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30

希修 초기불교와 기타 영적 전통들 간의 차이

(12) Facebook

< 초기불교와 기타 영적 전통들 간의 차이
#12. 초기불교는 인간의 주체성과 실천력을 최대치로 긍정, 요구하는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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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공허하고 부질 없으니 그냥 무조건 다 받아들여라, 어차피 '나'라는 게 없는데 분별은 누가 하고 노력은 누가 하느냐, 옳고 그름 따위는 아예 없다, 니가 당한 범죄행위도 너의 업일 뿐이니 업장소멸했다 생각하고 참회해라, 이런 식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어마어마한 착각!을 하고 있는 분들의 글을 자주 접한다. 이게 한국 불교의 '주류'인 듯 하니 ('전부'는 아니지만) 일반인들의 오해는 놀라운 일도 아니긴 하다. 그래도, "피할 수 없는 성폭행은 즐겨라"라는 인도의 한 국회의원의 망언에 대해 "기독교나 성리학과 달리 보편적 원칙/기준이 없는 회의주의, 상대주의인 불교의 영향"이라는 포스팅을 봤을 때의 참담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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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지식은 죽은 지식인데 언어와 이성이 다 무슨 소용이냐, 진리라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나비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게 뭐냐, 모든 게 한바탕 꿈일 뿐이니 인생은 소풍처럼 걍 즐기면 된다, 이런 류의 몽롱한 불가지론과 허무주의는 도교의 영향이지 부처님과 무관하다. 중국은 불교를 도교와 유교의 프레임을 갖고서 해석했고 ('道'를 '진리'의 의미로 쓰는 것도 이런 이유. 부처님은 추상적/신비적인 '道'/'깨달음'을 언급하신 적이 없다), 정치적인 영향 때문에라도 도교와 유교에 친화적으로 진화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불교를 한국도 받아들인 것이며, 유명한 고승/선사들의 얘기들조차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보다는 도교의 영향에 훨씬 더 많이 젖어 있다. 게다가 '참 나 (眞我)' 운운은 힌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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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정확한 언어와 논리를 무척 중시하신 분이셨고, 초기불교는 불가지론이 아니다. 선과 불선을 분별 못/안 하는 어리석음/비겁함에 대해 MN 2은 비판하고, 부처님이 가르침을 남기신 주제들에 대해서까지 '오직 모를 뿐'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라고 DN 1도 분류하며, 불가지론이나 회의주의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DN 15 역시 말한다. 12연기의 첫 요소가 ignorance이니 그 해결도 당연히 knowledge일 수밖에 없는 것. 초기불교는 허무주의도 아니다. 윤회계 안의 모든 것은 변해 가고 따라서 의지할 수 없으니 시공을 초월하는, 변하지 않고 그러므로 의지할 수 있는 완전한 행복=자유를 위해 해탈하라는 것이다. 윤회계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따위의 비루한 행복을 버리는 건 훨씬 더 큰 행복을 얻기 위한 투자!인 것. 모든 투자에는 철두철미한 계획이 필요한데 바로 그 투자전략!이 팔정도이며, 4성제와 12연기는 투자원리!에 대한 이해다. (한국에서 현재 가장 유명하신 비구니 스님도 "니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니가 있다. 우리가 서로 의지해 있다는 게 12연기의 내용"이라는 황당한 말씀을 하시던데, 초기불교에선 '12연기'도 '인연'이란 단어도 이런 의미가 전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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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와 기타 영적 전통들 간의 차이 #7. 아무 생각/분별 않는 게 미덕/심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12. 부처님은 언어/관념/논리에 의한 분별/분석을 금하셨다'
'초기불교에서의 '인연'의 뜻과 상식적으로 사용되는 '인연'의 의미는 다르다'
'타니사로 스님의 12연기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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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신 종교들에선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神의 손에 달려 있다. 누가 구원받을 것인지도 미리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고, 암튼 내가 신의 마음에 들지 못 하면 모든 게 끝장이다. 전쟁터에서 자신의 적 (enemy)이 자기 친척들임을 알아차린 용병이 주저하자 "이것도 너의 업이니 너는 고민 말고 그저 너의 임무=살상에 충실하면 된다"고 말하는 "바가바드 기타"처럼 힌두교의 업이론도 운명결정론적이 색채가 강하다. 인도에서 자신의 육체를 고문하는 일을 '수행'으로 삼는 이들이 많은 이유도, 그걸 '악업을 소진하는 방법'이라고 여기는, 즉 과거 업으로 인한 고통의 양을 현재에서 바꿀 방법은 없다는 전제의 운명결정론에 가깝다. 그러나 나의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은 (i) 과거 업으로 형성된 조건, (ii) 지금 이 순간의 나의 선택, (iii) ii가 즉각적으로 갖는 효과의 세 가지 사이의 '화학적' ('기계적'이 아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가르침이다. 상처 안 난 손으로는 독을 만져도 그 독이 몸속으로 스며들지 않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처럼, 과거 업의 결과로 인한 불리한 조건( =독)이 내게 오더라도 현재의 나의 분별력( =탐진치 제거 능력 =상처 안 난 피부)으로써 그 조건의 영향력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Dhp 124). 적은 양의 물에 소금 덩어리 한 조각을 넣으면 짜지만 강 전체에 소금 한 덩어리를 넣은들 강의 물맛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물( =탐진치와 반대되는 행동)에 따라 소금( =과거 업의 결과로 인한 불리한 조건)의 효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AN 3:99).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100% 오로지 나의 책임이며, 그 어떤 부처님도, 신도, 종교행위도, 나의 기존 업을 0.1%도 변화시키지 못 하고 나를 고통으로부터 구해 주지도 못 한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정신적 어른'만이 감당할 수 있는 종교가 바로 초기불교다. (신이든 성직자든 다른 존재에 대한 의존이 클수록 사이비/착취 가능성도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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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이론은 운명결정론이 아니며, 업의 작동원리도 자판기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초기불교와 기타 영적 전통들 간의 차이 #9. 초기불교는 타력구제 신앙이 아닌 자력구제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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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명상도 적극적 (proactive) 실천행위다. 세속적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선정의 행복에 대해서조차 "변해 가니 의지할 수 없고, 그러므로 '나'/'내 것'이라고 집착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선정의 행복조차 내려놓을 때 해탈한다는 얘기다 - 8정도의 8요소들을 모두 완성했다는 전제조건 하에. 멍때리기만 하고 있으면 어느 날 벼락 맞듯 지혜가 생기는 게 아니며, 유체이탈이나 임사체험 같은 초자연적 경험을 한다고 지혜가 생기거나 해탈하는 것도 아니다. 선정의 행복에 '우와~ 인간 의식의 신비!'라는 인식 (perception, 想)을 적용하면 집착하게 되지만 '무상-고-무아'라는 인식을 적용하면 미련이 없어진다. 부처님은 인식방법의 도미노 효과에 주목한, 인간 인지/심리의 달인이셨다. 상을 짓지 않으려 할 게 아니라 제대로 지어야 한다. 집착해서도 안 되지만 나의 책임임을 잊으면 안 된다. '알아차리기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이를 악물고서 탐진치에 물든 생각/감정을 짓뭉개는 다소 공격적인 분투도 필요하며 (MN 20), 심지어 부처님은 명상 중 졸고 있는 목갈라나 존자를 깨워 잠도 못 자게 하심으로써 그를 아라한으로 만들기도 하셨다 (AN 7:58). 현악기의 줄이 너무 느슨해도 너무 팽팽해도 제대로 소리나지 않는다는 얘기 (AN 6:55)는 수행자 Soṇa가 이미 인간 한계 내에서 가능한 최대치의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성과가 없기에 다른 방법도 써 보라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일 뿐, "번뇌에서 머물지도 번뇌에서 떠나려고도 하지 마라" 뭐 이런 몽롱한 얘기가 아닌 것이다. 분별 실패/포기에서 기인하는 평정심은 '세간의 평정심'으로서, 이런 평정심을 가진 사람을 초기경전은 "a foolish deluded person" (MN 137) 혹은 녹조라떼 같은 물로 표현한다 (SN 46:55). 그리고 이런 몽롱한 어불성설들을 '詩的' 내지 '심오'로 받아들이는 자체가 (이것도 도가의 영향) 탐진치 중 가장 해롭다는 (AN 3:68)는 치이고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실시키는 원인기도 하다 (SN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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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Not Self, No Conceit 가르침 역시 "'나' 없다"가 아니다.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할 수 있으면서 행위를 하는 자가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 노력, 분투, 인내 등이 있는데 노력, 분투, 인내하는 자는 없다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느냐?"고 부처님은 논박하셨으며 (AN 6:38), "'나' 있다"도 "'나' 없다"도 둘 다 똑같이! 잘못된 견해 6가지에 들어간다고 못박으셨다 (MN 2). 그러니 "알아차림의 주체는 알아차림 자체"라는 말도 오직 부정확+불필요일 뿐. 글 머리에 언급한 것과 같은 오해들은 해탈 이후!의 상태 (관념이나 주체-객체 구분을 초월한 윤회계 밖)에 대한 얘기를 해탈 이전! (여전히 윤회계 안)의 수행에까지 적용한 오류들이다. "사과에서 단 맛과 신 맛이 나므로 설탕과 식초를 섞으면 사과를 만들 수 있다"와 똑같은. 그러니 설탕과 식초를 섞어 놓고서 사과인 척( =깨달은 척, 바른 수행인 척) 할 게 아니라, 사과 씨를 심고 가꾸는, 즉 8정도의 8요소들을 차례로 마스터해 나가는 오직 이 노력만이 필요하다. X를 내려놓기 위해서는 X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며, 이건 (i) X를 발생시키는 원인 이해, (ii) X를 소멸시키는 원인 이해, (iii) 내가 X에 끌리는 이유 이해, (iv) 궁극적으로 X가 가져올 고통 이해, (v) X에 대한 환상에서 완전히 벗어남의 다섯 가지가 필요하다고 DN 1은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내려놓음'은 그 이론적인 가능성조차 8정도를 완성한 후에나 생긴다. 탐과 진을 없애는 걸 초기경전에선 awareness-release (freedom by heart)라 하고 치까지 없애는 것은 discernment-release (freedom by wisdom)라고 부처님은 부르셨는데, 그냥 분별 않고 마음의 평화만 유지해서는 (awareness-release) 처세는 원만해지겠지만 해탈하지 못 한다. 탐과 진도 치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discernment를 통해야만 해탈 (discernment-release without sequel)이 가능하다. 전두엽 사용 자체를 포기할 게 아니라, 4성제와 12연기를 기준으로만 해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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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문제 1. Anattā (아나따): '無我' 아닌 '非我''
'번역의 문제 2. Papañca (빠빤쨔): '대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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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에서는 우주도 윤회한다고 말한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우주는 무수한 (조 단위였는지 경 단위였는지는 잊어 버렸음) 숫자의 태양계로 이루어진 크기이며, 성주괴공의 과정을 거쳐 윤회한다. 여태까지 91번의 우주 윤회 (world-cycles)가 있어 왔고 이 기간동안 6분의 부처님이 등장하셨는데, 우리가 아는 Siddhārtha Gautama 부처님이 6번째. 그 긴긴 세월동안 겨우 6분의 부처님이 계셨고 그 중엔 가르침을 남기지 않고 그냥 고독과 침묵만 지키다 가시는 부처님도 계시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시기에 태어난 것 자체가 큰 축복이라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그러니 이에 대해 감사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초기경전을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우선 노력해야 마땅하다. 새삼스럽게 언어의 불완전함 운운하는 것은, Right View를 팔정도의 첫 요소로 특정하고서 장장 45년에 걸쳐 그 방대하면서도 세세한 가르침을 남기신 부처님의 노고가 '헛수고'였다고 암시하는 행동이고 또 '이심전심의 기적'이 아닌 '불완전한 언어'를 가르침의 수단으로 선택한 부처님의 판단을 부정하는 일일 뿐이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염화미소, 도가도비상도 등은 초기경전에는 나오지 않는 얘기이며, 언어의 한계 운운하는 이들 중에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버젼을 일일이 비교 대조 분석하는 노력을 하는 이는 보지 못 했다. 그들이 언어의 한계 운운하는 것은 "그냥 나 편리한 대로 믿겠다"는 지적 게으름에 대한 합리화가 아닌지 의심되는 부분이다. "심심한 사과" 해프닝을 일으킨 반지성주의를 연상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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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updated her cover photo.

< 번역의 문제 1. Anattā (아나따): '無我' 아닌 '非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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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를 하는 자'라는 건 없다"라는 견해에 대해 부처님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할 수 있으면서 행위를 하는 자가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 노력, 분투, 인내 등이 있는데 노력, 분투, 인내하는 자는 없다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느냐?"고 논박하셨다 (AN 6:38). 또 MN 2 (사진)는 "'나' 있다"도 "'나' 없다"도 잘못된 견해 6가지에 들어간다고 못박았다. 전생에 내가 뭐였었는지를 명상을 통해 보려고 노력!하고 (부처님에게는 저절로 일어난 과정이지만 아라한이 되는 데에는 불필요) 사후에 내가 어떻게 되려는지에 대해 사유하고 이런 게 전부 '나 집착'이라는 얘기다. '나'는 오온 (몸, 느낌, 인식, 상카라, 의식)도 아니지만 오온 이외의 다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역시 없다고 SN 22.89는 얘기한다. 평범한 인간들이 그러하듯 오온에 집착/동일시하는 것도 어리석고 ("'나'라는 건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갈 허상"조차도 여전히 'I am X'에 해당하는 유신견), 그렇다고 '참 나 (眞我)'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노력 또한 어리석다는 것이다. 윤회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변해 가기에 의지할 수 없으니 '나'라는 정체성을 발달시키지 말라고 하셨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anattā의 번역으로 '無我'보다 '非我'가 보다 적확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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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없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세상에 너무 많은데, '나'라는 게 있느냐 없느냐 묻는 질문에 부처님은 대답을 거부하면서 오직 4성제와 12연기로만 매사를 파악하라고 하셨다 (SN 12:12, SN 12:15, SN 12:48). 주체/존재 중심의 사고 대신 동사/행위 중심의 사고를 하면서 매사를 오직 4성제와 12연기의 관점에서 impersonally 사고하라는 것. (4성제와 12연기의 관점을 유지하면 '나'라는 관념 없이도 계율을 지키고 선업을 쌓을 수 있다.) 선정의 행복을 알아야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애를 놓을 수 있으나 결국은 선정에조차 집착하면 안 된다는 의미 (SN 22:97, AN 9:36, MN 14)에서 언급하신 게 바로 aniccā (inconstancy, 無常), dukkha (stress, 苦), anattā (not-self, 非我)이건만, 한자로는 非我로 번역하는 게 최선이었을 anattā를 無我로 옮기면서 온갖 오해가 일어났다. 초기경전을 읽지 않으니 無我를 아무 검증 없이 받아들이고, 그렇기에 anattā를 '나 없다'로 착각하며, 그러고 나니 "이승의 나도 없는데 전생의 나 혹은 내세의 나는 무슨 멍멍 소리인가?" 헷갈리게 되면서, 그래서 "윤회는 방편일 뿐" 운운하며 윤회를 완전히 부정하게 된 것. 탐(貪) 진(嗔) 치(癡) 중 가장 해로운 것은 치 (탐과 진의 뿌리)라고 AN 3:68은 명시하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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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함, 겸손, 사적/감정적 사랑/공감 등이 anattā의 취지라고 대개 오해하지만, 자신을 남보다 낮추든 높이든 자신과 남이 동등하다 생각하든 이 모든 생각들이 윤회를 지속시키하는 conceit = selfhood ('I am')라고 초기불교는 가르친다 (Sn 4:5, Sn 4:9, Sn 4:14, SN 22:89, AN 3:33, AN 3:34, AN 4:185). 어떤 분은 "'나 없다'는 '나'라는 것에 실체가 없이 환상이라는 얘기"라고도 하시는데, '나'가 실체가 아닌 환상이라면 서로를 해치는 일이 죄가 될 이유가 없으며, 우리가 느끼는 윤회의 고통도 환상일 것이므로 해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고통을 끝내는 해탈을 가르치신 건, '나 없다'만 외운다고 해서 윤회의 고통이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법이라고, 그건 너무나 당연한 거라고 정작 부처님은 말씀하셨으며 (SN 3:8, Ud 5:1), 실은 수행조차 고의 원인인 탐진치를 분별, 제거함으로써 고를 끝장내고 완전한 행복, 영원한 자유인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을 보호/사랑하는 마음이나 분별 없이 "'나'라는 게 없다"는 논리로는 수행의 시작조차 아예 불가능하다는 얘기이며 (AN 4:159), 그러므로 자아/에고를 안정적이고 성숙하게 우선 만들어야 건강한 수행도 가능하다는 것이 타니사로 스님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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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ent, beings are owners of kammas, heirs of kammas, they have kammas as their progenitor, kammas as their kin, kammas as their homing-place. It is kammas that differentiate beings according to inferiority and superiority." -- MN 135
"I am the owner of my actions, heir to my actions, born of my actions, related through my actions, and have my actions as my arbitrator. Whatever I do, for good or for evil, to that will I fall heir." -- AN 5:57
“One truly is the protector of oneself; who else could the protector be? With oneself fully controlled, one gains a mastery that is hard to gain.” -- Dhp 160
"If one holds oneself dear, one should diligently watch oneself." -- Dhp 157
"By oneself is evil done; by oneself is one defiled. By oneself is evil left undone; by oneself is one made pure. Purity and impurity depend on oneself; no one can purify another." -- Dhp 165
"Wherever one’s selfhood turns up, there that action will ripen. Where that action ripens, there one will experience its fruit, either in this very life that has arisen or further along in the sequence." -- AN 3:34
"This body comes into being through craving. And yet it is by relying on craving that craving is to be abandoned. This body comes into being through conceit. And yet it is by relying on conceit that conceit is to be abandoned." -- AN 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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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22: The Wisdom of Ego. Mature Wisdom Requires a Mature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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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한 사람의 추후 행동에 업의 과보가 따르지 않는 이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5. 무조건 남을 내 위에/앞에 두는 것이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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