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3

부천 풀무원에서 우리나라 최초 유기농 단체 정농회가 - 콩나물신문



부천 풀무원에서 우리나라 최초 유기농 단체 정농회가 - 콩나물신문





부천 풀무원에서 우리나라 최초 유기농 단체 정농회가
원혜덕 | kongpaper@hanmail.net

승인 2015.05.04


(원혜덕 님은 부천에서 풀무원을 만든 원경선 옹의 딸이자, 원혜영 국회의원의 여동생입니다. 남편 김준권 님과 경기도 포천에서 농장을 꾸려 나갑니다. - 편집자 주)

어제, <아름다운마을>공동체 신문을 만드는 최소란 선생이 기독출판사에서 일하는 두 사람의 마을기자 임안섭, 김준표 선생과 같이 찾아와 오후까지 머물다 갔다.




40년간 <정농회>를 지켜보고 활동해온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 찾아왔다고 했다. 원경선 선생님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우리집을 방문하게 되어 기쁘다고도 했다.




<아름다운 마을> 공동체는 나와 우리의 변화는 더불어사는 공동체적 삶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는 청년들의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그 꿈을 구체화하기 위해 2002년부터 수유 5동에 터전을 잡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농>을 기반으로 하는 터전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겼고 제 2의 터전 홍천을 마련하여 상당수 가족이 이주하였다. 홍천으로 이주하기 전에 공동체의 중심인 최철호 목사님이 20명 가량의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우리집을 찾아왔다. 농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아버지와 남편에게서 농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왔다고 했다.

현재 홍천 <아름다운마을> 공동체에는 농생활연구소, 생태건축 흙손 등이 있고 학습, 생활, 노동, 놀이 등의 삶을 함께 가르치는 초등과 중등과정의 아름다운마을학교가 있다.

<정농회>는 1976년 1월에 부천 도당리 풀무원에서 탄생하였다. 그 2년 전에 아버지께서는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 일이 있어 다녀오시는 길에 일본에 들러 유기농단체 애농회의 창립자인 고다니 쥬니치 선생을 찾아가셨다. 말이 통하는 것을 느낀 두 사람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고 고다니 선생은 "이제까지 많은 한국 사람들이 초청하겠다고 해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는데 당신을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한국에 가고 싶어졌다. 초청해 준다면 방문하고 싶다" 고 했다.

아버지는 다음해 9월에 그 분을 당신 농장인 도당리 풀무원으로 초청하여 3박4일간의 강연회를 열었다. 그 때 아버지는 지인 30여명을 불러 함께 듣자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는 오래된 소 집을 급히 개조하여 마루를 만들었다. 그 마루에서 사람들은 4일간 강의듣고 밥 먹고 잠을 잤다.

고다니 선생은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아 고통을 준 것을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애농회의 회장들은 정농회에서 인삿말을 할 때 마다 이와 같은 사죄를 한다.

고다니 선생은 농약과 제초제를 사용하는 일본의 죽음의 농사를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10년 있으면 한국도 틀림없이 일본과 같이 농약과 공해의 피해가 나타날 것인데 하루 빨리 돌아서라고 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큰 사회문제가 되었던 이따이이따이병 (아프다아프다병), 미나마타병 등의 공해병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농약과 제초제를 뿌리는 것, 공해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다음해인 1976년 1월에 아버지는 다시 고다니 선생을 초청하고 전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이번에는 겨울이라 추워서 전에 쓰던 마루에서는 잘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양계장 하나를 집으로 개조하셨다. 말이 개조이지 사실상 집을 하나 짓는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공동체를 꾸려 나가시면서 빚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것을 보아온 나는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다렸다 봄에 하시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해 겨울은 왜 그리 추웠던지! 바닥을 만들고 벽돌을 쌓는데 인부들은 손이 시려서 장작불 옆을 떠나지 못했다. 일의 능률이 날 리가 없었다. 어머니와 식구들이 지은 밥을 해나르는 나도 손발이 시려워 동동거리던 기억이 난다. 어쨋건 양계장으로 만든 기다란 집이 완성되었고 4일간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풀무원 공동체의 연수생이었기에 그 모임에 참가한 미래의 내 남편은 강의실에 놓인 여러 개의 연탄 난로를 끊임없이 갈아대고 모임의 시중을 하느라고 바빴다고 한다.

마지막 날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제까지 잘못된 농사를 지었다고, 이제부터는 농약과 제초제,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농사를 하겠다고 결심을 했고 모임을 만들어 서로 힘을 얻자고 했다. 사람들은 모임의 이름을 한국 애농회로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막 통과되려고 할 때 아버지가 일어나셨다. "길게 보아야 한다. 한국 애농회라고 하면 일본 애농회의 한국 지부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만이 아닌 다음 세대까지 생각해서 이름을 지어야한다. 바른 농사를 짓는다는 의미의 정농회가 어떠냐?" 하고 말씀하셨다. 듣고보니 맞는 말이라 모두 동의를 해서 정농회라는 말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당연히 아버지가 정농회의 회장을 맡아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는 평생 전도를 하기로 하나님께 약속한 사람이다. 정농회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나는 두 가지 일을 다 잘 하는 사람이 못 된다."하면서 그 자리에 있는 다른 분을 추천하셨다. 그러면서 정농회를 위해 할 수 있는 다 하시겠다고 했다. 부회장은 맡아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에 아버지는 승락하여 10년 넘게 정농회 부회장으로 계셨다.

이렇게 해서 1976년 1월, 부천 풀무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유기농 단체 정농회는 생겨났다. 아버지는 겨울 농한기에 단기대학이라고 이름을 붙여 해마다 사람들을 풀무원으로 불러 공동체 연수생들과 함께 공부하게 하셨다. 내국인 강사들을 초청하여 지식과 인식을 넓히게 하고 일본에서도 강사를 초청하여 유기농업에 필요한 실제적인 지식도 배우게 했다. 함석헌 선생님, 문익환. 문동환 목사님, 한완상 박사님 등 가깝게 지내시는 소위 민주인사들을 강사로 초청하시는 바람에 형사들이 쫒아오기도 했다.

▲ 정농회 창립 20주년 때. 마이크를 잡고 통역하는 분이 아버지이고, 옆에 있는 분이 고다니 쥬니치 선생이다.


그 때의 젊은 사람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유기농업의 지도자가 되었다.
지금은 유기농업이 사람과 자연과 생태를 살리기 위한 너무도 당연한 일로 여기지만 초기의 사람들은 이를 실천하고 지켜나가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다.

정농회가 창립될 때 남편은 가장 젊은 회원이었다. 그 후 농사 일을 하면서 정농회 총무, 부회장으로 오래도록 정농회 일을 도왔다. 몇 년 전에는 회장이 되어 작년까지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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