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은 한반도 평화·통일 물꼬 튼 역사적 회담이었다”
입력 : 2021-02-13
세계평화교수회의, ‘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학술회의
세계평화교수협의회 주최로 1월 27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 통일회관 4층 세미나실에서 열린 ‘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학술회의. 왼쪽부터 조정진 박사, 김일기 박사, 김수민 교수, 홍석훈 연구위원.
1991년 12월 6일 북한의 함경남도 흥남시 마전의 주석공관에서 세계적인 종교지도자 문선명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 설립자이자 세계평화연합 총재와 북한의 국가주석 김일성이 약 3시간 동안 역사적 특별회담이 진행됐다.
오찬을 겸한 회담 자리에는 남측 인사로는 문선명 총재의 부인 한학자 여사, 박보희 당시 세계일보 사장 등이, 북측에선 김달현 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과 윤기복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 배석했다. 흥남은 1945년 광복 직후 북한에 선교하러 들어갔던 문선명 선생이 1948년 5월부터 6·25 때 미군이 진격한 1950년 10월까지 감옥살이 하던 곳이라 유서 깊은 장소이다.
세계평화교수협의회(PWPA·회장 토마스 셀로버)는 문선명·김일성 회담 30주년을 맞아 1월 27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 통일회관 4층 세미나실에서 ‘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이날 학술회의는 전국 PWPA 회원들이 함께 참여했다.세계평화교수협의회 주최 ‘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학술회의 사회를 맡은 선문대 김수민 교수.
1부 세계평화교수협의회 정기총회에 이어 진행된 2부 연례 학술회의는 선문대 김수민 교수의 사회로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김일기 책임연구원(정치학박사)의 ‘문선명·김일성 회담 30주년, 한반도 평화의 길을 묻다’와 세계일보 조정진 선임기자(북한학박사)의 ‘문선명·김일성 회담 역사적 의의와 평가’ 발표에 이어 선문대 김민지 교수, 전남대 지충남 교수, 전북대 전광호 교수, 통일연구원 홍석훈 연구위원의 토론 순으로 진행됐다.
주제 발표에 나선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김일기 박사는 먼저 “국제적 반공주의자이자 승공주의자인 문선명 총재와 사회주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수령제’라는 종교 국가적 형태를 띠고 있는 북한 김일성 주석의 회담은 당시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며 “불과 수개월 전인 1990년 4월,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을 통해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계적 대화’가 한반도에서 다시 한 번 개최된 것”이라고 운을 뗐다.세계평화교수협의회 주최 ‘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학술회의 발제를 맡은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원 김일기 박사.
김일기 박사는 문선명·김일성 회담 배경에 대해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체제 전환에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낀 김일성의 의지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실질적으로는 문선명 총재의 의지가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김 박사는 “문선명 총재는 1990년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을 통해 세계평화에 기여한 자신감을 기반으로, 이미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최대한 이른 시일에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하며 문 총재가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 나섰던 배경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한반도 전쟁 재발 방지이다. 소련이 1~2년 이내에 붕괴할 것을 직감한 문 총재는 소련 붕괴 이후 궁지에 몰린 북한이 전쟁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는 상황을 우려해 이를 막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대화 채널확보가 급선무라고 판단하였다.
둘째, 조국의 장래, 즉 통일문제의 해법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문 총재는 남북이 먼저 평화통일을 이루어온전한 주권을 회복해야만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 주석과 만나 ‘사랑에 의한 남북통일’, 즉 ‘무력에 의한 통일’과 ‘주체사상에 의한 통일’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주의에 의한 평화통일’을 전파하고자 했다.
셋째, 북한에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을 전해주고자 하였다. 문 총재는 북한을 내 고향, 내 형제의 집으로 여기고 사랑의 마음을 주려고 김 주석과 만나고자 했다. 그는 북한에 쌀을 주고 비료를 주는 것보다 사랑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정을 다해 북한을 생각하고 위할 때 북한도 마음의 문을 연다고 확신하였다.
세계평화교수협의회 주최 ‘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학술회의 토론을 맡은 선문대 김민지 교수(오른쪽).
넷째, 한반도 중심의 세계평화 메시지 전파이다. 문 총재는 한반도가 세계평화의 축이고, 한반도의 천운이 세계로 뻗어나가야 한민족 중심의 세계평화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평화의 메시지를 북한에 전하고자 하였다. 문 총재는 좌익과 우익의 갈등과 충돌을 극복하기 위한 공생·공영·공의주의의 두익사상을 실천하고자 남북통일운동에 적극적이었으며, 문선명·김일성 회담은 이러한 연장선상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남북한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이다. 문 총재는 1991년 12월 1일 평양에 도착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나는 원수의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고향 내 형제의 집에 가는 것이다. 나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서로 단결하자는 나의 필생의 신조를 가지고 북한 땅을 밟았다. 대한민국 정부와 북한 당국자 간의 발전적인 대화와 교류를 증진시켜 나가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심경에서 북한을 방문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는 문 총재의 방북 목적 중 하나가 남북한 대화와 교류협력에 교량적 역할을 하고자했던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세계평화교수협의회 주최 ‘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학술회의 토론을 맡은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 홍석훈 박사.
회담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첫째, 형식적 측면에서 문선명·김일성 회담은 한반도 분단 역사에서 남한의 민간 대표와 북한 정상 간에 이루어진 최초의 공식회담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고, 둘째, 내용적 측면에서 문선명·김일성 회담은 이산가족 상봉, 북한의 비핵화, 남북경협 활성화, 남북정상회담 개최 등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한반도 주요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합의한 회의였다는 점, 셋째, 문선명·김일성 회담에서 합의한 4개항은 향후 남북 당국 간 회담의 주요 의제가 되었으며 상당한 진정이 이루어졌다는 점, 넷째, 탈냉전 세계사적 전환기 속에서 한반도 평화의 전기를 마련한 회의였다는 점 등을 들었다.
결론적으로 김일기 박사는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문 총재의 세계평화사상이 남북통일, 민족통일, 평화통일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주었다는 데에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보았다.세계평화교수협의회 주최 ‘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학술회의 발제를 맡은 세계일보 선임기자 조정진 박사
‘문선명·김일성 회담 역사적 의의와 평가’를 주제로 발표한 조정진 박사는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전과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성사과정과 합의 내용, 그리고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후에 발생한 김일성 사망과 조문파동,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에 대해 상세히 기술했다.
조 박사는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의 역사적 회담의 의미를 다음 열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한반도의 전쟁 재발을 방지하는 역사적인 통 큰 담판 사건이었다.
둘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성경에 기록된 ‘야곱과 에서’ 노정의 재현이다.
셋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실향민과 탈북민 등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주는 해원의 노정이다.
넷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으로 대표되는 유신론과 무신론, 유심론과 유물론, 종교와 반종교, 신과 물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승공과 용공, 자유와 독재, 인권과 반인권, 변증법과 수수법 등 여러 대립되는 세계관의 만남이다.
다섯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통일사상과 주체사상의 대결을 통한 사탄사상의 자연 굴복을 위함이었다.
여섯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인간안보(human security)를 통한 세계평화운동이자 남북통일운동이다.
일곱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김일성에게 잃어버린 기독교 향수를 깨우쳐 줬다.
여덟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남한의 민간 종교지도자와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만나는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이 이은 세계사적 회담이었다.
아홉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방북한 민간인 중 처음으로 합법적 절차를 밟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한 첫 선례를 남겼다.
열 번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적개심을 사랑으로 돌려세운 남북통일운동의 역사적 전환 회담이다.
다음은 조 박사가 이날 발표한 논문 ‘문선명·김일성 회담 역사적 의의와 평가’의 각주를 뺀 전문이다.
조정진 선임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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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김일성 회담 역사적 의의와 평가 <전문>
Ⅰ. 서론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라는 말이 있다. 하늘에 사무치도록 한(恨)이 맺히게 한 사이라는 뜻이다. 하늘을 같이 이지 못할 원수라는 뜻의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讐)라는 말도 있다. 도저히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관계이니 얼마나 껄끄러운 사이인지는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오랜 반목과 질시로 인해 서로 귀한 아들과 딸을 잃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 등장하는 몬태규 가문과 캐퓰렛 가문 사이를 연상하면 된다.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이하 통일교) 창립자 문선명(文鮮明, 1920∼2012) 선생과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이하 북한) 김일성(金日成, 1912~1994) 주석은 70평생을 불구대천지원수로 지낸 사이이다. 문선명 선생은 북한을 무신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독재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고, 북한은 국제승공운동을 하는 통일교와 종교지도자인 문선명 선생을 ‘엄청난 괴뢰도당, 승공의 괴수’로 불렀다. 물론 개인적인 원한 관계는 아니다. 각자 살아온 삶의 궤적과 철학, 신념이 정반대로 서로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유신론 세계관으로 무장된 문선명 선생은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신이 직접 통치하는 지상천국론’을 펼치는 종교지도자인 반면, 종교화된 ‘유물무신론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철두철미한 공산주의자인 김일성은 북한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절대 권력을 구가하는 철권 통치자였다.
따라서 인류 사상사의 두 큰 흐름 중 하나인 헤브라이즘을 대표하는 종교지도자 문선명 선생과 헬레니즘을 대표하는 주체사상 지도자 김일성 주석이 만난 일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이요, 시대적 사변이다. 더욱이 북한에서는 예전엔 통일교에 대해 “종교의 탈을 쓴 반공별동대, 반공모략단체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해독성을 갖고 있으며, 교리의 허황성과 사회윤리를 문란시키고 청년들을 정신불구자로 만드는 해독행위와 광란적인 반공모략 책동으로 남한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규탄과 배격을 받고 있다”고 규정했었다.
‘문선명·김일성 회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회담은 1회로 끝났지만 그 후 회담 당사자인 문선명 선생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김일성 주석의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집권할 때는 물론이고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집권하고 있는 2021년 1월 현재까지도 통일교와 북한 양측은 꾸준히 대화 채널을 유지하며 우호적으로 교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회담 직후 추진된 경제협력 원칙에 따라 북한에 평화자동차와 보통강호텔 운영 등 합의 내용 후속 조치가 일사불란하게 지속되어 양측의 신뢰 관계는 매우 두터운 편이다. 여기엔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 사망 시 문선명 선생이 최측근인 박보희 당시 세계일보 사장을 조문사절로 보낸 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문선명·김일성 회담에 동행했던 한학자 통일교 총재는 2015년 5월 기자간담회에서 “북한에서는 (우리에게) 지극정성이에요. 문 총재님과 김일성 주석과의 관계는 굉장히 끈끈했어요. 김정일, 김정은 위원장이 다 (통일교에 대한 김일성의) 유지를 받들었어요” 하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방북 초청장을 받아놓은 상태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계적인 승공운동가이자 종교지도자 문선명 선생과 세계적인 공산주의자 김일성 주석이 만난 희귀한 사례인 문선명·김일성 회담은 그동안 학계의 관심과 연구가 거의 없어 일반인은 물론 관련 전문가들조차 자료 접근과 이해에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심지어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역사적인 사건임에도 개최 사실 자체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묻혀진 역사적 사건’이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각각 당대 유신론과 무신론 사상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두 지도자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이 극적으로 만나 정상급 회담의 새 지평을 연 1991년의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성사 배경과 성사 과정, 회담 성과를 정리하고 회담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를 학술적으로 구명(究明)하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올해는 ‘문선명·김일성 회담’ 30주년이 되는 해로 1991년 회담 때 합의되고 기대됐던 남북한 화해와 평화, 교류, 이산가족 상봉, 한반도 비핵화, 평화적 통일이 요원해진 원인과 해결 방안까지 모색해 볼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에 본고는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전의 추진 상황과 회담 성과 과정부터 회담 내용, 회담 이후 후속조치 이행 등 시간 순으로 시기를 나눠 회담의 역사적 의의와 교훈을 살펴보고, 나름 객관적 평가를 시도한다. 연구 방법은 회담 당시의 신문 잡지 등 언론 보도를 중심으로 회담 관계자들의 구술과 증언록, 극소수의 관련 연구 논문을 수집 분석해 재해석하는 문헌연구법을 활용하고자 한다.
Ⅱ.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전
1. 문선명의 삶과 철학
문선명 선생의 삶은 크게 두 분야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종교인으로서 본인이 창교한 통일교 기반을 확장해 모든 인류를 교인화 하는 지구촌 선교이고, 또 하나는 무신론에 근거한 공산주의를 지구상에서 소멸하는 국제승공운동이다. 이런 목적 실현을 위해 문선명 선생은 1954년 종교법인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설립했고, 1968년엔 사회단체 국제승공연합을 창립했다. 문선명 선생의 또 다른 꿈인 한반도의 남북통일은 무신론에 기반 한 한반도 북녘 지역을 하나님주의라는 유신론, 즉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세상으로의 탈바꿈이다. 이를 위해 문선명 선생은 1986년 남북통일학생연합을 결성하여 주사파 등 북한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좌파이론에 속수무책이던 대학가에 일대 경종을 울렸으며, 1987년에는 좌·우익의 이념을 넘어선 범국민 통일운동단체인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을 창설했다.
문선명 선생은 북한과 인연이 깊다. 1920년 북한 행정구역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한 문선명 선생은 1948년 2월22일 남한 스파이란 죄목으로 평양 내무서에 끌려가 세 달 만에 무죄로 석방됐으나 곧바로 기성 교회의 투서로 공산당에 잡혀가 4월 7일 공판 이후 평양형무소에 수감, 5월 20일 흥남감옥으로 이송된 후 1950년 10월 13일 미군의 흥남 진격으로 2년 8개월 만에 흥남감옥에서 나와 자유를 맛봤던 가슴 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문선명 선생은 그 후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에 정착해 공산주의 유물사관을 반대하여 전 세계적으로 승공운동을 벌였고, 소련 공산당의 세계적화전략에 맞서 자유세계를 수호해야 한다고 역대 미국 대통령들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철저한 국제적 반공주의자이자 승공주의자이다.
문선명 선생은 목회자로서 선교활동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평화운동, 참가정운동, 언론운동, 심정교육활동, 학술운동, 문화·예술·스포츠 활동, 종교화합운동, 여성운동, 청년운동, 봉사·구호활동, 후생복지사업, 과학기술산업진흥운동은 물론 유엔에 기반한 비정부기구(NGO) 운동 등을 통해 평화세계 실현을 위해 노력해 왔다.
이에 미국 잡지 뉴스위크는 이러한 실적을 인정해 1976년 문선명 선생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고, 영국 신문 선데이타임스는 1991년 ‘20세기를 만든 1000명의 인물’ 가운데 한민족 중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 김일성 주석과 함께 문선명 선생을 나란히 꼽을 정도로 위상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유독 한국에서만은 종교적 편견으로 사후 9년이 흐른 2021년 현재까지도 위인 반열은커녕 기독교계의 이단 교주 논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문선명 선생의 공산주의, 특히 북한에 대한 이해는 통일교 경전인 ‘원리강론’에 잘 나와 있다. ‘원리강론’은 “히틀러가 망한 후 사탄 편인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공산세계가 세계적인 기반을 가지고 나타났다고 설명하고, 제1, 제2차 세계대전은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를 분리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쟁이었으며, 따라서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를 하나로 통일하기 위한 제3차 세계대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리강론’은 이어 “예수님이 재림하실 동방의 나라는 바로 한국이며, 따라서 한국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일선인 동시에 사탄이 가장 미워하는 일선이 되어서, 민주와 공산의 두 세력은 여기에서 서로 부딪치게 되는 것이고, 그 부딪치는 선이 바로 삼팔선이다. 그러므로 삼팔선에서 일어났던 6·25동란은 국토 분단에 기인한 단순한 동족상쟁이 아니라 민주와 공산 두 세계 간의 대결이었고,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결이었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문선명 선생에게는 공산주의 최전선에 위치한 북한은 가인의 세력이며 사탄의 세력인 셈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문선명 선생의 철학은 1983년 12월 20일 국제승공연합이 잠실종합운동장에서 개최한 전국승공궐기대회 대회사에 잘 나타나 있다. 문선명 선생은 이날 “북한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폭력을 일삼고 있는 공산주의 세력을 이 지구상에서 근멸하지 않고서는 결국 조국의 통일, 세계평화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며 “통일운동의 최종 목적은 공산주의를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일소하고 참된 자유와 평화와 번영의 세계를 이룩하는 것이다. 악마가 지배한 북한을 이기고 남한 내 지하조직을 적발하기 위한 실천적인 국민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다음은 북한과 관련된 이날 문선명 선생의 강연 요약이다.
“북한은 악을 대표하고 대한민국은 선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겨야 할 숙명적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공산주의를 승리할 때 대한민국은 세계에 웅비할 것이요, 공산주의에 패할 때 대한민국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패망의 비참한 운명은 인류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북한만을 이길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공산주의를 이겨야 합니다. 북한은 악한 편에서 세계공산주의를 대표해서 북한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은 선한 편에서 세계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북한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대한민국은 각각 공산세계와 민주세계의 첨단에 서서 양 세계를 대표해서 생사를 건 운명적인 역사적 대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은 악을 대표하고 대한민국은 선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악마가 지배하고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같이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리하여 한반도는 세계에서 선과 악이 가장 날카롭게 맞서고 있는 세계사적 지역이 되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선이 악을 승리할 때 세계의 모든 악은 망하게 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문선명 선생의 제자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은 ‘21세기 한국의 비전과 남북통일’에서 “남북통일은 문선명 선생의 숙원이다.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문선명 선생의 승공사상”이라며 “승공이념은 세계를 공산주의 마수에서 구할 수 있는 사상이며, 이는 20세기 새 종교혁명”이라고 강조했다.
문선명 선생의 북한관은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후 변화를 드러냈다. 문선명 선생은 2000년 ‘세계와 남북통일은 참사랑으로’라는 설교를 통해 “이미 북한 사람들은 전 국민이 다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무장을 하고 있다”며 “우리는 그들을 소화할 수 있는 하나님의 참사랑 사상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선명 선생은 또 “문제는 남한 사람이 남한을 사랑하는 이상 북한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야 된다. 또한 북한 사람이 북한을 사랑하는 이상 남한을 사랑하는 사람이 나오면 된다. 그것밖에는 모색 방안, 해결 방안이 없다”고 말했다.
문선명 선생이 20세기 최대 지구촌 과제인 냉전종식에 기여한 업적은 국제법 질서가 국가 중심으로 진행되는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문선명 선생은 국가를 대표하는 어떠한 직책도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지명도는 갖췄지만 그는 종교인이자 기업인, 세계 규모의 NGO와 사회단체 창설자이자 운영자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문선명 선생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소련 중국 일본 등 그 어떤 강대국 국가수반이나 유엔 사무총장 등 국제기구 대표가 하지 못한 일을 먼저 기획하고, 먼저 실행에 옮겨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민간인이지만 그가 이룩한 종교·경제·언론·문화 등 세계적인 기반에서 우러나오는 막강한 영향력에 기인한다. 여기엔 통일교의 교세는 물론 사업적 기반, 그리고 세계 여론을 움직이는 미국 워싱턴에서 통일교가 발행하는 일간 워싱턴타임스와 한국에서 발간하는 일간 세계일보의 역할과 위력도 한몫했다.
2. 김일성의 삶과 철학
김일성 주석은 1912년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현 평양시 만경대)에서 부친 김형직(1894~1926)과 모친 강반석(1892~1932)의 장남으로 출생, 1919년 만주로 이주한 부친을 따라 팔도구소학교, 길림육문중학 등에서 수학했다. 1929년 반단체 가입죄로 체포돼 길림감옥에 구금돼 있다가 1930년 석방된 후부터 한인과 중국인 공산주의들과 유격대 활동에 참가했다.
그러나 1941년 일본토벌대에 밀려 소련의 연해주로 퇴각해 있다가 1945년 9월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와 소련군정의 후견 하에 1948년 9월 북한정권의 수립과 동시에 초대 수상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1994년 사망할 때까지 장기집권자 독재 권력자로 군림했다.
김일성 주석의 권력은 그가 사망한 이후 현재까지 자신의 아들과 손자, 즉 김정일·김정은의 3대 부자세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현재 북한은 국가 그 자체가 김일성국가, 김일성민족으로 상징화된 김일성의 ‘수령종교국가제’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는 한마디로 북한이 창조주 김일성의 주체영성에 의한 하나의 거대한 종교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 가운데 모든 북한 주민들은 수령 종교의 신도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은 늘 지구상 최악의 종교 탄압 국가로 분류되지만 김일성 주석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다녔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김일성 주석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교회 장로였고, 아버지 김형직은 평양에서 기독교계열 학교인 숭실중학교를 다녔다. 어머니 강반석(본명 강신희)도 예수의 제자이자 초대 교황 베드로를 뜻하는 ‘반석’으로 개명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강돈욱의 6촌 동생 강양욱은 목사로 북한의 국가 부주석까지 지내면서 북한 정치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일성의 부모 김형직과 강반석의 결혼을 주선한 사람은 미국의 저명 침례교 목사 빌리 그레이엄(1918~2018)의 장인 넬슨 벨 의료선교사였다. 벨 선교사는 강반석의 기독교식 이름도 지어주었다. 그러한 인연에서 그레이엄 목사는 1992년과 1994년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첫 방북 때 김일성 주석에 성경을 선물하고 인간의 사후 문제에 대해 언급하자 김일성 주석이 경청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과거의 일보다 앞으로 전개될 미래의 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밝혔다.
영국주재 북한공사를 지내다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국회의원은 1970년대 초 김일성 주석이 ‘북한에는 더 이상 종교 문제가 없다’고 선포했지만 1980년대 남한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기독교와 가톨릭 세력이 급부상하면서 북한의 종교정책에 변화가 생겼다고 분석했다. 문익환 목사, 문규현 신부 등 재야 기독교 세력과 교류하고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북한에도 종교가 있는 것처럼 교회와 성당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태 의원은 “그러나 북한이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 가짜교회와 성당을 지어놓고 쇼를 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믿음을 가진 이들이 생겨났다”며 “이렇듯 종교의 위력을 깨달은 북한의 노동당이 더 이상 교회와 성당을 짓지 않고 종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 주석도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 “일이 정 고달플 때면 어머니는 삼촌어머니와 함께 예배당으로 가곤하였다. 송산이라면 지금의 군사대학이 있는 곳인데 거기에 장로교 계통의 예배당이 하나 있었다”며 송산교회 김성호 담임목사에 대해 회고하면서 “송산교회에 다닐 때 교회에서 주는 사탕과 공책을 받았던 일들도 기억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말년에 자신의 명령으로 복원한 봉수교회 등 평양에서 교회를 다녔다는 증언도 있다. 실제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과 평양 숭실중학교 동문이자 함께 교회를 다닌 주일학교 친구였던 김성락 목사는 생전에 두 차례 평양을 방문했는데, 1981년 방문 때는 함경도 별장에서 함께 점심을 먹게 되자 김일성 주석이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해 식사기도를 했더니 “아멘” 하고 응답했다고 회고했다. 김성락 목사는 헤어질 때 김일성 주석에 성경책 한 권을 선물로 주고 왔다고 밝혔다. 김성락 목사는 또 일제하의 숭실대학과 같은 대학을 평양에서 하나 해 보았으면 한다고 하자 김일성 주석은 “평양에 들어와 다시 하나 만들어 보자”고 승락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한편, 북한은 2016년 문선명 선생을 ‘통일애국인사’로 소개했다. 북한 대외선전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2015년 출간된 책 ‘통일의 길에 이름을 남긴 애국인사들2’ 편에 재미동포 김성락 목사를 비롯해 임창영 전 주유엔대사, 홍동근 목사,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함께 문선명 선생에 대한 사연을 담았다. 기사는 ‘반공은 숙명인가, 고독한 항해자’라고 표현된 문선명 선생에 대해서 김일성 주석을 만난 뒤 “민족을 위한, 통일을 위한 그의 갱생의 첫걸음이 시작됐다”며 “참된 애국은 혀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장 속에 있다. 애국의 말은 하기 쉬워도 애국의 행동을 하기는 어렵다. 민족의 기대와 통일의 결심을 안고 가는 훌륭한 애국의 길이었다”고 소개했다.
3.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
문선명 선생은 공산주의 소멸을 통한 무신론의 해방, 즉 지구촌을 하나님주의로 일색화하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문선명 선생의 설교 중에 “이 지구상에 제일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사건이 바로 공산주의의 출현입니다. 이것이 왜 큰 사건이냐? 엄연히 살아있는 하나님을 죽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죄 중에서 제일 큰 죄는 분명히 있는데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퍼렇게 살아 계시는데 하나님이 죽었다고 한다면, 그 이상의 원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원수의 주인공이 공산주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산주의에 대한 모든 것을 타파해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승공에 대한 훈련과 무장을 해야 되겠습니다”하는 내용이 있다. 문선명 선생이 전개한 승공운동의 핵심은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라는 외침이고, ‘공산세계를 구원하고 사탄까지도 구원한다’는 통일교 교리의 핵심인 ‘하나님의 참사랑’에 기반한다.
문선명 선생은 1989년 소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승공운동을 한 것은 소련을 적으로 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소련 사람들을 걱정하고 소련의 발전을 위한 마음에서였다고 말했다. “내가 40년 넘게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과 착취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옳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주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나는 나의 영적 삶에서 신이 있음을 알고, 그의 마음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었음을 주장한다. 나는 역사적 시작을 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소련 국민의 성공을 기원한다. 소련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종교의 자유 그리고 서방과의 협력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문선명 선생이 제시한 가시적 목표 중의 하나가 냉전의 평화적 종식이다. 심지어 문선명 선생이 남북통일에 관심을 보이게 된 것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한반도가 통일되지 않고서는 세계평화가 올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과 동유럽을 위시한 세계 공산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공산주의의 폐해를 집요하게 지적하면서 공산주의 체제 붕괴를 위해 노력했고, 소련 해체 이후에는 북한 김일성 주석을 만나는 등 한반도 화해와 통일의 물꼬를 트는 데 앞장섰다. 이런 노력 덕분에 불가능한 것 같았던 평화적 냉전종식이라는 문선명 선생의 바람과 계획은 문선명 선생이 예정한 해에 ‘어느 날 갑자기’ 기적처럼 이루어졌다.
문선명 선생이 공산주의를 종언(終焉)시키기 위해,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을 해체시키기 위해 어떻게 계획했고 어떻게 접근했는지 곳곳에 깔아놓은 복선(伏線)들을 하나하나 찾다보면 수시로 무릎을 치게 된다. 문선명 선생 회담 성공을 위해 수십 년 전부터의 면밀한 계획과 준비를 했다. 마치 20세기 세계사를 대하드라마로 연출하듯 문선명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은 ‘예언’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치밀한 복선과 완벽에 가까운 사전 준비가 돋보인다.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을 갖춘 종교지도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문선명 선생은 반세기 이전부터 소련 붕괴를 통한 냉전종식이라는 목표를 설정해놓고 움직였다. 승공이론서 ‘새 공산주의 비판’ 출판부터 승공운동 관련 국제기구 조직, ‘노한사전’ 편찬 지원, 일찍이 재일교포 사회의 화해를 주선하며 조총련 고국방문 사업을 추진한 일, 적대국 소련에 자동차 2,000대를 기부하겠다는 통 큰 깜짝 제안 등이 그렇다. 더욱이 어쩌면 돈을 마구 쓴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는 마포 도원빌딩 준공식 현장에서의 15억 원 살포, 피보다 귀한 교인헌금 2억 5,000만 달러를 회수 불투명한 공산국가 중국에 투자한 사건, 자신의 고희연을 국민잔치로 일주일 동안이나 대대적으로 치른 사연 등이 모두 소련 지도자와의 단독회담을 유인하기 위한 원려(遠慮)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소련은 당시 절대적으로 현금 등 외부의 경제지원이 필요했고, 문선명 선생은 충분한 현금동원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고르바초프의 러브콜을 받게 된 것이다.
세상이 문선명 선생을 믿던 외면하든, 통일교인들이 예언가이자 실천가로 한평생 세계평화를 통한 인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문선명 선생을 종교지도자로 모시고 따라간 이유를 문선명 선생의 족적과 사료는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국가가 하지 못한, 아니 정치 지도자들은 꿈조차 꾸지 못한 일을 문선명 선생은 민간인의 신분으로 국경·종교·민족·인종·이념을 뛰어넘어 원대한 목표를 세웠고, 기어이 이루었다.
문선명 선생이 이룩한 성과 하나하나는 모두 민간 외교관으로서 해낸 것이다. 윤기복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은 1991년 문선명·김일성 단독회담 직후 “문 총재님이 무서운 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 주석님을 대하시는 걸 보니 세상에 그런 천재적인 외교관도 없다. 문 총재님의 또 다른 위대한 면을 보았다”고 평가했다. 문선명 선생 스스로는 1991년 역사적인 북한을 앞두고 중국 베이징공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본인은 경제지원 전문가이자 화해 전문가로서 북한과의 경제개발 협력 및 사상적 화해를 이끌어내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문선명 선생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단독회담은 1990년 4월 11일 오후 6시 모스크바 크렘린궁전 대통령 접견실에서 이뤄졌다. 두 사람의 만남은 단순한 일회적인 만남이나 보여주기 식 행사가 아니라 냉전종식과 탈냉전의 전환기를 여는 회담으로 이후 한‧소 수교와 소련 붕괴, 냉전종식과 다극체제 전환 등 탈냉전시대로의 변화를 예고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문선명 선생은 독일 통일에 고르바초프가 큰 역할을 한 걸 높게 평가하며 “한국의 통일을 위해서도 대통령의 역할과 협조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자 고르바초프는 “대결과 투쟁은 원치 않는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이 세계평화에 중요하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세계평화 구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서도 공동노력을 기울일 생각이며 좋은 성과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엔 고르바초프가 먼저 “문선명 회장이 세계적으로 엄청난 기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 다국적 경제기반과 세계적인 조직을 활용, 소련의 발전을 위해 직간접적인 힘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한국과의 경제협력 역시 소련의 경제발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소·한 두 나라는 기술과 과학분야에서 상호교류를 증대해야 한다. 두 나라가 합작하여 세계 각지에 전출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문선명 선생은 “소련이 규제를 없애고 적극적으로 문호를 열어 경제적인 개방정책을 펼쳐야 국민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서 “통일교회의 세계적인 기반을 동원하여 소련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천명했다.
문선명 선생은 “북한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고, 고르바초프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통일 이후 우리 모두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긍정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 주변 국가들은 이제 한반도 통일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남북한 화해 분위기 조성을 위해 소련이 할 일을 구상하고 있다”고 답했다.
문선명 선생은 회담 성사 직후 소련의 정치 지도자들과 청년 지도자들을 미국으로 초청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1991년 4월에는 3200여 명의 고위 관리와 정치지도자들을 미국으로 초대해 민주주의에 대한 실질적인 소개를 하였다. 앞서 1990년 7월부터는 소련 대학생 3500명을 100~250명씩 나누어 총 27회에 걸쳐 미국 국제교육재단(IEF)이 주최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시켰다. 국제교육재단은 자유세계 및 공산세계 젊은이들 사이의 화해 및 대화와 교육을 촉진하기 위해 문선명 선생이 설립한 기관이다.
1991년 8월 소련 부통령 겐나디 야나예프, 총리 발렌틴 파블로프, 국방부 장관 드리트리 야조프, KGB 국장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 등 보수파들이 비상사태위원회를 구성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크림반도 포로스 별장에 감금하는 등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보리스 옐친과 함께 탱크 앞을 가로막은 채 쿠데타 세력을 굴복시키는데 앞장 선 이들이 이때 미국에서 교육받은 젊은이들이다. 쿠데타가 벌어진 3일 동안 반군세력에 의해 감금됐던 소련 국가교육위원회 구리예프 차관은 석방된 후 “소련을 구한 분은 바로 문선명 총재님이다. 문선명 총재님이 소련을 구하셨다”라고 밝혔다.
199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1회 세계언론인대회와 제3회 세계평화를 위한 정상회의를 통해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단독회담을 통해 냉전 종식의 씨앗을 뿌린 문선명 선생은 귀국 직후(4.30~5.22) 대한민국 전국을 순회하는 ‘모스크바대회 승리귀국 참부모님 환영대회’를 열었다. 이듬해 8월엔 세계평화종교연합과 세계평화연합을 잇따라 창설했고, 두 달 후인 10월엔 남북통일지도자총연합회를 결성했다. 마침내 1991년 11월 30일부터 12월 7일까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단독회담을 가지게 된다.
4. 김일성 만난 밀입북 인사들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전에 방북해 김일성을 만난 사람들이 있다. 정부의 비밀특사 이후락(1972)과 박철언(1989) 외엔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국회의원 서경원,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문익환 목사, 임수경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황석영 소설가 등 손에 꼽을 정도이다.
김구 선생은 일행과 함께 1948년 4월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참석차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고, 1992년 서경원 평민당 국회의원, 1989년에는 황석영 소설가(3.20~1993.4.27.), 문익환 목사(3.25~4.3), 한국외국어대학교 3학년 임수경 전대협 대표(6.30~8.15)가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났다.
하지만 이들의 방북은 모두 밀입북이라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도 비공식적 회담이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도 1990년부터 여러 차례 비밀리에 방북, 김일성 주석을 만났으나 어떤 성과도 없었다.
Ⅲ. 문선명·김일성 역사적 회담
1. 성사 과정
종교인이자 평화·통일운동가인 문선명 선생은 지구촌을 신이 창조했다고 믿는 이상 세계로 만들기 위해 평생을 헌신해왔다. 문선명 선생은 자신의 이러한 목적 실현을 위해 장기간에 걸쳐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게 움직였다. 종교인으로의 사명은 공산주의 소멸을 통한 무신론의 해방, 즉 지구촌을 하나님주의로 일색화하겠다는 신념이었고, 본인을 한반도에서 태어나게 한 신의 섭리를 의식해서는 분단 된 남북을 통일시켜 북녘을 해방하는 일이다.
한반도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첨예한 대립, 공산 사회주의와 자유민주 자본주의의 무한경쟁, 무신론 세계관과 유신론 세계관의 대립, 좌우익의 대립, 평등과 자유의 대립 등 인류사가 축적해 온 모든 모순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지구촌 마지막 이념 분쟁지역이다.
문선명 선생은 일찍이 한반도가 통일 되는 과정에서 지구촌이 당면한 현안들의 해결책이 나온다고 보았다. 따라서 문선명 선생이 평생 이룩한 통일교의 세계적 기반은 남북통일 북한해방으로 귀결된다. 소련 대통령인 고르바초프를 만난 것도 결국은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볼 수도 있다. 고르바초프가 문선명 선생이 이룩한 세계적 기반을 의식해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을 수용했듯이, 김일성 주석도 고르바초프가 문선명 선생을 만난 데 용기를 얻어 문선명 선생을 기꺼이 평양으로 초대한 것이다.
물론 문선명 선생이 일찌감치 깔아놓은 복선은 있었다. 냉전종식이라는 큰 주제를 놓고 고르바초프를 만나기 위해 썼던 앞서 소개한 일련의 사업들은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 위한 원려(遠慮)이기도 했다. 경제난에 직면한 소련이 절대적으로 현금 등 외부의 경제지원이 필요했듯이 북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문선명 선생은 충분한 경제적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고르바초프뿐만 아니라 김일성 주석의 러브콜을 받게 된 것이다.
문선명 선생은 7일간의 국민잔치로 진행된 1990년 2월 4일의 고희연 기념사에서 “그동안 본인이 세계적으로 닦아 놓은 기반들이 경이로운 업적이라고 함은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외형적이요 가시적인 그 기반 자체보다도, 그중 어느 것 하나라도 나 자신을 중심 삼지 않았다는 점과 현재보다는 미래를, 개인보다 전체를, 작은 것보다는 더 큰 목적을 위하여 닦은 것으로서 하늘땅과 역사가 공인할 기반이라는 점에 긍지를 갖습니다” 하고 말했다.
문선명 선생은 이어 “만일 본인이 창도한 사상에 의하여 인격이 변화되고 남을 위하여 살 수 있게 된다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으며, 우리에게 남북통일이 어려운 과제일 수 있겠습니까? 또 온 세계 인류가 이 뜻을 받아들인다면 평화롭고 번영된 세계는 보장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통일운동이 아직 양적으로는 미흡하지만 오늘의 실적이 갖는 의의는 우주사적인 것입니다. 본인은 지금 계속해서 봉공(奉公)하는 길을 찾고 있으며, 이 발걸음의 연속으로 생애를 마칠 것입니다” 하고 의미심장한 기념사를 남겼다.
문선명·김일성 회담 추진은 1991년 11월 16일 중국 베이징의 중국대반점에서 열린 ‘세계평화정상회의’의 평양개최를 위한 제3차 실무회담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당시 실무회담의 북한 측 대표로 참석한 김달현 북한 정무원 부총리 겸 대외경제위원장과 통일교 측 대표로 참석한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에게 문선명·김일성 회담을 공식 제의함으로써 성사됐다. 공식적으로 문선명 선생을 평양으로 초대한 사람은 김달현 부총리와 윤기복 북한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위원장 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다.
박보희 사장을 북한과 연결해 준 사람은 재미교포 박경윤 금강산국제그룹 회장이다. 박경윤 회장은 2012년 월간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박보희 사장이 통일교 쪽 카운터 파트였습니다. 통일교가 북한에 들어갈 때 힘들었어요. 중국이 문선명 총재 비자를 내주지 않았거든요. 단체 관광객 명단에 문 총재 이름을 넣어 간신히 중국비자를 받았습니다. 비행기가 뜰 때 서울에 ‘북조선 들어간다’고 연락했어요. 서울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죠” 하고 증언했다.
문선명 선생이 방북 전인 199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에서 문선명 선생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차기 세계평화언론인회의와 세계평화정상회를 평양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협조를 구했다. 이에 로드리고 카라조 전 코스타리카 대통령과 안토니오 베랑쿠르 사무총장이 문선명 선생이 창설한 세계평화정상회의 대표단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세계평화정상회의 평양 개최를 위한 협의를 하였다.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 회담은 1991년 12월 6일 함경남도 흥남시 함주군 마전의 김일성 공관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30분까지 약 3시간 동안 오찬을 겸한 가운데 진행됐다. 면담자리에는 남측 인사로는 문선명 선생의 부인 한학자 여사,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 등이 배석했고, 북측에선 김달현 부총리와 윤기복 조평통 부위원장이 배석했다. 흥남은 북한에 선교하러 들어갔던 문선명 선생이 1948년 5월부터 6·25 때 미군이 진격한 1950년 10월까지 감옥살이 하던 곳이라 유서 깊은 장소이다.
문선명 선생과 함께 방북길에 동행한 박경윤 회장은 “(문선명·김일성) 두 사람은 종교의 자유, 경제 협력, 통일 방안을 논의하고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김일성·문선명 만남 이후 통일교는 대북 투자에 나섰다. 평화자동차, 보통강호텔, 세계평화센터 등을 북한에서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2. 합의 내용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은 1991년 12월 6일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2시간30분 동안 ‘문선명·김일성 회담’과 오찬을 갖고 전날 합의된 문선명·김달현 부총리의 ‘남북경협 합의서’ 교환과 문선명·윤기복 원호위원장의 10개항 공동성명을 공식 확인한 후 4개항의 합의문을 별도로 서명 발표했다.
첫째, 남북통일의 1단계인 인도적 사업추진의 일환으로 1992년부터 이산가족 찾아주기 사업을 추진한다. 이산가족 상봉 및 결합은 노령자부터 실시한다. 문선명 선생이 먼저 “지금도 조국에는 생사조차 모른 채 나이 들어 죽어가는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있으니 서로 상봉하게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 주석이 “내년부터는 북남의 헤어진 동포들이 서로 만나는 운동을 시작하자”고 동의했다.
둘째, 핵에너지는 평화적 목적에만 사용할 것이며 북한은 순리적인 국제 핵사찰을 받을 것이다. 이 문제도 문선명 선생이 한반도 비핵화선언 합의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 협정 조인을 먼저 제안했고, 이에 김일성 주석은 핵이 평화적인 목적에만 사용하는 데에 동의했다. 또한 김일성 주석은 “북한이 순리적인 국제 핵사찰은 받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셋째, 북한은 해외교포를 위시한 모든 국가의 대북한 경제투자를 환영하며 군수사업을 제외한 북한의 평화적 경제사업에 통일그룹이 지원하는 대원칙에 합의한다.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은 금강산관광단지 개발 등 남북경협 문제를 폭넓게 논의하였다. 문선명 선생이 우리 민족의 명산인 금강산을 관광단지로 크게 개발해야겠다고 말하자, 김일성 주석은 즉시 금강산 개발을 요청했다. 이는 회담 전날 문선명 선생과 김달현 부총리가 남북경협에 관한 합의서를 교환한 것과 직결된 것이다.
넷째, 남북정상이 만나서 통일방식을 토론 및 결의할 수 있다면 정상회담에 응할 용의가 있다. 문선명 선생이 먼저 “남북 정상이 서로 만나 통일방식을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하자, 김일성 주석은 “만나서 통일방식을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다면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와 동시에, 김일성 주석은 “여러 번 북남최고위급회담을 하자고 제기도 하고 공식적으로 남측의 최고당국자를 초청하기도 했지만,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는데 서로 뜻을 같이해야만 만나는 것이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은 이어 전날 합의된 문선명·윤기복 10개항 공동성명의 이행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김일성 주석은 문선명 선생과 윤기복 위원장의 공동성명 발표문에 동의하면서, 공동성명에 밝힌 내용들을 서로 성실히 이행할 것을 희망했다.
문선명·김일성 4개항 항의 내용이 포괄적인 반면, 문선명·윤기복 10개항 공동성명은 매우 구체적이다.
① 쌍방은 반세기까지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나라와 민족의 분열을 더 이상 지속시켜서는 안 되며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통일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② 쌍방은 조국통일을 외세의 개입이나 간섭이 없이 자주적으로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실현하여야 한다는 데 대하여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③ 쌍방은 제도가 다른 남과 북이 서로 공존 공영하는 기초 위에서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국가를 세우는 방법으로 조국통일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민주주의적으로 하여야 한다고 인정한다.
④ 쌍방은 우리 민족이 다시는 전쟁의 참화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남과 북이 불가침에 합의하고 핵에너지는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하여 한반도에서 핵무기의 제조나 배치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⑤ 쌍방은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며 다각적인 협력·교류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남북고위급회담이 성과적으로 진전되기를 희망한다.
⑥ 쌍방은 남북고위급회담이 온 겨레의 기대에 맞게 진전되어 하루빨리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를 기원하였다.
⑦ 쌍방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원칙에서 민족의 대단결을 실현하며 힘 있는 사람은 힘을,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어 조국통일 실현에 적극 이바지할 것에 대한 공동의 염원을 표시하였다.
⑧ 해외동포원호위원회측은 북한에 대한 해외교포들의 경제적 투자를 환영하였으며 세계평화연합측은 북한에서 추진하는 경제사업에 여러 가지 형식으로 투자할 용의가 있음을 피력하였다.
⑨ 쌍방은 세계평화연합 측과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측 사이에 문화교류를 실시하는데 합의하고 우선 다음해(1992년)에 ‘리틀엔젤스’의 평양초대공연과 평양예술단의 서울초대공연을 실현시키기로 하였다.
⑩ 쌍방은 관계단체들과의 협력 하에 조국통일을 앞당기며 1천만 이산가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남과 북 사이의 자유왕래와 전면 개방을 실현하는데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첫 단계로 인도주의적 사업을 함께 추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그 일환으로 다음 해(1992년) 안으로 쌍방이 합의하는 장소에 이산가족면회소'와 편지교환소를 설치하고 먼저 노령자들 사이의 만남부터 실시하도록 노력하기로 하였다.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은 10개항을 하나하나씩 검토하며 서로의 입장을 타진했다. 통일 문제에 특히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①, ②, ③항 모두 통일 문제였다. 먼저 문선명 선생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하겠다”고 말하자, 김일성 주석은 즉시 환영의 뜻을 표하며 1972년 7·4공동성명에서 합의한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원칙을 강조했다. 이에 동의한 문선명 선생이 “김 주석께서 제안한 연방제통일방안을 남측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면 한 지역씩 점차적으로 통일해 보는 것이 어떤가”라고 제안하자, 김일성 주석은 “그렇게 해서는 나라의 통일을 실천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이어 문선명 선생이 “겨레의 단결을 이룩하면 내일이라도 통일할 수 있으니 김일성 주석이 전민족의 단결을 위해 더 노력해달라”고 말하자, 김일성 주석은 “오래전부터 남북 간의 신뢰 분위기를 조성하고 단결된 힘으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협상도 제기하고 북남최고위급회담도 제기하였지만 잘 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김일성 주석은 이어 “하루빨리 조국을 통일하고 후손들에게 통일조국을 물려주기 위해서 문선명 총재께서 돌아가면 북남최고위급회담도 하고 나라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자고 한다는 것을 미국 남한 일본 사람들과 당국자들에게도 적극 지지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당부했다.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은 통일방법론에 있어서 조금씩 의견을 달리했지만, 인도주의와 평화주의에 기초하여 통일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집중 논의했다.
회담 끝 무렵 김일성 주석은 문선명 선생에게 “미국 부시 대통령과 친한 사이이면 나를 초청하라고 전해주시오”라며 미국 방문 주선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문선명 선생은 미국의 정치 상황을 설명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김 주석은 또한 문 선생의 금강산 방문 소감을 묻고 금강산에 얽힌 일화와 금강산온천(주을온천)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았다. 이어 문 선생이 방북 후 둘러본 평양의 인민대학습당과 서해갑문 건축물에 관심을 표명하자 김 주석은 서해갑문의 건설 배경 등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밖에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은 함께 고향 이야기를 비롯해 서로의 추억, 좋아하는 음식 등과 관련하여 두루 이야기 했다. 양인은 ‘언 감자국수’ 이야기와 ‘사냥과 낚시’ 등 취미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어 김 주석은 “문 총재와 오늘 처음 만났는데 이제는 자주 오십시오. 오랜 친구와 같이 생각하고 다시 오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문 선생이 “김 주석께서는 나보다 연세가 많으시니 형님뻘 되시는 군요”하자, 김 주석은 “문 총재, 우리 이제부터 형님동생하며 잘해 보십시다!”하며 문 선생의 손을 꽉 잡았다. 회담을 마무리한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복도를 걸어 나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일성 주석이 남의 손을 잡고 기념사진을 찍은 것은 이 사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알려졌다.
Ⅳ.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후
1. 회담 후속 조치
문선명·김일성 회담 합의에 따라 통일교는 세계적 기반을 움직여 속전속결로 남북한 경제협력을 추진하게 된다. 먼저 평양 인근인 남포시에 100만평 부지를 확보해 통일교 측 평화자동차가 70% 지분을, 북한의 조선민흥총회사 30% 지분을 갖는 평화자동차종합공장을 2002년 4월 준공해 다양한 종류의 자동차를 생산했다. 연간 1만대 생산이 가능한 규모다.
평화자동차는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이름은 지어준 승용차 ‘휘파람’과 RV 차량 ‘뻐꾸기’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자동차를 생산했고, 평양의 주요 장소 8곳을 포함해 순안공항 및 고속도로에 상업용 광고탑을 북한 역사상 최초로 세웠다.
통일교는 아울러 문선명·김일성 회담 2년 후인 1993년 평양 보통강변에 위치한 10층 규모 163개 객실을 보유한 1급 보통강호텔을 인수했고, 문선명 선생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 생가 주변 30만평 부지에 정주평화공원을 조성해 전 세계 통일교인들이 순례를 하게 했다. 통일교는 또 평양에 이산가족 상봉 시 북측 회상상봉 장소 겸 북한 주민을 위한 외국어 및 컴퓨터 교육은 물론 교회 기능도 가능한 최신식 건물인 세계평화센터를 세웠다.
통일교는 이외에도 북한관광회사 ‘평화항공여행사’, 평화자동차 계열 대북무역회사 ‘평화무역’, 평화자동차 계열 대북건설회사 ‘평화토건’ 등을 북한에서 세워 운영해왔다.
통일교는 1994년 3월 27일 롯데호텔에서 제2차 세계평화대화를 가진 후 참석한 해외인사 70여명을 데리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기로 계획했었다. 이 계획은 1991년 방북 때 쌓아놓은 신뢰감을 바탕으로 북한의 초청으로 세워졌고 남한 당국도 허가한다는 입장이었으나 그 즈음 터진 남북대화장의 ‘서울 불바다 발언 소동’으로 백지화 됐다. 대신 문선명 선생은 그해 4월 윌리엄 테일러 미국 전략문제연구소(SCSIS) 부소장과 조셋트 샤이너 워싱터타임스 편집국장을 CNN과 함께 평양에 보냈다.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은 1997년 9월 20일 또 한 번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1994년 김일성 조문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입건돼 있던 상태라 더욱 관심을 끌었다. 박보희 사장은 평양에 1주일간 머물며 북한 고위급들과 접촉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국익을 위한 방문”이라는 알쏭달쏭한 설명 이외엔 입을 다물어 무슨 역할인지는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통일교와 북한은 1994년부터 1997년까지 남북청년학생 평화세미나를 5차에 걸쳐 개최하였다. 아울러 1998년 5월 평양에서 리틀엔젤스예술단 공연을 4차례 가졌고, 이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2000년 5월엔 북한의 만경대학생소년궁전 학생들의 서울 공연이 이루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도 북한과의 관계는 지속됐다. 문선명 총재는 2000년 10월 통일교산하 평화대사협의회가 진행한 대북식량 지원 사업에 10억원을 기부했다. 2007년 10월엔 남북한 포함 50개국 여성지도자 700명이 참가한 세계여성지도자 대회를 금강산에서 개최했고, 유엔(UN) 경제이사회에 등록된 평화봉사재단이 북한 농가주택 건축사업 추진, 4차례 걸친 재일동포 모국 방문사업 등을 성사시켰다.
문선명 선생의 90세 생일이던 2009년 1월 30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을 통해 90년, 80년, 60년 된 산삼 세 뿌리와 축하의 글을 자수로 새긴 리본, 장미꽃 90송이와 백합 90송이를 담은 화병과 화환을 보내는 등 매년 생일 때마다 선물을 보내왔다.
특이한 건 문선명·김일성 회담을 계기로 북한의 달라진 종교 이해이다. 1981년 판 북한의 ‘조선말 사전’에는 종교에 대해 “신, 하나님 등과 같은 자연과 사람을 지배하는 그 어떤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나 힘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그에 의지해서 살게 하며 이른바 저승에서 행복한 생활을 꿈꿀 것을 설교하는 반동적인 세계관 또는 그러한 조직. 종교는 인민대중의 혁명의식을 마비시키고 착취와 억압에 무조건 굴종하는 무저항주의를 고취하는 아편”이라고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후인 1992년 판에서는 “사회적 인간의 지향과 렴원을 환상적으로 반영하여 신성시 하여 받들어 모시는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또는 그 믿음을 설교하는 교리에 기초하고 있는 세계관”이라고 현저히 중립적인 설명으로 바뀐 게 확인된다.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북한의 종교·종교인에 대한 사전적 정의마저 바꿔놓은 것이다.
2. 김일성 사망과 조문파동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 예정일(7월 25일)을 17일 앞두고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했다. 하지만 회담 한 쪽 당사자였던 한국의 대통령 김영삼은 조의 표명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국무총리는 사망한 북한의 대통령을 “전범”이라고 불렀으며, 한국 정부는 “김일성은 6·25전범자임을 기억한다”라며 김일성을 비난하는 설명을 냈다.
김영삼 대통령은 또한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듣고 몇 분 만에 전군에 비상경계태세를 발령했다. 북한 주민들의 애도 분위기를 감안해 조문단을 파견해야 하지 않겠냐는 야당의 발언은 보수파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샀다. 김영삼 대통령은 어떠한 형식의 조의 표현도 국보법 위반으로 간주해 단호히 대처할 것을 천명했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 장례식 다음 날 김영삼 정부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은 100건의 구소련 문서를 공개했다. 김일성이 6·25남침의 주동자였다는 내용을 증명하는 자료들이었다. 이에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분노했다.
한반도 정세도 최악이었다. 그해 6월 16일 미국 백악관에선 군 관계자들이 북한의 핵 개발 문제를 놓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회의를 갖는 등 ‘제2의 한국전’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물론 김영삼·김일성 회담이 예정돼 있었지만 한국에 패트리어트미사일이 배치되고, 미국 CNN은 한반도 위기상황을 전하기 위해 중계팀을 급파하기도 했다. 미국 내에서는 “영변 핵 시설을 파괴하라”는 등의 강경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북한의 핵사찰 거부로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의 합의사항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문선명 선생은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지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 주석의 사망 소식을 들었지. 1991년도에 나를 초청하여 형제지의(兄弟之誼)까지 맺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네가 내 대신 평양에 들어가 조문을 하여라. 이것은 김정일 세대와 우의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 되고 나라에도 유익한 일이기도 하다.”
북한에서는 외부에서 일체 조문을 받지 않겠다는 보도를 내보내고 있었다. 박보희 사장이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문선명 선생은 “뭐라고, 못 들어간다고! 내가 보내는 사람은 달라. 정 안 받으면 압록강을 헤엄쳐서라도 들어가. 알았어!”라고 강력하게 지시했다.
박 사장은 7월 10일 중국 베이징으로 날아가 조화를 준비하여 주중북한대사관에 우선 조문을 갔다. 북한에는 그때까지 빈소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서둘러 마련한 빈소에서 주창준 주중북한대사와 함께 조문을 마친 박 사장은 주 대사에게 문선명 선생의 당부를 전했다. 주 대사는 본국에 보고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문선명 총재의 조문 사절은 예외로 하여 평양에 모시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박 사장은 세계평화연합 문선명 총재와 세계평화여성연합 한학자 총재의 이름으로 각각 조화를 올린 뒤 상주인 김정일 위원장에게 조의를 표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문선명 총재님과 영부인께서는 안녕하신가요? 이번에 이렇게 어려운 걸음으로 평양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시거든 문선명 총재님께 뜨거운 본인의 감사를 전해 주십시오”라고 전했다. 또 “문선명 총재님이 조국과 조국통일을 위해 애쓰고 계신 것에 대해 부친께서 늘 말씀하시고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오셨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전금철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영빈관에 머물고 있는 박 회장을 찾아와 조문을 비난하는 남측 신문기사를 보여주며 “이웃집에 초상이 났는데 동족끼리 동정은 못할망정 비상경계를 펴고 총부리를 대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흥분했다. 박 사장은 2000년 7월 ‘정경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갈 길이 험난할 것으로 느끼면서도 조문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가장 의로운 일이요, 더구나 스승의 명을 받고 미래의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해 중요한 초석을 놓고 있다는 자부심에 이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 될 것으로 믿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일성광장의 추도식이 끝난 뒤 유일하게 박보희 사장을 접견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다시 한 번 문선명 총재에게 정중한 사의를 표시한 뒤 박보희 사장과 30분간에 걸친 단독회담을 가졌다. 박 사장은 김정일 위원장이 “김 주석이 문선명 총재를 지극히 좋아하고 사랑하였다. 다시 한 번 오시게 하여 백두산에 곰 사냥을 가자”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이에 박 사장은 “김일성 주석께서 정상회담을 앞두고 돌아가셔서 애석하니, 김 총비서가 조국통일의 유지를 받들어 정상회담을 꼭 추진해달라”고 부탁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지요. 유지를 받들어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침내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통일교가 모종의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난 이유이다.
3. 지속되는 신뢰 관계
2000년대 들어 북한의 잇단 핵실험으로 남북관계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특히 2008년 7월 11일 남한 관광객 박왕자씨 피격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이 중단되고, 북한의 추가 핵실험으로 개성공단마저 폐쇄되면서 남북관계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남북 채널이 유지되며 교류하고 있는 곳이 통일교이다.
통일교 외곽단체인 평화대사협의회는 문선명·김일성 회담 20주년을 기념하여 2011년 11월 14일과 12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밀가루 300t을 지원했다. 특히 이 밀가루 300t의 제1차 지원 분배 모니터링을 위해 11월 25~29일 남측의 정부 당국자(통일부 인도지원과장)가 평화대사협의회 관계자들과 함께 방북했다. 이때 정부 당국자가 방북하여 분배 투명성의 현장을 방문하는 것은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처음이고, 또한 2010년 ‘5‧24조치’ 이후 남측 당국자가 북측 당국의 초청장을 받아 방북한 것도 처음이었다.
통일교는 2012년 평화자동차와 보통강호텔 등 지분을 보유한 대북사업 운영권을 북한에 무상으로 넘겨주었다. 처음부터 10년 운영해 정상 궤도에 오르면 기부하려 했다는 것이 통일교 측의 입장이다. 북한은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에게 ‘평양시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2012년 2월 북한은 “현대그룹에 준 금강산 관광 관련 독점권을 파기하려 한다”며 통일교에 금강산 국제관광 사업을 다시 제안한 일도 있다.
북한은 2012년 연말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후 집권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처음으로 인사를 하고 사진을 같이 찍은 인물은 박상권 평화자동차 명예사장이었다. 2013년 7월 30일 전승절 60돌(정전협정 60주년) 행사 참가를 위해 방북한 해외동포 대표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정은 위원장은 박상권 명예회장을 앞으로 나오게 해 대화를 나눈 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무슨 대화를 나눴냐는 질문에 박상권 사장은 훗날 “김정은 위원장님이 ‘박 사장님은 참 뿌리 깊은 분이십니다. 장군님 시절부터 오랫동안 한결같이 우리 조선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조국통일을 위해 힘을 합쳐 많은 일을 같이 합시다’라고 간단히 말씀해주셨고, 저는 ‘그동안 여러 가지로 저를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답변을 드렸다”고 말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3년 8월 23일 문선명 선생 1주기를 앞두고 박상권 사장을 통해 “민족의 화합과 번영, 나라의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노력한 문선명 선생의 명복을 기원한다”는 내용의 추모사를 보내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앞서 그해 2월 22일 통일교 행사인 기원절에 문선명 선생 부인 한학자 총재한테 풍산개 암수 한 쌍에 각각 ‘정주(문선명 선생 고향)’ ‘안주(한학자 총재 고향)’라는 이름까지 붙여 선물로 보냈고, 문선명 선생한테는 ‘조국통일상’을 수여했다.
한편, 문선명 선생 3남 문현진 글로벌피스재단(GP)도 2012년 북한에 빵공장을 세워 하루 5000개의 빵을 생산하고 있고, 7남 문형진 목사는 2014년 12월 두 차례 평양을 방문해 밀가루 300톤을 북한에 제공했다.
Ⅴ.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의의와 평가
1. 회담의 의의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학술적으로 처음 조명된 것은 20주년을 맞은 2011년이다. 한국평화연구학회와 평화대사협의회는 11월 30일 한국언론재단에서 ‘문선명 총재·김일성 주석 만남 20주년’ 기념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남북통일 과제와 평화회담의 의미’를 주제로 발제한 홍현익 세종연구소 안보전략연구실장은 이명박정부 임기 내에 북한이 도발한 사례를 거론하며 “북한의 버릇을 고치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북한이 극단적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현재 남북한 핫라인도 모두 끊긴 상황이다. 북한을 고립시키고 압박하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수정돼야 한다”고 주문하며 “북한 전역에 우리 기업이 진출해 경제적 기반을 건설한 가운데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남북화해와 경협 등을 논의한 문선명 총재와 김일성 주석의 회담은 남북 간 평화 기조를 쌓은 일”이라고 평가했다.
토론에 나선 북한전문가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1991년 두 지도자(문선명·김일성)의 단독 회담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고 정부 차원의 남북관계 개선 노력이 이뤄지기 전에 민간에서 이룬 성과”라며 “두 지도자가 만나 합의한 이산가족 상봉, 경제교류협력 등 4개 항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남북관계 현안이자 역사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어 “반공·승공주의 지도자인 문 총재와 골수 공산주의 지도자인 김 주석이 만난 것은 북한에 대한 열린 자세를 보인 문선명 총재의 자신감에서 비롯됐다”며 “겉으로는 반공·승공을 내세우면서 북한에 대해 어쩌지도 못하는 현 정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지적했다.
토론자 윤황 선문대 교수는 “종교적 편견으로 인해 두 지도자의 역사적 회담이 과소평가된 측면이 있다”며 “남북 간 화해·협력을 위해 향후 체계적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2013년 12월 8일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본부에서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주최로 ‘문선명·한학자 총재 평화통일 평양회담 22주년 기념 세미나’가 개최돼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의미와 성과가 재조명됐다.
먼저 ‘문·김 단독회담: 평화와 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주제로 발표한 손대오 선문대 부총장은 “문선명 총재는 평양회담에서 한반도의 전쟁 재발 방지와 통일 문제에 대한 담판, 민족애 차원의 북한 지원, 한반도 중심의 세계평화 구축 등의 강렬한 메시지를 전했고, 김일성 주석은 통일 문제와 함께 민족대단결, 연방제통일론 등을 의제로 내걸었다”며 “두 사람은 견해차가 있었음에도 한반도 평화 정착과 조국 통일이라는 큰 틀에서 주목할 만한 합의점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고 강조했다.
손대오 부총장은 또 “문·김 합의에 따라 남북정상회담 조기 개최, 두만강자유경제무역지구개발공사 투자 등을 골자로 하는 남북 경협, 남북한 문화·예술교류 등에 관한 10개항의 공동성명 등이 구체적으로 합의됐고, 많은 부분이 직간접으로 이행됐다”고 설명했다.
손 부총장은 1991년 개최된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제시하면서 회담은 “남북통일과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열기 위한 역사적 결단”이었으며 “남북관계와 동북아 평화유지의 차원에서 함의하고 있는 ‘평화회담’과 ‘통일회담’의 의미도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토론에 나선 김호성 전 서울교대 총장은 “한반도를 주축으로 동북아 신냉전 구도가 휘몰아치지만 국내 정치는 실종 상태인 위기의 시대에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평가를 재조명하는 것은 참으로 의의가 깊다”며 회담의 의미를 민족, 통일, 평화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민족이 통일의 주체이며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위해 두 정상이 합의한 이 역사적 사건은 민족사 해결의 표상이라고까지 했다. 남은 과제는 문·김 회담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우리가 그 당시 회담에서 합의된 내용들을 하나하나 테마별로 연구해 실천해 나가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토론에 나선 북한 공산대·함흥컴퓨터기술대 교수 출신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는 1991년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평양에서 열릴 때 자신이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다면서 회담에 대한 북한 방송 보도와 북한 주민들의 동향 등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했다. 김 대표는 “회담 당시 북한 방송에서는 문선명 총재가 북한에 큰 투자를 해 북한경제의 발전과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도해 북한주민들의 호응이 엄청났다”고 증언했다.
오기성 경인교육대 교수, 김민지 선문대 교수, 주우철 선문대 박사가 공동연구한 ‘통일노력에 대한 트랙2 외교적 접근: 문선명·김일성 회담을 중심으로’는 극심한 적대적 대립으로 대화 자체가 단절돼 있는 두 주체를 중재하는 데는 때론 정부 당국자(트랙1)보다는 다국적기업, NGO, 박애적인 강력한 힘을 지닌 개인 등 비국가행위가가 나서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트랙2’ 이론을 통해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성격과 의미를 분석했다.
세 연구자는 문선명 선생이 그 어떤 국가 차원의 공식 직함이 없는 개인임에도 종교지도자이자 여러 국제 NGO 설립자로서 높은 존경을 받으며 또는 인도적 기업, 농업, 건강, 교육, 언론분야에 공식적으로 종사하는 저명한 인사로서 국가 정상인 김일성 주석과 국가정상회담급 합의를 이끌어내고, 또 통일교가 합의내용을 실천하는 과정을 높게 평가했다. 특히 계약부터 운영까지 정부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추진한 현대그룹과 달리 오로지 민간 차원에서 북한과 평화자동차 등 경협을 이끌어내고 10년 동안 안정적으로 운영한 것은 남북경협의 획기적인 이정표라고 평가했다.
실제 평화자동차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꾸준히 수익을 내 북한 자동차 시장을 석권하는데 성공했다. 승용차 ‘휘파람’과 승합차 ‘삼천리’는 총 1만대 이상이 판매 돼 한때 북한 자동차 시장의 41%까지 점유했다. 판매 수익금 중 국내 입금된 돈은 2009년 50만 달러, 2010년 63만 달러, 2011년 79만 달러, 2012년 80만 달러로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다. 북한에 진출한 약 600개 기업 가운데 2014년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외국 기업은 평화자동차뿐이다.
김민지 선문대 교수와 우평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공동연구 ‘글로벌 거버넌스 관점에서 본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의 함의’에선 문선명 선생의 맹활약은 그의 위대성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는다.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를 만나 당당하게 종교자유를 인정하라고 요구할 정도의 두둑한 뱃장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때 자신을 테러 명령할 정도로 적대적이었던 무신론자 북한 김일성 주석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민족문제와 종교 자유를 논하고 끝내 서로 의형제까지 맺은 모습은 과히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지다. 따라서 문선명 선생을 신앙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그에게 ‘메시아’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듯하다.
2. 회담의 평가
문선명·김일성 회담 20주년을 맞아 문선명 선생의 제자 손대오 선문대 부총장과 윤황 선문대 교수가 함께 집필한 논문 ‘문선명 총재·김일성 주석 단독회담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는 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압축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논문은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는 그 회담의 개최 배경과 합의 내용에 기초하여 이론적·실천적 측면에서 당위성과 필요성 및 실행에 의한 일반적 차원, 그리고 실제적·특수적 측면에서 시대와 상황 및 조건에 의한 특정적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개최 배경에서는 전혀 다른 사상과 이념, 종교관을 갖고 사실상 대립과 적대적 관계에서 있는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이 각각 밝힌 입장을 통해 분석되었다. 즉 문 선생은 한반도 전쟁의 재발방지, 조국의 장래문제인 통일문제의 담판, 진실한 마음으로 북한에 ‘사랑’의 전파, 한반도 중심의 ‘세계평화’ 메시지 전달하고자 회담 개최에 적극 나선 반면, 김일성 주석은 통일문제, 민족대단결문제와 남북지원문제, 연방제 통일을 논의하고자 회담 개최에 적극 나섰다.
둘째, 합의 내용에서는 이산가족상봉실시문제, 북핵해결문제, 남북경협활성화문제, 남북정상회담 개최 문제의 4개항이 도출되었다. 이 내용은 한반도, 동북아,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에 크게 기여 할 수 있는 주요 핵심 사안이다. 이는 바로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남북대화, 남북교류협력의 활성화를 통한 남북관계의 개선, 궁극적으로 평화적 남북통일 달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셋째, 역사적 의미와 평가는 일반적, 특정적 차원으로 규명되었다. 일반적 차원에서는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남북관계 개선의 기틀 제공, 민간과 당국 간 절차상 이해와 신뢰의 발전, 주민 상호간 화해와 협력의 장 마련,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구축 및 평화통일에 대한 국제사회의 긍정적 여건조성 기여, 남북 간 민족 내부의 화합 촉진과 동시에 한반도문제의 남북 주도적 해결 기여 등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평가되었다.
특정적 차원에서는 회담이 한반도 분단사상 처음으로 합법적으로 민간대표와 정상 간에 이루어진 최초의 공식회담, 4개항(이산가족상봉실시문제, 북핵해결문제, 남북경협활성화문제, 남북정상회담 개최 문제) 합의 내용의 한반도 평화안정과 교류협력 확대를 위한 실제적·구체적 방안 제시, 북핵해결문제와 관련하여 북한 최고지도자의 의중 파악과 남북 관계의 진전 여부 탐색, 상대의 인정‧존중과 이해·신뢰 속에서 한반도와 세계의 통일과 평화 달성을 위한 노력, 남북관계에서 상호신뢰성의 확보 선례로서 통일한국 건설의 동반자적 의식 함양 노력과 통일 기반의 구축 등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평가되었다.
특히 문선명·김일성 회담 직후 북한의 국제핵 사찰 수용이 합의됐고, 회담 개최 직후 곧장 남과 북이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통해 한반도에서 비핵화를 합의한 것은 민간이 당국을 이끈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두 교수는 이와 같은 분석 결과를 종합해 문선명·김일성 회담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추동시키는 ‘평화회담’이자 ‘통일회담’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총평했다. 1991년 세계사적 탈냉전의 대전환기에서 개최된 회담과 4개항의 합의 내용은 남북관계적 차원에서 담고 있는 평화와 통일의 의미가 아주 크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합의와 성과가 사장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행되어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남북회담을 통해 남북관계의 현안문제와 통일문제 등에 대해 서로 입장을 밝히고 자유로운 논의와 협상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내며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두 연구자는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반공·승공주의자인 민간종교지도자와 공산·반종교주의자인 장기독재자와의 유례없는 세계사적 회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도 강조했다. 문선명·김일성 회담은 남한 국적의 세계적 종교지도자인 문선명 선생과 북한 공산정권의 세계적 절대독재자인 김일성 주석과의 단순한 회담이라기보다 유심론(唯心論)·유신론(有神論)적 반공·승공주의의 세계적 종교지도자와 유물론(唯物論)·무신론(無神論)적 공산·반종교주의의 세계적 장기독재자와의 회담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회담은 1994년 김 주석이 갑자기 사망한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북한의 대남도발전략 구도가 크게 변화하지 않는 상황 하에 긍정적 영향을 크게 끼치는 데에는 한계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그동안 남북관계사에서 볼 때 수많은 남북회담이 개최되었지만 남과 북이 필요와 상황에 따라 남북한 간에 대화와 접촉, 그리고 합의 사항들의 이행에서 거부·중단·조정·재개라는 행태를 줄곧 반복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분단의 계곡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반도가 문선명·김일성 회담과 같은 남북회담의 개최 필요성과 당위성이 퇴색되거나 유린당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통일한국의 대업을 달성하는 그날까지 그 어떤 형태로든지 남북회담이 지속적·정례적으로 개최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의 문제이고, 민족의 문제이고, 인간의 문제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남한 사람이 남한보다 더 북한을 사랑하고, 북한 사람이 북한보다 더 남한을 사랑하면 오늘이라도 한반도는 통일된다”는 시각에서 우리는 남북회담도 국가, 민족, 인간의 사랑으로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Ⅵ. 결론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 이후 70년 동안 지구촌을 억눌렀던 냉전역사는 199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 이전과 이후로 시대구분 된다면, 40년 동안 전쟁과 대립, 반목뿐이던 한반도 남북관계는 30년 전인 1991년 북한에서 열린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된다.
북한의 도발과 테러, 납치 그리고 남측 인사들의 밀입북이 예사롭게 발생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던 시절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터부시 되던 김일성 북한 주석과의 회담은 이후의 남북 관계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비록 민간인과 정치지도자이지만 북한에서 열린 사상 첫 정상급 회담이 실시간으로 국내 언론에 보도됐고, 정부가 독점하던 통일논의의 봇물이 터졌으며 이북에도 우리가 품어야 할 2000만 국민이 살고 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려졌다.
더욱이 목 뒤의 혹뿐만 아니라 머리에도 뿔이 나 있다고 배워온 공산당 괴수 김일성 주석과 하나님을 참칭한 자칭 메시아이자 사이비 교주로 폄훼되던 문선명 선생이 ‘민족의 숙원’이자 ‘우리의 소원’인 남북통일문제와 이산가족 상봉, 핵무기 개발 중지, 남북정상회담 등 국가적 의제들을 진지하게 의논하고 4개항의 합의문과 10개항의 공동성명, 4개항의 경협 합의서를 발표한 것 자체만으로도 세상은 깜짝 놀랐다.
공산주의 타도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세계적인 승공지도자 문선명 선생과 인류 역사상 가장 긴 독재를 행하던 새빨간 공산주의 두목 김일성 주석은 과연 어떻게 만날 수 있었고,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전 세계는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북한교회 재건을 추진하면서도 문선명 선생을 이단으로 몰던 기성 교회들은 대북 교류를 선점한 통일교에 어떻게 반응할지도 큰 관심사였다.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의 역사적 회담의 의미를 다음 열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한반도의 전쟁 재발을 방지하는 역사적인 통 큰 담판 사건이었다. 1990년 안팎으로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이 무너지고 동독이 서독에 합류 통일되면서 전 세계에 사회주의는 중국 쿠바와 북한밖에 안 남게 되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북한은 결국 대량살상무기인 핵과 미사일 개발에 집중하며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와 경제난을 자초하게 된다. 그만큼 한반도 전쟁 상황이 고조된 것이다. 이를 감지한 문선명 선생은 북한 정권의 숨통을 틔어줘 일단 전쟁을 막기 위해 동토의 땅으로 들어간 것이다. 실제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후 남북한 정부 간 지속적인 회담으로 적대감이 해소되면서 협력 사업으로 남한 중소기업의 개성공단 가동, 현대그룹의 금강산관광 사업, 통일그룹의 북한 진출 등이 현실화되었으며, 북한의 급격한 붕괴를 막고 연착륙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등 한반도의 전쟁이 다시 발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둘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성경에 기록된 ‘야곱과 에서’ 노정의 재현이다. 장자권을 획득한 동생 야곱이 형 에서와 하나 되기 위해 21년 동안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모은 재물을 갖고 다시 고향 땅을 찾아가는 모습은 41년 만에 경제협력 보따리를 품고 북녘 땅을 밟은 문선명 선생과 오버랩 된다. 김일성 주석이 형님, 문선명 선생이 아우로 형제지의를 맺은 사연이 야곱과 에서 노정을 재현하는 듯해서 묘한 기시감이 든다. 통일교에서는 문선명 선생이 야곱 입장에서 에서 입장인 김일성과 하나 되어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 기대를 승리하고 신구약시대의 종말을 고하면서 새로운 성약시대를 열기 위함이었다고 해석한다. 문선명 선생은 이듬해 1992년 성약시대를 선포하였다.
셋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실향민과 탈북민 등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주는 해원의 노정이다. 문선명 선생은 1950년 고향이 있는 이북을 떠나오면서 품었던 환고향, 즉 고향 회복을 위한 담대한 여정을 살아 왔다. 일찍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설립하고, 국제승공연합을 위시해 남북통일학생연합,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그리고 사지(社旨)에 ‘조국통일 정론’이라 못 박은 세계일보를 창간한 것은 모두 북한해방 남북통일을 지향하고 있다. 교회 이름도 약칭 ‘통일교’이다. 문선명 선생은 북한 체류 중 여동생 등 친척들을 두루 만났다.
넷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으로 대표되는 유신론과 무신론, 유심론과 유물론, 종교와 반종교, 신과 물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승공과 용공, 자유와 독재, 인권과 반인권, 변증법과 수수법 등 여러 대립되는 세계관의 만남이다.
다섯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통일사상과 주체사상의 대결을 통한 사탄사상의 자연 굴복을 위함이었다. 문선명 선생은 1980년대 초부터 남북통일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이즘은 물론 북한의 주체사상을 논리·철학적으로 이길 수 있는 두익사상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것이 통일원리이든 가디즘이든 하나님주의든 신(神)통일론이든 넓은 의미에서 개념은 매 한가지이다. 유신론적 철학으로 무장해 무신론적 세계관인 주체사상을 대체시켜 북한 위정자와 주민을 깨어나게 해야 한다는 소신이다. 문선명 선생은 실제 북한 장관급 인사들을 앞에 놓고 “신을 부정하는 주체사상으로는 어림도 없다. 남북통일을 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특이한 건 문선명 선생이 준비해 간 성명서 전문이 노동신문 1면에 가감 없이 전문 게재됐다는 점이다. 성명서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노동신문 창간 이래 처음이라는 후문이다.
여섯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인간안보(human security)를 통한 세계평화운동이자 남북통일운동이다. 안보의 궁극적인 대상을 인간으로 보는 개념인 인간안보는 문선명 선생이 평생 추구해온 가치와 부합한다. 따라서 문선명 선생이 북한 주민 안위를 걱정하고, 종교의 자유와 경제적 가난 등 여러 부자유로부터 북한 전체를 구원하고자 한 행위는 전형적인 인간안보를 위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일곱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김일성에게 잃어버린 기독교 향수를 깨우쳐 줬다. 어린 시절 외가에서 교회를 다닌 김일성은 14살 무렵부터 공산주의에 빠져 사실상 60년을 교회와 단절됐을 뿐만 아니라 철두철미만 반종교적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성직자인 문선명 선생을 만난 걸 계기로 그 후 세계적인 부흥목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초청하고, 위장일지언정 두 개의 교회와 성당 1개를 복원하는 등 사망 직전까지 친종교적 행보를 보여 왔다.
여덟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남한의 민간 종교지도자와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만나는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이 이은 세계사적 회담이었다. 문선명 선생은 국가를 대표하는 어떠한 직책도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종교지도자이자 세계적인 경제·언론·NGO 등의 네트워크를 가진 인물로서 국가를 중심한 국제관계를 초월하여 초국가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국제행위자로서의 모습을 선도적으로 보여주었다.
아홉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방북한 민간인 중 처음으로 합법적 절차를 밟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한 첫 선례를 남겼다. 문선명 선생에 앞서 서경원 의원, 문익환 목사, 황석영 소설가, 임수경 대학생,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이 북한에 갔으나 밀입북이었고 행적도 모두 비밀리에 움직여 역사로 기록되지 못했다.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의 회담 결과는 직후 열린 남북총리급 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라는 열매를 맺는데 기여한 모양새가 됐다.
열 번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적개심을 사랑으로 돌려세운 남북통일운동의 역사적 전환 회담이다. 문선명 선생은 김일성 주석과 만난 이후 “남한 사람이 남한보다 더 북한을 사랑하고 북한 사람이 북한보다 더 남한을 사랑한다면 오늘이라도 한반도는 통일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사랑에 의한 남북통일은 여기서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승공운동을 하며 공산당에 적개심을 보일 때와는 결이 다르다. 결국 문선명 선생은 사랑, 그 중에서도 참사랑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문선명 선생은 “하늘의 부름을 받은 그날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뛰는 마라톤 선수의 삶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자신이 설립한 모든 기반의 원천인 통일교회 창립도 남북통일과 세계평화 실현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고르바초프에 이어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한 이유이자 목적으로 하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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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세계일보』, 『연합뉴스』
1991년 12월 6일 북한의 함경남도 흥남시 마전의 주석공관에서 세계적인 종교지도자 문선명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 설립자이자 세계평화연합 총재와 북한의 국가주석 김일성이 약 3시간 동안 역사적 특별회담이 진행됐다.
오찬을 겸한 회담 자리에는 남측 인사로는 문선명 총재의 부인 한학자 여사, 박보희 당시 세계일보 사장 등이, 북측에선 김달현 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과 윤기복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 배석했다. 흥남은 1945년 광복 직후 북한에 선교하러 들어갔던 문선명 선생이 1948년 5월부터 6·25 때 미군이 진격한 1950년 10월까지 감옥살이 하던 곳이라 유서 깊은 장소이다.
세계평화교수협의회(PWPA·회장 토마스 셀로버)는 문선명·김일성 회담 30주년을 맞아 1월 27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 통일회관 4층 세미나실에서 ‘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이날 학술회의는 전국 PWPA 회원들이 함께 참여했다.세계평화교수협의회 주최 ‘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학술회의 사회를 맡은 선문대 김수민 교수.
1부 세계평화교수협의회 정기총회에 이어 진행된 2부 연례 학술회의는 선문대 김수민 교수의 사회로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김일기 책임연구원(정치학박사)의 ‘문선명·김일성 회담 30주년, 한반도 평화의 길을 묻다’와 세계일보 조정진 선임기자(북한학박사)의 ‘문선명·김일성 회담 역사적 의의와 평가’ 발표에 이어 선문대 김민지 교수, 전남대 지충남 교수, 전북대 전광호 교수, 통일연구원 홍석훈 연구위원의 토론 순으로 진행됐다.
주제 발표에 나선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김일기 박사는 먼저 “국제적 반공주의자이자 승공주의자인 문선명 총재와 사회주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수령제’라는 종교 국가적 형태를 띠고 있는 북한 김일성 주석의 회담은 당시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며 “불과 수개월 전인 1990년 4월,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을 통해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계적 대화’가 한반도에서 다시 한 번 개최된 것”이라고 운을 뗐다.세계평화교수협의회 주최 ‘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학술회의 발제를 맡은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원 김일기 박사.
김일기 박사는 문선명·김일성 회담 배경에 대해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체제 전환에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낀 김일성의 의지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실질적으로는 문선명 총재의 의지가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김 박사는 “문선명 총재는 1990년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을 통해 세계평화에 기여한 자신감을 기반으로, 이미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최대한 이른 시일에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하며 문 총재가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 나섰던 배경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한반도 전쟁 재발 방지이다. 소련이 1~2년 이내에 붕괴할 것을 직감한 문 총재는 소련 붕괴 이후 궁지에 몰린 북한이 전쟁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는 상황을 우려해 이를 막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대화 채널확보가 급선무라고 판단하였다.
둘째, 조국의 장래, 즉 통일문제의 해법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문 총재는 남북이 먼저 평화통일을 이루어온전한 주권을 회복해야만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 주석과 만나 ‘사랑에 의한 남북통일’, 즉 ‘무력에 의한 통일’과 ‘주체사상에 의한 통일’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주의에 의한 평화통일’을 전파하고자 했다.
셋째, 북한에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을 전해주고자 하였다. 문 총재는 북한을 내 고향, 내 형제의 집으로 여기고 사랑의 마음을 주려고 김 주석과 만나고자 했다. 그는 북한에 쌀을 주고 비료를 주는 것보다 사랑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정을 다해 북한을 생각하고 위할 때 북한도 마음의 문을 연다고 확신하였다.
세계평화교수협의회 주최 ‘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학술회의 토론을 맡은 선문대 김민지 교수(오른쪽).
넷째, 한반도 중심의 세계평화 메시지 전파이다. 문 총재는 한반도가 세계평화의 축이고, 한반도의 천운이 세계로 뻗어나가야 한민족 중심의 세계평화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평화의 메시지를 북한에 전하고자 하였다. 문 총재는 좌익과 우익의 갈등과 충돌을 극복하기 위한 공생·공영·공의주의의 두익사상을 실천하고자 남북통일운동에 적극적이었으며, 문선명·김일성 회담은 이러한 연장선상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남북한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이다. 문 총재는 1991년 12월 1일 평양에 도착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나는 원수의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고향 내 형제의 집에 가는 것이다. 나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서로 단결하자는 나의 필생의 신조를 가지고 북한 땅을 밟았다. 대한민국 정부와 북한 당국자 간의 발전적인 대화와 교류를 증진시켜 나가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심경에서 북한을 방문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는 문 총재의 방북 목적 중 하나가 남북한 대화와 교류협력에 교량적 역할을 하고자했던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세계평화교수협의회 주최 ‘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학술회의 토론을 맡은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 홍석훈 박사.
회담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첫째, 형식적 측면에서 문선명·김일성 회담은 한반도 분단 역사에서 남한의 민간 대표와 북한 정상 간에 이루어진 최초의 공식회담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고, 둘째, 내용적 측면에서 문선명·김일성 회담은 이산가족 상봉, 북한의 비핵화, 남북경협 활성화, 남북정상회담 개최 등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한반도 주요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합의한 회의였다는 점, 셋째, 문선명·김일성 회담에서 합의한 4개항은 향후 남북 당국 간 회담의 주요 의제가 되었으며 상당한 진정이 이루어졌다는 점, 넷째, 탈냉전 세계사적 전환기 속에서 한반도 평화의 전기를 마련한 회의였다는 점 등을 들었다.
결론적으로 김일기 박사는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문 총재의 세계평화사상이 남북통일, 민족통일, 평화통일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주었다는 데에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보았다.세계평화교수협의회 주최 ‘문선명·김일성 특별회담 30주년과 한반도 평화’ 학술회의 발제를 맡은 세계일보 선임기자 조정진 박사
‘문선명·김일성 회담 역사적 의의와 평가’를 주제로 발표한 조정진 박사는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전과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성사과정과 합의 내용, 그리고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후에 발생한 김일성 사망과 조문파동,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에 대해 상세히 기술했다.
조 박사는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의 역사적 회담의 의미를 다음 열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한반도의 전쟁 재발을 방지하는 역사적인 통 큰 담판 사건이었다.
둘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성경에 기록된 ‘야곱과 에서’ 노정의 재현이다.
셋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실향민과 탈북민 등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주는 해원의 노정이다.
넷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으로 대표되는 유신론과 무신론, 유심론과 유물론, 종교와 반종교, 신과 물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승공과 용공, 자유와 독재, 인권과 반인권, 변증법과 수수법 등 여러 대립되는 세계관의 만남이다.
다섯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통일사상과 주체사상의 대결을 통한 사탄사상의 자연 굴복을 위함이었다.
여섯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인간안보(human security)를 통한 세계평화운동이자 남북통일운동이다.
일곱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김일성에게 잃어버린 기독교 향수를 깨우쳐 줬다.
여덟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남한의 민간 종교지도자와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만나는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이 이은 세계사적 회담이었다.
아홉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방북한 민간인 중 처음으로 합법적 절차를 밟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한 첫 선례를 남겼다.
열 번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적개심을 사랑으로 돌려세운 남북통일운동의 역사적 전환 회담이다.
다음은 조 박사가 이날 발표한 논문 ‘문선명·김일성 회담 역사적 의의와 평가’의 각주를 뺀 전문이다.
조정진 선임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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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김일성 회담 역사적 의의와 평가 <전문>
Ⅰ. 서론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라는 말이 있다. 하늘에 사무치도록 한(恨)이 맺히게 한 사이라는 뜻이다. 하늘을 같이 이지 못할 원수라는 뜻의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讐)라는 말도 있다. 도저히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관계이니 얼마나 껄끄러운 사이인지는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오랜 반목과 질시로 인해 서로 귀한 아들과 딸을 잃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 등장하는 몬태규 가문과 캐퓰렛 가문 사이를 연상하면 된다.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이하 통일교) 창립자 문선명(文鮮明, 1920∼2012) 선생과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이하 북한) 김일성(金日成, 1912~1994) 주석은 70평생을 불구대천지원수로 지낸 사이이다. 문선명 선생은 북한을 무신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독재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고, 북한은 국제승공운동을 하는 통일교와 종교지도자인 문선명 선생을 ‘엄청난 괴뢰도당, 승공의 괴수’로 불렀다. 물론 개인적인 원한 관계는 아니다. 각자 살아온 삶의 궤적과 철학, 신념이 정반대로 서로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유신론 세계관으로 무장된 문선명 선생은 ‘세상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신이 직접 통치하는 지상천국론’을 펼치는 종교지도자인 반면, 종교화된 ‘유물무신론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철두철미한 공산주의자인 김일성은 북한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절대 권력을 구가하는 철권 통치자였다.
따라서 인류 사상사의 두 큰 흐름 중 하나인 헤브라이즘을 대표하는 종교지도자 문선명 선생과 헬레니즘을 대표하는 주체사상 지도자 김일성 주석이 만난 일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이요, 시대적 사변이다. 더욱이 북한에서는 예전엔 통일교에 대해 “종교의 탈을 쓴 반공별동대, 반공모략단체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해독성을 갖고 있으며, 교리의 허황성과 사회윤리를 문란시키고 청년들을 정신불구자로 만드는 해독행위와 광란적인 반공모략 책동으로 남한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규탄과 배격을 받고 있다”고 규정했었다.
‘문선명·김일성 회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회담은 1회로 끝났지만 그 후 회담 당사자인 문선명 선생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김일성 주석의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집권할 때는 물론이고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집권하고 있는 2021년 1월 현재까지도 통일교와 북한 양측은 꾸준히 대화 채널을 유지하며 우호적으로 교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회담 직후 추진된 경제협력 원칙에 따라 북한에 평화자동차와 보통강호텔 운영 등 합의 내용 후속 조치가 일사불란하게 지속되어 양측의 신뢰 관계는 매우 두터운 편이다. 여기엔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 사망 시 문선명 선생이 최측근인 박보희 당시 세계일보 사장을 조문사절로 보낸 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문선명·김일성 회담에 동행했던 한학자 통일교 총재는 2015년 5월 기자간담회에서 “북한에서는 (우리에게) 지극정성이에요. 문 총재님과 김일성 주석과의 관계는 굉장히 끈끈했어요. 김정일, 김정은 위원장이 다 (통일교에 대한 김일성의) 유지를 받들었어요” 하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방북 초청장을 받아놓은 상태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계적인 승공운동가이자 종교지도자 문선명 선생과 세계적인 공산주의자 김일성 주석이 만난 희귀한 사례인 문선명·김일성 회담은 그동안 학계의 관심과 연구가 거의 없어 일반인은 물론 관련 전문가들조차 자료 접근과 이해에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심지어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역사적인 사건임에도 개최 사실 자체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묻혀진 역사적 사건’이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각각 당대 유신론과 무신론 사상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두 지도자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이 극적으로 만나 정상급 회담의 새 지평을 연 1991년의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성사 배경과 성사 과정, 회담 성과를 정리하고 회담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를 학술적으로 구명(究明)하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올해는 ‘문선명·김일성 회담’ 30주년이 되는 해로 1991년 회담 때 합의되고 기대됐던 남북한 화해와 평화, 교류, 이산가족 상봉, 한반도 비핵화, 평화적 통일이 요원해진 원인과 해결 방안까지 모색해 볼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에 본고는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전의 추진 상황과 회담 성과 과정부터 회담 내용, 회담 이후 후속조치 이행 등 시간 순으로 시기를 나눠 회담의 역사적 의의와 교훈을 살펴보고, 나름 객관적 평가를 시도한다. 연구 방법은 회담 당시의 신문 잡지 등 언론 보도를 중심으로 회담 관계자들의 구술과 증언록, 극소수의 관련 연구 논문을 수집 분석해 재해석하는 문헌연구법을 활용하고자 한다.
Ⅱ.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전
1. 문선명의 삶과 철학
문선명 선생의 삶은 크게 두 분야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종교인으로서 본인이 창교한 통일교 기반을 확장해 모든 인류를 교인화 하는 지구촌 선교이고, 또 하나는 무신론에 근거한 공산주의를 지구상에서 소멸하는 국제승공운동이다. 이런 목적 실현을 위해 문선명 선생은 1954년 종교법인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설립했고, 1968년엔 사회단체 국제승공연합을 창립했다. 문선명 선생의 또 다른 꿈인 한반도의 남북통일은 무신론에 기반 한 한반도 북녘 지역을 하나님주의라는 유신론, 즉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세상으로의 탈바꿈이다. 이를 위해 문선명 선생은 1986년 남북통일학생연합을 결성하여 주사파 등 북한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좌파이론에 속수무책이던 대학가에 일대 경종을 울렸으며, 1987년에는 좌·우익의 이념을 넘어선 범국민 통일운동단체인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을 창설했다.
문선명 선생은 북한과 인연이 깊다. 1920년 북한 행정구역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한 문선명 선생은 1948년 2월22일 남한 스파이란 죄목으로 평양 내무서에 끌려가 세 달 만에 무죄로 석방됐으나 곧바로 기성 교회의 투서로 공산당에 잡혀가 4월 7일 공판 이후 평양형무소에 수감, 5월 20일 흥남감옥으로 이송된 후 1950년 10월 13일 미군의 흥남 진격으로 2년 8개월 만에 흥남감옥에서 나와 자유를 맛봤던 가슴 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문선명 선생은 그 후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에 정착해 공산주의 유물사관을 반대하여 전 세계적으로 승공운동을 벌였고, 소련 공산당의 세계적화전략에 맞서 자유세계를 수호해야 한다고 역대 미국 대통령들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철저한 국제적 반공주의자이자 승공주의자이다.
문선명 선생은 목회자로서 선교활동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평화운동, 참가정운동, 언론운동, 심정교육활동, 학술운동, 문화·예술·스포츠 활동, 종교화합운동, 여성운동, 청년운동, 봉사·구호활동, 후생복지사업, 과학기술산업진흥운동은 물론 유엔에 기반한 비정부기구(NGO) 운동 등을 통해 평화세계 실현을 위해 노력해 왔다.
이에 미국 잡지 뉴스위크는 이러한 실적을 인정해 1976년 문선명 선생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고, 영국 신문 선데이타임스는 1991년 ‘20세기를 만든 1000명의 인물’ 가운데 한민족 중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 김일성 주석과 함께 문선명 선생을 나란히 꼽을 정도로 위상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유독 한국에서만은 종교적 편견으로 사후 9년이 흐른 2021년 현재까지도 위인 반열은커녕 기독교계의 이단 교주 논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문선명 선생의 공산주의, 특히 북한에 대한 이해는 통일교 경전인 ‘원리강론’에 잘 나와 있다. ‘원리강론’은 “히틀러가 망한 후 사탄 편인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공산세계가 세계적인 기반을 가지고 나타났다고 설명하고, 제1, 제2차 세계대전은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를 분리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쟁이었으며, 따라서 민주세계와 공산세계를 하나로 통일하기 위한 제3차 세계대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리강론’은 이어 “예수님이 재림하실 동방의 나라는 바로 한국이며, 따라서 한국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일선인 동시에 사탄이 가장 미워하는 일선이 되어서, 민주와 공산의 두 세력은 여기에서 서로 부딪치게 되는 것이고, 그 부딪치는 선이 바로 삼팔선이다. 그러므로 삼팔선에서 일어났던 6·25동란은 국토 분단에 기인한 단순한 동족상쟁이 아니라 민주와 공산 두 세계 간의 대결이었고,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결이었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문선명 선생에게는 공산주의 최전선에 위치한 북한은 가인의 세력이며 사탄의 세력인 셈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문선명 선생의 철학은 1983년 12월 20일 국제승공연합이 잠실종합운동장에서 개최한 전국승공궐기대회 대회사에 잘 나타나 있다. 문선명 선생은 이날 “북한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폭력을 일삼고 있는 공산주의 세력을 이 지구상에서 근멸하지 않고서는 결국 조국의 통일, 세계평화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며 “통일운동의 최종 목적은 공산주의를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일소하고 참된 자유와 평화와 번영의 세계를 이룩하는 것이다. 악마가 지배한 북한을 이기고 남한 내 지하조직을 적발하기 위한 실천적인 국민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다음은 북한과 관련된 이날 문선명 선생의 강연 요약이다.
“북한은 악을 대표하고 대한민국은 선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겨야 할 숙명적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공산주의를 승리할 때 대한민국은 세계에 웅비할 것이요, 공산주의에 패할 때 대한민국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패망의 비참한 운명은 인류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북한만을 이길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공산주의를 이겨야 합니다. 북한은 악한 편에서 세계공산주의를 대표해서 북한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은 선한 편에서 세계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입장에서 북한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대한민국은 각각 공산세계와 민주세계의 첨단에 서서 양 세계를 대표해서 생사를 건 운명적인 역사적 대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은 악을 대표하고 대한민국은 선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악마가 지배하고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같이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리하여 한반도는 세계에서 선과 악이 가장 날카롭게 맞서고 있는 세계사적 지역이 되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선이 악을 승리할 때 세계의 모든 악은 망하게 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문선명 선생의 제자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은 ‘21세기 한국의 비전과 남북통일’에서 “남북통일은 문선명 선생의 숙원이다.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문선명 선생의 승공사상”이라며 “승공이념은 세계를 공산주의 마수에서 구할 수 있는 사상이며, 이는 20세기 새 종교혁명”이라고 강조했다.
문선명 선생의 북한관은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후 변화를 드러냈다. 문선명 선생은 2000년 ‘세계와 남북통일은 참사랑으로’라는 설교를 통해 “이미 북한 사람들은 전 국민이 다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무장을 하고 있다”며 “우리는 그들을 소화할 수 있는 하나님의 참사랑 사상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선명 선생은 또 “문제는 남한 사람이 남한을 사랑하는 이상 북한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야 된다. 또한 북한 사람이 북한을 사랑하는 이상 남한을 사랑하는 사람이 나오면 된다. 그것밖에는 모색 방안, 해결 방안이 없다”고 말했다.
문선명 선생이 20세기 최대 지구촌 과제인 냉전종식에 기여한 업적은 국제법 질서가 국가 중심으로 진행되는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문선명 선생은 국가를 대표하는 어떠한 직책도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지명도는 갖췄지만 그는 종교인이자 기업인, 세계 규모의 NGO와 사회단체 창설자이자 운영자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문선명 선생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소련 중국 일본 등 그 어떤 강대국 국가수반이나 유엔 사무총장 등 국제기구 대표가 하지 못한 일을 먼저 기획하고, 먼저 실행에 옮겨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민간인이지만 그가 이룩한 종교·경제·언론·문화 등 세계적인 기반에서 우러나오는 막강한 영향력에 기인한다. 여기엔 통일교의 교세는 물론 사업적 기반, 그리고 세계 여론을 움직이는 미국 워싱턴에서 통일교가 발행하는 일간 워싱턴타임스와 한국에서 발간하는 일간 세계일보의 역할과 위력도 한몫했다.
2. 김일성의 삶과 철학
김일성 주석은 1912년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현 평양시 만경대)에서 부친 김형직(1894~1926)과 모친 강반석(1892~1932)의 장남으로 출생, 1919년 만주로 이주한 부친을 따라 팔도구소학교, 길림육문중학 등에서 수학했다. 1929년 반단체 가입죄로 체포돼 길림감옥에 구금돼 있다가 1930년 석방된 후부터 한인과 중국인 공산주의들과 유격대 활동에 참가했다.
그러나 1941년 일본토벌대에 밀려 소련의 연해주로 퇴각해 있다가 1945년 9월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와 소련군정의 후견 하에 1948년 9월 북한정권의 수립과 동시에 초대 수상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1994년 사망할 때까지 장기집권자 독재 권력자로 군림했다.
김일성 주석의 권력은 그가 사망한 이후 현재까지 자신의 아들과 손자, 즉 김정일·김정은의 3대 부자세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현재 북한은 국가 그 자체가 김일성국가, 김일성민족으로 상징화된 김일성의 ‘수령종교국가제’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는 한마디로 북한이 창조주 김일성의 주체영성에 의한 하나의 거대한 종교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 가운데 모든 북한 주민들은 수령 종교의 신도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은 늘 지구상 최악의 종교 탄압 국가로 분류되지만 김일성 주석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다녔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김일성 주석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교회 장로였고, 아버지 김형직은 평양에서 기독교계열 학교인 숭실중학교를 다녔다. 어머니 강반석(본명 강신희)도 예수의 제자이자 초대 교황 베드로를 뜻하는 ‘반석’으로 개명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강돈욱의 6촌 동생 강양욱은 목사로 북한의 국가 부주석까지 지내면서 북한 정치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일성의 부모 김형직과 강반석의 결혼을 주선한 사람은 미국의 저명 침례교 목사 빌리 그레이엄(1918~2018)의 장인 넬슨 벨 의료선교사였다. 벨 선교사는 강반석의 기독교식 이름도 지어주었다. 그러한 인연에서 그레이엄 목사는 1992년과 1994년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첫 방북 때 김일성 주석에 성경을 선물하고 인간의 사후 문제에 대해 언급하자 김일성 주석이 경청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과거의 일보다 앞으로 전개될 미래의 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밝혔다.
영국주재 북한공사를 지내다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국회의원은 1970년대 초 김일성 주석이 ‘북한에는 더 이상 종교 문제가 없다’고 선포했지만 1980년대 남한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기독교와 가톨릭 세력이 급부상하면서 북한의 종교정책에 변화가 생겼다고 분석했다. 문익환 목사, 문규현 신부 등 재야 기독교 세력과 교류하고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북한에도 종교가 있는 것처럼 교회와 성당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태 의원은 “그러나 북한이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 가짜교회와 성당을 지어놓고 쇼를 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믿음을 가진 이들이 생겨났다”며 “이렇듯 종교의 위력을 깨달은 북한의 노동당이 더 이상 교회와 성당을 짓지 않고 종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 주석도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 “일이 정 고달플 때면 어머니는 삼촌어머니와 함께 예배당으로 가곤하였다. 송산이라면 지금의 군사대학이 있는 곳인데 거기에 장로교 계통의 예배당이 하나 있었다”며 송산교회 김성호 담임목사에 대해 회고하면서 “송산교회에 다닐 때 교회에서 주는 사탕과 공책을 받았던 일들도 기억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말년에 자신의 명령으로 복원한 봉수교회 등 평양에서 교회를 다녔다는 증언도 있다. 실제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과 평양 숭실중학교 동문이자 함께 교회를 다닌 주일학교 친구였던 김성락 목사는 생전에 두 차례 평양을 방문했는데, 1981년 방문 때는 함경도 별장에서 함께 점심을 먹게 되자 김일성 주석이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해 식사기도를 했더니 “아멘” 하고 응답했다고 회고했다. 김성락 목사는 헤어질 때 김일성 주석에 성경책 한 권을 선물로 주고 왔다고 밝혔다. 김성락 목사는 또 일제하의 숭실대학과 같은 대학을 평양에서 하나 해 보았으면 한다고 하자 김일성 주석은 “평양에 들어와 다시 하나 만들어 보자”고 승락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한편, 북한은 2016년 문선명 선생을 ‘통일애국인사’로 소개했다. 북한 대외선전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2015년 출간된 책 ‘통일의 길에 이름을 남긴 애국인사들2’ 편에 재미동포 김성락 목사를 비롯해 임창영 전 주유엔대사, 홍동근 목사,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함께 문선명 선생에 대한 사연을 담았다. 기사는 ‘반공은 숙명인가, 고독한 항해자’라고 표현된 문선명 선생에 대해서 김일성 주석을 만난 뒤 “민족을 위한, 통일을 위한 그의 갱생의 첫걸음이 시작됐다”며 “참된 애국은 혀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장 속에 있다. 애국의 말은 하기 쉬워도 애국의 행동을 하기는 어렵다. 민족의 기대와 통일의 결심을 안고 가는 훌륭한 애국의 길이었다”고 소개했다.
3.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
문선명 선생은 공산주의 소멸을 통한 무신론의 해방, 즉 지구촌을 하나님주의로 일색화하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문선명 선생의 설교 중에 “이 지구상에 제일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사건이 바로 공산주의의 출현입니다. 이것이 왜 큰 사건이냐? 엄연히 살아있는 하나님을 죽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죄 중에서 제일 큰 죄는 분명히 있는데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퍼렇게 살아 계시는데 하나님이 죽었다고 한다면, 그 이상의 원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원수의 주인공이 공산주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산주의에 대한 모든 것을 타파해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승공에 대한 훈련과 무장을 해야 되겠습니다”하는 내용이 있다. 문선명 선생이 전개한 승공운동의 핵심은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라는 외침이고, ‘공산세계를 구원하고 사탄까지도 구원한다’는 통일교 교리의 핵심인 ‘하나님의 참사랑’에 기반한다.
문선명 선생은 1989년 소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승공운동을 한 것은 소련을 적으로 대하려는 것이 아니라 소련 사람들을 걱정하고 소련의 발전을 위한 마음에서였다고 말했다. “내가 40년 넘게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과 착취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옳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주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나는 나의 영적 삶에서 신이 있음을 알고, 그의 마음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었음을 주장한다. 나는 역사적 시작을 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소련 국민의 성공을 기원한다. 소련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종교의 자유 그리고 서방과의 협력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문선명 선생이 제시한 가시적 목표 중의 하나가 냉전의 평화적 종식이다. 심지어 문선명 선생이 남북통일에 관심을 보이게 된 것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한반도가 통일되지 않고서는 세계평화가 올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과 동유럽을 위시한 세계 공산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공산주의의 폐해를 집요하게 지적하면서 공산주의 체제 붕괴를 위해 노력했고, 소련 해체 이후에는 북한 김일성 주석을 만나는 등 한반도 화해와 통일의 물꼬를 트는 데 앞장섰다. 이런 노력 덕분에 불가능한 것 같았던 평화적 냉전종식이라는 문선명 선생의 바람과 계획은 문선명 선생이 예정한 해에 ‘어느 날 갑자기’ 기적처럼 이루어졌다.
문선명 선생이 공산주의를 종언(終焉)시키기 위해,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을 해체시키기 위해 어떻게 계획했고 어떻게 접근했는지 곳곳에 깔아놓은 복선(伏線)들을 하나하나 찾다보면 수시로 무릎을 치게 된다. 문선명 선생 회담 성공을 위해 수십 년 전부터의 면밀한 계획과 준비를 했다. 마치 20세기 세계사를 대하드라마로 연출하듯 문선명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은 ‘예언’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치밀한 복선과 완벽에 가까운 사전 준비가 돋보인다.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을 갖춘 종교지도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문선명 선생은 반세기 이전부터 소련 붕괴를 통한 냉전종식이라는 목표를 설정해놓고 움직였다. 승공이론서 ‘새 공산주의 비판’ 출판부터 승공운동 관련 국제기구 조직, ‘노한사전’ 편찬 지원, 일찍이 재일교포 사회의 화해를 주선하며 조총련 고국방문 사업을 추진한 일, 적대국 소련에 자동차 2,000대를 기부하겠다는 통 큰 깜짝 제안 등이 그렇다. 더욱이 어쩌면 돈을 마구 쓴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는 마포 도원빌딩 준공식 현장에서의 15억 원 살포, 피보다 귀한 교인헌금 2억 5,000만 달러를 회수 불투명한 공산국가 중국에 투자한 사건, 자신의 고희연을 국민잔치로 일주일 동안이나 대대적으로 치른 사연 등이 모두 소련 지도자와의 단독회담을 유인하기 위한 원려(遠慮)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소련은 당시 절대적으로 현금 등 외부의 경제지원이 필요했고, 문선명 선생은 충분한 현금동원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고르바초프의 러브콜을 받게 된 것이다.
세상이 문선명 선생을 믿던 외면하든, 통일교인들이 예언가이자 실천가로 한평생 세계평화를 통한 인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문선명 선생을 종교지도자로 모시고 따라간 이유를 문선명 선생의 족적과 사료는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국가가 하지 못한, 아니 정치 지도자들은 꿈조차 꾸지 못한 일을 문선명 선생은 민간인의 신분으로 국경·종교·민족·인종·이념을 뛰어넘어 원대한 목표를 세웠고, 기어이 이루었다.
문선명 선생이 이룩한 성과 하나하나는 모두 민간 외교관으로서 해낸 것이다. 윤기복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은 1991년 문선명·김일성 단독회담 직후 “문 총재님이 무서운 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 주석님을 대하시는 걸 보니 세상에 그런 천재적인 외교관도 없다. 문 총재님의 또 다른 위대한 면을 보았다”고 평가했다. 문선명 선생 스스로는 1991년 역사적인 북한을 앞두고 중국 베이징공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본인은 경제지원 전문가이자 화해 전문가로서 북한과의 경제개발 협력 및 사상적 화해를 이끌어내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문선명 선생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단독회담은 1990년 4월 11일 오후 6시 모스크바 크렘린궁전 대통령 접견실에서 이뤄졌다. 두 사람의 만남은 단순한 일회적인 만남이나 보여주기 식 행사가 아니라 냉전종식과 탈냉전의 전환기를 여는 회담으로 이후 한‧소 수교와 소련 붕괴, 냉전종식과 다극체제 전환 등 탈냉전시대로의 변화를 예고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문선명 선생은 독일 통일에 고르바초프가 큰 역할을 한 걸 높게 평가하며 “한국의 통일을 위해서도 대통령의 역할과 협조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자 고르바초프는 “대결과 투쟁은 원치 않는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이 세계평화에 중요하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세계평화 구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서도 공동노력을 기울일 생각이며 좋은 성과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엔 고르바초프가 먼저 “문선명 회장이 세계적으로 엄청난 기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 다국적 경제기반과 세계적인 조직을 활용, 소련의 발전을 위해 직간접적인 힘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한국과의 경제협력 역시 소련의 경제발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소·한 두 나라는 기술과 과학분야에서 상호교류를 증대해야 한다. 두 나라가 합작하여 세계 각지에 전출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문선명 선생은 “소련이 규제를 없애고 적극적으로 문호를 열어 경제적인 개방정책을 펼쳐야 국민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서 “통일교회의 세계적인 기반을 동원하여 소련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천명했다.
문선명 선생은 “북한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고, 고르바초프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통일 이후 우리 모두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긍정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 주변 국가들은 이제 한반도 통일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남북한 화해 분위기 조성을 위해 소련이 할 일을 구상하고 있다”고 답했다.
문선명 선생은 회담 성사 직후 소련의 정치 지도자들과 청년 지도자들을 미국으로 초청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1991년 4월에는 3200여 명의 고위 관리와 정치지도자들을 미국으로 초대해 민주주의에 대한 실질적인 소개를 하였다. 앞서 1990년 7월부터는 소련 대학생 3500명을 100~250명씩 나누어 총 27회에 걸쳐 미국 국제교육재단(IEF)이 주최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시켰다. 국제교육재단은 자유세계 및 공산세계 젊은이들 사이의 화해 및 대화와 교육을 촉진하기 위해 문선명 선생이 설립한 기관이다.
1991년 8월 소련 부통령 겐나디 야나예프, 총리 발렌틴 파블로프, 국방부 장관 드리트리 야조프, KGB 국장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 등 보수파들이 비상사태위원회를 구성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크림반도 포로스 별장에 감금하는 등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보리스 옐친과 함께 탱크 앞을 가로막은 채 쿠데타 세력을 굴복시키는데 앞장 선 이들이 이때 미국에서 교육받은 젊은이들이다. 쿠데타가 벌어진 3일 동안 반군세력에 의해 감금됐던 소련 국가교육위원회 구리예프 차관은 석방된 후 “소련을 구한 분은 바로 문선명 총재님이다. 문선명 총재님이 소련을 구하셨다”라고 밝혔다.
199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1회 세계언론인대회와 제3회 세계평화를 위한 정상회의를 통해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단독회담을 통해 냉전 종식의 씨앗을 뿌린 문선명 선생은 귀국 직후(4.30~5.22) 대한민국 전국을 순회하는 ‘모스크바대회 승리귀국 참부모님 환영대회’를 열었다. 이듬해 8월엔 세계평화종교연합과 세계평화연합을 잇따라 창설했고, 두 달 후인 10월엔 남북통일지도자총연합회를 결성했다. 마침내 1991년 11월 30일부터 12월 7일까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단독회담을 가지게 된다.
4. 김일성 만난 밀입북 인사들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전에 방북해 김일성을 만난 사람들이 있다. 정부의 비밀특사 이후락(1972)과 박철언(1989) 외엔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국회의원 서경원,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문익환 목사, 임수경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황석영 소설가 등 손에 꼽을 정도이다.
김구 선생은 일행과 함께 1948년 4월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참석차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고, 1992년 서경원 평민당 국회의원, 1989년에는 황석영 소설가(3.20~1993.4.27.), 문익환 목사(3.25~4.3), 한국외국어대학교 3학년 임수경 전대협 대표(6.30~8.15)가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났다.
하지만 이들의 방북은 모두 밀입북이라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도 비공식적 회담이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도 1990년부터 여러 차례 비밀리에 방북, 김일성 주석을 만났으나 어떤 성과도 없었다.
Ⅲ. 문선명·김일성 역사적 회담
1. 성사 과정
종교인이자 평화·통일운동가인 문선명 선생은 지구촌을 신이 창조했다고 믿는 이상 세계로 만들기 위해 평생을 헌신해왔다. 문선명 선생은 자신의 이러한 목적 실현을 위해 장기간에 걸쳐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게 움직였다. 종교인으로의 사명은 공산주의 소멸을 통한 무신론의 해방, 즉 지구촌을 하나님주의로 일색화하겠다는 신념이었고, 본인을 한반도에서 태어나게 한 신의 섭리를 의식해서는 분단 된 남북을 통일시켜 북녘을 해방하는 일이다.
한반도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첨예한 대립, 공산 사회주의와 자유민주 자본주의의 무한경쟁, 무신론 세계관과 유신론 세계관의 대립, 좌우익의 대립, 평등과 자유의 대립 등 인류사가 축적해 온 모든 모순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지구촌 마지막 이념 분쟁지역이다.
문선명 선생은 일찍이 한반도가 통일 되는 과정에서 지구촌이 당면한 현안들의 해결책이 나온다고 보았다. 따라서 문선명 선생이 평생 이룩한 통일교의 세계적 기반은 남북통일 북한해방으로 귀결된다. 소련 대통령인 고르바초프를 만난 것도 결국은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볼 수도 있다. 고르바초프가 문선명 선생이 이룩한 세계적 기반을 의식해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을 수용했듯이, 김일성 주석도 고르바초프가 문선명 선생을 만난 데 용기를 얻어 문선명 선생을 기꺼이 평양으로 초대한 것이다.
물론 문선명 선생이 일찌감치 깔아놓은 복선은 있었다. 냉전종식이라는 큰 주제를 놓고 고르바초프를 만나기 위해 썼던 앞서 소개한 일련의 사업들은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 위한 원려(遠慮)이기도 했다. 경제난에 직면한 소련이 절대적으로 현금 등 외부의 경제지원이 필요했듯이 북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문선명 선생은 충분한 경제적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고르바초프뿐만 아니라 김일성 주석의 러브콜을 받게 된 것이다.
문선명 선생은 7일간의 국민잔치로 진행된 1990년 2월 4일의 고희연 기념사에서 “그동안 본인이 세계적으로 닦아 놓은 기반들이 경이로운 업적이라고 함은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외형적이요 가시적인 그 기반 자체보다도, 그중 어느 것 하나라도 나 자신을 중심 삼지 않았다는 점과 현재보다는 미래를, 개인보다 전체를, 작은 것보다는 더 큰 목적을 위하여 닦은 것으로서 하늘땅과 역사가 공인할 기반이라는 점에 긍지를 갖습니다” 하고 말했다.
문선명 선생은 이어 “만일 본인이 창도한 사상에 의하여 인격이 변화되고 남을 위하여 살 수 있게 된다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으며, 우리에게 남북통일이 어려운 과제일 수 있겠습니까? 또 온 세계 인류가 이 뜻을 받아들인다면 평화롭고 번영된 세계는 보장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통일운동이 아직 양적으로는 미흡하지만 오늘의 실적이 갖는 의의는 우주사적인 것입니다. 본인은 지금 계속해서 봉공(奉公)하는 길을 찾고 있으며, 이 발걸음의 연속으로 생애를 마칠 것입니다” 하고 의미심장한 기념사를 남겼다.
문선명·김일성 회담 추진은 1991년 11월 16일 중국 베이징의 중국대반점에서 열린 ‘세계평화정상회의’의 평양개최를 위한 제3차 실무회담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당시 실무회담의 북한 측 대표로 참석한 김달현 북한 정무원 부총리 겸 대외경제위원장과 통일교 측 대표로 참석한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에게 문선명·김일성 회담을 공식 제의함으로써 성사됐다. 공식적으로 문선명 선생을 평양으로 초대한 사람은 김달현 부총리와 윤기복 북한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위원장 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다.
박보희 사장을 북한과 연결해 준 사람은 재미교포 박경윤 금강산국제그룹 회장이다. 박경윤 회장은 2012년 월간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박보희 사장이 통일교 쪽 카운터 파트였습니다. 통일교가 북한에 들어갈 때 힘들었어요. 중국이 문선명 총재 비자를 내주지 않았거든요. 단체 관광객 명단에 문 총재 이름을 넣어 간신히 중국비자를 받았습니다. 비행기가 뜰 때 서울에 ‘북조선 들어간다’고 연락했어요. 서울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죠” 하고 증언했다.
문선명 선생이 방북 전인 199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에서 문선명 선생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차기 세계평화언론인회의와 세계평화정상회를 평양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협조를 구했다. 이에 로드리고 카라조 전 코스타리카 대통령과 안토니오 베랑쿠르 사무총장이 문선명 선생이 창설한 세계평화정상회의 대표단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세계평화정상회의 평양 개최를 위한 협의를 하였다.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 회담은 1991년 12월 6일 함경남도 흥남시 함주군 마전의 김일성 공관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30분까지 약 3시간 동안 오찬을 겸한 가운데 진행됐다. 면담자리에는 남측 인사로는 문선명 선생의 부인 한학자 여사,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 등이 배석했고, 북측에선 김달현 부총리와 윤기복 조평통 부위원장이 배석했다. 흥남은 북한에 선교하러 들어갔던 문선명 선생이 1948년 5월부터 6·25 때 미군이 진격한 1950년 10월까지 감옥살이 하던 곳이라 유서 깊은 장소이다.
문선명 선생과 함께 방북길에 동행한 박경윤 회장은 “(문선명·김일성) 두 사람은 종교의 자유, 경제 협력, 통일 방안을 논의하고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김일성·문선명 만남 이후 통일교는 대북 투자에 나섰다. 평화자동차, 보통강호텔, 세계평화센터 등을 북한에서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2. 합의 내용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은 1991년 12월 6일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2시간30분 동안 ‘문선명·김일성 회담’과 오찬을 갖고 전날 합의된 문선명·김달현 부총리의 ‘남북경협 합의서’ 교환과 문선명·윤기복 원호위원장의 10개항 공동성명을 공식 확인한 후 4개항의 합의문을 별도로 서명 발표했다.
첫째, 남북통일의 1단계인 인도적 사업추진의 일환으로 1992년부터 이산가족 찾아주기 사업을 추진한다. 이산가족 상봉 및 결합은 노령자부터 실시한다. 문선명 선생이 먼저 “지금도 조국에는 생사조차 모른 채 나이 들어 죽어가는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있으니 서로 상봉하게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 주석이 “내년부터는 북남의 헤어진 동포들이 서로 만나는 운동을 시작하자”고 동의했다.
둘째, 핵에너지는 평화적 목적에만 사용할 것이며 북한은 순리적인 국제 핵사찰을 받을 것이다. 이 문제도 문선명 선생이 한반도 비핵화선언 합의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 협정 조인을 먼저 제안했고, 이에 김일성 주석은 핵이 평화적인 목적에만 사용하는 데에 동의했다. 또한 김일성 주석은 “북한이 순리적인 국제 핵사찰은 받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셋째, 북한은 해외교포를 위시한 모든 국가의 대북한 경제투자를 환영하며 군수사업을 제외한 북한의 평화적 경제사업에 통일그룹이 지원하는 대원칙에 합의한다.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은 금강산관광단지 개발 등 남북경협 문제를 폭넓게 논의하였다. 문선명 선생이 우리 민족의 명산인 금강산을 관광단지로 크게 개발해야겠다고 말하자, 김일성 주석은 즉시 금강산 개발을 요청했다. 이는 회담 전날 문선명 선생과 김달현 부총리가 남북경협에 관한 합의서를 교환한 것과 직결된 것이다.
넷째, 남북정상이 만나서 통일방식을 토론 및 결의할 수 있다면 정상회담에 응할 용의가 있다. 문선명 선생이 먼저 “남북 정상이 서로 만나 통일방식을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하자, 김일성 주석은 “만나서 통일방식을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다면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와 동시에, 김일성 주석은 “여러 번 북남최고위급회담을 하자고 제기도 하고 공식적으로 남측의 최고당국자를 초청하기도 했지만,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는데 서로 뜻을 같이해야만 만나는 것이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은 이어 전날 합의된 문선명·윤기복 10개항 공동성명의 이행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김일성 주석은 문선명 선생과 윤기복 위원장의 공동성명 발표문에 동의하면서, 공동성명에 밝힌 내용들을 서로 성실히 이행할 것을 희망했다.
문선명·김일성 4개항 항의 내용이 포괄적인 반면, 문선명·윤기복 10개항 공동성명은 매우 구체적이다.
① 쌍방은 반세기까지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나라와 민족의 분열을 더 이상 지속시켜서는 안 되며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통일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② 쌍방은 조국통일을 외세의 개입이나 간섭이 없이 자주적으로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실현하여야 한다는 데 대하여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③ 쌍방은 제도가 다른 남과 북이 서로 공존 공영하는 기초 위에서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국가를 세우는 방법으로 조국통일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민주주의적으로 하여야 한다고 인정한다.
④ 쌍방은 우리 민족이 다시는 전쟁의 참화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남과 북이 불가침에 합의하고 핵에너지는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하여 한반도에서 핵무기의 제조나 배치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⑤ 쌍방은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며 다각적인 협력·교류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남북고위급회담이 성과적으로 진전되기를 희망한다.
⑥ 쌍방은 남북고위급회담이 온 겨레의 기대에 맞게 진전되어 하루빨리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를 기원하였다.
⑦ 쌍방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원칙에서 민족의 대단결을 실현하며 힘 있는 사람은 힘을,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어 조국통일 실현에 적극 이바지할 것에 대한 공동의 염원을 표시하였다.
⑧ 해외동포원호위원회측은 북한에 대한 해외교포들의 경제적 투자를 환영하였으며 세계평화연합측은 북한에서 추진하는 경제사업에 여러 가지 형식으로 투자할 용의가 있음을 피력하였다.
⑨ 쌍방은 세계평화연합 측과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측 사이에 문화교류를 실시하는데 합의하고 우선 다음해(1992년)에 ‘리틀엔젤스’의 평양초대공연과 평양예술단의 서울초대공연을 실현시키기로 하였다.
⑩ 쌍방은 관계단체들과의 협력 하에 조국통일을 앞당기며 1천만 이산가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남과 북 사이의 자유왕래와 전면 개방을 실현하는데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첫 단계로 인도주의적 사업을 함께 추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그 일환으로 다음 해(1992년) 안으로 쌍방이 합의하는 장소에 이산가족면회소'와 편지교환소를 설치하고 먼저 노령자들 사이의 만남부터 실시하도록 노력하기로 하였다.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은 10개항을 하나하나씩 검토하며 서로의 입장을 타진했다. 통일 문제에 특히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①, ②, ③항 모두 통일 문제였다. 먼저 문선명 선생이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하겠다”고 말하자, 김일성 주석은 즉시 환영의 뜻을 표하며 1972년 7·4공동성명에서 합의한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원칙을 강조했다. 이에 동의한 문선명 선생이 “김 주석께서 제안한 연방제통일방안을 남측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면 한 지역씩 점차적으로 통일해 보는 것이 어떤가”라고 제안하자, 김일성 주석은 “그렇게 해서는 나라의 통일을 실천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이어 문선명 선생이 “겨레의 단결을 이룩하면 내일이라도 통일할 수 있으니 김일성 주석이 전민족의 단결을 위해 더 노력해달라”고 말하자, 김일성 주석은 “오래전부터 남북 간의 신뢰 분위기를 조성하고 단결된 힘으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협상도 제기하고 북남최고위급회담도 제기하였지만 잘 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김일성 주석은 이어 “하루빨리 조국을 통일하고 후손들에게 통일조국을 물려주기 위해서 문선명 총재께서 돌아가면 북남최고위급회담도 하고 나라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자고 한다는 것을 미국 남한 일본 사람들과 당국자들에게도 적극 지지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당부했다.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은 통일방법론에 있어서 조금씩 의견을 달리했지만, 인도주의와 평화주의에 기초하여 통일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집중 논의했다.
회담 끝 무렵 김일성 주석은 문선명 선생에게 “미국 부시 대통령과 친한 사이이면 나를 초청하라고 전해주시오”라며 미국 방문 주선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문선명 선생은 미국의 정치 상황을 설명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김 주석은 또한 문 선생의 금강산 방문 소감을 묻고 금강산에 얽힌 일화와 금강산온천(주을온천)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았다. 이어 문 선생이 방북 후 둘러본 평양의 인민대학습당과 서해갑문 건축물에 관심을 표명하자 김 주석은 서해갑문의 건설 배경 등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밖에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은 함께 고향 이야기를 비롯해 서로의 추억, 좋아하는 음식 등과 관련하여 두루 이야기 했다. 양인은 ‘언 감자국수’ 이야기와 ‘사냥과 낚시’ 등 취미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어 김 주석은 “문 총재와 오늘 처음 만났는데 이제는 자주 오십시오. 오랜 친구와 같이 생각하고 다시 오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문 선생이 “김 주석께서는 나보다 연세가 많으시니 형님뻘 되시는 군요”하자, 김 주석은 “문 총재, 우리 이제부터 형님동생하며 잘해 보십시다!”하며 문 선생의 손을 꽉 잡았다. 회담을 마무리한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복도를 걸어 나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일성 주석이 남의 손을 잡고 기념사진을 찍은 것은 이 사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알려졌다.
Ⅳ.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후
1. 회담 후속 조치
문선명·김일성 회담 합의에 따라 통일교는 세계적 기반을 움직여 속전속결로 남북한 경제협력을 추진하게 된다. 먼저 평양 인근인 남포시에 100만평 부지를 확보해 통일교 측 평화자동차가 70% 지분을, 북한의 조선민흥총회사 30% 지분을 갖는 평화자동차종합공장을 2002년 4월 준공해 다양한 종류의 자동차를 생산했다. 연간 1만대 생산이 가능한 규모다.
평화자동차는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이름은 지어준 승용차 ‘휘파람’과 RV 차량 ‘뻐꾸기’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자동차를 생산했고, 평양의 주요 장소 8곳을 포함해 순안공항 및 고속도로에 상업용 광고탑을 북한 역사상 최초로 세웠다.
통일교는 아울러 문선명·김일성 회담 2년 후인 1993년 평양 보통강변에 위치한 10층 규모 163개 객실을 보유한 1급 보통강호텔을 인수했고, 문선명 선생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 생가 주변 30만평 부지에 정주평화공원을 조성해 전 세계 통일교인들이 순례를 하게 했다. 통일교는 또 평양에 이산가족 상봉 시 북측 회상상봉 장소 겸 북한 주민을 위한 외국어 및 컴퓨터 교육은 물론 교회 기능도 가능한 최신식 건물인 세계평화센터를 세웠다.
통일교는 이외에도 북한관광회사 ‘평화항공여행사’, 평화자동차 계열 대북무역회사 ‘평화무역’, 평화자동차 계열 대북건설회사 ‘평화토건’ 등을 북한에서 세워 운영해왔다.
통일교는 1994년 3월 27일 롯데호텔에서 제2차 세계평화대화를 가진 후 참석한 해외인사 70여명을 데리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기로 계획했었다. 이 계획은 1991년 방북 때 쌓아놓은 신뢰감을 바탕으로 북한의 초청으로 세워졌고 남한 당국도 허가한다는 입장이었으나 그 즈음 터진 남북대화장의 ‘서울 불바다 발언 소동’으로 백지화 됐다. 대신 문선명 선생은 그해 4월 윌리엄 테일러 미국 전략문제연구소(SCSIS) 부소장과 조셋트 샤이너 워싱터타임스 편집국장을 CNN과 함께 평양에 보냈다.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은 1997년 9월 20일 또 한 번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1994년 김일성 조문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입건돼 있던 상태라 더욱 관심을 끌었다. 박보희 사장은 평양에 1주일간 머물며 북한 고위급들과 접촉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국익을 위한 방문”이라는 알쏭달쏭한 설명 이외엔 입을 다물어 무슨 역할인지는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통일교와 북한은 1994년부터 1997년까지 남북청년학생 평화세미나를 5차에 걸쳐 개최하였다. 아울러 1998년 5월 평양에서 리틀엔젤스예술단 공연을 4차례 가졌고, 이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2000년 5월엔 북한의 만경대학생소년궁전 학생들의 서울 공연이 이루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도 북한과의 관계는 지속됐다. 문선명 총재는 2000년 10월 통일교산하 평화대사협의회가 진행한 대북식량 지원 사업에 10억원을 기부했다. 2007년 10월엔 남북한 포함 50개국 여성지도자 700명이 참가한 세계여성지도자 대회를 금강산에서 개최했고, 유엔(UN) 경제이사회에 등록된 평화봉사재단이 북한 농가주택 건축사업 추진, 4차례 걸친 재일동포 모국 방문사업 등을 성사시켰다.
문선명 선생의 90세 생일이던 2009년 1월 30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을 통해 90년, 80년, 60년 된 산삼 세 뿌리와 축하의 글을 자수로 새긴 리본, 장미꽃 90송이와 백합 90송이를 담은 화병과 화환을 보내는 등 매년 생일 때마다 선물을 보내왔다.
특이한 건 문선명·김일성 회담을 계기로 북한의 달라진 종교 이해이다. 1981년 판 북한의 ‘조선말 사전’에는 종교에 대해 “신, 하나님 등과 같은 자연과 사람을 지배하는 그 어떤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나 힘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그에 의지해서 살게 하며 이른바 저승에서 행복한 생활을 꿈꿀 것을 설교하는 반동적인 세계관 또는 그러한 조직. 종교는 인민대중의 혁명의식을 마비시키고 착취와 억압에 무조건 굴종하는 무저항주의를 고취하는 아편”이라고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후인 1992년 판에서는 “사회적 인간의 지향과 렴원을 환상적으로 반영하여 신성시 하여 받들어 모시는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또는 그 믿음을 설교하는 교리에 기초하고 있는 세계관”이라고 현저히 중립적인 설명으로 바뀐 게 확인된다.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북한의 종교·종교인에 대한 사전적 정의마저 바꿔놓은 것이다.
2. 김일성 사망과 조문파동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 예정일(7월 25일)을 17일 앞두고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했다. 하지만 회담 한 쪽 당사자였던 한국의 대통령 김영삼은 조의 표명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국무총리는 사망한 북한의 대통령을 “전범”이라고 불렀으며, 한국 정부는 “김일성은 6·25전범자임을 기억한다”라며 김일성을 비난하는 설명을 냈다.
김영삼 대통령은 또한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듣고 몇 분 만에 전군에 비상경계태세를 발령했다. 북한 주민들의 애도 분위기를 감안해 조문단을 파견해야 하지 않겠냐는 야당의 발언은 보수파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샀다. 김영삼 대통령은 어떠한 형식의 조의 표현도 국보법 위반으로 간주해 단호히 대처할 것을 천명했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 장례식 다음 날 김영삼 정부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은 100건의 구소련 문서를 공개했다. 김일성이 6·25남침의 주동자였다는 내용을 증명하는 자료들이었다. 이에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분노했다.
한반도 정세도 최악이었다. 그해 6월 16일 미국 백악관에선 군 관계자들이 북한의 핵 개발 문제를 놓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회의를 갖는 등 ‘제2의 한국전’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물론 김영삼·김일성 회담이 예정돼 있었지만 한국에 패트리어트미사일이 배치되고, 미국 CNN은 한반도 위기상황을 전하기 위해 중계팀을 급파하기도 했다. 미국 내에서는 “영변 핵 시설을 파괴하라”는 등의 강경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북한의 핵사찰 거부로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의 합의사항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문선명 선생은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지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 주석의 사망 소식을 들었지. 1991년도에 나를 초청하여 형제지의(兄弟之誼)까지 맺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네가 내 대신 평양에 들어가 조문을 하여라. 이것은 김정일 세대와 우의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 되고 나라에도 유익한 일이기도 하다.”
북한에서는 외부에서 일체 조문을 받지 않겠다는 보도를 내보내고 있었다. 박보희 사장이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문선명 선생은 “뭐라고, 못 들어간다고! 내가 보내는 사람은 달라. 정 안 받으면 압록강을 헤엄쳐서라도 들어가. 알았어!”라고 강력하게 지시했다.
박 사장은 7월 10일 중국 베이징으로 날아가 조화를 준비하여 주중북한대사관에 우선 조문을 갔다. 북한에는 그때까지 빈소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서둘러 마련한 빈소에서 주창준 주중북한대사와 함께 조문을 마친 박 사장은 주 대사에게 문선명 선생의 당부를 전했다. 주 대사는 본국에 보고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문선명 총재의 조문 사절은 예외로 하여 평양에 모시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박 사장은 세계평화연합 문선명 총재와 세계평화여성연합 한학자 총재의 이름으로 각각 조화를 올린 뒤 상주인 김정일 위원장에게 조의를 표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문선명 총재님과 영부인께서는 안녕하신가요? 이번에 이렇게 어려운 걸음으로 평양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시거든 문선명 총재님께 뜨거운 본인의 감사를 전해 주십시오”라고 전했다. 또 “문선명 총재님이 조국과 조국통일을 위해 애쓰고 계신 것에 대해 부친께서 늘 말씀하시고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오셨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전금철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영빈관에 머물고 있는 박 회장을 찾아와 조문을 비난하는 남측 신문기사를 보여주며 “이웃집에 초상이 났는데 동족끼리 동정은 못할망정 비상경계를 펴고 총부리를 대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흥분했다. 박 사장은 2000년 7월 ‘정경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갈 길이 험난할 것으로 느끼면서도 조문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가장 의로운 일이요, 더구나 스승의 명을 받고 미래의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해 중요한 초석을 놓고 있다는 자부심에 이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 될 것으로 믿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일성광장의 추도식이 끝난 뒤 유일하게 박보희 사장을 접견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다시 한 번 문선명 총재에게 정중한 사의를 표시한 뒤 박보희 사장과 30분간에 걸친 단독회담을 가졌다. 박 사장은 김정일 위원장이 “김 주석이 문선명 총재를 지극히 좋아하고 사랑하였다. 다시 한 번 오시게 하여 백두산에 곰 사냥을 가자”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이에 박 사장은 “김일성 주석께서 정상회담을 앞두고 돌아가셔서 애석하니, 김 총비서가 조국통일의 유지를 받들어 정상회담을 꼭 추진해달라”고 부탁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지요. 유지를 받들어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침내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통일교가 모종의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난 이유이다.
3. 지속되는 신뢰 관계
2000년대 들어 북한의 잇단 핵실험으로 남북관계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특히 2008년 7월 11일 남한 관광객 박왕자씨 피격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이 중단되고, 북한의 추가 핵실험으로 개성공단마저 폐쇄되면서 남북관계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남북 채널이 유지되며 교류하고 있는 곳이 통일교이다.
통일교 외곽단체인 평화대사협의회는 문선명·김일성 회담 20주년을 기념하여 2011년 11월 14일과 12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밀가루 300t을 지원했다. 특히 이 밀가루 300t의 제1차 지원 분배 모니터링을 위해 11월 25~29일 남측의 정부 당국자(통일부 인도지원과장)가 평화대사협의회 관계자들과 함께 방북했다. 이때 정부 당국자가 방북하여 분배 투명성의 현장을 방문하는 것은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처음이고, 또한 2010년 ‘5‧24조치’ 이후 남측 당국자가 북측 당국의 초청장을 받아 방북한 것도 처음이었다.
통일교는 2012년 평화자동차와 보통강호텔 등 지분을 보유한 대북사업 운영권을 북한에 무상으로 넘겨주었다. 처음부터 10년 운영해 정상 궤도에 오르면 기부하려 했다는 것이 통일교 측의 입장이다. 북한은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으로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에게 ‘평양시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2012년 2월 북한은 “현대그룹에 준 금강산 관광 관련 독점권을 파기하려 한다”며 통일교에 금강산 국제관광 사업을 다시 제안한 일도 있다.
북한은 2012년 연말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후 집권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처음으로 인사를 하고 사진을 같이 찍은 인물은 박상권 평화자동차 명예사장이었다. 2013년 7월 30일 전승절 60돌(정전협정 60주년) 행사 참가를 위해 방북한 해외동포 대표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정은 위원장은 박상권 명예회장을 앞으로 나오게 해 대화를 나눈 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무슨 대화를 나눴냐는 질문에 박상권 사장은 훗날 “김정은 위원장님이 ‘박 사장님은 참 뿌리 깊은 분이십니다. 장군님 시절부터 오랫동안 한결같이 우리 조선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조국통일을 위해 힘을 합쳐 많은 일을 같이 합시다’라고 간단히 말씀해주셨고, 저는 ‘그동안 여러 가지로 저를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답변을 드렸다”고 말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3년 8월 23일 문선명 선생 1주기를 앞두고 박상권 사장을 통해 “민족의 화합과 번영, 나라의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노력한 문선명 선생의 명복을 기원한다”는 내용의 추모사를 보내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앞서 그해 2월 22일 통일교 행사인 기원절에 문선명 선생 부인 한학자 총재한테 풍산개 암수 한 쌍에 각각 ‘정주(문선명 선생 고향)’ ‘안주(한학자 총재 고향)’라는 이름까지 붙여 선물로 보냈고, 문선명 선생한테는 ‘조국통일상’을 수여했다.
한편, 문선명 선생 3남 문현진 글로벌피스재단(GP)도 2012년 북한에 빵공장을 세워 하루 5000개의 빵을 생산하고 있고, 7남 문형진 목사는 2014년 12월 두 차례 평양을 방문해 밀가루 300톤을 북한에 제공했다.
Ⅴ.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의의와 평가
1. 회담의 의의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학술적으로 처음 조명된 것은 20주년을 맞은 2011년이다. 한국평화연구학회와 평화대사협의회는 11월 30일 한국언론재단에서 ‘문선명 총재·김일성 주석 만남 20주년’ 기념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남북통일 과제와 평화회담의 의미’를 주제로 발제한 홍현익 세종연구소 안보전략연구실장은 이명박정부 임기 내에 북한이 도발한 사례를 거론하며 “북한의 버릇을 고치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북한이 극단적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현재 남북한 핫라인도 모두 끊긴 상황이다. 북한을 고립시키고 압박하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수정돼야 한다”고 주문하며 “북한 전역에 우리 기업이 진출해 경제적 기반을 건설한 가운데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남북화해와 경협 등을 논의한 문선명 총재와 김일성 주석의 회담은 남북 간 평화 기조를 쌓은 일”이라고 평가했다.
토론에 나선 북한전문가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1991년 두 지도자(문선명·김일성)의 단독 회담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고 정부 차원의 남북관계 개선 노력이 이뤄지기 전에 민간에서 이룬 성과”라며 “두 지도자가 만나 합의한 이산가족 상봉, 경제교류협력 등 4개 항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남북관계 현안이자 역사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어 “반공·승공주의 지도자인 문 총재와 골수 공산주의 지도자인 김 주석이 만난 것은 북한에 대한 열린 자세를 보인 문선명 총재의 자신감에서 비롯됐다”며 “겉으로는 반공·승공을 내세우면서 북한에 대해 어쩌지도 못하는 현 정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지적했다.
토론자 윤황 선문대 교수는 “종교적 편견으로 인해 두 지도자의 역사적 회담이 과소평가된 측면이 있다”며 “남북 간 화해·협력을 위해 향후 체계적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2013년 12월 8일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본부에서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주최로 ‘문선명·한학자 총재 평화통일 평양회담 22주년 기념 세미나’가 개최돼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의미와 성과가 재조명됐다.
먼저 ‘문·김 단독회담: 평화와 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주제로 발표한 손대오 선문대 부총장은 “문선명 총재는 평양회담에서 한반도의 전쟁 재발 방지와 통일 문제에 대한 담판, 민족애 차원의 북한 지원, 한반도 중심의 세계평화 구축 등의 강렬한 메시지를 전했고, 김일성 주석은 통일 문제와 함께 민족대단결, 연방제통일론 등을 의제로 내걸었다”며 “두 사람은 견해차가 있었음에도 한반도 평화 정착과 조국 통일이라는 큰 틀에서 주목할 만한 합의점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고 강조했다.
손대오 부총장은 또 “문·김 합의에 따라 남북정상회담 조기 개최, 두만강자유경제무역지구개발공사 투자 등을 골자로 하는 남북 경협, 남북한 문화·예술교류 등에 관한 10개항의 공동성명 등이 구체적으로 합의됐고, 많은 부분이 직간접으로 이행됐다”고 설명했다.
손 부총장은 1991년 개최된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제시하면서 회담은 “남북통일과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열기 위한 역사적 결단”이었으며 “남북관계와 동북아 평화유지의 차원에서 함의하고 있는 ‘평화회담’과 ‘통일회담’의 의미도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토론에 나선 김호성 전 서울교대 총장은 “한반도를 주축으로 동북아 신냉전 구도가 휘몰아치지만 국내 정치는 실종 상태인 위기의 시대에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평가를 재조명하는 것은 참으로 의의가 깊다”며 회담의 의미를 민족, 통일, 평화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민족이 통일의 주체이며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위해 두 정상이 합의한 이 역사적 사건은 민족사 해결의 표상이라고까지 했다. 남은 과제는 문·김 회담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우리가 그 당시 회담에서 합의된 내용들을 하나하나 테마별로 연구해 실천해 나가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토론에 나선 북한 공산대·함흥컴퓨터기술대 교수 출신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는 1991년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평양에서 열릴 때 자신이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다면서 회담에 대한 북한 방송 보도와 북한 주민들의 동향 등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했다. 김 대표는 “회담 당시 북한 방송에서는 문선명 총재가 북한에 큰 투자를 해 북한경제의 발전과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도해 북한주민들의 호응이 엄청났다”고 증언했다.
오기성 경인교육대 교수, 김민지 선문대 교수, 주우철 선문대 박사가 공동연구한 ‘통일노력에 대한 트랙2 외교적 접근: 문선명·김일성 회담을 중심으로’는 극심한 적대적 대립으로 대화 자체가 단절돼 있는 두 주체를 중재하는 데는 때론 정부 당국자(트랙1)보다는 다국적기업, NGO, 박애적인 강력한 힘을 지닌 개인 등 비국가행위가가 나서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트랙2’ 이론을 통해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성격과 의미를 분석했다.
세 연구자는 문선명 선생이 그 어떤 국가 차원의 공식 직함이 없는 개인임에도 종교지도자이자 여러 국제 NGO 설립자로서 높은 존경을 받으며 또는 인도적 기업, 농업, 건강, 교육, 언론분야에 공식적으로 종사하는 저명한 인사로서 국가 정상인 김일성 주석과 국가정상회담급 합의를 이끌어내고, 또 통일교가 합의내용을 실천하는 과정을 높게 평가했다. 특히 계약부터 운영까지 정부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추진한 현대그룹과 달리 오로지 민간 차원에서 북한과 평화자동차 등 경협을 이끌어내고 10년 동안 안정적으로 운영한 것은 남북경협의 획기적인 이정표라고 평가했다.
실제 평화자동차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꾸준히 수익을 내 북한 자동차 시장을 석권하는데 성공했다. 승용차 ‘휘파람’과 승합차 ‘삼천리’는 총 1만대 이상이 판매 돼 한때 북한 자동차 시장의 41%까지 점유했다. 판매 수익금 중 국내 입금된 돈은 2009년 50만 달러, 2010년 63만 달러, 2011년 79만 달러, 2012년 80만 달러로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다. 북한에 진출한 약 600개 기업 가운데 2014년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외국 기업은 평화자동차뿐이다.
김민지 선문대 교수와 우평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공동연구 ‘글로벌 거버넌스 관점에서 본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의 함의’에선 문선명 선생의 맹활약은 그의 위대성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는다.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를 만나 당당하게 종교자유를 인정하라고 요구할 정도의 두둑한 뱃장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때 자신을 테러 명령할 정도로 적대적이었던 무신론자 북한 김일성 주석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민족문제와 종교 자유를 논하고 끝내 서로 의형제까지 맺은 모습은 과히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지다. 따라서 문선명 선생을 신앙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그에게 ‘메시아’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듯하다.
2. 회담의 평가
문선명·김일성 회담 20주년을 맞아 문선명 선생의 제자 손대오 선문대 부총장과 윤황 선문대 교수가 함께 집필한 논문 ‘문선명 총재·김일성 주석 단독회담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는 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압축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논문은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는 그 회담의 개최 배경과 합의 내용에 기초하여 이론적·실천적 측면에서 당위성과 필요성 및 실행에 의한 일반적 차원, 그리고 실제적·특수적 측면에서 시대와 상황 및 조건에 의한 특정적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개최 배경에서는 전혀 다른 사상과 이념, 종교관을 갖고 사실상 대립과 적대적 관계에서 있는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이 각각 밝힌 입장을 통해 분석되었다. 즉 문 선생은 한반도 전쟁의 재발방지, 조국의 장래문제인 통일문제의 담판, 진실한 마음으로 북한에 ‘사랑’의 전파, 한반도 중심의 ‘세계평화’ 메시지 전달하고자 회담 개최에 적극 나선 반면, 김일성 주석은 통일문제, 민족대단결문제와 남북지원문제, 연방제 통일을 논의하고자 회담 개최에 적극 나섰다.
둘째, 합의 내용에서는 이산가족상봉실시문제, 북핵해결문제, 남북경협활성화문제, 남북정상회담 개최 문제의 4개항이 도출되었다. 이 내용은 한반도, 동북아,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에 크게 기여 할 수 있는 주요 핵심 사안이다. 이는 바로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남북대화, 남북교류협력의 활성화를 통한 남북관계의 개선, 궁극적으로 평화적 남북통일 달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셋째, 역사적 의미와 평가는 일반적, 특정적 차원으로 규명되었다. 일반적 차원에서는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남북관계 개선의 기틀 제공, 민간과 당국 간 절차상 이해와 신뢰의 발전, 주민 상호간 화해와 협력의 장 마련,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구축 및 평화통일에 대한 국제사회의 긍정적 여건조성 기여, 남북 간 민족 내부의 화합 촉진과 동시에 한반도문제의 남북 주도적 해결 기여 등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평가되었다.
특정적 차원에서는 회담이 한반도 분단사상 처음으로 합법적으로 민간대표와 정상 간에 이루어진 최초의 공식회담, 4개항(이산가족상봉실시문제, 북핵해결문제, 남북경협활성화문제, 남북정상회담 개최 문제) 합의 내용의 한반도 평화안정과 교류협력 확대를 위한 실제적·구체적 방안 제시, 북핵해결문제와 관련하여 북한 최고지도자의 의중 파악과 남북 관계의 진전 여부 탐색, 상대의 인정‧존중과 이해·신뢰 속에서 한반도와 세계의 통일과 평화 달성을 위한 노력, 남북관계에서 상호신뢰성의 확보 선례로서 통일한국 건설의 동반자적 의식 함양 노력과 통일 기반의 구축 등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평가되었다.
특히 문선명·김일성 회담 직후 북한의 국제핵 사찰 수용이 합의됐고, 회담 개최 직후 곧장 남과 북이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통해 한반도에서 비핵화를 합의한 것은 민간이 당국을 이끈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두 교수는 이와 같은 분석 결과를 종합해 문선명·김일성 회담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추동시키는 ‘평화회담’이자 ‘통일회담’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총평했다. 1991년 세계사적 탈냉전의 대전환기에서 개최된 회담과 4개항의 합의 내용은 남북관계적 차원에서 담고 있는 평화와 통일의 의미가 아주 크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문선명·김일성 회담의 합의와 성과가 사장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행되어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남북회담을 통해 남북관계의 현안문제와 통일문제 등에 대해 서로 입장을 밝히고 자유로운 논의와 협상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내며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두 연구자는 문선명·김일성 회담이 반공·승공주의자인 민간종교지도자와 공산·반종교주의자인 장기독재자와의 유례없는 세계사적 회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도 강조했다. 문선명·김일성 회담은 남한 국적의 세계적 종교지도자인 문선명 선생과 북한 공산정권의 세계적 절대독재자인 김일성 주석과의 단순한 회담이라기보다 유심론(唯心論)·유신론(有神論)적 반공·승공주의의 세계적 종교지도자와 유물론(唯物論)·무신론(無神論)적 공산·반종교주의의 세계적 장기독재자와의 회담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회담은 1994년 김 주석이 갑자기 사망한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북한의 대남도발전략 구도가 크게 변화하지 않는 상황 하에 긍정적 영향을 크게 끼치는 데에는 한계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그동안 남북관계사에서 볼 때 수많은 남북회담이 개최되었지만 남과 북이 필요와 상황에 따라 남북한 간에 대화와 접촉, 그리고 합의 사항들의 이행에서 거부·중단·조정·재개라는 행태를 줄곧 반복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분단의 계곡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반도가 문선명·김일성 회담과 같은 남북회담의 개최 필요성과 당위성이 퇴색되거나 유린당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통일한국의 대업을 달성하는 그날까지 그 어떤 형태로든지 남북회담이 지속적·정례적으로 개최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의 문제이고, 민족의 문제이고, 인간의 문제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남한 사람이 남한보다 더 북한을 사랑하고, 북한 사람이 북한보다 더 남한을 사랑하면 오늘이라도 한반도는 통일된다”는 시각에서 우리는 남북회담도 국가, 민족, 인간의 사랑으로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Ⅵ. 결론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 이후 70년 동안 지구촌을 억눌렀던 냉전역사는 199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 이전과 이후로 시대구분 된다면, 40년 동안 전쟁과 대립, 반목뿐이던 한반도 남북관계는 30년 전인 1991년 북한에서 열린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된다.
북한의 도발과 테러, 납치 그리고 남측 인사들의 밀입북이 예사롭게 발생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던 시절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터부시 되던 김일성 북한 주석과의 회담은 이후의 남북 관계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비록 민간인과 정치지도자이지만 북한에서 열린 사상 첫 정상급 회담이 실시간으로 국내 언론에 보도됐고, 정부가 독점하던 통일논의의 봇물이 터졌으며 이북에도 우리가 품어야 할 2000만 국민이 살고 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려졌다.
더욱이 목 뒤의 혹뿐만 아니라 머리에도 뿔이 나 있다고 배워온 공산당 괴수 김일성 주석과 하나님을 참칭한 자칭 메시아이자 사이비 교주로 폄훼되던 문선명 선생이 ‘민족의 숙원’이자 ‘우리의 소원’인 남북통일문제와 이산가족 상봉, 핵무기 개발 중지, 남북정상회담 등 국가적 의제들을 진지하게 의논하고 4개항의 합의문과 10개항의 공동성명, 4개항의 경협 합의서를 발표한 것 자체만으로도 세상은 깜짝 놀랐다.
공산주의 타도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세계적인 승공지도자 문선명 선생과 인류 역사상 가장 긴 독재를 행하던 새빨간 공산주의 두목 김일성 주석은 과연 어떻게 만날 수 있었고,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전 세계는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북한교회 재건을 추진하면서도 문선명 선생을 이단으로 몰던 기성 교회들은 대북 교류를 선점한 통일교에 어떻게 반응할지도 큰 관심사였다.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의 역사적 회담의 의미를 다음 열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한반도의 전쟁 재발을 방지하는 역사적인 통 큰 담판 사건이었다. 1990년 안팎으로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이 무너지고 동독이 서독에 합류 통일되면서 전 세계에 사회주의는 중국 쿠바와 북한밖에 안 남게 되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북한은 결국 대량살상무기인 핵과 미사일 개발에 집중하며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와 경제난을 자초하게 된다. 그만큼 한반도 전쟁 상황이 고조된 것이다. 이를 감지한 문선명 선생은 북한 정권의 숨통을 틔어줘 일단 전쟁을 막기 위해 동토의 땅으로 들어간 것이다. 실제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후 남북한 정부 간 지속적인 회담으로 적대감이 해소되면서 협력 사업으로 남한 중소기업의 개성공단 가동, 현대그룹의 금강산관광 사업, 통일그룹의 북한 진출 등이 현실화되었으며, 북한의 급격한 붕괴를 막고 연착륙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등 한반도의 전쟁이 다시 발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둘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성경에 기록된 ‘야곱과 에서’ 노정의 재현이다. 장자권을 획득한 동생 야곱이 형 에서와 하나 되기 위해 21년 동안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모은 재물을 갖고 다시 고향 땅을 찾아가는 모습은 41년 만에 경제협력 보따리를 품고 북녘 땅을 밟은 문선명 선생과 오버랩 된다. 김일성 주석이 형님, 문선명 선생이 아우로 형제지의를 맺은 사연이 야곱과 에서 노정을 재현하는 듯해서 묘한 기시감이 든다. 통일교에서는 문선명 선생이 야곱 입장에서 에서 입장인 김일성과 하나 되어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 기대를 승리하고 신구약시대의 종말을 고하면서 새로운 성약시대를 열기 위함이었다고 해석한다. 문선명 선생은 이듬해 1992년 성약시대를 선포하였다.
셋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실향민과 탈북민 등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주는 해원의 노정이다. 문선명 선생은 1950년 고향이 있는 이북을 떠나오면서 품었던 환고향, 즉 고향 회복을 위한 담대한 여정을 살아 왔다. 일찍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설립하고, 국제승공연합을 위시해 남북통일학생연합,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그리고 사지(社旨)에 ‘조국통일 정론’이라 못 박은 세계일보를 창간한 것은 모두 북한해방 남북통일을 지향하고 있다. 교회 이름도 약칭 ‘통일교’이다. 문선명 선생은 북한 체류 중 여동생 등 친척들을 두루 만났다.
넷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으로 대표되는 유신론과 무신론, 유심론과 유물론, 종교와 반종교, 신과 물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승공과 용공, 자유와 독재, 인권과 반인권, 변증법과 수수법 등 여러 대립되는 세계관의 만남이다.
다섯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통일사상과 주체사상의 대결을 통한 사탄사상의 자연 굴복을 위함이었다. 문선명 선생은 1980년대 초부터 남북통일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이즘은 물론 북한의 주체사상을 논리·철학적으로 이길 수 있는 두익사상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것이 통일원리이든 가디즘이든 하나님주의든 신(神)통일론이든 넓은 의미에서 개념은 매 한가지이다. 유신론적 철학으로 무장해 무신론적 세계관인 주체사상을 대체시켜 북한 위정자와 주민을 깨어나게 해야 한다는 소신이다. 문선명 선생은 실제 북한 장관급 인사들을 앞에 놓고 “신을 부정하는 주체사상으로는 어림도 없다. 남북통일을 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특이한 건 문선명 선생이 준비해 간 성명서 전문이 노동신문 1면에 가감 없이 전문 게재됐다는 점이다. 성명서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노동신문 창간 이래 처음이라는 후문이다.
여섯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인간안보(human security)를 통한 세계평화운동이자 남북통일운동이다. 안보의 궁극적인 대상을 인간으로 보는 개념인 인간안보는 문선명 선생이 평생 추구해온 가치와 부합한다. 따라서 문선명 선생이 북한 주민 안위를 걱정하고, 종교의 자유와 경제적 가난 등 여러 부자유로부터 북한 전체를 구원하고자 한 행위는 전형적인 인간안보를 위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일곱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김일성에게 잃어버린 기독교 향수를 깨우쳐 줬다. 어린 시절 외가에서 교회를 다닌 김일성은 14살 무렵부터 공산주의에 빠져 사실상 60년을 교회와 단절됐을 뿐만 아니라 철두철미만 반종교적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성직자인 문선명 선생을 만난 걸 계기로 그 후 세계적인 부흥목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초청하고, 위장일지언정 두 개의 교회와 성당 1개를 복원하는 등 사망 직전까지 친종교적 행보를 보여 왔다.
여덟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남한의 민간 종교지도자와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만나는 문선명·고르바초프 회담이 이은 세계사적 회담이었다. 문선명 선생은 국가를 대표하는 어떠한 직책도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종교지도자이자 세계적인 경제·언론·NGO 등의 네트워크를 가진 인물로서 국가를 중심한 국제관계를 초월하여 초국가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국제행위자로서의 모습을 선도적으로 보여주었다.
아홉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방북한 민간인 중 처음으로 합법적 절차를 밟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한 첫 선례를 남겼다. 문선명 선생에 앞서 서경원 의원, 문익환 목사, 황석영 소설가, 임수경 대학생,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이 북한에 갔으나 밀입북이었고 행적도 모두 비밀리에 움직여 역사로 기록되지 못했다. 문선명 선생과 김일성 주석의 회담 결과는 직후 열린 남북총리급 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라는 열매를 맺는데 기여한 모양새가 됐다.
열 번째, 문선명 선생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은 적개심을 사랑으로 돌려세운 남북통일운동의 역사적 전환 회담이다. 문선명 선생은 김일성 주석과 만난 이후 “남한 사람이 남한보다 더 북한을 사랑하고 북한 사람이 북한보다 더 남한을 사랑한다면 오늘이라도 한반도는 통일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사랑에 의한 남북통일은 여기서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승공운동을 하며 공산당에 적개심을 보일 때와는 결이 다르다. 결국 문선명 선생은 사랑, 그 중에서도 참사랑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문선명 선생은 “하늘의 부름을 받은 그날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뛰는 마라톤 선수의 삶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자신이 설립한 모든 기반의 원천인 통일교회 창립도 남북통일과 세계평화 실현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고르바초프에 이어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한 이유이자 목적으로 하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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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세계일보』,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