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영학의 탈춤 미학
야곱은 밤새 하느님과 악을 쓰면서 씨름하다가 축복을 받았지만 이제 저도 하느님하고 어떤 씨름을 해볼까 하는데, 이제 늙어 기운이 없어서 할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우리 조상들이 가르친 민중들의 춤! 우리 학생들이 즐겨 추는 탈춤, 이제 그거나 배워야지 그런 생각입니다.
- 1985년 11월, 이화여대 교수 정년 퇴임 강연에서 하신 말씀이다. 하느님과 탈춤 추기를 소망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
1921년 생이신 현영학 교수
학부 2-3학년(1977-78년) 무렵, 목요강좌에 강사로 오셔서 봉산탈춤의 신학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셨다. 매우 특별한 강연이어서 지금까지 인상에 남는다. 그동안 예술신학, 기독교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면서 두어 번 언급한 바 있지만, 짧은 글이었고 성서에서 언급된 춤의 사례에서 출발하여 서양적 관점에서 성찰했을뿐, 한국의 민족-민중 미학의 연구를 공부하지 못한 상태였다. 성서, 신학 사전에 '춤'(dance, Tanz) 항목을 찾을 수 없다. 성서와 신학 연구자들이 얼마나 춤에 대해 인색한가. 이제 채희완, 조동일, 김지하 등의 연구를 읽고 현영학의 탈춤 신학을 한국의 민족-민중미학사에서 자리매김하고 싶은 생각이다. 최근 도올 김용옥 교수께서 안병무의 신학을 조선사상사에 좌정시키지 않았던가.
현영학 교수의 경험을 나 자신도 공감한다.
이분이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회를 다닐 정도였지만, 우리나라 음악은 지금도 잘 모른다고 말씀한다. 이유인즉 자랄 때 그렇게 자랐으니까, 라고 말한다. 이중 차단을 당한 셈이다. 하나는 일본 사람들이 그런 것을 배우면 민족의식이 계속된다고 못 배우게 했고, 둘은 기독교의 영향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민요라든지 타령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배우면 나쁜 걸로 알아서 그건 저속한 것, 술하고 여자하고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못 배우게 했습니다. 협소한 교리와 청교도적 도덕관이 전통 종교 및 문화와 예술에 접근할 수 있는 길 자체를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장신대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갔을 때, 학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신 모교수도 고등학교 때까지 청교도를 그리 중하게 생각하면서 자랐는데, 대학 1년 한 교수가 청교도 때문에 영문학이 발전, 성장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현영학은 동시대 민중 신학자인 안병무와 서남동에 비해 연구가 적다. 그의 저술 활동이 이 책 한 권 분량이니 그럴 것이라고도 생각되지만, 서남동의 저술도 많지 않다, 다작은 아니다. 그리고 사상의 고유성과 우수성은 양(量)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알아주는 후학들과 영향력이 관건이다. 이 책 안에서도 탈춤과 직간접 연결된 글은 서너 개뿐이지만, 제목은 유일무이한 의미 주름으로 다가오는 『예수의 탈춤』이고 전공 분야는 그리스도교 사회윤리다. 접음과 펼침의 운동을 할 때다.
현영학이 한국인의 몸을 깨우친 경험.
“하루는 우리 대강당에서 학생들이 한국 무용을 하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제 어깨하고 엉덩이 근육이 움직거리는 거였지요. 그때 제가 느낀 게 ‘아! 내 머리는 서양 머리이고 내 몸은 한국 몸이구나! 였습니다.” 서양과 한국, 한국과 서양의 구분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서양 것들이 더 친숙하고 한국 것이라는 것들이 더 낯설다는 것이다. 事情이 그렇다는데 어쩌랴, 무가내(無可奈)다. 그래도 살과 피와 땅이 그리운 사람들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탈근대적 상황과 지구적 실정(實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한국조직신학회에서 1년 세 차례 학술발표회를 하는데 20여 편의 논문 중, 한국이나 동양 관련 논문은 두세 편에 지나지 않는다. 사정은 여전히 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