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 등재
역사 화해와 용서의 정치: 동아시아의 기억공간에서 폴란드-독일 주교단 편지 다시 읽기Rereading "Polish Bishops' Appeal to German Colleagues" of 1965 in the East Asian Mnemoscape: History Reconciliation and Politics of Forgiveness
역사학보
2020, vol., no.246, pp. 111-152 (42 pages)
임지현 /Jie-Hyun Lim 1
1서강대학교
초록
이 글은 “우리도 용서하니 그대들도 우리를 용서하라”는 속칭으로 잘 알려진 1965년 폴란드 주교단의 사목 서신을 동아시아의 기억 전쟁과 역사 화해라는 맥락에서 재검토한다. 이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가장 큰 희생자였던 폴란드의 가톨릭교회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점만으로도 이 편지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화해의 정치적 논리와 용서의 기독교적 윤리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이 문건은 희생자가 가해자에게 용서를 구함으로써, 나치 독일의 가해자들이 폴란드 희생자들에게 사과하도록 촉구하는 고도의 도덕 정치적 메시지였다. 초국가적 행위자인 가톨릭교회가 주재한 역사적 화해의 기억이 20세기 동유럽과 21세기 동아시아의 시·공간을 넘어 전지구적 기억 공간에서 어떻게 상호 참조하면서 기억의 정의와 역사 화해를 향한 미래를 열 것인가 하는 현실적 고민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This article starts with a premise on how to appropriate "the Polish Bishops' Appeal to the German Colleagues (1965)" as a cross-reference for the history reconciliation in East Asia. Once spread, the Polish Episcopate's letter became a historical event for its message of "we forgive and we ask for forgiveness." The letter signaled the shift of the conventional dichotomy of the collective guilt and innocence from the nationalist political instrumentalism into an ethical vision of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With the compliments of the 'avant-garde of reconciliation' and 'the greatest foresight in the postwar Poland,' the "Appeal" showed how the Catholic Church as a transnational agency could be a paradigm changer for the history reconciliation. The "Appeal" carries an empathy for the misery of not innocent German refugees and self-criticism of the transgression of the Polish revenge, which gives transnational memory activists some leeway to overcome the old antagonism between guilt and suffering, and the zero-sum game of the victimhood nationalism. "What would it mean to transpose the Polish Bishops' Letter from Central-Eastern Europe of 1965 into present-day East Asia?" needs to be answered thoughtfully yet, despite some try in this article.
키워드
폴란드 주교단 편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역사 화해,
용서의 정치,
기억의 연대,
초국가적 기억 주체,
지구적 기억공간
Polish Bishops’ Appeal of 1965, victimhood nationalism, history reconciliation, politics of forgiveness, transnational memory agency, mnemonic solidarity, global memory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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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x.doi.org/10.16912/tkhr.2020.06.246.111
노 0
역사화해와용서의 정치:동아시아의 기억공긴에서 폴란드-독일 주교단 편지 다시 읽기고)
임 지 현**
1 . 초국가적 기억과시목서신 IV. 초국가적 화해와용서의 윤리
표. 희생의 비대칭성과 역사의 탈맥락화 v 비판과화해시의에서
Ⅱ. 오데르-나이쎄 국경 문제와 국경을 넘는 역사 인식
1. 초국가적 기억과 사목서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십주년이 되는
1965년 11월 18일 폴란드 가톨릭
* 이 논문은 2017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2017SIA6A3A01079727).
**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 사학과 교수
2019년7-8월 현지 체류 조사를 지원해준 라이프지히 대학 '동유럽연구센터(GWZO)'의 히들러(Frank Hadler) 교수와 "Entanglement and Globalization” 프로젝트 팀의 미* Middell) 교수, 자료 수집을 도외준 박크(Jonas Waack) 군과 모틸린 스카(Ewa Motylifiska) 양에게
감사드린다 논문 초고는 “국제역사학위원회"(%mité
International des Sciences Historiques)와 “교황청역久十위원회”(Pontificio Comitato di Scienze Storiche) 공~동주최로
바티간 시티 Collegio Teutonico에서 열린 학술대회
"Religion, History and Peace” (November 28, 2019) 및 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인문학
연구소와 신학연구소가 서강대학교에서 공동 주최한 “동아시아 기 억의 연대와 평화: 한일 가톨릭 교회의 역할"(October 31, 2019)에서
발표해 유럽과 동 아시아 교회사 연구지들에게 피드백을 받았다. 신학 교리에 관한 한 특히 김진호 목사의
가르침이 컸다. 그러나 오류는 전부 내 탓이다.
교회 주교단은 독일 주교단에 아주
특별한 교서를 보냈다기 비쉰스71(Stefan Wyszyfiski) 추기경을 필두로 35명의 대주교/주교들의 서명이 담긴 폴란드 주 교단의 이 편지는
세간에 알려지자마자 곧 자건'이 되었다. 주교단 편지의 주된
메시지는 폴란드 가톨릭교회가 독일의 가톨릭 형제들에게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었다. 나치 독일의
기장 큰 희생자였던 폴란드의 가톨릭교회가 먼저 나서서 독일의 형제자매들을 용서한다며 화해의 메시지를 보낸 것도 놀라웠지 만,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오히려 용서를 구하는 편지의 결말은 큰 충격이었다. 피해자인
폴란드 가톨릭교회가 가해자인 독일의 가톨릭교회에 먼저 용서를 구 한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폴란드
주교단의 이 사목 서신은 가 해자가 먼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기 마련인 세속적 상식을 엎어 버렸다. “그
대에게 용서를 베풀며, 또 그대의 용서를 구한다는 속칭으로 잘 알려진 이 편지 의 전복적 상상력은 그
제목만으로도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목 서신의 초안을 작성한 코미넥(Boleslaw Kominek) 대주교나 서명 에 동참한
폴란드 주교단도 편지가 몰고 올 파장을 충분히 예상했던 것처럼 보 인다. 편지가 발표되기 5일 전인 11월 13일
당 중앙에 보낸 폴란드 내무부 정보 국의 첩보 보고에 따르면, 코미넥 대주교는 이 편지가 '진짜 폭k}'(prawdziwa
2) 폴란드의 주교단 편지에서는 '독일 주교단'이라 지칭했지만, 실제로는 '서독' 주교단을 의미했다. 서독의 가톨릭교회와 관련하여 이 글에서 사용한 '독일이라는 표현은 '서독' 을
의미할 때가 많다. 문건의 원래 표현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독일이라는
용어를 그 대로 시용했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서독이라는
표현을 같이 사용하기도 했다. 이 논 문에서 참조한 폴란드 주교단 편지 및 독일 주교단 답신의 독일어
원문과 폴란드 정보 당국이 급조 번역한 폴란드어판, 그리고 아틀란틱 포럼에서 공간한 영어판은 다음과
같다 "Hirtenbrief der polnischen Bischöfe an ihre deutschen
Amtsbrüder vom 18. November 1965,”•, "Die Antwort der deutschen Bischöfe
*℃m 5. Dezember 1965 ” http://cdim.pl/1965—11—18—b0tschaft—der—p01nischen—
an—die—deutschen—bisch—fe,2942 (검색일: 2020년 3월 31 일);
Ministerstwo Spraw Zagranicznych. 498/Rap/65. https://msz.gov.pl/resource/8fd59e91—
Obb9—4fd7—bce3—fd81dfc421dd:JCR (검색일: 2020년 3월 31 일); German
Polish Dialogue: Letters Of the Polish and German Bishops and International
Statements (Bonn—Brussel—New York: Edition Atlantic Forum, 1966).
폴란드뚁일 주교단편지
bomba)이 될 거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밀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대주교의 우려 는 현실로 드러났다. 폴란드 주교단의 사목 서신에
대한 12월 5 일자 독일 주교단 의 미온적인 변명 조 답서가
빌미를 제공했다. 독일 주교단의 답서가 발표되자, 폴란드
공산당의 선전 기관과 매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가톨릭교회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당의 선전 매체들은 “우리는 용서하지 않으며, 또 용서를 구
하지도 않는다(Nie
przebaczmy i nie prosimy 0 przebaczenie)"는 슬로건 을 내세웠다. 폴란드 주교단 서신을 조롱 조로 패러디한 것이었다. 나아가 당 기
관지와 국영 언론은 '민족배반자', '서독의 복수론지들에
대한 항복문서', '비공민 적 행동' 등의 격한 용어를 구사하며
주교단을 비난했다. “(민족배반자) 추기경을 폴란드에서 추방하자"는 구호까지 나올 정도였다!) 나치의 후신, 서독의 제국주 의지들에게 폴란드의 민족적 이익을 필아넘긴 반민족적 매국노라는 게 주된 논 조였다?) 폴란드와 서독 사이에 아직 동서 냉전이 한창이고 또 나치의 대근g박살
에 대한 역사적 화해가 요원했던 당시 상횡에서 이런 비난은 폴란드 가톨릭교회 의 평판에 치명적일 수 있었다.
편지는 원래 폴란드 가톨릭교회가
1966년 예정된 기독교 수용 1,000주년 기 넘식에 서독의 가톨릭 형제들을 초대하여
양국 간의 화해와 용서의 물꼬를 트 려는 의도에서 작성되었다. 폴란드 가톨릭교회에게 기독교 수용 1,000주년 기 넘행시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무형의 민족 자산으로서 기독교의 중요 성을 재확인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서독과의 화해는 동구 진영의 공산주의 무 신론에서 벗어나 서구의 기독교 전통으로 회귀한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의도
3) W이ciech Kucharski. 'Trawdziwa bomba. Jak powstawalo Oredzie biskup6w
polskich do biskup6w niemieckich “. Wig} no. 615 (2010), P. 123.
4) Ewa
Czaczkowska, "Rola Kardynala Stefana Wyszyfiskiego W Powstaniu Oredzia
Biskup6w Polskich Do Niemieckich Nieznane Dokumenty W Archiwum Prymasa
Polski," Przeg14d Zachodni no. 3 (2016), P. 199.
5) Andrzej
Gajewski, "Confrontation And Cooperation 1000 Years Of Polish German ¯Russian
Relations, The Journal Of Kolegium Jagiellonskie: Torunska Szkola Wyzsza Ⅴ이. 2 (2015), PP. 9-10.
와 달리 폴란드 교회는 이 편지로
인해 큰 어려움에 형짝했다. 공산주의 체제 수 립 이후 가톨릭교회와 줄곧 경합해 왔던 '폴란드통합노동자당'(PZPR, Polska Zjednoczona Partia
Robotnicza)은 이 편지를 문제 삼아 가톨릭의 민족적 정통성에 흠집을 내려고 했다. 특히
오데르-나이쎄 국경선을 분명하게 인정하 지 않는 독일 주교단의 답장이 공개되고 조국을 배반한 비애국적
교회라는 당의 선전이 격화되면서, 폴란드 가톨릭교회는 큰 타격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교회 내부에서도 갈등이 생겼다. 종교담당 정부 부처의 설문 조사에
응한 폴란드 신부 50% 이상이 주교단의 사목 서신에 반대한다고 답했고, 비쉰스기 추기경은 젊은 사제들의 반발이 못마땅했다.6) 그러나 가해자가
먼저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피해자인 폴란드가 먼저 용서의 이니셔티브를 취한 이 사목 서신의 전복적 상상력은 역사 화해에 미 온적인
전후 독일의 사괴를 끌어내려는 고도의 정치적 메시지였다!) 가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폴란드 주교단의
메시지를 받은 독일 주교단은 죄불안석의 심정 으로 어떤 식으로든 용서를 빌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국적으로
보면, 폴란 드-서독 간에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편지는
대성공이었다. 빌리 브란트 (Willy Brandt)의 동방정책, 1970년 폴란드-서독의 국교 정상화, 1989년 서독 수상 콜대elmut Kohl)과 폴란드 수상 마조비에츠71(Tadeusz Mazowiecki) 의 평화 메시지 교환, 오데르-나이쎄 국경선의 국제적 재인정과 독일 통일, 폴 란드의 유럽 연합
가입 등 숨 가쁘게 탈냉전의 역시를 거치면서, 이 사목 서신은 역사적 의의를 점점 더해갔다. 폴란드와 독일의 역사적 화해가 진전되면서, '감 동적인 화해문서'대elmut Kohl), '폴란드와 독일의 대회를 이끈 편지'(Tadeusz
6) Piotr H. Kosicki, "Caritas across the Iron Curtain?
Polish—German Reconciliation and the Bishops' Letter of 1965,“ East European
Politics and Societies no. 2 (2009), P. 225.
7) Piotr Madajczyk, "S. Gawlitta, 'Aus dem Geist des Konzils! Aus
der Sorge der Nachbarn!' Der Briefwachsel der polnischen and deutschen Bischöfe
von 1965 und seine Kontexte," Kwartalnik Historyczny Ⅴ이. 125, no. 2 (2018), p. 187. 폴란드뚁일 주교단편지
Mazowiecki)
화해의 아방가르드'(Robert Zurek),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 드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견지명'(Jan Jözef Lipski) 등 주로 정치권과
가 톨릭 활동기들 시의에서 뒤늦게 격찬이 쏟아졌다.8) 가세기에 들어서도 폴란드 주교단의 사목 서신은
폴란드-독일 관계를 넘어 그 역사적 외연을 넓혀갔다. 종전 60주년인 2005년 6월
바르샤바에서 열린 주 교 회의에서 폴란드 주교단은 1965년 사목 서신을 모델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가 서로 용서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발표했다. 이 편지는
폴란드인-유대인우크라이나인들의 다문화 도시였던 서부 우크라이나의 르비프(L'viv/Lwöw), 테르노필(Ternopil/Tarnopol)의
차르바니치야 그리스 정교회 등에서도 낭독 되었다?) 테르노필은 폴란드-우크라이나
접경인 볼린/보원(BOJIHHb/Wolyfi)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주민을 대량 학살한
홀로코 2` 드 0뗘라 폴란드 민족저항군과 나치와 연합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지들 이 서로 10만이
넘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보복 학살한 비극의 현장이 었다.10) 또 2013년에는 폴란드 가톨릭교회와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상호 용서와
화해를 촉-구하는 공동의 화해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11)
1990년 중반 이래
8) Karolina Wigura, "Alternative Historical Narrative:
"Polish Bishops' Appeal to Their German Colleagues” Of 18 November 1965,“
East European Politics and Societies and Cultures Vol. 27 no. 3 (2013), P. 408;
Robert Zurek,
Avantgarde der Versöhnung: Uber den Briefwechsel der Bischöfe und
die Ostdenkschrift des EKD von 1965 ” https://www.dialogmagazin.eu/files/
gestaltung/illustration/Ausschnitt%20Ausgabe%20DIALOG%20Bischoefe. png (검색일: 2020년 3월 31 일).
9) Letter Of Bishops Of Poland and Ukraine on Reconciliation: 'We Have
to Rise Above the Legacy Of History, Forgive One Another, Zenit. August 29,
2005. https://zenit.org/articles/letter—of—bishops—of—poland—and—
ukraine—on—reconciliation/ (검색일: 2020년 3월 31 일).
10)보원의 학살에
대한 비교적 균형잡힌 폴란드 측의 최근 연구로는 다음을 보라.
Grzegorz Motyka,
WolY15 '孑3,• Ludoböjcza czystka - fakty, analogie,
polityka historyczna (Krak6w: wydawnictwo literackie, 2016).
11)
"Polish and Ukrainian bishops sign reconciliation: Polish and Ukrainian 양국의
리버럴 정치권과 비판적 지식인 그룹이 꾸준히 역사 화해의 필요성을 제 기했지만, 화해의 역사적 문서를
만든 것은 폴란드 가톨릭교회와 우크라이나 정 교회였던 것이다.
이 논문은 1965년 폴란드 주교단의 사목 서신과 독일 주교단의 답서, 그리 고 그 왕복 서한에 대해서 폴란드와 독일 사회의 다양한 행위지들이 어떻게 반응 했는가를 텍스트 중심으로
검토한 후, 오늘날의 동아시아로 시 • 공간을 이동시켜 그
사건의 초국가적 의미를 반추하고자 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아시아•
태 평양 전쟁의 과거사를 놓고 한국과 일본의 국기권력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다 수 구성원이 점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기억공간으로
옮겨질 때, 1965 년의 폴란드-독일 주교단 편지는 돌연
동유럽의 과거이기를 멈추고 동아시아의 미래가 된다. 그것은 1965년
주교단 편지의 역사적 맥락을 지워버리고 자의적으 로 탈역사화히는 작업괴는 분명히 구분된다. 이 논문은 1965년 사목 서신의 정 신을 21세기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 발한다.
2019년 동아시아의 기억공긴에서 1965년 폴란드
주교단의 편지와 그 역사 를 반추하는 것은, 역사적 화해를 도모하는 초국가적 행위자로서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수행성과 윤리적 의미를 확대하여 교착상태에 빠진 한• 일간의 역사 화해 를 향한 새로운 기능성을
모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와 시민사회 모두 국제정 치의 세속적 규범에 매여 역사 화해의 돌과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현 상횡에서, 가톨릭교회의 관계지들이 자유롭게 이념의 장벽과 국경을 넘어
대화 한 선례는 각별히 중요하다. 화해와 용서의 역사적 행위자로서의 폴란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성찰은
화해와 용서를 동아시아의 기억정치를 움직이는 게임 윤리 로 정립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church leaders
signed an appeal for reconciliation in Warsaw on Friday, marking the 70th
anniversary of WWII massacres.” Radio Poland. June 28, 2013.
http://archiwum.thenews.pl/I/10/Artykul/139811.PoIish—and—
Ukrainian—bishops¯sign—reconciliation (검색일: 2020년 3월 31 일).
Ⅱ. 희생의 비대칭성과 역사의 탈맥락화
인구비례로 볼 때,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기장 큰 희생 자였다. 3백만
유대계를 비롯하여 거의 6백민에 달하는 폴란드 전체 인구의 4분
의 1 가까이가 죽은 것이다. 절대 수치로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900만 명에 달하는 소련의 희생자보다 적지만, 20%를
훌쩍 뛰어넘는 폴란드 희생자들의 인 구 비례는 전체 인구 17%에 달하는 소련의 희생자 비율보다 훨씬
높았다. 폴란 드인들의 희생은 질적으로도 큰 것이었다. 나치의
의도적 엘리트 말살 정책에 따 라 법률가의 50% 이상, 의사의 40%, 대학교수와 고등학교 교사 3분의 1 이상이 희생되었다. 가톨릭 사제도 예외가 아니어서 약 2천 명의 신부와 다섯 명의 주교 가 강제수용소 등에서 살해당했다. 전체
사목 인구의 25%에 달하는 높은 수치 였다. 홀로 구八E뿐 아니라동유럽의 슬라브 이웃들에 대한 나치 독일의 절멸 전 쟁은 20세기
최악의 '인종 전쟁'이었다.12)
이 희생의 크기를 고려하면, 폴란드인들이 나치 독일에 대해서 품었던 증오 와 공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전쟁이 끝난 후 20년이 지나도록
폴란 드는 서독과 동독 그 어느 측에서도 공식적인 사괴를 받지 못했다. 동독의 공식 입장은, 나치즘에 저항해서 싸운 공산주의 반파시스트 투쟁의 적통을 이어받았 으므로 하등 사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치즘의 죄악은 독일 인민의 민족
12) 제2자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의
피해와 그에 대한 전후 기억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 라. 임지현,「역사의
금기와 기억의 진정성-21세기 폴란드 역사학과 '희생자의식'」『서양 사론』111호 (2011,
12); Karolina Wigura, Wina Narodöw: Przebaczenie jak0 strategia prowadzenia
polityki (Gdafisk/Warszawa: Scholar, 2011); Joanna Wawrzyniak, Veterans,
Vicitims and Memory (Frankfurt am Main: Peter
Lang, 2015);
Malgorzata Pakier and Joanna Wawrzyniak eds., Memory and Change in Europe:
Eastern Perspectives (New York/Oxford: Berghahn,
2016), part IV; Janine
Holc, The Politics of Trauma and Memory Activism: Polish—Jewish Relations Today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8); Zusanna Bogumil and Malgorzata
Glowacka—Grajper, Milieux de memoire in Late Modernity (Frankfurt am Main:
Peter Lang, 2019).
적 이해를 배반한 채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지지한 구우자본기들과 그들의 적 통을 계승한 서독의 책임이므로, 사괴는 온전히 서독의 몫이어야
했다. 동독은 폴란드의 사회주의 형제국이었을 뿐이다.13) 반면
폴란드와 공식적 외교 관계가 없는 서독의 기민당 보수 정권은 사과할 통로도 없었고 또 의지도 없었다. 폴란
드는 1950년 7월 6일
동독과 '즈교제레츠(Zgorzelec/Görlitz) 조얚을
체결해 포츠담에서 결정된 오데르-나이쎄 국경선을 획약받았지만, 국교가
없는 서독과 는 여전히 국경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독일-프랑스의
경우와 달리, 폴란 드-독일의 역사적 화해는 요원하기만 했다.14) 포츠담 회의에서 폴란드는 빌니우스(Vilnius/Wilno), 르비프(L'ⅵⅴ/ Lwöw) 등의 동부 변경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스 등 소연방 공 회국에 양도했다. 전전의 폴란드 영토 3분의 1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폴란
드는 대신 발틱해 연인에 띠처럼 걸쳐 있던 동프로이센의 포모제(Pomorze/
Pommern)
지역과 전전의 지우도시 그단스크(Gdafisk/Danzig), 브로츠와프 (Wroclaw/Breslau) 등 슐레지엔의 중심도시와 철강• 석탄
산지인 서부영토 를 패전국 독일로부터 양도빋았다. 1795년부터 세 차례에 걸친 프로이센의 분할 점령과
나치 독일의 끔찍한 점령 기억이 생생한 폴란드 조야가 전후 새로 확정 된 서부영토에 대한 독일의 공식 인정과 안전보장에 목말라했던 것은 당연하다. 1950년 '즈교제레츠 조약을 통해 국경선과 안전을 보장받은 동독은
열외로 해 도, 서독은 여전히 문제였다.
종전 이후 1960년대 초까지 서독의 기억문회는 과거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13)Jeffrey Herf, Divided Memory: The Nazi Past in the Two Germanys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PP. 35-37 and passim.
14) 19세기 이래 서쪽 이웃 프랑스는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하면서도 동쪽 이웃 폴란드에 대해서는 오리엔탈리즘을
견지했던 독일 역사주의의 전통적 역사 인식에도 큰 책임 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Jan M. Piskorski ed., Historiographical Approaches to Medieval
Colonization Of East Central Europe (Boulder &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2)를 보라.
기억의 모범국가 독일의 오늘날 이미지외는 거리가 멀었다. 1950년 독일의 현 지 통신에서, 아렌트는 전후 독일인들의 집단
심성에 지배적인 자기 연민에 기득 찬 희생자의식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아렌트가 볼 때, 당시 독일인들시이에 만연한 희생자의식은 자기 최면과 기만의 신물이었다.15)
1946년 11월 미군 점령 지역의 한 조사에서 독일인 응답지들의 37%는 “유대인과 폴란드인, 기타
비 아 리아인의 절멸은 독일인의 안전을 위해 필요했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같은 조사 에서 세 명 중 한 명은 “유대인은 아리아 인종에 속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조했다. 그로부터
6년 뒤 1952년의 조사에서는 약 37%의
응답자가 유대인들이 없는 것이 독일에 더 득이라고 답했다. “나치즘 은 좋은 생각이었지만 잘못 적용됐을
뿐"이리는 생각에서 독일인들 다수는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16)
나치의 과거에 대해 평범한 독일인들이 가졌던 변명 조의 기억 밑에는 자신 들이야말로 역사의 희생자였다는 전도된 희생자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 의 기억 속에서 나치의 잔혹 행위나 홀로구八E는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이 저지 른 일이고, 이 소수의 범죄지풀은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응징되었다. 평범한 독일인들의 눈으로 볼 때, 나치 범죄지들에 대한 역사적 정의는
이미 실현된 것 이다. 반면 '히틀러의 첫 번째 희생자이자
마지막 희생자였던 자신들은 정의롭지 못한 기억의 희생자라는 생각을 떨구지 못했다. 실제로 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 용은 적지 않다. 연합군 폭격 전대의 무차별 폭격으로 인한 여성과 어린이 등 민 간인들의 희생, 독일로 진격한 소련 적군의 약탈과 강간, 동프로이센과 슐레지 엔에서의
강제추방 등으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17) 많게는
15개annah Arendt,
"The Aftermath of Nazi Rule: Report from Germany, Commentary (October, 1950), PP.
342-43.
16)Tony Judt, Postwar: A History Of
Europe Since 7945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5), PP. 58-59.
17)독일인들의 희생자의식과 기억문화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Bill Niven ed., Germans as Victims (Basingstoke:
Palgrave.macmillan, 2006); Robert G.
1
200만으로 추한되는 독일 민간인 추방지들(Vertriebene)의 수는 약 320민에 달하는 일본 민간인 귀환자(弓I揚者)의 거의 4배에 가끼운
규모였다.
독일 피난민들을 임시 수용한 폴란드나 체코의 억류수용소들은 종종 악랄한 직업적 범죄지들이 운영을 맡았으며, 지주 나치 강제수용소의 복사판이었다. 나 치가 만든 강제수용소에
유대인들과 슬라브인들의 빈자리를 대신한 독일 피난민 들은 나치가 유대인에게 했던 만행을 거의 그대로 되돌려빋았다. 나치 치하의 모 든 유대인들이 'Jude'의 첫 글자 남' 표식을 가슴에 달고 다닌 것처럼, 독일 피난 민들은 폴란드이로 독일인을
뜻하는 Niemiec'의 첫 글자 'N' 표식을 가슴에 달
고 다녀야 했다. 18살짜리 소년 김보르스71(Cesaro
Gimborski)가 소장으로 있던 폴란드 람八도 근 Ü(Lamsdorf/Lambinowicz) 수용소가
특히 악명높았는 데, 이 가학적 소년 범죄지는 800명의
아이를 포함해 6천 명 이상의 독일 피난민 들을 학대하고 살해했다. 수용소에서
안경을 썼던 한 독일 교수는 지식인처럼 보 인다는 이유만으로 맞아 죽었다. 수용소 경비를 맡은 폴란드의
십 대 청소년들이 독일인 인텔리와 사업가, 상류층으로 보이는 부르주아 계급을 가학적으로 고문 하고 죽인
과정을 보면, 캄푸체아의 크메르 루즈나 마오쩌뚱의 홍위병이 연상될 정도이다. 8 체코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화로운 다민족 체코슬로바키아를 꿈꾸 었던 체코 대통령 베네스(Eduard
Bene9는 “독일인들에게 재앙 있으라고 저 주를 퍼부었다. 그는 공공연히 독일인들을 싹쓸이하라고 선동했다. 체코의 '혁명 수비대는 스트라호프(Strahoⅴ) 축구 경기장에 모여있는
만 명 이상의 독일 민 간인들에게 순전히 재미로 기괸꿍을 난사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천 명의 독일인
피난민들이 거기서 이들의 재미를 위해 죽었다. 또 1945년 7월 31일 주
Moeller, War
Stories: The Search for a Usable Past in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1); Herf, Divided Memory (1997) 외.
18) Ian
Buruma, Year Zero: A History of 7945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13), PP.
94-95, 157.
데텐란트의 작은 도시 우스티(Usti)의
무장대는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독 일 피난민들을강물로 던져 버리고 총을 난사해 50여 명을 죽였다. 19) 동그r럽에서0 독일
피난민들이 겪은 이런 식의 크고 작은 기억은 연합국 공군의 폭격보다 훨씬 생생하고 아팠다. 폭탄은 얼굴이
없었지만, 자신을 강간한 소련군 병사나 동유럽 가해자의 얼굴은 또렷이 기억할수 있었다. 제국주의 연합국 공군의 폭격에 대한 동독의 기억이 추성卜적이었다면, 사회주의
동유럽에서 고통받은 서독 피난민들의 기억은 훨씬 구체적이었다.
냉전 체제의 반공주의 또한 공산주의지들의 야만적
폭력을 강조하는 데 일조 했다. '실향민 동uY(Bund der Vertriebenen,
BdV)을 결성한 독일의 강제 추 방 희생자들은 이에 조응하여 자신들을 해치고 쫓아낸 소련, 폴란드, 체코 등 동 유럽 국기들의 사괴를 요구했다. 동독에서는 동유럽의
사회주의 형제국기를 가 해자로 기억하는 것은 금기였으므로, 강제추방에 대한 기억은 온전히 서독의 몫
이었다. 1,200민에 이르는 추방자 중 약 750만 명이
서독에 터전을 잡은 것은 우 연이 아니었다. 피난 도중 목숨을 잃은 약 200만 명을 제외하면, 70% 이상이 서 독에 정착한 것이다. 서독으로 이주한 이들은 대개 독일 가톨릭교회와 돈독한 관 계를 맺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이들은 보수당인 '기독교 민주당'(CDU) 혹은 '기 독교 사회당'(CSU)의 주요한 지지세력이었다. '실향민 동맹은 68혁명 이후 부 모세대의 과거에 비판적 성향을
지닌 자식 세대에 의해 주변화되었지만, 주교 단 편지가 발표된
1965년에는 결코 무시 못 할 중요한 정치세력이었다. 종전 이 래 서독 교회가 동유럽의
독일인 추방을 비판하고『독일 강제추방 실향민 헌장』
(Charta
der deutschen Heimatvertriebenen, 1950 을 지지한 것도 이러 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전후 서독의 아데나워 행정부 교통 장관 제봄대arms-Christoph Seebohm)은
한 걸음 더 나아가독일 피난민들이 겪은 고통을 홀로 구八E의 유
19)Bill Niven, "Introduction: German Victimhood at the Turn of
the Millenium, in Germans as Victims, P. 18.
대인 희생자들과 동일시함으로써 역사의 탈맥락회를 시도했다.『헌장과 서명한 지도급 인사 30명 중 20명이 전직 SS 간부거나
나치 당원이었으며, 실무진 200 여 명 중에도 나치 당원
출신이 3분의 1을 넘었다.
이들을 홀로구八E 희생자들 과 같은 반열에 놓는다는 것은 나치의 역시를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서독 정부 의 외교 방침 또한 동프로이센 실향민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Recht auf Heimat)를 인정하는 것이었다.20) 그러나
이들의 귀향 권리에 대한 폴란드인들 의 이해를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폴란드인들이 볼 때, 이들 나치 실향민 들은 희생자이기 이전에 가해자였던 것이다. 반면, 횡급히 패주하는독일 피난민 들에게 복수의 무기를 휘두른 폴란드와 체코의 무장 인민들은 가해자이기 이전 에 희생자였다.
'집합적 죄의식에 갇혀 가해자 집단에 속한 타자의 고통과 희생을 부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해와 희생의 중수구조를 무시한 채 모든 희생자가 다 같이 무 고한 희생자였다는 주장도 정당하지는 않다. 희생은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 그 렇다고 해서 희생자들을 줄 세워서
서열화히는 것도 온당하지는 않다. 희생을 당 한 본인이나 가족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희생이 다른 누구의
희생 못지않게 고통 스럽고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 지원에 머물러있는 희생의 기억이 사 회적
기억으로 전환되면, 그 희생의 역사적 결은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사 회적 기억의 장으로 진입한 개개인들의 희생을 논의할 때 역사적 맥락화가 요구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가) 희생자들을 서열화하는 것도 기억의 폭력이지만, 모든
20)Moeller, War Stories•••, PP. 32-35; Norbert F. Pötzl,
"Versöhnen Oder Verhöhnen: Dauerstreit um die Stiftung ”Flucht,
Vertreibung, Versöhnung, in Annette Grossbongardt et. 현.
eds., Die Deutschen i끄2 Osten Europas: Eroberer,
Siedler, Vertriebene (München: Deutsche Verlags—Anstalt, 2011), PP. 240-41.
21)Jie—Hyun Lim, "Victimhood Nationalism in Contested Memories—
National Mourning and Global Accountability” in Aleida Assmann and Sebastian
Conrad eds, Memory in a Global Age: Discourses, Practices and Trajectories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2010), PP. 138-162.
희생의 기억을 역사적 맥락에서 떼어놓고 추상적 고통으로 획일화하는 것도
폭 력이다. 피해자의 고통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그 고통의 서열화와 획일회를 경계 해야 하는 기 억의
장은 불편하고 모순된 긴장으로 기득 차 있다.
고향에서 쫓겨난 동프로이센의 실향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들의 희생이 폴란드인의 희생과 등-등하디는 주장이
성립되는 것은 아 니다. 독일의 희생과폴란드의 희생은 비대칭적인 것이었다. 희생자 개개인의 관 점에서는 모두 끔찍한 경험이지만, 폴란드, 독일 등의 국가나 민족 집단으로 분 류해보면, 희생의 비대칭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치에 희생당한 600만 폴란 드인과
소련 적군과 폴란드 등의 복수에 희생된 200만 독일인의 희생을 등치시 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희생의 비대칭성을 지적한다고 해서, 독일 추방지들의
희생을 부정하는 게 정당회될 수는 없다. 희생의 비대칭성은 종종 더 큰 희생자가 작은 희생자의 희생을
부정하고 희생자의 지위를 독점하는 논리적 근거로 작동하면서, 화해의 발목을 잡는다. 자신의 가해 사실과 상대방의 희생을 부정하면, 가해자가 회개할 이유도
희생자의 용서를 구할 이유도 없다. 용서가 없으면 화해도 없다.
자신들의 희생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저지른 독일의 죄를 대속했디는 독일 피난민들의 입장은 역사적 화해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 아도,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를 용서한디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회개가 전제되지 않는 용서는 범죄 행위를 저지를 당시 가해자의 태도가 바뀌지 않아 도 좋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폴란드-서독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 는 이들 동프로이센에서
강제추방된 독일 실향민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풀어야 했다. 사실상 아데나워 정부의 속마음은 폴란드와의
관계회복이 피난민들의 권 리보다 더 중요하디는 것이었다. 폴란드 인민공회국의 고무가 정권도 오데르나이쎄
국경에 대한 안전보장과 피해 보상금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 성장의 필요 때문에 서독과의 역사적 화해 및 국교 수립은 절실했다. 서독 정부가 오데르나이쎄 국경선만 보장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호혜
협정이 기능하디는 게 고무가
의 입장이었다.끄) 그러나 아데나워는 피난민 유권자들의 표를 계산해야 했고, 바 르샤바의
고무카는 독일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공포를 정치적으로 도구화하려는 우,혹을 쉽게 떨구지 못했다. 아데나워나 고무가나 '역사의 인질이기는 마찬가지
111. 오데르-나이쎄 국경 문제와 국경을 넘는 역사 인식
폴란드와 서독의 역사적 화해를 가로막는 교착상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가 해자와 희생자를
따지고, 누가 더 큰 희생자였고, 따라서 누가 먼저 사과하고
용 서를 구해야 한다는 식의 농속적 계산을 넘어서는 화해의 새로운 메타 윤리가 필 요했다. 양국의 가톨릭교회가
초국가적 기억의 주체로서 그 역할을 자임했다. 제 2차 바티간
공의회가 열린 1962년부터 폴란드와 서독의 가톨릭 대회는 이미 시 작되었다. 1962년 2월 공의회 참가자 로마에 도작한폴란드의 비쉰스카 추기경
은 독일의 되프M(Julius Döpfner) 추기경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두 추기경
22)폴란드 통합노동자당 서기장 고무가의 옆에서 당의 대 서독정책을 입안하는 데 결정 적인 역할을 했던 라코프스71(MieczsIaw Rakowski)의 회고에 따르면, 공식 석상에
서 표출된 고무가의 반독 감정은 형식적인 데 불과했다. 고무-기는
내심으로 서독을 잠 재적 파트너로 간주했으며, 서독의 강력한 경제적 후견 아래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어
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해 동독의 동지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폴란드 주교단의 편지에 대한 당의
대대적 비난 캠페인과 고무가의 비판은 반독 감정보다는 오히려 폴 란드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비쉰스기 추기경과 고무가의 경쟁 관계가 더 크게 작용
했다는 것이됴卜. "Gespräch mit Mieczslaw Rakowski: Wyszyfiski
und Gomulka Kämpften um die Herrschaft über Die Seelen, in Basil Kerski, Thomas
Kycia, and Robert Zurek eds., Wir Vergeben und Bitten um Vergebung:
Der Briefwechsel der polnischen und deutschen Bischöfe von 7965 und seine
Wirkung (Osnabruck: fibre, 2006), PP. 143, 145. 비쉰스기 추기경과 회담 을 마친 후 “이 나리에서 권력은 도대체 누구 손에 있는가?” 하고 고무가가 측근들에게
불평했다는 일회는 1960년대 폴란드 사회에서 널리 회자된 이야기였다.
23) Gajewski, "Confrontation And Cooperation•••, P. 4.
은 바티간 공의회 특별 위원회의 서기로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되 프니 추기경은 실향민들의 고통을 나치의 범죄 행위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상 대화하는 독일 가톨릭의 리버럴한
전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이 자리에서 되 프니 추기경은 서독 고위층의 내부 정보를 비쉰스카 추기경에게
흘렸다. 아데나 워 수상은 오데르-나이쎄 국경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만, 실향민들의 정서를 고 려하여 공개적으로 밝히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아데나워 서독 정부 는 폴란드와의 관계 정상회에 더 큰 관심이 있다는 게 되프너 추기경의 전언이 었다 24)
두 추기경의 화기애애한 친목괴는 별도로, 독일 주교단은 아우슈비츠에서 순 교한 폴란드 신부
콜베(Maksymilian Kolbe) 의 '시상을 독일-폴란드 교회 공 동으로 교황청에 요청하자고 제안했다. 1964년에는
독일 가톨릭 평화단체 '그리 스도 평화 우동Pax-Christi-Bewegung'의
멤버들이 폴란드를 방문했다. 이 단체는 폴란드와의 화해가 독일 가톨릭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훗날 존 폴(Jan Pawel) 11세 교횡의 되는 크리쿠프 대주교
카를 보이티외(Karol Wojtyla)가 이들 일행을 아우슈비츠 정문에서 반갑게 맞이했다. 또 1965년 브로츠와프에서 열린 종전 20주년 기념식의 강론에서 브로츠와프 대주교 코미넥은 폴란드 주민 들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쫓겨난 독일인들에게도
축복의 메시지를 건네고, 폴란 드뚁일인들의 상호 이해와 평회를 촉-구했다. '구르니 실롱스크/오버 슐레지엔'
출신으로 독일과 폴란드의 하이브리드 문회에 익숙한 코미넥 대주교의 강론은 공통의 문회유신을 시사함으로써 슐레지엔이 '원래 폴란드 땅이었다는 당시 폴 란드의 민족주의적 역사 이해외는 다른 관점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들어 대화의 기운은 이처럼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65년 10월 14일 '독일 개신교 연합(Evangelische
Kirche in
24)Kosicki, "Caritas•••, P. 222; Czaczkowska, "Rola
Kardynala Stefana Wyszyfiskiego•••, PP. 194-95.
25)Basil Kerski, Thomas Kycia and Robert Zurek, "Einleitung,”
in Wir Vergeben und Bitten Um Vergebung•••, PP. 17-22.
Deutschland,
EKD)'은 훗날『동방백서』(Ostdenkschrift)라 알려지게 된 중 요한 문서를
공표했다. 전후 20주년을 맞아 공표된 이 문건은 제2차 세계대전 이 후 오데르-나이쎄 국경선을 인정함으로써 폴란드에 할양된
독일 영토의 주권 이 폴란드에 있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폴란드와의 화해를 향한 첫발을 내딛었다. 『동방백서는
독일 실향민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나치 범죄 와의 역사적 관계를 맥락화함으로써, 폴란드
희생자와 독일 희생자들 시의에 상 호 이해의 물꼬를 텄다. 동프로이센 실향민들의 귀향 정서에 반해서
그들의 고향 에 대한 폴란드의 주권을 인정한 이 문서는 그야말로 전후 서독 사회의 '금가를 깨고 역사화해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 이정표가 되었다.26) 백서가 발표되자, 폴란
드에서는 리버럴 가톨릭 지식인 그룹인『즈낙』(Znak)에서 먼저 이 문건에 주목 했다. 당의 통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이들은 대화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믿었다. 『동방백서는
서독의 '복수론자'들이 폴란드의 '되찾은 땅인 서부영토를 다시 빼 앗으려고 한다는 폴란드 공산당의 민족주의적 반독 선전을 무효화시기는 효괴를
낳을 것이라 기대되었다.27 그러나 공산당의 반독 선전이 무화된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양국 간 불신
의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베를린 주재 폴란드군 감독관의 보고 서나 쾰른 주재 폴란드
무역 대표부의 보고는 '독일 개신교 연햅의『동방백서』에 대해 호의를 표하고 있어 흥미롭다. 서베를린 주재 폴란드군 감독관은 독일 실향 민 문제와독일窘-유럽
관계에 대한 '독일 개신교 연합'의 기자 회견에 대해 아무
런 비난 없이 담백하게 보고하고 있다.28) 또 쾰른 주재 폴란드 무역대표부는『동
26)Rainer Clos, "Ein Tabubruch: Die Ostdenkschrift der EKD *℃n
1965, September 17, 2015.
https://www.evangelisch.de/inhalte/124873/17—09—2015/
ekd—ostdenkschrift—1965—verstaendigung¯mit—p01en—kirche—und—p01itik (검 색일: 2020년 3월31일).
27)
Kosicki, "Caritas•••, PP.
229-30.
28)
“5 listopada 1965, szyfrogram
szefa Polskiej MiSJi WOJskowej w Berlinie Zachodnim 0 konferencJi prasowej w
sprawie Memorandum Wschodniego,
https://msz.gov.pl/resource/6d3747e9—f26a—4328—88aI -7641b59f2365 :JCR
방백서』와 관련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 기관지 편집장이 하이네만 박사(Dr. Heinemann)의
폴란드 초청 기능성을 타진했다는 접촉결괴를 보고하고 있다. 박사는 '독일
개신교 연합' 지도부의 일원인데,『동방백서』에 대한 폴란드
조야 의 반펑을 직접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하이네만 박사가 원래 '기독 교민주당'(CDU) 소속이었으나 서독의 재무장에 항의하여 기민당을
탈당해서 사민당에 입당했디는 개인 정보를 덧붙임으로써, 그의 초청에 긍정적인 쀼기 를 조성하고 있다.29) 또 본의 외신기자 클럽의 게르스텐마이Ol(Gerstenmeier/
Eugen Gerstenmaier) 초청 오초빠서 게르스텐마이어가 폴란드 대표부 관계 자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폴란드와 서독의 화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동 방백서』에 대한 폴란드의 반펑을 알기 위해 개인 자격으로 폴란드를
방문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디는 끄도 있다. 보고서는 바르샤바의 국제문제연구소' 를 초청 주체로 하면 어떻겠L는 건의를 조심스레 하고 있다.30) 독일 개신교의『동방백서는 폴란드의 권력기관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내부 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교회의 주교단 가운데 백서의 의미에 처음으로 주 목한 것은 브로츠와프(브레슬리우)의 대주교 코미넥이었다.
브로츠와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경선 조정과정에서 폴란드에 할양된 전전의 독일 영토였다. 폴 란드에서 '수복된 땅'(ziemia
odzyskana)이라 부르는 전형적인 변경지역으로, 독일푵란드의 문화가 뒤섞인 하이브리드
문회공간이었다. 브로츠와프에서 태
(검색일: 2020년 3월 31 일).
29)
“12 listopada 1965, szyfrogram
szefa Przedstawicielstwa Handlowego w Kolonii w sprawie Memorandum
Wschodniego,” https://msz.gov.pl/
resource/fd5e75f7—f61e—4765—b6c2—a002caba7fec:JCR (검색일:
2020년 3월 31일).
30)
16 listopada 1965, szyfrogram
szefa Przedstawicielstwa Handlowego w Kolonii 0 sytuacji PO ogloszeniu
Memorandum Wschodniego," https://msz.
gov.pl/resource/a7ca81dd—ab4c—40c6—a0e5—3daf730df49f:JCR (검색일: 2020 년 3월 31 일). 전문에 나타난 Gerstenmeier는 기민당 소속으로 당시 서독의
국회의장 이 었던 Eugen Gerstenmaier라고 판단된다.
어나고 자라 독일어와 독일문회에 정통했던 코미넥 대주교는 훗날 독일 개신교 의『동방백서』가
주교단의 사목 서신을 쓰게 된 계기였다고 고백한 바도 있다.31) 『동방백서』의 기장 큰 의미는 오데르-나이쎄를 잇는 독일푵란드 국경을 현실 화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로 할양된 '수복된 땅에 대한 폴란드의 주권
을 인정했디는 점이다. 당서기장 고무가조차 서독이 오데르-나이쎄
신 국경선 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폴란드-서독의 관계 정상화와 화해의 문제가 없다고 생 각했다는 점에서,『동방백서』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소련의 간섭에
맞서왔던 폴란드의 민족공신주의자인 고무가의 입장에서 폴란드-서독 화해는 중부 유럽의 거중 조정자로서의
소련의 간섭과 개입을 막는 선제조치이 기도 했다.32) 독일 개신교의 진보 진영은 이미 1961/62년 서독 의회에 보낸 외교와 관련 된『튀빙겐 백서』(Tübinger
Memorandum)에서 서독의 핵무장 계획에 반대 하고 오데르-나이쎄강 경계를 전후 독일과
폴란드의 공식적인 국경선으로 인정 할 것을 서독 정부에 촉구한 바 있다. 1961년 11월 6일 여덟 명의 저명한 개신교 학자들과 과학지들이 서명하여
몇몇 의회 의원들에게 보낸 이 문서는 1962년 2 월 일반에게
공개되어 서독 사회에서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백서의 내용이 공 개되자 서독 거주 실향민들은『튀빙겐
백서를 신랄히 비난했다. 이 문건의 저자 들이 동독과 동유럽 인민들의 자결권을 무시하고 부정과 폭력을
찬양하며 공산 주의를 승인한다는 것이 비난의 요지였다. 백서가 던진 사회적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심지어는 사회민주당조차 '조국없는 놈들'(vaterlandslose Gesellen)이 라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이 문건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못했다. 동방정책의 입 안자였던 브란트(Billy Brandt)조차 당의
공식 입장이 이 백서에 기초해서는 안
31)Gerhard Besier
(Dresden) und Katarzyna Stoklosa (Sønderborg), 'Kirchliches Versöhnungshandeln
im Interesse des deutsch—polnischen Verhältnisses (1962 - 1990),” KZG/CCH 24
(2011), P. 303. 32) "Gespräch mit Mieczslaw Rakowski, ” PP. 143, 145.
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33)
'독일 개신교 연합의『동방백서』와 폴란드 주교단의 사목 편지가 잇달아
발표 된 1965년 10월~11월의
쀼기가 1962년과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가운데 독일의 가해지들을 용서하고 또 가해지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폴란 드 주교단의 편지는 답답한 교착상태를 깨트리고 일거에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 는 메가톤급 핵폭탄이었다. 독일푵란드 문화가 뒤섞인 변경에서 자란 코미넥 대주교의 개인사적 경험은
주교단 편지가 폴란드의 지국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폴란드 주교단의 사목 서신은 우선
그 역사 용어에서부터 폴란드 공산당의 편협한 민족-공산주의적 역사해석과 크게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 이 후 독일로부터 할양받은 영토에 대해 '원래 폴란드 땅(Ur-polnisch),' '수복된 영토(ziemia odzyskana)' 같은 폴란드 중심주의적인 표현이 배제되었다.
대신 에 '포츠담 서부영토(Potsdamer
Westgebiete) 같은 중립적 용어를 시용하고, 독일 실향민들의 아픔에 충분히 공감한디는
취지에서 서독의 기억문화에서 일 반적인 '피난민'(Flüchtlinge),
'강제추방 실향민(Vertriebene)' 등의 용어를 사 용했다.罌) 주교단 편지에서 시용한 서독의 이 용어들은 재정착(민)을 뜻하는 동 독의
'Umsiedlung/Umsiedler'나 폴란드의
'przesiedlenie/przsiedlonych' 와 정치적 의미가 달랐다. 서독의
용어들이 실향민의 고통과 아픔-을 담고 있다 면, 사회주의
동독과 폴란드의 용어들은 고통의 역사가 지위진 중립적인 뉘앙스 였다. 미세한 것처럼 보이는 이 용례의
차이는 나중에 주교단 편지가 폴란드 공 산당의 비난에 시달리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1966년 5월 '야스나 구eF(Jasna Göra)에서 열릴 예정인 폴란드의 가톨릭
수용 천 주년 기넘행시에 독일 주교단을 초청하는 문구로 시작하는 편지는, '오 토 대제' 덕분에 폴란드가 그리스 정교가 아닌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였다고 감사
33)
Besier und Stoklosa, "Kirchliches
Versöhnungshandeln•••,” P. 297.
34)
"Hirtenbrief der polnischen Bischöfe an ihre deutschen
Amtsbrüder vom 18. November 1965”; German Polish Dialogue: Letters Of the
Polish and German Bishops•••, PP. 15-16.
의 뜻-을 표한다. 또 중세 이래 독일 상인, 건축가,
예술가, 이주민들이 서구 문화 와 폴란드를 잇는 문화적 가교였으며, 사도와 성인들 대부분이 독일을 비롯한 서 구에서 왔다는 역사적 사실도 담담히 인정한다. 독일의 막데부르크 법이 폴란드 도시의 공기를 자유롭게 하고 자유도시의 성장을 기여했다고 말하는 데도 스스 럼이
없다. 독일 상인, 예술가,
건축가, 이주지들이 폴란드 민족문화의 발달에 미 친 영향이나 독일푵란드 시의의 문화와 예술의
교류를 민족적 우월감이나 열 등감 없이 묘사했다.35) 로마 가톨릭에 기반한 폴란드 문호는 그리스 정교의
동유 럽보다는 서유럽에 가깝다는 역사적 암시가 그 행간에는 숨어 있다. 독일과 폴란 드 시의의 민족적
적대감보다는 가톨릭과 유럽이라는 공통의 가치로 묶인 하나 의 '우라리는 개념이 강했다. 동쪽 소련에서 강요된 공산주의는 타자라는 암묵적 인 메시지가 읽혀지기도 한다.36)
한편 역사 방법론의 관점에서 보아도, 편지에 담겨있는 역사관은 매우 흥 미롭다. 편지는 폴란드 문회에 대한 독일의 영향을 스스럼없이 인정하는 것처 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영향이 마치 독일의 식민주의 적 팽창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한 독일의 식민주의 사괸이나 폴란드 역사적
강 역 내에서 외국의 흔적조차 일체 인정하지 않는 민족주의 사관의 '영토순결주 의(autochthonousism)'와는 거리가 멀다.37) 지구사, 트랜스내서널 역사, 변 경사(border
history), 얽혀있는 역사(entangled history), 중접된 역사 (overlapping history) 등의 새로운 역사학 방법론이 등장하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일국시(national history)의 서술과 방법론이 압도적으로
지배
35)Ibid., PP. 7,
9, 10-11.
36)Wigura,
"Alternative Historical Narrative,” P. 407.
37)중동부유럽의 민족사적
서술과 그 대안에 대해서는 Jan M. Piskorski ed.,
Historiographical
Approaches to Medieval Colonization Of East Central Europe; Frank Hadler and
Mathias Mesenhoeller eds., Vergangene Grösse und Ohnmacht in Ostmitteleuropa:
Repräsentationen imperialer Erfahrung in der Historiographie seit 7978
(Leipzig: Akademische Verlagsanstalt, 2007) 등을 보라.
적이었던 1965년의 역사서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편지의 역사관은 놀랍도 록 진취적이다. 폴란드와 독일의 미술사기들이
바르샤바와 베를린, 드레스던1 등 지에서 '공동의 유한이라는 전시를 처음 가진 게 겨우 2000년의 일이었으니, 시 대에 앞선 편지의 선도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38) 편지에
따르면, 서유럽의 가톨릭 문화와 폴란드를 잇는 독일의 가교 역할은 오늘날의 식민주의외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형제 민족을 탐하는 대신 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소중한 자산인 문회를 전달하는 가톨릭 성인들"은 기독교의 진 정한 선교 소명과 식민주의 시의에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1414년 콘스탄츠 공 의회에서 비기독교들의 인권을 강조하고 총과 칼 대신 종교적 관용으로 선교해 야 한다고
역설했던 야기에워 대학 총장 브워트코비츠(Pawel Wlodkowic)를 대표적인 예로 적시하면서, 편지는 불과 칼로 이교도들을 개종하려고 했던 투튼 기사단을 단호하게 비판한다.39)
그 결과 튜튼 기사단은 유럽의 기독교에는 끔찍 한 짐이자, 폴란드인들에게는 모욕적인 악몽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폴란드 주교단 편지는 투튼 기사단에 대해 사뭇 비판적이다. 호전적 식민주 의의 욕망이 기독교의 평화로운 선교를 덮어버린 투튼 기사단의 전통이 훗날 프 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비스마르크-히틀러로 이어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는 강제수용소의 시체소각장 굴뚝이 밤낮으로
연기를 뿜어대는 죽음의 땅 으로 전락했디는 것이다. 유대계를 포함한
600만 폴란드인 희생자들 가운데는 2
38)Klaus Ziemer, "Introduction,” in Klaus Ziemer ed., Memory
and Politics of Cultural Heritage in Poland and Germany (Warsaw: Cardinal
Stefan Wyszyfiski University in Warsaw, 2015), p. 8.
39)
기사단은 폴란드어로는 “십자기사단(Zakon Krzyiacki)” 독일어로는 “독일기사 단(Deutscher Orden)이라 약칭한다. 라틴어로는 ”튜튼기사단(Ordo Theutonici) 이라 약칭하지만, "Ordo fratrum domus Sanctae Mariae Teutonicorum
lerosolimitanorum"이 라틴어 정식 명칭이다. 이 글에서는 라틴어
약칭을 따랐다.
40)
"Hirtenbrief der
polnischen Bischöfe an ihre deutschen Amtsbrüder vom 18. November 1965”; German
Polish Dialogue: Letters Of the Polish and German Bishops•••, PP. 13-14.
천 명의 사제와 5명의 주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폴란드 전체 가톨릭 사제의 25% 를 학살한 나치의 지배는 기독교의
평화적 선교 전통이 잔인한 식민주의적 통치 로 타락했음을 의미했다. 한 예로 전쟁 발발 초기, 해움노(Chelmno/Kulm) 주 교구 한곳에서만 전체 사제의 47%인 278명의 신부가 즉결 처형되었다. 이런 예 는 무수히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종말론적 파괴는 부서진 건물 잔해 와 파편, 가난과 질병, 눈물과 죽음만을 폴란드에 남겼다. 폴란드인들이 서부의 기장 가까운
이웃인 독일을 불신하고 오데르-나이쎄 국경선과 안전보장을 그토 록 절실히 요청하는 이위를 독일의 형제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편 지는 기대했다.41) 편지는 이처럼 전후 확정된 오데르-나이쎄 강을 경계로 하는 폴란드뚁 일 국경을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는 전제를 분명히 했다. 승전국의 일원이라고 는 하지만, 나치의 대근6박살과 의도적 파괴로 아주 피폐해진 채 종전을 맞이 한 폴란드의 입장에서는 새로 편입된 실롱스크와 포모제 등의
서부영토에 대 한 요구는 절실한 생존의 요청이었다. 그것은 아리안을 위한 더 넓은 '생활공간' (Lebensraum)을 요구하며 동유럽을 침공한 나치의
식민주의적 요구외는 전적 으로 다르다는 게 편지의 요지였다. 독일 실향민들의 희생과 폴란드인의 희생
사 이에 비대칭성을 적시하고, 유대인 홀로 구八E 희생자와
독일인 희생자를 같은 위치에 놓는 역사적 탈 맥락회를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편지는 또
한, '그대들의 자유 우리들의 지유리는 슬로건 아래 자기 민족의 해방뿐만 아니 라 이웃 민족의 해방을
꿈꾸었던 19세기 폴란드 민족해방우동의 전통을 호출하 여 폴란드의 안전과 평회는 독일의 안전과 평회를
불러온다고 암시했다. 폴란드 의 자유와독일의 지주는 같이 얽혀 있다는 것이었다.42) 주교단 편지에서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동프로이센에서 추방되거나
피난길
41)Ibid., PP. 14-15.
42) 이에 대해서는 임지현,『그대들의
자유, 우리들의 자우=폴란드 민족해방은동사』(서울: 아카넷, 2000).
에 올라야 했던 독일 실향민들의 고난이나 나치 치하에서 독일인들이 겪어야
했 던 '양심의 고통에 따듯한 공감을 보낸 것도 19세기적
전통의 맥락에서였다. 주 교단 편지는 또 '백장미' 단이나 히틀러의 암살을 시도한 독일의 반나치 레지스 탕스 우동에 경의를 표하며, 적지 않은 독일인들이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폴란 드 형제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고 지적했다.43) 공의회의 저쪽 벤치에 앉아 있는 독일 주교딘에 폴란드의 기독교 수용 천 주년 기념식에 초청장과 화해의
손을 내 밀면서, “그대에게 용서를 베풀며, 또 그대의 용서를
구한다(wⅳ••• gewähren Vergebung und bitten um Vergebung)"는
유명한 감동적 구절로 편지 는 끝을 맺고 있다.㈅ 이 구절은 폴란드 주교단이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
스(Quintus Horatius Flaccus)의 경구
'Veniam damus petimusque vicissim'?를 지용한 것으로, 이미 1963년 10월 17일
당시 교황 바요로 6세가교 회가 상쟁을 멈추고 세계교회의 통일을 촉-구하면서
인용한 바 있다. 또 분쟁 국 가나 지역의 사목지들이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의 물꼬를
트는 것은 3-4세기 로마제국 시대 이래 기독교의 전통으로 자리잡은 바 있다.45) 이렇게 보면, 가톨릭 역시에서 폴란드 주교단 편지의 형식이나
주장이 각별 히 파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부구하고, 1965년의
폴란드 주교단 편지 는 '화해의 아방가르드라는 평가도 부족할 정도로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편지 의 작성자들은 독일푵란드인들의 고통이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크기와 상관 없이 고용은 고통일 뿐이며, 정치적 의미가 다르다 해도 고통과 슬픔에 대해 이 야기하는 것 자체가 정의로운 일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었다.㈅ 자신들의 희생 을 절대화하여 폴란드인들을 가해자로 몰거나 혹은 홀로구八E 유대인
희생자
43)Ibid., P. 16.
44)Ibid., P. 18.
45) Gajewski,
"Confrontation And Cooperation•••, P. 10.
46)"Die polnische Gesellschaft war auf einen sholche Schritt
nicht vorarbeitet: Gespräch mit Tadeusz Mazowiecki,” in Wir Vergeben und Bitten
0&22 Vergebung•••, P. 101.
들과 등치시켰던 독일의 강제추방 실향민들의 태도와 비교하면, 폴란드의 주교 단 편지는 절제된 희생자의식과 더불어 훨씬 성숙한 화해와 용서의 윤리를 제시 한다.47)『디 벨트Die Welt』지가 썼듯이, 적지 않은 독일인들이 폴란드 주교단 편 지에서 감등-을 받은 것은
희생자인 폴란드가 처음으로 독일 실향민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이들에게 정의를 되돌려주려는 메시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희생의 비 대칭성을 근거로 독일인들의 희생을 부정하지 않고 그들의 고난에 따듯한 공감 을 표시한 것은 이렇게 독일 가해자 대 폴란드
희생자라는 '집합적 죄의식을 넘 어셨기에 기능했다.
2007년『요코 이야기』소동 당시 일본인 가해자 대 한국인 피해자라는 민족 적 구도에 갇혀서 일본인 '히기아게샤(引揚者)'의
희생 사실 자체를 단연코 부정 했던 21세기 한국의 기억문화와 비교할 때, 폴란드 주교단 편지의 진취성은 더 두드러진다. 일본인 희생자에 대한
한국사회의 거부감은 세계 유일의 원지폭탄 희생자라는 구실로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지국의 전쟁 범죄와
가해 사실을 상쇄하려는 일본의 자기 변호적 기억문회에 대한 반발로 이해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원폭 피폭자나 만주의 피난민, 시베리아 전쟁표로 등 일본인의 희생 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희생의 비대칭성이 더 큰 희생을 강 조하기 위해 작은 희생을 부정하거나 반박하는 논거로 작동하면, 그것은 '희생의
47)50여 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독일 '추방자 협회가 '절멸수용소', '강제노동', '시체소각 장과 같은 홀로코스트의 수시를 빌어 자기네
고통의 역시를 재현하는 양상을 보라 Stefan Berger, "On Taboos, Traumas
and Other Myths: Why the Debate about German Victims of the Second World War is
not a Historians Controversy,” ⅱ1 Niven ed., Germans as Victims, PP. 214, 220.
48) 이에 대해서는
윤상인,「수난담의 유혹」『비평』15호 (2007), PP. 177-20% James
J. Orr, The
Victim as Hero: Ideologies Of Peace and National Identity in Postwar Japan 대0요이uⅲ: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1);
John W. Dower, "An Aptitude for Being Unloved: war and memory in Japan in:
Omer Bartov et.
현. eds. Crimes of War: Guilt and Denial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The New Press, 2002), PP. 217-41 등을 보라.
제로섬게임'으로 귀결된다.49)
희생자의식의 경쟁을 통해 자기 집단의 고통과 회 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자의 불행과 희생을 부정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지배적인 기억문회에서 '화해는 이방인일 뿐이다.
IV. 초국가적 화해와 용서의 윤리
초국가적 화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폴란드
주교단의 사목 서신이 갖는 의미 는 기독교적 용서의 윤리를 통해 교착상태에 빠진 폴란드뚁일의 역사적 화해 를 시도했디는 점이다. 전통 신학에서는 신이 인간을 용서하는 수직적 용서가 지 배적이며, 따라서
화해도 신과 인간 시의의 수직적 화해가 중심이었다. 수직적 화해를 넘어 인간과 인간 간의 수평적 화해는 WCC의 에큐메니칼 신학이 주도 했다. 세상 속에 있는 모든 피조물
간의 평화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신학의 경향으로 볼 때, 인간과 인간 시의의 수평적 화해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복음주의 교회들의 참여로 WCC가
보수화되면서 수평적 화해의 열기는 식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살아있는 아젠다이다.
WCC외는 다른 한편으로 로잔 우동내에서도
'수평적 화해에 대한 관심은 높 아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9/11 테러,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 유고 내전, 발간의 인종청소, 르완다 제노사이드 등 인종, 민족,
종족 간의 갈등이 격화되는 현실을 더 이상 무시할수 없었던 것이다. 로잔운동은 종족 간
폭력의 실례로 인 종주의, 혹인 노예제, 홀로구八E, 인종청소,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등을 열거하 고, 기독교도들에게 화해의 건설적 참여자가 될 것을 촉-구했다. '가해자를 용서
49)
Michael Rothberg, Multidirectional Memory: Remembering the
Holocaust in the Age Of Decolonization (Stand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9), PP. 3, 9, 11 and passim.
50)
김은수,「선교과제로서의 화해와 치유」『선교신학』21집 (2009); 안승오,「에큐메니칼 화 해 개념 이해」『신학과 목회』45집 (2016).
하고 타인을 위해 불의에 도전하기,' '갈등의 상대편인 이웃을 환대하고 화해를 츄구하기,' '파괴나
복수보다는 고난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등으로 구성된 '화해의 생활양식'을 기독교적 실천의 한 방식으로 강조했다.51) 그러나 이 역시 실천보다는 수사의 영역에 머무르는 측면이 강했다.
가세기의 진보적 기독교 우동에서도 수평적 화해의 길이 여전히 험난한 현 실과 마주하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용서를 구한 1965년 폴란드 주교단의 사 목 서신이 얼마나 시대를 앞선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 세속적 통념을 전복시 킨 이 과감한 용서의 윤리는 저질러진 악과 악을 행한 죄인을 구분함으로써
가 능했다. 잘못을 저지른 주체와 벌을 받아야 하는 두 개의 주체로 죄인이 분리되 자, 악은 응징하되 악을 저지른 인간을 용서하는 것이 기능해졌다. 리코]르(Paul Ricoeur)의 논리를 빌면, 벌을 받아야 하는 주체의 운명은 신의 자비에 맡기되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용서를 통해 폴란드인들은 독 일에 대한 복수의 욕망을 떨쳐버림으로써 또 다른 악을 저지르는 위험에서 벗어
났다고) 맹아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포스트콜로니일적인 문제의식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폴란드 주교단의 편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해자-피해자의
기억을 폴 란드와 독일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서 구출하여, 역사적
화해와 기독교적 용 서의 길로 인도하겠디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죄인이
'회개를 전제로 신에게 용서 를 구하고 신은 회개한 죄인을 용서함으로써 신과 인간이 화해하는 수직적 화해 와 달리 인간과 인간 시의의
수평적 화해는 더 유연할수 있었다. 인간과 인간 사 이의 화해는, 회개가
반드시 용서의 전제가 되지 않아도 용서를 먼저 베품으로써 회개를 이끌어내는 역순의 화해가 기능한 것이다.53) 폴란드
주교단이 독일인들
51)
박보경,「로잔은동에 나타나는 화해로서의 선교」『선교신학』38집 (2015).
52)Kosicki,
"Caritas•••, P. 21% Wigura, "Alternative Historical Narrative, P.
404.
53)Urszula Pekala. "The Abuse Of Forgiveness in Dealing with
Legacies of Violence, in Tim McKenry and Charlotte Bruun Thingholm eds.
의 회개와 자책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용서를 저질러버린 것은 독일인들이
그 용 서의 도덕적 압력아래 참회와 사과의 길로 나아가 폴란드인들에게 용서를 구하 게 한다는 참신한 역발상이 그 밑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푵란드의 역사적 화해를 위한 폴란드 주교단의 참신한 역발상 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편지 수신자인 독일 주교단의 대응이 중요했다. 화 해와 용서의 행위 자체가 이미 일국적 자원을 넘어
초국가적 행위였던 것이다. 용서의 대상인 가해자 집단이 피해자가 받아들일 만큼 충분한 회개의 의지를
보 이지 않을 때, 피해자가 베푼 용서의 의의는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폴 란드인에 대한 독일인들의 인종적 • 민족적 편견이 아직 강했다. 가해자인 독일 인들이 충분히 회개하고 속죄하고 있지 않은 상횡에서, 폴란드
주교단이 독일인 들을 용서하고 더구나 그들의 용서를 빈다면 평범한 세속의 폴란드인들에게 그 것은 용서의 남용이라고 느껴졌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독일에 대해 등-등하다고
느끼거나 살짝 문명적 우월감을 가졌던 프랑스의 용서와 화해는 폴란드보다 더 쉬웠다.㈚ 불행히도 독일
주교단의 답서는, 폴란드 주교들이 용서를 남용했디는 인상을 줄 만큼 빈약한 것이었다. 답서는 서두에서 독일인들이 독일 민족의 이름으로 폴 란드 민족에게 가한 테러를 인정했지만, 폴란드 주교단이 독일인들의 고통을 언 급한 것에 감사하면서 훨씬 많은 분량을 힐에해 강제추방된 독일 실향민들의
고 통에 대해 쓰고 있다. 또 동프로이센의 독일인 이주민들은중세 이래 정복자로서 가 아니라 그 지역
슬라브 통치지들의 초청으로 건너가 올바르게 실았으프로, 침
Forgiveness:
Philosophy, Psychology and the Arts, (Oxfordshire: Inter— Disciplinary Press,
2013), p. 78.
54) Urszula
Pekala, "Asymetrie p이ednania. P이ednanie niemiecko—polskie i
niemiecko—francuskie PO Il wojnie {wiatowej, in Aleksandra Chylewska— T611e
ed., Perspektywy dialogu: Studia na ternat niemiecko—polskich procesöw transferowych
w przestrzeni religijnej (Slubice: Collegium Polonicum, 2016), PP. 98-100.
략의 의도가 없는 이 독일인 실향민들의
고향에 대한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논지였다. 폴란드 정보부의 첩보에 따르면, 독일 주교단은 폴란드 주 교단에게 기사단과 비스마르크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바꾸어달라고 비공식 적으로 요청했다.55) 한편 역사해석의 차이는 중요하지만 부차적 문제였다. 기장 본질적인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데르-나이쎄 강을 따라 그어진
새로운 국경선을 인정하 느나 여부였다. 실향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강조한 독일 주교단의 답장
은 한 마디로 오데르-나이쎄 국경선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또
폴란드 주교단의 편지가 폴란드인과 독일인들 간에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수평적 화해 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독일
주교단은 신과 인간의 수직적 화해를 강조했다. 인 간의 모든 부당한 행위는 무엇보다 먼저 신에 대한
죄이므로 동료 인간보다 신에 게 먼저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이웃의 인간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56) 폴란드 주교단의 수평적 화해 요청에 대해 수직적 화해로 답함으로써, 독일 주교단은 역사 화해에 소극적 입장을 표명한 셈이었다. 에큐메니칼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답답할 정도로 보수적인 행보였다.
독일 주교단의 답신이 공개되자, 비신스키 추기경은 불만을 감추지 못했다. 독일의 되프너 추기경에게
보낸 사신에서, 비쉰스카 추기경은 개신교의『동방 백서斝다 한참 고답적인 독일 주교단의 답신에 대해 실망감을
여과 없이 드러 냈다. “독일 주교단의 답신은 너무 억제되고 유보적이었다"는 것이다.57) 독일 회 생지에 대해 침띡을 지기는 폴란드
사회의 금기를 과감하게 깨고 용서의 새로운
55)Gajewski,
"Confrontation And Cooperation•••, P. 11.
56)Die Antwort der deutschen Bischöfe an die polnischen Bischöfe *℃m
5. Dezember 1965, http://cdim.pl/1965—11—18—b0tschaft—der—P01nischen—
an—die—deutschen—bisch—fe,2942 (검색일: 2020년 3월 31 일); German
Polish Dialogue: Letters Of the Polish and German Bishops•••, PP. 22-24.
57)Kosicki, "Caritas•••, P. 223; Wigura, "Alternative
Historical Narrative,” P. 406.
도덕률을 제시한 폴란드 주교단의 편지에 비하면, 독일 주교단의 답신은 빈약하 기 짝의 없었다. 훗날 독일의 되프너
추기경은, 가톨릭이 다수인 실향민들에 대 한 고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면서도 “더 따듯하게 답할 수 있었다"며 후회했다. 서독인들 대다수가 폴란드와의 화해를 절실하게 느끼지 않았던 점도 있지만, 희생자의식에
젖어 있는 서독인들 다수는 폴란드의 죄가 독일의 죄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용서를 구한다는 폴란드 주교단 편지의 마지막 구 절을 폴란드인들이 드디어 자기 죄를 인정한 증표라고 생각했다. 만약 독일 가톨 릭교회가 오데르-나이쎄 국경선에 대한 폴란드의 입장을
승인하면, 7백만이 넘 는 실향민들의 지지를 잃고 가톨릭의 정치적 기반인 '기독교민주당'(CDU)이나 '기독교사회당'(CSU)과의 관계도 곤란해질 것이라는 정치적 고려도 한몫했다.58)
1968년에는 독일 가톨릭의 '벤스버그 그룹(Bensberger Kreis)도 독일 주 교단의 답신이 불충분했다고 비판했다.
개신교의『동방백서』처럼 오데르-나 이쎄 강 국경선을 확실히 인정하고 폴란드인들의 불안과
공포를 덜어주었어야 했다는 것이다.59) 바르토세프스기(Wladyslaw
Bartoszewski), 마조비에츠기 등 폴란드의 가톨릭 지식인들이『벤스버그 백서』발간을 반겼지만,
엎질러진 물 이었다. 오데르-나이쎄 국경선을
인정할 수 없다는 독일 주교단의 답신이 이미 폴란드인들의 역린을 건드린 후였다. 폴란드 내무부 정보국은
독일 주교단의 답 신을 신속히 번역해서 당 지도부에 넘겼고, 당의 선전 매체들은 독일어 원본 편 지를
자의적으로 번역 • 해석한 바탕 위에서 대대적인 반 가톨릭 캠페인을 전개
이들은 제국주의 정치기들, 보수적 실향민 단체 등 서독의 반푵란드 집단
58)Basil Kerski, Thomas Kycia and Robert Zurek, "Einleitung, in
Wir Vergeben und Bitten 0&22 Vergebung•••, PP. 34-41.
59) 젊은 신학 교수였던 라칭거(Joseph Ratzinger)를
포함한 160명의 가톨릭 지식인들이 서명한 백서는 뉘른베르크의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신동방정책이 토론되던
바로 그해에 발표됐다.『벤스비그 백서』가 사민당의 신동방정책과 결을 같이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더 구체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 폴란드 주교단의 편지를 기장
반기고 있다는 증거로 독일의 언론 보도들을 자 주 인용했다. 특히 독일의 보수 언론들은 사목 편지의
역사해석에 불만을 토로하 거나 폴란드 주교단이 오데르-나이쎄 국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자의적 해석까
지 낳았다. “고향에 대한 권리는 여전히 지속된다"는『디
벨트Die welt』의 머리 기사처럼, 독일 언론들의 자기중심적
보도 태도는 당의 반-가톨릭 선전에 힘을 보탰다.60) 독일
주교단은 자기네 국가의 이익을 옹호하는데, 폴란드 주교단은 거 꾸로라는 당의 선전이 먹혀들었다. 폴란드의 가톨릭 주교단은 민족적 이해를 서 독 제국주의지들에게 필아버린 민족배반자리는 악의적 비난이 빗발쳤다. 당 기 관지『트리부나 *Trybuna Ludu』는 폴란드와 서독
주교단이 독일 피난민을 홀로 구八E 희생자와 비유하고, 나치에게
야만적으로 살해당한 6백만 폴란드인 들의 희생과 독일 실향민의 고통을 동일시했다고 분노했다. 서독 실향민 협회 회 장 약쉬(Wenzel Jaksch)가 폴란드
주교단의 이 편지를 자신의 업적인 양 선전 하는 것을 보면, 서독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잘 보 여준다는 것이었다.61) 당의 선전 매체들은 추방자 콤플렉스도 없고 나치의 국수주의
전통과 결별 한 동 독 을 제쳐두고 서독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주교단
편지가 동독과 폴란드 인민공회국에서 공인된 역사 용어인 '재정 작민Umsiedler/przesiedleficy'
대신 서독 보수파의 용어인 '강제추방 실향민
Vertriebene/wygnancy?를 사통한 것도 문제였다. 동독의 'Urnsiedler?는 탈 정치화된 중립적 용어였던 반면, 서독의 Vertriebene'는 고향에서 쫓겨난 실 향민이리는 고통의 역시를 담은 용어였다. 당의 공식 입장에서는 편지의 '포츠
60) "The Polish Bishops,” Die Welt, December 4 1965; "The
Answer,” Hessische Allgemeine, December 7 1965 in German Polish Dialogue: Letters
Of the Polish and German Bishops•••, PP. 118, 121.
61)“In Regard To
The Message Of The Bishops,” Trybuna Ludu, December
12. 1965. in
German Polish Dialogue: Letters Of the Polish and German Bishops•••, PP. 47-48.
담 서부영토'리는 용어도 문제였다. 주교단 편지가 '포츠담 서부영토'의 불가침 성을 주장했다고는 하나 이미 '포츠담 서부영토'리는 용어 자체가 오염된 용어라 는 비판이 쇄도했다. 실롱스크와 포모제가 원래부터 폴란드 영토였음을 뜻하는 'ziemia
odzyskana(수복영토)' 대신 서독 제국주의지들과 역사 수정주의지들 의 용어를 썼다는
것이다.62) 당 공식기관의 비판과 별도로, 비쉰스카 추기경은
개인 명의의 항의 편지들 에 시달렸다. 주로 '수복영토'의 주민들이 보낸 이 편지들은 '폴란드 배반자, 개탄 스러운 자본주의 하수인이라고 추기경을 몰아갔다. “가해자 독일인들은
용서를 빌지 않는데, 왜 우리 주교들이 독일인들에게 용서를 구하느나'는
반감이 표출되 고 “추기경님은 폴란드인이 맞느나'는 도발적인
질문-들이 빗발쳤다. “추기경을 폴란드에서 추방하자"는 등의 구호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그래도 추기경은 흔
들리지 않았다. 맹렬한 비난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주교단의 편지야말로 “우리 기독교 정신의 빛나는 증거이자 1,000년이
넘는 가톨릭 역사의 성숙함의 표식"이리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63) 당의 정치적 비난은 대부분 의도적 곡해에 서 나온 것이 많고, 또
폴란드 인민공회국 국무장관의 공식편지에서 보듯이 영적 권력인 교회가 세속 권력인 국가의 외교 영역을 침범한 데 대한 반발의 측면이 컸다.㈚ 한편 폴란드 주교단이 사목 서신의 독일어 버전만 발표하고, 폴란드이
버전 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큰 실수였다. 폴란드 공산당의 선전 기괸에게 자의적 번
62)
"Declaration Of the PAX
Federation,” 87이70 Powszechna, December 29 1965;
"Letter From the President Of the Council Of Ministers Of the Peoples
Republic of Poland to the Bishops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March 5,
1966. in German Polish Dialogue: Letters Of the Polish and German Bishops•••,
PP. 55, 71, 73.
63)
Czaczkowska, "Rola
Kardynala Stefana Wyszyfiskiego•••, PP. 198-99.
64)
"Questions Of the Authors
Of the 'Message',” Zycie Warszawy January 14, 1966; "Letter From the
President Of the Council•••,” in German Polish Dialogue: Letters ofthe Polish
and German Bishops•••, PP. 61-62, 72-73.
역과 공격의 빌미를 준 셈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입장에서 정작 뼈저린 비판은, 가톨릭교회가 개개인
희생자들을 대변해서 가해지들을 용서할 권리가 있L는 물 음이었다. 아무도
가톨릭 주교들에게 폴란드 민족을 대표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 는 당의 정치적 비난도 일리가 있었다. 비기톨릭
폴란드인들까지 가톨릭 교회가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가톨릭 내부로 눈을 돌린다 해도, 아직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폴란드의 개개인 희생자들을 대신해서 회개할 준비가 되 어있지 않은 독일인들을
용서한다고 교회의 이름으로 선언한 것은 문제였다. 독 일의 가해지들에게 속죄 의지를 확인하고 폴란드의
희생자들에게 용서의 윤리 를 설득하는 과정이 생략되었던 것이다. 폴란드 주교단 편지가 독일과 폴란드
사 이에 초국가적 화해의 초석을 놓았지만, 용서를 남용했디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石
v. 비판과화해 사이에서
1995년 2월
25일 일본주교단은 세계 2차 대전 후 50주년을
기념하며 '평화 를 향한 결의'리는 주교단 문서를 채택했다. 이 성명은 “일본군은 조선 반도에서, 중국에서, 필리핀에서 그리고 다른 여러 지역에서 그곳 사람들의 삶을
짓밟고• •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무시하고 잔혹한 파괴 행위로 무기를 지니지 않은 여자, 어 린이를 포함한 무수한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또 사과했다. 가해 자인 일본인들에게는 '아시아인들에게 부과된
상처를 치유해야 할 책임이 있으 며, 그 책임은 전후 세대 일본인들도 이어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우일 주
65)Urszula Pekala. "The Abuse Of Forgiveness in Dealing with
Legacies Of Violence, P. 80.
66)1995年2月25日日本力卜니 ``2夕司敎國敎書『平和^7)決,意戰後五十年I:豸Eo(』
https://www.cbcj.cath01ic.jp/wp—content/uploads/2016/10/heiwa_ketsui—1 (검색일: 2020년 3일31일).
교의 평가대로, 1995년
성명에서 보여준 “일본주교단의 진심 어린 참회와 속죄 의 고백은 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교회 인에 먼저
용서와 화해의 여정을 기능하 게 한중요한 첫걸음이 되었다." 이 성명은 한• 일 주교단의 정례적 만남으로 이어져 1996년 제 1차 한일 주 교회의가 열려 '한•
일 교과서 문제"를 토론했다. 이후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의 교훈"(2003), 동아시아의
팔핵/탈원전'(2012) 등 예민한 쟁점들을 주교 회의 에서
다루면서, 한• 일간의 역사 화해와 평회를 위한 가톨릭교회의
역할은 점차 중요해졌다. 한• 일간의 역사 화해를 향한 여정에서
중요한 또 다른 문건은 2019 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발표된 '일본 가톨릭 정의와 평화협의회'의 성명 이었다. 협의회장 카츠야 타이지 주교의 명의로 발표된 이
담회는 '식민지 지배 역시에 대한 가해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자세와 이에 분노하는 피 해국, 한국인들의 마음 시의에 벌이진 틈'이 한일간의 화해를 가로막는 장애라고
지적했다.
성명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전쟁피해배싱에
관련된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점을 재확인하고, 일본 정부에 식민지지배자로서의 가해 책임을
인정할 것을 다시 한번 촉-구했다. 일본 기업이 비인도적
노동 착취 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 배상한 중국인 징펑공의 경우처럼 한국의 징펑공 들에게도 개인적으로 배상하는 것을 '정평협'의 공식 입장으로 명시한 것이다. 이 는 일본 제국의 비인도적 행위의 피해자에 대한 개인 배상의 역사적 •도의적
정 당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 담회는 아울러 일본에서 예정된 '평화의
소녀상 공립 미술관 전시가 해당 기관장의 혐오 발언과 더불어 취소된 것을 예로 들면서, 격 화되는 한일간의
갈등에 대한 일본 측의 책임을 준엄하게 묻고 있다.67) 일본 '정평협'의 성명에 대한 응답이라도 하듯, 한국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
67)日韓政府闋f.系7)和解t:向(十(7)余長談言舌(日本力卜니 발/夕正義&平和協議余) 2019.08.14.
https://www.cbcj.cath01ic.jp/2019/08/14/19330/ (검색일:
2020년 3 월31일).
장 배기현 주교는 “언어와 나라, 심지어 괸습마저 빼앗겼던 한민족에게 일본의 경제 제재는
새로운 폭력이며, 진정한 반성과 성찰을 외면한 처사"라고
지적하면 서도 “일본 주교회의 정의평화협의회의 초대에 형제적 사랑으로 일치하고 연대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참회와 정화를 한일간의 평회를 위한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다.㈅ 또 그에 앞서 2019년 3월에는
한국 주교회의가 3 • 1 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를 발표하여,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참여와 신사
참배를 권유하는 등 식민지 시대 가톨릭교회의 잘못에 대해 성찰과 반성의 뜻-을 표했다.69) 이에 대해 일본의 가톨릭 '정평협'은, 일본의 가톨릭교회도 식민지 시대 한국 가톨릭교회에 깊이 괸여했고
또 신도들에게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한 협력을 촉 구했으며, 메이지이래 일본의 침략정책이 한국전쟁과남쳑부딘에도
책임이 있다 는 성명으로 화답했다.70) 한일간의 역사적 화해가 교착상태에 빠진 현 상횡에서, 한국 가톨릭 주교 회의와 일본 가톨릭 '정평협'의 3 • 1우동 100주년
기념 담회는 제도로서의 교회에 대한 자기비판과 비판적 역사 이해가 잘 조화되고 있다는 점 에서 소중한문건이다. 또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대화 채널이 거의 작동하지 못하 는 현 상황에서, 화해와 평회를 위한 역사적 행위자로서
또 초국가적 기억 주체 로서 가톨릭교회의 역할은 한층 더 중요해졌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두 담화 모두 식민지 시대 과거에
대한 일본의 일방적 반성과 사과 지원을 넘어섰으면 하는 아쉬움도 크다. 가해자 일본의 회개와 반성, 사괴는 물 론 화해의 필요조건이지만, 필요충분조건까지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초국가적
68)주교회의 정평위원장 배기현 주교 “한일관계 새로운 질서 찾자" https:〃www.cpbc.
co.kr/CMS/news/view_b0dy.php?cid=760302&path=201908 (검색일: 2020년 3 월31일).
69)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3•1 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 http://www.cbck.or.kr/ Notice/13013764?page=3&gb=K1300 (검색일: 2020년 3월 31 일).
70)日本力卜니 ``2夕正義2平和協議余余長談言舌「3 • 15虫立運動1 0 0周年춘迎乏(」 https:〃www.cbcj.catholic.jp/2019/03/05/18627/
(검색일: 2020년 3월 31 일).
기억 주체로서의 가톨릭교회는 일본사회의
회개와 반성을 촉-구하면서도 한국 사 회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비판을 견지할수 있다. 희생자 가 가해자를 용서한디는 것은, 가해자에 대한 복수의 욕망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 지배자가
아니라 피지배자가 된 데 대한 회한을 떨쳐버리는 계기 가 된다. 식민자와 피식민자, 가해자와 희생자,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위치 만 바꾼 채 억압과
불의가 지속되는 연쇄 고리를 끊지 않는 한, 식민주의적 불의 는 재생산될 뿐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보면, 반식민주의적 분노가 탈식민주의 적 성찰을
앞서고 있는 게 한국 가톨릭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한다. 폴란드의 가 톨릭교회처럼 가해자에게 먼저 용서를
베풂으로써 가해자의 사과와 참회를 끌어 낸 전복적 상상력을 펼치려면, 한국 가톨릭교회는 먼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이넘적 •
감정적 구속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2,000년이 넘는 긴 세월을 거쳐 형성된 가톨릭교회는 세계사 속의 역사적 행 위지들 가운데
대표적인 초국가적 행위 주체의 하나이다. 한• 일 양국의
가톨릭 교회에게 동아시아의 역사 화해를 주도하는 초국가적 기억 주체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거사를
둘러싸고 민족주의적 반목과 갈등이 점차 점예해지는 동아시아의 현실에서, 세속적 통념을 뒤집어엎고 희생자가
가해자 에게 용서를 구한 1965년 폴란드 주교단의 사목 서신과 같은 발상의 전횐은 더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각자의 민족주의적 서사 인에 갇힌 채, 서로에게
들리 지도 공감을 만들지도 못하는 화해의 서사가 전개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대화 방 식을 벗어나
가톨릭교회와 같은 초국가적 기억 주처]들에게 화해의 돌과구를 기 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71) 가해자는 고통이 없고 피해지는 죄가 없다는 '70빱적 이분법에서
벗어날 때, 화해와용서의 담론은 민족주의의 인질에서 벗어나 '슬픔
의 보편성'에
욕하게 될 것이다.72)
70 양권석, “기억의 치유: 이야기와
실천의 새로운 길을 찾아서,”『동아시아 기억의 연대와 평화: 한일
가톨릭 교회의 역할』학술대회(2019/10/31) 종합토론 기조 발제문.
72)Aleida Assmann, "On the (IN)CompatabilitY and Suffering in
German Memory," German Life and Letters 5%2 (April, 2006), P. 194.
죄와 고통,
가해와 피해, 참회와 용서, 사과와 화해에 대한
양자택일적 이분 법을 넘어서는 초국가적 화해와 용서의 동아시아적 길은 어떤 길일까? 폴란드 주교단의 1965년 사목 서신이 보여준 전복적 상상력이 가세기의 동아시아에서 도 '화해의
아방가르드'적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역사적 화해와
용서를 위 해 동아시아의 가톨릭교회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일본 가톨릭교회의 동방백서'는 한반도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무엇을 더 고민해야 하 고, 한국
가톨릭교회의 '사목 서신은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인들이
겪어 야 했던 불행과 아픔-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것인가? 역사적으로
맥락화된 기억의 정치와 화해와 용서에 대한 기독교의 보편적 윤리는 어떻게 결합하고 충 돌하는가? 동아시아의
초국가적 화해를 향한 이 질문들은 여전히 서로 모순되는 복수의 대답들에 열려 있는 질문들로 남아 있다.
(투고일자: 2020.04.11. 심사일자: 2020.0421. 게재확정일자: 2020.06.01.)
주제어 : 폴란드 주교단 편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역사 화해,
용서의 정치, 기억의 연대, 초 국가적 기억
주체, 지구적 기억공간
Keywords : Polish Bishops'
Appeal of 1965, victimhood nationalism, history reconciliation, politics Of
forgiveness, transnational memory agency, mnemonic solidarity, global memory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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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B, (2019.08.17.)
https://www.cpbc.co.kr/CMS/news/view_body.php?cid=760302&path=201908 (74AHOl • 2020E 33 31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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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
[Abstract]
Rereading "Polish Bishops' Appeal to German
Colleagues" of 1965 in the East Asian Mnemoscape:
History
Reconciliation and Politics of Forgiveness
Lim, Jie-Hyun
(Sogang Univ.)
This article starts with a premise on how to appropriate
"the Polish Bishops' Appeal to the German Colleagues (1965)" as a
cross-reference for the history reconciliation in East Asia. Once spread, the
Polish Episcopate's letter became a historical event for its message of
"we forgive and we ask for forgiveness." The letter signaled the
shift of the conventional dichotomy of the collective guilt and innocence from
the nationalist political instrumentalism into an ethical vision of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With the compliments of the 'avant-garde of reconciliation'
and 'the greatest foresight in the postwar Poland,' the "Appeal"
showed how the Catholic Church as a transnational agency could be a paradigm
changer for the history reconciliation. The "Appeal" carries an
empathy for the misery of not innocent German refugees and self-criticism of
the transgression of the Polish revenge, which gives transnational memory
activists some leeway to overcome the old antagonism between guilt and
suffering, and the zero-sum game of the victimhood nationalism. "What
would it mean to transpose the Polish Bishops' Letter from Central-Eastern
Europe of 1965 into present-day East Asia?" needs to be answered
thoughtfully yet, despite some try in this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