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7

05 예수 그리스도와 도의 신학(2) : 네이버 블로그

05 예수 그리스도와 도의 신학(2) : 네이버 블로그

[공지] 05 예수 그리스도와 도의 신학(2)
시원 김흡영 교수
도의 신학 서설
・ 2021. 7. 17. 16:59


도-그리스도론에 대한 한국적 전거들
그렇다면 도란 근본 은유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사실 도의 해석학
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시작부터 도의 관점을 통해 그리스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리스도를 이해한 것은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로고스를 통해 그리스도를 이해한 것처럼 지극히 타당하고, 그와
할 수 있다. 한국 신학 사상사에서 도를 근본 은유로 적용한 대표적 사례로서 이벽, 유영모 그리고 이정용의 그
다.<1>
1) 이벽(李檗, 1754-1786):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의 교차점으로서 그리스도
노자는 궁극적인 도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언어를 넘어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초언어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
삶의 방법(德)에 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도는 단지 형언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들이
혁적 실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적인 방식들까지도 제시하는 자기발견적인 은유인 것이다. 동아시아
반적으로 도교와 유교라는 상호보완적인 대립쌍(complementary opposites)에 의해 인식되었다. 도가전통
(apophatic) 차원, 곧 하늘의 길(天道)에 관심을 가지는 반면, 유가전통은 인간 삶의 언어적(kataphatic) 측
욱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다.
당대에 탁월한 유학자이면서 한국 최초의 신학자라 할 수 있고 한국 가톨릭교회의 영적 교부라는 광암 이벽(1
인도의 일치와 합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천도와
인성이 합일한 최상의 현자로 보았다.
2) 유영모(柳永模, 1890-1981): “없이 계신 님”으로서 그리스도
동아시아의 해석학적 지평의 깊은 심장부에서부터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단초를 제시한 이는 다석(多夕) 유영
분명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유교와 불교에 통달했고 선도의 수행자였다. 주돈이(周敦頤)는 『태극도설(太極
而太極)’, 즉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절대무(空虛)와 우주생성적 근원이라는 상호보
적 대립쌍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도를 최상의 우주생성적 역설이라고 보는 신유교적 관점에서, 다석은 아주
스도론을 구상했다. “십자가를 무극이 태극이라고 본다. 동양의 우주관이다. 동양의 우주관을 몸소 보여 주신
성인(殺身成仁)이었다. 자기를 제물로 바쳐 인류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 우주적 그리스도론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무극과 태극이 하나가 된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예수가 “내
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넘치는(父子有親
( )로서 드러난다. 다석은 십자가를 “꽃피”라고 했다. ‘꽃피’인 십자가를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의
을 드러낸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라는 꽃이 피를 흘리며 활짝 피는 것을 보면서 그는 우주의 영광스런 만개를



이 우주적 그리스도론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무극과 태극이 하나가 된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예수가 “내
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넘치는(父子有親
( )로서 드러난다. 다석은 십자가를 “꽃피”라고 했다. ‘꽃피’인 십자가를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의
을 드러낸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라는 꽃이 피를 흘리며 활짝 피는 것을 보면서 그는 우주의 영광스런 만개를
있어서는 “우주 궤도의 돌진이 십자가요 우주 궤도를 도는 것이 부활이요 세상을 비추는 것이 하나님의 우편에
이러한 없음(無)과 있음(有), 비존재와 존재라는 최고의 역설적 시각에서 다석은 특유한 한국적 영성으로서 기
apophatic) 도 그리스도론을 구상했다. 그는 예수를 원초적 호흡, 즉 “숨님”이라고 불렀다. 또한 예수는 “계시
는” 분이다. 다석은 “없이 계신 님”이라고 하는 비존재(無極)적 존재(太極)이라는 특이한 동양적 그리스도론을
어도 (실제적 가치가) 없는 존재’, 즉 ‘존재적 비존재’라면, 예수는 ‘없어도 (절대적 가치)가 있는 존재’, 곧 ‘비존
하면, 우리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면, 그리스도는 ‘공즉시색(空卽是色)’인 것이다.
3) 이정용(Jung Young Lee, 1935-1995): 역(易)의 완성으로서 그리스도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정용은 주역(周易)의 형이상학을 가지고 동아시아 그리스도론을 발전시키고자 했
신학을 위한 가장 적절한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미 실효성을 상실한 실체론적(substance
충분한 과정신학적(process) 패러다임(becoming)을 넘어서서 역(change)의 방식(being and becomin
임 전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같은 현대 물리학의 발견이 보여주었
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유클리드 기하학, 뉴턴 물리학 같은 희랍적 형이상학에서의 있음(substance)이
(Whitehead)의 과정 형이상학에서의 되어감(process)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변화 안에 있는 있음(bein
은 음과 양의 상호보완적 대립쌍 안에 있는 태극에 근접한다. “그러므로 역은 있었고, 있고, 있을 모든 것들의
있음과 되어감의 근원이다. 따라서 역의 신학은 있음이면서 또한 되어감인 궁극적인 것의 특징을 설명한다.”
서구적 사고방식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하는 양자택일적인 논리가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러
까지도, 그 한계를 넘어서기가 어렵다. 모든 궁극적 문제들에 있어, 진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상극적인
모두를 아우르는 상생적인 양자긍정(both-and)에 있다. 이정용은 양자택일의 방식은 그릇된 것이고, 역의 “
의 올바른 형이상학이라고 주장했다(God as Change). “역경(易經) 속에 나타난 역은 분명히 범주화할 수 없
에 비인격적이고, 여성적이면서 동시에 남성적이며, 내재적이면서도 또한 초월적이다.” 이러한 완전긍정(bo
(neither-nor)과 상호보완적이다. 최상의 역설로서, 태극은 완전한 긍정을, 무극은 완전한 부정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면서 비인격적이고, 여성적이면서 남성적이며, 내재적이면서도 또한 초월적이다. 그러나 동
않으면서도 비인격적이지 않고, 남성이 아니면서 여성도 아니며, 내재적이지 않으면서 또한 초월적이지 않다
스도는 역의 완벽한 실현으로서 파악된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완벽한 조화 속에 있다. 예수의 정체성은 그의 인성을 배제하는
음(陰)의 존재를 전제하듯이 그렇게 인성을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완전한 인성은 완전한 신성을 전제하고 있
변화와 변화함의 완전한 상호보완성 속에서 그는 완전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다. 변화와 변화
한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변화와 변혁의 궁극적인 현실이다."<4>


--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완벽한 조화 속에 있다. 예수의 정체성은 그의 인성을 배제하는
음(陰)의 존재를 전제하듯이 그렇게 인성을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완전한 인성은 완전한 신성을 전제하고 있
변화와 변화함의 완전한 상호보완성 속에서 그는 완전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다. 변화와 변화
한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변화와 변혁의 궁극적인 현실이다."<4>
이정용의 제안은 사실 신학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합당한 관심을 얻지 못했다. 그의 반서양적 수
과도했고, 그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지나치게 실증적인 형이상학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역이 새로운 대안
이상학이라고 주장하며 내세운 그의 ‘복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retrieval)’은 여러모로 탁월성을 가지
학의 구성을 위해 더불어 중요한 전통의 역사에 대한 진솔한 비판을 하는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
서 역의 신학은 토착전통에 대해 순박하고 낭만적인 해석학을 사용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스 신학(종교신학)을 위해서는 좋은 모형이지만, 아시아 신학의 또 다른 축인 프락시스 신학(해방신학)을 위해
지 못한다. 서구 형이상학의 모순에 반대하는 열정적인 논쟁 속에서 이정용은 그의 본래의도와는 반대로 도가
있다고 하는 형이상학적 함정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도덕경이 정의한대로, 도는 결코 객관적으로 기술될 수 없으며 오직 자기발견적으로 체득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고정된 얼굴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콘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계속적으로 변화하면
다. 따라서 역동적인 도의 해석학에서는 해석자의 맥락과 역할이 모두 중요하다. 도의 해석학이란 해석자 또는
과 맞물리면서, 도의 궤적을 각성하고 창조적이고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활동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
진 어느 때에 어떻게 우주적인 운동 속에 적절히 참여할 수 있는지 식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요구한다는
신-인간-우주적 합일의 완성: 완전긍정과 완전부정의 그리스도
신학적 근본 은유로서 도의 탁월성은 형이상학적 실증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면서도 초언어적인 도를 표현해내
적 실재를 양자긍정과 양자부정의 방식으로 해명하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도는 그리스
결하고 그리스도를 통전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사실 니케아-칼케돈 신조의 탁월성도 희랍
리스도의 궁극적이고 우주생성적인 본성을 표현해낸 것에 있다. 그것을 통해 4-5세기 교부들 은 기독교 신앙
고를 초월할 수 있게 하였 다. 우선 니케아 신조(325)는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 )’인 동시에 ‘참 인간
기 위해 양자긍정(both-and) 또는 완전긍정의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칼케돈 신조(451)는 그리스도의 두 본
하지도, 분리되지도, 구별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양자부정(neither-nor) 또는 완전부정의 방식
어로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면, 4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인성과 신성 양자 모두에 대한 전적 긍정으로서 태극(太
부정으로서 무극(無極) 사이의 최고의 역설적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우주생성적인 신비를 통찰하고 표현했던
인간이고 참 하나님인 동시에 우주의 참 주재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도의 신학은 신-인간
---
도덕경이 정의한대로, 도는 결코 객관적으로 기술될 수 없으며 오직 자기발견적으로 체득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고정된 얼굴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콘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계속적으로 변화하면
다. 따라서 역동적인 도의 해석학에서는 해석자의 맥락과 역할이 모두 중요하다. 도의 해석학이란 해석자 또는
과 맞물리면서, 도의 궤적을 각성하고 창조적이고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활동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
진 어느 때에 어떻게 우주적인 운동 속에 적절히 참여할 수 있는지 식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요구한다는
신-인간-우주적 합일의 완성: 완전긍정과 완전부정의 그리스도
신학적 근본 은유로서 도의 탁월성은 형이상학적 실증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면서도 초언어적인 도를 표현해내
적 실재를 양자긍정과 양자부정의 방식으로 해명하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도는 그리스
결하고 그리스도를 통전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사실 니케아-칼케돈 신조의 탁월성도 희랍
리스도의 궁극적이고 우주생성적인 본성을 표현해낸 것에 있다. 그것을 통해 4-5세기 교부들 은 기독교 신앙
고를 초월할 수 있게 하였 다. 우선 니케아 신조(325)는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 )’인 동시에 ‘참 인간
기 위해 양자긍정(both-and) 또는 완전긍정의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칼케돈 신조(451)는 그리스도의 두 본
하지도, 분리되지도, 구별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양자부정(neither-nor) 또는 완전부정의 방식
어로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면, 4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인성과 신성 양자 모두에 대한 전적 긍정으로서 태극(太
부정으로서 무극(無極) 사이의 최고의 역설적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우주생성적인 신비를 통찰하고 표현했던
인간이고 참 하나님인 동시에 우주의 참 주재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도의 신학은 신-인간다.
사실 이러한 역설적인 사유 방식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영지주의 복음서들, 그레고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reopagite)와 같은 초기의 창의적인 신학자들,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와
Eckhart)와 줄리안(Julian of Norwich)과 같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니콜라스(Nic
상극적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라는 원리 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더욱이 바울은 성경에서 이
여 그리스도교를 설명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8, 새번역)
새로운 태극(太極): 우주생성적 그리스도
앞에 열거한 선진들의 통찰을 기반으로 도의 신학은 도-그리스도론을 다음과 같이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
예수는 곧 도이시다. 그는 태극과 무극이 일치를 이루는 지고한 역설의 완성이며, 원초적 숨님이며, 비존재적
---
새로운 태극(太極): 우주생성적 그리스도
앞에 열거한 선진들의 통찰을 기반으로 도의 신학은 도-그리스도론을 다음과 같이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
예수는 곧 도이시다. 그는 태극과 무극이 일치를 이루는 지고한 역설의 완성이며, 원초적 숨님이며, 비존재적
이며, 완전한 형태를 이루는 완전한 비움(kenosis 혹은 sunyata)이다. 십자가는 우주변화의 길(道)로의 돌진
간-우주적 궤적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변혁을 의미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우주의 길을 변화시키는 우주생
것은 도의 옛 형이상학적 세계, 즉 태극과 이(理)에 존재하던 역사적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열어젖히는 사건을
벽(開闢)을 언표한다. 옛 태극의 우주생성은 무극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새로운 태극으로서, 다시 말해 지
적 운동으로서 부활했다. 그것은 그저 교리적인 혁명(logos)만도 아니요, 단순히 메시아적 영감을 받은 사회
은 우주생성적 혁명이다. 도로서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태극은 그리스도의 우주 생성적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태극의 옛 인간-우주적인 고리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서, 그것을 상서(祥瑞)
간-우주적 궤적으로 변화시키고, 태극의 새로운 시대(aeon)를 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건은 우주생명
하고 성취했다.<5>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 반전과 복귀의 그리스도
이 뜻밖의 상서로운 신-인간-우주적이고 우주생성적 궤적은 실재하는 것이지만 아직도 감추어져 있다. 그 궤적
지 않고 있으며, 종말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기(氣, )의 개념은 중요한 해석학적 열쇠를 제
통해 그리스도론적 영이신 신-인간-우주적 비전이 새롭게 창안될 수 있다. 통전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기
동시에 그러한 힘의 물질적 현현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원초적 기운의 근원(source)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말하기도 한다. 기의 소통은 인간과 다른 생물들의 관계를 보다 통전적으로 그리고 보다 심오하게 발전시킨다
을 통해 신-인간-우주적 생명의 그물망(life network)이 서로 공생(symbiosis)하게 할 수 있게 된다.
더욱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민중의 사회-전기(socio-biography)와 순진한 인간-우주적 비전 사이의 변증
서서, 착취당하는 생명의 사회-우주적 전기를 주제화 할 수 있게 해 준다. 도로서의 하나님은 기의 영적 소통을
생명들의 사회-우주적 관계망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원초적 기운인 원기(元氣)로서 그리스도는
에 가져온다. 더욱이 영이면서 동시에 물질로서의 기는 성육신(Incarnation)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마리를
탄생 이야기는 영-인간-우주적 비전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하고,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는 착취당하는 생명의
월하게 표출한다. 그러므로 신-인간-우주적 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원초적 기, 즉 원기
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그리스도론은 기에 대한 영적인 해석학과 착취당하는 생명의 사회-우주적 전기 모두를 그 구성요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 곧 도를 그리스도로 언표하는 도-그리스도론은 영적이고 해방적이다. 결국, 도
태극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아시아 영성의 구원론적 핵심 안에 구현되어 있는 해방적 그리스도론의 한 전형이라
간-우주적 도로서의 예수와 기-사회-우주적 도로서의 그리스도를 구상하는 도-그리스도론은 현대 그리스도론
----
생명들의 사회-우주적 관계망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원초적 기운인 원기(元氣)로서 그리스도는
에 가져온다. 더욱이 영이면서 동시에 물질로서의 기는 성육신(Incarnation)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마리를
탄생 이야기는 영-인간-우주적 비전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하고,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는 착취당하는 생명의
월하게 표출한다. 그러므로 신-인간-우주적 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원초적 기, 즉 원기
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그리스도론은 기에 대한 영적인 해석학과 착취당하는 생명의 사회-우주적 전기 모두를 그 구성요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 곧 도를 그리스도로 언표하는 도-그리스도론은 영적이고 해방적이다. 결국, 도
태극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아시아 영성의 구원론적 핵심 안에 구현되어 있는 해방적 그리스도론의 한 전형이라
간-우주적 도로서의 예수와 기-사회-우주적 도로서의 그리스도를 구상하는 도-그리스도론은 현대 그리스도론
본문제인 근대적 역사중심주의와 희랍적 이원론을 극복한다.
결론적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그리스도론의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라 삶을 바른 길(正道, orthodao)로 변화 시켜나가며,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생명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적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새로운 태극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주생성적
신-인간-우주적 도로서 그리스도는 수난받는 온생명들에게 이 상서로운 기-사회-우주적 궤적으로 복귀할 수
지-영이며, 더욱 우리식으로 말하면 원초적 기(元氣)를 불어넣어 주신다. 이 대목에서 『장자』에 다음과 같은 구
"너는 뜻을 한가지로 가져라. 그래서 귀로 들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듣
은 부합(符合)하는데서 그친다, 허나 기는 허해서 온갖 걸 다 포용한다. 오직 도는 허(虛)한 데서 모이니 허한
다."<6>
참된 도로서의 그리스도는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려 솟구치는 연어와 같이 생명들로 하여금 도로 복귀하게 만
를 완성하는 능력인 그리스도의 원초적 기, 곧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공허 곧 자기비움( )과 심재
한 마음 닦음( )이 이루어졌을 때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반전(산상수훈)의 능력에
가려는 물고기처럼 도약하며 도로 복귀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물고기로 상징되는 깊은 의미를
태극기에 나오는 태극문양 또한 물고기 두 마리가 맞물려 도약하는 상징으로도 표현되니, 그리스도와 우리나
또한 예수께서 시몬과 안드레에게 하신 다음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나를 따르라. 그러면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1:17)
주:
1 이 글은 세계 여러 곳에서 발표한 글을 보완·축약한 것이다. 학술적인 논의와 자 료를 위해서는 김흡영, 『도의
175-195; Heup Young Kim, A Theology of Dao (Orbis, 2017), 34-56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