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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학제20권제2호(통권제39호)2011년12월 KoreanJMedHist20ː291-326Dec.2011
ⓒ대한의사학회 pISSN1225-505X,eISSN2093-5609
선교의사 알렌(Horace N. Allen)의
의료 활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고찰*
이영아**
1. 머리말
2. 선교의사들의 조선 전통 의학과의 접촉
3. 알렌의 의료 행위
4. 알렌의 조선(의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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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010년 TV드라마 <제중원>과 이것의 원작이 된 소설 『제중원』(이기원, 2009)이 발표되면서, 개화기 조선에 유입된 서양근대의학에 대한 사회적 관 심이 커졌다. 제중원은 고종에 의해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 이며, 이를 설립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 선교의사였던 알렌(Horace
N. Allen)이다.
그는 한국에 체류하거나 한국 관련 일을 수행한 약 20년(1884~1905)의 시
간 동안 꾸준히 작성한 일기와 편지글을 통해 그 시기의 한국의 정치, 외교, 사회, 문화, 의학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므로 그의 일기와 선교
1)
* 이 논문은 2009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09-351-A00276]
**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인문교양학부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거북골로 34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120-728)
전화: 02-300-0878 / 이메일: coolya112@naver.com
활동, 외교활동을 하면서 작성한 방대한 양 )의 공적·사적 편지의 내용, 그 리고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 조선에서 지냈던 시간들을 회고한 기록들은 특히 정치·외교나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조선의 공식 문서나 기록의 빈틈 을 메워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사료이다.
특히 본 논문에서는 알렌이 조선 입국 초 의사로서 활동했던 시기의 조선인 의 몸, 위생, 질병 등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알렌은 1884 년 9월 조선에 입국했을 때 선교사이기 이전에 먼저 ‘의사’로서 정의되어 미국 공사관의 부속의사 및 유럽, 일본의 공사관 공의(公醫)로 임명되었다(민경배, 1991: 95). 그리고 1884년 12월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을 치료해 준 인연으로 1885년 4월 설립된 제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주위의 다른 선교 사 및 의사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 선교사직을 그만두고 1887년 8월 주미 한 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면서 외교관으로 변신하게 된다. )
1884년부터 1887년까지의 알렌의 선교 및 의료 사업 기간은 한국사적으 로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시기이다. 조선 정부가 서양식 근대병원을 처 음 세운 시기이며, 이와 함께 서양의 문물과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가 생겨가기 시작한 시기이다. 알렌은 이 기간 의료 활동을 통해 조선인의 몸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였다. 개화기에 조선을 찾았던 많은 서양인들처럼 동양의 한 인종으로서 조선인을 바라보기도 하였고, 환자로서 조선인의 몸을 관찰하 고 치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일기, 편지, 그리고 회고록 등을 통 해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데 알렌은 의사로서, 선교사로서뿐 아니라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 으로 주미 한국공사관 서기관직을 역임했으며, 훗날에는 주한 미국공사관 공 사로도 활동했다. ) 그만큼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던 존 재이다. 이처럼 알렌은 제중원의 설립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자, 구한말의 한 미외교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기 때문에, 기존 연구에서는 그의 치적사 업들에 대한 관심에 집중되어 왔다. ) 알렌을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개화기에 한국을 방문했던 선교의사 중 한 명을 살펴보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한국사 에서 개화기라는 격동의 시기의 중심부를 이해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역으로 알렌이라는 역사적 인물과 그의 기록들에 대한 섬
세한 텍스트 분석을 방해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즉, 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생각과 태도로 일상에서 조선인들을 보고, 대하고, 치료해왔는지에 대한 관 심은 극히 적었던 것이다. 김윤성이 「개화기 개신교 의료선교와 몸에 대한 인 식틀의 ‘근대적’ 전환」에서 여러 선교의사들의 몸에 대한 인식을 다루는 가운 데 알렌의 논의가 포함된 경우를 제외하고는(김윤성, 1994), 알렌은 정치사 적ㆍ외교사적ㆍ의료사적 ‘행위’를 한 인물일 뿐 어떤 조선(인의 몸)에 대한 ‘ 시선’을 가진 인물로서 연구되지 못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알렌을 ‘대문자 의 역사’라는 ‘거시적’ 담론 속 존재가 아닌 조선이라는 동양을 방문하여 생활 한 한 명의 서양인으로서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가 가진 선교 사, 의사, 그리고 외교ㆍ정치가로서의 위치가 참조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점 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그가 남긴 기록들이다. 그가 ‘글’을 통해 조선과 조선인, 특히 조선인의 몸을 어떻게 대하고 바라보았는지를 ‘미시적’으로 분 석하고자 한다.
‘몸’의 문제에 집중하여 본 논문을 전개하려는 데에는 이 시기의 ‘몸’에 대 한 담론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확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몸은 인간과 세계 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몸 안에서, 몸을 통하여 세계를 경험한다. 몸은 문화에 의해 정교화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의 가능성이
다. ) 따라서 몸은 언제나 특정한 사회적ㆍ환경적 맥락 속에서 존재하는데, 그 안에서 몸은 능동적인 행위자이면서 또한 모든 사회적 계기와 그 역사에 의해 서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1900년을 전후한 시기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은 서구의 문물이나 서양인의 방문 등을 통해 전면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 조선의 ‘근대화’는 여러 방면,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격변을 보인 부분이 몸에 관한 인식 부분이다. 의학, 위생, 체육교육, 섹 슈얼리티, 인종, 우생 등의 근대화 문제는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선결되어야 할 요소였다.7)
따라서 이 시기 조선 땅에서 마주친 조선인과 서양인이 각기 바라 본 ‘우리’
와 ‘그들’의 몸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가를 고찰함으로써 ‘몸의 근대화’의 과정을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몸을 묘사하는 과정은 어떤 경우에서건 온전 히 객관성을 띨 수는 없다. 여기에는 대상을 보는 주체의 시선이 언제나 개입 될 수밖에 없으며, 서술을 하는 목적과 주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주관적 평가 가 포함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담론을 대할 때에는 ‘누가’, ‘무엇을’ 그리고 ‘왜’ 묘사하는지 항상 질문해야 한다(존 퓰츠, 2000: 21). 이들의 ‘충돌’과 ‘융 합’, 혹은 ‘경쟁’과 ‘승/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근대적인 몸’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몸에 대한 강박에까지 많은 부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러 한 연구는 시의적 가치를 지닌다.
먼저 조선인 쪽에서의 몸에 대한 인식은 선행 연구인 「1910년대 조선인의 타자의 몸에 대한 시선 고찰」을 통해 기왕에 살펴본 바 있다(이영아, 2010a). 따라서 이번에는 서양인 쪽에서의 당시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 조선과 매우 오랜 기간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서양인이자 몸에 대한 감 각이 가장 예민할 수밖에 없는 직업인 의사로서 알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 다. ) 제국주의의 열풍이 불었던 당대에, 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한 서양인·백 인이자 의사로서의 알렌이 보고, 진료한 조선인의 몸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리고 그 몸을 대하는 알렌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을까?
2. 선교의사들의 조선 전통 의학과의 접촉
비서구사회에 서구 근대의학을 이식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자가 되었던 것 은 의료선교사들이었다. ) 1876년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고 일본에 의해 부 산, 원산, 인천 등이 개항된 이래로 1877년 제생의원이 부산에 설립되면서부 터 서양식 병원들이 조선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미국공사를 통해 알렌 에게 이듬해 봄부터 의료사업을 허락할 뜻을 비쳤던 고종은 갑신정변 때 알렌 이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1885년 봄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하게 되면 서 본격적인 서양 선교의사들의 조선인을 상대로 한 진료활동이 시작되었다.
조선정부는 1885년 4월 재동의 고 홍영식의 옛집에 근대적인 서양식 의술 을 시행하는 병원 제중원을 세우고, 알렌에게 진료를 맡겼다. 제중원의 설립 에는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에게 국가가 의료를 베풀던 기관인 혜민서의 역할 과 함께 서양 의술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할 목적이 있었다. 1885 년 5월부터 6월까지 한 달간 스크랜턴이 알렌을 도왔으며 6월에는 헤론이 합류하여 알렌과 같이 진료를 맡았다. 이들은 개원 이후 1년 동안 1만460명 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료한 실적을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로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은 서양인이 조선인을 진료한 결과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서 그들 이 파악한 조선인의 몸과 질병이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 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스크랜턴은 보다 자유로운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1885년 민간진 료소인 시병원(施病院, Universal Relief Hospital)을 설립하여 진료를 하였 는데, 역시 『연차 보고서(Annual Report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 for
1886 )』를 통해 조선인에게 흔한 질병이 무엇인가 등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또한 1887년에는 여성 환자들을 위해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세워 여의사 하 워드(Meta Howard)를 통해 진료하도록 했다. 그후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커틀러(Mary M. Cutler) 등도 여의사로서 보구여관에서 활동했 다(조이제, 2007).
그런데 서양의 선교의사들이 조선인을 진료하면서 남긴 기록 및 의학행 위들에는 조선의 몸 문화 및 의학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두 시각이 모두 드 러난다. 예를 들어, 1890년에 내한한 영국성공회 소속의 의료선교사 랜디스 (Eli Barr Landis)는 조선 전통의료에서 사용하는 치료약재들을 긍정하는 모 습을 보였다. ) 그는 당시 한국에 있던 서양인들 중에 가장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 받을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했으며 한문에도 밝아 조선의 다양 한 문화, 풍속에 대한 소개 글을 발표하고 동의보감의 영역(英譯)을 시도하기 도 하였다. 33세의 나이에 요절하면서 동의보감을 완역하진 못하였으나 그 가 제일 먼저 번역하여 중국학 잡지 The China Review에 소개한 부분이 「탕 액편(湯液篇)」이라는 사실(여인석, 2007: 10-1)은 그가 조선의 전통의학 중에 서 가장 인상 깊게 생각했던 부분이 조선의 전통적 치료약재에 관한 것이었 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보구여관의 의사였던 로제타 셔우드는 온돌형식의 병실이 당시 한
국 환자를 위해서는 가장 좋은 병실이라고 생각하였다(이방원, 2008: 39). 그 이유를 “첫째, 온돌방은 따뜻하고 잠자기에 편안하다. 둘째, 방 전체가 하나 의 침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환자가 침대 밖으로 나올 염려가 없다. 셋째, 온돌방은 청결하여 소독하기 쉽고, 요를 쉽게 살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 교병원에서 사용하기에 경제적이다” )라고 하였다. 반면, 조선의 전통 의료방식에 대해 불신하거나 폄하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양인 의사들은 한국인들이 질병에 대해 무지하며 비(서양근대)과학적인 치 료방식을 채택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죽거나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 신들의 서양근대의학 대신 뜸, 침 )의 치료나 비위생적인 환경, 콜레라의 유 행에 고양이 그림으로의 퇴치, ) 부적, ) 굿 등의 미신에 의존하는 조선인들에 대해 서양 선교의사들은 동의하지 못했다. ) 그들에게는 한국인이 사용하던
민간요법과 미신은 이해하기 힘든 치료방법이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을 ‘계몽’ 하면서 치료하려 했다(이방원, 2008: 48).
이처럼 서양의 선교의사들은 어떤 면에서는 조선의 전통의학과 생활환경 에 대해 인정하려는 태도가 있었던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침, 뜸과 같은 전통 적 치료법이나 위생불량 등을 비판하는 모습도 보였다. 알렌의 경우도 조선 의학에 대해 이러한 양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래 인용문에서와 같이 조선의 전통의학에 ‘좋은 아이디어들’이 있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하고, 조선인들은 쌀밥을 주식으로 해서 치아의 성장이 좋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 으며, 인삼의 발한(發汗)을 유도하는 작용에 대해 흥미를 보이기도 하였다.
토착 의료진들은 치료법에 대해 몇몇 좋은 아이디어들을 가지
고 있다.(The native faculty have some good ideas in regard to treatment.)16)
쌀밥 식사는 이의 성장에 좋은 것 같다. 한국인은 거의 누구나
훌륭하고 진주와 같이 흰 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침에 조심 스럽게 이를 닦는데 청정제나 솔 대신 손가락 위에 소금을 놓고 이 에 비벼댄다.17)
조선의 약전(藥典)은 주로 인삼으로 알려진 식물의 뿌리에 의존 한다. 인삼은 발한을 필요로 하는 조선 사람의 모든 병에 만병통치 약이다. 조선은 뛰어난 인삼으로 유명하며 최근 일본이 조선을 점 령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삼은 왕실의 부수입의 하나였다. … 미국 산 인삼은 활성이 없는 데 반해 조선의 인삼은 탁월한 발한성 때문 에 귀중하게 여겨진다. 나는 인삼을 먹고 발진한 외국인과 조선 사 람들을 본 적이 있다. 중국인들은 이 약초의 위대한 가치를 최음제 로 이용하는 것 같다. 내가 민영익을 치료할 때 체온이 올라가자 부 상한 부분이 붉게 타오르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에 특히 유의해서
린이에게도 예방접종을 하지 못했다”며 화를 냈음을 언급하고 있다.
16) H. N. Allen and J. W.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1886), p.7.
17) H. N. 알렌, 신복룡 역, 『조선견문기』 (서울: 집문당, 1999), 181쪽.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많은 질문을 한 끝 에 그의 가족이 빨리 낫게 하기 위해 당치도 않은 인삼을 복용시켰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 나는 나의 말에 분명히 복종하 지 않는 한 치료를 전부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의 말이 너무도 강경했기 때문에 그 후부터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나쁜 징 후가 없어진 후 나는 전보다도 더 인삼에 대해 탄복하게 되었다. )
그러나 알렌 역시 전통의학의 치료법에 대해 부정하거나 우려를 나타내기
도 하였다. 그는 침을 놓는 것의 비위생성, 고약을 바르는 것의 무의미함 등을 언급하며 전통의학은 그가 보기에 효능이 없거나 오히려 환자에게 해로운 것 으로 여겼다. 그래서 다음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무면허 의료행위로 침을 놓 다가 환자가 즉사를 한 경우, 민영익을 치료할 때 자신의 외과수술과 달리 전 통의사들은 고약을 바르려 했던 것 등에 대해서는 매우 위험한 치료방식이라 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조선의 의학 체계는 주로 중국의 의학 체계이며 중국에서 들어 온 것이다. 뜸을 자주 놓기 때문에 조선 사람을 벗겨 보면 어떠한 통증을 고치기 위해 뜨거운 뜸을 놓은 자리가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침도 뜸만큼 자주 놓는데 때로는 침이 더러워 원래의 병보다 더 심한 병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언젠가 나는 침을 사용하여 매 우 슬픈 결과가 일어난 경우를 본 적이 있다. … 한의사를 높이 평 가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는 교육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잘못되어 침이 골수 를 꿰뚫어 젊은이는 입에서 거품을 뿜으며 쓰러져 죽고 말았고, 몇 시간 내에 그의 어머니도 충격으로 죽고 말았다. )
제가 몇 차례에 걸쳐 수술을 한 것이 이곳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
을 주었습니다. 제가 처음 부름 받고 왕자(민영익)를 치료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약 13명의 현지 의료인들이 특히 영향을 받았습니 다. 저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상처 안에 그들의 검정 왁스( 고약-역자 주)로 채우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동맥을 묶고 상처를 꿰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1885년 2월 4일 자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3. 알렌의 의료 행위
이처럼 조선의 전통적인 의료 방식과 관념에 대해 한편으로는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를 나타냈던 알렌은, 조선인을 어떠한 의료방 식과 관념으로 치료하였을까? 글의 서두에서 언급하였듯 알렌은 조선에 서 양의 근대의학을 도입시키는 데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 조선 최초의 근 대식 정부 병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그의 존재가 이를 추진하는 데에 큰 동력이 되었다. 즉 그는 개별적인 치료행위 외에도 조선의 서양 근 대 의학 시스템, 지식, 기술을 수용할 기틀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 할을 담당하였다. 그렇다면 서양의 근대적 의사로서 그의 구체적, 개별적 의 료행위는 어떠했을까?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환자가 불치 환자일 때 무척 슬퍼하였으며, 완치되 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까지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치료할 수 없는 환 자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자신의 극진한 치료를 통해 환자의 회복을 기원하 고 성취해내는 그의 모습은 여느 의사들과 다를 바 없는 숭고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우리가 일을 하는 가운데 가장 슬픈 것 중 하나는 우
리에게 계속 오는 많은 수의 불치 환자였는데, 눈병의 상당수가 이 부류에 속했다. 두 눈이 완전히 손상된 남자가 외국인 의사가 그 를 완치시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찾아 왔을 때 “우리가 당신 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
나는 어제 밤에 다 죽어가는 김판서의 아들을 진료하기 위하여
불려갔다. 나는 그가 3일간 소변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약 3 시간 진료끝에 드디어 나는 소(小)카테테르(도뇨관)를 통해 소변 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나는 몇 방울의 오줌을 빼내었고, 그리고 이에 관련된 약을 조제해 주었다. 나는 그가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아서 아주 정성껏 그를 위해 기도했다. 초조와 불안의 아 침나절을 지난 후 내 기도는 감응을 받아, 정오 경 환자의 형이 내 게 와서 하는 말이 환자는 차도가 좋아져서 소변도 잘 나온다는 것 이다.(1885년 3월 22일자 일기) )
그러나 그는 때로는 조선인 환자들에게 오늘날의 의료윤리에 대한 ‘상식’ 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는 점 역시 주목을 요한다. 이를테면 그는 일 종의 ‘의료사고’를 낸 뒤에도 환자가 그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면 자신의 과 오를 시인하며 사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환자들의 무지와 맹목에 편승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나는 의과 대학에 다닐 때 이 빼는 방법을 배우려고 했다. 그러 나 내가 얻은 유일한 방법은 적합한 집게를 골라 이를 깊게 꼭 집 어 비틀면서 ‘귀중한 생명을 위해 잡아 뽑는’ 것이었다. 하루는 어 떤 사람이 이가 몹시 아프다고 불평을 하면서 찾아 왔다. 그 사람 을 빨리 돌려보내기 위해 아픈 이를 뽑아 버리자고 권했다. 그렇게 권하면 환자들은 곧 가 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놀랍게도 당장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처방을 수 행하기 위해 나는 능력을 다해 한 번에 이 두 개를 뽑아 버렸다. 그 날 늦게 내가 병원 문을 닫기 전에 그 사람이 온 것을 보고 나는 기 가 꺾이고 말았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이 하나를 썩은 이와 같 이 뽑아 버리고서는 호되게 욕을 먹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처의 이 몇 개를 뽑아 달라고 처 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때까지 한국인으로 그 렇게 아프지 않게 한꺼번에 이를 두 개씩이나 뽑는 사람을 보지 못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많은 이를 뽑게 되어 오히려 이 뽑 는 일을 점점 좋아하게 되었다. )
위의 인용문은 알렌이 제대로 된 치과치료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한 환 자의 건강한 생니를 뽑아 놓고도 환자가 그 사실을 개의치 않자 오히려 자신 감을 갖고 발치(拔齒)하는 일을 즐기게 되었다는 일화이다. 그는 자신이 했던 의료 실수에 대한 정보를 환자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으며, 그런 채로 지속했던 의료행위에 대해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음 인용문은 알렌이 제중원에서 1년간 근무한 뒤 작성한 『조선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의 ‘입원 환자에 대한 기록’에 나오는 구절인데, 여기 에는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큰 사지 절단 수술은 환자의 거부로 하지 못했고, 그 대신 손가락, 발가락, 그리고 음경을 환자에게 충분한 상의 없이 절단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의료윤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쉽게 납득 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수술 후 “환자들은 항상 그 결 과에 만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큰 사지 절단 수술을 하지 못한 것을 무척 유감스럽게 생 각한다. 절단이 필요한 환자가 여러 명 왔지만, 다리를 잃을 것이 라는 말을 듣고는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죽어서 고통 에서 해방되지 않았다면 아마 아직도 앓고 있을 것이다. 손가락, 발가락 및 음경을 절단한 경우 우리는 환자와 길게 상담하지 않고, 그들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진정으로 알아차리기 전에 절 단했다. 환자들은 항상 그 결과에 만족했다. )
알렌의 1885년 4월 10일자 일기에 따르면, 제중원에서 자신이 환자를 처 음 진료한 첫날 환자 총 20명 중 절단수술을 해야 할 환자가 3명이었으나, 그 들은 모두 절단수술 받기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효경』에는 “우리의 몸, 머리 카락, 피부 등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감히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또 『소학』에는 “증자가 말하기를 신체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으로 행하면서 감히 공 경하지 않을 것인가?” )라는 가르침이 들어있다. 이처럼 전통적인 유교 사회 에서 몸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체(遺體)이기 때문에, 자식은 몸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 즉 “전신(全身)”의 개념을 효의 근본으로 실천한다. ) 근 500 년간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서는 몸의 털끝 하나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 고 믿었던 조선인들에게 몸에 칼을 대는 일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 을 것이다(이영아, 2008: 25-8). 물론 살기 위해서였지만, 때론 신체부위를 절 단하거나 큰 흉터를 남겨야 하는 외과수술을 받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서 입원환자 분류표에는 45세 의 남성으로 음경상피종양(epithelioma penis)을 앓고 있던 환자가 음경절단 술(amputation)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음경절단술을 알렌과 헤론 에게서 받고 24일간의 입원기간을 거쳐 ‘good’이라는 치료결과로 퇴원했다. 본 논문에서 이에 대해 현대의 관점으로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가능 하지도 않거니와 논점에도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중요하고 흥미로운 지점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알렌의 사유구조이다. 그는 어떻게 그러한 행위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4. 알렌의 조선(의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알렌이 기본적으로는 환자를 극진히 치료하고 그것을 통해 서양의학과 기
독교의 힘을 증명하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의료행적들에는 몇몇 실수나 과잉진료 등의 흔적도 남아있다. 특히 조 선인의 몸에 대한 관념의 중심을 차지하는 효(孝)의식과 전신(全身) 개념(최 근덕, 1992: 171)에 배치되는 절단술 등의 의료행위도 감행했던 사실들에 대 해서는 보다 면밀한 해석이 필요하다.
1)조선및유교문화권의‘전신(全身)’개념에대한알렌의이해 그가 절단술을 행할 때 조선인에게 있어서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것이
가지는 치명적인 의미를 의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겠다.
어떤 사람은 파상풍으로 팔이 엉망이 되었는데도 그것을 절단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 그 중국인 장군은 외 팔이 군인으로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고 불구의 몸으로 고통을 받 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이유로 권하는 수술을 받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파상풍에 걸려 자기 고집대로 죽고 말았다. )
위의 인용문은 조선 내에서 있었던 청일간의 무력충돌 때 생긴 중국인 부 상환자가 절단술을 거부했던 것에 대한 회고이다. 알렌은 전쟁에서 파상풍 을 입은 환자에게 절단술을 권유했으나 환자는 ‘외팔이 군인’으로 사느니 죽 겠다며 거절했었다는 것이다. 중국인 군인 역시 서양의학의 절단수술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의 군인으로서의 사명감 혹은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것 에 대한 공포가 더 컸기 때문에 절단수술을 거부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런데 그의 이러한 선택에 대해 알렌은 “자기 고집대로 죽고 말았다”며 비판적 인 어조로 서술하고 있다.
서양의 근대의학은 몸을 하나의 기계로 여기면서 유기체로서의 몸, 하나의
완결된 몸보다는 각 부분들의 해부학적 기능성을 더 중요시한 것이 사실이 다. 근대에 들어 등장한 실증적인 해부생리학의 지식은 인간을 신체와 정신 으로 구분하고, 실증적인 인체 내부의 관찰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직 접 ‘관찰’해 보니, 인간의 몸이란 하나의 ‘잘 만들어진 기계’와도 같다는 생각 에 미치게 된다(다비드 르 브르통, 2003: 29).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몸은 하나 의 완결되고 유기적인 총체가 아니라, 분할되고 파편화된 부분들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처럼 몸을 계속해서 분할할 수 있는 ‘기계’로 생각한 사상가가 바로 데카르트이다. 신체의 절단이 가능한 이유도 몸이 하나의 기계이자 물질이기 때문이다. 몸은 한꺼번에 하나로서 주어진 총체가 아니라 분해되고 재결합될 수 있는 부분들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부분을 떼어내거 나 수정, 조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에 따르면 몸의 한 부분을 없앤다거나 조금 고친다고 해서 전체의 통일성이 깨진다거나 존재 자체가 바뀌어버리지 는 않는 것이다(김종갑, 2008: 132-6).
이러한 맥락에서 알렌이 환자의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것이 가지는 (동 양 혹은 조선의) 한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의 의미를 간과했을 수 있다. 그러 나 다음과 같은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몸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이 큰 의미 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내가 조선에서 제일 처음 집도한 수술은 호랑이의 공격을 받은
어떤 조선 사람의 팔을 잘라 내는 꼭 필요한 절단 수술이었다. 팔꿈 치 바로 위에 있는 뼈가 호랑이에게 물려 살이 썩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의 회복이 잘 되어 그의 친구들도 의아할 정도였다. 호랑이의 상처는 의사의 치료로 나을 수 있었지만 그는 (훗날 죽어서-인용 자 주) 그의 팔이 없는 채로 조상들에게 가게 될 것이다. )
그가 처음으로 절단수술을 한 환자가 상처는 회복되었으나 “팔 없는 채로
조상들에게 가게 되었다”라고 언급한 것은 곧 그것이 조선인 환자에게 얼마 나 큰 타격이라는 사실을 그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을 수 있었지 만’, 즉 ‘생명은 건졌지만’ 팔을 잃는 ‘장애’가 생긴 것이며, 전통적인 유교윤리 를 따르는 조선인의 입장에선 그것이 조상에게 엄청난 불효를 저지르는 일임 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신체의 절단이 조선인 개인의 삶에 아무런 지 장도 끼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 앞서 인용한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의 ‘입원 환자에 대한 기 록’에서 ‘큰 사지 절단’은 할 수 없었으나, ‘손가락, 발가락, 음경’의 절단 수술 을 환자의 동의 없이 행했다고 말한 사실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즉 그가 ‘ 큰 사지’에 대비되는 ‘신체의 작은 일부’로서 손가락, 발가락과 음경을 동위에 놓는 신체관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경우, 그가 조선인들에게 단발(斷髮)을 요구하였듯,30) 신체의 부위에 따라 훼손되 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여겼고, 손가락, 발가락, 음경 등은 전자 에 속한다고 여겼던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알렌의 의료행위들을 모두 해명할 수는 없다. 절단술
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큰 사지 절단 수술을 하지 못한 것을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비록 신체의 ‘작은 부분’이나마 환자에게 충 분한 설명을 하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절단수술을 감행할 때에는 이 수 술방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즉 ‘성공’에 대한 확 신이 없다면,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수술을 했을 리 없는 것이다. 그 런데 사실 알렌은 의과대학을 나왔으나 1년제를 졸업하였기 때문에(민경배,
1991: 82) 일기나 선교본부의 엘린우드(F. F. Ellinwood)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30) “조선어 교사가 오늘 오후에 나의 한문본 성서를 빌렸을 때 … 성서를 읽으려면 먼저 상투 를 자르라고 경고했더니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마침내 상투를 자르는 모험을 강행했다. 성서가 그로 하여금 단발의 결심을 굳히게 했던 것이다.”(1885년 1월 29 일자 일기)
서 자신의 의학에 대해 자신감 없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제중원이 설 립된 뒤 스크랜턴이나 헤론이 제중원 진료를 도와주길 바랐던 이유도 그 때 문이었을 것이다.
박사님이 나중에 저를 다시 조선으로 파송하게 된다면, 저는 외 과분야에서 졸업 후 과정을 밟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 저 는 조선에 오기 전에 경험이 전혀 없었고, 순전히 독학으로 공부했 기 때문에 이 제중원과 같이 전국적인 영향력이 있는 병원에서 시 술해야 할 큰 수술을 다룰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을 회피하고 있습니다.(1887년 1 월 3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
스스로 고백하고 우려하였듯, 알렌은 외과분야에 대한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순전히 독학으로 공부(self-taught)하였기 때문에 오히 려 큰 수술은 ‘회피하고’ 있는 정도였다.
2)알렌의서양의학및외과수술에대한확신 그럼에도 그가 환자를 대상으로 과감한 절단 수술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 은 이것이 19세기, 즉 서양의 근대의학이 ‘과학성’, ‘객관성’으로 이해되고, 이 러한 서양 근대의학의 새로운 ‘성격’에 외과수술이 가장 크게 기여를 했던 시 대였기 때문이었다.
묄렌도로프 집에 당도해 보니 환자가 이미 출혈이 심했고 계속
피를 흘리고 있어서 심각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나의 과감한 치 료방식에 크게 반대하는 14명의 조선인 의사들에게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1884년 12월 5일자 일기) )
제가 몇 차례에 걸쳐 수술을 한 것이 이곳 사람들에게 좋은 인
상을 주었습니다. 제가 처음 부름 받고 왕자(민영익)를 치료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약 13명의 현지 의료인들이 특히 영향을 받았습 니다. 저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상처 안에 그들의 검정 왁스 (고약-역자 주)로 채우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동맥을 묶고 상처를 꿰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들은 병원 계획 에 관심을 갖고 병원에 수용이 되는 숫자만큼 와서 교육을 받으려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민영익은 저에게 이렇게 말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신이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
다. 그들은 당신이 미국에서 왔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하죠. 이번 일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1885년 2 월 4일자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33)
꽤 많은 한의사가 병원을 이용했는데, 모두 치료 결과에 만족 해하는 것 같았다. 그중 몇 명은 서양의술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
했다.34)
알렌의 서양의학에 대한 자부심은 그가 갑신정변 당시 자상을 입은 민영익 을 치료하면서부터 확보된 것이었다. 민영익을 살려 낸 ‘외과수술’이라는 새 로운 의료방식은 조선 사람들로서는 매우 경이적인 것이었다. 알렌은 “피가 흐르고 있는 측두골 동맥을 관자놀이로 이어 명주실로 봉합하였고, 귀 뒤 연 골과 목 부분, 그리고 척추도 모두 봉합”했으며, “팔꿈치에서 팔뚝까지 약 8인 치의 깊은 상처도 명주실로 네 바늘 꿰매었다.” 이것은 조선에는 없는 치료법 이었다. 이 수술로 민영익이 회복되자 조선인들은 알렌을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measures”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번역이 더 적절하나, 김원모의 번역본에는 “이곳에 치료 하기 위하여 모인 조선인 의사들은 나의 뛰어난 치료 솜씨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오역을 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인석, 「한말과 일제시기 선교의사들의 전통의학 인식과 연 구」, 『의사학』 16-2, 2007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33) H. N. 알렌 저, 김인수 역, 『알렌의 선교 외교편지(1884-1905)』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교 부 설 한국교회사연구원, 2007) 38-9쪽.
34) H. N. Allen and J. W.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1886), pp.7-8.
오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약간의 생리학 지식을 민영익에게 설 명함으로써 그의 관심을 끌었다. … 그는 인체해부도를 보고는 경 탄의 소리를 연발하면서, 이들 기관이 인체 내의 어떤 부위인가를 확실히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외국의 의사들은 적어도 세 사람 의 죽은 시체를 직접 해부실험을 거친 후에라야 개업의의 면허를 받게 되며, 내 자신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고 그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생리학 책을 털썩 떨어뜨리고는 마치 내 눈에서 망령이 기어 나오지 않나 해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그는 인체 내부에 생긴 혹을 어떻게 치료하는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나는 물 통 크기의 복부종양도 제거 수술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인공항문을 만들어 끼어줌으로써 장의 수축을 없앨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 은 문답은 그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 관심은 너무나 심대해 서 … (1885년 2월 21일자 일기) )
위 인용문에서 민영익에게 자신이 인체를 해부해서 본 경험이 있다는 사
실, 그리고 그 경험이 있어야만 의사 면허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알렌의 모습에서 서양의 근대 의학교육 체계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또 한 서양의사들은 종양 제거, 인공항문 조성 등의 외과수술이 가능하다는 이 야기를 통해 알렌은 서양의학기술의 우월성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알렌 등 서양의사들이 자신들의 의학에 대해 이와 같은 자부심을 가
질 수 있었던 것은 해부학과 외과수술 방식 때문이었다. 알렌은 자기 개인의 의사로서의 숙련도나 지식보다 서양 근대의학의 특성 자체에 대한 신뢰를 바 탕으로 이러한 수술을 감행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당대 서양 근대 의학의 자기 확신은 압도적인 힘이 있었다.
미셸 푸코가 말한 바와 같이 19세기 중엽 이후 서양에서는 외과 수술이 의 학의 객관성과 과학성을 대표하게 되었다. 질병의 내적/외적 원인을 밝히려 는 의학적 지식은, ‘객관성’이라는 이름 아래 질병의 원인에 대한 ‘실증적 시 선’을 요구하게 되었고, 질병은 인간 몸과 의학적 시선이 마주치는 곳으로 끌 려나와 재편성되기 시작하였다(미셸 푸코, 2006: 32-3). 질병은, 해부대 위에 서, 현미경 속에서, 인간 몸의 안팎에 자리잡는 것으로 공간화되기 시작했으 며, 의학적 지식으로 분류되고 정복될 수 있는 물질적 대상으로 사물화, 실체 화되기 시작한 것이다(김윤성, 1994: 19). 서양의 근대의학은 질병을 ‘보고’ ‘ 말하려’ 했고(병리학), 이를 통해 기왕에 존재해 온 ‘보임’과 ‘보이지 않음’을 나누던 지식의 경계가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몸의 내부를 들여다보 기 위한 기술(해부학)이 발달하고, 정교한 수술 솜씨를 갖추게 되면서 서양의 학이 ‘과학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것이 근대의학이 말하는 객관성이다. 외 과수술과 같은 구체적 행위만이 객관성을 보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하고, 의학적 시선은 객관성이라는 조건 안에서 형성되는 진리를 담는 저장고이자 명증성의 근원이 되었다(미셸 푸코, 2006: 17-9).
3)알렌의조선인의몸에대한‘오리엔탈리즘’적시선 그런데 이처럼 서양의학이 그 가치와 우월성을 인정받을수록 서양의 근대 의학 지식을 지닌 알렌과 조선인 환자 사이에는 수직적인 관계가 성립될 수밖 에 없다. 지식은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콜린고든, 1995). 자신들의 치료법을 아직 모르는 조선인들과 이를 익힌 서양인 의사는 권력관계에 있어서 평등할 수가 없었다. 나아가 이러한 수직적 관계는 그가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조선 인을 무지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알렌은 특히 조선인의 몸과 위생에 대해서는 인색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굉장히 게으르고 더럽습니다. 중상류층이 흰 도포 와 큰 챙이 있는 작업모를 쓰고 여유 있게 활보하는 것을 보면 그 들이 깨끗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입니다. 조선인들은 할 수만 있 다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그들이 일을 끝마칠 때까지 계속 일 을 하도록 시키자면 이곳 외국인들이 보통 애를 먹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조선산 막걸리에 취해 있고 외국 술도 매우 좋아해서 20% 의 관세에도 아랑곳없이 많은 양의 술이 조선에 들어와 있습니
다.(1884년 10월 1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
이곳은 인건비는 싸지만 일꾼들이 매우 느리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듭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의 일을 하는 데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인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다른 외국인들은 급사들을 고용해 식탁 시중을 들게 했는데 그들이 차차 하인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그들은 너무나 더럽고 게으르고 확실한 도둑들이라 결코 큰 기대는 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1884년 10월 8일 엘린우드에 게 보낸 편지) )
그들의 몸에서 계속 고리타분한 똥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그들
은 선실에서 끊임없이 줄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이 담배냄새에다, 목욕하지 않은 고린 체취, 똥냄새, 오줌 지린 내, 고약한 냄새가 나 는 조선 음식 등이 뒤섞여 온통 선실 안은 악취로 가득했다.(1887 년 12월 26일 일기) )
위와 같이 알렌은 조선인은 더럽고 게으르며 행동이 느리고 무절제한 생 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이드(Edward W. Said)의 ‘오리 엔탈리즘’론에 따르면 서양은 자신들 이외 지역(특히 동양)을 ‘여성적=감성 적=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왔으며, 이와 동시에 ‘미개척지=야만적=정체적’인 문명으로 간주해왔다(에드워드 W. 사이드, 2000). 그는 푸코의 ‘지식/권력의 연계관계’의 개념틀을 차용하여,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 담론을 통하여 구성된 오리엔탈리즘의 허상을 폭로하고, 이러한 담론 뒤편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의 지를 파헤치려고 하였는데, 육체/정신, 여성/남성, 처녀지/개발, 빈곤/자본, 야만/문명 등의 이분법적 대비를 통하여 타자와 나를 구분 짓는 일은 오리엔 탈리즘적 사고의 변종이라고 하였다(이승환, 2004: 21). 4)당대몸에대한‘오리엔탈리즘’적시선의보편성
알렌 뿐 아니라 언더우드(H.G. Underwood), 게일(J.S. Gale), 비숍(I.B. Bishop), 에비슨(O.R. Avison) 등 조선을 방문한 대다수의 선교사들이 알 렌과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 그것이 조선인들의 실제 모습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조선을 낙후된, 미개한 국가라고 생각하 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알렌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 었다. 이처럼 미개한 인종을 동일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차등을 두어 대하 려 한 태도는 알렌뿐 아니라 문명화된 국가에서 온 대부분의 서양인들, 심지 어는 서양인들의 눈에 ‘비문명국’일 뿐인 조선의 지식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청결의 문제에서는 많은 비난을 받을 것이다. 한
영국인은 조선에서는 가장 깨끗하다는 사람이 그가 본 가장 더러 운 사람이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가 뜻하고자 한 것은 조선 사람들 이 지구상에서 가장 더러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
미국인은 제아무리 게으름을 피우게 되더라도 노동은 고귀하다 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다. …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와 정반 대되는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양심 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
평균 이상의 신장과 힘든 일에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체력을 지닌 한국인들은 우수한 종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신면으로 시선을 돌리면 우리는 다른 면을 보게 된다. 우수한 체력에 비해 정신력은 그에 못 미치는데, 그들은 분명 최상의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마치 너울처럼 심한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동방인 몽고계와 남방 인들의 교접에 의해 생겨난 탓으로 한국 민족 또한 너무나 다른 두 개체간의 잡종 혈통에 가해지는 조기 절멸의 생물학적 법칙의 가 혹한 운명을 피할 길이 없는 것 같다. 육체적으로는 아닐지 모르나 지금 한국인들은 정신적으로 쇠잔한 상태이다. )
사람으로 생겨나기는 다 마찬가지언마는 현금 지구상 인류간에
는 온갖점에 비상한 층등이 잇슴을 보겟도다. 구주각국의 인류가 긔 만 더할수업는 인지와 천혜의 결과로 「문명」이라는 맛조흔 술에 취흥이 잠잠하야 좁은 세계를 넓게 헵쓸고 단이는가하면 아 불리가 아미리가내지며 남양군도의 토인중에는 우리가 수백년 좀 더드리켜 수천년이전에 경험이 잇는 극히 유치(幼稺)한 극히 참혹 한 금수나 얼마틀리지안이한 상태가 지금 지도 온젼히 남어 잇 스니43)
조선인들은 『독립신문』의 1899년 2월 23일자 논설에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을 문명국으로, 일본, 이탈리아, 러시아 등을 개화국으로, 중국, 페르 시아, 터키와 함께 조선 스스로를 반개화국으로,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일대 를 야만국으로 구분하였다(박승희, 2008: 77). ‘반개화국’의 국민인 조선인들 은 위의 글에서와 같이 인간에게 종족, 인종 등에 따라 ‘층등’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아프리카, 아메리카, 남양군도, 호주 등의 ‘야만인’들은 ‘금수(禽獸)’와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그만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오리엔탈리즘 이나 인종주의는 단순히 서양만의 인식 태도라기보다는 심지어 동양인들에 게까지 내면화되었던 세계의 사상적 조류였다고 할 수 있다(이영아, 2010a). 따라서 동양을 방문한 미국의 선교의사인 알렌 역시 이러한 사유틀로부터 자 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생각이 의료행위를 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데에 있 을 것이다. 문명화되지 않았다는 것이 곧 그들의 생명이나 몸이 문명국 사람 의 그것보다 하찮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에도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사 알렌 은 그 사실을 종종 간과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의료행위를 하는 데 있 어서 미개한 동양인에게 시혜를 베풀러 온 문명화된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 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에 의해 알렌은 자신들보다 ‘낮은’ 등급 인 조선인 환자의 몸을 대할 때 과감하고 위험한 치료마저도 감행하였던 것 이라 판단된다.
5)알렌의선교사업외의성취욕망-보론
마지막으로, 알렌이 선교사로서가 아닌 정치가, 외교가, 사업가로서 가졌 던 야망도 그의 행적을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알렌은 1887년 한 국의 외교관리로서 주미 한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제중원을 떠난다. 1889년 9월 알렌은 다시 한국 선교사로 나왔으나, 1890년 7, 8월경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면서 선교사직은 사임하였다. ) 한국 최초의 외국인 선교 사 알렌은 한국 사정에 밝았기 때문에 세관이나 미국 회사에서 함께 일하자 는 제의를 계속 받고 있었다. 1885년 7월 19일자 편지에 의하면, 묄렌도르프 는 그에게 세관병원 설립과 좋은 집과 연봉 5000달러를 제의했다. 1886년 5월
13일자에도 미국 무역회사로부터 좋은 직위를 제의받았다. ) 그런데 사실 당시미국 선교사들에게는 조선의 정치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주재국 국내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이 본국 정부 에 대한 국민의 의무로 되어 있다. …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는 일도 없어야 한 다”는 것이 당시 주한미국 공사로부터 선교사들에게 내려온 지침이었다(백낙 준, 1979: 255). 선교사들도 당시 미국 신학계의 주류였던 경건주의ㆍ복음주 의적 신학교육을 받았고, ‘사회부재의 영혼구제, 정치무관의 정숙주의’를 노 선으로 삼았다(조영렬, 1990: 4).
그런데 알렌은 조선 정부의 사업과 정치에 매우 깊숙하게 연관을 맺고 있 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 서두에 “본 일기에는 공식적이고도 정치적인 성격을 띤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고 스스로 밝히고 있듯, 알렌의 조선에서의 생활은 공식적, 정치적인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1884년 12월 26일 일기에 는 갑신정변의 전개과정, 당시 발표된 황제의 포고령, 정변 직후의 내각 개편 등에 대해, ) 1885년 2월 16일자 일기는 조선 정부의 권력구조에 대해48) 매 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 그가 일기를 통해 조선 정 부나 외국 공사의 세관, 미국의 회사 등으로부터 받고 있는 여러 제의들을 기 록해 둔 것도 그만큼 그가 선교사직 외의 사업이나 관직 등에 관심이 컸음을 의미한다.
그가 헤론이나 스크랜턴 등과 불화를 겪은 것도 그의 이와 같은 외부 활동 과 연관이 있다. 알렌은 자신의 일기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크랜 턴이나 헤론에 대한 험담, 혹은 그들과의 불화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알 렌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띠기는 어려우나 그 갈등의 주 된 양상이 선교행위에 대한 ‘진정성’, ‘순수성’과 관련된 문제였던 것으로 판단 된다. 예를 들어, 1885년 6월 28일자 일기에서 알렌은 “스크랜턴은 심술궂은 인간이고 병원 일을 너무나 소홀히 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병원사업에 적임자 가 아니라고 판단,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1885년 9월 1일 일기에서는 “우리는 헤론 박사와 아주 놀랄만하고도 짜증나는 의견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 이러한 감정적 대립은 헤론의 가 장 완고한 행동을 촉발시키고 말았다. 이로 인해 나는 드디어 선교부를 떠나 겠다고 사임 의사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 헤론부인은 이 기회를 놓칠세 라, 내가 선교사업을 맡을 적임자가 아니라고 비난하면서, 다만 이를 선교부 사임의 구실로 이용, 돈벌이에 나서려 한다고 통박했다. 이같은 모욕적인 발 언은 정말로 그리고 당연히 나를 격분시켰고. … 이리하여 나는 마침내 뉴욕 의 선교본부에 부산에서 새 선교사업을 개척해 보겠으니 부산 전근을 요청했 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선교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알렌의 행위 들이 동료 선교의사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선교사 외의 외부적인 사업들에 관심을 둔 그의 행동이나 생각은
그의 강한 ‘인정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의 생활에 적 응하지 못한 알렌은 조선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민 경배, 1991: 93) 그가 중국에 비해 조선을 좋아한 이유가 다음과 같은 부분에 서 드러난다.
조선 사람들은 매우 친절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받은 환영에 매우 기뻤다. 우리가 중국에서 사는 동안 그들은 외국 사람 들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 그 반대로 조선에서는 외국인 들이 양반과 마찬가지로 존경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우리를 감시 할 개를 배치하곤 했지만, 조선에서는 개가 뛰어나와 우리에게 짖 으면 반드시 개를 꾸짖고 짖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떤 때 혹 시 군중 속에 휩쓸리게 되어도 떠민다든지 거칠게 대하지 않고 반 드시 지나갈 통로를 비켜주곤 한다. )
즉 조선 사람들이 자신들을 ‘환영’해 주었고, ‘존경’해주었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게 만들었으며, 조선과 깊은 인연을 맺을 결심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알렌의 ‘인정 욕망’의 한 모습을 보여주 는 예이다. 알렌은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인정과 존경을 받는 것에서 자신의 성취동기를 찾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앞서 인용한 민영익과 관련된 일기들 에서도 항상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조선인들이 어떻게 놀라고, 감탄하였 는가에 대한 서술을 빼놓지 않고 있다. ) 덧붙여 다음과 같은 그의 생각은 그 가 의사로서보다 제중원의 설립과 운영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 여주는 예이다.
특수한 사례 한 가지를 언급한다. 증례 1은 첫 번째 입원환자이 자 최초의 수술환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위험한 경우였다. 훈 련받지 않은 조수들에 의해 클로로포름 마취가 행해져야 했으며, 그래서 생긴 나쁜 결과는 새로 세워진 병원에 타격을 줄 수 있었 기 때문이다.51)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적힌 위의 수술은 다행히 사고 없이 성 공했고, 환자는 빠르게 회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훈련받지 않 은 조수”들이 마취를 했다는 것은 의료사고 위험성이 높았음을 의미한다. 충 분한 임상 훈련이 되지 않은 자들에 의해 마취를 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 이다. 알렌 역시 ‘그것은 위험한 경우였다’고 서술하였듯 이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 “그래서 생긴 나쁜 결과는 새로 세워진 병원에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위험했다는 것은 그의 관심이 어디에 먼 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즉, 알렌이 일차적으로 걱정한 것은 ‘환자의 생명’이 아니라 ‘병원의 존립’이었던 것이다.
그가 병원 설립 사업이 더뎌지자 “나는 하루 속히 병원 건물이 마련되길 바 라는 마음에 병원 건물이 준공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하면서, 매일 찾아 오는 환자들을 돌려보냈다”(1885년 3월 18일 일기)는 것도 그의 그러한 의중
관이 인체 내의 어떤 부위인가를 확실히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외국의 의사들은 적어도 세 사람의 죽은 시체를 직접 해부실험을 거친 후에라야 개업의의 면허를 받게 되며, 내 자 신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고 그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생리학 책을 털썩 떨어뜨리고는 마 치 내 눈에서 망령이 기어 나오지 않나 해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1885년 2월 21일자 일기); “오늘 아침 민영익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 신이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당신이 미국에서 왔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하 죠. 이번 일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1885년 2월 4일자 엘린 우드에게 보낸 편지) 등.
51) H. N. Allen and J. W.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1886), pp.30-1; H. N. 알렌 저, 신복룡 역, 『조선견문기』 (서울: 집문당, 1999), 182 쪽.
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는 병원의 설립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위해 조선인 환자들의 건강상태에 대한 걱정은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했다.
결국 그는 길지 않은 선교의료 활동을 마친 뒤 미국과 조선 사이에서 경 제ㆍ외교적 이권을 획득하는 데에 더 열중했다. 그만큼 알렌은 권력 지향적 이고 상승욕망이 강한 야심가였다. 그런 그에게 조선인을 치료하는 일은 조선 정부와 친분을 쌓고, 병원을 설립하고, 조선과 미국 간의 외교 관계 수립의 주 도세력이 되는 등의 자신의 야망을 위한 한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5. 결론
본 논문에서는 알렌이 조선에 입국하여 초기 제중원 등에서 의료 활동을
했던 1884~1887년을 중심으로 그가 남긴 일기, 편지, 그리고 정부병원 보고 서, 회고록 등을 살펴보았다. 알렌은 조선에 서양의 근대문명이 수용될 수 있 는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 정부가 근대식 병원을 설립하는 데에 많은 동력을 제공하였고, 선교사들의 입국과 정착 등을 도우면서 조선에 기독 교가 수용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제중원 설립 후 1 년 동안 그는 헤론 등의 의료진과 함께 1만460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0년대 초 세브란스 병원이 설립될 때에도 그는 주한 미국공사 자 격으로 미국선교부 측과 한국정부 사이에서 조율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담당 했다. 따라서 그가 개화기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으며 한국 개화기 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의 의사로서의 태도에 있어서는 그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기 힘 든 부분들이 존재한다. 그는 사실 충분히 숙련된 의학기술을 지닌 의사가 아 니었다. 단지 1년의 약식 교육과정을 마쳤을 뿐 제대로 된 임상 수술 경험도 없는 초보적인 의사였다. 그럼에도 그는 의료행위를 행할 때 거침이 없었다. 그는 조선인의 손가락, 발가락, 음경 등에 대한 신체 절단술을 행하면서 환자 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과정이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생략해 버렸다. 그리고 생니를 뽑는 등의 의료적 과실을 저질렀을 때에도 이를 은폐했다.
그의 이러한 행적들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서양근대의학의
객관성, 과학성이라는 권위에 대한 알렌의 굳건한 믿음에 일차적으로 근거하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알렌에게는 19세기 중엽 이후 해부학, 외과수술 등에 의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서양근대의학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시스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비록 개별 의사로서 본인의 의술에 대한 확신은 부족 했지만, 집합적 의미의 ‘서양의사’로서의 조선의 전통 의학에 대한 우월감은 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사-환자 사이의 관계를 수직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것은 더 근본적으로는 조선의 전통 의학뿐 아니라 조선인 전체에
대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불결하고 무지하며 게으른’ 조선인들 에게 한편으로는 동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하하는 태도를 보였다. 대부 분의 비서구지역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지닌 오리엔탈리즘적 태도를 알렌 역 시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의사-환자로서뿐 아니라 서구인-비서구 인, 혹은 문명인-야만인으로서의 수직적 관계에 대해서도 당연하게 여겼다. 때문에 그는 조선인 환자들에게는 의사로서 친절하고 정직한 태도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그다지 강하게 느끼지 못했다. 문명인으로서 야만인들에게 ‘시 혜’를 베푼다는 입장에서, 의학지식 독점자로서의 권력을 행사할 뿐이었다.
더불어 알렌은 사실상 선교사ㆍ의사로서의 활동기간보다 정치가ㆍ외교관 으로서의 활동기간이 훨씬 더 길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길지 않 은 선교의료 활동을 마친 뒤 미국과 조선 사이에서 경제ㆍ외교적 이권을 획 득하는 데에 더 열중했던 권력지향적이고 상승욕망이 강한 야심가였다. 그런 그에게 조선인을 치료하는 일은 조선 정부와 친분을 쌓고, 병원을 설립하고, 조선과 미국 간의 외교 관계 수립의 주도세력이 되는 등의 자신의 야망을 위 한 한 ‘과정’의 의미가 더 강했던 듯하다. 그래서 숙련되지 않은 조수들에게 마취를 맡겨 ‘위험’한 경우에 처했을 때에도 환자의 생명보다 병원에 대한 존 립을 먼저 걱정했고, 조선 정부에게 병원 설립의 재촉을 요구하며 진료를 거 부하기도 했다. 알렌에게 있어서 의료행위는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목표를 위한 수단의 의미가 더 강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색인어: 알렌, 선교의사, 의료 활동, 신체인식, 개화기, 조선, 오리엔탈리 즘, 서양근대의학
투고일 2011. 11. 1. 심사일 2011. 11. 3. 게재확정일 2011.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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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StudyonHoraceN.Allen'sMedicine andRecognitionofKoreanBody
LEE Young Ah*
Je Jung Won(濟衆院) was the first modern-style Government hospital built by the Korean King Ko-Jong(高宗) in April 1885, and it was the medical missionary Horace Newton Allen(1858~1932) who made one of the greatest contributions to the establishment of the hospital.
Allen was an American missionary. He graduated from Ohio Wesleyan University with a degree in theology in 1881, and completed one-yearcourse at Miami Medical College. In Korea and America he worked as a physician, a missionary, an American diplomatic minister to Korea and a Korean minister's secretary to America. While acting as a mediator between Korea and America, he knew and recorded the domestic and foreign situation of Korea during Gaehwagi(開化期 : the civilized and enlightened age). Thus to study him is to understand Korea's Gaehwagi as well as to research American medical missionaries.
During his stay in Korea(1884~1905), Allen steadily wrote diaries and letters about Korean politics, diplomacy, society, culture, and medicine. Thus his public/private record through diaries and letters(the quantity of these materials amounts to several thousands) supplements the Korean
* Bangmok College of General studies in Myongji Univ., Namgajwa 2-dong, Seodaemungu, Seoul, Korea, (120-728)
Tel: 82-2-300-0878 / E-mail: coolya112@naver.com
early modern era's historical record. However, until now these materials have received little scholarly attention from researchers except for a few historians of missionary work between Korea and America, or of Korean modern medicine. I intended to use these materials to suggest a new perspective on the study of Korean Gaehwagi.
Allen, along with John W. Heron, who came to Seoul on June 21st 1885, treated about 10,460 Korean patients in the first year of the opening of JeJungWon. They made "the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This report explained how Allen and Heron regarded and treated Korean patients.
Allen's diaries, letters and other writings offer a realistic view of how the western people actually recognized the Korean people at that time. As a western doctor, Allen had an ambivalent attitude toward Korean medical concepts and systems. On the one hand, he thought that medical idea, some food and drug of Korean is valuable.
He said that the native Korea faculty had some good ideas with regards to treatment. And he held Korean rice, ginseng, and so on in high regard. However, he did not rate Korean acupuncture and Korean traditional ointment at all.
In addition, he sometimes cured Korean patients dangerously and with imprudence. The amputation of patients' body, no matter how little, must ask the permission of the patients themselves. Especially, the sense of Korean filial duty(孝) couldn't accept amputation of body at those times. The artificial change of body meant to hurt parents' body, because at those times Korean people thought that my body was my parent's possession. But Allen did it without enough explanation or persuasion. Moreover he didn't feel guilty for the behavior at all. Besides, he seemed to be proud of it in the above mention. Such careless or unethical behavior cannot be excused.
On the other hand, he had made mistakes in treatment according to his record. He pulled out some healthy teeth of patients who had a bad toothache. But he didn't explain nor apologize the mistake. Besides, he refused treatment of patients until the hospital would be opened in order to push Korean government to prepare hospital quickly.
Why or how did he do that? The first answer available to the question, he might be so confident of his medical knowledge and skill that he didn't feel the need to ask the patients' thought and will. However, as stated above, his medical study was just one year. And he worried about his inexperience of surgery.
Thus the first assumption seems to be false. He wasn't confident of his medical knowledge. The fact that nevertheless Allen treated Korean patients at his will, is still blamable.
The second assumption is that he regarded western modern medicine as the only correct and proper approach. He didn't have many experiences, but his west modern medicine made him proud of its achievement. After middle 19th century of modern times, Micheal Foucault said at The Birth of Clinics, western modern medicine believed itself scientific on the ground that west modern medicine could have pathology and surgery. Allen might also trust the scientific ability of western modern medicine. So he might think that he didn't need to explain 'modern and scientific' medicine of West to people in 'premodern and non-scientific' medicine of Korea.
The third answer is his 'Orientalism'. He thought that Koreans were dirty, lazy, and barbarous and, therefore, he made a clear distinction between Caucasian and Korean. He set his affection on 'Cho-Seon(朝鮮)' and made efforts to cure Korean patients and establish the first western Government hospital in Korea. However he, as a westerner, could not free himself from ‘Orientalism’ and ‘Imperialism’. Thus, he might ride so roughshod Korean patients.
In fact the ‘Orientalism’ was not only Allen’s thought. Many western visitors thought Korean as an ‘Orient’. The West regarded themselves as civilized and the East as uncivilized or barbarous, therefore the West thought that the East should be modernized with the help of the West. This thought rationalized their imperialism and colonialism toward the East.
In addition, he seemed to have some ambition in politics and diplomatics. He wanted to be a high-ranking official, so his goal of his life was political or economical power rather than medical missionary.
Keywords : Horace N. Allen, medicine, missionary, body, Cho-Seon(朝鮮: Korea), Gaehwagi(開化期 : about the year 1876-1910, that is the civilized and enlightened age), Orientalism, western modern medic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