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의 밥상(김진호. 민중신학자) :: 제도가 성찰하라 -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권력과 일상에 관하여
제도가 성찰하라 -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권력과 일상에 관하여강의/강좌 2019. 7. 14. 09:00 posted by 한때 올빼미
다음 주 화요일(2019.07.16)에 춘천인문학교 포이에티케에서 '종교와 권력'을 주제로 강의를 하되었다.
강의안으로 2013년 기독여성민우회 회지에 기고했고 나의 책 [산당들을 폐하라]에 수록되었던 글을 보냈다. 많이 읽히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만, 후기자본주의 시대 종교와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로 쓴 글이이서 이 강의에 적합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글로 강의안을 정한 뒤에, 담당자들로부터 춘천지역의 목사님들이 많이 참석할 거라는 귀뜸을 받았다. 해서 급히 참고자료를 하나 더 추가했는데, 강의 주제가 쉼에 대한 후기자본주의적 질서와 종교의 비판적 개입에 있었기에 고대이스라엘의 안식일 신앙의 역사적 논의를 소개하는 글이다. 이것은 책으로 펴낼 게획과 함께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에서 20주 분량의 강의의 자료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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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성찰하라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권력과 일상에 관하여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마가복음〉 2,27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HfG Karlsruhe) 교수인 한병철 선생이 쓴 《피로사회》(Müdigkeits-gesellschaft)는 2010년
독일에서 출판된 이후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오늘 우리가 사는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불렀다. 이는 일종의 문명사적 진단으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말한 ‘규율사회’에서 이행한 사회의 지배 양식이라는 것이다.
‘규율사회’란, 신체를 가혹하게 다룸으로써 대중을 교화하던 전근대적 체벌사회를 대체하여, 정신적 규율을 통해 사람들을 사회에 순응하게 하는 근대 자본주의적 지배의 형태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감시의 체계’를 통해 실현된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았다”(〈로마서〉 5,13)는 바울의 말은 율법이 내면적 감시의 장치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율법은 이스라엘 신앙사에서 문자 해독층이 급증했던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집트 제32왕조) 시대에 중요한 신학적 요소로 등장하였다. 그 전에는 제사가 가장 핵심적인 종교적 통합의 장치였다. 제사는 시각, 청각, 후각적 지각을 통해 신의 지엄함을 과시한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은 제사종교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제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통제하지는 못한다. 왜냐면 제사가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성전에서 거행하는 거대한 제사를, 그러니까 굉장히 커다란, 고비용의 이벤트적 행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벤트는 일상이 될 수 없다. 일상이 된 이벤트는 더 이상 이벤트가 아니다. 하여 이벤트에 의존하는 제사, 특히 국가 차원의 제사는 일상에서 사람들에게 신에 관하여 속삭이는 종교가 될 수 없다.
반면 율법은 문자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말의 종교가 작동하기 시작되는 것이다. 하여 율법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작동하는 종교적 장치다. 율법은 회당에서, 사랑방에서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반복적으로 되새김함으로써 생각 속에 자리 잡는다. 그리하여 그렇게 자란 사람들은 율법이 내면의 소리로서 생각과 삶을 감시함으로써 사회에 통합되었던 것이다.
바울이 2천 년 전 간파해냈던 사회적 지배의 양식을 현대의 사상가 미셸 푸코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양식으로 재발견한다. 물론 그는 훨씬 정교하고 훨씬 다양하게 작동하는 사회적 통합의 메커니즘을 발견했다.
한데 한병철 선생은 그러한 감시의 체제를 통한 규율사회가 아닌 피로사회가 지금의 우리네 삶을 통제하는 체계임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규율사회는 감시에 의해 ‘해서는 안 된다, 할 수 없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 자기를 규율하는 ‘부정성의 사회’였다면, 피로사회는 ‘할 수 있다’는 ‘자기 긍정적 믿음’을 갖고 성과를 향해 질주하는 사람들의 사회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한 긍정의 자의식으로 무장한 질주하는 사회의 인간은 무수한 낙오자를 낳기 마련이다. 할 수 있다, 원하면 이루어진다 같은 자기 긍정적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결과가 그렇게 긍정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그런 믿음은 모든 사람을 잠재적 낙오자로 만든다. 왜냐면 누구나 자기가 이룰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심한 심리적 압박감을 감내하게 되며, 그중 일부는 병증을 드러내게 된다고 한다. 소진성 우울증 같은 질환 말이다. 만약 그렇게 우울증이 단순한 기분 상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는 잘 조절하기 어려운 상태, 즉 질환으로 나타나면, 몸과 정신이 반응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몸이 스트레스 조절에 실패하여 무력감에 빠지고 우울 증상을 드러내며, 종종 자기조절체계와 면역체계가 약화되어 당뇨나 심장질환 등 각종의 신체적 질병으로 이어지곤 하는 것이다.
한병철 선생이 활동하는 독일사회는 1990년대 이후 세 사람에 한 명 꼴로 이런 심리적 장애를 나타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1세기의 가장 심각한 질병 중 하나를 직업적 스트레스 질환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 점에서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선진국형 사회의 지배 메커니즘이며 소진성 우울증상을 선진국형 질환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한데 나는 한병철 식의 피로사회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긍정을 통한 성과주의에 몰두하다가 자기가 소진되어 버리는 사람들이 과거보다 현저히 많아졌음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자기를 소진시킬 노동의 기회조차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후기자본주의적 질서 속에 질주하는 사람들의 세계는 대개 이렇게 노동배제의 체험이 일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그의 견해에 다 동의 할 수 없다. 기계화는 노동의 기회를 더욱 줄였고 신자유주의적 경영은 비정규직화를 양산했으며 지구화는 이민자를 급증시켜 노동배제의 상황이 심화되지 않았던가.
독일의 국립전염병연구기관인 로베르트코흐연구소(Robert Koch Institute, RKI)는 이러한 노동배제의 상황에 내던져진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병에 더 잘 걸리고 더 많이 죽는다는 연구보고서를 냈다. 그것은 자기긍정에 기초한 성과주의에 몰두하다 자기 자신이 소진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궁핍과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무력해지고 우울증상을 드러내며 자기조절체계와 면역체계가 악화되어 각종 질병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기초생활수급자제도 같은 사회복지의 수혜자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어느 사회든 사회복지제도가 보호할 수 있는 대상보다 보호받으려는 대상이 훨씬 많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수혜자가 되는 이들을 선별하는 일은 사회부조형 복지제도를 운영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해서 까다로운 조건이 달라붙는다. 고정수입이 얼마 이하여야 한다든가, 자기 소유의 부동산이 없어야 한다든가, 부양할 가족이 없어야 한다든가 등등. 한데 이 조건들은 모두 부정성의 지표들이다. 덜 가졌고, 더 무능력하고, 도움을 받을 다른 통로가 더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지표들이다. 수혜자가 되려는 이들은 이런 지표들에 따라 자신의 ‘결핍’을 증명해 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능력을 입증해야 기회를 누리는 것과는 정반대로 결핍을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이 반복되면 그이들은 생각 자체도 결핍의 존재가 된다.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이런 이들을 무능력자라고 한다. 곧 사회복지제도는 자칫 무능력화의 장치가 될 수 있다. 딜레마다. 자존 능력이 없는 이에 대한 사회부조는 절실히 필요한데, 그 제도는 종종 수혜자인 사람들의 거덜난 자존성을 더욱 약화시킨다.
이것은 국가의 사회복지 체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사회복지가 잘 발달된 사회일수록 다양한 공적 사적 복지기구가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열악한 환경의 사람들은 무수한 자기부정을 통해 생존의 기회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회복지제도는 자기긍정이 아니라 자기부정을 통해 주체화되는 이들을 양산한다.
무수한 자기부정을 통해 주체화된 이들은 자신의 현실에 주눅 들어 있고 막막한 미래에 절망하고 있다. 그럼에도 소비사회의 부풀려진 욕망들은 그들의 영혼 속으로도 예외 없이 파고들어 간다.
이러한 존재의 불일치 속에서 사람들은 욕망을 억제하는 자기관리보다는 욕망의 대체물에 더 탐닉하게 마련이다. 술과 담배에 찌들고, 탐욕스런 식습관에 매이고, 심지어는 마약을 상습복용하기까지 하며, 친구, 이웃,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때때로 범죄자가 된다. 하여 이들은 건강도 악화되지만 범죄에 노출될 확률 또한 더 높아지는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에 이른바 ‘묻지마 범죄’가 도처에서 일어나고 충격적인 (아동)성범죄가 연이어 터지면서 이들에 대한 법률적 응징을 강화하려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다. 약자에 대한 돌봄을 얘기하면서도 눈앞의 약자가 저지른/를 위험성을 과장하고 그를 적대시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그 한 예가 ‘아동 성폭력 범죄’에 대해 악마 담론이 부상하고, 그런 이들을 영원히 격리시키는 것으로 사회 청정화가 실현될 수 있다는, 이른바 형사국가적 여론이 크게 확산되고 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형사국가란 위험한 자를 거의 종신에 가깝게 격리 수감하는 방식으로 치안을 유지하려는 제도를 뜻한다. 이것은 비단 범죄자에 한정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2)에서 미래사회의 모습으로 그려냈던 것처럼, ‘예방적 치안 시스템’을 작동시켜 이른바 범죄 없는 사회를 만들어내고자 하려는 욕구가 넘실거린다. 한데 이런 식의 욕구는 종종 특정 집단을 가상범죄자로 간주하는 대중적 허상을 만든다. 흔히 이런 가상범죄자로 간주되는 이들은 이민자, 빈민, 성소수자, 부랑자 같은 이들이다. 하여 이들을 그 실체적 범죄 행위와 상관없이 ‘잠재적 범재자화’ 하는 제도들로 나타나게 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존속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생각까지도 형사적 문제로 다루는 법제라는 점에서 과잉형사화의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또 최근의 테러금지법도 마찬가지 우려를 남긴다. 복면금지법의 경우도 말할 것도 없이 과잉형사화라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밖에 사회적 편견에 기대어 형사적 대상을 확대하려는 시도들이 특히 MB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 더 많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그런 것들에 대한 정부차원의 자정장치인 국가인권위원회를 무력화시킨 것과 병행한다.
권력은 일상을 통제하는 능력, 심지어는 자기 내면을 통제하는 능력을 통해 더 완성도 있는 수준의 통제의 장치가 된다. 그런 논지를 명쾌하게 보여준 것이 푸코의 규율사회론이었다. 한데 형사국가화는 그런 규율사회의 가해자가 더 이상 지배자들에 국한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민 자신이 그런 가해적 사회의 지배자들이다. 자신이 일상 권력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사회, 아니 많은 경우에 지배-피지배의 피라미드 속에 얽혀 들어가 가학성과 피학성을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데 시민이 비시민에 대한 가학성을 욕망하는 것은, 긍정적 믿음이든 부정적 결핍감이든, 자신이 겪고 있는 저 피로감, 결핍감, 공포감을 회피하려는 무의식적 충동일 수 있다. 해서 규율사회든 피로사회든, 사람들은 가학성의 존재로 타자를 (무)의식적으로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병철 선생은 피로사회의 대안으로, 소질성 질환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기 내적 가능성으로, 그리고 어쩌면 타자에 대한 가학성의 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내적 가능성으로, 성과의 예외지대를 자기의 일상에 설치하는 행위를 얘기한다. 예컨대 안식일이 그렇다. 1951년 유대교 사상가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 1907~1972)이 했던 안식일 해석은 한병철의 예외지대를 한병철보다 더 적절하게 설명한다. 6일간의 창조는 신이 공간을 점령하여 생산적 세계를 만들어간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6일간의 노동은 공간을 점령하는 생산적 창조의 과정이다. 한데 신이 그 행위를 멈추고 쉼을 선택한 시간이 안식일이다. 하여 그날 사람들은 노동을 멈추고 자기를 성찰하라고 그는 권한다. 성과사회에서 자기를 성찰하는 인문학적 사색은 쓸모없는 시간 활용에 속한다. 한데 헤셸처럼 한병철도 그 시간을 성과의 예외시간으로 두는 행위를 피로사회를 견디는 방법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절반만 옳다. 안식일에도 쉼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는 그날에라도 일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이가 있고, 누구는 그날에도 영락없이 일해야 하는 비정규직의 서러움을 감내해야 하는 이가 있다. 또 누구는 그날 시험을 치러야 하거나 수시로 있는, 바늘귀 같은 시험을 통과해야만 미래를 간당간당하게라도 꿈꿀 수 있는 이가 있다. 혹 누구는 안식일에 쉼의 소중함을 누릴 만큼 안식일이 아닌 날 노동할 기회 자체가 없는 이가 있다. 하여 까딱하면 그이들은 안식일뿐 아니라 모든 날을 그렇게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을 형사국가는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이들에게 안식일은 성찰의 시간일 수 없다. 이에 대해 예수는 안식일을 성찰하며 보내라고 하는 대신 안식일 자체가 성찰하라고 일갈한다.(〈마가복음〉 2,27) 성과사회에서 소진되어 잠재적 범죄자의 대열로 추락하지 않으려 하기보다 그런 사회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라는 것이다. □
[참고자료]
제07강. 바리사이와 적대한 뒤, 갈릴래아 촌락 ‘밖’에서*
―떠돌이 예언자들
안식일법
촌락회당 안에서 예수는 바리사이와 충돌하고야 말았다. 그 결정적인 사건은 ‘안식일’을 둘러싼 갈등이다. 바리사이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가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것이고, 예수의 관점에서 보면 바리사이가 안식일을 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은 대개 그 사회의 존속을 위한 공공적 필요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준수하게 하려면 보상과 체벌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공공적 필요’란 법 제정의 동기이고, ‘보상과 체벌’은 그것의 결과다. 그러니까 이상적인 것은 법 적용에 따른 보상과 체벌이 그것의 제정 동기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법이 적용될 때마다 제정 동기에 부합하는지 물을 수는 없다. 법 자체로 보상과 체벌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여 법은 그것의 배경이 되는 역사로부터 탈출하여 보편적 지위를 주장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법의 정신 운운하는, 해석의 여지가 많은 모호한 요소보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내용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법은 그 제정의 정신을 넘어서 적용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여 특정 법을 둘러싸고 제정의 정신과 그 적용 사이의 관계가 적절한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이러한 논쟁은 그 법을 매우 건강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반대로 그런 논쟁이 불온시되면 법은 건강성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나의 논지는 예수와 바리사이 간의 안식일법을 둘러싼 논쟁이 바로 그런 양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지난주에 개략적으로 다루었는데 여기서 그것을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겠다.
우선 안식일법 제정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안식일 전승이 언제부터 어떤 이들에 의해 유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먼저 살펴볼 것은 〈열왕기하〉 4,23이다. 이것은 기원전 9세기 초의 예언자 엘리사에 관한 전승으로 되어 있는데, 어쩌면 그보다 반세기 앞선 엘리야 예언자의 전승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여기서 한 여인의 아들이 돌연사하자 그녀가 서둘러 예언자를 찾아 나선다. 한데 그녀의 남편은 안식일도 아닌데 그이에게 어떻게 찾아가려느냐고 묻는다. 이는 안식일이 예언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라는 상황이 전제되고 있다. 그것은 그날에 큰 제사가 수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비슷한 관행이 유다국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는 안식일에 거행되는 제사의 허례허식에 대해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이사야서〉 1,13)
이 두 텍스트를 통해서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국과 유다국에서 안식일마다 제의가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엘리사 설화에서 볼 수 있듯 그것은 일상과 깊게 얽힌 종교성이었다. 사람들은 난데없이 일어나는 일상의 위기를 견뎌내기 위해 일년에 겨우 몇 번 오는 명절보다는 7일마다 오는 안식일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한데 기원전 7세기 초 유다국에서 안식일법이 제정되었다. 그때는 요시야 왕 시절이다. 〈신명기〉 5,12~15이 이때 제정된 안식일법의 조문을 반영한다. 하지만 〈신명기〉의 안식일법보다 더 오래된 안식일법이 있었다. 〈출애굽기〉 20,8~11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계약법전’(Covenant Code)이라고 부르는, 성서의 법전중 가장 오래된 법문서에 수록된 십계명의 일부로 안식일법이 들어와 있다. 이 법전은 아마도 이스라엘국에서 유래한 것 같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국에서 먼저 안식일법이 제정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후에 유다국에서도 안식일법이 제정되었다는 얘기다. 아마도 요시야 왕실은 이스라엘국의 ‘계약법전’을 입수하여 그것을 참조하면서 독자적인 법전인 신명기법전(the Deuteronomic code)을 편찬했다는 얘기다.
다음 도표는 두 법전의 안식일법을 비교한 것이다.
위에서 보듯 두 안식일법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 내용은 이렇다. 안식일에는 반드시 쉬어야 한다. 쉼을 누리는 대상은 집주인, 자녀, 종, 가축, 그리고 식객(the foreigner that is within your gates)이고, 그런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이는 집주인이다. 한데 두 안식일법에서 다른 부분이 있다. 그것은 법 제정의 동기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출애굽기〉는 창조 때에 하느님이 쉬었으니 모두 그날엔 쉬라고 하는 데 비해 〈신명기〉는 출애굽 때에 하느님이 구출해 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쉬라고 한다. 전자는 쉼 자체가 우주의 질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면, 후자는 해방받은 것을 기념하는 쉼이다. 아마도 요시야 개혁의 주체세력은 안식일의 쉼이 일종의 ‘구원을 상징하는 가상적 체험’임을 명시하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안식을 실행하는 주체와 안식을 누리는 대상에 관한 내용은 일치하지만, 안식에 관한 철학, 그 법 제정의 정신은 다르다.
이러한 안식일법은 안식일 제사가 이스라엘국과 유다국에서 널리 거행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대중의 일상 깊게 스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관행대로 그날 제사를 드러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땅에 거주하는 모두에게 쉼의 날이 되게 하라고 한다. 여기서 제사와 노동금지는 어떻게 연관되는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날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안식일 제사는 여전히 중요한 행사였을 것이다. 여기에 안식일법은, 그날은 제사를 드릴 뿐 아니라 노동을 멈추고 쉬는 날임을 명시한 것이다.
한편 식민지 재건공동체 시대의 안식일법에서는 노동으로부터의 쉼이라는 요소가 사라지고 제사만이 강조된다.
엿새 동안은 일을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반드시 쉬어야 하는 안식일이다. 거룩한 모임을 열어야 하고,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날은 너희가 살고 있는 모든 곳에서 지킬 주의 안식일이다.
―〈레위기〉 23,3
계약법전, 신명기법전 등과 함께 성서의 3대법전이라고 불리는 ‘성결법전’(Code of Hollness)의 안식일 규정이다. 성결법전은 식민지 재건공동체 후기의 법문서다. 이때 유다재건사회는 사제 중심의 귀족과두체제의 사회였다. 사제가 중심인 사회니 제사가 중요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 ‘쉼’은 추상화되고, 노동으로부터의 쉼이라는 구체적 규정은 사라졌다. 오히려 ‘쉼’의 의미가 ‘고행’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이 날은 너희가 엄격하게 지켜야 할 안식일이다. 너희가 스스로 고행을 하는 날이다.”(〈레위기〉 16,31)
한데 사제중심사회라는 얘기는 중앙의 사제귀족의 권력이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중앙성전의 위상이 압도적으로 높아졌고 지방성전의 위상이 추락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과거 군주국 유다 시대의 요시야 개혁의 슬로건인 중앙성전 중심주의가 이 시대에 와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작동하자, 지방성소는 우상숭배의 장소로, 그러니까 폐기되어야 할 장소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방성소에서 제사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니 실제로는 여전히 상당히 많은 곳에서 여전히 제가가 수행되었을 것이다. 지배담론의 관점에서는 사교(邪敎)적 집회로 간주되었지만 적지 않은 대중은 그 제사를 통해 악령이 퍼뜨리는 재앙을 견뎌냈다.
그럼에도 중앙의 제사와 지방의 제사는 담론상 대립적이었다. 지방의 많은 사제들은 지방성소에서 벌어지는 제사의 제주(祭主)이고자 했지만, 중앙의 사제들은 지방의 사제들을 중앙성전에서 거행되는 제사에 차출되어 허드렛일 하는 하급사제가 되기를 요구했다. 하여 일부 사제들은 사교의 교주(敎主)처럼 군림했고 다른 일부의 사제들은 스스로를 하급사제로 간주하며 중앙권력에 예속되었다.
이렇게 사제중심적 사회로의 변화는 대중의 일상 속에서 안식일 제사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7일마다 거행되는 제사보다는 중앙성전에서 벌어지는 연중행사가 강조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앙의 관점이다. 대중은 여전히 일상을 덮치는 악령의 마수를 견뎌내야 했다. 그래서 지방의 사교화된 제사가 여전히 폭넓게 소비되었지만, 또 다른 구원의 장치가 필요했다. 문제는 7일마다 돌아오는 구원의 장치를 재가동되는 동력이 무엇인가였다.
여기서 우리는 ‘글’을 주목하게 된다. 과거 글은 중앙정치세력이 탄탄한 정치경제적 기반을 갖추었을 때 활용된다. 저장성(Storage capacity)의 차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글’이라는 매체는 왕을 까마득하게 먼 조상, 심지어 신과 연계시킬 수 있는 탁월한 도구였다. 해서 글을 통해 왕은 신에 준하는 막강한 위상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글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지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데 있다. 즉 백성이 철저히 탈주체화된 사회에서 글은 통치의 주된 도구였다.
한데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사회에도 문자혁명의 시대가 있었다. 그것은 우선 상형문자가 아니라 알파벳문자가 널리 활용되는 시대와 맞물린다. 대표적인 것이 아람어와 헬라어다. 시리아 지역어의 국제화된 언어로서의 아람어의 대두가 페르시아 제국의 정치경제와 관련이 있다면, 그리스 지역어의 국제화된 언어로서의 헬라어의 대두는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후계자들의 제국들(헬레니즘제국들)의 정치경제와 관련이 있다. 지난 1강과 2강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시대에 특히 민간서기관들이 대거 등장하여 문자의 대중화를 추동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대중을 등에 업고 중앙정치에 진출하여 개혁정치를 펴는 일이 잦았다.
유다국의 요시야 개혁도 문자를 정치에 활용했고 대중을 등에 업은 개혁정권이긴 했지만, 이때 글이 대중정치의 장치로 작동했는지는 잘 입증되지 않는다. 하지만 페르시아와 헬레니즘 시대에 대중을 추동한 문자계층의 등장을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묵시문학이나 지혜문학(〈잠언〉 〈전도서〉 등), 그리고 통속소설(〈욥기〉 〈에스더기〉 〈룻기〉 등)은 문자가 대중과 소통하는 데 일련의 역할을 했던 흔적들이다. 비록 대중은 글을 읽지 못했지만 글을 읽는 이가 대중에게 낭송의 형식으로 들려주곤 함으로써 글의 소비자가 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 억울한 일이 있어 재판을 받을 때 민간서기관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과거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확장된 국제교역 과정에 일정한 역할을 부여받은 이들도 거래장부를 위해 민간서기관의 도움을 받았다. 아무튼 글은 읽든 읽지 못하든 놀라울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이때 대중사회에서 글이 종교성을 표현하는 새로운 도구가 되기도 한다. 마치 동물 같은 형상이 종교적 상징이 되듯 글자가 종교가 된 것이다.
이런 변화는 대중과 가까이 있는 문자계층이 대중의 지도자가 되는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데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에서 이런 이들을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명칭이 ‘바리사이’(φαριαιος)였다.(1) 그들은 아직 어떤 강령을 가진 종파집단이 아니었지만, 촌락사회에 대중을 이끄는 계층적 주체였다.
여기서 우리는 위에서 인용한 〈레위기〉의 안식일 규정의 ‘거룩한 모임’(qodes miqra, holy convocation)이라는 표현에 주목하게 된다. 안식일을 지키는 데서 제사가 중요해졌던 시대의 산물이라고 했다. 해서 노동으로부터의 쉼이라는 사회적 함의는 안식일에서 사라졌다. 대신 추상적인 표현으로서 ‘쉼’이 강조되었다.
그런데 제사가 중요해졌지만, 중앙의 제사가 부상한 만큼 일상의 영역에서 안식일이 구원의 장치로 작동되는 새로운 양식이 요청되었다고 했다. 〈레위기〉의 구성주체인 엘리트 사제들은 안식일에 ‘거룩한 모임’을 제사를 대신하는 구원의 장치를 만들려 했다. 하지만 아직 그것은 모호했다. 그 모임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지, 누가 할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한데 점차 그 자리에 촌락회당(συναγωγή)이 들어섰다. 그리고 점차 그곳을 바리사이 같은, 소자산가적 대중엘리트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바리사이들들에게서 안식일 신앙은 다시 재동력화되었다. 이때 그 새로운 구동 장치가 바로 ‘글’이었다. 율법으로 해석된 다섯 권의 책 ‘토라’는 대중에게는 너무 먼 텍스트였다. 그것은 이전까지는 사제들의 율법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그 문자 덩어리를 일상의 계율들과 매칭시키는 가르침을 배우는 장소, 그것을 지키거나 지키지 못함으로써 보상과 체벌을 받는 것을 확인하는 장소, 그것이 바로 촌락회당이었던 것이다.
하여 극단적으로 대중은 회당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자와 들어가지 못하는 자로 나뉜다. 이때 회당 안의 사람들은 구원의 가능성 앞에 열린 죄인이다. 그것이 가능성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회당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안과 밖의 이분법은 바리사이적인 회당체제가 작동되는 데 있어 필요불가결한 요소인 것이다.
한데 예수는 그밖으로 혹은 내몰릴 자들의 시선에서 안식일 율법에 대해 묻는다. 왜 안식일은 구원의 장소가 되면 안 되는가. 특히 밖으로 내몰린/릴 이들에게 말이다. 바로 이 문제가 예수와 바리사이의 안식일 논쟁의 핵심이었다. 그것은 바리사이적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며 따라서 바리사이는, 적어도 그들의 상당수는 예수와 더 이상 공존할 수 없게 되었다.
떠돌이 예언자들, 대중활동과 은거의 장소
그들(베드로와 안드레)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1,18)
그들(요한과 야고보)은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1.20)
그(바르티매오)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10,50)
〈마가복음〉에서 제자로 부름받은 이들의 행동을 묘사하는 구절들이다. ‘따르다’는 단어와 ‘버리다’는 단어가 공통으로 쓰였다. 예수의 제자됨이란 ‘버림과 따름의 에토스’로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을 둘씩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명하시기를, 길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하나 밖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빵이나 자루도 지니지 말고, 전대에 동전도 넣어 가지 말고, 다만 신발은 신되, 옷은 두 벌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곳을 떠날 때에 너희의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서, 그들을 고발할 증거물로 삼아라.”
―〈마가복음〉 6,7~11
여기서도 예수의 제자됨에 관해 비슷하게 묘사한다. 그 핵심은 어느 곳도 상주하지 말 것이고, 떠돌아다닐 때 최소한의 구비품 외에는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서 독일의 성서학자 게르트 타이쎈은 예수운동의 핵심 에토스를 유랑과 무소유라고 말했다. 여기에 떠돌이들이니 가족을 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니 무가족의 에토스가 부가된다. 실제로 예수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가복음〉 3,33~35)라고 말했다.
한데 이것이 처음부터 에토스였던 것은 아니다. 지난 두 주 동안 얘기한 것처럼 예수는 요한이 잡힌 뒤 가버나움의 동료들의 집에 은거하면서 하느님나라 활동을 벌였다. 그때는 마을회당들을 돌아다니면서 활동하다가 가버나움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물론 이때도 한 곳에 계속 머물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것은 안티파스의 공권력의 추격을 받으며 활동해야 했던 탓이다.
그런데 바리사이와 갈등하게 되면서 이젠 마을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하여 예수 일행은 마을 밖을 전전하며 활동했다. 이때 그의 활동은, 이전에도 그랬듯이 두 차원으로 나뉜다. 공개적 활동과 비공개적 활동이다. 그 필요는 역시 안티파스의 공권력에 노출되지 않은 채 활동해야 했던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공개적 활동, 즉 그의 하느님나라의 대중운동적 차원은 요한을 추종하던 때엔 ‘베레아의 호수가’, 그가 잡힌 뒤 갈릴래아에서 활동하던 초기엔 ‘촌락회당 안’, 그리고 후기엔 ‘마을밖 공터인 호숫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상경했을 때엔 ‘성전’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하고 펼쳐졌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많은 사람이 따라왔다. (3,7)
예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매우 큰 무리가 모여드니, 예수께서는 배에 오르셔서, 호수 쪽에 앉으셨다. 무리는 모두 호숫가 뭍에 있었다. (4,1)
예수께서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다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예수께로 모여들었다.(5,21)
한편 그밖에도 어떤 ‘집’이나 ‘거리’에서 대중들에게 하느님나라를 설파하는 얘기가 간혹 나오는데, ‘집’과 ‘거리’는 촌락회당 안에서 밖으로의 전환과 무관하다. 하여 마을 안과 밖이라는 장소성의 전환이 갖는 의미를 주목한다면 ‘촌락회당’과 ‘마을 밖 호숫가’라는 장소성에 주목하게 된다. 여기서 ‘마을 밖 호숫가’라는 장소성에 대하여는 나중에 더 자세이 이야기하겠다.
떠돌이 예언자들, 활동 양식
예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또한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3,14~15)
여기서 ‘말씀 전파’와 ‘축귀’, 이 두 가지가 예수운동의 활동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 두 요소에 대하여는 다른 강의에서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지만 간단히 말하면 ‘말씀 전파’란 하느님나라가 도래했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것에 관한 메시지를 말하고, ‘축귀’란 악령 들린 이를 치유라는 행위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바리사이적 안식일법의 밖으로 내몰린 병자의 치유라는 점에서 바리사이적 질서와 대립하고 있다.
(1) 이 표현은 ‘분리하다’는 뜻의 아람어 Pərīšā (복수형은 Pərīšayyā)를 음역한 것이다.
출처: https://owal.tistory.com/583?category=195677 [올빼미의 밥상(김진호. 민중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