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교시 일본 미래공창신문 발행인이 만난 조철호 회장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6.09.11
‘동양포럼’ 통해 동양일보는 세계신문으로 발돋움할 것
(동양일보) ‘동양포럼’ 통해 동양일보는 세계신문으로 발돋움할 것
한국의 충청북도 청주시에 본사를 둔 일간 종합지 동양일보는 부설기구로 ‘동양포럼’을 운영하고 있다. ‘-한·중·일 동북아 3국의 공통가치를 찾아서-’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철학을 탐구하는 모임이다. 지난 5월 3일 동양포럼 운영위원회(위원장 유성종)가 주최한 1회 동양포럼(주간 김태창)이 충북예총 따비홀에서 개최됐다. 나는 이날 이 행사를 후원하고 있는 동양일보 조철호(72) 회장을 만났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동양의 민족 철학, 사상, 예술이 융합하여 백화란만의 화원을 이루기를 꿈꾸면서 고향인 청주에 동양일보사를 설립했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시인이기도 한 조 회장은 일본과 중국의 맺음마디인 또 그 중앙에 위치하는 청주를 동아시아의 흐르는 동양철학의 매개-공창-발신의 기지로 하여 거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 뜨거운 가슴 속을 참가자 수명으로 된 공동 인터뷰를 했으며 이 내용을 일본 미래공창신문 7월 30일자에 3개면을 할애하여 게재했다.
나의 이 인터뷰 내용을 동양포럼 유성종 운영위원장의 번역으로 여기 싣게 됐음을 밝힌다.
< 야마모토 교시·山本恭司>
● 동양철학의 개신창발을 향하여
나는 동양포럼의 운영위원장인 유성종(전 꽃동네대학교 총장) 박사가 조철호 회장에 대한 이해자이고 강력한 지원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 회장의 인물상을 미리 들었다.
조 회장은 충청북도를 중심으로 한국의 언론계에서 45년간을 언론 외길로 살면서 빛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반 군정의 언론인으로 청년시대부터 활약해 왔다.
조씨의 문제의식은 정치방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민족, 철학, 예술, 빈곤, 차별, 평화, 과학 등등 근대 동아시아를 일원적으로 지배하여 온 서양적 가치 체계와 패권주의에 의심을 품어온 ‘의식있는 기자’였다.
유 위원장은 한국 교육계의 여망을 지고 있는 한국교육평가원의 원장과 2개 대학의 총장, 충청북도 교육감·도산서원(이퇴계 선생이 창시)의 원장도 지낸 한국 교육계의 원로. 그의 인격, 식견에 대한 신망이 두텁고 보이스카우트 한국 연맹의 치프 커미셔너(Chief Commissioner)를 8년간이나 맡았다. 일본에 우인과 지인도 많다.
유 위원장은 말한다. “조 회장은 박정희 정권이 진행한 미국 편중의 근대화에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교육감 시대에 어떤 정보당국의 유력자가 찾아왔었습니다. 그는 상사로부터 ‘그대는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 그를 처리할 수가 없느냐’ 라고 되게 혼났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그 정보당국자는 나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지금 세상에 그(조 회장)같은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라고”.
이같은 정보기관의 분위기나 비밀얘기가 일선 교육장의 귀에도 닿아 있었다.
유 위원장이 교육감 시절에 조철호 회장은 충북문인협회 회장이었는데 문인협회가 충북문학전집을 간행했었다.
전국적으로 지역에서 발행된 최초의 문학전집 이었다.
유 교육감은 그 내용과 가치에 깊이 공감하고 충청북도교육위원회가 예산을 세워 전 초·중·고교의 도서로 그 전집을 사서 배부했다.
당시 정보기관의 미움을 받고 있던 조 회장이 주도해 발행한 도서를 대량 구입한 것을 들어서 관계 기관에 투서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장래를 짊어질 청소년 교육에 보탬이 될 문학전집이라며 그 비판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조 회장은 연합통신의 기자시절부터 권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러왔다.
지금도 부친이 교장으로 있는 학교 화재사건 기사를 직접 써서 보도한 유명한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조 회장은 본인이 시인인지라 문화와 예술에 더 없이 애정을 쏟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한 ‘사랑의 점심나누기’는 듣는 이들을 감동 시킨다.
월드비전과 함께 동양일보는 매년 충북도내 시·군을 순회하며 모금한 성금으로 에티오피아에 학교를 짓고 있으며 최근 6년간 집중 지원한 쉬로메다 청소년직업기술학교는 30여개 교실에 5층 건물로 참전용사 자손들에게 자활의 꿈을 키워주고 있다.
● ‘동양포럼’을 통해 세계신문으로 발돋움
- 조 회장은 젊었을 때는 연합통신 등의 기자로서 활동하셨습니다. 기자 출신이 신문사를 창간해 성공하였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은 일이 없습니다. 동양일보를 창간한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조철호 회장 “저는 대학시절 대학신문 기자로 기사 쓰는 일에 관계하여 왔습니다. 당시는 군사독재 정권에서 한국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매우 의아한 상태였습니다. 당시는 일간지라 하더라도 권력과 유착하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신문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순수한 대학생 기자의 시각으로는 못마땅했지요. 그때 “언젠가 나 스스로의 손으로 일간지를 창간하여 건강한 문화시민이 되도록하는데 기여하고 싶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1971년부터 일간신문 기자가 되고 꼭 20년째가 되는 1991년에 동양일보를 창간했습니다. 마음에 새긴 대로 된 셈이지요.”
- 당시의 대통령은요?
“군사정권에서 민주정권에로의 과도기를 담당하였던 최후의 군정대통령 노태우씨였습니다.”
- 충청북도의 청주라는 땅에서 신문사를 만든 이유는?
“뉴욕 타임즈는 지방신문입니다만, 세계의 사람들이 읽는 세계 신문이 됐습니다. 그와 똑같이 지방지라도 그 지방의 특색을 최대한으로 빛내는 신문이 될 수 있다면 세계 신문이 될 것이고 그러므로 (지방에 본사를 두는) 지방신문이라도 뜻을 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지정학적으로 보아서 대한민국의 중심에 있는 것이 충청북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고구려·신라·백제의 삼국시대에 삼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곳이 이 충청도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충청도에는 많은 성토가 있습니다. 그 충북의 중심이 청주입니다.”
- 회장 자신도 청주 출신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청주일보’가 아니고 ‘동양일보’라고 명명한 이유는 왠 까닭입니까?
“신문사의 명칭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먼저 문제였습니다. 지방지면 ‘부산일보’라든가 그 지명을 붙이는 것이 당연했습니다만 나는 ‘동양일보’라고 터무니도 없이 커다란 이름을 붙여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장래 대한민국의 어디에서라도 제호 때문에 곤란을 겪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처음엔 청주에서 10년정도 뿌리를 내린 후 서울로 이전을 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동양일보라고 명명한 두 번째 이유는 장래 동양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에 동양일보는 대한민국이라는 틀을 넘어서 동양의 중심이 된다고 하는 마음을 새겼습니다. 지면의 제자는 푸른 바탕에 흰 글씨로 ‘동양일보’라고 쓰고 있습니다. 푸르름은 용기와 희망의 색입니다.
그러므로 동양일보는 미래지향적이고 나의 꿈을 실현시키는 것이라는 결의를 담고 있습니다. 사시는 ‘이땅의 푸른 깃발’입니다.”
-‘이 땅’은 청주의 땅이로군요?
“청주와 충청도와 대한민국과 동양입니다. 그리고 보통 신문사는 제작정신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양일보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빛남을 위하여’ 라는 방향을 분명히 설정하고 있습니다. 특정 계층이나 잘난 사람들이 아니라 서민 대중과 더불어 보통사람들을 조명하여 그들을 빛나게 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올해는 동양일보 창간 25주년의 축년이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25주년을 기하여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문의 격을 한 단계 높이는 일입니다. 철학을 하여야만 제대로 살 수 있는데 그 길을 만드는 것이 이 시대의 명제입니다. 민중이 철학해야 비로소 세상은 제대로 된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양포럼’을 태동시킨 김태창 선생과 유성종 선생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이라든가 철학이라고 하면 무거운 인상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떻게든 철학을 신문 지면에 살려나가는 모험을 결심하고 있습니다.”
- 이번 가을 창간 25주년을 맞아 제2의 창업분위기를 맞게 될 것인지요.
“나는 신문쟁이의 길 45년간 기사를 쓰고 다듬고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등 활자관계의 일 이외의 사업을 한 일이 없습니다.
보통 신문사는 신문을 내면서 다른 사업을 폭넓게 하여 수익성을 높이고 그것으로 사원의 복지에 환원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그러한 재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창간 25주년을 맞는 올해 그것을 기념해서 본사 사옥을 신축하기로 했습니다. 10층 건물의 신사옥을 현재의 자리에 건축하거나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신축하거나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올 해 안이나 내년 봄에는 모든 계획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사원의 복지를 충실하게 강구하게 될 것입니다. 25주년의 기념행사는 창간일인 10월12일을 전후하여 갖게 될 것입니다.”
-제2의 창간에 관해서 좀 더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제2의 창간은 제2의 비약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겠습니다. 첫째 신문의 품격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독자와 더불어 철학하는 일로 ‘철학하는 신문’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철학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철학한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의 마음으로 체득하고 자기의 손발로 실천하는 일반 대중이 길러지는 데에 도움이 되는 언론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신문의 질적 전환입니다.
또한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신문사로서 사원의 복지를 높이고 싶습니다. 사원은 이때까지 낮은 보수를 받으면서도 헌신적으로 일 해주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동양일보에 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있는 신문사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부적으로도 외면적으로도 동시진행의 대전환을 꾀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25년을 맞는 동양일보사 회장으로서 나의 결심이고 유성종 . 김태창 선생 등 동양포럼 관계자들과 사원들이 함께 하고자 한 일입니다.”
-혼자서 동양일보를 창간한다고 하는 일에 불안은 없었습니까?
“동양일보사의 창간을 앞두고 독지가 몇 분이 30억원 이상을 출자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회사에 일제히 세무조사가 들어갔습니다.
세무조사를 받게 되면 온전히 빠져나가는 회사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분들이 찾아와 신문 창간을 도울 수 없는 전후 사정을 알려주었습니다.
(한사람의 신문기자 출신의 인간이 궐기하였지만 국가권력이 ‘장수를 쏘고자 한다면 말을 쏴라’라는 것일까. 작은 협력자를 일제히 공격한 것이다. 당시의 배후에서 한국 중앙정보부 (KCIA)가 움직인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했었다.
군사정권에의 엄한 언론활동으로 곱게보이지 않던 조철호 회장이 신문사를 창간한다는데 그냥 놓아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징세권력을 행사하고 싹트기 전에 자금 면을 단절하여 계획을 좌절케 하려고 노골적으로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불가사의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협력자의 자금을 기대하지 않고 나 자신이 조달할 수 있는 자금만을 바탕으로 하여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재정적인 면에서 매우 가혹한 상황에 쫓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꿈꿔온 ‘신문을 발행해서 서민이 빛나는 세상을 연다’라고 하는 열망을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악전고투했습니다만 결과로서 공채로 엄선한 사원 77명으로 동양일보를 출범시켰습니다.”
(전전의 일본에는 권력과 정면으로 싸우면서 ‘골계신문(滑稽新聞)’을 발행하는 미야배 가이고쓰(宮武外骨)와 같은 아주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전후 신문사 창간에 열망한 사람은 혼다 쇼이치(本多勝一)정도가 아니었을까. 반 권력으로 몇 사람의 동인이 시작한 주간 금요일(週間金曜日)은 동양일보와 같은 일간 신문은 아니다.)
-믿었던 협력자금의 길이 끊어졌는데 어떻게 해서 신문발행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 당시엔 신문사를 시작한다면 우선 윤전기가 필요합니다. 작성한 기사자료를 필름화해 윤전기를 돌리는 방법이지만 나 혼자 조달한 적은 돈으로 건물이며 윤전기며 신문 제작설비를 갖춘다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나는 “돈이 없다. 그러나 신문은 만든다”라는 생각을 굳히고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전 과정을 컴퓨터화 하여 제작인원을 줄였습니다.
설비비와 인건비를 최소한도로 한 것입니다. 커다란 신문사라면 전 과정을 전산화 하는 것이 좋다고 알고 있어도 노동조합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개혁은 어렵습니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노동조합이 강하다.)
나는 자금의 입구가 폐쇄된 궁상을 역으로 하여 생(省)에너지 시스템의 신문 발행 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정녕 궁즉통(窮卽通)입니다.
컴퓨터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원이나 새로운 기술면의 협력자도 나타나서 동양일보의 창간은 계획대로 가능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77명의 사원의 급료가 이내 필요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구독자와 광고수입만으로는 어떻게 경영이 되었습니까?
“일본에서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만 새로이 신문사를 만들어서 신문 발행을 시작한다고 하면 최초의 6개월에서 1년동안은 무료 서비스 기간을 설정합니다. 무료로 신문을 읽고 공감을 얻어서 일정의 구독자를 확보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동양일보에는 돈이 없었습니다. 무료기간은 없고 처음부터 1개월이 지나면 구독료를 받는 ‘서비스기간 없는 신문’ 으로 전환하여 색다른 화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한국에도 ABC협회라고 하는 신문발행부수를 공인하여 공개하는 기관이 있습니다.
동양일보의 발행부수가 그 당시 9만8000부라고 인정됐습니다. 0에서 시작한 신문으로서는 적잖은 숫자입니다. 민중의 지지가 얻어졌다는 일로 우리들도 꽤 자신을 얻었던 것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다음이 보수계의 김영삼 정권,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으로 이어집니다. 시대의 흐름이 뒷받침하여 주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까?
“예, 순풍의 상태가 이어지게 되고 본체의 동양일보 외에 ‘소년 동양’을 창간하고 그것을 얼마 후엔 ‘소년동양일보’라 하는 일간지로 발전시켰습니다. 또 ‘동양라이프’라고 하는 월간 화보를 내기도 하여 사세확대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흐름을 바꾼 것이 1999년의 IMF 외환위기입니다. 그때의 일번 타격을 받은 것이 달러를 많이 쓰는 기업입니다.
우리들도 그랬습니다. 컴퓨터를 비롯해 필름이며 PS판이며 신문제작의 모든 자재는 수입품으로 충당했기 때문입니다. 부도를 냈습니다. 국내의 외화가 없었기 때문에 부도의 도미노 현상을 피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문은 계속 발행하겠다는 방침으로 전 사원들이 더욱 결속했습니다. 부도가 나는 이튿날 동양일보 1면에 ‘동양일보는 부도를 냈습니다.
그러나 동양일보는 계속 발간됩니다’라는 사고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동양일보를 잇게 하자’라는 목소리가 높아져서 1개월 여 만에 무려 1억 원을 넘는 기부금이 모아졌습니다.
몇 만원에서 몇 십 만원까지 참으로 많은 분들이 동양일보가 계속 발행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었습니다.
덕택으로 동양일보는 단 하루도 휴간하는 일이 없이 발행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IMF위기에서 탈출하면서 어떤 각오를 갖게 되었는지요.
“IMF 직전에 280명이던 사원은 100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일방적인 해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한사람도 해고자를 내지 않았던 것은 회사의 권유로 사원이 자발적으로 다른 기업에 전직하던가, 길을 찾아서 나가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에 소년동앙일보라든가 동양라이프 같이 채산이 맞지 않는 발간물은 폐간하고 일체의 거품을 빼는 경영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의 문화적 욕구와 문화에 대한 시대적 소명을 의식하는 지면을 구성하는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이와 같이 동양일보의 25년은 파란 만장의 역사였고 건강한 문화시민을 위한 방향설정과 고집스런 행보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새삼스럽게 질문을 합니다. 신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신문이란 중요한 정보원의 역할을 이루는 것입니다.
현대는 정보가 넘쳐흐르고 있습니다만 그 정보를 정리하고 편집한다는 작업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뉴스를 아는 전문가들의 집단인 신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보 과잉의 시대야 말로 신문의 선별이 중요합니다.
신문사로서는 정보를 정확하게 정리하여 독자가 알 수 있게 뉴스의 가치별로 친절히 제공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또 한가지 신문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뢰받는 신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절대 조건입니다.
큰 신문이든 작은 신문이든 신뢰를 얻고 있느냐 어떤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일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신문이라는 것은 무엇이냐’하고 묻는다면 ‘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을 맺는 끈이 신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사람과 사람이 있는 한 끈이 없어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철학하는 국민이라든가 철학하는 신문이라는 발상이 원래부터 회장님한테 있던 것입니까?
“나는 꽤 오래전부터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철학한다고 하는 것에도 마음을 써왔습니다. 특히 민중·서민·시민에 비춰 의미와 가치를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 줄곧 나의 사고의 근원에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철학한다는 일에 내가 커다란 힌트를 얻은 것은 영국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입니다. 젊은 시절에 읽고 커다란 자극을 받았습니다.”
-조 회장이 동양포럼을 기획한 동기와 이후의 전망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일본과 중국의 사이에 끼어있는 한국은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 나는 그 일을 줄곧 생각하여 왔습니다.
거기에 김태창 박사와 유성종 위원장으로부터 철학포럼을 열면 어떠한가라는 제안을 받고 생각한 것이 ‘동양포럼’이었습니다.
사내에서는 지면이 너무 무거워진다는 저항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학하는 시민을 기르기 위해서 선두에 서야 하는 역할을 이루는 것은 신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동양일보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문에는 여러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그 중에 철학하는 신문이라는 것도 있을법하지 않느냐, 물론 한·중·일의 석학이 모여 의논하는 내용을 신문에 반영한다는 작업은 간단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따른 노력과 재정적인 지원도 간단치 않을 것입니다. 금방 어떤 효과가 나오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지면제공에 관해서는 회사의 의지에 관련한 전권사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20년 가량 앞으로까지 입니까?
“아니. 그 이상 이어질 것입니다. 설령 내가 동양일보에서 물러 난다해도 ‘철학하는 국민이어야 산다’는 명제는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어져야 회사의 전통과 가치가 더해진다는 데 이의를 갖지는 않을 것 입니다.
사풍(社風)이란 안이한 업무추진에서가 아니라 몰입과 집중, 지속적인 열정이 마침내 빚어내는 예술작품 같은 것이지요. 결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신문사에서 20년 이상을 한 사람이 정상에 서서 경영하고 있는 사례는 타에 예가 없다고 한다. 통계는 사원도 빈번히 교체되지만 동양일보는 25년 전의 창간사원들이 여럿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희유의 특이한 사풍이 있다.)
-조 회장이 무엇보다 열의를 담아 말씀해주신 일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지방신문에서 세계로 가는 장대한 계획을 세우고 신문으로서 하나의 모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은 참으로 굉장히 빛나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끈이라고 할 때에 두 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중·일 삼국의 현상, 또는 세계의 현상에 대해 어떠한 미래 예측을 하고 계시는 건지. 그때 회사가 짊어져야 하는 역할과 그것을 이뤄나가는 이미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둘째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고 할 때에 독자와 더불어 편집한다고 하는 선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방법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일·중·한 삼국의 현상과 미래에 대해서는 한국이 산업화 하여 경제발전을 해가는 최후에 당도하는 것인 예의작법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갖추지 않으면 안되는 기본적인 예의라고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라고 하는 데 이를 것입니다.
(조 회장이 일·중·한이라고 자국 명을 제일 나중으로 돌려 말한 것은 인터뷰인 관계로 일본인에 대한 섬세한 배려이고 정녕 문명국의 예의에 들어맞고 있다. 이러한 상대를 먼저 세우는 마음 씀의 가운데에서만이 세계 평화의 원리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면 연간 3만 달러이상의 소득이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만 선진국이 된 사람의 예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발을 밟힌 쪽의 사람이 먼저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합니다. 이것이 선진국이 된 사람들의 기본적인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의작법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이제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때 되어서 생각하면 늦는 것입니다.
국가는 선진국민이 되어도 국민은 선진국민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독자와의 연대입니다만 세론에는 형성되어 가는 것과 만든다는 양면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문은 세론을 만드는 쪽에 속합니다. 그러나 독자의 생각을 관계하지 않으면 독자와 신문은 유리되게 되고 여러분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됩니다. 독자의 가운데에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도 있고 그들은 온갖 각양각색의 의견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이어간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발을 밟힌 사람이 ‘미안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문명국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것을 조금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만원버스에서 남의 발을 밟은 사람은 ‘미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발을 밟힌 사람이 밟은 사람에게 ‘미안합니다’라고 말 하는 것은 먼저 상대를 배려해 주는 아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문화나 문명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상대에 대한 끝없는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의도 상대의 배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래 철학해왔습니다만, 책을 내도 30페이지 이상 읽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충격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철학 책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연숙 교수의 딸, 21세의 화가 (김선우 양)의 그림은 한번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김태창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그녀의 작품에는 한 철학적 생명관의 핵심이 잘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저도 그 견해에 이론은 없습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일부의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심에 예술이 있고 그 꽃이 글이나 그림이나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어묵이 한 그릇의 국물에 잠겨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어묵의 국물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 가지의 맛이 아니라 뒤엉켜 있으면서 새로운 제3의 어떤 맛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그리움’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모든 관계의 가운데에는 그리움이 있고 그 그리움 속에는 한없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것을 표현하고 싶다고 하는 마음이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조 회장은 예술에 관심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시인이기도 하십니다. 시를 짓게 된 계기와 지은 시의 대표적 작품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저는 선조 대대로 문필가의 집에 태어났습니다. 4대조의 선조는 조민이라고 하는 유명한 시인입니다.
큰 할아버지는 조선말 한시인인 괴당 조공희요, 작은 할아버지는 한국 최초로 창작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발간하고 소설 ‘낙동강’을 쓴 포석 조명희 선생입니다.
부친은 교장을 하면서 시도 쓰시고 몇 학교의 교가도 만드셨습니다. 저는 내놓을만한 시인이 아닙니다. 3권의 시집을 냈지만 시문학사에 남을 시는 한 편도 없습니다.”
-제일 감동 받은 책과 좋아하는 시인과 좌우명을 일러주십시오.
“어린시절에 읽으며 혼자 훌쩍거렸던 심훈의 ‘상록수’입니다.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에 공감한 청년이 농촌에 들어가 계몽을 하려하는 내용의 책입니다.
이것을 저는 중학교 시절에 읽고 가장 감동 받았습니다. 일본어판은 가지무라 히데키씨의 번역으로 출판돼 있습니다.
좋아하는 시인은 여러분이 계십니다만 지금 살아있는 분 중 한분을 고르면 신경림 시인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좌우명이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만 제가 고교생 시절에 스스로 적어서 책상위에 뒀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활은 서민을 닮고 이상은 귀족을 닮아라’입니다.”
-끝으로 일본인에게 메시지를 부탁합니다.
“식민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들 세대만해도 일본에 대해서 좋지 못한 감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 동양을 대표하는 문명국이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부러워하는 칭찬의 마음도 함께 섞여 있습니다. 일본이 문명국으로서 동양에 있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다행한 일이고 훌륭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중의 기분이 줄곧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북 대지진 쓰나미 뒤에 일본인이 매우 침착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존경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우익의 일부 국민이 독도(일본명 죽도) 문제로 도발을 반복하는 태도를 보면 한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가 나타나고 있고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새로운 청소년들이 이것을 극복해 가는 교류가 이뤄져서 지혜를 모으면 좋겠는데……. 매우 불안한 마음과 그것을 극복하는 지혜를 젊은 세대가 새로 만들어 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대단히 감사했습니다.
“긴 시간 감사했습니다. 대답이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매우 감명 받았습니다.
< 야마모토 교시·山本恭司>
● 동양철학의 개신창발을 향하여
나는 동양포럼의 운영위원장인 유성종(전 꽃동네대학교 총장) 박사가 조철호 회장에 대한 이해자이고 강력한 지원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 회장의 인물상을 미리 들었다.
조 회장은 충청북도를 중심으로 한국의 언론계에서 45년간을 언론 외길로 살면서 빛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반 군정의 언론인으로 청년시대부터 활약해 왔다.
조씨의 문제의식은 정치방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민족, 철학, 예술, 빈곤, 차별, 평화, 과학 등등 근대 동아시아를 일원적으로 지배하여 온 서양적 가치 체계와 패권주의에 의심을 품어온 ‘의식있는 기자’였다.
유 위원장은 한국 교육계의 여망을 지고 있는 한국교육평가원의 원장과 2개 대학의 총장, 충청북도 교육감·도산서원(이퇴계 선생이 창시)의 원장도 지낸 한국 교육계의 원로. 그의 인격, 식견에 대한 신망이 두텁고 보이스카우트 한국 연맹의 치프 커미셔너(Chief Commissioner)를 8년간이나 맡았다. 일본에 우인과 지인도 많다.
유 위원장은 말한다. “조 회장은 박정희 정권이 진행한 미국 편중의 근대화에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교육감 시대에 어떤 정보당국의 유력자가 찾아왔었습니다. 그는 상사로부터 ‘그대는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 그를 처리할 수가 없느냐’ 라고 되게 혼났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그 정보당국자는 나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지금 세상에 그(조 회장)같은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라고”.
이같은 정보기관의 분위기나 비밀얘기가 일선 교육장의 귀에도 닿아 있었다.
유 위원장이 교육감 시절에 조철호 회장은 충북문인협회 회장이었는데 문인협회가 충북문학전집을 간행했었다.
전국적으로 지역에서 발행된 최초의 문학전집 이었다.
유 교육감은 그 내용과 가치에 깊이 공감하고 충청북도교육위원회가 예산을 세워 전 초·중·고교의 도서로 그 전집을 사서 배부했다.
당시 정보기관의 미움을 받고 있던 조 회장이 주도해 발행한 도서를 대량 구입한 것을 들어서 관계 기관에 투서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장래를 짊어질 청소년 교육에 보탬이 될 문학전집이라며 그 비판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조 회장은 연합통신의 기자시절부터 권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러왔다.
지금도 부친이 교장으로 있는 학교 화재사건 기사를 직접 써서 보도한 유명한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조 회장은 본인이 시인인지라 문화와 예술에 더 없이 애정을 쏟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한 ‘사랑의 점심나누기’는 듣는 이들을 감동 시킨다.
월드비전과 함께 동양일보는 매년 충북도내 시·군을 순회하며 모금한 성금으로 에티오피아에 학교를 짓고 있으며 최근 6년간 집중 지원한 쉬로메다 청소년직업기술학교는 30여개 교실에 5층 건물로 참전용사 자손들에게 자활의 꿈을 키워주고 있다.
● ‘동양포럼’을 통해 세계신문으로 발돋움
- 조 회장은 젊었을 때는 연합통신 등의 기자로서 활동하셨습니다. 기자 출신이 신문사를 창간해 성공하였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은 일이 없습니다. 동양일보를 창간한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조철호 회장 “저는 대학시절 대학신문 기자로 기사 쓰는 일에 관계하여 왔습니다. 당시는 군사독재 정권에서 한국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매우 의아한 상태였습니다. 당시는 일간지라 하더라도 권력과 유착하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신문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순수한 대학생 기자의 시각으로는 못마땅했지요. 그때 “언젠가 나 스스로의 손으로 일간지를 창간하여 건강한 문화시민이 되도록하는데 기여하고 싶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1971년부터 일간신문 기자가 되고 꼭 20년째가 되는 1991년에 동양일보를 창간했습니다. 마음에 새긴 대로 된 셈이지요.”
- 당시의 대통령은요?
“군사정권에서 민주정권에로의 과도기를 담당하였던 최후의 군정대통령 노태우씨였습니다.”
- 충청북도의 청주라는 땅에서 신문사를 만든 이유는?
“뉴욕 타임즈는 지방신문입니다만, 세계의 사람들이 읽는 세계 신문이 됐습니다. 그와 똑같이 지방지라도 그 지방의 특색을 최대한으로 빛내는 신문이 될 수 있다면 세계 신문이 될 것이고 그러므로 (지방에 본사를 두는) 지방신문이라도 뜻을 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지정학적으로 보아서 대한민국의 중심에 있는 것이 충청북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고구려·신라·백제의 삼국시대에 삼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곳이 이 충청도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충청도에는 많은 성토가 있습니다. 그 충북의 중심이 청주입니다.”
- 회장 자신도 청주 출신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청주일보’가 아니고 ‘동양일보’라고 명명한 이유는 왠 까닭입니까?
“신문사의 명칭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먼저 문제였습니다. 지방지면 ‘부산일보’라든가 그 지명을 붙이는 것이 당연했습니다만 나는 ‘동양일보’라고 터무니도 없이 커다란 이름을 붙여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장래 대한민국의 어디에서라도 제호 때문에 곤란을 겪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처음엔 청주에서 10년정도 뿌리를 내린 후 서울로 이전을 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동양일보라고 명명한 두 번째 이유는 장래 동양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에 동양일보는 대한민국이라는 틀을 넘어서 동양의 중심이 된다고 하는 마음을 새겼습니다. 지면의 제자는 푸른 바탕에 흰 글씨로 ‘동양일보’라고 쓰고 있습니다. 푸르름은 용기와 희망의 색입니다.
그러므로 동양일보는 미래지향적이고 나의 꿈을 실현시키는 것이라는 결의를 담고 있습니다. 사시는 ‘이땅의 푸른 깃발’입니다.”
-‘이 땅’은 청주의 땅이로군요?
“청주와 충청도와 대한민국과 동양입니다. 그리고 보통 신문사는 제작정신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양일보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빛남을 위하여’ 라는 방향을 분명히 설정하고 있습니다. 특정 계층이나 잘난 사람들이 아니라 서민 대중과 더불어 보통사람들을 조명하여 그들을 빛나게 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올해는 동양일보 창간 25주년의 축년이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25주년을 기하여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문의 격을 한 단계 높이는 일입니다. 철학을 하여야만 제대로 살 수 있는데 그 길을 만드는 것이 이 시대의 명제입니다. 민중이 철학해야 비로소 세상은 제대로 된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양포럼’을 태동시킨 김태창 선생과 유성종 선생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이라든가 철학이라고 하면 무거운 인상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떻게든 철학을 신문 지면에 살려나가는 모험을 결심하고 있습니다.”
- 이번 가을 창간 25주년을 맞아 제2의 창업분위기를 맞게 될 것인지요.
“나는 신문쟁이의 길 45년간 기사를 쓰고 다듬고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등 활자관계의 일 이외의 사업을 한 일이 없습니다.
보통 신문사는 신문을 내면서 다른 사업을 폭넓게 하여 수익성을 높이고 그것으로 사원의 복지에 환원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그러한 재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창간 25주년을 맞는 올해 그것을 기념해서 본사 사옥을 신축하기로 했습니다. 10층 건물의 신사옥을 현재의 자리에 건축하거나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신축하거나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올 해 안이나 내년 봄에는 모든 계획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사원의 복지를 충실하게 강구하게 될 것입니다. 25주년의 기념행사는 창간일인 10월12일을 전후하여 갖게 될 것입니다.”
-제2의 창간에 관해서 좀 더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제2의 창간은 제2의 비약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겠습니다. 첫째 신문의 품격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독자와 더불어 철학하는 일로 ‘철학하는 신문’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철학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철학한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의 마음으로 체득하고 자기의 손발로 실천하는 일반 대중이 길러지는 데에 도움이 되는 언론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신문의 질적 전환입니다.
또한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신문사로서 사원의 복지를 높이고 싶습니다. 사원은 이때까지 낮은 보수를 받으면서도 헌신적으로 일 해주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동양일보에 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있는 신문사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부적으로도 외면적으로도 동시진행의 대전환을 꾀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25년을 맞는 동양일보사 회장으로서 나의 결심이고 유성종 . 김태창 선생 등 동양포럼 관계자들과 사원들이 함께 하고자 한 일입니다.”
-혼자서 동양일보를 창간한다고 하는 일에 불안은 없었습니까?
“동양일보사의 창간을 앞두고 독지가 몇 분이 30억원 이상을 출자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회사에 일제히 세무조사가 들어갔습니다.
세무조사를 받게 되면 온전히 빠져나가는 회사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분들이 찾아와 신문 창간을 도울 수 없는 전후 사정을 알려주었습니다.
(한사람의 신문기자 출신의 인간이 궐기하였지만 국가권력이 ‘장수를 쏘고자 한다면 말을 쏴라’라는 것일까. 작은 협력자를 일제히 공격한 것이다. 당시의 배후에서 한국 중앙정보부 (KCIA)가 움직인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했었다.
군사정권에의 엄한 언론활동으로 곱게보이지 않던 조철호 회장이 신문사를 창간한다는데 그냥 놓아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징세권력을 행사하고 싹트기 전에 자금 면을 단절하여 계획을 좌절케 하려고 노골적으로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불가사의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협력자의 자금을 기대하지 않고 나 자신이 조달할 수 있는 자금만을 바탕으로 하여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재정적인 면에서 매우 가혹한 상황에 쫓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꿈꿔온 ‘신문을 발행해서 서민이 빛나는 세상을 연다’라고 하는 열망을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악전고투했습니다만 결과로서 공채로 엄선한 사원 77명으로 동양일보를 출범시켰습니다.”
(전전의 일본에는 권력과 정면으로 싸우면서 ‘골계신문(滑稽新聞)’을 발행하는 미야배 가이고쓰(宮武外骨)와 같은 아주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전후 신문사 창간에 열망한 사람은 혼다 쇼이치(本多勝一)정도가 아니었을까. 반 권력으로 몇 사람의 동인이 시작한 주간 금요일(週間金曜日)은 동양일보와 같은 일간 신문은 아니다.)
-믿었던 협력자금의 길이 끊어졌는데 어떻게 해서 신문발행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 당시엔 신문사를 시작한다면 우선 윤전기가 필요합니다. 작성한 기사자료를 필름화해 윤전기를 돌리는 방법이지만 나 혼자 조달한 적은 돈으로 건물이며 윤전기며 신문 제작설비를 갖춘다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나는 “돈이 없다. 그러나 신문은 만든다”라는 생각을 굳히고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전 과정을 컴퓨터화 하여 제작인원을 줄였습니다.
설비비와 인건비를 최소한도로 한 것입니다. 커다란 신문사라면 전 과정을 전산화 하는 것이 좋다고 알고 있어도 노동조합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개혁은 어렵습니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노동조합이 강하다.)
나는 자금의 입구가 폐쇄된 궁상을 역으로 하여 생(省)에너지 시스템의 신문 발행 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정녕 궁즉통(窮卽通)입니다.
컴퓨터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원이나 새로운 기술면의 협력자도 나타나서 동양일보의 창간은 계획대로 가능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77명의 사원의 급료가 이내 필요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구독자와 광고수입만으로는 어떻게 경영이 되었습니까?
“일본에서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만 새로이 신문사를 만들어서 신문 발행을 시작한다고 하면 최초의 6개월에서 1년동안은 무료 서비스 기간을 설정합니다. 무료로 신문을 읽고 공감을 얻어서 일정의 구독자를 확보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동양일보에는 돈이 없었습니다. 무료기간은 없고 처음부터 1개월이 지나면 구독료를 받는 ‘서비스기간 없는 신문’ 으로 전환하여 색다른 화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한국에도 ABC협회라고 하는 신문발행부수를 공인하여 공개하는 기관이 있습니다.
동양일보의 발행부수가 그 당시 9만8000부라고 인정됐습니다. 0에서 시작한 신문으로서는 적잖은 숫자입니다. 민중의 지지가 얻어졌다는 일로 우리들도 꽤 자신을 얻었던 것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다음이 보수계의 김영삼 정권,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으로 이어집니다. 시대의 흐름이 뒷받침하여 주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까?
“예, 순풍의 상태가 이어지게 되고 본체의 동양일보 외에 ‘소년 동양’을 창간하고 그것을 얼마 후엔 ‘소년동양일보’라 하는 일간지로 발전시켰습니다. 또 ‘동양라이프’라고 하는 월간 화보를 내기도 하여 사세확대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흐름을 바꾼 것이 1999년의 IMF 외환위기입니다. 그때의 일번 타격을 받은 것이 달러를 많이 쓰는 기업입니다.
우리들도 그랬습니다. 컴퓨터를 비롯해 필름이며 PS판이며 신문제작의 모든 자재는 수입품으로 충당했기 때문입니다. 부도를 냈습니다. 국내의 외화가 없었기 때문에 부도의 도미노 현상을 피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문은 계속 발행하겠다는 방침으로 전 사원들이 더욱 결속했습니다. 부도가 나는 이튿날 동양일보 1면에 ‘동양일보는 부도를 냈습니다.
그러나 동양일보는 계속 발간됩니다’라는 사고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동양일보를 잇게 하자’라는 목소리가 높아져서 1개월 여 만에 무려 1억 원을 넘는 기부금이 모아졌습니다.
몇 만원에서 몇 십 만원까지 참으로 많은 분들이 동양일보가 계속 발행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었습니다.
덕택으로 동양일보는 단 하루도 휴간하는 일이 없이 발행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IMF위기에서 탈출하면서 어떤 각오를 갖게 되었는지요.
“IMF 직전에 280명이던 사원은 100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일방적인 해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한사람도 해고자를 내지 않았던 것은 회사의 권유로 사원이 자발적으로 다른 기업에 전직하던가, 길을 찾아서 나가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에 소년동앙일보라든가 동양라이프 같이 채산이 맞지 않는 발간물은 폐간하고 일체의 거품을 빼는 경영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의 문화적 욕구와 문화에 대한 시대적 소명을 의식하는 지면을 구성하는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이와 같이 동양일보의 25년은 파란 만장의 역사였고 건강한 문화시민을 위한 방향설정과 고집스런 행보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새삼스럽게 질문을 합니다. 신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신문이란 중요한 정보원의 역할을 이루는 것입니다.
현대는 정보가 넘쳐흐르고 있습니다만 그 정보를 정리하고 편집한다는 작업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뉴스를 아는 전문가들의 집단인 신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보 과잉의 시대야 말로 신문의 선별이 중요합니다.
신문사로서는 정보를 정확하게 정리하여 독자가 알 수 있게 뉴스의 가치별로 친절히 제공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또 한가지 신문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뢰받는 신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절대 조건입니다.
큰 신문이든 작은 신문이든 신뢰를 얻고 있느냐 어떤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일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신문이라는 것은 무엇이냐’하고 묻는다면 ‘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을 맺는 끈이 신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사람과 사람이 있는 한 끈이 없어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철학하는 국민이라든가 철학하는 신문이라는 발상이 원래부터 회장님한테 있던 것입니까?
“나는 꽤 오래전부터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철학한다고 하는 것에도 마음을 써왔습니다. 특히 민중·서민·시민에 비춰 의미와 가치를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 줄곧 나의 사고의 근원에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철학한다는 일에 내가 커다란 힌트를 얻은 것은 영국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입니다. 젊은 시절에 읽고 커다란 자극을 받았습니다.”
-조 회장이 동양포럼을 기획한 동기와 이후의 전망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일본과 중국의 사이에 끼어있는 한국은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 나는 그 일을 줄곧 생각하여 왔습니다.
거기에 김태창 박사와 유성종 위원장으로부터 철학포럼을 열면 어떠한가라는 제안을 받고 생각한 것이 ‘동양포럼’이었습니다.
사내에서는 지면이 너무 무거워진다는 저항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학하는 시민을 기르기 위해서 선두에 서야 하는 역할을 이루는 것은 신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동양일보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문에는 여러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그 중에 철학하는 신문이라는 것도 있을법하지 않느냐, 물론 한·중·일의 석학이 모여 의논하는 내용을 신문에 반영한다는 작업은 간단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따른 노력과 재정적인 지원도 간단치 않을 것입니다. 금방 어떤 효과가 나오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지면제공에 관해서는 회사의 의지에 관련한 전권사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20년 가량 앞으로까지 입니까?
“아니. 그 이상 이어질 것입니다. 설령 내가 동양일보에서 물러 난다해도 ‘철학하는 국민이어야 산다’는 명제는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어져야 회사의 전통과 가치가 더해진다는 데 이의를 갖지는 않을 것 입니다.
사풍(社風)이란 안이한 업무추진에서가 아니라 몰입과 집중, 지속적인 열정이 마침내 빚어내는 예술작품 같은 것이지요. 결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신문사에서 20년 이상을 한 사람이 정상에 서서 경영하고 있는 사례는 타에 예가 없다고 한다. 통계는 사원도 빈번히 교체되지만 동양일보는 25년 전의 창간사원들이 여럿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희유의 특이한 사풍이 있다.)
-조 회장이 무엇보다 열의를 담아 말씀해주신 일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지방신문에서 세계로 가는 장대한 계획을 세우고 신문으로서 하나의 모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은 참으로 굉장히 빛나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끈이라고 할 때에 두 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중·일 삼국의 현상, 또는 세계의 현상에 대해 어떠한 미래 예측을 하고 계시는 건지. 그때 회사가 짊어져야 하는 역할과 그것을 이뤄나가는 이미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둘째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고 할 때에 독자와 더불어 편집한다고 하는 선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방법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일·중·한 삼국의 현상과 미래에 대해서는 한국이 산업화 하여 경제발전을 해가는 최후에 당도하는 것인 예의작법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갖추지 않으면 안되는 기본적인 예의라고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라고 하는 데 이를 것입니다.
(조 회장이 일·중·한이라고 자국 명을 제일 나중으로 돌려 말한 것은 인터뷰인 관계로 일본인에 대한 섬세한 배려이고 정녕 문명국의 예의에 들어맞고 있다. 이러한 상대를 먼저 세우는 마음 씀의 가운데에서만이 세계 평화의 원리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면 연간 3만 달러이상의 소득이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만 선진국이 된 사람의 예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발을 밟힌 쪽의 사람이 먼저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합니다. 이것이 선진국이 된 사람들의 기본적인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의작법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이제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때 되어서 생각하면 늦는 것입니다.
국가는 선진국민이 되어도 국민은 선진국민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독자와의 연대입니다만 세론에는 형성되어 가는 것과 만든다는 양면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문은 세론을 만드는 쪽에 속합니다. 그러나 독자의 생각을 관계하지 않으면 독자와 신문은 유리되게 되고 여러분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됩니다. 독자의 가운데에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도 있고 그들은 온갖 각양각색의 의견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이어간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발을 밟힌 사람이 ‘미안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문명국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것을 조금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만원버스에서 남의 발을 밟은 사람은 ‘미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발을 밟힌 사람이 밟은 사람에게 ‘미안합니다’라고 말 하는 것은 먼저 상대를 배려해 주는 아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문화나 문명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상대에 대한 끝없는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의도 상대의 배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래 철학해왔습니다만, 책을 내도 30페이지 이상 읽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충격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철학 책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연숙 교수의 딸, 21세의 화가 (김선우 양)의 그림은 한번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김태창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그녀의 작품에는 한 철학적 생명관의 핵심이 잘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저도 그 견해에 이론은 없습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일부의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심에 예술이 있고 그 꽃이 글이나 그림이나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어묵이 한 그릇의 국물에 잠겨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어묵의 국물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 가지의 맛이 아니라 뒤엉켜 있으면서 새로운 제3의 어떤 맛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그리움’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모든 관계의 가운데에는 그리움이 있고 그 그리움 속에는 한없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것을 표현하고 싶다고 하는 마음이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조 회장은 예술에 관심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시인이기도 하십니다. 시를 짓게 된 계기와 지은 시의 대표적 작품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저는 선조 대대로 문필가의 집에 태어났습니다. 4대조의 선조는 조민이라고 하는 유명한 시인입니다.
큰 할아버지는 조선말 한시인인 괴당 조공희요, 작은 할아버지는 한국 최초로 창작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발간하고 소설 ‘낙동강’을 쓴 포석 조명희 선생입니다.
부친은 교장을 하면서 시도 쓰시고 몇 학교의 교가도 만드셨습니다. 저는 내놓을만한 시인이 아닙니다. 3권의 시집을 냈지만 시문학사에 남을 시는 한 편도 없습니다.”
-제일 감동 받은 책과 좋아하는 시인과 좌우명을 일러주십시오.
“어린시절에 읽으며 혼자 훌쩍거렸던 심훈의 ‘상록수’입니다.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에 공감한 청년이 농촌에 들어가 계몽을 하려하는 내용의 책입니다.
이것을 저는 중학교 시절에 읽고 가장 감동 받았습니다. 일본어판은 가지무라 히데키씨의 번역으로 출판돼 있습니다.
좋아하는 시인은 여러분이 계십니다만 지금 살아있는 분 중 한분을 고르면 신경림 시인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좌우명이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만 제가 고교생 시절에 스스로 적어서 책상위에 뒀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활은 서민을 닮고 이상은 귀족을 닮아라’입니다.”
-끝으로 일본인에게 메시지를 부탁합니다.
“식민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들 세대만해도 일본에 대해서 좋지 못한 감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 동양을 대표하는 문명국이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부러워하는 칭찬의 마음도 함께 섞여 있습니다. 일본이 문명국으로서 동양에 있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다행한 일이고 훌륭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중의 기분이 줄곧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북 대지진 쓰나미 뒤에 일본인이 매우 침착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존경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우익의 일부 국민이 독도(일본명 죽도) 문제로 도발을 반복하는 태도를 보면 한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가 나타나고 있고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새로운 청소년들이 이것을 극복해 가는 교류가 이뤄져서 지혜를 모으면 좋겠는데……. 매우 불안한 마음과 그것을 극복하는 지혜를 젊은 세대가 새로 만들어 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대단히 감사했습니다.
“긴 시간 감사했습니다. 대답이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매우 감명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