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6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출간 전 연재 1 : 네이버 포스트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출간 전 연재 1 : 네이버 포스트





비를 맞는 바보


대학 졸업반 때의 일이다. 싼 월세방이 있다는 친구의 말만 믿고 경기도 외곽에 있는 어느 종교 단체의 공동 거주지에 세를 들었다. 원룸 형태의 낡은 연립주택이었지만 방에 햇빛이 들고 문을 닫으면 완전히 독립된 공간이었다. 나무들 사이의 오솔길이 강으로 이어져 있어서 문학을 하는 나에게는 신이 준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학교도 가지 않고 밤에는 시를 쓰고 낮에는 주변을 산책했다.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장발을 한 낯선 자가 여름인데도 검은색 바바리코트를 입고(방이 추웠다) 자신들의 신성한 터전을 광인처럼 중얼거리며(시를 외운 것이었다) 어슬렁거리자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른 아침 여러 명이 예고도 없이 내 방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부정 탄다는 듯 신발도 벗지 않고 들어와서 나더러 당장 그곳을 떠나라고 요구했다.

나는 집주인에게 세를 냈기 때문에 몇 달은 살 권리가 있다고 예의 바르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곳이 무척 마음에 들어 가능하면 오래 살고 싶다고도 간청하며 나 자신이 시인이라고 밝혔다. 그것이 문제를 더 키웠다. 흥분한 그들은 ‘시인’을 ‘신’으로 잘못 알아듣고 급기야는 나에게 “마귀야, 마귀! 썩 물러가라!” 하고 고함치기 시작했다.

난해한 자작시 몇 편밖에 가진 것 없는 문학청년에게 ‘마귀’라는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결국 몇 푼 안 되지만 나에게는 거금인 남은 월세도 돌려받지 못한 채 떠나야만 했다. 내가 정문을 나설 때까지 그들은 팔짱을 끼고 서서 매의 눈으로 감시했다. 애초부터 잘못은 신앙 공동체 안에 겁 없이 뛰어든 이방인에게 있었지만, 세상으로부터 추방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신은 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시골길을 걷다가 연극부 후배와 마주쳤다. 그의 집이 그 동네에 있었다. 군인 담요와 책 뭉치를 들고 배회하는 나를 보자 그는 약간 경계 태세를 취했다.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초지종을 들은 후배는 자기 집으로 데려가더니, 내가 지쳐 보였는지 설탕 탄 물 한 그릇을 먹이고는 세들 곳을 물으러 다녔다.

그리하여 강변의 밭 한가운데 서 있는 무허가 창고에 싸게 세들 수가 있었다. 동네와 적당히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에게 또다시 배척당할 일도 없고 근처에 설탕물 타 주는 후배까지 있으니 든든했다. 전기가 없어 밤에 촛불을 켜고 지내야 하는 것 외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 밤에는 촛불의 심지를 들여다보거나 글을 쓰고, 한낮에는 랭보나 말라르메의 시를 외우며 먼 곳까지 한가롭게 걸어 다녔다.

이내 여름 장마가 닥쳤다. 먹구름이 창고 슬레이트 지붕 위에 드리워지고 천둥이 헛으름장을 놓더니 저녁부터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들리는 빗소리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밤중에 밖으로 나간 나는 기겁을 하고 놀랐다. 폭우에 급격히 불어난 강물이 금방이라도 밭과 창고를 삼킬 것처럼 저만치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동트기 전이라 어두운데도 물빛은 무서울 만큼 희게 빛났다.

모든 것이 불안하기만 한 시기였다. 졸업을 얼마 앞두고 있었지만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더 힘들게 느껴져,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앞이 내다보이지 않았다. 그 불안감을 가중시키며 저 앞에서 강물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때, 더 이상 밀려날 곳도 없는 두려움 속에서 나를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낡은 창고 앞에 서서 위협하듯 불어 오르는 강물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나는 시인이 아닌가!’ 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 모든 상황이 시를 쓰고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경험해야 하는 일들로 여겨지고 삶의 의지가 다시 솟았다.




그렇다, 빗소리를 들으며 촛불 아래 글을 쓰는 것은 시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이었다. 깊은 밤 홀로 강의 섬뜩한 물빛과 마주하는 것도, 폐렴을 개의치 않고 비를 맞는 것도 시인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작가는 비를 맞는 바보’라고 나탈리 골드버그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말했다. 폭우가 쏟아져 사람들이 우산을 펴거나 신문으로 머리를 가리고 서둘러 뛰어갈 때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비를 맞는 바보라는 것이다.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거나 시간에 맞춰 어딘가에 도착하기보다 무늬를 그리며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응시하는 것, 그것이 작가가 자신의 빛나는 순간을 붙잡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 중략 -



그 밤에 비를 맞으면서 나는 온 영혼을 다해 소리 내어 시를 외웠다. 그리고 나 자신이 ‘오갈 데 없는 처지’라거나 ‘공동체에서 쫓겨난 마귀’가 아니라 시인이라고 생각하자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이, 빗줄기에 춤을 추는 옥수수 잎이, 촛농이 떨어지는 창턱까지도 축복처럼 느껴졌다. 그런 시적인 순간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삶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이 깨달음은 그날 이후에도 나를 붙들어 주었다. 언제 어디서나 나 자신이 시인임을 기억할 때, 모든 예기치 않은 상황들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때 삶이라는 이 사건이 글을 쓰기 위한 선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는 인생 본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잃지 않는 길이었다.

삶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
- 비를 맞는 바보가 되라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내게 독자란, 글을 나눠 읽는 동지이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을 만날 때 나는 같은 인간 존재로서의 동지애를 느낀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여행을 하다가 칠레의 탄광에 들른 적이 있다. 그때 갱도에서 일하던 얼굴이 새까매진 광부가 다가와 네루다를 와락 껴안으며 외친다. ‘당신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런 동지가 있을 때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굳건해진다.”
- 류시화,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표제작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외에 「비를 맞는 바보」 「축복을 셀 때 상처를 빼고 세지 말라」 「신은 구불구불한 글씨로 똑바르게 메시지를 적는다」 「불완전한 사람도 완벽한 장미를 선물할 수 있다」 「인생 만트라」 등 삶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시인의 언어로 풀어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진실한 고백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좋아」, 세상이 자신을 매장시킨다고 생각될 때 그것을 파종으로 바꾸는 「매장과 파종」, 어차피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고 또 하고 끝까지 할 수밖에 없다는 「마법을 일으키는 비결」도 실었다. 흔히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하지만, 어떤 붓은 쇠처럼 깊게 새기고 불처럼 마음의 불순물을 태워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사색하게 한다. 그림_Miroco Machiko ©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저자 류시화

출판 더숲

발매 2019.03.05.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출간 기념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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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화) ~ 3/4(월)
매일 1회씩 총 6회(일요일 제외)


이벤트 기간
~3/4(월)

당첨자 발표
3/6(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시리즈 포스트에 발표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는
3월 초 출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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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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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파크: https://bit.ly/2SNnP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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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지은이) | 더숲 | 2019-03-05







반양장본 | 256쪽 | 139*204mm | 386g | ISBN : 9791186900789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국내도서 > 에세이 > 명사에세이 > 문인



시집, 산문집, 여행기, 번역서로 변함없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류시화 시인의 에세이. 이번 책의 주제는 '삶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이다. 표제작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외에 '비를 맞는 바보' '축복을 셀 때 상처를 빼고 세지 말라' '신은 구불구불한 글씨로 똑바르게 메시지를 적는다' '불완전한 사람도 완벽한 장미를 선물할 수 있다' '인생 만트라' '자신을 태우지 않고 빛나는 별은 없다' 등 삶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시인의 언어로 풀어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진실한 고백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좋아', 어차피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고 또 하고 끝까지 할 수밖에 없다는 '마법을 일으키는 비결'도 실었다.

만약 우리가 삶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다면, 지금의 막힌 길이 언젠가는 선물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걸 알게 될까?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자신은 문제보다 더 큰 존재라고. 인생의 굴곡마저 웃음과 깨달음으로 승화시키는 통찰이 엿보인다. 흔히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하지만, 어떤 붓은 쇠처럼 깊게 새기고 불처럼 마음의 불순물을 태워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사색하게 한다.





1
비를 맞는 바보
새는 날아서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도
그것을 큰일로 만들지 말라
인생 만트라
축복을 셀 때 상처를 빼고 세지 말라
신은 구불구불한 글씨로 똑바르게 메시지를 적는다
살아 있는 것은 아프다

2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왜 이것밖에
마법을 일으키는 비결
나의 힌디어 수업
미워할 수 없는 나의 제자
융의 돌집
불완전한 사람도 완벽한 장미를 선물할 수 있다

3
매장과 파종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좋아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나
내면 아이
나의 품사
내 영혼, 안녕한가
다시 만난 기적

4
어떤 길을 가든 그 길과 하나가 되라
순우리말
원숭이를 생각하지 말 것
어서 와, 감정
렌착
사과 이야기
직박구리새의 죽음

5
누구도 우연히 오지 않는다
꽃이 피면 알게 될 것이다
60억 개의 세상
연민 피로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나는 왜 너가 아닌가
나예요

6
진실한 한 문장
낙하산 접는 사람
진짜인 나, 가짜인 너
자신을 태우지 않고 빛나는 별은 없다
우리가 찾는 것이 우리를 찾고 있다
에필로그_하늘 호수로부터의 선물





첫문장
대학 졸업반 때의 일이다.





“솔직히 말씀드려 마음을 빼앗길 만큼 이야기들이 너무 좋았습니다. 끝까지 듣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습니다.”

시바 신이 화를 누르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이 카일라스산을 떠나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서 그 이야기들을 전하라.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 이야기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결코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

그리하여 신하는 히말라야 신전에서 추방당했으며, 이후 온 세상을 방랑하며 자신이 아는 이야기들을 인간들에게 들려줘야만 했습니다.
모든 작가는 이 신하처럼 이야기 전달자의 숙명을 짊어진 사람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늘 새롭고 재미있고 깨달음과 의미가 담긴 이야기를 들려줘야만 하는. 그래서 독자가 첫 번째 이야기를 읽고 나면 그다음 이야기도 읽고 싶게 만들어야만 하는.

우리는 저마다 자기 생의 작가입니다. 우리의 생이 어떤 이야기를 써 나가고 있는지, 그 이야기들이 어떤 의미이며 그다음을 읽고 싶을 만큼 흥미진진한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우리 자신뿐입니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 이어 새 산문집을 냅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 「저자 서문 ‘자기 생의 작가’」 중에서

내가 물었다.
“왜 나한테 말해 주지 않았지? 랑탕 지역의 환경을 잘 알면서 어떤 장비가 필요한지 왜 조언해 주지 않았어?”
친구가 말했다.
“직접 경험하는 것이 너에겐 더 좋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트레킹을 할 테니까 말야. 도중에서 필요한 장비와 도구들을 구할 수 있으리란 걸 난 알고 있었어.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으리란 것도.”
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은 우리 안의 불순물을 태워 버린다. 만약 그 친구가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면 랑탕 트레킹은 내 혼에 그토록 깊이 각인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때 그 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믿는다. 경험자들의 조언에 매달려 살아가려는 나를 직접 불확실성과 껴안게 하려고. 미지의 영역에 들어설 때 안내자가 아니라 눈앞의 실체와 만나게 하려고. 결국 삶은 답을 알려줄 것이므로.
- 「새는 날아서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도」 중에서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비를 맞은 것은 처음이었다. 바퀴까지 물에 잠긴 오토릭샤가 늪인지 웅덩이인지 모를 곳을 종횡무진으로 달리니 사방의 비를 다 맞는 기분이었다. 어쩌다 보이는 물체가 소인지 사람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쇠창살을 꽉 움켜쥔 내 두려움을 느꼈는지, 늙은 릭샤 운전수가 어깨너머로 말했다.
“낫싱 스페셜(Nothing special)!”
‘큰일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우기가 긴 남인도에서는 12월에도 종종 폭우가 쏟아진다). 그 한마디 말이 부정적인 상상으로 내면의 전투를 벌이는 내 마음을 한순간에 바꿔 놓았다. ‘나는 여행자 아닌가? 아열대 나라가 아니면 어디서 이런 비를 맞아 보겠는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 「그것을 큰일로 만들지 말라」 중에서

전에 알던 한 여성은 음식을 먹기 전에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하고 주문을 외었다. 맛을 변화시키는 특별한 마살라(양념)를 뿌리듯 자못 진지해서 보는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 때도 그 주문을 왼다고 했다. “그렇게 한다고 맛없는 음식이 정말로 맛있어지겠어?” 하고 묻자, “그럼요, 이건 강력한 만트라예요!” 하고 말했다.
자신에게 거는 마법의 주문, 당신의 인생 만트라는 무엇인가? 그 단어와 문장 안에서 긍정이 발효되고 있는가? - 「인생 만트라」 중에서

우리는 신에게, 삶에게 묻곤 한다. ‘왜 나에게는 이것밖에 주지 않는 거지?’ 그러나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답한다. ‘이것이 너를 네가 원하는 것에게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 속삭임을 듣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과의 내적인 논쟁에 시간을 허비한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스스로가 자신의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자신이 결코 팔을 갖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새의 몸에서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 「왜 이것밖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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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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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2012년 경희문학상
최근작 :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인생 우화>,<시로 납치하다> … 총 138종 (모두보기)
소개 :
시인.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한동안 시 창작을 접고 인도, 네팔, 티베트 등지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오쇼,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바바 하리 다스, 달라이 라마, 틱낫한, 무닌드라 등 영적 스승들의 책을 번역 소개하는 한편 서울과 인도를 오가며 생활해 왔다.

1991년 첫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1996년 두 번째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발표했다. 세상을 신비주의적 차원에서 바라보...












미지의 책을 펼치는 것은 작가에 대한 기대와 믿음에서다. 시집, 산문집, 여행기, 번역서로 변함없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류시화 시인의 신작 에세이. 이번 책의 주제는 ‘삶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이다.

표제작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외에 「비를 맞는 바보」 「축복을 셀 때 상처를 빼고 세지 말라」 「신은 구불구불한 글씨로 똑바르게 메시지를 적는다」 「불완전한 사람도 완벽한 장미를 선물할 수 있다」 「인생 만트라」 「자신을 태우지 않고 빛나는 별은 없다」 등 삶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시인의 언어로 풀어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진실한 고백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좋아」, 어차피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고 또 하고 끝까지 할 수밖에 없다는 「마법을 일으키는 비결」도 실었다.

만약 우리가 삶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다면, 지금의 막힌 길이 언젠가는 선물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걸 알게 될까?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자신은 문제보다 더 큰 존재라고. 인생의 굴곡마저 웃음과 깨달음으로 승화시키는 통찰이 엿보인다. 흔히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하지만, 어떤 붓은 쇠처럼 깊게 새기고 불처럼 마음의 불순물을 태워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사색하게 한다.

시인의 언어로 쓴,
삶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는 인생에 다 나쁜 것은 없다는 작가의 경험과 깨달음을 담고 있다. ‘시인’을 ‘신’으로 알아들은 사람들 때문에 신앙 공동체에서 쫓겨난 일화, 화장실 없는 셋방에 살면서 매일 근처 대학병원 화장실로 달려가며 깨달은 매장과 파종의 차이, ‘나는 오늘 행복하다’를 수없이 소리내어 반복해야 했던 힌디어 수업, ‘왜 이것밖에 주지 않느냐?’는 물음에 ‘이것만이 너를 저것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어떤 목소리, 신은 각자의 길을 적어 주셨으며 그 표식을 따라가면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 가장 힘든 계절의 모습으로 나무를 판단해서는 안 되며 꽃이 피면 알게 되리라는 진리.

어떤 이야기는 재미있고, 어떤 이야기는 마음에 남고, 어떤 것은 반전이 있고, 또 어떤 것은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이다. 시인은 단 한 줄의 문장으로도 가슴을 연다.

류시화는 명상서적을 주도적으로 번역하고 영적 스승들을 만나 왔지만 주장이나 이념이 먼저인 작가가 아니다. 다만 자신을 성장시킨 우연한 만남들, 웃음과 재치로 숨긴 만만치 않은 상처의 경험들, 영혼에 자양분이 되어준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때로는 폭소를 터뜨리게 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눈물짓게 한다. 글들을 읽다 보면 저자가 ‘이야기 전달자’를 넘어 ‘이야기 치료사’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는다. ‘삶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알아 가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대학 졸업반 때 저자는 싼 월세방이 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경기도 외곽의 신앙 공동체에 세를 든다. 낡은 원룸이지만 독립된 공간이고, 강으로 난 오솔길이 있어서 신이 준 선물이라 여긴다. 하지만 장발을 한 이방인이 신성한 터전을 어슬렁거리자 공동체 사람들이 몰려와 당장 떠나라고 요구한다. 사정을 봐 달라고 간청하며 시인이라고 밝히자 사람들은 ‘시인’을 ‘신’으로 잘못 알아듣고 “마귀야, 썩 물러가라!” 하고 고함친다. 결국 남은 월세도 돌려받지 못한 채 쫓겨난다.

하지만 신은 그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 갈 곳이 없어 시골길을 배회하다가 마주친 연극부 후배가 강변 밭의 무허가 창고에 살도록 주선해 준다. 행복도 잠시, 여름 장마가 닥치고 한밤중에 밖으로 나가니 폭우 속에 강물이 무섭게 불어나고 있다. 더 이상 밀려날 곳도 없는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위협하듯 불어 오르는 강물을 보며 그는 문득 자각한다. “나는 시인이 아닌가!” 하고.

저자는 ‘작가는 비를 맞는 바보’라는 소설가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깨달음을 이렇게 정리한다.
“나 자신이 ‘오갈 데 없는 처지’라거나 ‘공동체에서 쫓겨난 마귀’가 아니라 시인이라고 생각하자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이, 빗줄기에 춤을 추는 옥수수 잎이, 촛농이 떨어지는 창턱까지도 축복처럼 느껴졌다. 그런 시적인 순간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신은 구불구불한 글씨로 똑바르게 메시지를 적는다”

한 권이 책이 우리를 껴안을 때가 있다. 독자는 읽는 순간 느끼고, 그 느낌을 믿는다. 글 속에 글쓴이의 진정성이 얼마나 담겨 있는지를. 어느 인터뷰에서 저자는 말한다.
“내게 독자란, 글을 나눠 읽는 동지이다. 내 글을 읽은 사람을 만날 때 나는 같은 인간 존재로서의 동지애를 느낀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여행을 하다가 칠레의 탄광에 들른 적이 있다. 그때 갱도에서 일하던 얼굴이 새까매진 광부가 다가와 네루다를 와락 껴안으며 외친다. ‘당신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런 동지가 있을 때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굳건해진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도 무너지거나 절망한 적이 많다. 그럴 때 나를 일으켜 세워 준 사람들, 내가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가리켜 보인 이들 모두가 나의 스승이다.”

저자는 늙은 암소 한 마리에만 겨우 의지해 아무 희망 없이 살아가던 어떤 가족이 암소가 절벽에 떨어져 죽은 후 삶의 반전을 시도해 비로소 인생 최고의 행운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안전하게 살아가려고 마음먹는 순간 삶은 우리를 절벽으로 밀어뜨린다. 파도가 후려친다면 새로운 삶을 살 때가 되었다는 메시지이다. 어떤 상실과 잃음도 괜히 온 게 아니다. ‘신은 구불구불한 글씨로 똑바르게 메시지를 적는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는 지금 절벽으로 밀어뜨려야 할 어떤 암소를 가지고 있는가? 그 암소의 이름은 무엇인가? 내 삶이 의존하고 있는 안락하고 익숙한 것, 그래서 더 나아가지 못하게 나를 붙잡는 것은.”

“불완전한 사람도 완벽한 장미를 선물할 수 있다”
자신이 결코 팔을 갖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새의 몸에서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매장과 파종의 차이는 있다고 나는 믿는다. 생의 한때에 자신이 캄캄한 암흑 속에 매장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어둠 속을 전력질주해도 빛이 보이지 않을 때가. 그러나 사실 그때 우리는 어둠의 층에 매장된 것이 아니라 파종된 것이다. 청각과 후각을 키우고 저 밑바닥으로 뿌리를 내려 계절이 되었을 때 꽃을 피우고 삶에 열릴 수 있도록. 세상이 자신을 매장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파종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매장이 아닌 파종을 받아들인다면 불행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 「매장과 파종」 중에서

좋은 글은 마음을 맑게 한다. 그래서 마음을 치유한다. 시인의 글답지 않게 형용사와 부사를 자제한 문장들, 눈앞에 그림을 그리는 듯한 생생한 묘사가 독자를 ‘몰입’시킨다. 재치와 웃음이 담긴 문장들, 가슴 뭉클한 이야기들이 한 편 한 편 완결된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 책을 덮은 후에도 여운이 오래 남는다. 때로는 깊은 숨을 내쉬느라, 살아온 날을 뒤돌아보고 살아갈 날을 내다보느라 페이지 넘기는 손이 드문드문 멈출 때도 있다. 어둠 속에서 노래하는 새처럼 책갈피에서 숨쉬는 떨림과 울림이 있다. 저자의 인생 여정이 담긴 글인데도, 읽는 이는 자신의 숨소리가 들린다. 작가의 상속자는 독자라는 말은 옳다. 빙하기가 와도 삶을 사랑하는 심장은 뜨겁다.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세상과 인생을 보는 저자의 시각에 공감하고 그 세계에 끌린다. 분명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작가 류시화,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며 변함없이 좋은 글을 발표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저자는 그것을 ‘분투노력’이라고 말한다.

“나는 타고난 재능을 지닌 작가나 번역가가 전혀 아니기 때문에 매일 노력을 쏟지 않으면 안 된다. 첫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한 단락도 끝내지 못하고 오전을 다 보낼 때도 있다.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면 한 편의 글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영감은 그저 매일 계속 쓰는 것이다. 멋진 소재가 그냥 굴러들어오는 행운은 매번 나를 비켜 간다. 집필의 신이 내 집필실에는 안 오고 다른 작가들의 집필실만 편애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당신과 나, 우리는 어차피 천재가 아니다. 따라서 하고 또 하고 끝까지 해서 마법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
- 「마법을 일으키는 비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