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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학-공공단상] 나를 다시 보기, 다시 개벽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공공학-공공단상] 나를 다시 보기, 다시 개벽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공공학-공공단상] 나를 다시 보기, 다시 개벽

기자명 이효정 경기평화교육센터 상임교육위원
입력 201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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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무한의 길을 걷는 우주를 한 불사조에 비 할진대, 우주 자체나 한 마리의 새나 한 사람의 영혼이 무엇이 다르리오. 한 생명이 굴러 나감에 거긔에는 반다시 선과 빗과 소리가 잇슬 것이다.

시인 조명희(1894~1938)의 시집 <봄 잔디밧 위에>(1924) 머리말이다. 3·1운동에도 동참했던 조명희는 1928년 소련으로 망명했으나 일본 첩자라는 누명으로 총살된다. 그는 1920년대 비중 있는 작가였음에도 소련 망명 문학인, KAPF 문학인이었다는 이유로 특별히 조명을 받지 못한 비운의 시인이다. ‘개벽학당’이 아니었다면 이 시인의 시집을 찾아볼 일도, 이 글에서 동학과 개벽의 내용을 발견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개벽학당에 오기까지
이화학당, 배재학당은 들어봤어도. ‘개벽학당’이라니 낯선 이들이 많을 것이다. 개벽학당 개강 파티에서 당장 이병한 교수는 ‘학교는 근대의 산물이며, 서원, 서당은 조선시대 유학을 배우는 곳이었다면 학당이 그나마 우리의 배움을 설명하는 적합한 명칭’이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고 하지만 40대에 접어든 나는 어쩌다 개벽학당에 오게 됐고 대부분이 20대인 친구들과 ‘개벽’에 대해 공부하게 됐을까? 이 이야기는 여러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지만, 몇 번의 외국 여행경험으로 내가 갖게 된 고민에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나는 동남아시아, 서유럽, 일본의 각각 두 곳을 여행했다. 여행 중에 각 나라의 다른 문화, 자연환경을 살펴보고 즐기면서도 다른 한편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다른 경험, 다른 감정이었지만 정리해보면 피부색으로 드러나는 국가 간 경제 격차, 지구 안에서의 불평등, 그 불평등 때문에 내가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불편한 감정을 일으켰다.

100여 년 전, 동남아 국가를 식민지 삼았던 유럽인들이 여전히 그들의 나라보다 가난한 그곳에서 휴양을 즐기는 모습, 오래되고 낡아 보이지만 근대를 선도했고 그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도시의 모습. 그곳에서 기초 노동력을 제공하는 유색인종. 동남아시아보다는 경제적으로 앞섰고 서구의 문화를 선진화의 목표로 보고 달려왔던 한국인으로서, 지구적 불평등 사이에 낀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지만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여행지에서 늘 느끼는 것이다. 정점은 일본이었다. 올해 초, 일본 여행 중 나가사키의 ‘데지마’라는 곳을 둘러보았다. 17세기 막부시대 일본인들이 네덜란드·포르투갈인들을 인공 섬에서 생활하게 하고 교역을 했던 ‘진짜’ 데지마는 사라졌지만 복원해 박물관,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선도적으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중국과 조선이 초기에 서양의 문명을 거부했을 때,일본인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가장 먼저 성공한 이유가 궁금했다. 함께 한 여행자는 이 물음에, ‘당시 조선과 중국이 왕권 중심으로 힘의 균형을 이루었던 반면 막부시대의 일본은 더 큰 힘을 갖기 위해 경쟁했기에, 외부세력과 손을 잡는 것을 이용하지 않았을까’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오~ 이건 『총·균·쇠』의 저자 제러드다이아몬드식 해석인데?”라며 웃었지만 이렇게 시작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엉뚱하게도 근대의 개인주의를 일본이 전혀 체현하고 있지 못하며 그래서 과거를 반성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뻗어 나갔다. 외압에 의한 조선의 근대화 과정, 포스트모던 시대에 ‘통일’ 과제를 풀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 이런 것들로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서구 중심의 문명과 제국주의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국가, 인종 간 불평등이 싫지만, 우리가 후발주자인 것 같은 열등감도 싫은, 설명할 수 없는 상태를 묻어두고 생활하던 중 개벽학당의 소식을, 정확하게는 개벽학당의 ‘한국 사상사 강의’ 소식을 접했다. 아마도 ‘개벽학당’이라는 말부터 처음에 들었다면 흔히들 가지고 있는 ‘개벽’이라는 단어의 종교적 이미지 때문에, 한국사상사 강의도 듣지 않았을지 모른다. 한국 사상사 강의에 살짝 일어난 호기심이 개벽학당 수강 신청이라는 행동으로 이어진 것은 강의를 맡아준 선생님과 함께 소개된 책 『한국 근대의 탄생』(조성환) 때문이었다. 강사에 대한 정보가 내게 없으니 얼른 검색을 해보았다. 책을 소개하는 내용들이, 정리하지 못한 나의 고민에 일격을 가한 느낌이었다. ‘내가 여전히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구나.’ 개벽학당 소식을 알게 된 건 우연이지만, 이 강의를 듣는 것은 내게 필연인 것 같았다.

과거-현재-미래가 대화를 나누는 개벽학당
개벽학당은, 일주일에 한 번 오전에는 한국 사상사 강의를 오후에는 주제에 맞는 책을 한 권씩 정해서 읽고 집중 세미나를 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나는 사정상 오전 강의에만 참여했다. 한국 사상사 강의를 함께 듣는 이는 ‘한국만의 사상이 있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으로 시작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학에서 한국의 자생적 근대의 흐름을 찾고 그 가치를 개벽에 둔다는 것은 ‘개벽학당’이라는 이름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 흐름을 어떻게 잡아갈지 궁금할 뿐이었다.

오전 강의가 과거의 흐름 속에서 우리 사상의 특징을 찾아내는 작업이라면 오후는 현재로부터 미래를 탐구하는 시간이었다. 『라이프 3.0』, 『휴먼 에이지』 등 다양한 책들을 섭렵하며 인공지능, 환경 문제 등에 인간사회가 어떻게 대처하며 어떤 가치를 중심으로 만들어 갈지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개벽학당에서의 하루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며, 미래에 대한 모색의 시간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세미나는 참여할 수 없어서, 개벽학당 카페에 올라오는 ‘벽청(개벽하는 청년)’들의 크리틱을 읽으며 내용을 좇아가 보기도 했다.

‘개벽’으로 보는 한국사상사
다양한 시간들이 개벽학당을 이루고 있지만 ‘나’라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시간이, 내게는 가장 기초작업 같은 시간이었다. 한국 사상사 강의는 서구 중심의 시각을 벗어나 동아시아 안의 우리 사상의 개성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자존감을 회복하는 시간,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시간이었다.

연구자가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 사상사를 접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정규교육에서는 고등학교 윤리시간이 전부이다. 요즘에는 ‘윤리와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고등학교 2학년 과정에 동양, 서양, 한국의 사상사를 다루고 있다. 윤리 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려보면 우리는 중국의 영향 아래, 조선 건국을 전후로 불교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으며, 원효, 퇴계와 같이 몇몇 특징 있는 인물들이 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름 이 시간을 재미있어하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이 시간을 통해 나에게 남은 인상은, 우리는 강국으로부터 외침뿐만 아니라 사상적 영향도 늘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조선까지는 중국의 성리학을 따르고 현대에 와서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그나마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은, 민중들의 끊임없는 역사 참여였다. 외침이 있을 때마다 일어섰던 의병, 보국안민의 기치를 건 동학농민항쟁,3·1 만세운동, 4·19, 5·18, 87년 6월 항쟁 등 민초들이 만들어 온 역사였다. 2017년 촛불 항쟁까지. 여전히 제대로 변화시키지 못했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함께하는 힘이 있다는 건 자랑스러워해도 될 일이라 생각했다.

정규 교육을 벗어나, 사상사 전체를 다루는 것은 어렵지만 간혹 철학책을 찾아보기도 한다. 공자, 노자, 니체, 스피노자, …. 누군가 해석해놓은 책을 보지만 우리나라 철학가, 사상가는 없다. 한동안 ‘핫’했던 강신주, 도올 등의 철학책도 결국은 서양 철학자, 중국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삶과 사회를 보는 것들이었다. 물론 고전이라는 것은 지역과 경계, 시대를 넘어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에 고전이며, 그것을 통해 인간 사회와 개인의 삶을 성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가능하다면 부지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왜 우리 것으로 우리를 보는 성찰은 없지? 우리 것은 무엇이지? 이런 물음이 도돌이표처럼 맴돌 때가 있다. 이 물음을 자각하지 않을 때가 더 많기도 하다. 이 의문은 은폐되고 묻혀 있어, 그냥 우리는 늘 앞서 있는 누군가를 따라만 가는 존재라는 무의식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상태로 있음에도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왔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 사상사 강의는 중국의 유·불·도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시작으로 했다. 중국의 것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우리만의 개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다른 우리의 특성을 찾는 작업에도 기준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중국 철학을 기준으로 우리 사상사를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외부의 기준을 벗어나 우리의 관점으로 중국의 유·불·도가 한반도에 와서 어떻게 적용되고 영향을 미쳤는지 보는 것이다. 우리의 관점은 무엇일까? ‘개벽’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개벽’이 무엇인지부터 짚고 가면 이 이야기는 흥미가 줄어들 수 있다. 한국 사상사 강의 또한 그러했다. 물 흐르는 듯 가보니, 개벽과 만났다.

치열한 자기 인식의 사상가들
지금도 명실상부 동양의 고전으로, 많은 이가 원문보다는 전문가의 해석으로 읽는 『논어』에서,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말로 동아시아의 특징을 읽었다. 공자가 말한 ‘술이부작述而不作’은 공자 ‘자신은 새로운 것을 창조[作]하지 않고 고대의 모범을 해설[述]했다’는 표현이라고 한다. 『논어』의 구절 중 ‘학이시습學而時習’을 이야기하며 때에 맞는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많이 접했지만 ‘술이부작’은 처음이었다. 이에 대해 강의를 맡은 조성환 선생님은 “창조하지 않는 학습”으로 동아시아의 특징을 명명했다. 중국 성인을 롤 모델로 삼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지만 그 이상을 넘지 않는 것이 마치 규범처럼 돼버렸던, 중화사상으로 점철됐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을 이해하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창조[作] 없는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현상 유지는 할 수 있으나 발전과 진보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作’을 금기시하는 사회에서 창조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자기에 대한 치열한 인식을 바탕으로 나에게 맞는 무엇을 찾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치열한 자기 인식을 했던 사람들이 우리 사상사에서 있었나?

신라의 최치원, 원효, 조선 초기 사대부, 조선의 세종, 퇴계, 다산 정약용, 동학을 만든 최제우, 최시형, 원불교의 박중빈, 한살림의 장일순까지 그들이 남긴 기록과 글들을 살피며 치열한 자기 인식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우리 사상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읽어 내려갔다. 원불교의 박중빈과 한살림의 장일순을 제외하면 보편적으로 모두 아는 인물이지만 개벽학당에서 살펴본 이들은 좀 낯설었다. 보지 못했던 면을 보았기 때문이고 보던 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9세기의 최치원을 7세기의 원효보다 먼저 살펴보았다. ‘한국 철학의 첫 페이지를 무엇, 어디에서부터 설정할 것인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최치원이라는 문제의식에서였다. 섬으로서 격리돼 있던 일본과 달리 지리적으로 중국과 붙어 있던 우리가 중국의 앞선 문명과 철학을 수용하는 것은 정해진 운명 같은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 가운데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는 강의 중 이야기는 그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듯 심각하게 다가왔다.

어린 시절 당나라 유학을 하고 그곳에서 성장했음에도 최치원에게서 주체적 수용과 동인東人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태도를 그가 남길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최치원은 중국을 ‘서국’, 신라를 ‘동국’으로, 공자, 노자, 석가를 단순한 직책으로 표현하며 중국을 대국으로 모시는 입장에서 벗어나 주체적 사고를 드러낸다. 그는 <난랑비 서문>에 “포함삼교包含三敎”라는 표현으로 신라가 중국의 유·불·도를 ‘포함’했다고 한다.유·불·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신라의 정체성에 맞게 포용·수용했다는 의미로 ‘포함’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동인의식’ 때문이다. 최치원의 ‘동인의식’은 중국이라는 대국과 비교한 열등감의 결과가 아니라 ‘나’의 존재에 대한 물음의 결과임이 그의 글 곳곳에서 묻어난다.

다음으로 치열한 자기 인식의 사상가로, 세종을 들수 있다. 조선의 왕이었던 세종을 사상가로 보는 입장은 이제까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개벽학당에서 우리는 한글 창제를 비롯해서 백성들과 함께하려 했던 그의 정신과 실천이,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해석에 동의했다. 세종의 한글 창제, 음악과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업적, 창조성을 추동했던 힘은 중국을 기준으로 조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실정에 맞는 삶을 백성과 함께[與民] 살고자 했던 ‘주체성’이었다. 그렇기에, 중국 문자의 ‘술述’에 머물지 않고 한글이라는 ‘작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학의 최제우. 시대를 한참 뛰어넘었다. 강의 순서는 이와 달랐지만 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중심으로 두고 이야기해본다. 우리 ‘사상’의 첫 ‘창조’였다. 우리의 토착적 풍토와 어울리는,사람을 하늘로 보는[人乃天] 사상. 비단 사람에 머물지 않고 우주 안의 생명에 모두 하늘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 사상이었다. 최제우의 뒤를 이어 동학을 확산시킨 최시형은 ‘천인상여天人相與’의 인간관을 정립하는데, 하늘과 사람이 서로 더불어 존재한다는 이것은 자유의지를 발현하는 독립된 자아로 인간관을 정립하는 서구의 관점과 많이 다르다. 인간과 인간의 조화, 인간과 자연의 조화 등 ‘조화’의 인간관을 지닌 ‘천인상여’ 사상은 평화와 생명의 사상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한살림의 장일순에게 계승된다.

동학까지 가기 전에, 강의에서는 우리의 ‘하늘’에 대한 관점과 지향도 살펴봤다. 조선 초기 사대부 권근의 <천인심성분석지도>, 퇴계의 <천명도설후서>, 다산의 상제上帝인仁에 대한 재해석이 그 자료들이었다. 중국과 다른 조선의 하늘이었다, 동학의 하늘님이 그냥 불쑥 나온 것은 아니었다. 하늘에 대한 우리만의 철학적 사유가, 사상가들의 개성과 함께 진행돼 왔다.

중국보다 ‘天’을 사용하는 횟수가 많은 조선의 ‘하늘’은 왕도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였다. 중국의 ‘天’과 달리 때로는 어느 순간에나 함께 하는 인격적 존재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하늘과 가까워지고자 부단히 자신을 수양하는 태도를 강조했다. 그러다 동학에서는 사람과 만물이 모두 하늘님이 되는 것이다. 대반전이다. 그래서 사람을, 생명을 모시는 태도로 존중하고 귀하게 대하는 것이 하늘님인 인간의 덕목이며 실천 과제이다.

15주의 강의마다 사상과 인물에 대한 정보, 지식을 알아가는 것만이 아니었다. 삶에 대한 태도와 새로운 인식을 얻었다. 마음이 열리고 나와 세상을 다시 보는 개벽이구나. 느지막이 생각해본다.

‘다시 개벽’ 안에 다 있네.
1894년 갑오농민항쟁으로, 동학도들은 거의 목숨을 잃거나 설 자리를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와 정신, 그 사상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갑오년에 태어난 조명희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태어난 해의 항쟁을, 거기에 스며들었던 사상을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듣고 생활에서 느꼈을 것이다. 그가 태어난 진천에서도 농민의 저항과 투쟁이 있었기에 더더욱.

동학의 정신이 어떻게 3·1운동으로 이어지는지 이야기하기에 나의 지식은 짧지만, 1919년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조명희에게는 자신이 세상의 빛을 본 해에 있었던 역사에 대한 뜨거운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의 시집 머리말에 동학의 사상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우주도, 새도, 사람도 그 영혼이 다르지 않다는 글귀는 모두가 한울님이라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구한말 즈음에 탄생한 ‘민족종교’로 규정되는 천도교, 원불교, 대종교 등은 모두 ‘개벽’을 말한다. 유학의 시대가 끝나가던 조선 말기, ‘천주’를 믿는다는 서양 세력의 횡포를 보면서 탄생한 신생 종교들이 모두 개벽을 말한다는 것은 ‘개벽’에 우리만의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개벽’은 무엇일까? ‘내가 변해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개벽’이며 ‘내 안의 하늘을 자각해서 다른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는 것이 개벽’이라는 강의 내용에 밑줄을 긋는다. 혁명과 개벽이 다른 것은 외부의 변화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에서 시작해서 세계의 변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최제우는 ’다시 개벽‘을 말한다. 그것은 또 다시 우주의 섭리로 천지가 개벽하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사회의 개벽, 문명의 개벽이다. 그동안 불평등하고 부조리했던 인간 사회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주의 생명이 모두 한울이며 하늘님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시 개벽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깥으로 향해 있던 관점을 나에게로 돌려놓고 ‘나’의 시점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것이 ‘다시 개벽’”이다. 강의록의 이 문장을 읽는데 마음에서 쿵 소리를 낸다. 우리가 최치원으로 시작해, 세종, 최제우, 그 밖의 개벽종교를 살펴본 이유이다.

나의 시점으로 나를 보는 것, 늘 타인을 비교 대상을 두고 달려왔던 이들에게(내 생각에 한국 문화는 이 문화가 무척 강하다. 나라와 나라의 비교, 사람과 사람의 비교) 다른 누구의 눈으로 보지 말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모든 생명에 하늘이 있으니 귀하게 모시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자고. ‘다시 개벽’ 안에 평등,평화, 생명존중, 페미니즘이 다 ‘포함’돼 있다.

개벽학당에서 만난 사람
개벽학당을 여는 날, 놀라웠다. 나는 어쩌다가 이곳에 온 것 같은데 그곳에 온 20대 청년들은 스스로를 개벽하는 청년(벽청)이라 칭하며, 적극적으로 그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나의 20대가 떠올랐다. 벽청들 중에는 자발적 고졸의 삶을 선택하며, 통과의례처럼 사회에서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대학 입학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친구들도 있다. 물론 아무런 방황과 갈등 없이, 신념에 넘쳐 그런 선택을 한 것만은 아닌 듯했다.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도 있고, 고민도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들 한 명, 한 명이 빛났다. 단지 청춘이어서 빛나는 것만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벽청이라 이름 짓기 전에, 이미 그들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삶을 만들며 ‘다시 개벽’하는 중이었다.

벽청 중에는 ‘공공公共하는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청년들도 있다. 삼포 세대, 오포 세대라는, 기성세대의 규정에 머물지 않고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청년들이었다. ‘렛츠 피스’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등 그들만의 색깔로 삶의 공공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벽청들, ‘공공公共하는 청년’들 심각하게 멋지다.

개벽학당 이후 …
‘분단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인 나를 바라본다. 우리가 서구 근대화를 정신없이 따라간 시간만큼 분단과 전쟁으로 대결과 위협의 시간을 보냈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은 얼마나 다른 길을 걸어왔나? 그 차이가 너무 크니 탈분단 상태에서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의견도 많다. 통일은 어떤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 북이 더 개방하고 개혁해야 한다고 진보적 북한학, 통일학자들은 말한다. 북만 변하면 될까?우리는 이대로 이 모습대로 있으면 될까? 아이들에게 혐오가 놀이가 돼 버리고 청소년의 행복지수가 OECD국가 중 가장 낮은 이 모습 이대로 가도 되는 걸까?

어느 일방에게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함께 변화를 위해 노력한다면, 그 변화의 가치에 개벽이 있어도 좋겠다. 남북이 함께 서구의 근대화 물결을,자본주의, 사회주의 방식으로 좇았던 역사를 평가해보고 치열한 자기 인식에서 출발한 토착적 근대화에 대해 토론한다면 어떨까? 물론,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주체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북과 토착적 근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나’를 기준으로 사상사를 다시 평가하고 우리의 근대성을 찾아보자고 한다면 그들의 ‘주체’와도 만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개벽’의 가치에서 통일 사회의 공통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해 본다.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끝내고 생명과 평화가 중심이 되는 시대의 중심 가치가 ‘개벽’이면 아주 괜찮을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분단을 끝내는 일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전쟁과 대결의 분위기로 더욱 공고해진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개벽은 어떤 모습일까. ‘모심’의 철학, 모두가 모두를 하늘님과 같은 태도로 대할 수 있다면 여성을 비롯한 역사의 소수자들도 자기의 언어로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화제를 몰고 있는 ‘검블유’ 임수정, ‘녹두꽃’의 한예리, 역사에서 묻혀 있던 여성의 서사가 드러나는 과정을 환영하며 자기 언어를 갖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양반과 선비의 전유물이었던 ‘학學’을 역사상 처음으로 백성들이 할 수 있었던 ‘동학’도 민중이 자기 언어를 갖는 과정이었구나. 퇴계, 다산과 같은 훌륭한 철학가가 있었음에도 처음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글로 쓰인 『용담유사』(최제우의 말을 최시형이 옮긴 책)는 사상의 첫 창조물이자, 역사에서 소외됐던 민중이 자기 언어를 갖는 계기였다. 그 언어에도 시대적 결핍으로 여성과 소수자의 이야기가 적을 수 있다.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니 앞으로 만들어나가면 될 것이다.

종강 자리에서 한 학기의 소회를 나누며 벽청들은 개벽을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자신들을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아이에 비유했다. 개벽은 절대적 이상으로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고 앞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삶 속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기 언어로 말하는 과정에서 ‘개벽’이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리라. 나는 그저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나를 보고 싶어서, 서구 근대화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 개벽학당에 왔는데 나름의 미래까지 개벽과 함께 그리고 있다.
이효정 경기평화교육센터 상임교육위원






이효정 경기평화교육센터 상임교육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