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 EBS <인문학 특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최진석 (지은이)위즈덤하우스2015-03-20
편집장의 선택
"노자를 오늘, 다시 불러내야만 하는 까닭"
공자와 노자는 동양문화권에서 가장 자주 호명되는 철학자다. 게다가 둘은 대척점에 놓여 비교되기 일쑤다. 보통 공자는 인위에 기반한 문화론자로, 노자는 무위에 기반한 자연론자로 해석되는데, 이런 해석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에도 끝이 없다. 두 철학자가 살던 시대가 오늘과 다르기에 해석이 분분할 테고, 두 철학자가 마주하고 해결하려던 문제는 여전하기에 끊임없이 이름이 불릴 텐데, 철학자 최진석은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왜 굳이 노자를 선택했고, 그 사상을 어떻게 해석한 걸까.
최진석은 우선 동양사상의 큰 줄기를 짚어가며 노자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무언가를 하자고 주장한 게 아니라 나름의 방법을 제시하며 그것을 하자고 주장했다는 말인데, 이념보다 일상에서의 삶에 주목하고, 개인을 구조 속에 통합하는 조직보다는 자발적 개인의 자율적 통합을 강조하는 노자의 사상이 각자의 특성보다 표준화를, 구체적 실재보다 이념을 중시한 기존의 사회 시스템을 넘어설 방법이라 해석한다. 거대 국가 시스템으로 이행하던 노자 시대와 거대 국가 시스템이 한계에 이른 오늘 시대가 맞닿아, 노자를 불러내야만 했다는 말이다. 이런 시선은 당연히 사회 시스템에 그치지 않고 개인으로 연결되는데, 자신을 시스템의 일원, 즉 일반명사로 방치하지 말고, 개별자의 자발성이 발휘되는 고유명사로 살려내라는 결론에 이른다. 최진석의 적극적인 해석 속에서 비로소 노자 철학이 오늘의 철학으로, 노자가 현대 철학자로 되살아나는 듯하다.
- 인문 MD 박태근 (2015.03.10)
기본정보
파일 형식 : ePub(13.35 MB)
TTS 여부 : 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 308쪽, 약 16.4만자, 약 4.1만 단어
가능 기기 : 크레마 그랑데, 크레마 사운드, 크레마 카르타, PC,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폰/탭, 크레마 샤인
ISBN : 9788960868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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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EBS <인문학 특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단순히 노자 철학을 소개하거나 《도덕경》을 해설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는 노자와 《도덕경》을 화두로 삼아, 인류의 생각과 철학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피는 것부터 시작하여 인생 철학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또 개인의 삶을 바꾸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를 변혁하는 데 노자의 사상이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도 설명한다. 노자의 시대적 맞수 공자의 사상과 치밀하게 비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헤겔·다윈·마르크스·프로이트·니체 등 근현대 서구의 사상가들과도 전방위적으로 견주며 노자를 현대적으로 재탄생시킨 저자의 지적 모험은 인문학적 생각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길로 인도한다.
목차
서문
1. 생각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 인간, ‘생각의 터전’을 마련하다
:: ‘나’라는 존재의 발견
:: 신과 소통하는 내공, ‘예’와 ‘덕’의 출현
:: 천명보다 ‘인간의 힘’을 믿다
:: 덕은 지식이 아니라 동력이다
2. ‘생각하는 힘’이 만든 역사
:: 주변과 중심의 역전, 그리고 ‘철학’의 탄생
:: 철기, 부의 흐름을 바꾸다
:: 하늘의 시대에서 땅의 시대로
:: 법法의 등장이 말해주는 것
:: 인간의 생각으로 닦은 길, 도道
:: 노자, 공자를 꾸짖다
3. 유와 무로 완성한 노자의 사상
:: 공자와 노자, 천명론을 극복하는 법
:: 정의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 본질을 부정하고 관계를 보다
:: 관계론의 총결, 유무상생
4. 가짜에 속지 않는 법, 관계론
:: ‘생각의 틀을 버리는 것’이 무소유다
:: 차이가 없다면 의미도 없다
:: 불교에서 말하는 관계론
:: 《주역》에서 말하는 관계론
:: 관계론 철학의 종착점, 《도덕경》
5. 왜 현대 철학자 ‘노자’인가
:: 철학이란 무엇인가
:: 세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6. 지知가 아닌 명明으로 본다는 것
:: 진실의 세계는 저곳이 아닌 이곳에
:: 해와 달을 품다
7. ‘안다’는 것은 결국 ‘모른다’는 것
::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위대함
:: 사랑과 이별은 하나다
:: 확신하지 않는 힘
:: 자기표현이 안 되는 공부는 끊어라
8. 무위,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 살아 있는 나무만이 흔들린다
:: 코끼리가 살얼음 밟듯이 행동하라
:: 나는 타인의 타인일 뿐
::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없다
:: 물러서면 앞서고 숨으면 빛난다
9. 불편한 법칙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 보여지는 대로 보라
:: 지배당하지 않는 힘
:: 욕망과 희망의 자발성
:: ‘선善’이라는 이름의 모순
10. ‘고유명사’로 살아간다는 것
:: 자기로부터의 혁명
:: 삶은 결국 ‘내 몸’에 있다
::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존재하라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학고창신學古創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만의 능력으로 건립한 그 길을 바로 ‘도道’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만의 능력이란 믿음의 힘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말해요. 인간은 이제 천명을 따르지 않고 도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이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에게 익숙한 도를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도의 출현은 바로 중국 문명에서 최초로 터져 나온 인간의 독립선언이에요. 도의 출현 이전에 중국인이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개의 중심축은 ‘천’과 ‘덕’이었습니다. 도가 출현하고 나자 이제 중국인들은 세계와 관계하고 세계를 해석하며 또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두 개의 중심축을 새롭게 갖게 됐으니 그것이 바로 도와 덕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道德’은 바로 이 도와 덕을 붙인 말이지요.---71쪽
노자의 꿈은 인간의 주관성을 완전히 탈피해 자연의 객관성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가치’의 세계와 결별하고, 자연이라고 하는 ‘사실’의 세계에서 인간질서의 근거를 발견하려는 것이죠. 자연이 움직이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서 혹은 모방해서 살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연의 질서는 누구나 관찰할 수 있지요. 또 누구에게나 똑같은 모습으로 열려 있습니다. 그러니 객관적일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투명하고 어디에나 똑같이 적용되는 보편성을 가지게 되겠지요. 천명론을 극복할 수 있는 객관성?보편성?투명성은 이렇게 확보되었습니다.---87쪽
노자는 거대국가 시스템이 아니라 작은 나라 시스템인 지방자치제를 지향합니다. 그런데 지방분권이나 지방자치를 하려면 하나의 표준으로 전체를 묶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분리된 곳들 각자에 맞는 다양한 기준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저 멀리서 표준으로 기능하는 보편적 이념을 버리고 바로 여기에 있는 구체적인 것들의 자율성을 취하는 방식, 즉 ‘거피취차去彼取此’가 더 적합한 방식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습니다.---160쪽
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인식 능력은 어때야 할까요? 노자에 의하면 그것은 ‘지知’의 방법이 아니라 ‘명明’의 방법이어야 합니다. 해를 해만으로 보거나 달을 달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달을 해와의 관계 속에서, 해를 달과의 관계 속에서 보는 것이지요. 해를 해로 보고,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은 해와 달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요. 분리된 것으로서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지’라고 합니다. 반면 해와 달을 상호 연관 속에서 인식하는 것을 ‘명’이라고 하는데, 달과 해가 존재적으로 따로따로 분리된 두 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이루는 한 벌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죠. 해와 달을 동시에 포착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통찰입니다.---194쪽
대립면의 긴장 상태를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은 과감하지 않으며 광신狂信하지 않아요. 광신은 대개 협소한 믿음에서 옵니다. 앞서 말한 “저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자들로 하여금 과감하게 무엇을 하려고 하지 못하게 한다[使夫智者不敢爲也]”는 말은 사람을 광신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광신하는 사람은 대개 헛똑똑이라는 말입니다. 충혈된 눈으로 과감하게 말하는 사람, 굵은 팔뚝을 휘저으며 주장하는 사람, 깃발을 들고 소리치는 사람, 머리띠를 하고 내달리는 사람, 서둘러 충고하려 덤비는 사람이 대개 헛똑똑이라는 것입니다. 헛똑똑이들이 판치는 세상은 거칠고 갈등이 심하며 선명성 경쟁이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세계가 대립면의 긴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시 말해 대립면의 경계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진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214쪽
무위란 바로 이런 이념이나 기준과 같은 관념의 구조물에 수동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세계의 변화에 따라 자발적이고 유연하게 접촉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래서 ‘유위’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자신의 기준에 따라 ‘봐야 하는 대로’ 보게 되지만, ‘무위’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어떤 기준의 지배도 받지 않기 때문에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습니다.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보고 반응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는 사람은 과거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겠죠. 그러니 무위의 태도를 지녀야만 변화하는 진실과 접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244~245쪽 접기
P. 300 거룩함은 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서 있는 바로 여기가 거룩함이 등장하는 원초적 토양입니다. 이상적인 삶은 저 멀리 있는 곳에 도달하려는 몸부림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착실한 발걸음일 뿐입니다. 저 먼 곳에 인위적으로 걸어 놓은 기준을 추종하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자기 자신에 집중해야 합니다.
당신은 보편적 이념의 수행자입니까, 자기 꿈의 실현자입니까?
당신은 바람직함을 수행하며 삽니까, 바라는 걸 실행하며 삽니까?
당신은 원 오브 뎀 one of them 입니까, 유일한 자기입니까?(306) - miru2003
왜 집착을 할까요? 그 대상을 더 좋은 것 또는 `진짜`라고 가치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137) - miru2003
떠난 버스가 자신이 탈 버스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상을 짓는 행위입니다. 버스는 그냥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일 뿐인데 말이죠. 상을 짓는 행위, 어떤 것을 `자기 뜻대로` 정해버리는 행위가 불교에서 말하는 `소유` 입니다. (중략) 무소유라는 말은 재산을 많이 갖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어떤 형상을 지어서 그것을 진짜로 정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138~139) 접기 - miru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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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최진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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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새말새몸짓’ 기본학교 교장이다. 건명원(建明苑) 초대 원장을 지냈다.
1959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 곁의 작은 섬 장병도에서 태어나 함평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베이징대학교에서 당나라 초기 장자 해석을 연구한 『성현영의 ‘장자소’ 연구(成玄英的‘莊子疏’硏究)』(巴蜀書社, 2010)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가(道家) 철학자인 그는 원래 서양철학을 공부하려고 독일 유학을 계획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독일철학... 더보기
최근작 :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 총 3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당신은 보편적 이념의 수행자입니까, 자기 꿈의 실현자입니까?”
“당신은 바람직함을 지키며 삽니까, 바라는 걸 이루며 삽니까?”
“당신은 원 오브 뎀one of them입니까, 유일한 자기입니까?”
-EBS <인문학 특강> 화제의 명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를 책으로 만나다!
EBS <인문학 특강>에서 최진석 교수가 청중에게 던진 이 세 가지 질문은, 지식과 경험을 쌓아가지만 더 자유롭지 못하고 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줬고, 이후 그의 강연에 더욱 열광하게 만들었다. 저자 최진석 교수는 대학과 기업, 각종 단체를 종횡무진하며 사람들의 생각을 명쾌하게 만들고 허를 찌르는 깨달음과 감동을 선사하는 동양철학의 대가이자 ‘창조 인문학의 전도사’로 통한다. 그는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을 통해, 2500년 전 노자의 생각법에서 ‘현대인의 생존법’을 끄집어내는 동시에 지금 우리의 삶과 사유를 뒤흔드는 통찰을 전달한다.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은 단순히 노자 철학을 소개하거나 《도덕경》을 해설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는 노자와 《도덕경》을 화두로 삼아, 인류의 생각과 철학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피는 것부터 시작하여 인생 철학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또 개인의 삶을 바꾸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를 변혁하는 데 노자의 사상이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도 설명한다. 노자의 시대적 맞수 공자의 사상과 치밀하게 비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헤겔·다윈·마르크스·프로이트·니체 등 근현대 서구의 사상가들과도 전방위적으로 견주며 노자를 현대적으로 재탄생시킨 저자의 지적 모험은 인문학적 생각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길로 인도한다.
250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인생 철학의 진수!
자유와 행복에 대한 명쾌한 해법, ‘노자 인문학’으로 답하다
이 책은 노자 인문학을 토대로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해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대답은 잘하면서도, 질문은 잘하지 못하는 현상을 지적하며 “자기표현이 안 되는 공부는 즉시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인의식’과 관련해서는 역으로 자기가 스스로를 주인으로 생각지 않고 ‘손님’으로 여겨야 상대방과 열린 관계로 상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자살률이 세계 1위인 우리 사회에 대해,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보편적 기준이 너무 강하고 그 기준이 획일화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경고하면서 스스로를 거대한 가치 기준 아래 두고 하찮은 존재로 만들지 말고 ‘각자 사는 맛’을 가져야 함을 설파한다. 책은 우리를 일상에서 좌절하게 만드는 선택, 불안, 사랑, 소통, 행복에 관한 문제들에 명쾌한 해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살며, 내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는 길 제시
공부를 끊고 생각을 시작하라!
이 책은 세계가 본질이나 중심이 아닌 ‘관계’로 되어 있다고 본 노자 사상을 꿰뚫어봄으로써 ‘생각하는 힘’을 복원하는 길을 제시한다. 저자는 현대인이 외부로부터 강한 신념, 이념, 가치관, 지적 체계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잃어간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생각하는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신념이나 가치, 이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경계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념과 기준에서 벗어난 ‘나(자기)’로 돌아가야만 ‘생각하는 힘’, 즉 인문적 통찰력이 생긴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자기’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기 자신을 일반명사 속에 함몰되도록 두지 않고, ‘고유명사’로 살려내자는 것이다. ‘고유명사’로 살아가는 것은 결국 자기로부터의 혁명에서 시작된다는 저자의 메시지는 지금-여기를 사는 우리에게 큰 공감을 안겨줄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삶의 양식이 자기로부터 나오지 않은 삶,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 자기로부터 나오지 않은 삶은 결코 정상일 수 없습니다. 자발적이지 않은 것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거룩함은 결코 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자신이 서 있는 지금, 여기가 거룩함이 등장하는 원초적 토양입니다. 이상적인 삶은 저 멀리 있는 곳에 도달하려는 몸부림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착실한 발걸음일 뿐입니다.”
이제 독자들은 최진석 교수가 대중과 직접 소통하며 전해주는 노자의 철학과 생각법을 통해 시대를 살아가는 인문적 힘을 배양하고,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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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유위적인 생활을 하다가 사냥하는 말에서 내려온 때에 무위 철학을 맛보다 구매
Blue 2016-01-13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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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리는 무늬'란 책에 반해 최진석의 책을 구입했다. 반쯤 읽었는데, 좀 어렵고 헷갈려서 집중력이 떨어진다. 근데 덮을려고 하면 좋은 내용이 튀어 나와서 쉽게 포기하기도 애매한 책. 최진석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부터 추천한다. 구매
바다7 2015-03-25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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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에 대해서 가장 잘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놓은 책. 이해가 당장 안되도 뒤로 가면 갈수록 저절로 이해가 되는 책이고 마음에 꼭 들어 오는 좋은 책이라 생각됩니다. 공자,맹자,노자,장자에 대한 철학적 구분이 조금은 되는 것 같습니다. 구매
머를볼까 2015-10-23 공감 (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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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사상을 처음 접하는 제경우 편안하게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느낌입니다 구매
momo 2016-07-2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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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사상에 대하여 심도 있는 이해를 도와 주고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알 수 있어요. 구매
yeshot21 2015-12-08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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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무위(無爲)와 유위(有爲)의 관계론 새창으로 보기 구매
최진석 교수가 생각하는 노자(老子) 인문학에 관한 책이다.
전작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 이어 이번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에서 노자의 사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노자의 사상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지 정리되어 있다.
노자를 빌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에게 집중하라'와 '자기로 돌아가라'로 정리된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서 강조된 '오직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의 메세지가 다시 반복되는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이번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에서는 <도덕경>의 해석을 통해 보다 내용을 심화시켰고, 불교, 주역 등 다른 동양철학과 파르메니데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등 서양 철학자의 주장을 이용해서 노자의 메세지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며 노자 철학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내용적으로 전작보다 나아갔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최진석 교수의 전체적인 해석에는 동의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의문이 생기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도덕경>37장의 해석이다. 저자는 <도덕경>이 천하를 경영하는 학문이며, 이를 '무위'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고 주장을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내용으로 <도덕경>37장을 들고 있다.(p89)
道常無爲而無不爲.
도상무위이무불위. (무위해라. 그러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저자는 위 부분을 "내가 말하는 대로 해봐라. 그러면, 가장 강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천하도 네 손 안에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해석을 한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반드시 그렇게만 해석되지는 않을 것 같다.
'무위(無爲)'를 행해서 이룬다는 의미는 '무위'를 저자가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행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무위'를 하라는 수단으로 해석한 것은 아닐까.
영어에서 'nothing'이 '없다'는 상태를 의미하지 '없음'이라는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무위' 역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또한, 천하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무위'를 행하면,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해석은 자신을 비우라는 내용과는 '목적'과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내게는 위의 말이 자신을 끊임없이 비워가다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로 더 다가온다.
이상의 두 가지는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리라 생각하고, 보다 상세한 저자의 생각은 더 깊게 들어간 저자의 또 다른 저서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을 통해 확인해봐야겠다.
이 책이 <인간이 그리는 무늬>와 보이는 또 다른 차이점은 저자가 생각하는 '유(有)-무(無)'관계론이다. 저자는 노자의 '有無相生'의 관계를 '대립면의 상호의존' 또는 '새끼줄처럼 꼬임'으로 해석하여, 왕필의 해석을 비판한다.
왕필은 '도(道) -> 무(無) -> 유(有) -> 만물(萬物)' 의 생성으로 이해하는 반면, 기본적으로 저자는 '유-무' 의 관계에서 '도(道)'가 생성된다고 보았다. 마치, '유-무'의 관계를 저자는 DNA의 이중나선구조로 파악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유기체의 근원인 DNA의 구조와 만물 생성 이치인 '유(有)-무(無)'는 관련이 있을 것도 같다.
이 책은 'EBS 인문학 특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의 특성상 저자의 생각을 보다 면밀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한계점을 감안한다면, 최진석 교수의 노자 사상에 대한 관점과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세지를 같이 살펴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유익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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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8-27 공감(40) 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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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도를 아십니까? 새창으로 보기
남들보다 더 살고, 잘 보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자신의 유능함을 과시하는 성향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부자와 빈자가 구분되는 세상이 되면서 부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특별한 단어’를 만든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도 귀족이 되는 부자들은 자신만의 계급의식(class consciousness)을 드러내고 싶었다. 혈연관계 중심으로 신분이 세습되는 고대 중국 사회에서 탄생한 ‘특별한 단어’가 바로 ‘군자(君子)’다. ‘군자’의 반대말은 ‘소인(小人)’이다. 소인은 육체노동을 하는 백성이다. 그러면 군자는 정신노동, 학문을 가까이하는 사람이다. 맹자(孟子)는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를 가지고 군자와 소인을 정의했다. 계급 사회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철기 시대부터 봉건적 계급의식은 공고해진다. 중국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는 인류가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오는 최대의 격변기였다. 이 변화의 과정에서 생산력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고, 비교적 윤택하게 살 수 있게 된 소인들이 군자를 따라 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계급 갈등이 일어난다.
자기들만의 이익만을 위한 갈등과 분쟁이 극에 달할수록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는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이때 공자(孔子), 맹자, 한비자(韓非子) 등 제자백가(諸子百家)로 알려진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여기에 노자(老子)가 빠지면 섭섭하다. 노자는 동시대 사상가인 공자처럼 분열과 반목이 이어지는 난세의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노자는 공자와 사뭇 다른 사상적 노선을 취했다. 공자는 바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인(仁), 즉 군자의 덕목을 사람들이 추구하지 못해 사회가 혼란스러워졌다고 생각했다. 반면 노자는 오히려 사람들이 오히려 인위적인 법과 도덕에 얽매여서 자연스러운 본성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노자는 공자의 주장에 반대했다.
노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본성을 잃어가는 것을 일찌감치 우려했다. 그는 인위적인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가치론적 판단’을 부정하고, 거기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인 무위(無爲)의 경지를 지향한다. 무위의 경지는 모든 가치 판단이나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의 단계이다. 억지를 부리지 않고 원래 자연 그대로의 순리에 따르는 것은 인간 본연의 회복이며, 자유를 추구하는 삶이다. 유가 사상가들은 도가사상을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자들이 좋아하는 초월적인 사상’이라고 비난한다. 요즘에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가끔 길을 걷다 보면 “도를 아십니까?”라는 말로 사람들에 접근해 귀찮게 하는 수상한 사이비 종교 전도사를 만난다. 사이비 종교 전도사를 만났던 찜찜한 기억 때문인지 도(道)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은 노자의 도를 현실성이 떨어지는 관념적 개념으로 인식한다. 사실 원문 풀이가 제대로 된 《도덕경》을 읽어도 도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에는 시대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실전 감각이 깃들어 있다. 건명원 초대 원장인 최진석 교수는 노자를 ‘시대가 낳은 아들’이라고 했다. 아들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기성세대로 상징하는 아버지에 반항한다. 노자는 개인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인위적인 기성 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하려고 했다. 노자가 태어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상제(上帝)’라고 부르는 신에게 빌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았다. 노자는 인간이 스스로 깨달아야 할 자기 존재의 의미를 ‘개인의 자유’라고 봤다. 그리고 자기 존재의 의미를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세상은 ‘관계’를 지향하는 사회이다. 최진석 교수는 노자 사상의 핵심을 함축한 유무상생(有無相生)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현대적인 단어인 ‘관계’와 함께 설명했다. 유무상생. 이 말은 ‘있음(有)’과 ‘없음(無)’이 새끼줄로 꼬여 있는 형태가 되어 서로 어우러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유무상생의 세계는 ‘대림면의 꼬임’으로 구성되어 있고, 서로 대립하는 사물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될 수 있도록 수양을 권한다. ‘군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받고, 제대로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만이 획득할 수 있는 일반 명사다. 그러나 노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반대하고 공자가 만들어낸 일반 명사를 거부했다. 그는 인간 존재 그 자체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세상을 원했다. 유가 사상과 도가 사상을 비교하는 순간,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편견이 생긴다. 편견은 우리의 눈과 정신을 가리는 인위적인 거미줄과 같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거미줄 틈 사이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게 좁은 틈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사회의 다양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렇다 보니 나와 정반대인 대상을 만나면 무조건 나빠 보이고, 해롭다고 믿는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당연하다고 믿는 사람은 ‘생각하는 힘’이 부족하다. ‘생각하는 힘’이 없으니까 ‘편견’의 거미줄에 걸린 ‘자기 자신’을 구출해낼 능력도 없다. 거미줄에 빠져나오려면 남의 시선, 남의 눈치, 남의 생각 등 인위적인 요소들로 채워진 가짜 ‘나’를 비워내야 한다. 춘추전국시대보다 더 혼란스러운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각하는 힘’을 키우려면 노자를 공부해야 한다. 노자의 사상은 현실적인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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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1 공감(32) 댓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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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而不肆 光而不耀를 생각하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
낭중지추인 친구가 있다.
가만히 있으면 충분히 대박인데,
꼭 자기 입으로 잘난 척을 하여 초를 치고, 쪽박을 깬다.
어젠가는 전날 밤 봤던 달이라며 사진 한장을 보내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쁜 사진'을 보내주는 그 마음씨에 충분히 감동을 했었다.
그래서 연이어 날아온 이런 메시지가,
어제 밤 달임
저 위의 별도 신기했음
Opsc라는 늙은 별이래
논리적으로 오류가 보인다 싶고, 이상하다 싶었지만,
일부러 사진까지 찍어 보내준 성의가 괘씸하여 '이쁘다'며 호들갑을 떨고 말려고 했었는데,
자기가 천체물리를 쩜 한다는 걸로도 부족해, 고등학교 선생님들보다 낫다고 하는데서 뚜껑이 열려,
감성과 필 충만한 나는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고,
평상시 옵션으로 달고 다니던 이성을 메인으로 장착해
'Opsc가 뭐의 약자냐, 누구 그러더냐, 저게 몇 시경의 사진이냐...'따위를 꼬치꼬치 캐묻는걸로 부족해,
'그냥 달이랑 별이랑 이쁘다고 하면 될 것을, 꼭 그렇게 잘난 척을 해야 속이 시원하냐'며 말을 뾰족하게 벼렸다.
내가 이성을 장착해 주시게 된건, '늙은 별'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는데,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 스스로 폭발하면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내뿜는데,
그 순간이 마치 새로 태어난 밝은 별처럼 보여 ‘초신성’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어디서 주워들었다, ㅋ~.)
늙은 별이라 함은 에너지가 소진되어가는 온도가 낮은 별일텐데,
마지막 순간이 아니고선 저렇게 밝게 보일수가 없지 싶어서 였다.
혼자 이러고 노는 날 엿보기라도 했는지,
한참 후에 'Omicron Psc'('물고기의 항성')이라며 자료를 보내줬는데,
그 자료를 보고도 내가 툴툴거리며, 의문을 쏟아내자,
이번엔 이런 사진을 보내줬다.
이 사진에선 잘렸지만,
맨 위 사진에서의 조각달과 어우러졌던 별은 '샛별'정도 될 것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친구를 향하여, 낭중지추(囊中之錐)라서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겠지만,
이 책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을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직이불사 광이불요(直而不肆 光而不耀)-'솔직하되 멋대로 하지 않는다, 빛나되 눈부시지 않는다'가 생각났다.
이 문장은 입장을 해석하기에 따라선 나에게 적용되는 구절일 수도 있다.
스승이나 상사의 말에 바로 자기 뜻을 이야기하는 것이 솔직하긴 하지만 분명 성숙한 행동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주변의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은 솔직함 혹은 뒤끝 없음은 종종 유치함을 미화시킨 표현일 때도 있습니다. 솔직하면서 성숙한 모습을 함께 보이기가 쉽지 않아요, 영리하면서 중후하기 어려운 것처럼요.
영리한 게 뭡니까. 예리한 것이지요. ㆍㆍㆍㆍㆍㆍ"너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ㆍㆍㆍ."
그런데 그게 상대를 위하는 게 아닌 경우가 많아요. 예리하지만 찌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보고 모른 체하는 게 아니라 기다려주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올 시기를 본다거나, 상대가 자연스럽게 깨닫기를 기다려주는 거예요.
도가에서는 예리함 자체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예리함은 항상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될 때 나오거든요. 대개 가치관이 바른 사람들, 삶의 태도가 바른 사람들이 예리하고 솔직합니다. 그런데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 스스로 가볍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든요.
반면 하나의 의미에 갇히지 않고 대립면을 살피며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신중합니다. 어떤 '다름'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아요.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편을 가르지 않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니 성인은 방정하되 옳고 그름을 가르지 않고, 예리하되 찌르지 않고, 솔직하되 함부로 하지 않고, 빛나되 눈부시지 않다 [光而不耀]는 겁니다. 대개 빛나고 눈부시길 원하지만 빛나고 눈부시면 오래가지 못하거든요.(220~221쪽)
이 책의 띠지를 보면, '바람직한 삶이 아닌 바라는 삶을 살라'고 하고 있고,
노자에 일가견이 있는 강신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나답게' 살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위 박스 글을 통하여 보게 되면,
가치관이 바른 사람, 즉 삶의 태도가 바른 사람들은 예리하고 솔직하다고 하는데,
예리하고 솔직하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다름을 구별해 내고 차이를 인정한다는 걸 얘기한다.
다름을 구별하고 차이를 인정한다는 건, 편을 가르게 된다는 의미이고,
나누고 편 가르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거슬러올라가서 그 근원이 되는 예리함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의미인데,
언뜻 보기엔 '내가 원하는 대로, 나답게' 사는 것과 상충되는 듯 보여진다.
일례로 효(孝)와 관계되어,
힘들어도 부모를 모셔야 하느냐 하는 류의 질문에 대하여,
강신주는 자신의 앞가림을 먼저하라는 말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나답게' 살라고 조언하는데,
최진석은 내면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라는 말로 답을 대신한다.
부모를 모시는 대신 그 시간에 자기 개발을 도모하게 되는게 자신이 정말 바라는 일일까,
다른 어떤 가치에 지배되어 그것을 바라고 요구하는 양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되묻고 있다.
노자 이전의 천명론이라 불리우던 것들의 속성이 비의성, 임의성, 주관성으로 대두된다면,
자연의 존재형식이나 운행원리를 근거로 한 노자에 이르면 객관성, 보편성, 투명성의 속성으로 옮아가는데,
강신주의 그것과 최진석의 그것은,
임의적이고 개인적이라는 점과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닮은 듯 다르다.
이 책이 좋은 것은 제기하는 주장이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억지스럽지 않다.
때로 때때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관점이나 가치관으로 그럴듯하게 생각되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로 옮아가보면, 터무니없어져 버리는 상황이 있다.
그런데, 최진석의 경우, 그 시대로 옮아가, 그 시대를 이해학고 몰입하게 만든다.
또 하나, 중국어와 우리말의 어순이 다른 경우,
중국어의 어순을 지켜 해석을 하다보니,
의미가 미묘하게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그게 맞는다 수긍이 가서 고개를 주억이게 된다.
개인적으로, 노자를 해설자를 바꾸어가며 제법 여러권 읽었다.
그런 내게도, 그동안의 견해와는 달라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여러 곳 있었는데,
그럴때마다 조곤조곤 자상하게 설명을 해준다.
ㆍㆍㆍㆍㆍㆍ우리가 <도덕경>을 이해하려고 할때는 누구의 시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대개는 왕필의 시각으로 노자를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노자의 시대와 왕필의 시대는 시간적으로 7백 년의 차이가 나요.ㆍㆍㆍㆍㆍㆍ위나라 시대의 당면 문제와 춘추전국시대의 당면 문제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즉 7백 년의 시간차를 간과한 채 왕필의 시각만으로 노자를 보면 노자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159쪽)
책을 읽고 감동을 받고 깨달은 바가 있다면, 현실에에 적용할 수도 있어야 하겠는데,
그렇다면 현대에 노자의 철학을 토대로 살아간다는 건 어려울까?
만약 최진석이 노자를 '현대의 철학자'라고 명명하면서, 노자의 그것으로만 제한시켰다면 이렇게 좋다고 설레발을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는데, 어떤 단계에 도달하는데 특정한 방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표현함으로써,
훨씬 자유롭고 넉넉하다.
공자를 통하기도 하고 노자를 통하기도 하고,
(또 공부를 통해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지만,) 공부를 통해서만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단다.
세상 경험 속에서, 일을 통해서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들을 보아왔다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 중에 아주 맘에 들었던 건, 유가와 도가의 차이 부분이었는데,
유가는 채우고 채우고 채워서 그 높이를 우주의 높이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고,
도가는 비우고 비우고 비워서 우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182쪽)이라고 부분은 너무 멋졌다.
그런데, 여기에 내 개인적인 생각을 첨언하자면,
비우고 비우고 비워서 받아들이는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문이란 들고 나는 일이 교차하는 지점'이라는 논리를 적용하여,
비우고 우주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내주어 우주로 흡수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노자가 얘기하는 건 공감과 소통인데,
나를 비우고 우주(=자연=타인)을 받아내는 것이나,
나를 내주어 우주(=자연=타인)로 흡수되는 것도,
다시말해, 우주에로 번지고 스며 물드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비워낸다는 것은 나를 없애고 지우는 것이지만,
나를 내준다는 것은, 번지고 스며 물든다는 것은,
나의 것과 우주의 것이 만나는 것이니까 말이다.
다시 말해, 나의 본성을 포기하지 않고,
나라는 고유명사를 포기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는 동시에,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 책은 두껍지는 않았지만, 동서양을 종횡으로 넘나들며 나를 행복하고 황홀하게 해주었다.
두고두고 관점과 시점을 바꾸어 읽고 생각하고 해야겠다.
관점과 시점을 제한시키거나 조건을 준다는 것은 생각의 자유를 구속한다는 얘기이고,
이건 편견과 선입견, 내지는 독선에 빠질 수 있는 우를 범할 수 있으니 경계하여야 겠다.
참 좋은 책인데,
*익이 우임금의 아들인 계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지산 산[箕山]으로 숨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해요.(26쪽 밑에서 둘째줄)
*당시 제후들이 기산으로 피한 익을 따르지 않고,(27쪽 4줄)
단어를 통일해줄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얼마 떨어지지 않아 지산, 기산 다르게 쓰이다 보니, 다른 지명인줄 착각할 우려가 있다.
290쪽의 "자신을 천하만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하는 노자의 도덕경은 제3장이 아니고, 제13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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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5-03-25 공감(29) 댓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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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무상생‘!! 노자 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새창으로 보기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만큼 <도덕경> 속의 노자의 말은 다양한 각도로 재해석되어 왔다. <도덕경>을 병법서로 보는 관점과 제왕의 통치술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책으로 보는 시점에서 소개된 서적을 보아왔던 나에게 최진석 교수의 관점은 참으로 신선했다. 하나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틀에서 벗어난 사실들은 무시해버린다. 왕필본 <도덕경>과 하상 공본<도덕경>을 읽고 있는 나는 두 주석서를 참고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도덕경> 속의 노자의 말을 이해하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알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다. 최진석 교수의 책은 내가 <도덕경>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본 새로운 <도덕경>의 세상은 무엇일까?
1. 최진석만의 탁월한 해석
논어 자로 편에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보통은 '군자는 조화를 추구하나 소인과 같아지지는 않고, 소인은 같아지기를 바라지만,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다.'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최진석은 해석이 달랐다. 당시의 신분제 사회라는 점에 유념해서, 군자는 지배계급으로서, 군자와 소인 계급이 다르며, 따라서 차이를 인정하고 각각의 사명을 수행하여 전체의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소인은 피지배계급으로서 계급적 구분을 부정하고 군자와 차이 없이 같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라고 말한다. 기존의 현대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보통의 학자들과는 달리 혁명적으로 해석한 최진석의 해석은 나의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패는듯했다. 공자는 기존 질서 유지를 두둔하는 보수적인 학자로 볼 수도 있는 해석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해석으로 <도덕경>을 <논어>와 대비시키며 최진석은 자신만의 <도덕경> 읽기를 한다.
무명천지지시(無名天地之始)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를 최진석은 어떻게 해석할까? '이름 없음은 천지의 시작이요, 이름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이다.'라는 보통의 해석을 최진석은 자신만의 '무'와 '유'의 개념정의로 혁신적 해석을 해낸다. '무'는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몸 안의 공간처럼 비어있으되 기능하는 영역을 '무'라 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유'라 정의한다. 있음과 없음이라는 극단적인 표현보다는 '비어있음'으로 '무'를 해석하는 것이다. 비어있는 곳이 우리가 기능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다. 도시의 비어있는 공원이 도시의 삭막함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삶의 여유를 주듯이……. '있음'과 '없음'의 극단적인 개념으로 도덕경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던 도덕경이, 최진석의 새로운 관점을 통해서 바라보니, 너무도 쉽게 이해되었다.
2. <도덕경>의 핵심 '유무상생'
<도덕경>의 핵심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을 핵심이라고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최진석은 <도덕경>의 핵심은 대립 면의 공존이라 말한다. 이를 도덕경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 할 수 있다. 유와 무는 서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새끼줄이 서로 꼬여서 하나의 새끼줄이 되듯이, 유는 무와 관계를 맺고 무는 유와 관계를 맺는다. '노자의 철학 체계 안에서 유와 무는 존재적으로 선후나 차등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층 차에서 공존한다.'는 최진석의 해석은 그가 바라보는 <도덕경>의 핵심이다.
이러한 관계론적 측면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새로운 관점이 눈에 들어온다. '밝을 명(明 )'에 대한 최진석의 해석을 살펴보자. 그는 '해를 해로만 또는 달을 달로만 아는 것은 '지(智 )'이며, '해와 달을 한 세트로 아는 것'은 '명(明)'이라 말한다. 노자 철학을 관계론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최진석의 해석을 확장하면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많은 동양철학의 의문들이 풀린다. '생사일여(生死一如)' 즉,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이 말은 삶과 죽음을 같이 바라보아야, 둘 사이를 관계론적으로 바라보아야 제대로 '삶과 죽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철학적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 '사랑과 이별'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사랑과 이별'이 하나라면, '사랑과 미움'도 하나이다. 사랑하기에 미움도 싹튼다. 연애할 때는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이 결혼해서 싸우는 것도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무관 심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수많은 관계의 연속이다.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의 연속에서 벗어나서 때로는 대립하는 세차원의 관계 속에서 인생이 펼쳐지기도 한다.
3.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
'馳騁?獵令人心發狂(치빙전렵영인심발광)'이라는 말은 '말달리며 사냥하는 사람의 마음을 발광하게 한다.'라고 해석된다. 나는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노자는 사냥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말했을까? 사냥은 고대의 군사훈련 성격도 갖고 있기에 군주는 사냥을 많이 다녔다. 그런데 왜? 사람을 미치게 할까? 최진석은 '바람직한 것을 모두 똑같이 수행하는 사회보다 바람직한 것을 없애고 각자 바라는 바를 다양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더 강하다.'라고 해석한다. 사냥감을 쫓는 사람들처럼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서 맹목적으로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미쳐 나갔는가? 충남의 00 고등학교에서 모의고사 1% 안에 드는 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사회가 정해놓은 목표가 근접한 학생이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져 고민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모두가 같은 목표, 사회가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달리면서 많은 학생이 미쳐나가고 있다. 자신이 정한 목표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정해놓은 목표의 위험성을 일찍이 노자는 지적하고 있었다. 1등이 아니면 모두가 패배자라고 치부하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용기 있는 우리 사회를 보면서 노자의 구절을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故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고귀이신위천하 약가기천하 애이신위천하 약가탁천하)'라는 말은 '그래서 자신을 천하만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줄 수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언뜻 생각하면, 이기적인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최진석은 '죽음을 가벼이 여기게 만드는 국가라면 이미 근본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진단한다.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최진석의 주장은 노자가 말하는 건강한 사회를 이해하게 해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가미카제 특공대'에서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광풍 속에서 수많은 젊은이를 '일본제국'을 위해서 '천황'을 위해서 바치라고 강요했다. 승산 없는 전쟁에, 가치 없는 전쟁에 수많은 젊은이가 죽었다. 그 죽음의 행렬에 조선의 젊은이들도 있었다.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자가 어찌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 개인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국가가 국민을 안전하게 보살필 수 없다. 노자는 이미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과연 우리는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 사랑하는 자에게 이 나라의 운영을 맡기고 있는가? 저 국회에 있는 국회의원 중에서 과연 얼마만큼이 그러할까?
최진석을 통한 <도덕경> 읽기는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안겨주었다.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를 통해서, 하상공주에 근거한 노자 이해를 주로 해왔다면, 최진석을 통해서 대립 면의 관계성을 강조한 '(有無相生)'이라는 문구를 통한 노자 이해는 <도덕경> 이해를 한 차원 높여주었다. 그리고 '보통명사'로 살기보다는 '고유명사'로 살라는 말을 되뇌며, 학생들에게 남이 정해 놓은 목표를 살기보다는 자신이 정한 자신의 삶을 살도록 안내하는 교육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별 자의 독립성보다는 관계성에 주목하고, 나의 삶을 살자! 오늘도 나는 <도덕경> 읽기를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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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2018-09-01 공감(1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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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를 실천해봐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동양 철학의 두 주류라고 하면 공자와 노자를 들 수 있단다. 보통 공자는 현실 정치에 꾸준히 참여하려고 했고, 노자는 현실을 떠나 은둔의 생활을 한 사람으로 인식들 하고 있어. 아빠도 동양철학에 깊은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가끔씩 교양 서적을 통해서 읽고, 지나면 또 까먹고 그러니까 자세히는 몰라. 그래도 노자의 도덕경 첫 번째 구절은 알고 있단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그 문구가 너무 멋지게 들렸어.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리고 노자는 현실을 떠나 무위(無爲), 즉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강조했다고 알고 있었어. 스트레스와 집착으로 일관된 생활을 하는 아빠로서는 그의 그런 무위 사상이 늘 동경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단다. 더욱이 ‘무위’ 다음에 ‘자연’이라는 말까지 붙여 무위자연이라는 부르기도 하잖니. 자연 속에 묻혀 아무것도 안하고 자연의 흐름대로 살아간다. 생각만 해도 여유롭고 평온한 삶이 그려지잖니..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좀더 노자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 책을 들었단다.
이 책은 이미 EBS에서 지은이 최준석이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단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강연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 아빠는 보지는 못했어. 그래도 강연을 책으로 옮겼으니, 좀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 책을 선택했단다. 강연이 그리 긴 강연은 아니었기 때문에, 책도 노자 전체에 대해 주석을 달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대략적인 내용과 강연을 듣는 사람들이 관심이 있을 내용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의 사상에 대해 그 전보다는 더 알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았어. 예전에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라는 책을 통해 노자에 대해 읽은 적이 있는데, 김용옥이 해석한 것과는 또 다른 해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김용옥의 책을 읽은 지 오래 되어서 아빠 머리 속에서는 느낌만이 남아 있지만 말이야.
1.
인간은 왜 다른 동물들에 비해 두뇌가 발달했을까? 이것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해주었단다. 불에 익힌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동물성 단백질 섭취가 쉬워졌고, 그로 인해 뇌 발달이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생각하는 동물이 되었다는 거야. 고대 중국에서도 사람들이 씨족을 이루면서 살다가 초기 국가 형태에 이르게 되었어. 당시 사람들은 나라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하늘이 점지해주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가 생겼는데, 이것은 하늘의 뜻을 어긴 것이 되었잖아. 그래서 그들은 “덕(德)”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주나라의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었단다. 덕이 있으면 하늘의 뜻인 천명이 오고, 덕을 잃으면 천명도 떠날 수 있다고 했어. 그렇게 해서 덕을 잃은 은나라는 천명이 떠나고, 덕이 있는 주나라에 천명이 왔다는 것이지. 그러다가 철기 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사회는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었단다. 철기를 가진 자들이 부를 쌓게 되고, 그 전에 소인으로 취급된 사람들이 세력을 키워가게 되었어. 그러면서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여러 나라들이 생겨나게 되었지.
그 때가 춘추전국시대였단다. 그러면서 점점 이 세계의 주인이 하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단다. 이때 공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하늘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했어. 그리고 그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인(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 인(仁)이란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라고 했어. 그러면서 인(仁)을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 “예(禮)”라고 했어. 그러면서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로 설명했지. 이것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인간은 인간이 지켜야 할 보편적 기준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예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지. 바로 이 점을 노자가 비판했단다.
노자 또한 인간의 존재를 하늘이 아닌 인간 자체에서 찾으려고 했어. 하지만, 공자와 달리 인간의 보편적 기준을 인정하지는 않았어. 인간은 모두 자신만의 길이 있었다고 생각한 거야. 노자는 공자의 보편적 기준을 따르려다 보면 갈등을 초래한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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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이런 연유로 공자와 다른 방식으로 객관성, 투명성, 보편성이 확보된 질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공자는 천명론을 극복하고자 자신만의 도를 건립하면서 인간 세계, 인간의 내면성으로부터 인사이트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주관성이라는 틀을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면 노자는 ‘인간’을 완전히 벗어납니다. 우리 밖에 펼쳐진 ‘자연’에서 인사이트를 구하지요. 자연에는 주관성이나 가치가 개입되어 있지 않은데, 노자는 이를 ‘천도무친(天道無親)’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자연의 질서에는 더 친하게 여기고 덜 친하게 여기는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어떤 주관적 가치도 개입시키지 않고 아주 평등하게 대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의미에서 자연 질서는 매우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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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하자면, 공자와 노자는 모두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관점을 바꾸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런 점에서 공자와 노자 모두 도(道)를 추구했단다. 그 도(道)란 것은 인간이 인간만의 능력으로 건립한 길을 이야기하는 것이거든… 그런데 공자와 노자의 차이점은… 공자는 인간의 내면성을 근거로 한 인간의 길을 이야기하였고, 노자는 자연의 존재 형식과 운행 원리로 한 인간의 이야기를 했다는 점이란다. 자, 그럼 이제 노자가 이야기하는 도와 무위에 대해서 이야기해줄게.
2.
일단, 도(道)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야. 도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할 수 있대. 여기서 무(無)는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비어있다는 의미라는구나. 우리가 지금은 무(無)를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노자가 살던 시절에는 비어있다는 뜻으로 쓰였대. 있음과 비어있음이 서로 같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 노자로 대표되는 도교는 관계론에 주목을 했대. 도교가 공자의 유학과 가장 큰 차이점 중을 보이는 하나가 바로 이 관계론이란다. 유학은 가치론을 중시했기 때문에 ‘좋다’와 ‘나쁘다’의 주관적 판단이 있었고, 그를 위해서는 구분을 해야 했고 이것은 배제와 억압을 불러왔다는 거야. 이에 반해 도교는 관계론을 중시했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불교, 주역, 포스트모더니즘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대.
사실 불교도 관계를 중요시 했거든. 불교는 이 세계를 고통의 바다라고 해서 여덟 가지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넘어서야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러면서 무소유를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뜻을 개입하지 않는 자세라고 보면 돼. 소유라는 것은 바로 자기 생각의 틀을 가지는 것이거든. 그렇게 자기 생각의 틀과 현실과 맞지 않아 집착하게 되고 고통이 생기는 것이라고 했어.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깨달음이 되는 것이고… 불교에서 또 중요시 하는 것이 바로 ‘인연’이잖아… 그게 곧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지…
..
도교에서는 도를 행하는 이유는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라고 했어. 그렇게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의 지경에 이르는 것이야. 무위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야. 무위는 세상을 바라보는 일종의 자세라고 할 수 있어. 세상 사람들이 정의 내린 신념, 이념, 가치관 등을 무시하고 자신이 주인이 돼서 자신만의 의식으로 세계와 직접 관계를 맺는 것이지. 좀 말이 어려운 것 같지만, 세상을 볼 때 기준을 갖지 말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자, 그러면 이제 무위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러면 무위를 한번 실천해보자꾸나. 왜, 노자는 이렇게 무위를 주장했을까? 그것은 더 높은 경지를 위해서였던 거야. 무위를 지나 무불위(無不爲)에 이르기 때문이래. 무불위가 뭐냐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란다. 그러면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노자가 현실을 초탈하는 철학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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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爲而無不爲
무위를 실천해봐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을 말할 때, 노자의 시선은 절대 ‘무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바로 ‘무위’를 지나 ‘무불위’에 가서야 멈추지요. 노자의 시선이 닿고 싶어 하는 곳은 바로 ‘무불위’의 지경입니다. 노자가 무위를 강조한 이유는 무불위의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현실을 초탈하려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현실적 성취를 매우 중시했던 철학자입니다. 세상 속으로 아주 깊숙이 들어간 철학자였죠.
(25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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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면 노자의 가르침을 보고 나서,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냥 책으로만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노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꾸나.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 그런데 그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하는 것이 아니야. 자꾸 내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떨까? 그 기준과 변화된 세상과 차이 때문에 문제, 그래, 스트레스가 생길 거야.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내 마음 속의 기준 같은 것은 갖다 버리라는 거지. 바로 그것이 무위의 태도를 갖게 되는 거야. 그럼, 위해서 말한 것처럼 안 되는 일이 없게 된다는 거야. 이것은 비단 세상과 나의 관계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란다. 아빠와 너희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야. 아빠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너희들을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이지. 아빠는 아빠만의 길, 너희들에게는 너희들만의 길이 있다는 것이 바로 노자의 사상인 거야. 그러면서 지은이는 자식에게 세 가지만 해주라고 하는데, 아빠가 생각하기에 그 세가지는 너무 당연한 것들이더구나. 믿어라, 사랑하라,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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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자식을 키우면서 겪은 여러 시행착오들 때문에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자식에게는 세 가지만 해주면 될 것 같아요. 첫째, 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예뻐 보이질 않습니다. 자식의 꿈과 희망을 존중하고 믿어야 합니다. 둘째, 자식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식이 아닌 자식의 성공이나 출세를 사랑해선 안 됩니다. 성적이 올라가면 더 예뻐하고, 성적이 떨어지면 덜 예뻐진다면 아마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가지고 온 성적표를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셋째, 기다려줘야 합니다. 간혹 실패하더라도 기다려줘야 해요. 실패를 통하지 않고는 배울 기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눈앞의 작은 실패들도 허용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학습장을 잃게 됩니다. 믿고 사랑하고 기다리기. 다만 진심으로. 여기서 가정의 행복이 나오고 창조적 성휘가 이루어집니다.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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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아빠가 맨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노자의 핵심 사상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했다고 했잖아. 노자의 도덕경 전체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책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동양 철학에 대해서 깊이 공부하고 싶은데, 쉽지는 않구나. 나중에 너희들이 크고 나서 너희들이 동양 철학에 관심이 생기게 된다면.. (만일 말이야.) 그럼 같이 공부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다가도… 아빠가 아빠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면 노자의 사상에 어긋나는 것인데 말이야 하는 생각까지 이어지더구나.
- 접기
bookholic 2017-03-01 공감(1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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