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8

함석헌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ㅡ 속죄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무교회(1945-1955)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ㅡ 함석헌 속죄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오철근
12 hrs ·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ㅡ 함석헌

속죄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오늘은 여러분과 약속한 마지막 시간입니다. 한 가지만 더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죄 문제입니다. 기독교에서 보는 세계는 윤리적인 질서라고 위에서 말했습니다. 윤리적이기 때문에 죄 문제는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라면 곧 십자가, 십자가라면 곧 죄, 그거면 기독교의 전부로 알만큼 죄와 그것을 해결하는 속죄문제는 기독교에서 중요한 교리가 되어있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둘셋 모인 곳에 가기만 하면, 예배나 토론을 하는 곳에 가기만 하면 반드시 곧 죄, 회개, 속죄, 하는 말을 듣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교 속죄교라 할 만합니다.

물론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는 아니요, 구경의 목적도 아닙니다. 마지막에 가는 곳은 영원한 생명이요 하늘나라입니다. 속죄는 그것을 위한 수단이요 방법이지, 목적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중요시하게 되는 것은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를 그렇게 중요시하는 것은 기독교가 인격적인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종교인 이상, 사람의 맘을 바로잡기를 목적하는 이상, 어느 종교나 죄에 관한 가르침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처럼 거기 대해 심각히 말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죄는 어찌하여 있게 되느냐. 그 기원을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면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죄를 알 수 없는 인연으로 됐다든지, 물욕에 가려서 그랬다든지 하는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질 속에 자유로운 의지로 의식적으로 된 것으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인격적인 우주관에 서기 때문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역사를 단순한 물리적인 변천과정으로 보는 데는 죄가 있을 리가 없고, 양심의 고통이니 가책이니가 있을리 없습니다. 우주정신의 범신론적 현현으로 보는 데도 그렇고, 형이상학적인 원리의 발전으로 보는 데서도 그렇고, 맹목적인 의지로 더듬어가는 데서도 죄의 고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상의 여러가지 설명은 인간의 가슴속 깊이 들어 있는 독사 같은 죄의 고민을 없애볼까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소용이 없는 것은 참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사실은 그러한 설명보다는 더 강하고 끈질긴 것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도 다른 생물과 일반으로 간단한 데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해가는 것이라고 생물학자가 말해도, 죄란 불완전 상태에 불과한 것이라고 철학자가 말해도, 고민하는 인간의 가슴에서 죄의 의식을 뽑아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물질주의, 현실주의가 왕성해감을 따라 양심이 점점 둔해져 가는 것 같으면서도, 과학의 응용에 따라 생활은 날로날로 편리해 가는 것 같으면서도, 세계적으로 고민이 늘어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인격적인 존재인 증거요, 죄가 인간 본질에 관계되는 문제요, 우주에 윤리적인 질서가 엄존하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죄는 인간 자유의지의 산물이요, 이성의 산물입니다. 죄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무엇보다 먼저 처분해야할, 무엇보다 나중까지 깉어 있을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은 인간 혼의 알 속에서부터 대우주의 끝까지 뻗어 있는 균사(菌絲)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만물이 오늘날까지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얼마나 고통스런 우주관입니까? 또 얼마나 진실하고 장엄한, 거룩한 우주관입니까?

성경은 예수의 사업을 한마디로 요약해 죄를 정결케 했다 합니다. 그것이 근본이요, 다른 모든 활동도 다 거기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통일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 생각할 때 예수께서 유대민족에 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고금 여러 민족 중 그들처럼 죄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가진 민족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상한 성격의 민족이어서 한편 유대인이라면 곧 돈을 연상할 만큼 이욕적(利慾的)이면서 다른 한편엔 엄격한 도덕적 양심을 가집니다. 강한 광선같이, 렘브람트(Rembrandt van Rijn)의 그림을 보는 것같이 명암이 극도로 대조됩니다. 『구약』 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죄, 완악, 불의, 음란 등등 이런 문구로 꿰뚫려 있습니다. 그 대부분이 역사적 문헌인데, 세계 어떤 국가 민족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게 신음으로 일관된 것은 없습니다. 정말 뺀 백성이었습니다. 죄의 의식이 그들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수를 낳은 태반이었습니다. 예수는 다른 데서 날 수없었습니다. 이 고민하는 양심만이 영원한 인격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 끊는 용광로만이 순금을 낳을 수 있는 것같이.

예수의 생애와 사상을 유대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바라보면 놀라운 대조를 이루어 한개 숭엄한 그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배경이 아니고는 그 인격의 영광이 찬란한 맛을 완전히 알 수 없고, 또 그 인격의 빛이 아니고는 그 역사의 의미를 잘 알 수 없습니다. 예수가 가장 많이 쓰신 말씀을 들면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일 것입니다. 이것은 끓어 돌아가는 용광로의 중심에 떠오르는 결정체같이 빛나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서운 죄의식에서만 닦이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나는 그를 영원한 로켓탄이라 했습니다. 이 로켓탄을 발사하는 폭발하는 불은 하늘에서 내려온 영이겠지만 , 그 폭발을 가능케 하는 굳은 탄피는 죄의식으로 단련된 강철같이 엄혹한 도덕입니다.

어느 민족의 역사가 아니 그러리오만, 특히 유대 역사는 훈련의 역사요 단련의 역사입니다. 둔한 짐승깉이, 약한 어린이 같이 그들은 채찍에 맞으며 자라났습니다. 그들을 후려갈긴 채찍은 '거룩'이요, '의'였습니다. [창세기] 이하를 읽어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을 알고 그 의를 배우기 위해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국가, 여러 문화와 접촉하며 가지가지의 파란곡절을 겪었지만, 구경의 의미는 이 두 가지에 돌아가고 맙니다. 두 채찍 사이에서 이리 넘어지고 저리 엎어지는 동안 가슴속에 늘어간 것은 날카로운 죄의 의식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포수시대(捕囚時代)를 지내고, 예언자도 끊어지고, 나라가 완전히 망한 때에 마치 심장도 인젠 이 이상 견딜 수도 없다 할 만큼 된 때에, 고대 모든 문화 중 가장 고상한 도덕적인 문화를 가졌던 종교의 뺀 백성은 절망하려 했습니다. 그때에 나온 것이 예수요, 그가 와서 한 말이 "하늘나라 가깝다" "나를 믿으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였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는 한가지 사실의 두 면입니다. 인생의 입장에서 하면 인간의 목표는 영원한 생명이고, 역사적 입장에서 하면 역사의 완성은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죄의 고민속에 절망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것을 복음이라, 기뿐 소식이라 했습니다. 예수는 무엇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었나. '사랑'과 '참'입니다. [요한복음]의 기자는 "율법은 모세로부터 왔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왔다"고 했습니다. 거룩과 의를 배우기에 기운이 빠진 인간을 그는 사랑과 참의 가슴에 안아 살려냈습니다. 칼날같이 날카롭던 죄와 그뒤에 따라서는 무서운 죽음이 그만 권위를 잃고 안개같이 사라지게 됐고, 무너진 역사의 무더기 속에서 새 생명의 싹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옛사람은 듣기를 "하나님은 노여워하는 하나님이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노를 풀어보려고 단식도 해보고,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써도 보고, 제사도 드려보았습니다. 소박한 양심에도 생 • 사 • 화 • 복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는 줄을 알았고, 또 윤리적인 질서 속에 난 생명인지라, 제가 당하는 불행과 제 행위를 인과적으로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은 어째 그런지는 모르면서도 역사의 먼동 트기부터 당연한 것으로 그리 생각하여왔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를 첨부터 지배해온 법칙입니다.

그래 그들은 항상 벌벌 떠는 심리였습니다. 또 유치한 생각에, 자기의 무력을 언제나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술적으로 초월한 능력의 하나님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호의를 얻으려 전전긍긍하는 것이 고대 종교였습니다. 이리하는 동안에 그들은 그 종교의 초보적 소학에서 도덕생활의 기초를 닦았고, 사회질서 유지에 필요한 규율을 지키는 것을 배우기는 했으나, 맘의 평안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맘의 평안이 없는 한 모든 축복의 약속은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차차 주의를 밖에서부터 안으로 돌리게 됐습니다. 마법 • 주문으로 행복을 끌어오자던 생각을 그만두고 제사종교를 발전시켰습니다. 자기네가 지은 죄를 없이 해주심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양이나 염소 중에 아름답고 흠 없는 놈을 골라 제단 앞에서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고기를 단위에 통으로 불살랐습니다. 그리하여 타오르는 연기 속에서 노한 하나님의 풀어진 얼굴을 보려 했습니다.

몰론 죄의 값이 죽음인 것을 양심적으로 아는 이상 죄를 청산하려면 죽음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을 그들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죽을 수는 없고, 죽는 의미를 표시하여 그 심정을 알아주기를 바라서 취한 의식이 곧 짐승의 피를 흘려 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생물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로 피를 제단에 뿌린 것입니다. 뿌린 짐승의 피는 곧 자기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시사회에서는 정말 사람을 잡아 제사한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에도 그 자취가 아직 '심청이 이야기'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사상이 진보됨에 따라 그것은 그만두고 짐승으로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민하는 유대인의 신전 안에서는 죽는 짐승의 비명이 그칠 날 없었고, 또 제단에서는 늘 선지피가 뚝뚝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것으로 양심을 평안케 할 수는 없었습니다. 짐승은 아무래도 사람은 아니요, 대제사장은 비록 전 민중을 대표한다 해도 나 자신의 맘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개 비유요, 식이요, 제도요, 기계지 산 인격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유치한 시대에 일시 양심의 위로를 아니 받은 것 아니나, 그것으로는 정말 양심을 완전히 죄의 권위에서 해방하여 영혼의 자유를 얻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도는 점점 복잡해가고 의식은 점점 엄중해가건만, 양심은 차차 더 괴롭고 무력할 뿐이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부 소수의 진실한 양심속에 반대가 일어나게 됐습니다. "이것 가지고는 아니 된다. " 그들은 더 인격적으로, 따라서 더 정신적으로 하나님에 접근하기를 애썼습니다. 아모스, 호세아로 시작되어 이사야, 미가, 에레미야, 제2 이사야 등으로 내려오는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교회와 의식제도에 관계 없는 자유신앙자들 이었습니다. 이들이 제사종교와 예수의 복음 사이에 다리를 놓은 사람들입니다. "나는 제사를 즐겨 하지 않고 자비를 즐겨한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 죄를 사했다 하라" "내 율법을 그들의 맘에 두리라" 하는 소리를 그들은 벌써 양심속에 들었습니다.

그러는 때에 예수가 나타나시어 폭탄적으로 한 선언이 "하나님은 아버지다" 하는 말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영이시다" 했습니다. 놀라운 혁명 아닙니까. 하나님이 만일 사랑의 아버지라면 그 앞에 죄란 것이 있을리 없습니다. 죄가 없는데 속죄제가 무슨 필요며, 벌벌 떨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만일 영이시라면 그 앞에 일체의 형식이 소용이 없고 오직 참으로 하는 양심이 요구될 뿐 아니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은 아버지라, 영이시라 하는 말을 듣고, 제사장과 교법사들이 분이 나 죽이려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의 종교가 토대에서부터 진동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목자 없는 양같이 헤메는" 민중을 보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네 죄를 사하였다" "평안하라, 두려워 말라" 했고, 사람들은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전 옛날 사람들이 죄란 것을 가슴에 꼭 안고, 그것을 피해보려고 눈을 감아도 보고, 달음질도 해보며, 애쓰면서 하지 못하던 것을 예수는 그 죄의 실재성을 빼앗음으로써 스스로 없어지게 했습니다. 죄의 실재성을 무엇으로 빼앗았나.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으로써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를 아버지로 아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로 안 것입니다.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한테 인격적인 태도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음으로써 그를 아버지로 알아보았고, 아버지를 앎으로써 그의 가슴에 사뭇 들어갔습니다. 거기 죄가 있을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품속으로서 왔노라 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죄는 믿지 않는 자에게만 있습니다. 죄가 따로 있는 것 아니라 믿지 않는 심정, 그것이 곧 죄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죄가 실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심정에, 생명의 근본 원리는 사랑이니 그 안에 정죄함이나 심판함이나 죽음이 있을 수 없다 믿는 맘에, 죄는 있을 곳이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