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弼 (三国)
王弼 | |
---|---|
魏 尚書郎 | |
出生 | 黄初7年(226年) 兗州山陽郡 |
死去 | 嘉平元年(249年) |
拼音 | Wáng Bì |
字 | 輔嗣 |
主君 | 曹芳 |
王 弼(おう ひつ、226年 - 249年)は、中国三国時代の魏の学者・政治家。字は輔嗣。兗州山陽郡の人。祖父は王凱。父は王業。兄は王宏。
王弼は何晏らと共に「玄学」を創始したとされている。『三国志』では鍾会の伝に付された裴松之の注に、西晋の何劭の書いた伝が引用されている。
経歴[編集]
『博物記』によると、祖父は名士としての血統と容姿の美しさを理由に、劉表に気に入られ娘婿となった人物である。また父は劉表の外孫で、王粲の子が刑死し彼の家系が断絶した後、その一万巻の蔵書を受け継いだ人物である。
王弼は幼少の頃から賢く聡明で、十数歳で『老子』を好み明晰かつ雄弁に語った。若くして傅嘏・裴徽・何晏に高く評価され、鍾会と並び評された。
正始年間前期、黄門侍郎の官が連続で欠員となったので、何晏は賈充・裴秀・朱整を起用し、王弼の起用も審議させた。しかし、丁謐が王黎を曹爽に推薦したので、曹爽は王黎を起用した。このため王弼は尚書郎に任命された。任命を受けた王弼は、曹爽にお人ばらいを願い出たため、曹爽も何か重要な要件があるのかと思い、側近を下がらせた。しかし王弼は道家の理論を語り合うだけで、他のことには全く触れなかった。このため曹爽は彼を軽蔑した。
王弼は浅薄であったが、穏やかな性格で酒宴を好み、音律に通じ投壺(壷の中に矢を投げ入れる遊び)が上手だった。道家の学説では何晏に及ばなかったが、何晏より優れた説も多かった。しかし、自分の得意分野においては人を嘲笑したので、当時の知識人から憎まれたという。
鍾会は王弼と仲が良く、王弼の論の高邁さに感服していた。鍾会は何晏とも交流があり、何晏の「聖人には喜怒哀楽の情が無い」という論を祖述した。王弼は何晏のこの論を批判し、「聖人は人より精神の働きに優れ、人と同じ点は五つの情(喜怒哀楽と欲または怨)にある。精神の働きが優れているからこそ、宇宙の和楽の気を体得して、無に通ずることが出来る。五つの情が同じだからこそ、哀楽の情によって外物に対応してしまうのである。だからこそ、聖人の情は外物に引きずられない点を取り上げて、外物に対応しないのだと考えるとすれば、それは間違いである。」と主張した。
王弼は『老子』・『易(周易)』の注釈を書き、『道略論』を著述した。『老子』・『易』の注釈は現存し、高く評価されている。『易』の注釈は『十三経注疏』に採用されている。
司馬懿がクーデターを起こし(高平陵の変)、曹爽・何晏を処刑すると王弼は免職となった。嘉平元年(249年)秋、癩病を患い死去した。享年24。子はなく、家は断絶した。
関連作品[編集]
六朝志怪のひとつ『幽明録』には、王弼の死の原因を怪異によるものとする説話が採録されている。それによれば、王弼が『易経』の注釈を施す際に、儒家的に解釈しすぎる鄭玄を常日頃から嘲笑し、老いぼれのやることには全く意味が無いと放言していた。ある夜、門外から何者かが近寄ってきて自らを鄭玄と名乗り、「君は年も若いのに、どうして軽々しく文章をいじくり回し、無闇に私を非難するのか」と、忿然として王弼を責めた。その人物は言い終わると立ち去ったが、王弼の心には畏れと嫌悪が生じ、ほどなく癩病にかかって死亡した、とされている[1]。
脚注[編集]
- ^ 佐野誠子、竹田晃、黒田真美子(編)『捜神記 幽明録 異苑 他 <六朝Ⅰ>』<中国古典小説選> 第2巻 明治書院 2006年 ISBN 4625663431 pp.153-154.
関連項目[編集]
왕弼 (삼국)
왕자 | |
---|---|
魏 尚書郎 | |
출생 | 황초 7년( 226년 ) 항주 산양군 |
죽음 | 가평 원년( 249년 ) |
늑대 | Wang Bì |
글자 | 輔嗣 |
주군 | 조조 |
왕 弼(오우 히츠, 226년 -249 년 )는 중국 삼국 시대 의 학자 학자·정치가. 글자 는輔嗣. 항주 산요군 의 사람. 할아버지는 왕개. 아버지는 왕업 . 형은 왕 히로시.
왕弼는 몇 晏들과 함께 ' 현학 '을 창시했다고 한다. ' 삼국지 '에서는 종회 의 전에 붙은 사탕마츠유키 의 주에, 니시진의 몇 권이 쓴 전이 인용되고 있다.
경력 [ 편집 ]
'박물기'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명사로서의 혈통과 외모의 아름다움을 이유로 리우 에 마음에 걸린 딸이 된 인물이다. 또 아버지는 유표의 외손으로, 왕죽 의 아들이 형사하고 그의 가계가 단절한 뒤 그 1만권의 장서를 계승한 인물이다.
왕弼는 어린 시절부터 현명하게 사명하고, 십수세로 『노자』를 선호하고, 명석하고 웅변에게 말했다. 젊어서傅嘏・裴徽・何晏에 높이 평가되어 종회와 나란히 평가되었다.
정시 연간 전기, 황문사무로의 관이 연속으로 결원이 되었기 때문에, 무슨 晏는賈充·裴秀·朱整을 기용하고, 왕弼의 기용도 심의시켰다. 하지만 丁謐가 王黎을曹爽에 추천했기 때문에 曹爽은 王黎을 기용했다. 이 때문에 왕弼는 상서 로로 임명되었다. 임명을 받은 왕弼는 조찬에 사람만을 소원했기 때문에 조찬도 뭔가 중요한 요건이 있을까 하고 측근을 내렸다. 그러나 왕자는 도가 의 이론을 토론하는 것만으로, 다른 것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찬은 그를 경멸했다.
왕弼는 얕은 얇았지만, 온화한 성격으로 술 연회를 좋아해, 음율 에 통하여 투항 (병 안에 화살을 던지는 놀이)이 능숙했다. 도가의 학설에서는 아무런 홍수에 미치지 못했지만, 몇 권보다 뛰어난 설도 많았다. 그러나, 자신의 특기 분야에 있어서는 사람을 조롱했기 때문에, 당시의 지식인으로부터 미워되었다고 한다.
종회는 왕弼과 사이가 좋고, 왕弼의 이론의 고편함에 감복하고 있었다. 종회는 몇 혼인과 교류가 있어, 몇 권의 「성인에게는 희로애락의 정이 없다」라는 논을 조술했다. 왕弼는 몇 가지의 이론을 비판하고, “성인은 사람보다 정신의 일이 뛰어나고 사람과 같은 점은 다섯 가지 정(희로애락과 욕 또는 원한)에 있다. 정신의 일이 우수하기 때문 우주의 화악의 마음을 체득하고, 무에 통할 수 있다. 없는 점을 다루고, 외물에 대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수이다.”라고 주장했다.
왕弼는 『老子』・『易(周易)』의 주석을 쓰고 『도략론』을 저술했다. 『노자』・『이』의 주석은 현존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쉽다』의 주석은 『13경주소』에 채용되고 있다.
시마 칸 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평릉의 이상 ), 조찬·무선을 처형하자 왕弼는 면직이 되었다. 가평 원년(249년) 가을, 호병 을 앓고 사망했다. 향년 24. 아이는 없었고 집은 단절했다.
관련 작품 [ 편집 ]
롯조시괴의 하나 '유명록'에는 왕弼의 죽음의 원인을 괴이에 의한 것으로 하는 설화가 채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왕弼이 『이경』의 주석을 붙일 때 유가적으로 너무 해석하는 정현 을 평소부터 조소하며 노년기의 일에는 전혀 의미가 없다고 방언하고 있었다. 어느 밤 문외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스스로를 정현이라고 자칭해, “너는 나이가 어린데, 어째서 가볍게 문장을 괴롭히고, 어둠 속에 나를 비난하는 것인가”라고, 바쁩니다. 했다. 그 인물은 말이 끝나자 떠났지만, 왕새의 마음에는 두려움과 혐오가 생겨, 곧 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되어 있다 [1] .
각주 [ 편집 ]
- ^ 佐野誠子、竹田晃、黒田真美子(編)『捜神記 幽明録 異苑 他 <六朝Ⅰ>』<中国古典小説選> 第2巻 明治書院 2006年 ISBN 4625663431 pp.153-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