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8

열등감으로 파멸에 이르는 '피아니스트' < 문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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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으로 파멸에 이르는 '피아니스트'
기자명 강현 기자
입력 2024.02.06

[김미옥의 종횡무진]

(김미옥 문예평론가)


당신의 열등감 2

영화가 된 문학이다.

지난 글에서 영화 <오펜하이머>에 드러난 열등감은 인간관계의 핵폭탄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열등감을 내가 화제로 올렸던 첫 작품은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였다.  이 작품은 영화감독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로 제작되어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와 남녀 주연상을 수상했다.

독자들이나 평론가가 『피아노 치는 여자』를 읽고 쓴 글을 보면 거의 비뚤어진 성 의식에 대한 사도마조히즘과 폭력성이다. 좀 더 나아간 서평은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을 들먹인다.

내 생각은 좀 달랐다.

나는 내 인생의 멱살을 쥐고 흔든 엄마와 평생 애증 관계로 지냈기 때문에 이 소설은 내게 남다른 것이었다.  작품의 내용은 딸에게 집착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딸의 이야기다.

아파트에서 둘만 사는 모녀는 부부에 가깝다.
어릴 때부터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으며 피아니스트로 성장한 에리카는 30대 중반의 노처녀다.
엄마는 정신적으로 그녀를 억압하고 둘은 떨어질 수 없을 만큼 결속된 관계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에게 독신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필요없다는 것이 엄마의 주장이다.
딸의 생활 전체를 통제하는 엄마는 끊임없이 최면을 건다.

세상에 ‘유일하고 단 하나뿐인 존재’인 딸이 다른 사람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갖지 못하도록 차단해 버린다. 딸의 화장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남자들의 시선을 끌까 싶은 우려 때문이다.

성적으로 차단된 에리카는 남자와 잘 수도 없이 늙어간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야외극장 카섹스를 하는 연인 곁에서 방뇨를 하거나 자신의 몸에 면도칼로 자해하는 것이다.
그녀의 행위는 욕망의 굴절된 표현으로 보인다.

어느 날 그녀에게 피아노를 배우겠다는 젊고 잘생긴 대학생 발터 클래머가 나타난다.
그는 못 생기고 초라한 그녀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
사랑은 전체가 아니라 부분에서 시작하지 않는가?

열정적인 청년의 접근에 에리카는 당황한다. 처음 키스를 나누는 장면은 더러운 공중화장실이다. 화장실은 그녀의 무의식 속 섹스는 더럽고 추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영화 '피아니스트' 속 한 장면)

사랑을 한 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 그녀는 난감하다.
그녀도 청년의 눈부신 젊음에서 애정을 느낀다. 여기서 에리카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병적으로 성을 금기시하는 ‘엄마’와 사랑하는 남자에게 욕정을 느끼는 ‘나’와 자신과 자고 싶어 하는 ‘연인’의 욕망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그녀가 택한 것이 밤중에 남자가 강도로 들어와 엄마를 다른 방에 감금하고 자신을 성폭행하게 하는 일이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건강한 청년은 시키는 대로 그녀를 폭행하지만 변태적인 애정행각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에게 모녀는 미친 사람들로 보인다.

남자는 이별을 통보하고 건강하고 젊은 여대생과 정상적인 데이트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남자에게 거절당한 에리카가 길을 걸으면서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찌른다.

나는 이 작품을 열등감의 왜곡된 굴절로 보았다.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엄마의 열등감은 딸에게 투사되어 결국 파멸로 치닫게 했다.
소설도 영화도 내겐 열등감의 모든 것이었다.

작품은 작가의 자전소설인데 마지막 장면의 죽음은 엄마에게서 정신적 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었다. 이것이 소설의 매력이다. 자신의 이야기에 소망을 덧대어 하나의 진실로 완성시키는 것.

돌아보라.
혹시 내가 가까운 사람을 잃을 때 그 저변에 열등감이 있지 않았던가.
완벽한 정상이 있기나 한 것인가?

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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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랙뤼미에르의 영화 뒤집기 `피아니스트` 가학과 피학의 혼재, 아름다운 선율의 섬뜩함
https://www.mk.co.kr/news/culture/7378473
입력 :  2016-06-09

200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엘프리데 옐리네크.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인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가 영화 <피아니스트>의 원작이다. 어머니의 집착으로 음악대학에 입학했지만 증오와 반항으로 독문학을 공부, 작가가 된 옐리네크. 그녀의 도전적인 문체, 노골적이고 섬뜩한 성 묘사 그리고 작품을 관통하는 난해한 문제 의식은 그대로 영화에 투영되었다. 물론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폭력성을 거칠게 정제한 연출, 이자벨 위페르의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가 되는 섬세한 연기를 더해서.

 
2001년 칸영화제 주인공은 <피아니스트>였다. 이 영화는 대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아차 싶었던가. 칸영화제는 규정을 바꾼다. ‘앞으로 한 작품에서 남녀주연상을 모두 수상하지 못한다.’ 사실 <피아니스트>는 칸의 주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감독은 칸이 사랑하는 감독 미카엘 하네케, 에리카 역은 프랑스의 위대한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이기 때문이다. <퍼니 게임>, <아무르> 등의 작품에서 ‘답을 보여주기 보다는 질문을 퍼붓는 것’이 영화 본연의 임무임을 여실히 보여준 하네케, 1978년 폭력을 일삼는 부모를 살해한 창녀 비올렛을 완벽하게 연기해 그해 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자벨 위페르, 두 사람에게 칸은 이미 언제 찾아도 문을 열어주는 ‘고향집’이기 때문이다. 음악 학교의 피아노 교수 에리카(이자벨 위페르)는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진 공대생 윌터(브누아 마지멜)를 만난다. 첫눈에 에리카에게 반한 윌터. 그는 적극적으로 에리카에게 접근한다. 40대 독신으로 어머니와 살고 있는 에리카는 차갑고 냉정한 성격. 그녀는 윌터의 사랑을 밀어내지만 점차 그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머뭇거림도 잠시, 에리카는 자신이 평소 꿈꿔왔던 은밀하고 치명적인 방식의 사랑을, 편지에 적어 월터에게 요구한다. 그것은 두 사람에게 사랑이 아닌 비극의 시작이 된다.


나이 많은 여선생과 젊고 핸섬한 청년의 세대를 뛰어넘는 사랑? 아니다. 영화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부담스럽고 거칠고 때로는 역한 기운을 뿜어낼 정도의 파격이 담겨 있다. 하네케 감독은 질문한다. ‘사회가 용납하는 윤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기준이라는 믿음에 숨어있는, 즉 사회에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거짓은 무엇인가?’ 이 난해한 질문의 답을 찾는 시작의 전제 조건은 ‘미친 것’이다. ‘슈베르트, 슈만. 그들은 미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왜! 그들은 미쳤으니까’라고 말하며 영화는 첫 음절을 시작한다. 그리고 에리카의 겉과 속을 마치 투시 카메라처럼 비춘다. 에리카는 하나가 아니다. 차가운 지성의 교수 에리카, 남편의 정신분열로 고통 받고 오직 에리카만을 바라본 어머니의 속박에 사로잡힌 딸 에리카, 월터의 사랑 앞에서 가학의 사랑을 주고 싶고, 피학의 사랑을 받고 싶은 여인 에리카. 그 어떤 캐릭터이든 정상은 아니다. 포르노극장에서 누군가의 욕망이 뭉쳐있는 휴지를 코에 댄다. 자동차극장에서 카섹스를 지켜보며 욕망을 채운다.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온전한 자신만의 공간인 화장실을 찾는다. 그리고 정신분열증 환자였던 아버지의 면도칼로 자해하며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으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에리카는 무엇을 얻고, 확인하고, 느끼고 싶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관계와 욕망 그리고 숨겨진 결핍의 이야기는 당혹스럽고 충격적인 지점까지 치닫는다. 영화의 질문에 굳이 답을 찾지 말자. 그것은 감독이 설치한 사도마조히즘의 혼재를 파괴하는 것이다. 무서울 정도로 완벽한 연기를 보여준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 선율은 단연 커튼 콜, 기립 박수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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