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생리학 "다섯가지 몸의 층" 그리고 요가니드라를 통한 아난다마야 꼬샤의 경험
관리자2020.5.5
다섯가지 꼬샤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마음을 의식과 잠재의식, 무의식의 세층으로 여 기고 있는 반면, 요가 철학에서는 그것을 조잡체, 미세체, 원인체의 세 면으로 본다. 이 세 부분은 다시 우리 존재의 가장 조잡 한 것으로부터 가장 미세한 면까지 인간의 품성의 전적인 발현을 이루는 다섯가지 꼬샤로 세분되어진다. 다섯가지 꼬샤는 요가교과서에서 다음과같이 정의하고 있다. 다섯가지 꼬샤는 아래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의식의 심리적면 관계되어 있다.
1. 안나마야 꼬샤(음식물로 유지)는 감각을 통하여 인지되는 혈액, 뼈, 피부, 등의 생리적인 몸이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조잡한 단계이다.
2. 쁘라나야마 꼬샤(기의 몸)는 기(에너지)나 원생질에너지의 흐름을 구성하는 인간구조의 에너지연결망 아래에 있다.
3. 마노야마 꼬샤(정신적 몸)는 의식의 반구내에 있는 의식작용층이다.
4. 비기야나마야 꼬샤(고도의 정신체) 는 행성에서 작용하는 우리 인성의 한 단면이다. 이것은 꿈꾸는 동안 신체적 경험을 떠나 다양한 심리현상을 몸이다.
5. 안나다마야 꼬샤(축복받은 몸)은 고통도 즐거움도 없는 인간의 품성으로 존재 그 자체의 초월적인 면을 말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아난다는 지복, 기쁨 또는 축복으로 잘못 해석되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고통도 즐거움도 없이 완전히 깨어있는 특별한 상태이다.
그 때에 완전한 동질을 경험한다. 이러한 완전한 동질의 깨어있음의 상태를 아난다마야라고 한다. 보통 고통이나 기쁨을 경험할 때는 정신적인 파동을 경험한다.
그것은 고통이 하나의 경험이라는 뜻이다. 기쁨도 마찬가지다.
아난다마야 꼬샤는 가장 미세한 신체로서 아무런 경험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경험이란 도구는 완전히 초월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 요가니드라의 수련은 우리를 그 상태로 곧바로 안내한다.
거기엔 오직 기본적인 무의식의 파동만이 남아있을 뿐, 파동이나 변화도 없다.
이는 완전한 무의식의 면인 아난다마야나 축복체인 요가니드라의 깊숙한 경험이다.
이러한 동질성 경험은 고대요가교과서인 타라발라의 상카라차리야가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마음이 마야(환영)를 초월할 때, 에고가 정지될 때, 감각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그리고 감각과 의식사이의 교류가 완전히 끊겼을 때, 나와 너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 이것이 요가니드라의 궁극적 성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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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된 마음" by 스와미 니란잔아난다 사라스와띠
관리자2017.6.9
성숙된 마음
요가는 계속되는 향상의 과정이며 결코 단 몇 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수련하고 요가를 배워 이해하게 되면 당신의 나날은 요가식 인식방법으로 채워지게 된다. 요가는 정신적 프라나야마(pranayama)나 육체적 아사나(asana)가 전부가 아니다. 당신의 삶에 있어 어려움의 순간 유연하게 통과해갈 수 있는 힘, 태도와 인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가는 지속적 교육이 된다.
교육이라고 해서 단지 지식적인 성취의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마음과 의식에 있어 숙성에 이르도록 살아있는 역할을 해냄이다. 마음과 의식의 성숙, 이것이 교육의 목적이며 이는 당신이 연마한 지식을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느냐에 의해 조망되는 것이다. 아는 것과 활용하는 것은 각각이다. 응용하지 못하는 지식이란 단지 지력(知力)의 증장(增長)일뿐 허나 실제 당신이 아는 바를 살려나갈 때 곧 의식의 숙성이 펼쳐지는 것이다. 당신이 균형과 조화 그리고 나날의 평화를 지탱할 수 있을 때― 이것이 곧 마음의 성숙임이다.
마음이란 곧 밤낮으로 세상과 상호작용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감각을 통해 세상과 어떻게 반응하는 주체의 그 자체는 대상과 밀고 당기기인 것이다. 삶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밀고 당기기가 잘 안되기에 그렇다. 우리는 어떻든 매혹적인 것에 끌리고 상대방이 이에 반응하길 원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되지 않을 때 골치가 아프게 된다.또 우리가 끌리지 않은 것은 피하려 하지만 또 긴장이 수반되고 결국 화가 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불협화음을 겪고 균형이 깨지는 것이다.
브리티(vritti)조절하기
요가에 있어 균형이 어그러짐은 브리티의 움직임에 속하는 것이 된다. 우리도 마음이 아주 민감하여 어떤것에 골몰해 있을 때에는 이를 벗기가 어렵다. 골몰하고 있는 것이 직업이나 안전 또는 욕망 등에의 생각과 관련된 경우 이를 떨쳐버리기는 매우 힘든 것이다. 몇 번이고 밤에 잠에서 깨어 방을 빙빙 돌면서 ‘ 왜 내가 잠을 못 이루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또 아, 쓸데없는 짓, 내일 생각해보자 ’ 할 수 있다. 방을 오가면서 TV를 켜거나 책을 보거나 하며 지쳐버린다. 자고자 시도를 하면 같은 일이 또 재현되는 것이다. 쉴 수가 없고 마음은 어떤 생각에 계속 사로잡혀 있게 된다. 이를 일컬어 마음의 구속, 브리티(vritti)라고 한다,
어느 때는 이 강박적 경향들이 요인이 이해될 수도 있다. 언제는 또 잘 알 수 없다. 우리 잠재된 마음, 무의식은 아주 심원한 것이다. 우린 무엇엔가 홀린 듯 그 이유도 모르고 결과에 시달린다. 도움을 정신분석학자, 심리학자, 상담자, 정신 병리학자에 가게 된다. 그들은 계속 얘기를 거듭하여 우리로 하여금 내면의 걱정으로 몰고 가는 근거, 그 양상을 파내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요가적 태도와 인식을 생활화하게 되면 우린 우리 에너지의 스스로 형태를 증거하고 재조정이 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마음의 그리고 감성적인 에너지를 추슬러나감을 악힌다. 실제의 생활 속에서 요가의 성취는 존재하는 것이다. 마음의 혼란을 이겨나가는 것이 요가에 있어 마음의 성숙을 꾀하는 큰 업적이 된다. 당신 내면의 기능을 계속 확충시켜가는 과정, 자신에 있어 즉각적으로 생활과 표현이 곧 이식의 나아지는 전개인 바다. 이것이 곧 실질적 교육이며 성숙d로 진보해 가는 요가의 과정이다.
자아 동일화(同一化)
우리 스스로를 보면 우린 항상 ‘ 무엇이라 함’에 자신을 감추게 된다. 당신은 누구요? ― “ 나는 교수입니다” “ 나는 의사입니다” “ 나는 기술자요” 그러나 이것은 직업적 동일성이지 자아의 참 면목은 아니다. 세상에 만들어진 밖으로 투영된 동일화는 피상적인 자기일 뿐이다. 이는 단지 사회에 드러내기 위한 껍데기요 가려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무언가 우리를 사회에 보다 낫게 통용될 수 있게 스스로를 내보이는 목표가 있다. 우린 실제 자기 자신보다 더 낫게 자신을 포장한다. 요가에서는 자신을 바깥세상에 그릇되게 표현하거나 얼굴에 매어 달리고 하는 등의 에고(ego)적 동일화(同一化)라 한다. 이렇게 에고의 동일화가 계속되면 우리 내면의 균형과 평화가 뒤바뀌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요가는 이러한 에고 동일화를 깨닫게 해주고 그것의 해악을 알아차리게 해준다.
정화(淨化)
우리가 참으로 자연스럽게 즉각적이고자 하면 모든 허위는 떠나가야만 한다. 자아를 깨끗이 하고 우리의 거짓과 가면을 벗음은 마치 불에 의한 단련과도 같다. 불은 정신수련, 온전할 건강, 내핍(耐乏), 그리고 노력으로 의지와 결정력의 함양을 낳게 됨이다. 이러한 훈련과정에 힘입어 우리는 마치 불을 헤치고 나온 시타(sita)처럼 순수하고 승리의 껍데기 벗어던짐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 라마(rama)와 시타(sita)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라마는 큰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고 시타에게 말했다. “자 이제 당신은 사라져야 하겠어. 난 당신을 불 속에 숨겨둘 거야. 나와 더불어 있게 될 것들은 실제 당신의 그림자 시타이며 참된 당신이 아니고 복제된 그대일 뿐이야” 라마는 시타를 불속에 숨겼고 유괴된 시타는 오직 그림자일 뿐임을 확신시켰다. 그는 평화와 질서를 세상에 주고자 악마와 싸워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제 몫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전쟁을 끝나고 라바나(ravana)는 죽게 되었다. 라마는 자신의 군대 앞에서 다른 기교를 연출했다. 참 시타를 구하고자 그는 랑카(lanka)의 새로운 왕인 비히사나(vibhishana)께 말했다. “ 나는 도시에 들어가지 않겠소. 시타를 내게 보내주시오.” 이에 그림자 시타가 라마에게 왔다. 이에 라마는 심하게 이렇게 말했다. “ 자 나는 이제 전사로서 내 할 바를 다했소. 당신은 자유롭소. 어디든 가고 싶은데로 가시오.”
모든 군대 등 라마의 말을 들은 모두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는 외쳤다. “ 아 라마가 시타를 취하지 않는가? 무엇 때문에? ” 라마는 말했다. “ 그대는 그대의 순결을 입증해야만 한다.” 시타의 그림자는 물론 라마가 무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움직였다. 그녀는 말했다. “ 어떻게 제가 제 순결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 라마는 말했다. “ 불속에 뛰어 들어라. ” 그래서 불은 당겨졌고 시타의 또 다른것은 불에 들어갔다. 그리고 참 시타가 나오게 되었다. 이에 라마는 말했다. “ 당신은 순수하오. 와서 내 옆에 앉으시오. ”
유괴된것이 참 시타가 아님이다. 또 해방된 것도 그렇다. 그것은 환영(幻影)이었다. 그리고 전쟁중 그림자 시타는 깨어 없어져 버렸다. 참된 자아의 출현을 위해 시타가 불의 시험을 겪었듯 우리 또한 규율과 수련의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 그리고 참 자아가 나타났을 때 당신 삶에 있어 요가의 왕관과 같은 영광이 있을것이다.
평온이 나타남
오직 우리가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이 없을때 삶이 평화가 찾아온다. 그렇지 않다면 명상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잠시간의 휴식일뿐 이는 더운 여름날 마치 시원한 냉수일듯 역시 우리가 명상과 요가수련에 있어 젠체하고 꾸미는 것을 털어버리지 못해서야 무엇을 하든 단지 일시적 효과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알고 경험하는 것 그런 식으로 달려들어서는 옳지 못하고 고립됨이다. 모든 허위가 다 그치고야 우린 스스로를 찾고 자연스레 자아에 도달하고 더 아시아 명상을 수련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된다. 명상이 우리 삶의 태도요 삶의 평화의 새벽을 기약해 줌이다. 내면적 평화의 출현이야 함고 또한 외계에 대한 자연스런 조화를 느끼게 해 주는 바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가까운 벗- 자식, 남편, 아내, 친구, 사회 등과의 관계에 한계가 있다. 그것이 관계가 자아 중심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점을 알아차릴 때, 우리 모든 개인이 전 우주와 자연 신이라 불리 우는 초월적 실재와 공유하고 있음을 음미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충만해진다. 우리는 그런 힘과 보호 그리고 낙관력의 강도에 연이어져 있다. 그렇기에 우린 스스로를 바쳐 다른 이들로 하여금 지혜롭게 우리의 행위, 태도 속 지식을 활성화하여 고대의 현인(賢人)들이 보신 안목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 2004년 5월 강가 다아샨(Ganga Darshan)
스스로 아는 것과 스스로 실현하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가 아는 것을 넘어 실현하려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아(ego)와 자기 스스로 알아차림 간이 관계는요?
마음은 하나이다. 그러나 마음엔 두가지 경험적 측면이 있는데― 명시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이다. 명시적인 바는 어둡고 초월적인 것은 밝음이 마치 밤과 낮과 같다. 밤에 불도 꺼버린다면 과연 어둠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세상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둠속이고 숨겨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등불을 밝히면 이는 약간 환하게 하여 모양과 색깔을 구별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린 어둠속 그 어떤 색깔도 분간할 수가 없게 된다. 밤이 그치고 해가 뜨면 우리는 등 하나로 조금 비추이는 것과는 달리 지평선 끝까지 바로 볼 수가 있게 된다.
이것이 스스로 아는 것과 스스로 실현하는 것의 차이이다. 스스로 아는 것은 마치 전등이 어두운 곳을 각기 비추듯 그러하다. 아는 것이기는 하나 통제의 작용은 아니다. 입증할 수 있으나 우리 행위와 반응에 어떤 영향을 부여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는 바로서 엄정하게 되며 개별적 밝은 부분에 한정되게 된다. 그러나 자아실현은 마치 대낮에 온 청하를 바로 보는 것과 같다. 우리 안목이 확장되어 자아실현이 가능해 진다. 이에 우리 의식은 확장되어 개별적 등불에서처럼 한계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 2003년 6월 강가 다아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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