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권택의 ‘만다라’(1981)
1. 임권택의 ‘만다라’(1981)
기자명 문학산 교수
본문 글씨 키우기 본문 글씨 줄이기 바로가기 기사저장문학산의 시네마 다르마
입력 2019.01.07 14:37
치열한 수행자 삶 다룬 한국 불교영화 백미
한 길만걸어온 임권택 영화감독
‘만다라'로 불교영화 관심 이끌어
불교 넘어서 이상세계 구현 위해
낭비 없이 사는 치열한 삶 주목
만행의 길을 떠나는 주인공의 뒷모습에서 관객들은 길을 관조할 넉넉한 시간을 갖게 된다. 영화 ‘만다라' 장면.
임권택은 한 길을 걸어왔다. 그 길은 영화다. 영화는 그에게 예술이며, 인생이었으며 심지어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존재증명이었다. 영화는 그의 전부였다. 때문에 그는 영화의 길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으며 다른 길을 상상도 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그의 영화에 길을 걷는 주인공들이 한여름의 매미 울음소리만큼 가득하다. 심지어 임 감독은 서양식 로드무비(road movie)가 아닌 길 영화로 명명하여 카메라로 길을 넉넉하게 담아냈다.
그에게 영화는 삶의 길이며 종교에 근접해갔다. 예술의 신앙화는 그를 종교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으며 그의 영화적 전성기도 불교영화를 연출한 1980년대에 펼쳐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만다라’는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감독 임권택에게는 1970년대 대중영화 감독의 오명을 씻어내는 일등 공신이 ‘만다라’였고, 한국 불교영화사에서 전입신고를 한 작품이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1949)이라면 부끄럽지 않은 불교영화의 명함을 내민 작품이 ‘만다라’였다. 1980년대 성애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애마부인’(1982), ‘어둠의 자식들’(1981)이 한국 영화제작 목록을 채워갈 때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날’(1980)과 함께 한국 영화의 난파선을 이끌고 항해한 작품도 ‘만다라’였다. ‘만다라’는 임권택의 작가적 행보에 등대 역할을 했다면 한국 불교영화사에서는 큰 등불이 되었다.
‘만다라’는 순도 높은 불교영화다. 불교영화의 정의는 다양하다. 불교영화는 좁게는 ‘불교인이 등장하고 사찰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그 범위를 넓히면 ‘불교를 주제로 하거나 소재로 하는 영화’까지 아우른다. 광의의 불교영화나 협의의 불교영화로 살펴보아도 ‘만다라’는 모범적인 불교영화다. 두 주인공은 승려이며 배경은 사찰이다. 그들은 성불하기 위해 수행을 하며 심지어 계율의 울타리를 벗어나 파계로 수행의 범위를 확장한다.
첫 시퀀스에서 동안거 장면이 몽타주로 응축된다. 크레딧이 끝나면 남북을 가로 지르는 길을 따라 허허 벌판에서 버스가 다가오는 익스트림 롱쇼트가 등장한다. 본격적인 첫 장면은 길에서 시작되며 마지막 장면도 만행의 길을 떠나는 법운(안성기 분)의 뒷모습이다. 두 장면 모두 동양화처럼 펼쳐진 익스트림 롱쇼트로 길을 프레임에 채우고 롱테이크로 관객들이 길을 관조할 넉넉한 시간을 보시한다. ‘만다라’는 길에서 시작하여 길에서 마침표를 찍으며 길과 길 사이에 수행자들의 움직임과 마음이 걸려있다. 서양의 평론가는 홍상수 영화를 한 줄로 요약했다. 그 명료한 명제는 ‘여성이 홍상수 영화의 시간축이며 영화 안에서 시간의 단일성을 이루어낸다’이다. 이 표현을 임권택의 영화에 견주어 보면 ‘길이 임권택 영화의 서사의 축이며 영화 안에서 서사적 일관성을 획득한다’로 번역가능하다.
임권택은 한국인이며 ‘한국’이라는 용어에 대해 깊이 성찰하여, 오랫동안 영화적 번역 작업을 수행했다. 한국의 소리는 ‘서편제’에 담아냈고 한국의 종이는 ‘달빛 길어올리기’(2011)에 지천년(紙千年)정신을 압착하였다. 한국의 종교는 ‘만다라’에 당도하여 한국주의의 본령에 도달한다. 그의 한국에 대한 천착은 한국이라는 장소에 대한 예찬이 한 편에 자리한다면 다른 한편에는 예술가의 자기 완성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영화적 매혹이 서 있다.
법운은 계율을 중시하는 지산의 행보를 거부하다 천천히 계율의 울타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지평의 확장을 꾀한다.
그가 소설 ‘만다라’를 영화로 선택한 이유는 자기완성에 대한 매혹이었다. 정성일과 인터뷰에서 “‘만다라’를 읽고 감동한 것은 자기 삶을 이렇게 치열하게 살수 있구나, 한 치의 낭비도 없이, 몸을 던져서 살 수 있는 이런 치열한 삶이라는 게, 그러니까 불교라는 카테고리를 떠나서 자기를 구현해가고 자기의 이상 세계를 향해 낭비 없이 치열하게 산다는 것”에 주목했다고 술회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종교와 예술)을 위해 스스로를 연소해버리는 삶에 대한 매혹이 ‘만다라’를 선택한 까닭이다.
‘만다라’에서 지산(전무송 분)과 법운 수좌는 성불을 위해 수행한다. 그들은 화두를 참구한다. 화두는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고 넓어지는 병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새가 자라고 있구나, 그런데 그 새가 자라서 꺼내야하는데 너는 그 새를 어떻게 꺼내겠느냐”이다. 임권택은 두 가지 수행의 길을 제시한다. 하나의 길은 두 인물이 계를 받고 서원(誓願)을 통해 스스로 성불하기 위한 수행 정진의 방편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에 사는 중생들의 구제를 위해 마음의 격랑을 뚫고 가는 것이다.
지산과 법운은 계율 안에서 수행과 파계를 통해 경계를 넓히고 지우는 두 가지 행보를 보여준다. 연구자들은 소승 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누어 법운은 계율을 중시하고 수행 정진하는 소승불교의 길을 걸으며, 지산은 중생 구제를 위한 노력과 계율의 경계를 확장하는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수좌로 나누었다. 법운은 지산의 행보를 거부하다 천천히 계율의 울타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지평의 확장을 꾀한다. 그는 결국 ‘새를 가두는 병’인 계율로부터 해방된다. 지산의 파계는 법운에게 병을 깨뜨리게 하는 일종의 망치 역할을 한다. 지산은 스스로 “새가 갇힌 병은 현실이자 욕망, 계율이지, 난 그냥 그 병을 깨버렸어 육체가 마음이고 마음이 곧 육체야”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법운은 불교영화의 백미인 수행 장면을 통해 화두를 깨우친다. 법운은 해변에서 용맹 정진할 때 바다 위로 새가 날아간다. 새는 억압의 그물에서 벗어난 자유를 표상한다. 새는 법운의 자유에 대한 열망과 병속의 새가 병에서 자유로워졌음을 암시한다. 이로 인해 마지막 장면에 길을 떠나는 법운은 만행은 세상 속으로 향하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의 행보로 귀결된다.
문학산 영화평론가·부산대 교수
임권택은 한 길을 걸어왔다. 그 길은 영화다. 영화는 그에게 예술이며, 인생이었으며 심지어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존재증명이었다. 영화는 그의 전부였다. 때문에 그는 영화의 길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으며 다른 길을 상상도 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그의 영화에 길을 걷는 주인공들이 한여름의 매미 울음소리만큼 가득하다. 심지어 임 감독은 서양식 로드무비(road movie)가 아닌 길 영화로 명명하여 카메라로 길을 넉넉하게 담아냈다.
그에게 영화는 삶의 길이며 종교에 근접해갔다. 예술의 신앙화는 그를 종교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으며 그의 영화적 전성기도 불교영화를 연출한 1980년대에 펼쳐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만다라’는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감독 임권택에게는 1970년대 대중영화 감독의 오명을 씻어내는 일등 공신이 ‘만다라’였고, 한국 불교영화사에서 전입신고를 한 작품이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1949)이라면 부끄럽지 않은 불교영화의 명함을 내민 작품이 ‘만다라’였다. 1980년대 성애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애마부인’(1982), ‘어둠의 자식들’(1981)이 한국 영화제작 목록을 채워갈 때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날’(1980)과 함께 한국 영화의 난파선을 이끌고 항해한 작품도 ‘만다라’였다. ‘만다라’는 임권택의 작가적 행보에 등대 역할을 했다면 한국 불교영화사에서는 큰 등불이 되었다.
‘만다라’는 순도 높은 불교영화다. 불교영화의 정의는 다양하다. 불교영화는 좁게는 ‘불교인이 등장하고 사찰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그 범위를 넓히면 ‘불교를 주제로 하거나 소재로 하는 영화’까지 아우른다. 광의의 불교영화나 협의의 불교영화로 살펴보아도 ‘만다라’는 모범적인 불교영화다. 두 주인공은 승려이며 배경은 사찰이다. 그들은 성불하기 위해 수행을 하며 심지어 계율의 울타리를 벗어나 파계로 수행의 범위를 확장한다.
첫 시퀀스에서 동안거 장면이 몽타주로 응축된다. 크레딧이 끝나면 남북을 가로 지르는 길을 따라 허허 벌판에서 버스가 다가오는 익스트림 롱쇼트가 등장한다. 본격적인 첫 장면은 길에서 시작되며 마지막 장면도 만행의 길을 떠나는 법운(안성기 분)의 뒷모습이다. 두 장면 모두 동양화처럼 펼쳐진 익스트림 롱쇼트로 길을 프레임에 채우고 롱테이크로 관객들이 길을 관조할 넉넉한 시간을 보시한다. ‘만다라’는 길에서 시작하여 길에서 마침표를 찍으며 길과 길 사이에 수행자들의 움직임과 마음이 걸려있다. 서양의 평론가는 홍상수 영화를 한 줄로 요약했다. 그 명료한 명제는 ‘여성이 홍상수 영화의 시간축이며 영화 안에서 시간의 단일성을 이루어낸다’이다. 이 표현을 임권택의 영화에 견주어 보면 ‘길이 임권택 영화의 서사의 축이며 영화 안에서 서사적 일관성을 획득한다’로 번역가능하다.
임권택은 한국인이며 ‘한국’이라는 용어에 대해 깊이 성찰하여, 오랫동안 영화적 번역 작업을 수행했다. 한국의 소리는 ‘서편제’에 담아냈고 한국의 종이는 ‘달빛 길어올리기’(2011)에 지천년(紙千年)정신을 압착하였다. 한국의 종교는 ‘만다라’에 당도하여 한국주의의 본령에 도달한다. 그의 한국에 대한 천착은 한국이라는 장소에 대한 예찬이 한 편에 자리한다면 다른 한편에는 예술가의 자기 완성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영화적 매혹이 서 있다.
법운은 계율을 중시하는 지산의 행보를 거부하다 천천히 계율의 울타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지평의 확장을 꾀한다.
그가 소설 ‘만다라’를 영화로 선택한 이유는 자기완성에 대한 매혹이었다. 정성일과 인터뷰에서 “‘만다라’를 읽고 감동한 것은 자기 삶을 이렇게 치열하게 살수 있구나, 한 치의 낭비도 없이, 몸을 던져서 살 수 있는 이런 치열한 삶이라는 게, 그러니까 불교라는 카테고리를 떠나서 자기를 구현해가고 자기의 이상 세계를 향해 낭비 없이 치열하게 산다는 것”에 주목했다고 술회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종교와 예술)을 위해 스스로를 연소해버리는 삶에 대한 매혹이 ‘만다라’를 선택한 까닭이다.
‘만다라’에서 지산(전무송 분)과 법운 수좌는 성불을 위해 수행한다. 그들은 화두를 참구한다. 화두는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고 넓어지는 병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새가 자라고 있구나, 그런데 그 새가 자라서 꺼내야하는데 너는 그 새를 어떻게 꺼내겠느냐”이다. 임권택은 두 가지 수행의 길을 제시한다. 하나의 길은 두 인물이 계를 받고 서원(誓願)을 통해 스스로 성불하기 위한 수행 정진의 방편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에 사는 중생들의 구제를 위해 마음의 격랑을 뚫고 가는 것이다.
지산과 법운은 계율 안에서 수행과 파계를 통해 경계를 넓히고 지우는 두 가지 행보를 보여준다. 연구자들은 소승 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누어 법운은 계율을 중시하고 수행 정진하는 소승불교의 길을 걸으며, 지산은 중생 구제를 위한 노력과 계율의 경계를 확장하는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수좌로 나누었다. 법운은 지산의 행보를 거부하다 천천히 계율의 울타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지평의 확장을 꾀한다. 그는 결국 ‘새를 가두는 병’인 계율로부터 해방된다. 지산의 파계는 법운에게 병을 깨뜨리게 하는 일종의 망치 역할을 한다. 지산은 스스로 “새가 갇힌 병은 현실이자 욕망, 계율이지, 난 그냥 그 병을 깨버렸어 육체가 마음이고 마음이 곧 육체야”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법운은 불교영화의 백미인 수행 장면을 통해 화두를 깨우친다. 법운은 해변에서 용맹 정진할 때 바다 위로 새가 날아간다. 새는 억압의 그물에서 벗어난 자유를 표상한다. 새는 법운의 자유에 대한 열망과 병속의 새가 병에서 자유로워졌음을 암시한다. 이로 인해 마지막 장면에 길을 떠나는 법운은 만행은 세상 속으로 향하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의 행보로 귀결된다.
문학산 영화평론가·부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