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4

김진호.보수의 마음 읽기’의 가능성에 대하여 202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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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마음 읽기’의 가능성에 대하여 - 이나미의 〈전환과 통합의 관점에서 본 보수의 마음〉에 대한 논평논평 2021. 7. 3. 20:50 posted by 한때 올빼미


북한대학원대학교의 SSK남북한마음연구센터가 주관한 
<한반도 '문제'의 마음적 전환: 행위자, 장소 그리고 페미니즘>(2021.06.30)에서 발표된 
이나미 선생의 〈전환과 통합의 관점에서 본 보수의 마음〉에 대한 논평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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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마음 읽기’의 가능성에 대하여
이나미의 〈전환과 통합의 관점에서 본 보수의 마음〉에 대한 논평


리처드 로티(Richard M. Rorty)가 처음 사용한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는 용어를 연상시키는 ‘마음적 전환’이라는 심포지엄 표제는, ‘언어적 전환’이 그랬듯이 이제까지의 지배적인 인식론적 질서의 교체를 도모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까지는 아직 그 이론적 함의가 형성 중인 ‘정동(affect)이론’이나 ‘인지과학적 마음(mind)이론’이 그러한 변화를 선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나미 선생의 발표글은 ‘마음이론’에 기반을 두고 ‘보수’에 대한 마음 읽기를 시도한다.

‘보수의 마음 읽기’라는 문제설정은 그 표현만으로도 짜릿하다. 언어적 개념이나 정치적 이팩트의 관점에서만 이 문제를 이야기해왔던 나로서는 허를 찔린 느낌이다.

가령 언어장애가 있는 이를 치료하려는 심리치료사가 그의 발화를 언어 개념을 통해 해독하려 한다거나 그의 행위가 어떤 정치적 이팩트를 반영하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적절한 치료를 위한 이해에 이를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어떤 이의 욕구, 바람, 믿음 같은 마음상태를 읽어내려는 마음이론이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물론 마음이론은 언어장애의 다양한 양상에 대한 충분한 임상적 해석능력을 갖추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성 중심적이고 합리적 인과성을 전제로 하는 언어 개념적 접근이나 정치적 효과 분석의 한계를 돌파하는 가능성에 대한 시도라는 점에서 마음이론은 의의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개체적으로 발현되는 인지/마음 상황처럼 차별이나 혐오 같이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인지/마음 상황도 있다. 그러한 사회적 인지/마음을 분석하는 것을 사회인지이론(socioconitive theory)이라고 부르는데, 보수의 마음 읽기를 위해 사회인지이론은, 역시 아직은 충분한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용한 접근으로 보인다.

이나미 선생이 이 글에서 기대고 있는 인지과학적 마음이론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연구다. 저자는 베이트슨의 논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두뇌와 신체로 이분화된 것이 아니라 통전적 일체로서의 마음이라는 것, 나아가 개체의 마음과 그가 속한 환경은 불가분 연결되어 있다는 것, 즉 개체의 마음은 공간적 전체와 연결된다는 것, 그리고 마음이 공간적 맥락과도 연결되어 있지만 시간적 맥락과도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체의 마음은 시공간적인 맥락의 일부만은 아니다. 그것을 재맥락화하는 성찰의 기능까지 포함한다.

이 대목에서 비판적 인상비평을 이야기하자면, 이런 논지는 베이트슨의 이론이 왕성하게 제기되던 1960년대에는 신선한 문제제기일 수도 있지만 지금의 지성사적 맥락에서는 너무 상식적이거나 모호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상식적이라 함은 개체와 그 시공간적 맥락이 연계되어 있다는 것, 그것을 위해 분과학문적 접근이 아닌 통섭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관한 것이다. 모호하다는 점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의 애매함에 관한 것이다. 

가령 “젊은이는 미래에 대한 관심이 많아 사실적인 정보와 합리적 선택을 중시하는 반면 노인은 남아있는 미래가 별로 없기 때문에 현재의 안정과 정서적 의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나미 선생의 주장은 ‘보수’를 노인층의 연령효과(age effect)처럼 논하고 있는 듯하다. 연령효과는, 특정한 시공간적 환경에서 성장기를 공유한 세대의 독특한 체험과 그이들의 행동양식이나 집합적 의식을 연계시키려는 코호트 연구와는 달리, 그 시공간적 체험의 역사적 독특성에 대해 묻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진보적 노인도 있을 수 있고 보수적 노인들 사이의 보수주의 양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나타다고 있는 행동과 정체성의 역사문화적 배후를 묻는 데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는 노인층의 보수성을 보여주는 시공간을 달리하는 여러 자료들을 제시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또 노인층의 보수성이 어느 시대 혹은 공간에서는 더 강하게 나타나고 다른 시공간에서는 덜 강한 것에 대해서도 설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상비평에 지나지 않다. 내 생각에는 인지과학적 마음 연구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베이트슨뿐 아니라 보다 최근 연구자들의 가설에 기대면서 논의를 펴면 이런 허술한 인상비평을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문외한이 얘기하기는 조심스럽지만, 한때 한국 철학계에서 논란이 되었던 ‘확장된 마음’(the extended mind)에 관한 논쟁은 베이트슨 이후의 보다 현대적인 논점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벌어진 토론으로 보인다.

한편 저자가 ‘기독교와 보수’라는 소절에서 다룬 내용에 대해서는 신학자로서 끼어들 여지가 좀 더 있어 보인다. 우선 “1990년대 이후 보수 세력의 헤게모니가 두드러지게 확장됐다.”는 주장과 그것에 연결된 주장들에 관해서다. 이 주장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 현상과 개신교 보수를 이해할 때 유용하다. 
  • 1989년 설립 당시 이 단체는 월남한 개신교 원로 지도자들이 주축이 된 반공적 보수주의 단체였다. 하지만 그때에는 그 존재감이 미미했다. 
  •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현직의 대형교회 목사들 다수가 한기총 활동에 적극 가담하게 되면서 그 영향력이 급상승한다. 
  • 특히 2003년, 노무현 정권이 집권하고 불과 보름도 안 된 시기에, 두 번의 대선 패배로 보수주의적 선거연합이 와해의 위기에 있던 상황에서 무려 20만 명을 동원한 3.1절 시청광장집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게 되고 그것이 이듬해 대통령 탄핵안 국회통과로 이어지게 되면서, 한기총은 일약 보수반공주의적 연합의 주축세력으로 부상한다. 이러한 한기총의 막강한 보수주의적 구심력은 2013년 어간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보완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기총은 지금까지도 반공주의적 보수 성향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관된 반공보수주의의 개신교적 아성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그 영향력은 2013년 이후 급격히 무너졌다. 특히 전광훈이 대표화장으로 선출되는 2019년은 개신교 주류교단들 가운데 어느 곳도 한기총에 기부금을 내지 않았으며 주요 교단들 거의 모두가 명시적으로 탈퇴를 선언했다.

두 번째는 “(이념적) 보수의 헤게모니가 ... 확장되었다”는 1990년대는 한기총의 영향력이 전국화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보수주의가 개신교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형성하는 시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 시기는 개신교의 성장의 위기가 본격화되던 시기였고, 교회와 목사들에 실망을 강하게 느끼는 이들이 광범위하게 등장하던 시기였다. 나는 이들을 ‘실망신자’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교회에 대한 충성행위를 이완시키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했고 특히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도 표현했다. 나는 이런 현상을 ‘실망신자의 떠돌이화’라고 불렀다.

그런데 떠돌이 신자들의 상당수는 일부 교회들에 재정착했는데, 그렇게 해서 1990년대 후반 이후에 대형교회의 대열에 진입한 새로운 유형의 교회들이 러시를 이루었다. 과거 고도성장기인 1970~80년대 대형교회들은 새신자들이 대대적으로 교회에 유입됨으로써 탄생한 것이라면, 이 시기 대형교회들은 떠돌이 신자들의 재정착의 결과부상한 경우가 압도적이다. 1970~80년대 새신자는 대개 농어촌에서 이주한 하위계층이 많았다. 그들은 교ㅕ육수준도 낮았고 자산능력도 열악한 이들이었다. 또한 새로 개신교 신자가 되었기에 자존성이 약한, 목사에 대한 팬덤 같은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그런 이들이 절대다수였다. 반면 1990년대 이후 재정착한 떠돌이 신자들은 교회와 목사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품고 있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교회나 신앙에 대한 주장도 강하고 종교적 자존성도 높은 이들이 다수였다. 한편 과거의 대형교회들이 전국 대도시들, 특히 도시 외곽지역에 산개되어 있었다면, 새 유형의 대형교회들은 강남, 강동, 분당에서 압도적으로 나타났다. 당연히 후자의 신자 대중은 빠르게 자산이 상승한 이들이고 교육수준이나 문화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즉 그들은 사회적 자존성도 높은 이들이 다수였다.

나는 이런 새로운 유형의 교회를 후발대형교회로 분류하면서, 이곳에서 발전한 신앙유형을 웰빙보수주의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것은 이념적 보수 성격보다는 계급적 보수의 성향이 좀더 강화된,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유형의 보수주의가 이들 후발대형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특히 그것이 문화적 웰빙 취향으로 표출된 고급화된 계급현상이 후발대형교회에서 두드러지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시기에 새로운 보수주의가 형성되고 안착할 수 있는 장소로 이들 후발 대형교회와 비교할 수 있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논지다. 수천에서 수만 명의 웰빙적 고급취향의 중상위계층이 매주 1회 이상 모이고 그 기간이 수십년 혹은 태어날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이어지는 곳은 교회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시기 개신교뿐 아니라 불교, 천주교에서도 강남권의 종교시설은 신자대중의 출석률이 다른 지역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것은 종교적 충성심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정 계층의 문화적 계급화를 설명하기에 유용한 장소가 바로 이 시기 이 지역의 종교였다. 그리고 개신교는 그런 현상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주도했다.

이런 유형의 보수적 대형교회는 보수주의적 선거연합을 형성하는 데 반공주의적 보수 그룹보다는 덜 적극적이었지만, 개신교 교회들과 신자들에 대한 영향력의 차원에서는 가장 강력한 보수의 범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반공적 보수에 집중하고 있는 저자의 개신교 보수 논의는 보완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한편 “교회가 보수적인 이유 중 하나는 월남자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기 때문이다.”는 표현과 그것에 연관된 논의도 수정 및 보충이 필요하다. 우선 일제강점기에 개신교 신자의 70~80%가 북한에 거주했다는 것은 사실의 개연성이 적다. 당시 인구통계, 특히 종교인구조사들 중 신뢰할만한 것이 별로 없지만 그나마 가장 신뢰도 높은 자료는 조선총독부의 자료다. 1940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것에 따르면 북한지역 개신교 신자는 228,509명이고 남한지역은 279,413명으로, 남한 개신교 인구가 전체의 55%를 상회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보수성’과 ‘월남자 개신교도’의 인과성에 관한 것이다. 저자의 설명은 북한 개신교가 보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보수적’이라는 말은 ‘반공주의적 보수’를 뜻한다. 한데 일제강점기에 북한지역 개신교가 보수적인 것은 이념적으로 반공주의가 강하다는 뜻이 아니라 근본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북한지역의 교회지도자들은 ‘자유주의’에 대비해서 자신을 ‘정통주의’라고 표현하곤 했다. 북한 개신교도의 80퍼센트 이상은 서북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서북지역 개신교의 90퍼센트 정도가 미국 북장로회 출신 선교사들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당시 미국 개신교 내에서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던 근대주의 논쟁에서 이들 조선의 서북지역의 선교사들 대다수가 가장 강성의 반근대파 성향에 인사들이었다.(1) 그런 맥락에서 근본주의는 반근대주의적 신앙에 가까웠다. 한데 조선에서 이들 근본주의적 선교사들과 그들의 대리인 역할을 하던 조선인 개신교 지도자들에게서 근본주의는 조선의 토착종교나 문화에 대한 배타주의 성향이 더 강했다. 아무튼 이때까지 반공주의는 서북개신교의 보수성을 특징짓는 요소가 아니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 벌어진 일련의 공산주의화 프로젝트에서 근본주의적 개신교 세력들은 반공성향이 강화되었지만, 그것만으로 월남한 개신교 신자들의 강한 행동적인 반공적 보수주의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것보다는 당시 남한 사회가 압도적으로 좌편향 성향이 강한 상황에서 낯선 곳으로 이주한 월남자 개신교 청년들이 미군정청과 남한의 보수적 엘리트들에 의해 반공 투사로 호명되는 과정에서 학습된 것이 반공적 보수주의였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한기총을 비롯하여 보수적 교회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한국사회의 지배집단의 대다수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는 표현과 그것에 연결된 논의도 수정, 보완이 필요하다. 저자는 앞에서 개신교 보수주의를 반공적 보수에 초점을 두면서 이야기했는데, 지배집단을 과점한 종교로 개신교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선 상장사 임원이나 국회의원 비율 등, 반공주의와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계급적 범주에 더 가까운 관점에서 보수를 말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사회의 파워엘리트 연구에 따르면 전체 파워엘리트의 40퍼센트 이상이 개신교 신자였다. 한데 이들 계급적 보수, 특히 문화계급화된 보수는 보수대연합이 거대하게 형성될 때는 이념적 보수에 견인되어 엮이기도 하지만 보수대연합이 붕괴되거나 약화될 땐 탈정치화되거나 제3의 길로의 방향선회의 양상을 보이곤 했다.

마지막으로, 마음읽기의 관점에서 보수를 논하겠다는 저자의 논지에 가장 부합하는 설명이 드러나는 대목에 관한 것이다. 태극기집회에 참여한 개신교 신자인 노인의 경우 그들의 보수는 정치적 행동의 관점에서는 극우반공주의적 정치세력화의 한 양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 언어적 개념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보수주의가 반공주의적이면서 친미적이고 때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약탈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소극적 반대의 성향과 결합되었고, 반동성애적이고 반여성주의적 태도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한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사회・경제・문화적 자본을 결여한 남성노인이 유난히 많다는 점에 대해 설명하기에 언어적 개념이나 정치적 행동의 관점은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마음 읽기는 태극기집회에 참여한 노인과 그 현상을 이해하고 진단하는 데 유용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사회적 박탈체험이 보수적 행동으로 나타났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저자의 마음읽기 결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의 분석에 대해서는 충분한 공감을 하기 어렵다. 가령 저자는 개신교, 이슬람, 유대교 근본주의자의 충원이 주로 ‘주변화된 남성 엘리트들’로 채워진다는 종교사회학적 논의를 논거로 제시하는데, 그런 주장은 인지과학적 마음 연구의 장점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인지과학은 학제간 통섭을 강조하는 여러 범주의 학문적 문제제기 중 특히 과학적 논증이라는 점에 강세가 있다. 그런데 위의 논지는 과학적 명제가 될 수 있을까. 유일신 종교가 아닌 종교의 근본주의는 주변화된 남성 엘리트의 박탈체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또 근본주의적 비종교 현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나아가 남성엘리트의 주변화 체험과 비엘리트 남성의 주변화 체험은 각기 근본주의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차이점이 있는가. 이런 부가된 질문들에 대해 위의 논지는 과학적 명제로서 명징한 분석을 향해 열려 있는가? 나의 추정으로는 인류학적 분석으로 소개될 수는 있어도 과학적 명제로서는 적절해보이지 않는다.

또한 유일신 종교들이 주변화된 남성엘리트의 박탈체험과 밀접히 연관된 시공간적 맥락에 대해서 저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시공간적 보편성을 갖는 명제처럼 이야기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노인의 박탈체험이 태극기집회로 주체화되는 시공간적 맥락에 대해 저자는 깊게 묻지 않으면서 위의 명제를 제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내가 보기엔 태극기집회 노인의 마음 연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시공간적 체험, 그들의 체험이 특정한 정치적 행동으로 연결되게 하는 담론의 양식, 그것을 실행에 옮기게 하는 사건적 양상 등이 제일 먼저 다루어져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나미 선생의 문제제기에 대해 큰 틀에서 동의한다. 특히 그것을 마음 읽기의 관점에서 보려한다는 점, 그러한 생각의 실험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그것을 구체화하는 데 있어서 몇 가지 아쉬움이 있다. 무엇보다도 마음 현상의 시공간적 맥락을 사회인지적 관점에서 읽어내려는 디테일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서 나는 갈증을 느낀다. 그의 글이 보다 완전해지기를 기대한다. □

[주]

(1) 여기서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었던 서북지역의 두 도시가 있었다. 하나는 선천이고 다른 하나는 평양이다. 평양이 더 큰 도시임에는 분명하지만 선천도 서북지역에서 평양 못지 않은 산업화된 도시였다. 그런데 당시 신문의 기사들로 추정한다면 인구대비 개신교도의 비율은 선천이 더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선천의 개신교를 이끌었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는 휘트모어(N.C. Whittemore, 1870-1952, 한국명 위대모)는 미주리 주 파크빌시(Parkville)에 있는 파크대학(Park University) 출신으로 교세가 확장될 때마다 파크대학 출신의 선교사들을 초청했다. 
반면 평양의 개신교를 이끈 선교사는 새뮤얼 모펫(Samuel Austin Moffet. 한국명 마포삼열)인데, 그는 일리노이 주 시카고 시에 있는 매코믹신학대학(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출신으로, 평양의 개신교 교세가 팽창할 때마다 매코믹 출신 선교사를 초청했다.

 그런데 아시아 선교에 앞장서고 있던 두 대학이 파크대학과 매코믹대학은 매우 대조적 성격의 신학을 갖고 있었다
  • 선천 -- 휘트모어 ---- 파크대학은 근대화에 관심이 있었다면 
  • 평양 -- 새뮤얼 모펫 - 매코믹은 반근대주의적 근본주의 신앙의 이식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선천의 개신교는 전국적 영향력을 갖는데 실패한 반면, 평양의 개신교가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해서 서북지역 개신교를 근본주의적 보수 일색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정확한 주장이 될 수 없지만 신앙의 전국적 영향력이라는 관점에서 서북주의가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성향이 강했다는 것은 타당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https://owal.tistory.com/category/논평 [올빼미의 밥상(김진호. 민중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