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0

미래를 향한 선택 - 화해의 여정 > 웹진 |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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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미래를 향한 선택 - 화해의 여정
김성한 121.♡.116.95
2021.03.10 15:31 6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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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완다 학살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던 로잔세계복음화대회가 1989년 필리핀 마닐라에 이어서 21년 만에 2010년 케이프타운에서 열렸다. 케이프타운 시내에 위치한 대회장 가까운 곳에서 혹독했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남긴 흔적들을 발견하는 일을 어렵지 않았다. 법원이었던 건물 앞에는 유색인종을 위한 전용 벤치가 남아 있었다. 법원에서 다뤄지는 판결은 그 사람이 어느 인종에 포함되는지를 판결하는 일이었다. 그 판결에 따라 그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던 누군가의 인생은 뒤바뀌었을 것이다.

로잔대회 셋 째날 아침이었다. 르완다에서 온 안투완 루타이시어(Antoine Rutayisire)가 사람들 앞에 섰다. 학생사역을 하던 그는 르완다 학살(Rwanda genocide)의 생존자였다.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르완다에서는 80만 명에서 100만 명이 죽는 학살이 벌어졌다.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몽치, 도끼, 마체테(벌채용 칼)와 같은 일상적인 도구로 살해당했다. 안투완은 1994년에 일어난 르완다의 이야기와 함께 네 가지 교훈을 세계교회와 나누었다.1)


첫 번째로 그는 르완다의 교회가 자신들의 진짜 문제들을 다루지 않았다고 했다. 벨기에의 오랜 식민 통치를 경험한 르완다에는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후투, 15%를 차지하는 투치, 그리고 5% 정도의 트와, 세 부족이 있었다. 벨기에는 다른 식민국가와 같이 ‘분리해서 통치’하는 과정에서 소수 부족인 투치를 전면에 내세워 다수인 후투를 통치하였고 이 식민 통치 기간 동안 생긴 두 부족 간의 깊은 갈등은 1965년 벨기에가 르완다를 떠난 뒤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 1994년 이전에도 후투와 투치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과 학살이 있었지만 교회는 이것을 신앙의 문제로 직면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신자들은 신앙고백과 함께 필수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단기간의 교리 교육을 마치면 세례를 받고 교회의 멤버가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거나 갈등이 발생할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르완다의 전통적인 부족 중심의 세계관으로 돌아서곤 했다. 1994년 당시 르완다 인구의 90%가 그리스도교인 (가톨릭 아니면 개신교)이었다.

세 번째로 안투완은 선교 주체들 간의 갈등을 언급했다. 교회는 성장했고 복음은 널리 전파되는 것 같았지만 르완다의 교회들은 서로 일치되거나 서로 사랑하기 보다는 경쟁하며 때로는 폭력을 수반한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놀랍게도 르완다는 1970년대까지 계속 되었던 동아프리카 개신교 대부흥 운동의 핵심 지역 중 하나였다. 네 번째로 국가 권력과 깊이 연합한 교회를 언급했다. 벨기에의 식민 통치기간동안 가톨릭교회는 식민지 통치의 주된 협력자였으며 식민 통치가 끝난 뒤에도 교회는 자신들의 과거로 인해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고 했다.

종합하자면, 르완다 대학살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후투와 투치이기도 했지만, 또한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이었다. 이것이 안투완의 이야기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이 끔찍한 일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가 꼭 물어야 할 질문은 ‘교회가 학살과 관련해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이다.

안투완 루타이시어(Antoine Rutayisire)의 강의 영상

르완다 학살을 연구한 롱맨(Longman)은 르완다의 교회와 국가 모두에게 근본적인 내부개혁과 그들이 맺어온 역사적인 관계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두 기관 모두 ‘대중적 인기를 다시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인종에 대한 논의’를 이용했다고 설명한다. 롱맨은 이 발전 과정이 1994년에 일어난 대량 학살에서 교회가 담당했던 후원자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교회는 ‘대량 학살의 계획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어도 ‘권위에 순종하라고 격려하였고 인종 차별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듯 만들어서’ 대량 학살을 도왔다”는 것이다.2) 그러나 안타깝게도 롱맨의 주장과 달리 실제로 많은 신부들과 목사들이 학살에 직접 가담했다는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들은 단지 후견인이 아니었으며 적극적으로 학살에 참여했다.3)


2. 한국전쟁과 그리스도교

르완다에서 벌어진 이 끔찍한 학살의 이야기는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까? 안투완이 제시하고 있는 네 가지 문제를 우리 교회의 상황으로 가져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한국전쟁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남북한의 군인 사망자의 합이 약 44만 명, 민간인 사망자의 합이 약 65만 명으로 민간인 사망자가 군인 사망자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광범위한 민간인의 희생과 피해의 대부분은 무차별적인 폭격과 국가권력과 그 수족역할을 했던 좌우익에 의한 학살의 결과였다.4) 박해와 순교자의 이야기만 주로 다루는 교회에서는 숨겨진 이야기들이다. 더 나아가서 전쟁기간 중 교회의 역할과 책임을 묻는 것은 어려운 질문이다. 물론 교회는 순교자들로만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70년 동안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상황에서, 전쟁 이후의 미래에 대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분단과 전쟁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교회는 복음의 능력으로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 것 같다.

한국전쟁기 학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구성 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김동춘 교수는 “화해가 중요한 국가적 쟁점이 되었는데도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단체나 종교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 거의 개입하지 못했다...한국 기독교는 강한 반공주의를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해보다는 적대와 증오의 종교에 가까웠다. 공산주의에 피해를 본 경험이 강하게 드리워서 그런지 대체로 군경 학살에 대해 무관심했고 화해에 대한 입장이나 철학 자체가 없었다”라고 회고한다.5) 적대와 증오로는 오늘의 현실을 바꿀 수 없으며, 미래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3. 화해의 여정을 위해서



다시 케이프타운으로 돌아가 보자. 1994년 5월 르완다에서 학살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모든 인종이 참여하는 최초의 총선을 치르게 되고 27년 동안 정치범으로 수감 생활을 한 넬슨 만델라가 승리한다. 오랜 기간 가장 정교한 방식으로 인종분리 정책을 시행해왔던 남아공의 미래는 불분명했다. 그러나 만델라가 이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선택은 아파르트헤이트 기간 동안 일어난 국가 폭력과 테러의 진실을 밝히고 화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꾸리고 과거를 다루게 된다.

더 놀라운 일은 만델라가 진실을 밝히고 화해를 이루는 어려운 과업을 법률가나 정치인이 아닌 성공회 대주교였던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 5장에서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화해하셨고, 우리에게 ‘화해의 임무’와 ‘화해의 이치’를 맡겼다고 한다.


지금 우리의 교회는 깨어지고 분열 된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70년 넘게 계속되는 전쟁이 끝난다하더라도 교회가 화해의 공동체로 나설 수 있을까?

존 폴 레더락은 시편 85편을 사용하여 화해를 진실, 자비, 정의, 평화가 함께 있으며 그 모두가 하나로 드러나는 자리라고 설명한다.6) 진실 없는 자비와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평화는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며 반대로 자비 없는 진실과 평화를 위한 수고 없는 정의의 구현도 온전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화해의 임무는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실천을 요구한다.

거듭 말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 이들은 적대와 증오의 임무를 받지 않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는 화해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부터 우리가 화해의 여정을 시작한다면 교회와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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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투완의 이야기는 ‘상처입은 민족들, 상처입은 치유자들, Wounded Nations, Wounded Healers’라는 제목으로 다음의 링크에서 직접 들을 수 있다. 나는 안투완의 이야기에 내 나름대로의 해석과 의견을 덧붙였다. https://www.lausanne.org/content/reconciliation-gospel-of-reconciliation-rwanda?_sfm_wpcf-groupings=Session+Videos&_sfm_wpcf-select-gathering=2010+Cape+Town&sf_paged=2

2. Longman, T. 『Christianity and Genocide in Rwand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28. Anthony Court, “The Christian Churches, the State, and Genocide in Rwanda,” 『Missionalia』 44:1 (2016) 에서 재인용.

3. 필립 고레비지/강미경 옮김,『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 -아프리카의 슬픈 역사, 르완다 대학살』 (갈라파고스, 2011).

4. 박찬승 지음, 『마을로간 한국전쟁-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돌베개, 2010).

5. 김동춘 지음,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한국전쟁과 학살, 그 진실을 찾아서』 (사계절, 2013), 191-12.

 

6. 존 폴 레더락/유선금화해를 향한 여정』 (KAP, 2010)

 


 

김성한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 동북아 대표)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CC)에서 평화교육가이자 동북아시아 지역 대표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