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3

아사카와 다쿠미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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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

최근 수정 시각: 
아사카와 다쿠미
浅川巧あさかわ たくみ
Takumi Asakawa
Takumi
출생
사망
1931년 4월 2일[1] (향년 40세)
직업
임업기사, 도예 연구가
가족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2]
주요 업적
잣나무 종자의 노천매장 발아촉진법 개발(1924)
조선의 소반(朝鮮の膳) 저술(1929)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 저술(1931)

1. 개요2. 출생3. 생애4. 죽음5. 평가6. 기타7. 영화화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본 국적의 한국 내 활동하던 도예 연구가.

일제강점기 시절 대표적인 친한파 인사였으며 후세 다츠지와 더불어 조선에 도움을 주었던 일본인으로서 추앙받는 인물이다.

2. 출생[편집]

일본 야마나시현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으로 오기 전까지는 야마나시에서 소학교와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아키타현의 대관 영림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다 경성부 남대문공립심상소학교에서 미술교사로 부임하고 있던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3]의 권유로 1914년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산림과의 임업기사로 일하게 되었다.

3. 생애[편집]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임업연구소에서 근무하며 당시로는 획기적인 '오엽송 노천매장법'이라는 양묘법을 고안했다. 그는 이를 활용하여 그 당시 2년이 지나야만 양묘가 가능했던 조선의 소나무들을 1년으로 단축시킬 수 있었다.[4] 경기도 광릉수목원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고 국립산림과학원 정원에 있는 1892년생 소나무(盤松)도 1922년 홍파초등학교에 있던 것을 그가 옮겨 심은 것이다.

다쿠미의 주 업무는 양묘였으므로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자연스레 조선 사람들과 조선 문물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5] 그러던 가운데 그는 형 노리다카의 조선 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깊이 공감하고 함께 도자기를 찾아 조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도자기는 물론 조선의 민예품들도 큰 관심을 두고 몰두했다. 그는 '조선의 소반(朝鮮の膳)'(1929)과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1931)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한국에는 한 권으로 묶어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학고재, 1996)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조선의 소반에서 그는 "올바른 공예품은 친절한 사용자의 손에서 차츰 그 특유의 미를 발휘하므로 사용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소반은 순박, 단정한 아름다움이 있으면서도 우리 일상생활에 친히 봉사하여 세월과 함께 아미(雅美)를 더해가므로 올바른 공예의 대표라고 칭할 수 있다."라고 평가하며 책을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1916년 8월, 그의 생애에서 큰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찾아왔는데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 만난 것이다.[6] 아사카와 다쿠미의 형 노리다카가 소개하여 야나기와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야나기는 직감적으로 다쿠미가 수집해 놓은 조선 민예품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 공예에 눈을 떴다. 결과적으로 다쿠미는 야나기가 공예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동기부여를 해준 장본인이 된 셈이고, 그 후 야나기가 조선미술품을 수집하는 데 최고의 안내자 역할을 했다.

아사카와가 경성에 거점을 두고 조선 민예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야나기에게 전수하면 야나기는 일본에서 조선 민예의 이론을 정립하고 전파하는 노릇을 했다. 조선을 통해 민예의 미를 발견한 야나기는 후에 일본 민예로 그 영역을 넓혔다. 조선민족미술관이란 곳을 열기도 했는데 장소 확보와 자금 조달 등의 임무를 야나기가 맡고 전시품을 수집하고 관리하는 등의 실무는 아사카와가 도맡았다. [7]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해방 이후 수집품들을 처리하는 과정이었다. 당시 많은 일본 학자들은 한국의 불안한 정세와 미성숙한 학문성적을 신용하지 못하겠다며 대부분 연구품들을 일본으로 가져갔다.[8] 그러나 이러한 학자들과는 다르게 아사카와 타쿠미와 야나기 무네요시는 자신들이 수집한 물품 3,000여점 전부 한국 정부에게 기증하였고, 이렇게 받은 것들은 한국 연구가들에게 소중한 연구자료가 되었다.

4. 죽음[편집]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서울 망우리 묘지에 묻힌 그의 묘비명

아사카와 다쿠미는 1931년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다가 과로로 4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는 죽기 전 '조선식 장례로 조선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여 자신이 살던 경기도 이문리에 묻혔다가 몇 년 후 망우리공원[9]으로 옮겨져 오늘날까지 이어진다.[10] 그가 모은 항아리를 본따 만든 탑이 그의 무덤 앞을 지키는데, 산림청에서 무덤을 주기적으로 관리한다고 한다.

5. 평가[편집]

그 당시 한국에서 소반이나 도자기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이었지, 예술품으로 대접받으리라는 생각은 별로 없었고 일본인들 중에서도 조선 도자기는 예술품이기에 앞서 사치품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아사카와 타쿠미는 그러한 사회적인 시류 속에서도 한국 공예품들을 잘 정리하여 후에 한국 공예연구를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일본의 많은 연구가들은 조선 문화에 대해 중국 문화의 아류라고 평가절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 문화만의 독창성을 찾아 연구하며 후세의 연구가들에게 아래와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었다.
피곤으로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을 따라 흉내를 내기 보다 갖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자신으로 찬 날이 올 것이다. 이는 공예로만 국한한 것이 아니다.

당대 현실에서 그는 일반적인 일본인들에겐 결코 좋게 평가받을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인격과 평소 생활에 대해 깊이 알고 있는 지식인들이나 총독부 고위 관료 중 극히 일부는 그를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존경했고 물론 당대 조선인들에겐 거의 숭배에 가깝게 존경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본인 대부분은 그를 대단히 이상한 인물로 여기면서 싫어했었다. 일종의 조선도자기 혹은 조선소반 오타쿠쯤으로 취급 받았다고 보면 된다. 한편 오늘날은 당연히, 그에 대해 알게 된 일본인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6. 기타[편집]

조선 공예품을 사랑함에 그치지 않고 조선과 조선 사람들도 사랑했던 사람이다. 1914년 24세 나이로 조선에 부임했을 때, 일기에 '조선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몇 번이나 고향으로 돌아갈까' 생각하기도 하였고 '내가 조선에 있는 것이 언젠가는 무슨 일에든 요긴하게 쓰일 수 있게 해 주소서'라고 이야기 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사는 한 한국인과 같은 것을 먹고 마시며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을 써야겠다'고 결심하여 조선인 마을 온돌방에서 지내며 바지저고리 차림과 망건을 쓰고 외출했는데 일제의 무단통치가 절정일 때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개인적인 인품도 좋아서 많지 않은 월급으로도 절반을 조선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고 적지 않은 조선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어 졸업시켰다.

아사카와는 그 당시 한국 지식인들과도 면식이 있어 1920년대 문예잡지인 ‘폐허[11]’ 활동인들과도 교류하였다.

그가 남긴 일기에서 아사카와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가 일본에서 보낸 광화문 철거 반대 기고문을 당시 동아일보 장덕수 주필에게 넘겨 게재한 적도 있다고 한다.

7. 영화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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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핑크영화계 쪽에서 유명한 다카하시 반메이가 2012년 영화로 제작하였다.

줄거리가 전반적으로 약간 루즈하다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으나 관심이 있다면 볼 만하다.

8. 관련 문서[편집]

[1] 식목일 기념행사 준비중에 순직[2] 생몰: 1884년 ~ 1964년. 일본의 조각가로 동생 다쿠미와 마찬가지로 그도 조선의 도자기에 연구하던 사람이었다. 1906년 야마나시 사범학교를 졸업했고 1924년 경복궁 안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다. 그가 모았던 소장품은 해방 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고향인 야마나시현에 형제를 기리는 노리타카·다쿠미 형제 기념관이 있다.[3] 형인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도 나중에 일본에서 '조선 도자의 신'이라 불리며 일본 내 조선 도예학의 최고 권위자 중 하나가 된다.[4] 조재명 전 임업연구원장은 한국 인공림 37%가 다쿠미 선생이 공을 들인 나무라고 했다. #[5] 실제로 그는 당시 조선어를 아주 능숙하게 했다.[6] 야나기는 일본 문예운동의 중심이자 해군 장성의 아들로 도쿄대 철학과를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부친의 후배인 사이토 조선총독의 힘을 활용해 조선민족박물관을 설립하고 일본에서 조선의 민예를 이론적으로 전파하는 데 큰 족적을 남겼다. 이외에 한국의 문화를 한의 정서로 규정한 인물이기도 하다.[7] 조선민족미술관은 광복 후 국립민속박물관으로 개편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8] 이 때문에 한일협약에서 문화재반환 문제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9] 망우리 공원 묘지는 방정환한용운이중섭 등 한국 위인들이 많이 묻혔기로 유명하다.[10] 망우리 공원에 있는 유일한 일본식 무덤인지라 눈에 쉽게 띈다.[11] 염상섭이광수나혜석 등 쟁쟁했던 작가, 예술가들이 있었던 그 잡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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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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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1891년 1월 15일 ~ 1931년 4월 2일)는 일제 시대 한국에서 근무한 일본인이다.
생애[편집]

야마나시현 출신. 조선총독부 산림과에 근무하며 산림녹화에 힘썼다. 그의 형은 '조선 도자기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아사카와 노리타카이며, 자신도 조선의 공예를 좋아했다. 형에게 조선의 도자기 파편을 구해 보내주는 한편, 자신은 조선의 소반(밥상)을 연구하며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다. 그의 고향인 야마나시현 호쿠도시노라다카·다쿠미 형제 기념관이 세워졌다. 그는 40세에 요절하여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1]
민예운동에 영향[편집]

아사카와 다쿠미의 영향으로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이를 일본에 소개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예운동을 시작한 배경에는 조선 백자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고 한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웠고, 이 소장품은 후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계승됐다.
한국의 조림[편집]

당시 한국 잣나무는 2년간 길러야 양묘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아사카와씨가 고안한 양묘법 덕분에 1년으로 단축할 수 있었으며, 2011년 현재 한국의 인공림 37%에 잣나무가 심겨져 있다. 아사카와는 조선의 민둥산을 푸르게 하는 것이 소명이라 믿고, 전국을 다니며 맞는 수종을 고르고 식목을 거듭하여 자연 상태 흙의 힘을 이용하는 '노천매장법' 방식으로 조선오엽송 종자를 싹 틔우는 방법도 개발했다.
영화[편집]2012년 아사카와 다쿠미의 일생을 그린 일본 영화 '백자의 사람: 조선의 흙이 되다(일본어: 道〜白磁の人)가 개봉했다. 에미야 다카유키의 소설 《백자의 사람》이 원작이다.
기타[편집]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비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적혀 있다.[2]
각주[편집]
전병근, 일제시대 한국을 그토록 사랑했던 일본인 아사카와 망우리 묘지엔 아직도 참배객들이 늘어선다는데…, 조선일보
한국일보 성혜경, 삶과 문화/9월 16일-아사카와 형제, 노리타카와 다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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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를 기리는 사람들...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巧) 형제 추모회’의 잔영(殘影)

비바람이 멈춘 다음날, 야마나시(山梨)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구름들이 휘감고 있는 3,776m의 후지산(富士山)이 한눈에 들어왔다. 구름 사이로 몇 줄기 만년설도 보였다. 시즈오카(靜岡) 여행 시절 후지산을 여러차례 통과하면서도 구름의 훼방으로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이날은 운(運 )좋게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자! 갑시다.”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다쿠미(巧) 형제 추모회’의 치노 쓰네오(千野恒郞·77) 회장이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앞장섰다.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형제의 생가 터


두 형제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 터는 자료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다카네초(高根町) 고초다(五丁田) 294번지. 동쪽으로는 긴포산(金峰山), 남동쪽으로는 후지산, 북쪽으로는 야쓰가타케(八ヶ岳)가 보이는 아늑하고 예쁜 농촌이었다. 노리타카·다쿠미 형제는 이러한 자연 속에서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생가 터에는 말뚝 세 개뿐 아무 것도 없었다.



아사카와 형제의 탄생지 비석


“생가를 복원해서 문화관을 만들면 어떨까요?”

필자가 치노(千野) 회장에게 의견을 제시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렇지 않아도 저희 추모회가 나고야(名古屋)에서 살고 있는 땅 소유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값을 비싸게 부르더군요(웃음).”

추모회의 모금으로 땅을 사는 것은 버거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치노(千野) 회장의 표정으로 봐서 언젠가는 뜻이 이뤄질 것으로 보였다.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의 탄생지’라는 비석도 생가 터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공원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이 또한 추모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일 듯싶었다.

450여 명이 참석한 총회, 날씨만큼 뜨거워

노리타카·다쿠미 형제를 추모하는 모임의 총회는 6월 16일 오후 1시 30분부터 ‘야스가타케(八ヶ岳) 메아리 홀’에서 열리는 것으로 예고돼 있었다. ‘메아리 홀’이라는 이름이 야마나시의 특성과 잘 맞아 떨어졌다.

오후 1시가 되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젊은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450여 명 홀의 좌석은 삽시간에 꽉 메워졌다. 1시 30분이 되자 사무국장 히나타 요시히코(比奈田善彦·65)씨가 마이크를 잡고서 총회의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아사카와(淺川) 형제를 추모하는 모임의 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호쿠토(北杜) 시장·시의회 의장 등 내빈 소개에 이어서 치노 쓰네오(千野恒郞) 회장이 인사말을 했다.



인사말을 하는 치노 쓰네오 회장



“회원 여러분! 레이와(令和) 원년 6월 16일, 저희 모임의 총회가 성황리에 개최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희 추모회는 1996년에 발족한 이래 23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회원이 많아진데 대해 참으로 감사드립니다...특히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는 지난 2015년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세계의 70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명실 공히 ‘한일을 연결하는 가교(架橋)를 건설한 인물’로 평가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고, 서울시 망우리에 있는 그의 묘역에 ‘한일 우호의 표지석’을 설치하려는 것을 실현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양국의 우호관계가 걱정이 되고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민간의 교류를 추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사카와 형제의 마음’은 지금도 일본과 한국에서 살아 있습니다. 두 형제의 박애 정신을 한일 양국의 차세대에 계승시키기 위해서, 한국문화원과 도쿄한국학교, 호쿠토시의 교류를 보다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치노 쓰네오 회장은 ‘민간교류를 확대해서 양국의 거리를 좁히자’면서 ‘아사카와 형제의 박애 정신을 후세에 계승하자’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다. 정치성이 없는 순수한 민간교류의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총회에서는 사업 방향과 예산 집행 등 여러 가지 현안들을 논의 했으나, 중요한 안건은 ‘다쿠미의 기념비’에 대한 것이었다.



어떠한 내용일까.



조선일보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광복 70주년(2015년)을 맞아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세계의 70인에 아사카와 다쿠미가 포함됐다’는 사실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다. ‘아사카와 노리타카·타쿠미 형제 추모회’ 회원들은 ‘한국 발전에 기여한 인물(아사카와 다쿠미)’에 큰 의미를 두고, 그의 족적을 길이 남기기 위해서 정성스럽게 모금 운동을 펼쳤다. 정성의 결과물은 오는 10월, 그의 묘역에서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이번 총회에서는 이명렬(李明㤠·54) 주(駐)요코하마대한민국총영사의 기념 강연이 눈길을 끌었다.

요코하마 총영사의 강연...참석자들로부터 뜨거운 박수 받아




강연을 하는 이명렬 요코하마 총영사

“오늘 이토록 귀중한 자리에 초대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아사카와(淺川) 형제의 이야기는 책과 영화(道, 백자의 사람)를 통해서 한일 양국에 소개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100년 전에 민족의 벽을 넘어 한국의 삼림과 한국인을 사랑한 아사카와 선생은, 지금도 많은 한국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일본인입니다.(...)

화제를 잠깐 바꾸겠습니다. 유전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DNA분석에 의하면 한국인과 일본인은 대부분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양(兩)민족은 유전자적으로 사실상 형제의 관계인 것입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일본은 혈연관계로 여겨 지원군을 파견할 만큼 형제의 관계였다고 역사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일 양국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통한 교류에 의해서 한일 관계의 진정한 정상화가 이뤄지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강연을 듣는 참석자들의 진지한 모습


참석자들은 이명렬 총영사의 강연 내용이 자신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듯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박수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산골마을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후지카와(富士川)이야기...한일관계의 토대는 사람

연극 ‘후지카와(富士川) 이야기(物語)’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극(劇)의 내용이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준비를 위해서 전투기의 재료인 알루미늄이 필요했다. 알루미늄 공장 운영을 위한 대량의 전력이 필요한 까닭에 각 지역에 발전소 건설을 추진했고, 후지카와의 취수를 위한 터널 공사도 있었다. 여기에 많은 조선인이 동원됐다. 이들 중에 초등학교 6년생인 손춘임(孫春任)이 있었다. 일본 이름은 하루코(春子). 이들 가족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기도 했으나, 인정 많은 일본인 선생님(武井善人 분)도 있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목포의 눈물이 배경으로 깔리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도라지 타령을 하는 노동자(雨宮徹周 분)의 연기도 일품이었다.



도라지 타령을 하면서 막걸리를 마시는 극의 한 장면


<이 산에서 목숨을 잃은 동포여!/ 이 강에서 목숨을 잃은 어린이여!/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저 쪽의 나라로부터/ 빛이 되어 찾아 오리요.>

이 연극은 야마나시 현민(県民)문화제에서 상은 받을 와타나베 슈코(渡邊修孝)씨의 수필<손춘임의 일>을 희곡으로 만든 것이었다. 97세의 와타나베씨가 무대에 올라 관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연극이 끝난 후 메아리 홀의 로비에서 극작가 미즈키 료(水木亮·77)씨를 만났다. 그의 말이다.

“후지카와는 나가노(長野)·야마나시(山梨)·시즈오카(静岡) 현을 흐르는 128km의 강입니다. 이 강은 인간의 삶과 흐름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극의 내용은 후지카와 강변에서 일어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작가도, 배우도, 관객들도 ‘한일관계의 토대는 사람이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는 듯했다. 하루코(春子)를 넘어 손춘임(孫春任)의 마음으로(계속).

입력 : 2019.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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