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3

연찬문화연구소 | 협동조합운동과 인문운동의 결합은 시대적 요청이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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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운동과 인문운동의 결합은 시대적 요청이다.

남곡추천 0조회 15719.02.23 10:52댓글 0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협동조합운동과 인문운동의 결합은 시대적 요청이다.

 

 

1. 한반도의 역사가 큰 분수령을 맞고 있다.


대한민국의 과제는 물질적 토대는 중심교역국가(中心交易國家), 제도는 협치국가(協治國家), 의식은 새로운 문명의 선도국가의 세 방향이 융합되는 국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중심교역국가(中心交易國家)’가 되기 위해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업가 정신이 선진화되어야 한다.

‘협치국가(協治國家)’는 진보와 보수가 협치하는 나라고, 자본과 노동이 협동하는 나라다.

‘새로운 문명의 선도국가’는 사람들이 물신(物神)의 지배와 각자도생의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이 조화되는 나라’다.

 

우리 사회와 나라는 짧은 기간에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이제 우리의 관념과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낡은 진영(편가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대한민국호가 침몰하는 것을 막기 힘들 것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정신, 그리고 상대가 배제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할 동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열쇠가 될 것이다.

 

지금 현실로는 대단히 어려워서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태의 심각성과 급박함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

 

요즘 급박하게 진행되는 남북 관계가 어떻게 변해갈지 아마 근대 이후 한반도 역사의 가장 큰 분수령이 될 것 같다.

남북 관계의 전망에 있어서도 한국의 이러한 진화야말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핵심요소다.

 

나는 새로운 변화는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여러 분야에서 물질적•제도적 개혁과 인문운동의 결합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립이 극심한 정치나 사회운동 보다는 그래도 협동조합운동이 그 마중물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특히 그 선구자인 한 살림에 거는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

 

2. 내가 생각하는 인문운동은 크게 세 가지 목표를 지향한다.

 

 

1) 첫째는 우리는 사실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 인식할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내가 틀림없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따라서 '누가 옳은가?'하고 서로 다투는 문화로부터,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탐구하는 문화로 진화시키는 일이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제4편 이인)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읽고 지나치는 것 같다.
나에게는 ‘정의’ 논의에 대해 정곡을 꿰뚫고 있는 말로 들린다.

첫째, ‘이것이 정의다’라고 단정함이 없이 출발한다.
둘째,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에 빠지지 않고 ‘오직 의(義)를 좇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둘의 사고방식의 중요함을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친다.

현실을 보면 이 둘이 함께 이루어지는 일이 드물다.
‘이것이 정의’라고 자기 생각을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의를 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이것이 정의’라고 단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회의주의나 불가지론이나 시세영합에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단정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정의를 추구하는 ‘결합’을 2500년 전 공자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지의 자각’이라는 인간 의식의 진화가 필요하다.
<공자 말하기를,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끝까지 밝혀 가겠다.” (제9편 자한)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인간은 실체를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 실체를 인식할 뿐이라는 자각이다.
그래서 공자에게는 이른바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이단(異端)이라고 공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극단(極端)과 단정(斷定)을 벗어나 실체에 접근하자는 것이다.

<공자 말하기를,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 (제2편 위정)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그런데 이것을 ‘이단을 행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공자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유교(유학)가 국가 권력과 결합하여 사회의 정체를 가져온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우리나라가 지향해야할 목표의 하나가 '협치국가'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기 위한 인문적 토대는 ‘무지의 자각’을 바탕으로 진정한 소통과 대화를 통하여 그 시점에서 가장 옳은 합의에 도달하는 진정한 민주적 역량을 기르는 것이다.

 

2) 둘째는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행복을 위한 1차적 조건이지만, 그것은 필요조건이고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적 성숙이 뒤따라야 진정한 행복이 온다는 것을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을 통해 확산해 가는 것이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보다는 진정한 인간의 가치에 눈을 떠 물질에 대한 욕망이 자연스럽게 감소하는 것이다.
이것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 그 자기 몫을 충족시키고 남은 것을 '나누고 풀어놓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절대빈곤을 넘어섰기 때문에 가능한 목표로 되었다.
내가 공자의 '빈이락'과 '부이호례'가 이제 비로소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목표로 되었다고 생각하는 배경이다.
부자들, 대기업이나 재벌들에게 그들과 후손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이런 의식의 전환을 기대하고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식(食)의(衣)주(住)를 해결하는 것이 1차적 생존 조건으로 된다.

인간은 그 지적 능력(도구 사용능력)으로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획득하는데서 다른 동물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엔 그 능력 때문에 수단과 목적이 전도(顚倒)되어, 물질에 의해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특히 자본주의에 오면 ‘물신(物神)의 지배’가 모든 영역에 걸쳐 확산된다.

물질을 생존을 위한 1차적 조건으로 보면서, 항상 그 물질을 수단 이상의 가치로 보지 않을 때라야 진정한 진보 즉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

 

<공자께서 위나라에 가실 때 염유가 수레를 몰고 따르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참 많구나.”

염유가 말씀드렸다.

“백성이 많아진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다시 여쭈었다.

“부유해지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쳐야 한다.”

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子路 第十三)>

 

<자공子貢이 여쭈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學而 第一)>

 

3) 셋째 '돈'을 벌기 위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일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결코 자유롭지도 않고 행복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시스템(자본주의)이 생산력을 증대시켜 왔기 때문에 부정할 수가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전념(몰입)하여 그것이 기쁨으로 되는' 동기가 생산력의 원천으로 될 때 새로운 생산관계가 가능해질 것이다.
내가 협동(조합)운동이 뿌리내리게 하는 것에 인문운동가로서 큰 관심을 갖는 배경이다.

 

즉 개별적인 깨달음의 추구가 자칫하면 벗어나기 힘든 함정이 결국 ‘자기 본위’에 그치기 쉽다는 것이다.

며칠 전 협동운동가들의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를 소개한다.

 

<‘트라우마로부터의 해방’이 출발이라면 나아갈 방향은 어디일까?

나에게는 15세기 에크하르트가 이야기한 ‘거룩함’이 강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자발성• 전념(專念)• 기쁨’이 그 내용이다.

아마 이것이 동기(動機)로 보편화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중심이 될 때 자본주의를 넘어 새로운 인간•새로운 사회•새로운 문명으로 이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공자가 스스로 평생을 관통(一以貫之)했다고 하는 ‘서(恕)’와 ‘충(忠)’이라는 말이 에서도 깊은 감동이 있다.

‘트라우마로부터의 해방’이 ‘서(恕)’와 통하고 ‘에크하르트의 거룩함’이 ‘충(忠)’과 통한다는 느낌이다.

축(軸)의 시대의 위대한 인물의 한 사람인 공자는 그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그리고 국가 권력에 의하여 여러 면에서 심하게 왜곡되었다.

유교(유학)로부터의 해방은 시대의 한 과제이기도 한 것 같다.

나는 그 것이 공자를 왜곡으로부터 해방하는 일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협동조합은 새로운 인간•새로운 사회•새로운 문명을 향한 주요한 실험 무대이고, 중요한 동력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모임이 여러 운동체 안에 내장(內藏)할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공유하고 개발하며, 그것을 진행 운영할 인재들을 육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기를 희망한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 못매어 쓴다’라는 말이 있다.

협동운동과 인문운동의 결합이 시대적 요청이라해도 결코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 협동조합의 선구자인 한살림이 진정한 마중물 역할을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