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0

[단독]‘비폭력·평화주의’ 양심적 병역거부 첫 인정 - 경향신문



[단독]‘비폭력·평화주의’ 양심적 병역거부 첫 인정 - 경향신문




[단독]‘비폭력·평화주의’ 양심적 병역거부 첫 인정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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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2.19


지난해 6월28일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라고 선고한 뒤 시민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환영 입장을 밝히고 있다. 권도현 기자


종교가 아닌 다른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 법원 판결이 처음으로 나왔다. ‘종교적 양심’ 외 ‘비폭력·평화주의 등 신념’을 양심으로 인정한 첫 판단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지난해 11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형사처벌해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한 뒤 하급심에서 100여건의 무죄 판결이 나왔다. 모두 여호와의증인과 종교적 양심을 근거로 내린 무죄 선고였다.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수원지법 형사5단독 이재은 부장판사는 병역법과 예비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20대 남성 ㄱ씨에게 지난 14일 무죄를 선고했다. ㄱ씨는 현역 군 복무를 마친 뒤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10여차례 예비군·동원훈련에 불참해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ㄱ씨가 병력동원훈련소집 통지서를 받은 사람이 ‘정당한 사유’ 없이 지정된 일시에 입영하지 않으면 형사처벌하도록 한 병역법 제90조 등을 어겼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ㄱ씨는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전쟁을 위한 군사훈련에 참석할 수 없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므로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반박했다.


ㄱ씨는 현역 군복무는 끝내고 예비군 훈련부터 거부했다는 점에서 통상적이지 않았다. 여호와의증인 신도로서 종교를 병역거부의 이유로 댄 사례도 아니었다.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2000년 이후 80여명으로 집계되지만 무죄가 나온 적은 없다. 재판부는 ㄱ씨가 진정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맞는지를 확인했다.


심리 결과 재판부는 ㄱ씨의 병역거부가 양심에 의한 것으로 병역거부 처벌 예외사유인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관계에 따르면, ㄱ씨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그로 인해 고통을 겪은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해 어려서부터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됐다. 미군이 헬기에서 기관총을 난사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동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여러 매체를 통해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잘못이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고 그것은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게 됐다.


ㄱ씨는 입대 거부를 결심했지만 어머니와 친지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양심과 타협해 입대했다. 신병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신이 적에게 총을 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고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됐다. 적에게 총을 쏠 수 없는 자신이 군에 복무하는 것은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료, 나아가 국가와 국민에게 큰 해가 될 수 있다고 깨닫고 입대를 후회했다. ㄱ씨는 회관관리병으로 자원해 근무했다.


ㄱ씨는 전역 전 부대에서 다른 병사들로부터 폭력으로 괴롭힘을 당하던 후임 병사가 탈영해 자신을 제외한 모든 동료 병사들이 처벌을 받는 사건을 목격했다. 폭력에 반대하면서도 소극적으로 방관했던 자신의 행동이 양심에 반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기회주의적인 것이라고 반성했다.


2013년 2월 제대한 ㄱ씨는 예비역에 편입됐으나 더 이상 양심을 속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훈련에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ㄱ씨는 수년간 수십회 조사와 재판을 받았다. 안정된 직장을 구할 수 없어 일용직이나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재판부는 “ㄱ씨가 자신의 신념을 형성하게 된 과정을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며 “수년간 계속되는 조사와 재판, 사회적 비난에 의해 겪는 정신적 고통과 안정된 직장을 얻기 어려워 입게 되는 경제적 손실, 형벌의 위험 등 ㄱ씨가 예비군 훈련을 거부함으로써 받게 되는 불이익이 예비군 훈련에 참석함으로써 발생하는 시간적, 육체적, 경제적 불이익보다 현저히 많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형사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선고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재판부는 이어 “오히려 ㄱ씨는 유죄로 판단되는 경우 예비군 훈련을 면할 수 있는 중한 징역형을 선고받기를 요청하고 있다”며 “ㄱ씨가 훈련을 거부한 때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선고되기 전이라는 점까지 종합해보면 ㄱ씨의 예비군 훈련 거부가 양심에 의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예비군 훈련 거부에 대해서는 명확히 판단하지 않았지만 재판부는 국민의 국방의 의무를 구체화하기 위해 마련된 법 조항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에 현역 입영 거부와 마찬가지로 예비군 훈련 거부도 인정된다고 했다.



이번 판결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종교에 국한하지 않고 비폭력·평화주의 신념 등에 따른 경우에도 폭넓게 인정했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크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따르면 헌법 제19조에서 보호하는 양심이란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지지한 마음의 소리로서 절박하고 구체적인 것을 말한다. 단순히 선량하다거나 올바르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체복무제 법안을 만든 국방부는 용어를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병역거부’로 변경하는 등 양심의 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해왔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2190600001&code=940100&fbclid=IwAR1eh_pf6qR5O1BZ_nZ3vYE16JGyj-zddzaxHcUkFtOoqQjcCuaEkdkaBvs#csidx7a067afe814558fa0f263376123dce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