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7

1509 각계에서 문선명 총재에 대한 연구와 평가 활발:매일종교신문

각계에서 문선명 총재에 대한 연구와 평가 활발:매일종교신문


각계에서 문선명 총재에 대한 연구와 평가 활발
‘하늘과 함께한 위대한 생애’ 평전들


기사입력: 2015/09/11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사람의 위대함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군사적 재능으로 측정할 것인가? 재력으로 측정할 것인가? 아니면 정신적 역량으로 측정할 것인가?

역사가 H.G. 웰스는 사람의 위대함은 ‘그 사람이 발전하게 한 일과 그리고 그가 후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날로 새롭고 활기있게 생각하게 하였는지의 여부‘로 평가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선명(文鮮明·1920년 1월6일~2012년 9월3일), 그는 누구인가? 시대의 이단아인가? 아니면 인류를 사랑한 ‘평화의 성자’인가? 극과 극의 칭송과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세계적인 인물 문선명, 과연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삶은 어떠했는가?

2015년은 셰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의 창시자 문선명 총재가 성화(聖和·타계)한지 3주년이 되는 해이다. 음력(天歷) 7월17일(2015년은 양력 8월30일)은 문 총재가 성화한 날이다. 올해는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 문선명’ ‘평화로 세상을 연결하자’라는 슬로건아래 다양한 추모 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됐다. 이를 계기로 문 총재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어 주목된다. 그동안 기성 기독교단이나 언론 등에 의해 왜곡되거나 잘못 알려진 문 총재의 참모습을 밝히고 그에 대한 조명과 평가가 오히려 통일교단 밖에서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어떤 역사적 영웅이나 위인들도 당대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문 총재는 재세(在世) 시에도 그에 대한 일부 학자들의 평가와 저서들이 다수 출간돼 주목을 받았다. 물론 통일교단 내에서 방대한 분량의 문 총재의 ‘말씀’을 기록한 서적들은 많다. 그러나 이제는 교단 밖에서 통일교 신도가 아닌 제3자적 입장에서 ‘인간 문선명’에 대해 다룬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문 총재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가 상당히 이뤄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 총재가 성화한 이후 근래에 나온 책들은 『김일성과 문선명』(김동규 지음/고려대 명예교수), 『메시아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박정진 지음/문화평론가)와 『문선명 평전』(김호경 지음/소설가) 등이 대표적이다. 주로 ‘문선명 인물론’에 포거스를 맞추고 있는 위 3권의 책에 서술된 내용을 바탕으로 다루고자 한다.

김동규 『김일성과 문선명』을 통해 상반된 두 巨人 비교 평가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극과 극이 만나면 오히려 비슷한 측면이 생겨 서로 통하게 돼 있다. 평생 한반도의 공산화를 꿈꿨던 김일성(金日成) 북한 주석, 한평생 이 지구성에서 공산주의를 추방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려 했던 문선명 통일교 총재. 김 주석이 한반도 공산화를 꿈꿨다면, 문 총재는 지구상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는 게 목표였다. 두 거인(巨人)은 ‘통일’을 말했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은 전혀 달랐다.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던 김 주석은 무작정 ‘무력’만 키운 반면, 종교인이자 사상가였던 문 총재는 끝까지 ‘평화’에 호소했다. 두 사람이 1991년 만나 합의한 내용 중에는 ‘금강산 개발’과 ‘남북 문화예술 교류’가 들어 있다. 정치와 군사 대신 경제와 문화로 북한을 변화시키려 했던 문 총재의 강력한 요청이 이끌어낸 성과이다.

김일성 주석과 문선명 총재를 비교 연구해 『김일성과 문선명』을 출간한 김동규 교수는 두 사람을 “불과 물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극과 극이 ‘극’에 달하면 오히려 비슷한 측면이 생기듯 서로 상통하는 점이 많다.”고 했다. 그들은 인류 보편적 가치기준에서는 분명히 물과 불의 관계요 물과 기름의 관계이지만, 불이 물을 끓이고 물이 불을 소멸시키듯이 공존 불가의 적대적 관계이면서도 물과 불이 상보적(相補的)으로 음식을 만드는 것처럼 공존하는 동지로 변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는 분명히 접점(接點)보다는 분기점(分岐點)이 더 많았다. 18세기 영국에서 세계동포주의라는 이념으로 결성되어 각국의 주요 지도자들이 가담돼 있는 ‘프리메이슨’이라는 국제비밀결사조직에서는 한반도의 최고인물로 문 총재와 김 주석을 지적하고 있으며, 외국의 일부 학교의 종교 교과서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지도자로서 주체교의 교주로 김 주석과 통일교의 교주로 문 총재를 대비시켜 설명하고 있다.






김 교수는 두 인물의 동질성을 이렇게 평가한다. “외형적으로 키나 체중이 비슷하다. 김 주석은 ‘햇빛공포증’에 시달려 밤에 집무를 봤다. 빨치산 활동을 한 탓이다. 문 총재도 하루 3시간만 자고 일하곤 했다. 세간의 비난을 누구보다 많이 받은 점도 비슷하다. 그밖에는 모든 게 달라 보일 것이다. 한 사람은 독재정치의 지도자이고, 한 사람은 신흥종교 지도자가 아닌가. 김 주석은 공산주의자인 반면, 문 총재는 반공주의자이다. 하지만 물과 불이 상보적으로 음식을 만드는 것처럼 공존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김 주석은 50년간의 봉건영주적 독재정치를 통해 2000만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신도화 함으로써 하나의 종교집단 국가를 만들었다. ‘정치의 종교화’를 추진한 것이다. 주체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인민에게 강요해 종교적 신앙으로까지 확장시켰다. 문 총재의 통일교는 지상천국을 목표로 종교뿐 아니라 경제, 교육, 문화, 언론 등 다양한 영역에서 막강한 조직력을 발휘했다. 주체사상을 보면 수령・당・인민은 성부・성자・성령으로, 김일성 대(大)가정론은 유교의 충효사상과 연결된다. 통일교의 삼위일체는 하나님・참부모(문 총재 부부)・참자녀(신도), 가정질서 중시 사상은 유교의 부부유별과 맥을 같이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김 주석은 일국의 정치지도자로서 자신의 권력구조에 유교적인 통치철학과 기독교적인 유일·절대 사상을 대입시켜 정치의 종교화를 도모했다면, 문 총재는 종교지도자로서 종교적인 초월적 가치체계에 과학적 논리성과 현실주의를 적용함으로써 두 사람의 인식체계는 역방향으로 향하는 커다란 분기점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문 총재의 사상에 대해서도 “문 총재의 ‘통일사상’은 학문적으로 나에게 큰 충격을 줬다. 정치경제학에서는 마르크스의 정(正)-반(反)-합(合), 즉 변증법적 발전 개념에 대해 비판만 해왔지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통일사상은 정반합을 ‘정(正)-분(分)-합(合)’으로 수정하는 수수법(授受法)을 제시했다. 병아리(合)가 노른자위(正)와 껍데기 간의 갈등(反)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노른자위와 껍데기는 상호 협동관계(分)를 통해 새로운 병아리(合)가 된다는 논리이다. 나는 여기서 합리적 반공 이론의 실마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김동규 교수는 두 인물 비교를 통해 우리 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점이다.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는 지나친 ‘이념 갈등’이다. 너무 극단으로 보는 시각 때문인데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앞서 말했듯이 극과 극은 오히려 동질한 부분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김일성 주석과 문선명 총재가 한국 현대사에 드리운 명(明)과 암(暗)을 통해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인가를 비교 평가해 독자에게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싶었다.” 그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한 사람은 악명 높은 정치지도자로서 한 사람은 신흥종교의 교주로서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평가되고 있는 인물이지만, 1980년대까지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동서냉전으로 대치하는 극점에서 세계사의 시대정신을 대표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1991년 12월6일 북한 평양의 김 주석 공관. 김 주석과의 단독회동을 마친 문 총재가 부인 한학자(韓鶴子) 총재, 그리고 김 주석과 나란히 서서 기념촬영을 했다. 이들의 만남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를 뒤덮은 냉전의 얼음을 녹이고, 남북 간 교류·협력의 씨앗을 뿌린 일대 사건이었다. 애초 김 주석은 단독회동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평양 만수대의사당을 방문한 문 총재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하나님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곧 망한다”고 열변을 토하자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북한 지도층과 수행원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김 주석이 문 총재의 배짱에 반해 단독 회동 요청을 받아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훗날 김 주석은 측근들에게 “그렇게 배짱이 두둑한 인물은 처음 봤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김 주석이 79세, 문 총재는 71세였다 이렇듯 북한과 통일교의 관계는 각별하다. 여덟 살 차이인 두 사람은 평안도의 기독교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 주석은 평양 근교 평남 대동군, 문 총재는 평북 정주시가 고향이다. 김 주석의 생모 강반석(康盤石, 1892~1932)은 기독교 장로였다. ‘반석’이라는 이름은 성경의 베드로를 가리킨다. 교육자였던 외할아버지 강돈욱(敦煜, 1871~1943)은 칠골교회 장로였다고 한다. 문 총재 역시 작은 할아버지 문윤국(文潤國, 1877~1958)목사로부터 많은 가르침과 영향을 받으며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이처럼 개신교 영향이 두드러진 환경에서 자랐으면서도 한 사람은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자로, 다른 한 사람은 특정 종파를 넘어선 평화주의자로 성장한 점이 특이하다.

문 총재는 방북(訪北) 당시 김 주석의 배려로 누나와 여동생 등 가족을 만나고 고향 생가를 찾았다. 김 주석은 문 총재에게 평안도 음식인 언 감자국수를 대접했다. 두 사람은 “역시 고향 사람끼리 만나니 입맛까지 잘 통한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때 김 주석은 문 총재의 생가를 잘 보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곳에는 현재 통일교 성지인 대규모 정주평화공원이 조성돼 있다.

문 총재의 방북(訪北) 당시 두 사람은 남북경제협력 등을 논의했고, 역사적인 남북교류의 물꼬를 텄다. 통일교 측은 북한에서 남포 평화자동차공장, 평양 보통강호텔과 세계평화센터(지하 1층, 지상 5층), 평화자동차부품회사, 평화주유소 등을 운영한다. 문 총재의 방북 이후 해외 통일교 신자들의 문 총재 생가 성지순례가 이어져 북한도 적잖은 관광수익을 올렸다. 어느 날 김 주석이 북한에 머물고 있는 통일그룹 관계자에게 커다란 항아리를 선물했다. 그 항아리를 문 총재의 생가 입구에 놓도록 했다. 통일교 측은 한동안 이곳에 모이는 달러 헌금을 북한 당국에 전달했다. 북한의 경제난으로 한 푼의 달러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특히 경조사를 챙기는 것에서 두드러진다. 1994년 7월8일 김 주석 사망 때는 박보희(朴普熙) 세계일보 사장이 문 총재의 특별지시로 방북해 조문했다. 문 총재는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2011년 12월에도 문형진(文亨進) 통일교 세계회장을 북한에 파견해 직접 조문을 하게 했다. 당시에 그는 김정은(金正恩)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도 만났다.

김 제1위원장은 이번 문 종재 성화 3주년 때에도 ‘문선명 선생의 유가족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친히 조전을 보냈다. 문 총재 보다 먼저 사망한 김 주석은 생전에 “문 총재를 각별히 배려하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북한은 문 총재 생일 때마다 귀한 선물을 보내오곤 했다. 구순을 맞은 2009년에는 산삼 세 뿌리(90년, 80년, 60년짜리)와 장미와 백합 각각 90송이로 된 화환을 보냈다. 그밖에도 김 위원장이 보낸 ‘금박, 은박 을밀대’ 모형과 금관, 은관, 보석을 잘게 부숴서 그린 금강산 만년화 등이 천정궁(天正宮)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천정궁은 경기 가평군 설악면 천성산 일대 통일교 성지의 본궁(本宮) 격이다. 문 총재가 성화하기 전까지 거처했던 곳으로 문 총재 생애박물관을 겸하고 있다.

김 교수는 “그들이 한국현대사에 드리운 명과 암에서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평가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우리와 동시대에 살다 간 두 인물의 행적을 조명하여 대비(對比)시킴으로써 민족분단의 근원을 또 다른 시각에서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판단기준으로 내일의 올바른 역사관을 갖게 하는 데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특히 문 총재에 대해 그는 “(문 총재의) 숨은 힘과 선도적인 사상, 일념의 조국애, 그리고 세계적인 평화활동은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 반드시 올바른 평가로 기록되어질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박정진 “문명사적 시선으로 문 총재의 사상·발자취 재조명‘

“나는 이름 석 자만 말해도 세상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지는 세상의 문제 인물입니다. 돈도 명예도 탐하지 않고 오직 평화만을 이야기하며 살아왔을 뿐인데 세상은 내 이름자 앞에 수많은 별명을 덧붙이고 거부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문 총재가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서두에서 한 고백이다. 그를 ‘이단(異端)’으로 지목해 핍박한 한국 기독교와 평생에 걸쳐 겪은 불화를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다. 문 총재를 불온시해 인류평화에 헌신한 공적까지 외면하려는 일부 기성교인의 태도는 과연 온당한가.

언론인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저자 박정진은 1950년대 세계의 변방에 불과했던 한국에서 탄생한 통일교가 오늘날 194개국에 선교본부를 둔 ‘세계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을 문명사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지금 서양의 기독교는 신도수의 격감으로 실의에 빠져있다. 신부나 수녀, 목사 등 성직자들을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조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종래 기독교 신학이론으로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흥을 줄 수가 없다. 반면 통일교는 현재 미국과 일본 신도들이 국내 신도수를 훨씬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교국가는 190개국을 넘어섰다. 2010년에는 36만쌍의 축복결혼식이 있었다. 참가정 실천운동은 4억쌍이 참여하고 있다. 심지어 많은 서양의 목사와 지식인들도 통일교 이론에 심취해 개종을 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면 한국에서 태동한 통일교가 한국에서는 이단이라는 지탄을 받고 배척 받았는데 세계적으로는 어떻게 이토록 성공할 수 있었을까? 문 총재가 기독교 전통이 아주 강한 집안에서 성장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는 어릴 때 종조부 문윤국 목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교회에도 열심히 다녔다. 하지만, 특정 종교의 울타리 안에 머물기엔 문 총재의 ‘그릇’이 너무도 컸다. 그는 기독교는 물론 다른 여러 종교와 한국 전통사상까지 아우르고자 했다.

저자는 문 총재가 한국의 독특한 ‘자생기독교’인 통일교를 세우고 세계화되어 가는 과정을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역사 운명적인 문 총재의 발자취와 사상을 하나하나 복기한다. 세계화가 된 통일교는 어쩌면 요즘 유행하는 한류(韓流)보다 먼저 기틀을 잡아놓은 것이 아닌가하는 글로 시작한다. 이어 통일교의 추세와 리틀엔젤스의 세계적인 활동을 논한다. 세계로 진출한 통일교가 현대에 걸맞은 메시지로 환원하게 한 문 총재의 의미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여성시대를 열어가는 한학자 총재의 의미를 다양한 측면에서 조망한다. 끝으로 '대승기독교'로 통일교가 발전해가는 현상을 고찰하면서 통일교는 현재 지구상에서 존재하는 종교 가운데 가장 폭넓게, 전체적으로, 포괄적으로 기독교를 통일하고자 한다.






통일교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지인(天地人)-음양(陰陽) 사상의 토대 위에 서양의 기독교 절대 신관(神觀)을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신관을 정립하게 된다. 기독교 사상과 우리 고유의 전통사상이 어우러져 '한(恨)의 하나님'이 도출되는데, 이는 독생자 예수를 보내어 구원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아야했던 하나님의 한을 풀어서 못다 이룬 하나님의 뜻을 완성해야 한다는 사명을 띠고 재림주가 온다는 것이다. 재림주는 신약시대 이후의 완성되지 못한 채 미뤄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오는 것이고 약속이 완성되는 때가 성약시대라는 것이다. 통일교 신학이론은 서양의 '닫힌 기독교'를 '열린 기독교'로 바꾼 획기적인 자생신학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다.

도리어 서양에서 그 의미와 기미를 느끼고 있는 듯하다. ‘문선명 현상’은 한국문화의 맥락으로 보면 구한말 외세에 대항하여 일어난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의 완성이면서 모성시대를 향한 기원적 시기에 일어난 '기독교의 세계적 완성'이다. 문 총재가 약속이 완성되는 성약시대에 메시아로 등장하여 그 사명을 완수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메시아를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된 셈이다. 이 점이 기독교의 존재신학과 다른 통일신학이다. 그리고 메시아는 문 총재 한 사람만도 아니다. 메시아는 우리 집단의 각 단위별로 종족메시아, 국가메시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가정에서 메시아적 사명을 완수하는 것으로 ‘대승기독교’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역설한다.

오늘날 통일교가 큰 성공을 거둔 이유에 대해 저자는 “기독교와 한국 전통사상이 융합함으로써 토착화를 이룩하고, 나아가 세계종교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통일교의 핵심은 기독교에 한국 전통사상을 가미한 점이다. 따라서 요즘 세계를 휩쓰는 한류의 원조가 문 총재라는 주장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독교계가 통일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우리 고유의 전통을 경원시하고 그저 서양에서 들어온 사상과 이론만 숭상하려는 ‘사대주의’의 발로일 뿐이란 저자의 분석이 날카롭다. 책 제목이 도발적이다. 일부에서는 “결국 문 총재 본인이 메시아라는 뜻 아닌가”라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문 총재의 사상을 연구한 저자가 정말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이다. “메시아를 기다리지 말고 너희가 메시아가 되어라.”


김호경 “탄생에서부터 ‘최후의 기도’에 이르기까지 92년의 굴곡 많은 삶”

『문선명 평전』은 목사, 총재, 교주, 선생님, 메시아, 참아버님 등 그 많은 호칭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의 문선명을 조명했다. 문 총재는 종교인으로 출발했지만 기업인, 저술가, 언론인, 사상가로서의 역할을 한없이 뻗어나갔다. 통일교 교주 문 총재가 2012년 9월 성화한지 만 3년이 흘렀다. 살아생전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이는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통일교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일본, 미국, 유럽, 남미에서도 마찬가지다. 문 총재는 1970년 이후 일본 입국금지령이 내려졌으며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입국이 금지됐다. 왜 적지 않은 나라에서 문 총재의 입국을 금지했는가. 그는 평생 여섯 번이나 교도소에 수감됐으며, 그의 말과 언행은 늘 언론의 추적 대상이 되었다. 6번의 감옥살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 기업, 교육, 예술에서 그렇게 엄청난 업적을 쌓았으며, 숱한 논란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광복 이후 한국의 신흥종교로서는 최초로 통일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키웠을까?

문선명! 그 이름 석 자만으로도 그의 말처럼 세상은 와글와글 시끄러워진다. 왜, 무엇이, 어떤 이유로 그는 항상 논란의 한가운데 있게 됐는가? 그의 어떤 말이 그를 사이비 교주로 몰아갔으며, 그의 어떤 교리가 기독교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어떤 행동이 1970년대 이후부터 한국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는가?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자체가 왜 신성모독으로까지 간주되는가? 통일교를 접했다는 이유만으로 지탄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책은 1920년 1월6일 문 총재의 탄생에서부터 2012년 9월3일 성화할 때까지 만 92년 생애를 살면서 그가 행했던 모든 일들, 그가 주장했던 교리, 그가 행한 연설, 그가 이룩한 업적, 그가 방문한 장소, 그가 만들었던 기관과 단체, 조직 등을 망라해 취재하고, 탐구하고, 면밀히 분석한 최초의 일대기이다. 주관적 입장과 교리를 철저히 배격하고 오직 객관적 자료와 그가 행한 연설, 행동을 바탕으로 과연 그는 한국과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면밀히 탐구했다. 저자는 소설 『낯선 천국』, 스크린 소설 『명량』 『국제시장』 등을 집필한 유명 소설가 김호경으로 통일교인이 아닌 무신론자이다.






● 天命을 따라 걸은 굴곡 많은 92년의 생애
문 총재의 생애는 공격, 비난, 비판, 사이비, 왜곡, 오해, 무시, 부정 등으로 얼룩져 있다. 현대 한국인으로서 그만큼 많은 공격과 비난을 받은 사람도 드물고, 그만큼 많은 일을 해낸 사람도 없으며, 그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인도 드물다. 풍운(風雲)으로 얼룩진 그의 삶을 되돌아보며 과연 무엇이 그를 그토록 문제적 인물로 만들었는지를 추적했다.

제1장은 북한 정주에서 출생한 이후 16세에 스스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가문의 내력을 밝히고 어린 시절과 일본 유학시절을 들려준다. 제2장은 통일교의 탄생 과정을 연대순으로 설명하고, 제3장은 통일교가 세계로 뻗어나간 역사를 일본, 미국, 남미로 나누어 추적했다. 제4장은 세계평화와 인류 화합에 헌신한 노력을, 제5장은 길고도 처절했던 공산주의와의 투쟁을, 제6장은 기업을 세운 배경과 성공·실패의 과정을 추적했고, 제7장은 수많은 학교들을 세운 과정과 의미를, 제8장은 ‘리틀엔젤스’를 비롯한 예술에 헌신한 발자취를 설명했고, 제9장은 언론에 투신한 배경과 세계적 활동, 제10장은 합동결혼식의 의미와 역사를 되돌아보았고, 제11장은 통일교 교리는 과연 무엇인가를 탐색했다. 제12장은 문 총재의 사후(死後)에 통일교를 이끌어가는 한학자 총재에 대해 분석했으며, 제13장은 문 총재의 최후의 기도를 통해 그가 이 세상에 던진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를 살폈다. 또한 부록으로는 세계적으로 치른 성화식(장례식)의 면모, 문 총재가 남긴 어록과 함께 92년에 걸친 연보(年譜)를 수록했다. 이를 통해 ▲과연 ‘인간 문선명’은 누구이고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룬 업적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독자가 판단하도록 했다. 이 책에는 그 과정이 객관적이면서도 소상히 담겨 있다. 저자는 그가 ‘사악한 사이비 종교의 교주'인지, '평화를 사랑한 세계인'인지 판단을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객관적 설명 외에 교리는 최대한 배제했으나 꼭 필요한 부분에서는 교리를 인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 책 속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부분을 발췌해 인용․소개한다.

◆ 「제1장 탄생은 깨달음을 위한 것이었다」 중에서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영혼의 세계는 과연 있는가? 하나님은 확실히 존재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정말 전능한 분인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셨다면 이 세상의 고통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인가? 왜 인간은 서로를 미워하며 싸우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인가?’ 이는 심각하고 본질적인 질문이었으나 그 어느 누구도 대답해줄 수 없었기에 오로지 기도만 했다.

사춘기에는 누구나 그런 의문을 한 번씩은 갖게 된다. 탐구 끝에 나름대로 자신만의 답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답을 모른 채 어른이 되기도 한다. 문선명은 그때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기도를 하는 동안에는 고통도 슬픔도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자 기도시간이 점점 길어졌고 급기야 밤을 새우는 날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16살(1936년)의 부활절 전날 밤에 마을 뒤에 있는 묘두산(猫頭山)에 올라 밤새 기도를 했다. 눈물을 흘리며 삶과 사람, 죽음, 세상의 참 의미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기도로 꼬박 밤을 새운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이 그 앞에 나타나셨다. “고통 받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고 계시니라. 지상에서 하늘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맡아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 “하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언제든지 정성과 마음을 다해 그 목적지를 찾아가야 합니다. 이 길에는 집념이 필요합니다. 타고난 고집불통인 나는 본래부터 집념덩어리였습니다. 타고난 성질 그대로 집념을 갖고 고난을 극복해가며 내게 주어진 길을 갔습니다. 흔들릴 때마다 나를 단단히 붙잡아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었다’는 엄중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단 한번뿐인 청춘을 바쳐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때로는 피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문선명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결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기꺼이 바치기로 했다. --

◆ 「제3장 통일교, 세계로 뻗어나가다」 중에서
“세계는 정말로 넓고 크다. 거기에는 많은 나라와 민족이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탄자니아와 같은 가난한 나라에 내가 가기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 비록 그 길이 사막 한가운데를 오랜 기간 걸어야 하는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노정이라 해도 나는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사모토가 탄자니아에서 순교한 것은 1980년 12월18일이었다. 항구도시 다르에스살람에서 총에 맞아 순교한 것이다. 성스러운 순교는 이미 1973년부터 시작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선교사를 비롯한 신도 30여 명이 한꺼번에 검거되는 일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때 24살의 마리 지브나는 차디찬 감방에서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어 공산국가에서 선교하다 숨진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이듬해에 또 다른 신도가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선교를 하다가 추방되는 일은 다반사였고 공산권 국가에서는 언제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공포의 상황이 계속되었다. 단지 통일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해를 받은 신도들의 사연은 참으로 애처롭다. 중국, 남미, 중동 등 세계 각국에서 생명을 위협받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의 발길은 1958년 이래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그 고통과 위험 속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돕고, 학교를 세우고, 직업교육을 시키고, 황야를 개척해 먹고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일에도 뛰어들었다. 오늘날 190개가 넘는 나라에 통일교회가 있고 신도들이 있는 것은 모두 선교사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일교 창시자로서 문선명 역시 선교사 중의 한 명이었다. 미국에서 여러 차례 50개주 순회강연을 통해 미국인의 신앙심을 일깨웠으며 1990년대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련과 북한을 방문해 한 치의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전세계 선교사들은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의 정신을 물려받아 묵묵히 순교의 길을 걸었으며 정신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온갖 학대와 억압을 견뎌냈다.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통일교는 한국인에 의해 창시된 신흥종교로서 전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다.

◆ 「제6장 경제와 기술로 세계발전에 이바지하다」 중에서
문선명은 어렸을 때부터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 치하에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한 문선명은 특히 기계공업 계통에서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때에 앞날을 내다보는 사업들을 구상했다. 북한의 남침 위협이 상존하는 한국의 실정을 감안할 때 하루 빨리 방위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지적했으며, 기계공업의 꽃인 자동차 산업을 발전시키고자 주장했다. 통일교 기업들 중 최초로 정부 허가를 받은 사업은 예화산탄공기총제작소였는데, 1959년 12월에 정부 인가를 받았다. 아직 시장조차 형성되지 않아 사업의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었지만 특허상품으로 발전시키면서 장래를 대비해 나갔다.

문선명은 일본 사람들이 쓰다가 버리고 간 선반기계를 1962년 화폐개혁 전에 72만 원을 주고 샀다. 그것을 교회로 쓰던 적산가옥의 구석진 연탄광에 들여놓고 ‘통일산업’이라 이름 지었다. “여러분의 눈에는 이 선반기계가 보잘것없어 보일 수도 있어요. 고작 낡은 기계 한 대를 들여놓고 도대체 무슨 사업을 벌인다는 것인가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앞에 놓인 이 기계가 머지않아 7천대 아니 7만 대의 선반기계가 되어 대한민국의 군수산업과 자동차 공업까지 꼬리를 물고 발전할 겁니다.” 그러나 기술개발은 그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갖은 실패 끝에 10년 걸려 끝낼 일을 3년 안에 끝내야한다는 절박함으로 매진했다. 그 결과 공작기계 등 기술개발에 성공하여 공기총과 선반, 부속기계 등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통일산업은 M1소총과 똑같은 공기총을 만들어 청와대에 납품했고, 1969년에는 정부와 계약을 추진하는 한편 1973년에는 방위산업체로 지정받아 분당 30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발칸포를 개발하는 등 자주국방의 틀을 갖추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왜 살상무기를 만드느냐고 의아해 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 이유는 하나였다.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강해지는 게 최고의 방법이자 최선의 방법이다. 무기의 국산화에 성공하면 우리나라를 우리의 손으로 지킬 수 있고 절약된 돈으로 다른 산업을 일으킬 수 있어 모든 점에서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문선명은 바로 그러한 마음으로 방위산업에 뛰어들었다. 과학기술 평준화의 꿈을 가지고 출발한 대표기업이 바로 통일중공업이다. 통일중공업은 1959년에 단 4명으로 출발했으며 온갖 어려움과 고난을 무릅쓰고 발전을 거듭하였다. 아무런 기반이 없었던 초창기에 경제기반을 닦기 위해 밑바닥부터 가장 정성을 들인 기업이었다.

◆ 「제12장 통일교의 미래를 이끌 한학자 총재」 중에서
“한국 여성은 전통적인 미덕으로 유명합니다. 부모님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효도, 남편에 대한 존경, 그리고 자식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 이 3가지 미덕의 전통으로 유명합니다. 한국여성은 일반적으로 수줍음을 많이 타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 용감히 일어서서 생명을 걸고 조국을 지켰습니다. 여러분에게 한국에서의 진정한 힘은 여성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평생을 문 총재의 뒤에서 말없이 걸어온 한학자 총재는 수만 명의 관중 앞에서 강연도 여러 차례 했다. 1991년 9월17일 일본에서의 강연은 뜻 깊은 행사였다. 소규모의 사람들과 통일교 신도들 앞에서는 여러 차례 설교와 강연을 했지만 수만 명이 모인 곳에서의 본격적 강연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알래스카에 머물던 문선명은 대회를 1주일 앞두고 아내의 일본 강연을 결정했다. 9월17일 도쿄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평화여성연합 일본대회에서 한 총재는 ‘아시아와 세계를 구원하는 참사랑운동’을 주제로 이렇게 말했다.

“옛말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가정이 평화의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을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참사랑입니다. 참사랑이란 사랑 중에서도 하나님을 중심한 절대사랑을 말합니다. 즉 사랑할 수 없는 것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참사랑이어서 참사랑 속에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한다는 입장에서 서로 평등한 가치를 갖게 되고, 일체가 된 부부는 하나님의 참사랑의 파트너가 되며, 창조주와 인간은 참사랑을 중심삼고 평등한 가치를 갖게 됩니다. 이제 여성 여러분이 아시아와 세계를 위하여 참사랑의 실천자들이 될 때, 오늘의 이 역사적 대전환의 시점은 일본은 물론 아시아가 세계로 비약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등장할 것입니다.” 한 총재는 일본어를 할 줄 모르지만 문선명이 일본어로 강연할 것을 말하자 연설문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읽어 줄줄 외울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거창한 도쿄돔에서 강연을 무사히 끝내 일본 신도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그때를 한 총재는 “꼭 물짠 탈지면처럼 딱 기절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한 총재의 강연은 편할 날이 한 번도 없었다. 해발 400m나 되는 볼리비아 수도 라파즈에서는 산소호흡기를 옆에 두고 강연을 했고, 전쟁으로 폭탄이 날아다니는 크로아티아에서는 비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을 위해 밤새 기도를 올렸다. 한국의 대학을 순회할 때는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곳이 많았으며, 중동에서는 참석자들의 반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도 했다. 아프리카 순회를 앞두고 일주일에 1알씩 복용해야 하는 말라리아 약을 잘못 처방받아 하루에 1알씩 3일을 복용하고 말라리아에 걸려 심하게 앓았다. 그럼에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나라를 옮겨다니며 강연을 했다. 1년에 153회의 강연을 하는 강행군 속에서 강력한 조명의 불빛으로 인해 시력이 나빠지고, 목이 갈라졌다. 세계 여성지도자로서 유례가 없는 대기록을 세우며 참어머니로서의 주어진 책임을 다한 것이다. 

<精吾 문윤홍·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