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3

고난의 시대, 함석헌이 말했다 “같이 살자” : 뉴스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고난의 시대, 함석헌이 말했다 “같이 살자” : 뉴스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고난의 시대, 함석헌이 말했다 “같이 살자”

등록 :2021-03-10 04:59수정 :2021-03-10 08:22
조현 기자 사진
조현 기자

[함석헌 탄생 120돌…제자 5명이 말하는 함석헌과 그의 정신]

10대 때 ‘3·1운동’에 나서며 일제에 대한 저항을 시작한 고 함석헌 선생은 김일성·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에 항거해 수차례 투옥된 와중에도 굴하지 않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비폭력 평화 운동가다. 그가 평생 주창해 온 ‘씨알사상’은 이름 없는 한 명 한 명이 당당히 깨어 일어나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서야 한다는 사상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의 씨알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함석헌(1901~1989)은 10대 때 ‘3·1운동’에 나선 이래 평생 ‘씨알’을 위한 헌신으로 초지일관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김일성·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에 항거해 모두 여덟번이나 “인생 대학”(감옥)에 다녀온 그는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비폭력·평화운동가로 꼽힌다.


함석헌 탄생 120돌(13일)을 앞두고 지난 5일 오후 3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 ‘이 시대에 왜 함석헌 정신이 필요한가’를 주제로 좌담회가 열렸다. 애초 기독교회관에서 열 예정이던 기념 강연회가 코로나19 사태로 취소되면서 함석헌의 제자 5명만 모였다. 1970년 박정희 독재에 맞서 창간해 송건호·법정스님·김동길·안병무 등이 편집위원으로 함께했던 <씨알의 소리>가 지난해 창간 50돌을 맞았지만, 이마저 코로나19 확산 탓에 행사가 열리지 못했던 터라 이번 만남은 조촐했지만 뜻깊었다. 좌담엔 창간 때부터 편집일을 도맡았던 <씨알의 소리> 주간 박선균 목사(83), <함석헌 사상 깊이읽기> 1·2·3권을 쓴 김영호(79) 인하대 명예교수, 박재순(71) 전 씨알사상연구소장, 목성균(68)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장영호(67) 씨알사상연구원장이 함께했다. 이들은 1960~70년대 중앙신학교와 한신대 강단에 섰던 함석헌의 제자이거나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동지들이다. 이들은 “당시엔 장준하(<사상계> 창간자), 안병무(민중신학의 태두), 김동길(연세대 명예교수), 김용준(고려대 명예교수), 장기려(부산 복음병원 의사) 등 기라성 같은 분들이 주위에 있어 우리는 제자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꼬맹이였다”고 겸손해했다.



앞줄 왼쪽부터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 박재순 전 씨알사상연구소장, 박선균 <씨알의 소리>주간, 뒷줄 왼쪽부터 목성균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김은경 목사, 장영호 씨알사상연구원장, 김관호 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김대식 씨알사상연구원 연구위원.


■ 인간 함석헌…“공감능력 뛰어난 투사”



함석헌은 일제 치하와 독재 시절을 거치는 동안 여러번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다녀와서도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선 의기의 인물이다. 1950~70년대 서슬 퍼런 독재에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때도 함석헌의 강연장엔 수만명이 모여 그의 포효를 들으며, 민주화의 꿈을 되살렸다.

제자들은 “함석헌은 투사의 면모뿐만 아니라 공감능력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중앙신학교(강남대 전신)에서 함석헌을 만났고, 1970년 이후 함석헌의 집에서 함께 살며 <씨알의 소리>를 만들었던 박선균 목사는 함석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 중 한명이다.

“선생님은 일체의 지시 없이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했다. 원효로 70번지인 선생님 댁은 문을 닫는 법이 없었다. 늘 열어두었기에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었다. 정보과 형사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지위가 높다고 특별 대우하는 것도 없고, 아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끼를 먹었지만 선생님은 한끼밖에 드시지 않으면서도 그 한끼를 우리와 한 밥상에서 똑같이 드셨다.”

1970년대 함석헌이 집회나 목요기도회에 나가는 날이면 경찰 20~30명이 집 앞길을 봉쇄했다. 그때 동지들은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곤 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한번도 경찰에게 욕설을 뱉거나 폭력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게 박 목사의 전언이다. 함석헌이 오산학교 교사 시절, 학생들이 학내 시위를 벌이며 교사들에게 뭇매를 때릴 때도 자신을 때린 학생을 미워할까 봐 눈을 가리고 있었을 만큼 증오심 없이 살고자 했던 함석헌은 말뿐만 아니라 실제 삶도 비폭력·평화주의로 일관했다는 설명이다.

박재순 목사는 서울대 철학과 1학년 때 서울대에 강연 온 함석헌을 처음 만났다. 1974년 일어난 민청학련 사건으로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나와 한신대에 편입한 뒤엔 늘 함석헌의 강연을 쫓아다녔다. 4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휘어진 척추를 펴는 수술을 했던 1976년 당시엔 함석헌이 부산에서 올라와 수술실까지 바래다주기도 했다. 그날 함석헌이 마루에 앉아 시든 나무를 보며 ‘저 나무가 재순이 같다’고 눈물을 훔치더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병원에서 머리에 구멍을 두개 뚫고, 쇠막대기 4개를 꽂아 척추를 억지로 늘린다고 40일간 고정해 놓았다. 친구들이 이런 야만적인 수술이 어디 있냐고 분개할 만큼 큰 고통을 받고 대수술을 할 때, 선생님이 바쁜 상황인데도 아침 일찍 수술실까지 와 줘 큰 위로가 됐다. 나만 그런 사랑을 받은 게 아니다. 그분은 평생 사랑하면서 산 분이다.”



좌담회 중인 목성균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왼쪽부터), 박재순 전 씨알사상연구소장, 박선균 <씨알의 소리>주간,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 장영호 씨알사상연구원장.


■ 함석헌의 씨알사상…“한명 한명이 역사의 주체”

이름 없는 한명 한명이 당당히 깨어 일어나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서야 한다는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철학자대회에서 현대의 한국을 대표할 사상으로 주목을 받았다.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중앙신학교에 진학해 함석헌을 만났다는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는 “미국에 유학하며 새로운 사상을 접해보면 이미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한국의 사상과 글을 쓰는 표준을 말할 때, 함석헌을 빼고는 말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좌담회 도중 김은경(66) 목사가 들어섰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함석헌의 원효로 집에서 함께 살며 민주화운동을 도왔던 그는 이 좌담회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박재순 목사는 “시계도 없이 사는 나를 보고 선생님이 자신의 회중시계를 보내줬는데, 그 시계를 가지고 온 이가 바로 김 목사”라고 설명했다. 함석헌의 권유로 한신대에 진학해 기독교장로회 목회자가 돼 오는 9월 장로회 교단 역사상 첫 여성 총회장으로 부임하는 김 목사가 여성 지도자로 우뚝 선 것도 당시 소외된 여성의 내적 힘을 격발시킨 함석헌의 응원 때문이었단다. “사회에 처음 나온 내가 주눅이 든 것을 보고 선생님은 ‘여자 한 사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해줬다. 민주화운동 한다고 공부는 안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평생 씨알사상을 연구해온 박재순 목사는 “씨알은 작은 객체로 따로 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생명은 자신을 깨트려 싹을 틔우고 줄기를 키우고 열매를 맺어 다른 생명체를 먹여 살리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씨알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이 세상 생명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함석헌의 사상을 설명했다.

“산업혁명과 국가주의, 마르크스 유물론, 자연과학 모두 고귀한 생명의 의미와 목적을 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거울에 비친 네 얼굴을 보라. 100만년 비바람과 재난과 전쟁과 죽음을 뚫고 이겨내고 버텨낸 위대한 얼굴이다. 우주 생명 진화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가 통째로 압축된 그 얼굴이다’라며 소외되고 핍박받고 고통받는 씨알이 얼마나 존귀하고 위대한 존재인지 일깨워주셨다. 선생님이 죽음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도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씨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장영호 씨알사상연구원장은 최근 성전환을 했다는 이유로 전역당한 뒤 목숨을 끊은 변희수 하사의 죽음에 대해 “약자가 소외되지 않도록 모두가 돌봐야 할 책임이 있다”며 함석헌의 말을 전했다. “선생님은 ‘어떤 제도도 사람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고 하셨다. 또한 생명에 대해서도 ‘생이 곧 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생은 살아내야 할 명령이라는 것이다.”

함석헌기념사업회를 이끄는 목성균 이사장은 씨알사상이 깊은 수도와 철학을 통해 나온 공감과 연민임을 전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마음을 집중해 그 근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 역사의 주체로 해야 할 씨알의 의무다.”



10대 때 ‘3·1운동’에 나서며 일제에 대한 저항을 시작한 고 함석헌 선생은 김일성·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에 항거해 수차례 투옥된 와중에도 굴하지 않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비폭력 평화 운동가다. 그가 평생 주창해 온 ‘씨알사상’은 이름 없는 한 명 한 명이 당당히 깨어 일어나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서야 한다는 사상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의 씨알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 고난의 시대, 함석헌의 사상은 어떤 가르침을 주나



함석헌은 일제 때 오산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10년을 일한 이후 평생 월급을 받아 본 일 없이 하루 한끼만 먹으며 투쟁의 삶을 살았다. 북한에서도 공산당에 협조하면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지만 거부하고 월남했고, 남한에서도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갈 수도 야당 당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모든 부와 권력을 거부하고 빈자·약자·핍박받는 자와 함께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겨우 마련한 원효로 집을 스승인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을 기리는 재단에 헌납했고, 1회 인촌상 수상 상금으로 받은 2000만원도 결핵요양원에 보냈다. 함석헌은 자신을 “잘 날지만 먹이 하나 구하지 못하는 바보새”라고 표현했다.

박재순 목사는 “걷기도 어려운 장애의 몸이지만 ‘인간은 하늘을 향해 일어서는 존재’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거꾸러지지 않고 일어날 수 있었다”며 함석헌의 고난 철학을 전했다. “선생님은 ‘좌절·시련·고난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발판’이라고 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한 밑거름이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도 한국전쟁 같은 참상을 겪었지만, 그 정신을 드높여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정화하고 구원할 수 있다고 본 것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다.”

함석헌의 활동 중에 유일하게 ‘운동’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 ‘같이 살기 운동’이다. 참석자들은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에 처해 좌절하고 자살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요즘, 같이 사는 정신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영호 교수는 “남과 북도 정치의 부침과 상관없이 함석헌의 비폭력·평화 정신으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며 “휴전선 부근에 함석헌 비폭력 평화센터를 건립하자”고 제안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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