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성서아카데미 2020년 상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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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다시 보기, 2020
강의 취지_
바울은 난감한 존재였다.
성서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그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리스도교 제국의 팽창주의의 원흉이자 반여성주의자이며 가부장적 교권주의자, 오 늘날 그리스도교의 저 모든 ‘화려한
창백함’이 그에게 투영되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런 문제의식의
문을 연 철학자였다. 그리고 이러한 반(反)바울주의적 지식의
계보 에는 자유주의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 여성신학자 루이제 쇼트로프, 그리고
민중신학자 안병무 등, 유 수의 비판적 신학자들도 포함된다.
쇼트로프나 안병무 같은 래디컬한 제2성서학자는 오늘의 그리스도교를 해체하고 새로운 그리스도교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그리스도교 이전, 곧 ‘바울 이전’의 그리스도 운동을 찾고자 ‘역사의 예수’를 탐색했 다. 이러한 ‘바울 패스’ 현상은 오늘날 진보적 그리스도교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바울을 재해석해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 중 민중신학자 김창락의 연 구가 빛난다.
그는 바울 신학에서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 신학의 핵심 교리의 성서적 근거로 여겨온 ‘의 인론(義認論)’
텍스트에 대하여 이제까지의 물음과는 다르게 물음을 던진다. 바울의 의인론 텍스트는 그의 ‘논쟁의
언어’였다는 것이다. 즉 보편적 구원에 관한 논리가 아니라 특정한 맥락에서 논쟁을 위해 구성
한 언어가 바로 의인론 텍스트라는 얘기다. 김창락의 결론은 이 논쟁에서 바울이 주장한 것은 ‘인권’이
었다.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에 대한 옹호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 강의는 김창락의 바울 해석을 계승하여
현대의 인권 문제의 관점에서 바울을 다시 읽고자 한다. 오늘 우리 시대가 그런 것처럼, 바울의
시대 또한 지중해, 특히 그곳의 대도시들의 사람들은 세계화로 인한 격동의 세기를 맞고 있었다. 물론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동시대 사람들은 그 변화에 현기 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하고
있던 종교들 내부에서 일종의 극우주의 현상이 도처에서 발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타자적 존재들을 배제하고 증오하는
방식으로 집단적 결속을 강화하려는 현상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바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배타적 극우주의에 대항하는 이스라엘계 종교권의 그리스도파 활동가였 다. 그의 선교 활동은 바로 이런, 지중해
대도시들의 사회종교적 갈등 상황에서 배타주의를 거슬러서 모 든 배제된 이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이러한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라고 불렀다. 오늘 우리가 ‘교회’라고
번역하는 바로 그것이 바울의 평등주의적 공동체 운동의 단위였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의인론 텍스트와 그밖의 다른 텍스트들을 해석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이 강좌에서 다루 려는 것이다. 이 강좌는 상반기와 하반기 각각 10회씩,
총 20회에 걸쳐 진행할 예정이다.
강의 구성_
상 반 기 |
01 |
04.01 |
교회의 바울 대 역사의 바울 |
02 |
04.08 |
바울 연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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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
04.22 |
예루살렘의 헬레니스트와 헬라계 그리스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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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
04.29 |
다마스쿠스의 바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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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
05.06 |
안디옥의 바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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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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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
05.20 |
〈빌립보서〉 다시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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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
05.27 |
〈데살로니가전서〉・〈빌레몬서〉 다시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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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
06.03 |
〈고린도전서〉・〈고린도후서〉
다시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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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
06.10 |
〈갈라디아서〉 다시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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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06.17 |
〈로마서〉 다시 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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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반 기 |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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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동역자들(1): 바나바 |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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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동역자들(2): 회당장과 중류층 인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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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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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동역자들(3): 루디아 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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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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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동역자들(4): 브리스카와 아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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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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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동역자들(5): 수행자(디도・디모데・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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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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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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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점들(1): 의인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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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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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점들(2): “여성은 잠잠하라”―방언하는 여성들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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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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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점들(3): 동성애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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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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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점들(4): 노예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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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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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정리 |
※ 교재는 매 수업마다 제공
※ 보조교재: 김진호 저, 《리부팅 바울》(삼인)
이끔이_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경향신문》 객원칼럼리스트. 전 《한겨레신문》 《한겨레21》 《서울신문》 《주간경향》 객원 칼럼리스트. 전 한백교회 담임목사・전 《당대비평》 주간. 주요저서 《리부팅바울》《예수역사학》《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시민K, 교회를 나가다》《권력과 교 회》《반신학의 미소》《산당들을
폐하라》 등.
제1강_ 교회의 바울 대 역사의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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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종교’
중세 가톨릭신학을 대표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근대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대표하는 마르틴 루터에게 있어서 바울은 중요한 신학적 해석의 단서였다. 하지만
그들의 바울 해석에 대한 섬세한 분석을 하는 것은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 강의의 초점도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적 영향사에 있다.
이 두 인물이 미친 그리스도교 신학의 골격은,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모든 인간은 죄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로 감싸주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배적 체제(교회나 국가 같은)의 권위는 하느님이 위임한 것이니 그것의 정당성을 둘 러싸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데 이 두 신학적 해석은 모두 그들의 바울해석에 기반을 둔 것들이다.
이 두 가지 신학적 논제는 훗날 그리스도교 교리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압도적인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문제는 그리스도교가 역사 속에서 어느 종교도 누려보지 못할 만큼의 막대한 권 력을 휘둘렀고, 그것이 종종 엄청난 폐해를 불러일으켰다는 데 있다. 하여 무수히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 교를 비판하는 일에 나섰고, 그들의 비판은 그리스도교의 ‘교리 중의 교리’라고 할만한, 위의 두 요소들 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한데 그 교리들은, 말했듯이,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에서 유래했고 그 근저에 바로 바울이 있었다. 하여 많은 그리스도교 비판자들은 너도나도 이 교리의 진원지인 아우구스티누스와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교는 ‘바울의 종교’에 다름 아니었다는 독설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바울의 종교’,
그것이 문제의 초점이 되었다.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자임을 자처하면서 그리 스도파 운동을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열정적으로 펼쳤지만, 그의 가르침에 따라 구축된 종교인 그리스도 교는 왜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바울의 종교’가 되었는가? 그것은 바울 자신에게서 유래한 것인가
아니 면 그를 추종한 일부 그리스도파 지도자들로 인한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이 강좌가 주목하는 것은 ‘역사적
바울’에 있다. 그것은 바울의 신학이 후대의 해석자들에 의해 수용된 신학적 공리들과 형식상으
로는 연속적이지만 그 함의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 역사적 뿌리
서기 16세기
북유럽의 신학자인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열렬히 외치며 구축하고자 했던 그리스도 교는 한마디로 하면 ‘바울의
종교’로의 복귀였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서 서기 5세기
북아프리카의 신학 자인 아우구스티누스가 가톨릭파를 대변하면서 도나투스파에 대한 반박에 열을 올릴 때 그는 주장한 그 리스도교는 바울의 종교,
곧 바울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전체 틀을 구축한 종교였다.
그러나 ‘바울의
종교’, 그 역사적 뿌리를 살피려면 좀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서기
393년 북 아프리카의 힙포(Hippo. 알제리 지역의 항구도시)와
397년 카르타고(Carthago. 튀니지 지역의 항구도시)에서 열린 공의 회에서 제2성서
27권의 목록이 확정되는데, 여기에는 바울이 저자로 표기된 13개의
문서와 바울의 저작
으로 널리 알려진 익명의 저자의 문서(〈히브리서〉)[1])가
포함되어 있다.(48.1% / 51.9%) 이는 그리스도교 형성에 서 바울이 얼마나 압도적인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방증한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앞선 시기에도
바울의 위상이
다른
그리스도파 지도자들보다 압권적이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 있다. 우선 서기 90년대
말부터 2세기 초 사이의 문서로 추정되는 〈사도행전〉이다. 제목처 럼 이 문서는 사도들의 행전인데,
구체적으로 열거하 면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빌립의 행전이라고 할 수 있다. 옆의
표에서 보듯 세 명의 사도 중 절반 이상의 비율이 바울에게 할애되어 있다. 또 제2성서에
나오는 다음 구절들에서도 바울의 높은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여러분이 이 편지를 읽은 다음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읽을 수 있게 하고,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오는 편지도 읽으십시오.
―〈골로새서〉 4,16
바울은 모든
편지에서(εν πασαις ταις
επιστολαις) 이런 것을 두고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알기 어려 운 것이 더러 있어서, 무식하거나 믿음이 굳세지 못한 사람은,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그것을 잘못 해석해서, 마침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6
나 바울이 친필로 문안합니다. 이것이 모든 편지에 서명하는
표요,
내가 편지를 쓰는 방식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7
이 세 텍스트가 수록된 문서들은,
〈사도행전〉과 비슷하게, 서기 90년대 말부터 2세기
전반기 사이에
저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데 이 세 텍스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정을 할 수 있다.
이 문서들의 시 기에 바울의 문서들은 동지적 관계의 그리스도파 공동체들 사이에서 회람되고 있었고,(〈골로새서〉) 바울과 는 계보가 다른 그리스도파 공동체들 사이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었으며,(〈베드로후서〉) 바울의 이름으로 회 자되는 문서들을 둘러싸고 친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데살로니가후서〉) 훗날 정전이 확정될 당시 13권 또는 14권의
문서만 바울서신으로 간주되었다면, 위의 〈골로새서〉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보 낸 서신 등은 바울이
친필로 서명하지 않은 문서인 탓에 정전에 수록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그밖에 바울위서로 간주되었을 여러 문서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문서들이 여기저기서 회람되었고 수집되었으 며 치열한 권위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1세기
말에서 2세기 전반기에 말이다.
친서와 위서
한편 친서와 위서 문제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만 논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현대의 성서학자들 사
이에서도 바울서신들을 친서와 위로서 나누는 논의들이 많다. 친서와
위서 사이에는 문체, 어휘, 신학 등에서 현격한 차이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여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는 큰 틀에서 합의가 이루 어져 있다. 아래 도표는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친서와 위서 목록이다.
그런데 친서들에 나오는 몇몇 구절들에서 바울의 위상이 어땠는지를
시사하는 구절들을 보자.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 도’(ὁ ελαχιστος
των αποστολων)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 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8~9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10
여기서 바울은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로서, “사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도”라고
스스로를 말하고
있다. 당시 그리스도파 공동체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알려진 ‘기둥
같은 사도들’은 베드로, 요한, 주의 형 제 야고보 등이었다.
또 고린도의 바울계 공동체에서 바울에 대해 탐탁해 하지 않은 이들은 바울보다 ‘더 큰’
사도들을 들먹이며 바울에 맞서려 했다. 이때 더 큰 사도들은 아볼로나 베드로 등이었다.
위의 구절에 따르면 바울은 자신이 저평가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리스도운동의 박해자였던 자신의 전력(前歷) 때문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고린도후서〉 10,10에
의 하면 고린도의 그리스도파 공동체 사람들에게 바울은 글을 통해서 보면 강력한 파워가 있는 존재처럼 생각했었지만 막상 마주하니 말주변도 부족하고
몸도 허약해 보였던 듯하다. 대면접촉의 현장에서 그에 겐 카리스마가 별로 엿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곳곳에서 자신이 사도임을 주장했고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사역해왔음을 강변했다. 요컨대
생전의 그는, 모든 사도 중의 최고의 사도이기는커녕, 끊임없는 인정투쟁을 벌여야 했던 변두리 활동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실제 바울의 시대인
1세기 중반의 바울과 그가 사망한 지[2])
최소한 한 세대 이상 지난 1세 기 말 이후의 바울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인정투쟁에 갈급했던 변두리 바울이 그 어떤 사도보 다도 중요한 ‘핵인싸’로
부상한 것이다.
최근 바울학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다른 위상이 바울 읽기에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그
것을 대중에게
명쾌하게 전달하고자 ‘세 명의 바울’이라는 카피를 사용되고 있다. 친서의
바울과 위서의 바울이 얼마나 다른지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용어인데, 위서 속의 바울은 ‘반전된
바울’(reactionary ‘Paul’), 혹 은 ‘보수적
바울’(conservative ‘Paul’)이라면, 친서
속의 바울은 ‘급진적 바울’(radical Paul)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도파 운동의 ‘핵인싸’가 된 바울의 이미지가 ‘반전된
바울’ 혹은 ‘보수적 바울’이라면, 매우
저평가된 아웃 사이더 바울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는 ‘급진적 바울’이라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실제 바울’의 신학과 그 역사적 함의를 읽는데 ‘기억된
바울’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간단히 말하면 위서 속의 바울은 우리가 바울을 오해했던 바로 그 모습이다.
그리고 그 모습, 그것에 얽힌 바울의 해석에서 ‘바울의
종교’ 가 대두하였다. 하여 바울의 종교, 그
경계를 넘어서 그리스도교를 리부팅하려면 바울을 리부팅해야 하 며, 그러려면 위서 속의 바울을 경유하지 않고, 친서
속의 바울을 읽는 게 중요하다.
물론 위서 속의 바울을 ‘잘못된
역사화(historicization)’, 안 하느니만 못한 기억의 정치학이라고
단언해서
는 안 된다. 성서
속의 바울, 아우구스티누스의 바울, 마르틴 루터의 바울, 그리고
오늘의 그리스도교로 이어지는 ‘바울의 종교’의 계보를 문제시하기 위해 그 계보에 균열을
내고자 친서의 바울과 위서의 바울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위서의 문제적인 기억의 계보를 해체한 뒤 바울을 다시 물으 면 위서
속의 바울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실마리가 발견될 수 있다. 이 문제는 내년도 성서 아카데미 에서 다룰 주제의 하나다.
아무튼 이 강좌에서는 역사의
바울을 읽기 위해 무엇보다도 바울의 친서에 주목할 것이다. 그것은 ‘위
서의 바울’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바울의
종교’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시선들로부터 벗어나서 바울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읽은 바울을 나는 ‘리부팅 바울’이라고 부를 것이다.
새로운
관점(New Perspectives)
1970년대
후반 이후 바울학계 일각에서 불고 있는 이른바 ‘새 관점’론은 친서 속의 바울을 보는 중요 한 안목을
제시해 주었다. 여기서 ‘새 관점’이란 ‘낡은
관점’을 전제로 한다. 무엇이 낡은 관점일까? 바울이
‘심판/징벌의 종교’인 유대주의와 대결한 그리스도의 사도였다는
주장이 바로 낡은 관점이다. 하여 이 주장에 따르면 바울 대 유대주의는 ‘은혜의
종교’ 대 ‘심판/징벌의 종교’로
대조되는 경계가 그 려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로 대표되는 정통파 그리스도교,
그 교리가 탄생한다.
한데 1970년대
말 이후 유대교 문서를 전문적으로 살펴본 연구자들은 유대주의도 심판/징벌의 종교가
아니라 은혜의
종교였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니까 유대주의와 바울의 대결은 심판/징벌 대 은혜의 대립 이 아니다. 곧
율법인가 은혜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종족주의에 갇힌 은혜론’에 대한
비판이었다는 얘기 다.
이것은 현대 그리스도교에 대한
두 가지 실천적 문제제기와 연결된다. 하나는 ‘포스트아우슈비츠 신 학’의
문제제기를 따라 그리스도교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는 바울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오 독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문제제기와 연결된다.
다른 하나는 ‘포스트모던, 포스트콜로니얼 신학’의
문제 제기를 따라, 그리스도교의 뿌리 깊은 유럽-백인-남성 중심주의 또한 바울의 오독의 산물이라는
주장과 연결된다. 요컨대 바울의 종교가 반유대주의적이며 유럽-백인-남성
중심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 이다.
이것은 1960년대
이후 서구사회에서 제기된 담론 지형이 신학에도 반향을 미친 결과인데, 그 담론의 새로운 지형을 간단히 서술하면 ‘포스트아우슈비츠의
신학’과 ‘포스트모던/포스트콜로니얼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이 두 신학적 지향은
한동안 함께 얽히며 바울을 읽는 새로운 관점의 두 축이었지만, 2천 년대
이후에는 두 지향의 연속성보다는 균열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 균열을 강조하는 주장에 의하면, 포스 트아우슈비츠 신학은 반유대주의를 강화하면서 발전해온 서구 중세와 근대를
엮는 인종주의를 비판하면 서, 그 장벽을 허무는 데탕트(긴장완화)의 정신, 아니 똘레랑스(포용)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포스트아우슈비츠의 신학은
반유대주의를 해체하였지만, 동시에 팔레스티나의 소수자들을 망 각하는 새로운 편견과 배제의 정치학에 다름 아니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하여 ‘포스트’포스트아우슈비 츠의 신학이 제기되었는데, 이것은
끊임없는 탈중심주의적 정치학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담론과 포스트 콜로니얼담론과 만난다. 21세기는
바로 그러한 담론이 부상한 시대다.
‘새 관점’론은 유대주의를 심판/징벌의
종교가 아니라 바울과 마찬가지로 은혜의 종교였음을 강조했다. 다만 바울은 유대주의의 이스라엘 중심주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유대주의 개 혁가였다. 그런데 유대주의 연구에 의하면 유대교 내에,
심판/질벌의 종교든 은혜의 종교든, 거대한 컨센 서스가 있었다는 주장은 당시 팔레스티나와 지중해 지역에 산개하면서
존재했던 이스라엘계 혹은 팔레 스티나계 종교의 다양성을 은폐한다. 그것은 다양한 사람들의 존재를 생략하고 배타주의라는 얼룩을 세 탁한 유대인들만을
존재로 보는 ‘은폐된 배타주의’에 다름 아니다. 하여
나는 이 강의에서 ‘실재했던 바 울’을 ‘새 관점’의 은폐된
배타주의를 넘어서서 보려 한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주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 다.)
고대 지중해 사회의 글로벌라이제이션과 팍스로마나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하고, 이집트를 거점으로 하여 등장한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의 제국 (이집트 제32왕조. 기원전 305~30)의
등장 이후 지중해 사회는 특히 몇몇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지구적 연결망이 형성되었다. 이후
지중해 지역에는 몇몇 메트로폴리스들이 급부상하면서 고대지중해 글로벌라 이제이션의 중심무대가 된다. 서기
50년대의 바울은 바로 이 메트로폴리스에서 활동했다. 그러므로 바울 을 이해하는 데 있어 고대
지중해사회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염두에 두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여기에 기원전 27년,
로마의 지존자(아우구스투스)인 옥타비아누스가 선포한 ‘팍스로마나’가
몰고 온 글로 벌 지중해에서 일어난 거대한 사회적 변동은 바울의 활동공간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컨텍스트이다. 그
러므로 이런 정치경제적인 사회적 변동이 바울이 활동한 메트로폴리스들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로
인해 이 도시들의 이스라엘 이주민 코뮤너티에서 일어난 양상들을 주목하면서 바울을 살펴보는 것이 필 요하다.
바울문서들에 관한 디테일한 연구들
바울서신들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은
현존하는 바울의 서신들은 최종본일뿐 바울 자신이 쓴 것과는 적 잖이 다르다는 견해를 편다. 가령
3~4개의 고린도인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이 재조합되어 두 편으로 최 종 정리된 것이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강좌에서 는 이런 논의들은 무시하려 한다.
요컨대 이 강좌에서는 현존하는 친서 텍스트가 바울이 썼다는 가정 아래서 그 문맥적 컨텍스트와 역사적 컨텍스트를 조합하여 해석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