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3

알라딘: 3 STOP THINKING 현대의 붓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모든 것

알라딘: STOP THINKING 현대의 붓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모든 것


STOP THINKING 현대의 붓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모든 것  |
 

비교종교학자로서 그동안 수많은 저서와 강연을 통해 종교와 인간, 윤회와 환생 등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과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최준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그가 보고 읽고 듣고 느끼고 깨달은 종교의 모든 것과 종교를 떠나 존재할 수 없는 인간 운명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를 ‘최준식 교수의 메타 종교로 가는 마지막 춤’이라는 시리즈 3권의 책으로 엮었다.

불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붓다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넌 다음 이 사람은 이 뗏목을 가지고 가야 하는가, 아니면 놓고 가야 하는가?’ 이에 제자들은 당연히 뗏목을 놓고 가야 한다고 대답했다. 붓다가 이어서 말했다. ‘내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여러분들이 깨달음을 얻고 나면 내 가르침도 더 이상 필요 없다.’

이것은 불교의 우수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다. 불교는 자신마저 부정하고 넘어서라고 가르치는 탁월한 종교라는 것이다. ‘메타 종교로 가는 마지막 춤’ 시리즈 세 번째 책은 바로 이 진리를 실현한 사람과 그의 사상을 소개한 책이다. 그 사람은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다. 그는 인도 구루 중에 가장 과격한 사람이다.


목차


전체 서문 | “메타 종교” 시리즈를 내며

책을 또 쓰게 된 몇 가지 이유 | 다시 한 번 유지를 소개하며


서문 | 왜 다시 유지인가
- 상상초월, 듣도 보도 못한 절세의 스승
- 붓다가 이 시대에 다시 온다면
- 사람들은 유지를 어떻게 기억할까?

[제1부] 현대의 붓다, 유지! - 왜 우리 시대의 최고 각자라고 할 수 있는가

첫 번째 이야기  이른바 쿤달리니 에너지와 유지의 그것이 각성하는 과정

종교 체험과 쿤달리니 에너지
- 진정한 종교 체험은 심신의 전변(全變)이 있어야
- 쿤달리니 에너지와 그 폭발이란
- 쿤달리니 각성의 여파
유지의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하는 과정
- 부화기를 거쳐 드디어 대폭발 앞에서

두 번째 이야기  1967년, 가장 강한 종교적 체험! 재난 같은 7일 간의 대폭발

쿤달리니 에너지의 대폭발
- 첫 번째 날,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나다
- 두 번째 날, 생각이 끊어지다
- 세 번째 날, 감각이 끊어지다
- 네 번째 날, 보이는 것과 하나가 되다
- 다섯 번째 날, 소리와 하나 되다
- 여섯 번째 날, 몸이 사라지다
- 일곱 번째 날, 완전히 죽다!

세 번째 이야기  대폭발 이후에도 계속된 폭발, 그리고 그가 얻은 것

범람하는 강물처럼
- 이상 징표들, 몸에 나타난 변화
- 생각의 종말, 아즈나 차크라가 재가동하다
- 생각은 여러분이 죽은 후에야 없어질 것
성(性)을 넘어서다
- 미스터리한 성
-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인간의 성욕
- 성욕을 넘어선 모습
- 그래서 진정한 각자(覺者)

1부를 정리하며 / 현대의 붓다, 유지

[제2부]  진정한 각자의 모습, 종교적인 모든 것을 거부한 소탈한 일상

첫 번째 이야기 종교적인 모든 것을 거부한 각자(覺者)

반 구루, 반 종교인, 철저한 파괴자
- 거창한 호칭을 모두 거부, 이름으로만 불려
- 어떤 조직도 만들지 않아
- 어떤 책도,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아
- 어떤 수련법도 남기지 않아

두 번째 이야기  일상에서 보이는 참다운 각자의 모습, 너무나 소탈한 성자

소탈하기 짝이 없는 일상
- 아주 사소한 일에도 그는
- 그에게 던지는 성역 없는 질문들
- 돈! 돈을 찬양하고 숭배하라!
- 철저하게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일상
- 그다운 최후! 아무 흔적 없이 철저하게 혼자 가
2부를 정리하며 / 비범함 속 평범 그 자체

[제3부]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의 생애, 나서부터 몸을 벗기까지

첫 번째 이야기  세상에 나와서 -평범하고 비범하고

생애 전반부부터 진즉에 깨달은 결론
- 탄생과 부모, 그리고 외할아버지
- 위선에 젖은 종교적인 어른들을 향한 거침없는 폭로
- 본능적인 강력한 욕망들에 관한 솔직한 태도
- 당대의 두 각자가 만나다! 라마나 마하르쉬와의 만남
- 대학, 결혼, 그리고 네 명의 아이
추앙 받는 최고의 각자에게 던진 거침없는 질문들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의 만남, 서로 다른 태도
- 지두와의 격렬한 토론, 과감한 결별

두 번째 이야기  때를 기다리며 - 나쁘고 좋고 이상하고-

드디어 인도를 떠나다
- 백수 선언과 아주 기이한 일
- 가정을 정리하다
부유하는 여정 속에서
- 쿤달리니 에너지의 폭발을 기다리며
- 1964년, 드디어 숙연(宿緣) 발렌타인을 만나다

세 번째 이야기  폭발 전후와 임종 -이다지도 소리 없이

 
1967년(49세), 스위스 제네바 자에넨에서
- 대폭발을 앞두고
- 대폭발 이후
- 지두의 임종을 맞은 68세의 유지
2007년(89세), 이탈리아에서
- 2007년 3월 22일!

[제4부] 유지는 무엇을 이야기했을까, 너무도 단순한 그의 사상

첫 번째 이야기  생각은 근원적인 악 -모든 것은 실제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의 중심은 생각!
- 끊임없이 생각하는 인간
- 나, 내 것, 자아 개념의 실체
- 생각이 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일까?

두 번째 이야기  모든 것을 부정하고 초월한 진정한 각자 U.G.! -육신 전체가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생각으로는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
- 반(反)생각적인 가르침
- 생각의 생멸은 몸(아즈나 차크라)이 해주는 것
- 아즈나 차크라를 활성화 할 수 있는 방법
유지에게 얻을 수 있는 것, 깨달음이란 사건의 요체!
- 깨달음을 묘사한 숱한 표현들
- 깨달음의 실체를 정확히 보여준 유지

유지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최준식 (지은이)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이며, 국내 죽음학 연구의 선구자이자 종교학자이다.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미국 템플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1992년에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한국 문화에 대해 폭넓은 공부를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 ‘국제한국학회’를 만들어 김봉렬 교수, 고 오주석 선생 등의 동학들과 더불어 한국 문화를 다각도로 연구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사단법인 ‘한국문화표현단’을 만들어 우리 예술 문화를 공연 형태로 소개하는 운동을 해오고 있다. 2013년에는 한국 문화가 ... 더보기

최근작 : <종교분쟁, 무엇이 문제일까?>,<최준식의 메타 종교로 가는 마지막 춤 세트 - 전3권>,<STOP THINKING 현대의 붓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모든 것> … 총 13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최준식 교수가 본 현대의 붓다 U.G. Krishnamurti

가히 현대의 붓다라 할 수 있는 유지 크리슈나무티는 근현대에 존재했던 성자 가운데 가장 강렬한 깨달음을 체험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깨달음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부정했고 부정하는 자신의 말까지도 부정해버렸다. 그런 점에서 그는 대승불교의 중심 철학인 중론(中論)에서 모든 것을 부정한 용수를 연상하게 한다.
유지를 읽는다는 것은 ‘영적 테러리스트’에게 노출되는 일이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념들, 즉 신이나 자아, 깨달음, 환생, 사랑 등에 관한 생각을 모두 뒤엎어버렸다. 그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어떤 방법도 제시하지 않았고 제자들로 조직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사무실도 없었고 비서도 없었다. 그러니 전화나 팩스도 있을 수 없었고 고정된 주소도 없었다. 그저 친구들과 같이 다니거나 작은 아파트를 빌려 기거할 뿐이었다.
이런 유지를 정의 내리는 일은 매우 힘들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그는 구도(求道)의 끝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불세출의 성자를 샅샅이 다루고 있는데 삶과 종교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 있는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이전과는 격이 다른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진리나 깨달음도 부정하고 우리 곁에서 평범하게 살다간 현대의 붓다


비교종교학자로서 그동안 수많은 저서와 강연을 통해 종교와 인간, 윤회와 환생 등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과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최준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그가 보고 읽고 듣고 느끼고 깨달은 종교의 모든 것과 종교를 떠나 존재할 수 없는 인간 운명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를 ‘최준식 교수의 메타 종교로 가는 마지막 춤’이라는 시리즈 3권의 책으로 엮었다.

불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붓다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넌 다음 이 사람은 이 뗏목을 가지고 가야 하는가, 아니면 놓고 가야 하는가?’ 이에 제자들은 당연히 뗏목을 놓고 가야 한다고 대답했다. 붓다가 이어서 말했다. ‘내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여러분들이 깨달음을 얻고 나면 내 가르침도 더 이상 필요 없다.’
이것은 불교의 우수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다. 불교는 자신마저 부정하고 넘어서라고 가르치는 탁월한 종교라는 것이다. ‘메타 종교로 가는 마지막 춤’ 시리즈 세 번째 책은 바로 이 진리를 실현한 사람과 그의 사상을 소개한 책이다. 그 사람은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다. 그는 인도 구루 중에 가장 과격한 사람이다. 그보다 이전에 있었던 가르침을 모두 부정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 말마저 부정했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말은 개가 짖는 거나 다름없다고 외쳐댔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자신을 ‘구루’나 ‘마스터’라고 부르는 것을 제지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그를 평범하게 ‘유지’라고 불렀다. 그런 그였기에 그는 제자도 없었고 어떤 조직도 만들지 않았다. 평생을 지인들과 함께 세계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그저 떠들다 갔다. 장례식 같은 것도 없었다. 죽은 다음 화장해서 바다에 뿌린 것,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 체험은 어떤 구루보다 강력했다. 인도에서는 이 체험을 보통 쿤달리니 에너지가 각성되었다고 표현하는데, 유지의 경우는 그 에너지의 폭발이 누구보다도 강력했다. 사타구니에 있는 회음부부터 시작하는 이 폭발은, 에너지가 척추를 따라 올라오면서 우리 몸의 에너지 중심인 7개의 차크라를 강하게 자극한다. 그래서 잠자고 있거나 활동이 미비한 차크라들이 모두 깨어나 그것들을 통해 에너지가 사통팔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그의 몸에 있는 모든 세포가 깨어나 완전한 전체가 된다. 몸과 영이 완전하게 된 각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유지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데 쿤달리니 에너지가 폭발하기 시작하면 누구나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체험을 한 사람은 보통 3일 내로 죽는다고 한다. 열반에 드는 것이다. 그런데 유지는 죽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사바세계에서 할 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할 일이란 다름 아닌 가르침을 전파하는 일이다. 이것은 석가모니 붓다의 경우와 같다. 붓다도 깨달음을 얻은 후에 40여 년을 더 살면서 가르침을 폈다. 이것은 그의 업보가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덕에 우리는 붓다의 높은 가르침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붓다에게 크게 감사해야 한다.

저자는 유지를 현대의 붓다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붓다처럼 말할 수 없이 큰 깨달음을 얻었고 그것을 알리기 위해 우리와 같이 살다 갔기 때문이다. 다른 점은 유지는 붓다와 달리 제자를 만들거나 교단 같은 조직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지는 조직 같은 것을 소스라치게 싫어했던 사람이다. 옛말에 조직은 악마가 만들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것은 조직을 만드는 순간부터 인간성이 파괴되기 때문일 것이다. 유지는 자연스럽게 이런 조직에 반하는 정신에 충실했던 것 같다.

유지의 직계 선배는 우리에게 친숙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다. 이 두 사람은 생전에 많은 토론을 했다. 후에 유지는 지두를 무지막지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양자의 가르침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이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갔다. 그러나 지두는 마지막에 긍정적인 사고로 돌았다. 반면에 유지는 끝까지 부정으로 일관했다. 그는 자기 자기 말까지 부정했으니 할 말 다 한 거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남긴 가르침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진리는 갈 수 있는 길이 없는 땅(Truth is a pathless land)’이라는 것이다. 지두의 후배인 유지는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이 가르침을 실천했다. 아니 그는 진리나 깨달음까지도 부정했다. 그런 건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러니 깨닫기 위해 하는, 명상과 같은 여러 가지 수련은 다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고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자기에게 와서 가져갈 가르침이 하나도 없다고 한 것이다.

유지의 가르침은 아주 간단하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악은 인간이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 생각만 그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유지에 따르면 생각이 그치려면 여섯 번째 차크라가 깨어나야 한다. 이것은 ‘아즈나’ 차크라라고 불리는데 우리의 이마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우리 대부분은 이 차크라가 활성화되지 않고 잠자고 있다. 이게 깨어나려면 유지처럼 쿤달리니 에너지가 폭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방법을 모른다. 세간에는 이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방법이 있다는 주장이 많지만 유지에 따르면 이것은 모두 헛될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는 깨닫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게 된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폭발해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됐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유지의 가르침에서 위안을 받지 못한다. 허무로 끝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읽고 따르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다. 모든 편견과 고정 관념을 일거에 부숴버리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 책을 읽고 유지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여러분은 엄청난 자유를 느낄 것이다. 그리고 불교나 힌두교 같은 동양 종교에서 무엇을 가르치려고 했는지 그 핵심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부디 그런 일이 생기기를 바랄 뿐이다. 접기
===

평점분포 9.3




정말 많은 것을 알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alswodjaak 2023-08-22 공감 (0) 댓글 (0)


마이리뷰



리뷰

일단 저자에 대한 악의가 없음을 밝힙니다. 다만 그저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이 책에 대해 느끼는 바를 간단히 이야기해보자면,

1. 유지라는 사람에 대한 소개는 좋으나 저자 본인의 감동과 생각을 엮어 그를 너무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다. 유지 본인이 가장 싫어하는게 정작 그런 신격화 아니던가. 유지를 소개하는것 이상으로의 신격화는 세상에 유지라는 사람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는 저자의 사적인 감정일 뿐이다. 물론,사적인 감정을 배제한다면 이 책을 쓰는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걸 모르지 않으나,  
2. 세상의 모든 틀과 요식행위, 심지어 종교를 통해 사익을 추구하는 지두를 부정하는 유지를 소개하는 책을 냄으로서 저자는 이익을 추구하고있다는 것에서의 아이러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이라는 재화를 공짜로 소비하고 싶어서 하는말은 아닙니다)

카르마의 법칙, 스탑띵킹 두권 구매했는데 아쉽게도 불교사상을 좋아하는 저에게 썩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다만, 감히 타인의 시간과 정성, 노력이 담겨진 책을 개인적인 생각이나 만족도만으로 평가절하 할수는 없으므로 중간값인 별 세개를 넣습니다(사실 개인적 만족도만으로 말하자면 별 한개를 드리고 싶지만)
- 접기
배윤정 2023-07-26 공감(2) 댓글(0)




STOP THINKING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이하 유지)에 대해서는 몇 년전 작가가 이전에 쓴 <길은 없지만 가야 할 길> 책에서 잠깐 본 적이 있지만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평소 흠모했던 지두크리슈나무르티를 너무 신랄하게 비난했기 때문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메타종교 시리즈 세 권을 내면서 한 권을 유지에게 몽땅 할애 할 정도로 40년간 종교을 연구한 작가를 매료 시켰다는 사실이 다시금 유지에게 관심을 돌리게 했다.

작가는 이번에 유지에 관한 책을 또 다시 출판하게 된 이유로 지난 책에서 유지를 충분히 피알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번 책은 유지만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고 생애에 대한 내용보다 강렬했던 종교체험을 앞부분에 실었다.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말한대로 종교체험, 2부는 삶의 스타일, 3부는 생애, 4부는 사상에 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 종교체험은 첫날부터 대폭발이 일어나는 일곱째 날까지 상세하게 다룬다.
  • 유지의 강렬한 쿤달리니 체험은 아마 독보적이고 타의 추종을 불허 할 만 하다.
  • 한가지 의문점은 종교체험은 반드시 이런 고통을 수반해야 만 하는가라는 것이다.
  • 뽕을 맞은 것 같은 쾌감이 동반되는 그런 종교체험은 왜 없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2부는 평소 유지가 일상에서 보여준 삶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유지의 삶은 매우 소탈하고 평범한 했다는 점이다.

  • 당시 유지의 명성과 능력이라면 과거의 구루들처럼 큰 집단을 만들어 왕처럼 대접 받고 살았을 터인데 유지는 그 모든 것을 거부 했다는 것이다.
  • 또한 자신에 대해 어떤 책이나 기록도 남기지 말라고 했고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주의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다 필요 없고 돈이나 많이 벌고 사는게 좋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고 한다.
3부는 유지가 태어나서 죽기까지 성장과정이 담겨져 있다.
  • 주목할만한 내용은 유지가 위대한 성자가 되기까지 그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다.
  • 유지의 어린시절 양육은 외조부모에게 맡겨졌다. 외조부모는 신지학회 회원이었기 때문에 유지는 그곳에서 지두 크리슈나무무르티를 만나게 된다.
  • 14세에서 21세까지는 시바난다에게서 요가와 명상등을 배웠고 시바난다를 떠난 후 유명한 마하르쉬를 찾아간다.
  • 하지만 결국 이들과 모두 결별하고 자신의 길을 간다

4부는 유지의 사상이다. 사상은 단순하다. 제목 그대로 생각을 멈추기다. 생각이 인간 고통의 원초적 요인이기에 생각이 없어지면 생각을 포함하여 '나'라는 존재까지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그런 의미가 나가 아니라 순수한 '나'를 의미한다.


그런데 불교든 유지든 일단 '나' 가 없다면 모든 것은 불가능하다. 깨달았다고 해서 자아감이 완전히 없어지는 않는다. 유지가 깨달았을지라도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분명 '나'라는 자기 존재가 있었을테니 말이다.

작가는 이 문제를 켄웰버의 홀라키 개념으로 풀어낸다. 원자를 감싸고 있는 분자처럼 나를 감싸고 있는 상위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분자속에는 원자가 있듯이 내가 깨달아 나를 초월해도 본래의 나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다시 나에게로 돌아 올 수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인데 그것은 생각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생각이 사라지면 이원론적 체계가 붕괴되어 나와 세상이 통합되고 삶의 고통도 또한 사라진다는 것이 유지의 사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유지가 깨달음은 없다고 하는 이유도 생각을 멈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이 문제를 생각의 영역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인데 바로 쿤달리니 폭발이다.

쿤달리니 폭발은 잠자고 있는 7개의 차크라를 깨워 생각을 멈출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뇌하수체 자리에 있는 아즈나 차크라가 활성화되면 생각이 활동을 멈춘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있다. 쿤달리니 폭발은 자의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지의 경우도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라 어느날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유지는 자기가 하는 이야기는 다 개가 짖는 소리와 같으니 들을 필요도 없고 깨닫고자 노력하는 일도 다 헛짓거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렇게 깨닫는 일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런 과정을 밟고 싶지는 않다. 깨달음이 주는 혜택에 비해 그 댓가가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작가는 독자들의 이런 생각을 미리 파악했는지 책 말미에서 독자들에게 당부한다. 어느정도 수련이 깊지 않은 사람은 이 책을 읽지 말라고. 그리고 이미 읽었다면 잊어버리라는 말도 덧 붙인다.

본 서를 읽고 난 후 떠오르는 유지에 대한 이미지는 헐벗은 진실 같다.

솔직하고 투명한 것은 좋지만 너무 속이 드려다 보이면 보는 사람이 좀 불편하지 않을까.

때로는 인간적인 실수와 허물을 가리는 것도 매너인데 이런 것들을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유지가 너무 부정적인 것도 꺼려진다. 그렇지않아도 힘든 세상인데 이왕이면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작가는 바닥을쳐야 위로 올라간다고 부정의 극단은 긍정의 시작이라고 해명은 하고 있지만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다

이 책의 또 한가지 특성은 서민적인 글 스타일이다. 문장들이 투박하고 싸구려 티가 난다.

교수가 쓴 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품위하고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섹스 혹은 성행위를 '박는다'라고 서슴치 않고 표현하고 있는데 유지가 했던 말에 뉘앙스를 살리려는 뜻도 있지만 유지의 삶의 스타일에 맞춰서 의도적으로 털털하게 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고보니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무의식적으로 유지와 거리를 두었던 것 같다.

작가가 혀를 내두르며 유지를 치켜 세우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문제를 삼으려는내 태도가 느껴졌다.

아직도 내가 유지에 대한 앙금을 가지고 있거나 그의 깨달음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깨달음을 얻었지만 모든 권위와 명예를 부정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자유롭게 살았던 유지의 삶은 경탄할 만 하다.

그리고 다른 얘긴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로댕의 동상 <생각하는 사람> 을 <생각을 멈춘 사람> 으로 바꾸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서평은 출판사 서평행사에 참여하여 
책을 제공받아 자유로운 환경에서 작성했음을 알립니다.

- 접기
흐르는강물처럼 2023-07-23 공감(1) 댓글(1)
Thanks to
공감



STOP THINKING

현대의 붓다는 어떤 의미이고 무엇을 말하는 걸까?

종교적 신념에 의한 삶은 선택적 삶이라 지칭한다면 영적 삶의 선택은 종교적 신념이나 삶을 뛰어 넘는 색다른 삶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최준식 교수는 종교를 일반적인 종교라 지칭하지 않고 궁극적 관심으로 표현한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이 더 올바른 종교에 대한 정의와 개념이 아닐까 하는 판단도 하게 된다.

현대의 붓다라는 유지 크니슈나무르티는 기존에 우리가 사유했던 신념, 신, 자아, 깨달음, 환생, 사랑 등 형이상학적 존재와 가치들에 대한 전복을 일으킨 사람으로 그의 깨달음의 근거는 부정에 기인하는 무엇으로 읽혀진다.

그런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 그 존재의 깊이있는 성찰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을 만나 읽어본다.

이 책 "STOP THINKING" 은 저자가 만나 본 현대의 붓다이자 종교의 끝판왕이라 말할 수 있는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와의 만남과 가르침, 그의 사상에 대한 안내를 우리 인간이 바라마지 않는 진리를 실현한 사람과 그의 사상적 혜안을 소하는 책이다.

유지 그리슈나무르티는 존재의 티끌과 같이 사라졌지만 그의 가르침은 쿤달리니 에너지의 폭발이 그 어느 누구보다 강렬했기에 몸과 영의 완전 분리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의 카르마 역시 깨달음을 가르치는데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와 다르며 두 사람의 사유의 흐름과 체계도 달랐다고 하는데 유지는 거의 모든 깨달음의 대상자들이 긍정적 사고를 통해 이루었지만 그와는 다르게 부정적 사유를 통해 깨달음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야말로 저자의 말처럼 유지의 사유를 통하면 허무를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인간 삶의 궁극적 목적에 이르게 하는 진리와 그로 인한 다양한 문제들이 빚어내는 문제들에 대한 혜안이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부정적인 의식을 보인다면 허무와 자유의 간극 사이 어디쯤을 헤매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강하게 든다.

쿤달리니 에너지 폭발이란 다섯 감각에 모두 변화가 일어나고 몸이 자웅동체로 변화하는 것까지 겪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데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게 된다.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쿤달리니 에너지 폭발 3일 후에 열반에 든다는 이야기는 죽음과 조우한다는 의미지만 유지는 살아 남았다고 하며 현실 세계에서 추종하는 종교적 구도자의 끝판왕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깨달음을 말하는 것은 직관적인 느낌으로 무(無)에 가까운 의미가 아닐까 하는 번뜩임에 다가서게 되고 지금까지의 깨달은자들의 사유에 대한 부정의식이 그러한 것들에서 탈피, 벗어나는 것을 뜻하기에 저자는 유지에 존재에 대한 설명을 비중있게 하고 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을 논하는 시간으로 책의 구성이 이루어진 상태를 접하면서 크게 복잡하지 않고 너무도 단순한 그의 사상에 적잖은 끌림의 이유를 발견한다.







저자의 메타 종교로 가는 춤 시리즈 3편을 만나 읽어보았지만 종교인도 아닌 비종교인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일천하다.

더불어 무척이나 어렵고 모르는 부분들을 읽어나갈 때는 따분함 마져 가질 수 있었지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서술형식을 채택한 턱에 지식이나 교양인의 흉내를 내지 않고도 마주할 수 있는 부분들이 아마도 저자가 흠모하고 배움을 얻은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의 스타일에 경도된 까닭의 결과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종교에 대해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하고자 하는 말들과 생각들이 넘치고 넘친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우리는 종교에 대한 진실과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쉬 간파하지 못하며 유지와 같은 성인의 깨달음이 보여주는 내용에 대한 반문, 궁금증 등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일, 어쩌면 저자가 바라마지 않는 모습이자 유지 역시 인간의 삶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종교적 진실과 가치에 대해 인간의 의식이 빚어내는 것들을 어떻게 바꾸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깨달음의 수행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남겨본다.

**네이버 카페 책과콩나무의 지원으로
개인적 의견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접기
newkorea21 2023-07-27 공감(0) 댓글(0)
Thanks to
공감



STOP THINKING 현대의 붓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모든 것

가장 강한 종교적 체험을 한 유지 크리슈나무르티

종교적 체험의 증좌는 몸과 정신의 변화다. 종교 체험의 강도와 진정성의 정도는 무엇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가? 진정한 종교적 체험을 겪었다면, 쿤달리니 에너지의 폭발, 40대 후반이었던 그가 20대의 외모로...그는 7일에 걸친 대폭발을 경험한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를 현대의 붓다라고 하는 이유

지은이 최준식이 주저 없이 그를 현대의 붓다라고 하는 이유를 보자. 유지의 사상에 경도된 것인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 여기는데, 과연 그 이유는, 첫째로 드는 것은 그의 태도다. 자신의 깨달음을 전혀 신비화 하지 않았다. 그 반대로 그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신은 깨달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뿐더러, 깨달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는 모든 것을 부정했다.



깨달음이란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제자를 두거나 교단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지는 조직하는 것을 싫어했다. 조직은 악마가 만들었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조직을 만드는 순간부터 인간성이 파괴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점에는 나도 크게 동의한다. 깨달은 사람은 세속에 살되 세속과 절연한다. 왕처럼 고대광실에서 살지 않는다. 예수의 유명한 말, 자신은 섬김을 받으로 온 게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조직은 자가발전하게 마련이고, 사람을 위해 선한 목적을 위해 조직을 했지만, 어느덧 조직이 조직을 위해 작동하게 되는 순간, 통제를 할 수없게 됨은 역사의 경험 속에서 충분히 보지 않았던가, 유지는 모든 거창한 호칭을 거부하고 단지 이름으로만 불려, "유지"로 불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김대중의 면전에서 DJ라고 부르지 않듯, 하지만 유지는 그의 앞에서 유지라고 부르도록...



두 번째는 유지의 가르침이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악은 인간이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유지는 생각이 그치려면 아무것도 없는 무념의 상태가 되려면 여섯 번째 차크라(인간 신체의 여러 곳에 있는 정신적 힘의 중심점 가운데 하나다. 산스크리트어로 ‘바퀴’, 또는 ‘원반’을 의미한다. 물질적 혹은 정신의학적 견지에서 정확하게 규명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중심부), 여섯 번째 차크라라 함은 미간 사이에는 2변의 연화형을 한 아즈나 차크라한다. 이것이 깨어나려면 쿤달리니의 힘이 폭발해야 한다. 일간에서는 쿤달리니가 결국 사하스라라 차크라에 이르면, 이는 우주의 근본원리인 시바신과 합일한 것이 되는데 이때 사람은 우주를 주재하는 힘을 갖추어서 해탈을 한다고 한다고 하지만, 유지는 이것은 모두 헛됨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고정된 관념이다. 틀이다. 이것을 깨고 부숴버리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핵심이다. 그는 어떤 책도,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세상에 모든 것을 실제하지 않는다. 생각은 근원적인 악이며, 이를 깨는 것이 깨달음이다.

꽤 흥미롭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은 것일까, 이를 우리는 허무라고 하는데, 허무와는 또 다른 무엇인가라는 느낌이다.

불교든 힌두교든 겸손함, 즉, 무지함을 깨닫는 것이 수련이라는 점이다. 깨달음 끝은 초월이고, 초월하면 종교는 끝난다. 고통이든 그 무엇이든, 무엇을 위해서 수련하는 것을 경계한 유지, 사람들이 수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해 다른 존재가 되려는 것을 경시했다. 그는 명상 등을 통해 현재의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되려하는 것은 모든 고통의 시작이다. 심지어 그는 당신이 (무엇인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따르는 한 당신은 폭력적인 사람으로 남을 것이라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진정 깨달은 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 여기에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데 우리는 다른 데서 찾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병통이다. 생각으로는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는 생각은 불교나 힌두교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다.

지금, 여기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수련을 통해서 무엇인가 되려는 허영을 버리라는 것이다. 허례와 허식은 진짜가 아니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있는 그대로... 깨달음 뒤에 영웅으로 숭배되기를 원하는 것 자체가 깨닫지 못함이다. 그가 남긴 게 아무것도 없기에...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간다. "무소유"의 법정스님이 겹쳐온다.



<출판사에서 보내 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접기
moonbh 2023-07-28 공감(0) 댓글(0)
Thanks to
공감



영적 테러리스트, 유지 크리슈나무르티

종교를 넘어선 종교가 메타종교다. 내가 보기에, 비교종교학자 최준식이 지향하는 메타종교는 조직화되거나 제도화된 종교와 결이 다르다. 불교나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제도화된 세계종교의 틀에 갇혀 있지 않다. 저자가 말하는 메타종교는 '종교'보다 '영성'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저자는 깨달은 각자의 의식 수준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데, 자신이 높이 평가하는 인물로 켄 윌버와 인도의 영성가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를 꼽는다. 저자는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를 '현대의 붓다'로 높이 평한다. 유지가 근현대에 존재했던 성자 가운데 가장 강렬한 깨달음을 체험한 분이며, 그의 가르침이 용수 보살의 '중론' 사상과 통하는 급진적인 '영적 테러리스트'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유지의 삶과 사상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유지는 종교인들과 명상가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념들, 즉 신이나 자아, 깨달음, 환생, 사랑 등에 관한 생각을 모두 뒤집는다. 
  • 특히 영적 깨달음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인도 출신의 이름난 명상 구루들을 두루 비판하고,
  •  아울러 '영성 쇼핑'에 중독된 소비자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운다. 
  • 유지는 열반과 같은 깨달음 같은 건 없고, 명상 수련은 허섭스레기라고 비판한다. 
  • 유지는 말그대로 반구루적 인물이다. 
  • 그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어떤 방법도 제시하지 않았고 제자들로 조직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일정한 거주지도 마련하지 않았다.

​평소 명상과 정신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독자라면, 유지와 같은 이름을 가진 또다른 세계적인 명상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다. 저자는 지두와 유지를 서로 동기감응할 수 있는 영적인 쌍둥이로 간주한다. 비록 지두가 유지보다 훨씬 연장자지만 말이다. 두 사람의 가르침은 공통점이 많다. 다만, 지두의 가르침이 보다 긍정적이고 분석적이라면, 유지의 가르침은 보다 직설적이고 부정적인 성향이 크다는 차이를 보인다.

​유지는 사십 대 후반에 쿤달리니 에너지의 폭발을 경험한다. 일주일 동안 몸의 에너지 중심인 7개의 차크라가 뚫리는 경험을 하는데, 일단 쿤달리니 에너지가 폭발하기 시작하면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쿤달리니 폭발과 동시에 몸에 이상 징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가령 안이비설신 다섯 개의 감각에 모두 변화가 일어나고, 심지어 몸이 자웅동체로 변화하는 것까지 겪는다. 쉽게 말해서, 쿤달리니 에너지 폭발로 육체의 모든 화학 구조가 변하는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쿤달리니 폭발 체험을 한 사람은 보통 3일 내로 죽는다고 하는데, 유지는 살아남았다.

​불가에선 중생이 일으키는 생각이 번뇌라고 말한다. 번뇌는 크게 세 가지다. 감각적 욕망의 번뇌, 존재의 번뇌, 무명의 번뇌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유지는 생각이 인간의 모든 고통과 악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생각만 그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요가에서 말하는 이른바 '마음의 소멸'과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생각의 소멸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생각이 그치려면 우리의 이마 한 가운데 위치한 여섯 번째 차크라인 아즈나 차크라가 깨어나야 한다. 생각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아즈나 차크라의 각성인데, 이게 깨어나려면 유지처럼 쿤달리니 에너지가 폭발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에너지를 폭발시킬 수 있는가. 그 방법은 아무도 모른다. 비록 전해져 내려오는 수많은 종교 의례들과 명상 비법들이 있지만, 유지는 그런 인위적인 방법들이 아즈나 차크라 각성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헛짓이라고 말한다.
- 접기
zixia 2023-07-17 공감(0) 댓글(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