2021/08/24

박길수 천도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서로를 '동덕(同德)'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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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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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통문-191] 1. 천도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서로를 '동덕(同德)'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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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독교인들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로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른다면, 천도교인들이 서로를 동덕이라고 부르는 뜻은  '한 한울님의 은덕(恩德)으로 이 세상에 생겨난 동포[同胞]라는 마음이며, 또 그런 의미에서 한울님의 은혜에 보답하기[同事] 위하여 정성과 공경과 믿음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또 내가 받은 덕을 이 세상에 펴나가는[布德]일을 함께하는 동지(同志)라는 연대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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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형제자매든, 동덕이든 '하나의 종교'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이야기[神話]'와 하나의 언어[敎理], 하나의 역사[천지창조~현재]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민족(民族)'과도 흡사한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사실, 교리나 교사도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하나의 종교를 신앙하는 무리는 하나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한국 기독교'라는 이름보다 "한국의 '기독교들'"이라고 부르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하고, 편안합니다. 기독교인들[주로 목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무저 저들이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미 장로파, 감리파 등으로 교파를 달리는 경우를 말하기보다, 전국의 모든 '교회'들('담임목사'가 존재하는 것을 단위로 하는)이 각각의 기독교라고 말하는 편이 더 올바른 현실인식이라는 점입니다. 이를 '바른 기독교인'과 '잘못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나, 그보다 '여러 기독교'라고 말하는 편이 더 간편하고, 속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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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나마 천도교는 아직은 교인들의 신앙행태에서 '공유하는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점점 그 비중이 줄어들고, 그 강도가 약화되는 걸 느낍니다. [당연히 이야기는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훨씬 이전부터 진행된 일을 토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천도교도 점점 '천도교들'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은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각 교파, 심지어 교파 내에서도 '개별 교회' 단위가 중요하다면, 천도교는 천주교처럼 '단일한 조직체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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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런데, 이 문제, 다시 말해 '공유하는 이야기'의 상실 문제는 기독교나 천도교, 그리고 종교계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 이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분단을 둘러싼 오랜 갈등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족속으로서의 민족의식을 오랫동안 희석시켜 왔으며 이는 지금도 가속화하는 중이고, '세대차'라는 것은 인류 역사 이래 언제나 있었던 문제이지만, 오늘날 세대간 소통의 단절은 지금까지의 역사 이래로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 보이며, 남녀[남혐-여혀] 사이의 극단적 대립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 하나의 말을 두고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 현재 벌어지는 현상의 근본 문제입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그동안 '우리'라고 부르던 집단이 공유하는 '공통의 이야기'가 사라지고, 훨씬 더 파편화되고 소규모화된 "우리'들'"의 집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우리'들'이 서로의 각각의 '우리'로 주로 모이는(?) 곳은 '인터넷'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우리'들'이 서로(다른 '우리')를 확인하는 곳도 주로 '인터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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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요즘 '메타버스'가 새로운 관심어로 등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오래전(십여년 전?)부터 '가상공간'을 위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세상 소식을 주로 인터넷의 포털 사이트 뉴스나, 혹은 각 세대별로 특화된 SNS(내가 미처 다 알지도 못하는) 등을 통해서 습득하게 되면서, 서로(우리'들')의 존재를 점점 멀게 느끼고, 이질적으로 느끼며, 심지어 적대적으로 느끼게 되는 경향이 가속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5, 6의 문제는 오늘 읽은 유상근 님의 글을 통해 계발받았습니다.] 하나의 '우리'는 그 안에서도 다시 수많은 소집단으로 분화하고, 결국 남는 것은 '나(개인)'과 '거대 포털'입니다. 자본이 노동자를 파편화시켜 지배력을 강화하듯이, 오늘날은 포털이 이야기를 파편화하여 개인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메트릭스 영화에서, 인간은 거대한 컴퓨터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에너지원으로 전락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지금의 우리는 바로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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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요즘 제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개벽라키비움-동학천도교사전연구회" 사업의 하나로, 천도교 신앙을 오랫동안 해 온 분의, 평생에 걸친 일상적인 신앙생활 '이야기를 듣는 일'입니다. 그것은 '인명사전'의 일이기도 하고, '편년사'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이야기야말로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근본 힘'이라는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한 인생이며, 이렇게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 '동덕'을 회복하는 것이며, 천도교를 믿는 것, 천도교를 하는 것의 출발점, 혹은 도착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시 꿈꾸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고/만들고, 그것을 '공유하는 세상/사회'를 맞이할 수 있을까입니다. 그 이야기를, 찾을 수는 있을까요? 세상에서 무엇 하나 내세울 만한 '업적'을 이룬 적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삶'은 이렇게 이야기 속에서 흘러갈 때, 평온하다는 걸, 깨닫는 아침입니다. 
#이야기 #개벽라키비움 #동학천도교사전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