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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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한 말 위나라의 인물[편집]
王必
(? ~ 218)
후한 말 위나라의 인물.
조조의 부하로 삼보의 난 때 조조가 연주목으로 임명되자 왕필이 사신으로 파견되어 헌제에게 글을 올렸다.
주부, 승상장사 등을 지냈으며, 여포가 조조에게 붙잡혔을 때 포박을 느슨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주부였던 왕필은 여포는 사나운 무리이고 그 무리들이 가까이 밖에 있어 느슨하게 해주면 안된다고 진언했다.
승상장사일 때 조조가 병사를 맡아 허도의 일을 감독하도록 남겼고 218년 봄 정월에 소부 경기, 사직 위황, 태의령 길본과 그의 아들 길막, 길목 등이 공모해 반란을 일으켜 허도를 공격해 자신의 진영에 불을 질렀는데, 공격하는 자가 누군지 몰라 김의와 친했기 때문에 그의 집으로 달아나 의탁하려고 했다.
밤에 김의를 부르자 김의의 집안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해 얘기했는데, 그들이 길막 등으로 착각해 왕장사가 이미 죽었냐면서 그대의 무리들이 일을 이뤘다고 하는 것을 듣고 다른 길로 달아났다. 일설에는 그의 장하독이 오늘 일이 어느 집안인지 아시는데 거기로 들어가겠냐고 물으면서 부축을 받아 남성으로 달아났으며, 날이 밝아오자 길막 등이 왕필이 죽은 줄 알고 흩어졌다가 패배했다고 한다.
왕필은 전농중랑장 엄광과 함께 그들을 토벌했지만 10여일이 지나 상처 때문에 죽었다고 하며, 조조가 왕필이 죽은 것에 크게 분노해 한의 백관들을 업성에 불러 오게 했다가 불을 끄러 나온 자는 왼쪽, 끄러 나오지 않은 자는 우측에 섰다. 많은 사람들이 불을 끄는 것이 반드시 죄가 없을 것이라 여겨 모두가 왼편에 붙었는데, 조조가 불을 끄러 나오지 않은 자들은 반란을 도운게 아니라면서 끄러 나온 자들이 실제 적이라면서 모두 죽였다고 한다. 물론 이는 조조의 다분한 궁예질이었다.
조조는 왕필에 대해 자신이 어려운 고비를 겪을 때부터 따르던 사람으로 충성스럽고 유능하면서도 부지런하며, 마음이 쇠나 돌처럼 굳어 훌륭한 관리로 때를 놓쳐 오랫동안 왕필을 부르지 못했다는 얘기를 할 정도였다.[1]
반란의 상세 사항은 무제기에서 주석으로 나온 위무고사, 삼보결록, 헌제춘추, 산양공재기 등에서 인용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무능한 관리로 나와 사마의가 술을 너무 좋아하고 성품이 너그럽기만 하고 엄하지 못해 이 일을 맡기기 힘들다고 할 정도였으며, 왕필이 김의의 집에 상처를 치료하러 들어갔다가 김의가 반란에 가담한 것을 알게 된 것은 김의의 아내가 왕필을 죽였냐고 한 것 때문으로 나온다.
(? ~ 218)
후한 말 위나라의 인물.
조조의 부하로 삼보의 난 때 조조가 연주목으로 임명되자 왕필이 사신으로 파견되어 헌제에게 글을 올렸다.
주부, 승상장사 등을 지냈으며, 여포가 조조에게 붙잡혔을 때 포박을 느슨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주부였던 왕필은 여포는 사나운 무리이고 그 무리들이 가까이 밖에 있어 느슨하게 해주면 안된다고 진언했다.
승상장사일 때 조조가 병사를 맡아 허도의 일을 감독하도록 남겼고 218년 봄 정월에 소부 경기, 사직 위황, 태의령 길본과 그의 아들 길막, 길목 등이 공모해 반란을 일으켜 허도를 공격해 자신의 진영에 불을 질렀는데, 공격하는 자가 누군지 몰라 김의와 친했기 때문에 그의 집으로 달아나 의탁하려고 했다.
밤에 김의를 부르자 김의의 집안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해 얘기했는데, 그들이 길막 등으로 착각해 왕장사가 이미 죽었냐면서 그대의 무리들이 일을 이뤘다고 하는 것을 듣고 다른 길로 달아났다. 일설에는 그의 장하독이 오늘 일이 어느 집안인지 아시는데 거기로 들어가겠냐고 물으면서 부축을 받아 남성으로 달아났으며, 날이 밝아오자 길막 등이 왕필이 죽은 줄 알고 흩어졌다가 패배했다고 한다.
왕필은 전농중랑장 엄광과 함께 그들을 토벌했지만 10여일이 지나 상처 때문에 죽었다고 하며, 조조가 왕필이 죽은 것에 크게 분노해 한의 백관들을 업성에 불러 오게 했다가 불을 끄러 나온 자는 왼쪽, 끄러 나오지 않은 자는 우측에 섰다. 많은 사람들이 불을 끄는 것이 반드시 죄가 없을 것이라 여겨 모두가 왼편에 붙었는데, 조조가 불을 끄러 나오지 않은 자들은 반란을 도운게 아니라면서 끄러 나온 자들이 실제 적이라면서 모두 죽였다고 한다. 물론 이는 조조의 다분한 궁예질이었다.
조조는 왕필에 대해 자신이 어려운 고비를 겪을 때부터 따르던 사람으로 충성스럽고 유능하면서도 부지런하며, 마음이 쇠나 돌처럼 굳어 훌륭한 관리로 때를 놓쳐 오랫동안 왕필을 부르지 못했다는 얘기를 할 정도였다.[1]
반란의 상세 사항은 무제기에서 주석으로 나온 위무고사, 삼보결록, 헌제춘추, 산양공재기 등에서 인용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무능한 관리로 나와 사마의가 술을 너무 좋아하고 성품이 너그럽기만 하고 엄하지 못해 이 일을 맡기기 힘들다고 할 정도였으며, 왕필이 김의의 집에 상처를 치료하러 들어갔다가 김의가 반란에 가담한 것을 알게 된 것은 김의의 아내가 왕필을 죽였냐고 한 것 때문으로 나온다.
1.1. 미디어 믹스[편집]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13 PK에서 추가되었다. 능력치는 통솔력 63/무력 48/지력 65/정치력 68. 특기는 문화 1, 순찰 2, 교섭 2. 중신특성은 화기생재이고 전수특기는 교섭이며 전법은 궁공약화. 일러스트는 오른쪽 손가락을 위로 올리고 있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58, 무력 43, 지력 57, 정치 64, 매력 66으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과 무력이 각각 5, 지력이 8, 정치력이 4 하락했다. 개성은 진흥, 진화, 주란, 주의는 왕도, 정책은 지역순회 Lv 2, 진형은 방원, 전법은 고무, 친애무장은 김의, 조조, 혐오무장은 없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도 등장하여 경기 일당들에게 화살을 맞았음에도 목숨걸고 적들의 반란을 알리는 투혼을 보인다.
배철수의 만화열전 고우영 삼국지에서의 성우는 정성화. 나레이션인 배철수가 소개하기를 '소크라테스같은 인물'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소크라테스란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아닌 공처가 소크라테스를 뜻한다. (...)
조조가 위왕에 자리에 오르면서 수도를 업으로 옮기게 되어 허도를 책임질 책임자로 그 누구도 예상못한 왕필을 앉히는데, 이것은 조조가 아직도 자신에게 반항하는 한실의 신하들을 걸러내기 위해 미끼로 왕필을 내세웠던 것. 조조의 예상대로 김위와 경기, 위황등의 한실의 신하들은 정월대보름 행사에 맞춰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어림군을 장악하지만, 이미 모든 사실을 파악하고 있던 조조는 하후돈과 기갑부대를 보내 반란군과 반란에 가담한 백성들을 잔인하게 진압한다.
왕필은 반란이 일어나기 전 김위와 술을 마시다 허도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을 나서다 경기가 쏜 화살에 맞아 사망. 만화 본편에서는 화살에 맞은 채 도망치다가, 조조가 모든 뒤처리를 다 끝낸 뒤에 뒤늦게 반란 소식을 알리고 픽 쓰러져 죽는다. 이 때 주위 사람들의 표현이 일품. '올림픽 마라톤 때 시상식에 폐회식까지 다 끝난 뒤에 들어오는 선수 같구먼.'. 조조도 저 바보의 꼴을 보라며 비웃는다.
여담이지만 본편 한정으로 왕필의 아내는 악처 수준을 넘어 의부증 증세가 심각한 것 같다. 남편이 퇴근하면서 옷에 묻혀온 머리카락을 보고 바람을 피웠다고 마구 구타를 하더니 머리카락을 안 묻혀오자 "니가 이젠 대머리 여자랑 바람핀다 이거제? 일루 와. 니 오늘 죽었어~!!!"라고 할 정도(...)
원전이 된 고우영 삼국지에는 알콜 중독자에 무능한 인물로 나온다. 사실 이런 보잘 것 없는 인물에게 중책을 준 이유로 조조에게 반감을 품은 불순세력들을 걸러내기 위함이였다. 조조의 계획대로 경기, 김위 등 반 조조세력이 왕필을 우습게 보고 난을 일으키고 사전에 예측한 조조에 의해 일망타진된다. 왕필은 왕필대로 난리 도중에 입은 부상이 도져 죽는데 조조는 잘써먹었다는 투로 그의 죽음을 비웃는다.
소설 비열한 성자 조조에서는 황족인 유막의 시종으로 과거에는 친구의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이고 떠돌다가 유막이 거둬줬다고 하며, 5년간 유막을 섬기다가 조조가 형양 전투에서 패하고 원소에게 의탁하기 전에 양주에서 군사를 모집하려고 하면서 조조와 만나게 되었다. 유막은 황실로 가기로 하면서 조조의 수하가 되어 시종이 된다.
조조가 연주에 기반을 마련하자 글을 읽을 줄 아는데다가 이전의 주인이었던 유막이 낙양에 있다는 이유로 주부에 임명되어 조조가 정식으로 연주자사에 임명될 수 있도록 낙양으로 향했는데, 중간에 장양에게 붙잡혔다가 그 수하인 동소의 도움으로 무사히 임무를 완수해 조조를 조정의 칙령에 따라 연주자사에 임명된다. 이후 행군주부에 올라 조조 군영의 장수들을 감독하고 정보를 보고했다.
옥대밀조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유수상부에 임명되어 허도의 일을 담당했고 경기, 위황 등이 군사를 일으켜 부상을 입고 진압하기 위해 말 위에서 지휘하다가 고꾸라졌고 결국에는 사망했다.
드라마 삼국에선 본인은 등장하지 않지만 불을 끄러 나온자와 그렇지 않은자를 구분하는 내용은 그대로 재현됐는데 말도 안되는 OX로 사람을 도살한 연의의 조조와 달리 여기선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데 일단 조조가 그냥 가만 있던 사람은 백기 아래에 불을 끄러 나와 적과 맞서 싸운자는 홍기 아래에 서라고 하자 상당수가 홍기 아래에 섰는데 조조는 백기 아래에 있는 자들에겐 금수문양을 내리니 각자일을 보라고 하며 홍기 아래에 선 자들을 모두 체포하라 지시하고 홍기밑에 선 사람들은 그저 불을 끄러 나왔을 뿐이라고 억울해하자 너희처럼 기력이라곤 없는 문신놈들이[2]무슨 힘이 있다고 불을 끄고 적과 싸우냐며 너희가 오복루에 온건 적을 도운 것이라며 그들을 모두 참수하라고 지시 한다.
2. 위나라의 상서랑[편집]
王弼
(226 ~ 249)
왕개의 손자이자 왕업의 아들, 왕굉의 동생.[3]
연주 산양군 고평현 사람으로 자는 보사(輔嗣).
어려서부터 총명하면서 배우기를 즐겨 십여 살 때 유가와 도가의 이치에 대한 논의를 좋아했으며, 문필이 좋아 예능이 있었고, 변론을 좋아하였으며 이에 능했기 때문에 부하의 인정을 받았다.그는 천박하였지만 온화하였고, 주연을 좋아하였으며, 음률에 통달하였고, 투호를 잘했다.
하안이 그를 만나보고 감탄하여 '공자께서 젊은 후배가 무섭다고 했거늘, 이 사람이야말로 하늘에 내린 사람이다'라고 말했으며, 성인은 정이 있으면서도 거기에 걸림이 없어 성인에게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다고 하는 하안의 주장에 반대했다. 도가의 학설에는 하안에 미치지 못했지만 하안을 넘는 설도 많았다고 하며,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을 비판하여 당시의 지식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하안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정작 하안이 실세로 있던 당대 정권의 최고권력자 조상에게 배척당했다. 정시(正始)연간에 황문시랑이 누차 결원됐는데 하안은 가충(賈充), 배수(裴秀), 주정(朱整)을 이미 쓰고 다시 왕필을 쓰는 것에 관해 의논하였다. 당시에 정밀(丁謐)이 하안과 더불어 다퉜는데[4] 고읍의 왕려(王黎)를 조상(曹爽)에게 추천했고 조상은 왕려를 기용하였다. 이에 왕필을 대랑에 보하였다. 처음 제수됐을 때 조상을 만나 독대를 청했는데 조상은 좌우를 물렸고 왕필은 더불어 도를 논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도록 다른 화제로 옮기지 않아 조상은 이로 말미암아 왕필을 비웃었다. 당시에 조상이 조정의 업무를 오롯이 하여 당파가 더불어 같이 등용됐는데 왕필은 통달 준매하여 이름이 높은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얼마 후 왕려는 얼마 있지도 않고 병으로 죽었고 조상은 왕침을 왕려의 대체로 삼았다. 왕필은 마침내 문하에 있지 못하게 됐고 하안은 이 때문에 탄식하고 한스러워 했다.
도덕경, 주역 등의 고전에 주석을 달았는데, 세설신어에 따르면 노자의 주석을 달던 하안이 왕필이 노자의 주석을 듣고 있다는 걸 알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쓰던 것을 그만두고 도덕론을 저술했다고 한다. 또한 하안, 하후현 등과 함께 현학의 청담 기풍을 창시해 정시지음(正始之音)이라 일컬어졌다.
왕필이 대성에 있던 시간이 적고 일을 해서 성과를 내는 것 역시 그가 잘하는 바가 아니었기에 더욱 뜻을 두지 않았다. 회남 사람 유도(劉陶)는 종횡가의 학설을 잘 이야기하여 당시의 추앙을 받았다. 매번 왕필과 이야기하면 항상 왕필을 굴복시켰다. 왕필은 하늘이 내려준 재주로 탁월하여 그가 얻은 것은 빼앗을 수 없는 것이었다. 천성이 온화하고 조리 있었으며 연회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였고 음률을 이해하였으며 투호에 능했다. 그가 도를 논함에 있어 문장을 쓰는 것은 하안만 못했지만 자연히 얻은 심득에 있어서는 하안보다 많았다. 왕필과 종회가 친하게 지냈는데 종회는 논의를 함에 있어 정밀한 사고를 근본으로 하였는데 매번 왕필의 고상한 식견에 굴복하였다. 왕필은 주역의 해설을 썼는데 영천 사람 순융이 왕필의 대연의를 비난하였다. 왕필이 그 뜻을 답하며 편지를 썼는데 희롱하며 말하길
「무릇 밝음이 족히 깊고 미묘한 곳을 찾고 끝까지 달할 수 있지만 자연의 본성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안자의 분량은 공자가 예측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만났을 때 기쁘지 않을 수 없었고 잃었을 때 슬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항상 그 사람(공자)을 협소하게 생각해 감정을 도리에 종속시켜 따르게 하지 못한다고 여겼습니다. 지금은 마침내 자연이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족하의 분량이 비록 가슴속에 정해졌다고 하나 한 달정도 못 보면서 어찌 그 서로 생각하는 마음이 이토록 많습니까? 그러므로 공자가 안자에 대한 것이 가히 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왕필은 노자의 해설을 쓰면서 노자지략을 지었는데 (노자를 해석하는데) 통일된 원리가 있었다. 도덕론을 저술하고 주역을 해설하는데 있어 왕왕 심오하고 아름다운 언사를 사용하였다. 태원의 왕제가 담론을 좋아하였는데 노자와 장자를 비난하였다. 항상 말하길
「왕필이 해석한 주역을 보면 깨우치는 게 많다.」
하였다. 그러나 왕필은 사람됨이 천박하고 물정을 몰라 처음에 왕려(王黎), 순융(荀融) 등과 더불어 잘 지냈는데 왕려가 그의 황문랑을 빼앗자 이에 왕려를 원망하였고 순융과도 또한 좋게 끝나지 않았다. 정시 10년 조상이 폐해지고 송사 문제로 면관당했다. 그해 가을에 온역 때문에 죽었으니 당시의 나이가 24세로 아들이 없이 후사가 끊겼다. 왕필의 죽음을 진 경왕(景王)이 듣고는 수일동안 탄식하였으니 그 식견이 높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이 된 것이 이와 같았다.
하안과 관련해서 하안이 지은 도덕론과 관련된 일화 이외에도 세설신어에는 하안의 집에서 담론을 논한 일화와 배휘와 대화한 일화가 있다.
하안의 집에서 담론을 논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하안이 이부상서가 되었을 때 지위와 명망이 높아 당시에 담객들이 가득찼는데, 왕필은 이 당시에 20살도 채 안된 나이였지만 하안을 찾아갔으며, 하안도 왕필의 명성을 들었기 때문에 지난 번의 담론에서 제기된 이론중에 논리적으로 가장 뛰어난 것를 골라 왕필에게 "이 이론에 대하여 나는 논리적으로 지극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다시 반론을 펼 수 있겠냐?"라고 묻자 왕필은 곧바로 반론을 펼쳤고, 이를 들은 좌중의 사람들은 하안이 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필은 스스로 문제 제출자와 응답자가 되어 자문자답을 하면서 담론을 전개했는데, 좌중의 사람들 모두가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
배휘와 대화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왕필은 약관의 나이에 배휘를 방문해 배휘가 "대저 무(無)라는 것은 진실로 만물의 바탕이 되는 바로서 성인은 기꺼이 언급하려 하지 않았는데, 노자는 끊임없이 부연 설명했으니 왜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왕필은 "성인은 '무'를 체득했고 '무'는 또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유(有)'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노자와 장자는 아직 '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부족한 바를 설명했던 것입니다."라고 했다. |
배휘와 관련된 일화는 학문적으로도 의의가 있는데, 현학의 경향을 설명하는 주요 예시가 된다. 배휘의 말처럼 대저 그전까지의 유교에서는 무니 현이니 하는 따위의 글자에 대해서 학자들은 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휘가 무와 성인의 관계에 대해서 논급한 것은 그 당시의 학문적 경향이 이미 고전 유교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왕필의 답변은 더욱 현학적이라 할 수 있다. 성인 즉 공자는 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왕필은 성인이 무를 체득했으나 무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논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또한 왕필이 부연하기를 노장은 부족했기에 부족한 바를 항시 설명했다지만, 공자가 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왕필의 해석대로라기보단 공자가 무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과는 무관하거나 무심했다고 여기는 편이 사리에 맞다. 왕필이 무를 논함에 있어 그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았던 공자를 끌어들인 것은 공자의 지위를 건드리기보단 공자의 위치와 학문을 빌어 노장의 사상을 뒷받침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노장이 언급한 것을 공자는 언급치 않은 이유가 공자는 노장보다 훨씬 더 잘 파악해서, 즉 그것이 설명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는 얘기니까.[5]
일찍이 상서랑에 임명되었다가 처음에 왕려, 순융 등과 사이가 좋았지만 왕려가 자신의 황문랑을 빼앗았다고 여겨 왕려가 왕필을 증오했으며, 순융과 끝까지 좋게 지내지 못했다. 249년에 조상과 하안이 피살되자 이에 관련되어 면직되었다가 가을에 역질로 죽자 사마사는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라고 탄식하면서 식견 높은 사람들도 이를 애도를 했다고 하며, 아들이 없어 가문이 단절되었다. 워낙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도덕경 주석을 할 때 여성의 성기를 이해하지 못한 흔적이 있다. 왕필이 도덕경을 주석한 나이는 16살
주역에 주석을 달았다. 주역의 수많은 주석들 중, 왕필의 주석은 공자의 십익(十翼)이후, 우번역 등과 함께 최고의 주로 꼽혔으며, 고려,조선시대 잡과 과목에도 들어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유명록에는 정현을 비웃다가 역질에 걸려 죽은 일화가 있다.
왕필이 역의 주석을 지을 때 번번이 정현을 고루한 유생이라면서 영감쟁이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현의 유령이 나타나 젊은 나이에 경솔하게 문구를 견강부회하면서 나를 함부로 책망하냐고 했다. 정현이 떠나자 왕필은 속으로 몹시 두려워했고 얼마 후 역질에 걸려 죽었다. |
철학사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조숙한 천재. 왕필 이외에 철학사에서 이름을 남긴 철학자들은 대부분 40대 이후에 주저서를 완성했고, 몇몇 천재적 인물들도 20대 후반 이상은 되어야 유의미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예술이나 전쟁, 수학, 과학 분야의 경우 종종 조숙한 천재들이 등장하곤 했지만 철학의 경우 왕필을 제외하면 십대 시절 족적을 남긴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1] 조조의 수하 문관으로는 거의 최고참급인데 진궁 허사 왕해 필심 위충은 장막이 난을 일으킬 때 나갔고 조지 임준은 일찍 사망해서 짬으로는 순욱 정욱과도 안밀린다. 일부 창작에서 미끼로 쓰이지만 오랫동안 조조 밑에서 있는듯 없는듯 일해온 걸로 봐서 위험인물로 찍히지도 않았을테니 그렇게 버려졌을리도 없다.[2] 참고로 뒤에 밝혀지길 이들은 대부분 황궁 내시들 이라고 한다.[3] 박물기에 이르길 왕찬(王粲)과 족형 왕개(王凱)가 더불어 형주로 피난왔는데 유표(劉表)가 그의 딸을 왕찬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했으나 그의 모습이 추하고 성격이 소략한 것을 꺼려서 왕개가 풍모가 있음으로 인하여 마침내 왕개와 결혼 시켰다. 왕개가 왕업을 나았으니 왕업은 유표의 외손자이다. 채옹(蔡邕)에게 책이 있어 거의 만 권에 이르렀는데 말년에 여러 수레에 실어서 왕찬에게 줬고 왕찬이 죽은 이후에 상국연 위풍(魏諷)이 모반을 일으켰는데 왕찬의 아들이 이에 연루되어 이미 주살당하자 채옹이 줬던 책은 모두 왕업에게 돌아갔다. 왕업(王業)은 자가 장서(長緒)로 지위가 알자복야에 이르렀다. 아들인 왕굉(王宏)은 자가 정종(正宗)으로 사례교위를 지냈다. 왕굉은 왕필의 형이다.[4] 정밀은 조상일파 중 조상과 가장 친했고 항상 하안을 무시하고 있었다.[5] 하안은 성인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다고 여겼는데 그 논의가 굉장히 정밀하였고 종회 등이 논술하였다. 왕필은 더불어 동의하지 않고 성인이 다른 사람보다 무성한 것은 신명(神明)이고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은 오정(五情)이라고 여겼다. 신명이 무성하기 때문에 충화(沖和)를 체득하여 무(無)에 통하고 오정이 같기 때문에 슬픔과 기쁨으로 사물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즉 성인의 감정은 사물에 응하되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다. 지금 그 얽매이지 않음으로 바로 다시 사물에 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잘못이 많은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