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는 기독교인가…기독교와 통일교의 교리 차이는? :매일종교신문
통일교는 기독교인가…기독교와 통일교의 교리 차이는?
기독교와 다른 성경해석으로 충돌하기도…타락에 대한 해석, 구원관 달라
기사입력: 2018/04/02 [19:23]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통일교)은 한국에서 탄생한 신(新)종교이다. 그렇다고 전통 민족종교라고는 할 수 없다. 불과 창립 50년 만에 전세계 195개국에 교회와 선교본부를 두고 있는 글로벌 종교로 성장한지 오래이다.
그런데 통일교는 기독교와 유사하다. 아니 통일교의 뿌리는 기독교다. 기독교 성경을 기본 경전으로 삼고 있으며 기독교의 신(神)인 하나님을 신앙하고 있다. 창립 초기에는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가 공식 명칭이었다. 오늘날 일반에 널리 알려진 통일교는 이 명칭을 줄여서 불리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 통일교에서 성경과 함께 경전으로 사용하는 ≪원리강론≫은 성경을 논리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다시 말해 통일교는 성경을 재해석한 새로운 원리에 바탕을 둔 신앙체계라 할 수 있다. 통일교에선 성경은 교과서이고 원리강론은 참고서라고 본다. 그러면 기독교와 통일교는 어떤 교리의 차이가 있는지 자세히 살펴본다.
기독교와 통일교의 교리 차이
1. 신앙의 대상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고 똑같은 성경을 믿는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같다. 경전인 성경도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구약 그대로이다.
2. 타락에 대한 해석이 기독교와 전혀 다르다.
통일교는 해와가 뱀(사탄)의 유혹을 받은 것을 ‘공주와 같은 해와’를 ‘종의 입장인 누시엘(천사장)’이 사랑의 유혹을 했다고 보고 있다. 성적인 유혹이라고 하면 틀린다. 성적 유혹은 제비나 창녀의 육체적 유혹인 반면, 사랑의 유혹은 순수한 사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와에게는 이미 배필이 있었다. 바로 아담이다. 아무튼 해와는 계속 대접을 잘해주면서 구애하는 누시엘(사탄이 됨)을 뿌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걸 미리 아신 하나님이 누시엘의 사랑 공세에 굴복하지 않도록 사랑을 이겨낼 수 있는 지침을 주었으니 그게 바로 “따먹지 말라"는 계명이라고 본다.
즉 잘못된 사랑의 관계로 곧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젠 타락으로 해와의 몸 속에는 누시엘의 원리를 벗어난 불륜한 사랑이라는 악의 피가 스며들었다. 타락으로 원죄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 죄는 계속 유전돼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분노했다.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성혼(成婚)도 못한 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이면서 부모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을 그냥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인간을 다시 구원해 주기로 했다.
3.구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성 기독교와 조금 다르다. 통일교는 일단 하늘나라가 지상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내세를 궁극적 세계라고 보면서도 지상에서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내세에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교는 기독교와는 달리 지상에다 먼저 에덴을 건설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지상에서 에덴을 이루어 살지 못한 사람은 천상에서도 에덴, 곧 천국에서 살 자격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4. 누가 그런 구원을 받는가
인류가 지은 원죄(原罪)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모두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가 곧 사탄의 피를 씻어내고 순수한 하나님의 본래 혈통으로 복귀한 인간이다. 통일교에서 행하는 축복(결혼)의식이 바로 혈통을 중생(重生)케 하는 의식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나 축복의식 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바탕 위에 ‘지상(地上)에서 천국생활을 한 사람’만이 구원받는다. 메시아를 믿고 축복을 받아 천국인답게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지상을 하나님이 애초에 원했던 에덴으로 바꿔야만 한다.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지상에서의 천국생활은 또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원죄를 청산하고 순결한 참가정을 이루어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 형제자매의 사랑 등 4대 사랑을 체휼하고 완성한 인격체가 되어 자신과 가정, 이웃과 사회를 위해 더불어 위하는 삶을 실천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상태를 뜻한다. 이 지상에서 그렇게 평화로운 상태를 누리며 살아본 사람만이 천상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이 곧 구원이다.
그런데 언젠가 천국이 지상에도 도래하고 모든 인류가 구원이 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참사랑을 실천하는 평화 상태를 이룰 때 지상천국이 건설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다시찾은 에덴동산’이다. 세계가 그렇게 에덴동산의 상태가 될 때, 하나님의 인간 구원섭리는 완결된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가 올 때까지 모든 인간은 종교와 교파를 초월해 노력해야 한다.
5. 구원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구원의 방법)
구원 받을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오직 한 가지 혈통을 바꿔줄 즉, 중생(重生)해줄 메시아가 이 땅에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메시아가 와서 구원섭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환경(보호막)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런 메시아의 울타리요 보호막이 곧 유대교와 유대민족이다. 그렇지 않다면 메시아가 구원도 하기 전에 사탄에 의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메시아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무리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순종의 상징으로 어린양, 암소, 비둘기 등을 제사하게 하면서 그런 동물처럼 살길 바라셨다.
성경 구약으로 들아 가서 보자. 구약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에게 알리기 위해 하나님은 수많은 선지자를 보냈던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곧 하나님의 섭리를 완성할 중심인물이다. 그들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믿고,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믿음의 생활을 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구원하기로 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역시 그러한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 어린양과 같은 제물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오히려 메시아를 대마왕으로 오인(誤認)하여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지상에 천국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의 대속으로 영적 구원의 기대만을 완성하게 되었다. 전에는 불신하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어린양의 입장을 완성해 순종·굴복하여 중생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영적 구원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영육 아우른 완벽한 구원으로 알고 있지만, 성경은 예수님 부활 후에도 육신은 여전히 사탄의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교의 가르침도 일정한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6. 하나님은 다시 중심인물(재림주)을 보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중심인물을 보내셨다. 그 중심인물이 바로 문선명 선생이다. 문선생의 말을 따라 하나님을 믿고 결혼 축복을 받고, 생활 속에서 순결을 유지하고, 가정을 중시하면서 선한 실천을 계속하면 구원, 곧 진정하고 영원한 평화를 얻게 된다. 하나님은 문선생과 한학자 총재를 통해 지금 구원섭리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본 사람들, 또는 기독교에 대해 조금 아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대목들이 속속 등장한다. 다른 그 무엇보다 당장 문선생이 ‘하나님 섭리의 중심인물’로 자처한다는 점부터 기성 기독교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7. 문선생은 하나님인가 아닌가
실제로 통일교인들은 문선생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또 문선생과 함께 부인을 ‘참부모’라고 한다. 그리고 통일교의 축복가정 모두 참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만인 메시아론 주장) 말하자면, 그들도 믿고 따라야 할 신앙의 대상이 돼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문선생 자신이 궁극적인 ‘하나님’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통일교의 문선생이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은 원리강론에서 삼위일체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통일교측에 따르면 “문선생 자신도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선생도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고’ 있는 ‘중간 존재’라는 것이다. 다만 인간에게 하늘의 말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려고 한다는 하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인간 세계에 내려온 존재라는 설명이다. 인간보다 한 단계 더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존재, 예수님처럼 이 세계에 구원 섭리를 전하고 실천하러 강림한 존재라고 일컫는다.
8. 믿음과 실천 모두 구원의 요건으로 본다
통일교는 기독교와 달리 개인 구원보다 세계의 영구 평화운동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기성 기독교에서는 2,000년전 이스라엘 나사렛의 말구유에서 태어나 하늘의 말씀을 전하다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붙잡혀 유대인들의 주장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그 예수님만 인정한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보혈(寶血)을 흘리고 죽어갔다는 사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해 하늘에 올랐다는 사실만 받아들인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 대속(代贖)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1920년 평안북도 정주 땅에서 태어난 문선생은 ‘내가 곧 예수님의 뒤를 이어 인간 세상에 내려온 하나님 섭리의 중심인물’이라고 하니, 판이하다. 통일교에서는 먼저 ‘지상에서 참사랑을 실천하는 완전하게 평화로운 삶’을 누려야 천국에 가서도 평화와 영생을 누릴 수 있으며,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해석한다.
지상에서의 평화로운 삶이란 ‘하늘 말씀에 따라 참사랑을 통한 참가정을 이루고 이를 소중히 여기고 선한 생활을 하며 이웃을 위해 살아가는 실천적인 삶’을 의미한다. 또 인간들이 모두 그런 마음으로 노력해 지구상에 완전한 평화를 이루게 되면, 그날이 바로 지상에 본연의 ‘에덴동산’이 실현되는 날이며, 그렇게 해서 영원한 지상천국이 시작된다고 갈파한다.
그러나 기성 기독교에서는 육신이 죽은 뒤 이승을 떠나 ‘천국에서의 영생’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고 본다. 나아가 신·구약 성경 66권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쓰인 것처럼 ‘세상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내리는 불의 심판을 받지 않고 이미 천국에 들어간 이들과 함께 ‘영생의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것을 구원으로 본다.
구원에 이르는 길도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믿음’이 관건이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 구원의 섭리,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내려오고 세상을 구원하려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사흘 만에 부활했고, 그가 다시 세상에 올 때 심판의 날이 올 것이며… 하는 사실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곧 믿음이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인 셈이다.
반면 통일교에서는 믿음만으로는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믿음은 구원받기 위한 필요조건이며 여기에 ‘지상에서의 실천’이라는 충분조건을 갖춰야 구원받는다고 본다. 어떤 실천인가. 앞서 본 것처럼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에 봉사하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실천, 두 가지가 병행될 때 인간에게는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며 그렇게 평화를 누려본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9. 통일교의 종교관과 수난사
여기서 나아가 통일교는 ‘종교는 수단일 뿐,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종교는 개인이 궁극적으로 몸과 영혼의 평화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것이지, 종교가 인간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그런 점에서 학교이다. 학교에서 정해진 공부를 마치고 몸에 실력이 다 붙으면 졸업한다. 완전한 평화를 이룬 사람에게 무슨 종교가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고 에덴동산에 인간을 지었을 때, 거기에 무슨 종교가 있었는가. 참평화만이 있었다.
신앙생활은 개인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평화를 찾아가는 과정이요, 수련과정이다. 그것이 반드시 통일교일 이유는 없다. 어느 종교든 그 종교에서 가르치는 선한 생각과 선한 삶을 몸에 익혀 평화를 얻은 사람은 그 종교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런 모든 이가 모여 평화의 세상을 만들 때, 그것이 곧 지상천국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와 교파는 서로 배척할 필요가 없다. 모두 어울려 평화를 이루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 의미가 있다.
이런 교리에 따라 통일교는 전도와 교회개척에 별다른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계열 기업이나 단체에 몸담고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도 ‘통일교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쪽으로 힘을 쏟기보다 그 시간과 노력을 아껴 오히려 성실한 생활에 매진함으로써 주변에 통일교 신앙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활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으로 전도를 대신한다는 것이다.
통일교의 한 관계자는 “그래서인지 계열 기업이나 계열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통일교 신도가 아닌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 가운데 통일교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고 덧붙인다. 나아가 자신을 배척하는 기성 기독교든 불교든 천주교든 이슬람교든, 통일교는 모두 끌어안고 화합한다는 것도 특징으로 내세운다. 무슨 기독교 교파니, 종단이니 하는 명칭 대신 공식명칭을 ‘연합’(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라고 한 것도 거기서 연유한다. ‘교파를 초월해 다 같이 평화를 향해 나아가자’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미 신앙의 의미, 구원의 의미, 구원의 방법에서 차이가 나는 만큼 기성교회는 통일교를 기독교로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와의 갈등으로 통일교는 지난 60여년 역정에서 국내에서만 두 차례에 걸쳐 큰 수난을 겪었다.
하나는 1955년에 발생한 이른바 ‘이화여대 사건’으로 문총재가 구속까지 됐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1980년대의 이른바 ‘피가름’ 논쟁이었다. 결국 이 두 사건은 모두 통일교가 근거 없이 ‘훼손’당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통일교는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때의 이미지로 통일교를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먼저 이화여대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자. 청년 문선생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현판을 처음 내건 곳은 서울 성동구 북학동의 한 판잣집이었다. 그때가 1954년 5월이고 집주인은 양윤영씨로, 이화여대 음악과 시간강사였다. 그는 앞서 문선생에게 감화된 대학생 유효원씨와 지인 사이로, 유씨를 통해 문선생의 새로운 성경 해석을 받아들인 터였다. 양씨가 집을 장충단공원 부근 약수동 야산 기슭으로 옮긴 이후 문선생이 현판을 내건 판잣집교회는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북적거리게 된다. 이화여대에 몸담고 있던 양 교수를 통해 학생들이 문선생의 교리를 접한 이후다. 문선생의 교리를 들으려는 이들이 불어나더니 손바닥 만한 판잣집교회 안팎으로 300여명이 몰렸다. 그런 가운데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1955년 7월 경찰이 문선생과 유효원 씨 등 그의 초기 제자 4명을 전격 체포한 것이었다. 사연인즉, 이화여대생들이 문선생의 교리를 듣기 위해 몰리자 학교 측에서 조바심이 났다. 당시 이화여대는 캐나다의 기독교재단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운영하던 터였다. 그런데 학생들이 듣도 보도 못한, 감히 기성 기독교에 도전하는 새로운 성경 교리에 ‘현혹’된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사실이 캐나다 재단 쪽에 알려지면 누가 봐도 문제가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학교 측이 일부 교수들을 통일교와 학생 측에 보내 ‘통일교가 사교(邪敎)라는 사실을 계몽하고 학생들이 거기에서 발을 뺄 것을 종용’하게 했다. 그런데 그런 ‘임무’를 띠고 파견된 교수들이 통일교와 접촉하면서 자신들도 문선생의 성경해석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에 놀란 학교 측에서 통일교에 경도(傾倒)된 학생 14명을 퇴학 처분하는 일이 벌어졌다. 1955년 5월14일이었다. 언론이 이 문제를 일제히 거론하고 나서면서 통일교 사태는 곧 사회문제가 됐다. 당시 기사와 사설들을 모아 보면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는 나라’라는 전제 아래 ‘이화여대 측의 퇴학처분은 문제가 있다’는 논조 일색이었다.
당시 김활란이 이화여대 총장이었고, 이기붕 국회의장의 부인 박마리아가 부총장이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물론, 기성 기독교계에서도 통일교를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어디에서 어떤 고발이 들어갔는지, 7월4일 문선생이 경찰에 전격 연행됐다. 당시 경찰(치안국 특수정보과)이 그에게 적용한 혐의는 여교수와 여학생 등 다수의 여인을 농락했으며 온갖 문란한 행위로 사회기강을 어지럽혔다, 북한에서 넘어온 간첩 혐의가 있다는 것 등이었다.
문선생과 제자 4명은 미결수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채 이후 3개월간 검찰조사를 받고 법정에 섰다. 그로부터 석달만인 10월4일 서울지방법원은 문선생은 무죄라고 판결하고 석방했다. 다른 사람들은 처벌됐다. 그러나 그들에게 적용된 죄목도 기소 내용인 풍기문란 혐의가 아닌, 통일교와 무관한 병역기피 등 모두 병역법 위반이었다. 결과는 무죄였고, 기간도 석달 뿐이었다. 그러나 문선생의 연행을 전후한 시기부터 그가 재판받고 석방되기까지 통일교는 기성 기독교계의 집중공격을 받아 소위 ‘음란하기 짝이 없는 사이비 종교’라는 이미지를 덮어쓰게 된다.
10. 통일교의 가정관 - 가정은 평화의 근원
1980년대에는 기성 기독교계와 신흥종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종교연구가 T씨가 ‘연합’으로 통일교를 공격했다. 그들이 문제시한 것은 ‘피가름의 논리’였다. ‘해와의 몸속에 뱀(사탄)의 피가 흘러들었으며, 교주 문씨와 성교하면 그러한 사탄의 피를 씻어낼 수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급기야 T씨의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정기간행물에 모 교회 목사의 기명 기사로 그와 같은 내용의 글이 실렸다.
창설 이래 기독교측의 어떤 공격에 대해 단 한 차례도 반격한 적이 없던 통일교 측도 이때는 너무 피해를 보게 된다는 판단 아래 이 글을 가지고 법정 소송에 들어갔다. 결과는 공격한 측에서 근거없는 낭설을 퍼뜨린 것으로 판결났다. 통일교측의 주장은 선명했다. “태초에 인간의 몸속에 사탄의 부정한 피가 흘러들어갔다는 교리는 맞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상에서 가정을 지키며 성실하게 생활하면 깨끗하게 사함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임을 밝히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통일교가 본 피해는 실로 컸다. 초창기 때 이화여대 사건으로 덧씌워진 이미지에 이 ‘피가름’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또 이를 기화로 기독교계의 집중적인 공격이 이어지면서 통일교는 ‘사악하고 음란한 종교’라는 인식이 대중에게 오히려 더 각인되고 말았다. 그러나 통일교 측은 가해자 측의 ‘사과’만 받았을 뿐 아무런 손해배상도 요구하지 않고 사건을 끝냈다.
이 두 사건은 통일교의 교리가 무엇인지, 기성 기독교와 무엇이 다른지를 사회적으로 공식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 기독교가 왜 그렇게 통일교를 적대시하고 공격하는가를 보여 준 계기이기도 했다. 통일교가 어떤 종교인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지 위에서 ‘겉핥기’한 내용을 감안하면서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이런 교리를 가진 통일교가, 또 그런 교리로 인해 기성 기독교의 엄청난 반발과 수난을 당해야 했던 통일교가 어떻게 60여년 만에 지금처럼 성장했을까. 그 힘은 과연 무엇일까.
비신도의 눈으로 분석하면 몇 가지 외연(外延)이 우선 눈에 띈다. 지금은 조금 사정이 다르지만 ‘교주’가 생존해 있으면서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이 이 교단이 안정을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돈과 사람, 신앙의 응집력이 발휘됐다. 더욱이 돈과 사람의 규모가, 경제로 치면 말 그대로 ‘규모의 경제’를 이루었다. 세계화가 이뤄지면서 신도와 조직이 방대해지고 기업의 이윤과 헌금도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힘’이다. 여기에다 종교 활동뿐만 아니라 다수의 기업 활동을 병행하면서 탄탄한 ‘제국의 구조’를 이루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통일교를 승승장구, 급성장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
종교계 안팎에서 통일교를 아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4가지 통일교의 특징을 꼽을 수 있다. 첫째, 가정을 강조한다는 점이 특별하다. 세계 종교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구원, 거기서 더 나아가 세상의 구원이다. 교리 가운데 가족의 화목이나 질서를 규정한 종교들은 있지만 종교 자체가 가정을 뿌리로, 기본 단위로 설정한 예는 없다. 통일교는 당초 기독교 교파를 넘어 종교화합을 이룬다는 의미로 ‘통일신령협회’라고 했지만, 나중에는 ‘가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 아예 교단의 명칭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바꾸었다.
▲ 1995년 잠실 올림픽경기장에서 치러진 36만쌍 국제합동축복결혼식
통일교 교리에 따르면 가정은 모든 개인에게 평화와 안정의 시작이며 끝이다. 혼자 구원받고 가족은 구원받지 못하면 어떻게 진정으로 기쁠 수 있겠는가라는 믿음에서 가족에 대한 전도의 당위성도 나온다. 그것이 친지, 이웃, 사회, 국가, 세계로 확대돼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도들은 모두 가정에 충실할 것을 요구받는다. 남편은 아내 앞에서, 아내는 남편 앞에서 정절과 순결을 지켜야 한다. ‘외도’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같은 교리에 근거해서 통일교 국제합동축복결혼식이 나온 것이다. 합동결혼식은 한마디로 순결한 한 남자와 순결한 한 여자가 ‘축복’을 받고 ‘성혼’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해와가 이루지 못했던, 받지 못했던 ‘축복’을 받는 성스러운 행위이다. 지상에서의 ‘축복자’는 바로 문선생 내외다. 그래서 문선생 부부의 주례로 부부가 되는 이들은 다같이 ‘축복’을 받는 의식을 치른다. 맨 처음 3쌍에서 시작한 이 ‘축복’ 의식은 무려 4억쌍이 동시에 이뤄졌다. 위성방송과 인터넷을 통해서다.
해마다 몇 쌍이 합동결혼식을 올리는가 하는 것도 일정한 교리에 따라 정해진다. 그렇게 ‘축복’받은 신랑 신부는 서로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가정을 꾸리고 가꿔 나갈 의무를 지게 된다. 개인의 차원에서 가정의 차원으로, 구원과 평화와 행복의 단위를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통일교는 대중에게 한 걸음 다가서는 종교로 인식됐다.
통일교의 또다른 힘은 개방성에서 나온다. 기독교의 다른 교파는 물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개방된 태도를 견지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종교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같은 태도가 가능하다. ‘내가 통일교를 통해 평화를 얻으려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신의 종교를 통해 평화를 추구한다’는 입장이다. 자신의 종교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도그마요, 독선이라고 본다. 종교를 통해 스스로를 닦고 평화를 얻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더욱 큰 평화, 세계평화, 지상천국을 이뤄야 한다는 종지(宗旨: 한 종교 및 종파의 핵심적인 교의)이다.
그래서 설사 다른 종교가 통일교를 때리고 공격해도 통일교는 묵묵부답이다. 그것은 문선생의 뜻이기도 하다. 더욱 문선생의 이러한 뜻 때문에 외부에 대해 다툼은 물론 소송도 못낸다. 사실 앞서 기독교계와의 소송도 통일교 재단에서 제기한 것이 아니라 신도 가운데 한 사람이 제기한 것이다. 말하자면 마주 때리는 것이 아니라 맞으면서도 끌어안는다. 부드러운 것은 부러지지 않는다. 생명력을 갖는다.
11. “세계 평화의 근본은 가정의 행복”
동양적 시각과 종교관으로 성경을 해석함과 동시에 통일교는 동양적인 가치관을 강력히 주장했다. 양창식 전 통일교 미국총회장은 통일교의 동양적 가치관은 미국사회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정신적 공허 속에서 혼란을 겪을 때 통일교에서 가르치는 순결과 가정의 가치는 엄청난 반응을 불러왔다. 성적인 문란, 이혼과 가족의 붕괴에 대한 확실한 메시지를 준 것이 문 선생의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구약성경은 아담과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인간 타락의 시초로 설명한다. 통일교는 이것을 인간의 성적타락으로 해석한다. 통일교가 벌이는 순결운동은 이런 교리를 바탕으로 한다. 인간의 원죄가 불륜과 음란으로 인한 성적 타락에서 비롯했다는 통일교의 타락론은 기성 기독교의 강력한 비난을 받는다. 게다가 통일교 비판자들은 이것을 피가름 논쟁의 근거로 삼으며 원색적으로 비방하는 단초가 됐다. 고(故) 김봉태 선문대학교 총장은 성경 해석의 논쟁에 대해 이러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성경의 내용은 현대에 와서 과학과 이성적 판단으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졌다. 기성 기독교에서는 문구에 매달려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물음에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 총재는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아 성경의 원리를 해석했다. 창세기 당시로 돌아가고, 예수 시대로 돌아가 직접 보고 해석한 내용이 원리강론”이라고 밝혔다.
인간 타락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섭리로 복귀하는 근본이 되며 통일교의 타락론은 그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의 영역이다.시대가 변하면서 옛것만으로는 오늘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 새로운 종교가 나타나는 것은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문제와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를 뿌리로 기독교의 가지가 뻗어났고 그 배경으로 이슬람교가 나타났다. 팔레스타인의 사막으로부터 이 땅에까지 그 씨앗이 날아와 통일교가 태어났다. 통일교는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해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있다. 종교를 이해하려면 백 마디의 교리를 듣는 것보다, 그 종교를 믿는 한 사람의 행동을 보는 것이 더 쉽고 빠른 경우도 있다. 통일교를 알기 위해선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
12. “지상에서 먼저 평화를 이루어라”
통일교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와 부인 한학자 총재. 통일교 신도들은 이들을 ‘참부모’라고 부른다. 이와 함께 통일교의 큰 힘은 실천하는 종교라는 데서 나온다. 신도에게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열심히 믿고 하는 것만큼 생활 속에서 하늘의 말씀과 가르침을 실천할 것을 주문한다. 금주, 금연, 금욕 등 절제는 물론 사회 각 영역에서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교리는 강조한다.
신도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이웃에 봉사를 다 하고, 쌓아놓기보다 나눠 줄 것을 요구받는다. 교회를 키우고 신도를 늘리고 하는 일보다 자신의 삶을 통해 주변 사람에게 저절로 ‘빛과 소금’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선교가 이뤄지고 전도가 이뤄질 때, 그렇게 해서 새로운 신도가 늘어날 때 통일교는 그것을 진성(眞性) 교인이라고 부른다. 억지로 끌어다 앉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는 논리다.
끝으로 저 멀리 있는 구원을 바라기 전에 먼저 지상에서, 자기 생활에서, 가정에서 평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대단히 현실적이다. 구원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때가 되어 구원이 찾아올 수 있도록 지금 자신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먼저 평화를 추구하고 실현하라, 말하자면 그것이 신앙의 1차 목표다.
▲ 문선명·한학자 총재 부부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열린 태도를 견지하며, 성실한 삶에 힘쓰면서, 주변의 가장 작은 단위부터 평화를 이뤄 나가라….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너에게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작용한다’는 것이 곧 통일교 교리의 요체이다. 하나님이 정한 구원의 섭리, 구원의 프로그램에 따라 인간이 일정한 노력을 기울이면 구원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든 것 아닐까.
개인 차원을 넘어 통일교 재단 역시 ‘하늘이 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많은 일들을 ‘실천’해 왔다고 통일교측은 설명한다. 1960년대 개발 연대에 통일교 젊은이들은 우리나라 농촌 각지를 돌며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70년대에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유물론을 내세우는 공산주의에 맞서 승공(勝共)운동에 전력투구했다.
지금 기성세대라면 아마 당시 통일교 산하 국제승공연합이 주최하는 동네별 강연회에 한두 번쯤 참석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1980년대부터는 냉전구도를 타파하고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대북(對北)활동에 매진했다. 공산주의는 반대하지만 평화를 위해 기꺼이 대북사업에 앞장섰다는 얘기이다.
1990년대는 통일교가 본격적으로 ‘가정’을 푯대로 들고 나선 시기이다. 이때부터 모든 활동의 시작과 목표를 가정의 행복, 가정의 평화, 가정의 화목에 두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지금 통일교는 세계평화 쪽으로 활동의 중심을 잡고 있다. 공산주의를 넘어 이웃과 국가를 받들고 가정을 기본단위로 한 세계의 영구적 평화운동에 매진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통일교다. 개인으로 치면 성실한 삶이고 교리의 ‘실천’인 셈이다. 바로 그러한 궤적이 사회와 국가, 세계에 속된 말로 먹혀 든 것이 아닐까.
통일교가 ‘본업’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활동, 선교활동 외에 수많은 활동을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복지, 문화예술, 교육, 언론, 국제학술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 활동을 펴나가는 것도 궁극적으로 인간세계를 위한 ‘실천’이라는 것이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기 전 모든 것을 지어 놓으셨다. 왜 그랬는가. 인간의 행복, 인간의 평화를 위해서다. 통일교가 행하는 모든 활동도 바로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일을 해서 궁극적으로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환경, 인간이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통일교에서 경영하는 기업들이 수익을 많이 내서 누가 부자가 되고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것이 어떤 활동이 됐든 결국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인간의 평화와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과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통일교측은 “문선생이 통일교를 창시한 지 60여년밖에 안 됐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에게 신앙을 전했고 또 실질적으로 인간세계에 도움이 되는 수많은 일들을 이루지 않았느냐”면서 “그것이 바로 지상에서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원리강론≫은 영적교류 통해 얻은 계시엮어…신·구약에 견줘 成約으로
통일교에서는 문선명 선생 내외를 참부모로 섬긴다. 문선생을 이어 한국회장과 세계회장을 맡았던 문형진씨는 취임사에서 자신을 목회자로 표현했다. “아버님은 북한에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도할 때도 목사로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모든 섭리적인 내용을 행하실 때도 목사로서 행하셨습니다. 지금도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우리를 성장시켜주시는 것도 목사로서 그렇게 하시고 있습니다. 참부모님이시지만 목사로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문선생뿐 아니라 자신도 종교적으로 목사의 신분이라는 것이다. 통일교가 기독교를 배경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1. 가정연합의 경전 ≪원리강론≫
통일교는 성경 외에 독자적인 경전을 가지고 있다. 문선명(文鮮明) 선생이 성경을 해석한 내용과 하나님과 직접 영적 교류를 통해 얻은 계시를 엮어 ≪원리강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통일교에서 원리강론은 신·구약에 견주어 성약(成約)으로 부른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신·구약이 미완성이라면 성약에 해당하는 원리강론은 완전한 구원을 약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원리강론이 성약이라는 주장은 통일교의 역사관에서 비롯됐다. 아담의 창조로 시작된 인류는 아브라함까지의 역사가 후대를 준비하는 기반이 된 시대라고 설명한다. 그 이후 예수님까지의 시기를 인간의 지성과 심성이 막 자라나기 시작한 구약의 시대로 보고 있다. 예수님 이후의 때를 인류 역사가 장성해간 신약의 시대라고 한다. 즉 인류가 자라온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가 지금까지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대로 인류가 완성을 향해 나가는 성약시대라는 것이 통일교측의 주장이다. 이들은 인간의 타락 이후 실패해온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그것이 천일국(天一國)시대이다. 통일교 측에서 볼 때 2018년은 천일국 6년째 되는 해이다. 통일교가 기성 기독교계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는 출발점은 성경에 대한 상이(相異)한 이해와 해석에 있다. 어떤 종교든 경전은 절대적이고 신성하다고 믿는다. 진리를 담고 있으며 현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 경전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계는 통일교의 성경 이해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원리강론과 같은 해석의 바탕에는 성경과 계시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기존의 신앙과 어긋나는 것일까. 기성 교회의 입장에서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예수님의 구원이 실패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상징으로 여기는 십자가 역시 실패의 상징이라고 본다. 통일교에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타락한 인간을 완전히 구원하려한 하나님의 뜻으로 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지상천국을 먼저 완성해야 했다고 설명한다. 결국 그 실패를 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통일교 신도들은 문선명 선생을 이 땅에 온 구원자, 즉 재림주인 메시아이며 참부모로 섬긴다. 원리강론은 이 부분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이 땅 위에 인생과 우주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한 분을 보내셨으니, 그 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이시다.” 라고 기술해 놓았다.
2. 문선생 부부를 메시아요 참부모로 섬겨
원리강론은 이어서 문 선생이 세상을 주관하는 섭리를 계시 받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선생은 혈혈단신으로 영계(靈界)와 육계(肉界)의 억만 사탄과 싸워 승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비롯한 낙원의 수많은 성현들과 자유로이 접촉하시며, 은밀히 하나님과 영교(靈交)하는 가운데서 모든 천륜의 비밀을 밝혀내신 것이다.” 현실세계뿐 아니라 영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하나님과 영적인 교류를 꾸준히 해오며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영계의 존재를 강력히 시사하고 영적인 대상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 통일교의 세계관은 다분히 한국적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인간세계와 교통하는 영적 존재는 기존 기독교의 설명과는 다르다. 오히려 접신과 강력한 신비를 주장하는 동양의 신비적 종교와 닮아 있다. 통일교 교리에는 이같은 동양의 색깔이 많이 드러난다.
특히 음양(陰陽) 철학을 바탕으로 한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설명은 전통적인 동양의 세계관이다. 원리강론의 내용은 이렇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사이에서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통일교는 이성성상이 존재를 형성하는 근본 원리임을 주장한다. 통일교는 이 두 가지 상반돼 보이는 것이 대립을 끝내고 통일되어야 하나님의 섭리가 완성된 행복한 세상이 온다고 본다. 그것이 외형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 있고 직접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남자와 여자가 만나 이루는 가정이니, 가정의 행복은 결국 세계평화를 이루는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남과 북, 한국과 일본의 적대적인 관계도 그런 점에서 반드시 해결하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종교학회 김탁 박사는 통일교에 한국적인 종교의 특징이 분명히 내재한다고 설명한다. “강증산의 가르침은 이후의 모든 종교에 영향을 미쳤다. 역사의 전개를 원한을 풀어나가는 해원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점과 창종자 자신이 우주 최고주 자재이거나 그 대리자임을 자각하는 점이 그렇다. 통일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 천일국도 결국 후천개벽의 사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상생(相生)이나 해원(解寃) 등의 가르침은 통일교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통일교는 인간의 타락으로 창조주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예수님의 구원이 완성되지 못했으므로 해원시켜주는 것이 통일교인의 사명이라고 한다. 지상천국을 이루는 것으로 예수님의 해원이 되며 그것이 복귀섭리를 통한 해원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문윤홍·시사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
통일교는 기독교인가…기독교와 통일교의 교리 차이는?
기독교와 다른 성경해석으로 충돌하기도…타락에 대한 해석, 구원관 달라
기사입력: 2018/04/02 [19:23]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통일교)은 한국에서 탄생한 신(新)종교이다. 그렇다고 전통 민족종교라고는 할 수 없다. 불과 창립 50년 만에 전세계 195개국에 교회와 선교본부를 두고 있는 글로벌 종교로 성장한지 오래이다.
그런데 통일교는 기독교와 유사하다. 아니 통일교의 뿌리는 기독교다. 기독교 성경을 기본 경전으로 삼고 있으며 기독교의 신(神)인 하나님을 신앙하고 있다. 창립 초기에는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가 공식 명칭이었다. 오늘날 일반에 널리 알려진 통일교는 이 명칭을 줄여서 불리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 통일교에서 성경과 함께 경전으로 사용하는 ≪원리강론≫은 성경을 논리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다시 말해 통일교는 성경을 재해석한 새로운 원리에 바탕을 둔 신앙체계라 할 수 있다. 통일교에선 성경은 교과서이고 원리강론은 참고서라고 본다. 그러면 기독교와 통일교는 어떤 교리의 차이가 있는지 자세히 살펴본다.
기독교와 통일교의 교리 차이
1. 신앙의 대상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고 똑같은 성경을 믿는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같다. 경전인 성경도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구약 그대로이다.
2. 타락에 대한 해석이 기독교와 전혀 다르다.
통일교는 해와가 뱀(사탄)의 유혹을 받은 것을 ‘공주와 같은 해와’를 ‘종의 입장인 누시엘(천사장)’이 사랑의 유혹을 했다고 보고 있다. 성적인 유혹이라고 하면 틀린다. 성적 유혹은 제비나 창녀의 육체적 유혹인 반면, 사랑의 유혹은 순수한 사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와에게는 이미 배필이 있었다. 바로 아담이다. 아무튼 해와는 계속 대접을 잘해주면서 구애하는 누시엘(사탄이 됨)을 뿌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걸 미리 아신 하나님이 누시엘의 사랑 공세에 굴복하지 않도록 사랑을 이겨낼 수 있는 지침을 주었으니 그게 바로 “따먹지 말라"는 계명이라고 본다.
즉 잘못된 사랑의 관계로 곧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젠 타락으로 해와의 몸 속에는 누시엘의 원리를 벗어난 불륜한 사랑이라는 악의 피가 스며들었다. 타락으로 원죄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 죄는 계속 유전돼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분노했다.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성혼(成婚)도 못한 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이면서 부모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을 그냥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인간을 다시 구원해 주기로 했다.
3.구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성 기독교와 조금 다르다. 통일교는 일단 하늘나라가 지상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내세를 궁극적 세계라고 보면서도 지상에서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내세에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교는 기독교와는 달리 지상에다 먼저 에덴을 건설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지상에서 에덴을 이루어 살지 못한 사람은 천상에서도 에덴, 곧 천국에서 살 자격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4. 누가 그런 구원을 받는가
인류가 지은 원죄(原罪)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모두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가 곧 사탄의 피를 씻어내고 순수한 하나님의 본래 혈통으로 복귀한 인간이다. 통일교에서 행하는 축복(결혼)의식이 바로 혈통을 중생(重生)케 하는 의식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나 축복의식 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바탕 위에 ‘지상(地上)에서 천국생활을 한 사람’만이 구원받는다. 메시아를 믿고 축복을 받아 천국인답게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지상을 하나님이 애초에 원했던 에덴으로 바꿔야만 한다.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지상에서의 천국생활은 또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원죄를 청산하고 순결한 참가정을 이루어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 형제자매의 사랑 등 4대 사랑을 체휼하고 완성한 인격체가 되어 자신과 가정, 이웃과 사회를 위해 더불어 위하는 삶을 실천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상태를 뜻한다. 이 지상에서 그렇게 평화로운 상태를 누리며 살아본 사람만이 천상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이 곧 구원이다.
그런데 언젠가 천국이 지상에도 도래하고 모든 인류가 구원이 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참사랑을 실천하는 평화 상태를 이룰 때 지상천국이 건설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다시찾은 에덴동산’이다. 세계가 그렇게 에덴동산의 상태가 될 때, 하나님의 인간 구원섭리는 완결된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가 올 때까지 모든 인간은 종교와 교파를 초월해 노력해야 한다.
5. 구원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구원의 방법)
구원 받을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오직 한 가지 혈통을 바꿔줄 즉, 중생(重生)해줄 메시아가 이 땅에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메시아가 와서 구원섭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환경(보호막)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런 메시아의 울타리요 보호막이 곧 유대교와 유대민족이다. 그렇지 않다면 메시아가 구원도 하기 전에 사탄에 의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메시아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무리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순종의 상징으로 어린양, 암소, 비둘기 등을 제사하게 하면서 그런 동물처럼 살길 바라셨다.
성경 구약으로 들아 가서 보자. 구약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에게 알리기 위해 하나님은 수많은 선지자를 보냈던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곧 하나님의 섭리를 완성할 중심인물이다. 그들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믿고,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믿음의 생활을 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구원하기로 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역시 그러한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 어린양과 같은 제물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오히려 메시아를 대마왕으로 오인(誤認)하여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지상에 천국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의 대속으로 영적 구원의 기대만을 완성하게 되었다. 전에는 불신하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어린양의 입장을 완성해 순종·굴복하여 중생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영적 구원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영육 아우른 완벽한 구원으로 알고 있지만, 성경은 예수님 부활 후에도 육신은 여전히 사탄의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교의 가르침도 일정한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6. 하나님은 다시 중심인물(재림주)을 보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중심인물을 보내셨다. 그 중심인물이 바로 문선명 선생이다. 문선생의 말을 따라 하나님을 믿고 결혼 축복을 받고, 생활 속에서 순결을 유지하고, 가정을 중시하면서 선한 실천을 계속하면 구원, 곧 진정하고 영원한 평화를 얻게 된다. 하나님은 문선생과 한학자 총재를 통해 지금 구원섭리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본 사람들, 또는 기독교에 대해 조금 아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대목들이 속속 등장한다. 다른 그 무엇보다 당장 문선생이 ‘하나님 섭리의 중심인물’로 자처한다는 점부터 기성 기독교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7. 문선생은 하나님인가 아닌가
실제로 통일교인들은 문선생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또 문선생과 함께 부인을 ‘참부모’라고 한다. 그리고 통일교의 축복가정 모두 참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만인 메시아론 주장) 말하자면, 그들도 믿고 따라야 할 신앙의 대상이 돼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문선생 자신이 궁극적인 ‘하나님’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통일교의 문선생이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은 원리강론에서 삼위일체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통일교측에 따르면 “문선생 자신도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선생도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고’ 있는 ‘중간 존재’라는 것이다. 다만 인간에게 하늘의 말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려고 한다는 하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인간 세계에 내려온 존재라는 설명이다. 인간보다 한 단계 더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존재, 예수님처럼 이 세계에 구원 섭리를 전하고 실천하러 강림한 존재라고 일컫는다.
8. 믿음과 실천 모두 구원의 요건으로 본다
통일교는 기독교와 달리 개인 구원보다 세계의 영구 평화운동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기성 기독교에서는 2,000년전 이스라엘 나사렛의 말구유에서 태어나 하늘의 말씀을 전하다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붙잡혀 유대인들의 주장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그 예수님만 인정한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보혈(寶血)을 흘리고 죽어갔다는 사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해 하늘에 올랐다는 사실만 받아들인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 대속(代贖)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1920년 평안북도 정주 땅에서 태어난 문선생은 ‘내가 곧 예수님의 뒤를 이어 인간 세상에 내려온 하나님 섭리의 중심인물’이라고 하니, 판이하다. 통일교에서는 먼저 ‘지상에서 참사랑을 실천하는 완전하게 평화로운 삶’을 누려야 천국에 가서도 평화와 영생을 누릴 수 있으며,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해석한다.
지상에서의 평화로운 삶이란 ‘하늘 말씀에 따라 참사랑을 통한 참가정을 이루고 이를 소중히 여기고 선한 생활을 하며 이웃을 위해 살아가는 실천적인 삶’을 의미한다. 또 인간들이 모두 그런 마음으로 노력해 지구상에 완전한 평화를 이루게 되면, 그날이 바로 지상에 본연의 ‘에덴동산’이 실현되는 날이며, 그렇게 해서 영원한 지상천국이 시작된다고 갈파한다.
그러나 기성 기독교에서는 육신이 죽은 뒤 이승을 떠나 ‘천국에서의 영생’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고 본다. 나아가 신·구약 성경 66권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쓰인 것처럼 ‘세상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내리는 불의 심판을 받지 않고 이미 천국에 들어간 이들과 함께 ‘영생의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것을 구원으로 본다.
구원에 이르는 길도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믿음’이 관건이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 구원의 섭리,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내려오고 세상을 구원하려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사흘 만에 부활했고, 그가 다시 세상에 올 때 심판의 날이 올 것이며… 하는 사실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곧 믿음이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인 셈이다.
반면 통일교에서는 믿음만으로는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믿음은 구원받기 위한 필요조건이며 여기에 ‘지상에서의 실천’이라는 충분조건을 갖춰야 구원받는다고 본다. 어떤 실천인가. 앞서 본 것처럼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에 봉사하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실천, 두 가지가 병행될 때 인간에게는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며 그렇게 평화를 누려본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9. 통일교의 종교관과 수난사
여기서 나아가 통일교는 ‘종교는 수단일 뿐,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종교는 개인이 궁극적으로 몸과 영혼의 평화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것이지, 종교가 인간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그런 점에서 학교이다. 학교에서 정해진 공부를 마치고 몸에 실력이 다 붙으면 졸업한다. 완전한 평화를 이룬 사람에게 무슨 종교가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고 에덴동산에 인간을 지었을 때, 거기에 무슨 종교가 있었는가. 참평화만이 있었다.
신앙생활은 개인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평화를 찾아가는 과정이요, 수련과정이다. 그것이 반드시 통일교일 이유는 없다. 어느 종교든 그 종교에서 가르치는 선한 생각과 선한 삶을 몸에 익혀 평화를 얻은 사람은 그 종교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런 모든 이가 모여 평화의 세상을 만들 때, 그것이 곧 지상천국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와 교파는 서로 배척할 필요가 없다. 모두 어울려 평화를 이루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 의미가 있다.
이런 교리에 따라 통일교는 전도와 교회개척에 별다른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계열 기업이나 단체에 몸담고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도 ‘통일교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쪽으로 힘을 쏟기보다 그 시간과 노력을 아껴 오히려 성실한 생활에 매진함으로써 주변에 통일교 신앙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활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으로 전도를 대신한다는 것이다.
통일교의 한 관계자는 “그래서인지 계열 기업이나 계열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통일교 신도가 아닌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 가운데 통일교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고 덧붙인다. 나아가 자신을 배척하는 기성 기독교든 불교든 천주교든 이슬람교든, 통일교는 모두 끌어안고 화합한다는 것도 특징으로 내세운다. 무슨 기독교 교파니, 종단이니 하는 명칭 대신 공식명칭을 ‘연합’(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라고 한 것도 거기서 연유한다. ‘교파를 초월해 다 같이 평화를 향해 나아가자’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미 신앙의 의미, 구원의 의미, 구원의 방법에서 차이가 나는 만큼 기성교회는 통일교를 기독교로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와의 갈등으로 통일교는 지난 60여년 역정에서 국내에서만 두 차례에 걸쳐 큰 수난을 겪었다.
하나는 1955년에 발생한 이른바 ‘이화여대 사건’으로 문총재가 구속까지 됐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1980년대의 이른바 ‘피가름’ 논쟁이었다. 결국 이 두 사건은 모두 통일교가 근거 없이 ‘훼손’당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통일교는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때의 이미지로 통일교를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먼저 이화여대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자. 청년 문선생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현판을 처음 내건 곳은 서울 성동구 북학동의 한 판잣집이었다. 그때가 1954년 5월이고 집주인은 양윤영씨로, 이화여대 음악과 시간강사였다. 그는 앞서 문선생에게 감화된 대학생 유효원씨와 지인 사이로, 유씨를 통해 문선생의 새로운 성경 해석을 받아들인 터였다. 양씨가 집을 장충단공원 부근 약수동 야산 기슭으로 옮긴 이후 문선생이 현판을 내건 판잣집교회는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북적거리게 된다. 이화여대에 몸담고 있던 양 교수를 통해 학생들이 문선생의 교리를 접한 이후다. 문선생의 교리를 들으려는 이들이 불어나더니 손바닥 만한 판잣집교회 안팎으로 300여명이 몰렸다. 그런 가운데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1955년 7월 경찰이 문선생과 유효원 씨 등 그의 초기 제자 4명을 전격 체포한 것이었다. 사연인즉, 이화여대생들이 문선생의 교리를 듣기 위해 몰리자 학교 측에서 조바심이 났다. 당시 이화여대는 캐나다의 기독교재단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운영하던 터였다. 그런데 학생들이 듣도 보도 못한, 감히 기성 기독교에 도전하는 새로운 성경 교리에 ‘현혹’된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사실이 캐나다 재단 쪽에 알려지면 누가 봐도 문제가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학교 측이 일부 교수들을 통일교와 학생 측에 보내 ‘통일교가 사교(邪敎)라는 사실을 계몽하고 학생들이 거기에서 발을 뺄 것을 종용’하게 했다. 그런데 그런 ‘임무’를 띠고 파견된 교수들이 통일교와 접촉하면서 자신들도 문선생의 성경해석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에 놀란 학교 측에서 통일교에 경도(傾倒)된 학생 14명을 퇴학 처분하는 일이 벌어졌다. 1955년 5월14일이었다. 언론이 이 문제를 일제히 거론하고 나서면서 통일교 사태는 곧 사회문제가 됐다. 당시 기사와 사설들을 모아 보면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는 나라’라는 전제 아래 ‘이화여대 측의 퇴학처분은 문제가 있다’는 논조 일색이었다.
당시 김활란이 이화여대 총장이었고, 이기붕 국회의장의 부인 박마리아가 부총장이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물론, 기성 기독교계에서도 통일교를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어디에서 어떤 고발이 들어갔는지, 7월4일 문선생이 경찰에 전격 연행됐다. 당시 경찰(치안국 특수정보과)이 그에게 적용한 혐의는 여교수와 여학생 등 다수의 여인을 농락했으며 온갖 문란한 행위로 사회기강을 어지럽혔다, 북한에서 넘어온 간첩 혐의가 있다는 것 등이었다.
문선생과 제자 4명은 미결수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채 이후 3개월간 검찰조사를 받고 법정에 섰다. 그로부터 석달만인 10월4일 서울지방법원은 문선생은 무죄라고 판결하고 석방했다. 다른 사람들은 처벌됐다. 그러나 그들에게 적용된 죄목도 기소 내용인 풍기문란 혐의가 아닌, 통일교와 무관한 병역기피 등 모두 병역법 위반이었다. 결과는 무죄였고, 기간도 석달 뿐이었다. 그러나 문선생의 연행을 전후한 시기부터 그가 재판받고 석방되기까지 통일교는 기성 기독교계의 집중공격을 받아 소위 ‘음란하기 짝이 없는 사이비 종교’라는 이미지를 덮어쓰게 된다.
10. 통일교의 가정관 - 가정은 평화의 근원
1980년대에는 기성 기독교계와 신흥종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종교연구가 T씨가 ‘연합’으로 통일교를 공격했다. 그들이 문제시한 것은 ‘피가름의 논리’였다. ‘해와의 몸속에 뱀(사탄)의 피가 흘러들었으며, 교주 문씨와 성교하면 그러한 사탄의 피를 씻어낼 수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급기야 T씨의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정기간행물에 모 교회 목사의 기명 기사로 그와 같은 내용의 글이 실렸다.
창설 이래 기독교측의 어떤 공격에 대해 단 한 차례도 반격한 적이 없던 통일교 측도 이때는 너무 피해를 보게 된다는 판단 아래 이 글을 가지고 법정 소송에 들어갔다. 결과는 공격한 측에서 근거없는 낭설을 퍼뜨린 것으로 판결났다. 통일교측의 주장은 선명했다. “태초에 인간의 몸속에 사탄의 부정한 피가 흘러들어갔다는 교리는 맞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상에서 가정을 지키며 성실하게 생활하면 깨끗하게 사함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임을 밝히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통일교가 본 피해는 실로 컸다. 초창기 때 이화여대 사건으로 덧씌워진 이미지에 이 ‘피가름’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또 이를 기화로 기독교계의 집중적인 공격이 이어지면서 통일교는 ‘사악하고 음란한 종교’라는 인식이 대중에게 오히려 더 각인되고 말았다. 그러나 통일교 측은 가해자 측의 ‘사과’만 받았을 뿐 아무런 손해배상도 요구하지 않고 사건을 끝냈다.
이 두 사건은 통일교의 교리가 무엇인지, 기성 기독교와 무엇이 다른지를 사회적으로 공식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 기독교가 왜 그렇게 통일교를 적대시하고 공격하는가를 보여 준 계기이기도 했다. 통일교가 어떤 종교인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지 위에서 ‘겉핥기’한 내용을 감안하면서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이런 교리를 가진 통일교가, 또 그런 교리로 인해 기성 기독교의 엄청난 반발과 수난을 당해야 했던 통일교가 어떻게 60여년 만에 지금처럼 성장했을까. 그 힘은 과연 무엇일까.
비신도의 눈으로 분석하면 몇 가지 외연(外延)이 우선 눈에 띈다. 지금은 조금 사정이 다르지만 ‘교주’가 생존해 있으면서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이 이 교단이 안정을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돈과 사람, 신앙의 응집력이 발휘됐다. 더욱이 돈과 사람의 규모가, 경제로 치면 말 그대로 ‘규모의 경제’를 이루었다. 세계화가 이뤄지면서 신도와 조직이 방대해지고 기업의 이윤과 헌금도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힘’이다. 여기에다 종교 활동뿐만 아니라 다수의 기업 활동을 병행하면서 탄탄한 ‘제국의 구조’를 이루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통일교를 승승장구, 급성장하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
종교계 안팎에서 통일교를 아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4가지 통일교의 특징을 꼽을 수 있다. 첫째, 가정을 강조한다는 점이 특별하다. 세계 종교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구원, 거기서 더 나아가 세상의 구원이다. 교리 가운데 가족의 화목이나 질서를 규정한 종교들은 있지만 종교 자체가 가정을 뿌리로, 기본 단위로 설정한 예는 없다. 통일교는 당초 기독교 교파를 넘어 종교화합을 이룬다는 의미로 ‘통일신령협회’라고 했지만, 나중에는 ‘가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 아예 교단의 명칭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바꾸었다.
▲ 1995년 잠실 올림픽경기장에서 치러진 36만쌍 국제합동축복결혼식
통일교 교리에 따르면 가정은 모든 개인에게 평화와 안정의 시작이며 끝이다. 혼자 구원받고 가족은 구원받지 못하면 어떻게 진정으로 기쁠 수 있겠는가라는 믿음에서 가족에 대한 전도의 당위성도 나온다. 그것이 친지, 이웃, 사회, 국가, 세계로 확대돼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도들은 모두 가정에 충실할 것을 요구받는다. 남편은 아내 앞에서, 아내는 남편 앞에서 정절과 순결을 지켜야 한다. ‘외도’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같은 교리에 근거해서 통일교 국제합동축복결혼식이 나온 것이다. 합동결혼식은 한마디로 순결한 한 남자와 순결한 한 여자가 ‘축복’을 받고 ‘성혼’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해와가 이루지 못했던, 받지 못했던 ‘축복’을 받는 성스러운 행위이다. 지상에서의 ‘축복자’는 바로 문선생 내외다. 그래서 문선생 부부의 주례로 부부가 되는 이들은 다같이 ‘축복’을 받는 의식을 치른다. 맨 처음 3쌍에서 시작한 이 ‘축복’ 의식은 무려 4억쌍이 동시에 이뤄졌다. 위성방송과 인터넷을 통해서다.
해마다 몇 쌍이 합동결혼식을 올리는가 하는 것도 일정한 교리에 따라 정해진다. 그렇게 ‘축복’받은 신랑 신부는 서로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가정을 꾸리고 가꿔 나갈 의무를 지게 된다. 개인의 차원에서 가정의 차원으로, 구원과 평화와 행복의 단위를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통일교는 대중에게 한 걸음 다가서는 종교로 인식됐다.
통일교의 또다른 힘은 개방성에서 나온다. 기독교의 다른 교파는 물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개방된 태도를 견지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종교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같은 태도가 가능하다. ‘내가 통일교를 통해 평화를 얻으려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신의 종교를 통해 평화를 추구한다’는 입장이다. 자신의 종교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도그마요, 독선이라고 본다. 종교를 통해 스스로를 닦고 평화를 얻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더욱 큰 평화, 세계평화, 지상천국을 이뤄야 한다는 종지(宗旨: 한 종교 및 종파의 핵심적인 교의)이다.
그래서 설사 다른 종교가 통일교를 때리고 공격해도 통일교는 묵묵부답이다. 그것은 문선생의 뜻이기도 하다. 더욱 문선생의 이러한 뜻 때문에 외부에 대해 다툼은 물론 소송도 못낸다. 사실 앞서 기독교계와의 소송도 통일교 재단에서 제기한 것이 아니라 신도 가운데 한 사람이 제기한 것이다. 말하자면 마주 때리는 것이 아니라 맞으면서도 끌어안는다. 부드러운 것은 부러지지 않는다. 생명력을 갖는다.
11. “세계 평화의 근본은 가정의 행복”
동양적 시각과 종교관으로 성경을 해석함과 동시에 통일교는 동양적인 가치관을 강력히 주장했다. 양창식 전 통일교 미국총회장은 통일교의 동양적 가치관은 미국사회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정신적 공허 속에서 혼란을 겪을 때 통일교에서 가르치는 순결과 가정의 가치는 엄청난 반응을 불러왔다. 성적인 문란, 이혼과 가족의 붕괴에 대한 확실한 메시지를 준 것이 문 선생의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구약성경은 아담과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인간 타락의 시초로 설명한다. 통일교는 이것을 인간의 성적타락으로 해석한다. 통일교가 벌이는 순결운동은 이런 교리를 바탕으로 한다. 인간의 원죄가 불륜과 음란으로 인한 성적 타락에서 비롯했다는 통일교의 타락론은 기성 기독교의 강력한 비난을 받는다. 게다가 통일교 비판자들은 이것을 피가름 논쟁의 근거로 삼으며 원색적으로 비방하는 단초가 됐다. 고(故) 김봉태 선문대학교 총장은 성경 해석의 논쟁에 대해 이러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성경의 내용은 현대에 와서 과학과 이성적 판단으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졌다. 기성 기독교에서는 문구에 매달려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물음에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 총재는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아 성경의 원리를 해석했다. 창세기 당시로 돌아가고, 예수 시대로 돌아가 직접 보고 해석한 내용이 원리강론”이라고 밝혔다.
인간 타락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섭리로 복귀하는 근본이 되며 통일교의 타락론은 그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의 영역이다.시대가 변하면서 옛것만으로는 오늘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 새로운 종교가 나타나는 것은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문제와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를 뿌리로 기독교의 가지가 뻗어났고 그 배경으로 이슬람교가 나타났다. 팔레스타인의 사막으로부터 이 땅에까지 그 씨앗이 날아와 통일교가 태어났다. 통일교는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해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있다. 종교를 이해하려면 백 마디의 교리를 듣는 것보다, 그 종교를 믿는 한 사람의 행동을 보는 것이 더 쉽고 빠른 경우도 있다. 통일교를 알기 위해선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
12. “지상에서 먼저 평화를 이루어라”
통일교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와 부인 한학자 총재. 통일교 신도들은 이들을 ‘참부모’라고 부른다. 이와 함께 통일교의 큰 힘은 실천하는 종교라는 데서 나온다. 신도에게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열심히 믿고 하는 것만큼 생활 속에서 하늘의 말씀과 가르침을 실천할 것을 주문한다. 금주, 금연, 금욕 등 절제는 물론 사회 각 영역에서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교리는 강조한다.
신도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이웃에 봉사를 다 하고, 쌓아놓기보다 나눠 줄 것을 요구받는다. 교회를 키우고 신도를 늘리고 하는 일보다 자신의 삶을 통해 주변 사람에게 저절로 ‘빛과 소금’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선교가 이뤄지고 전도가 이뤄질 때, 그렇게 해서 새로운 신도가 늘어날 때 통일교는 그것을 진성(眞性) 교인이라고 부른다. 억지로 끌어다 앉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는 논리다.
끝으로 저 멀리 있는 구원을 바라기 전에 먼저 지상에서, 자기 생활에서, 가정에서 평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대단히 현실적이다. 구원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때가 되어 구원이 찾아올 수 있도록 지금 자신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먼저 평화를 추구하고 실현하라, 말하자면 그것이 신앙의 1차 목표다.
▲ 문선명·한학자 총재 부부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열린 태도를 견지하며, 성실한 삶에 힘쓰면서, 주변의 가장 작은 단위부터 평화를 이뤄 나가라….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너에게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작용한다’는 것이 곧 통일교 교리의 요체이다. 하나님이 정한 구원의 섭리, 구원의 프로그램에 따라 인간이 일정한 노력을 기울이면 구원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든 것 아닐까.
개인 차원을 넘어 통일교 재단 역시 ‘하늘이 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많은 일들을 ‘실천’해 왔다고 통일교측은 설명한다. 1960년대 개발 연대에 통일교 젊은이들은 우리나라 농촌 각지를 돌며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70년대에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유물론을 내세우는 공산주의에 맞서 승공(勝共)운동에 전력투구했다.
지금 기성세대라면 아마 당시 통일교 산하 국제승공연합이 주최하는 동네별 강연회에 한두 번쯤 참석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1980년대부터는 냉전구도를 타파하고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대북(對北)활동에 매진했다. 공산주의는 반대하지만 평화를 위해 기꺼이 대북사업에 앞장섰다는 얘기이다.
1990년대는 통일교가 본격적으로 ‘가정’을 푯대로 들고 나선 시기이다. 이때부터 모든 활동의 시작과 목표를 가정의 행복, 가정의 평화, 가정의 화목에 두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지금 통일교는 세계평화 쪽으로 활동의 중심을 잡고 있다. 공산주의를 넘어 이웃과 국가를 받들고 가정을 기본단위로 한 세계의 영구적 평화운동에 매진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통일교다. 개인으로 치면 성실한 삶이고 교리의 ‘실천’인 셈이다. 바로 그러한 궤적이 사회와 국가, 세계에 속된 말로 먹혀 든 것이 아닐까.
통일교가 ‘본업’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활동, 선교활동 외에 수많은 활동을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복지, 문화예술, 교육, 언론, 국제학술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 활동을 펴나가는 것도 궁극적으로 인간세계를 위한 ‘실천’이라는 것이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기 전 모든 것을 지어 놓으셨다. 왜 그랬는가. 인간의 행복, 인간의 평화를 위해서다. 통일교가 행하는 모든 활동도 바로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일을 해서 궁극적으로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환경, 인간이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통일교에서 경영하는 기업들이 수익을 많이 내서 누가 부자가 되고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것이 어떤 활동이 됐든 결국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인간의 평화와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과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통일교측은 “문선생이 통일교를 창시한 지 60여년밖에 안 됐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에게 신앙을 전했고 또 실질적으로 인간세계에 도움이 되는 수많은 일들을 이루지 않았느냐”면서 “그것이 바로 지상에서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원리강론≫은 영적교류 통해 얻은 계시엮어…신·구약에 견줘 成約으로
통일교에서는 문선명 선생 내외를 참부모로 섬긴다. 문선생을 이어 한국회장과 세계회장을 맡았던 문형진씨는 취임사에서 자신을 목회자로 표현했다. “아버님은 북한에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도할 때도 목사로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모든 섭리적인 내용을 행하실 때도 목사로서 행하셨습니다. 지금도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우리를 성장시켜주시는 것도 목사로서 그렇게 하시고 있습니다. 참부모님이시지만 목사로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문선생뿐 아니라 자신도 종교적으로 목사의 신분이라는 것이다. 통일교가 기독교를 배경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1. 가정연합의 경전 ≪원리강론≫
통일교는 성경 외에 독자적인 경전을 가지고 있다. 문선명(文鮮明) 선생이 성경을 해석한 내용과 하나님과 직접 영적 교류를 통해 얻은 계시를 엮어 ≪원리강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통일교에서 원리강론은 신·구약에 견주어 성약(成約)으로 부른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신·구약이 미완성이라면 성약에 해당하는 원리강론은 완전한 구원을 약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원리강론이 성약이라는 주장은 통일교의 역사관에서 비롯됐다. 아담의 창조로 시작된 인류는 아브라함까지의 역사가 후대를 준비하는 기반이 된 시대라고 설명한다. 그 이후 예수님까지의 시기를 인간의 지성과 심성이 막 자라나기 시작한 구약의 시대로 보고 있다. 예수님 이후의 때를 인류 역사가 장성해간 신약의 시대라고 한다. 즉 인류가 자라온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가 지금까지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문선명 선생의 가르침대로 인류가 완성을 향해 나가는 성약시대라는 것이 통일교측의 주장이다. 이들은 인간의 타락 이후 실패해온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그것이 천일국(天一國)시대이다. 통일교 측에서 볼 때 2018년은 천일국 6년째 되는 해이다. 통일교가 기성 기독교계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는 출발점은 성경에 대한 상이(相異)한 이해와 해석에 있다. 어떤 종교든 경전은 절대적이고 신성하다고 믿는다. 진리를 담고 있으며 현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 경전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계는 통일교의 성경 이해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원리강론과 같은 해석의 바탕에는 성경과 계시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기존의 신앙과 어긋나는 것일까. 기성 교회의 입장에서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예수님의 구원이 실패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상징으로 여기는 십자가 역시 실패의 상징이라고 본다. 통일교에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타락한 인간을 완전히 구원하려한 하나님의 뜻으로 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지상천국을 먼저 완성해야 했다고 설명한다. 결국 그 실패를 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통일교 신도들은 문선명 선생을 이 땅에 온 구원자, 즉 재림주인 메시아이며 참부모로 섬긴다. 원리강론은 이 부분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이 땅 위에 인생과 우주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한 분을 보내셨으니, 그 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이시다.” 라고 기술해 놓았다.
2. 문선생 부부를 메시아요 참부모로 섬겨
원리강론은 이어서 문 선생이 세상을 주관하는 섭리를 계시 받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선생은 혈혈단신으로 영계(靈界)와 육계(肉界)의 억만 사탄과 싸워 승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비롯한 낙원의 수많은 성현들과 자유로이 접촉하시며, 은밀히 하나님과 영교(靈交)하는 가운데서 모든 천륜의 비밀을 밝혀내신 것이다.” 현실세계뿐 아니라 영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하나님과 영적인 교류를 꾸준히 해오며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영계의 존재를 강력히 시사하고 영적인 대상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 통일교의 세계관은 다분히 한국적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인간세계와 교통하는 영적 존재는 기존 기독교의 설명과는 다르다. 오히려 접신과 강력한 신비를 주장하는 동양의 신비적 종교와 닮아 있다. 통일교 교리에는 이같은 동양의 색깔이 많이 드러난다.
특히 음양(陰陽) 철학을 바탕으로 한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설명은 전통적인 동양의 세계관이다. 원리강론의 내용은 이렇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사이에서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통일교는 이성성상이 존재를 형성하는 근본 원리임을 주장한다. 통일교는 이 두 가지 상반돼 보이는 것이 대립을 끝내고 통일되어야 하나님의 섭리가 완성된 행복한 세상이 온다고 본다. 그것이 외형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 있고 직접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남자와 여자가 만나 이루는 가정이니, 가정의 행복은 결국 세계평화를 이루는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남과 북, 한국과 일본의 적대적인 관계도 그런 점에서 반드시 해결하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종교학회 김탁 박사는 통일교에 한국적인 종교의 특징이 분명히 내재한다고 설명한다. “강증산의 가르침은 이후의 모든 종교에 영향을 미쳤다. 역사의 전개를 원한을 풀어나가는 해원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점과 창종자 자신이 우주 최고주 자재이거나 그 대리자임을 자각하는 점이 그렇다. 통일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 천일국도 결국 후천개벽의 사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상생(相生)이나 해원(解寃) 등의 가르침은 통일교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통일교는 인간의 타락으로 창조주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예수님의 구원이 완성되지 못했으므로 해원시켜주는 것이 통일교인의 사명이라고 한다. 지상천국을 이루는 것으로 예수님의 해원이 되며 그것이 복귀섭리를 통한 해원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문윤홍·시사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