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외로움 또는 고독함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1.02.22
한남대 명예교수
[금강일보] 얼마 전 가끔 깊게 대화하고 안부를 서로 묻는 한 분과 전화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 그분은 ‘이번 코로나19는 우리가 고독함,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라는 메시지인지 몰라’ 라고 하였다. 일가친척도, 친구도, 아는 사람들도, 일이나 다른 것 때문에 만나야 할 사람들도 자유롭게 만나지 못하고 뒤로 미루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지다보니 혼자서 지내야 하는 일이 많고 길어진다.
이 때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고독하기에 우울하고 답답하고 쓸쓸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사전에서는 고독이나 외로움을 ‘부모나 자식이 없어 의지할 길이 없어 쓸쓸함’을 뜻한다고 돼 있다. 그러니까 든든한 후견인이 없어서, 비비고 의지할 언덕이 없어서, 밝혀줄 등불이 없어서 앞이 막막하고 캄캄하며, 뒤가 텅 빈 듯이 허전함을 느낀다는 뜻이겠다. 그러니까 고독하고 외롭다는 것은 자기 혼자 광막한 곳에 던져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를 이제까지 지탱하고 우울하지 않으며 고독감을 느끼지 않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친구를 만나든, 친척을 방문하든, 어디에 가서 운동을 하고 산책을 하든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만나지 못함으로 그 관계가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어져 있는 관계를 확인할 만남이 없으니 때때로 존재 자체가 무상하고 허무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전통과 관행과 문화로 내려오던 것들이 온통 다 흩어져서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기가 혼란스럽다는 뜻이겠다. 부모나 자녀나 형제자매와 친지가 병원에 입원하여도 방문이 자유롭지가 못하고, 심지어는 임종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깊은 맘으로 애도할 기회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슬프게 한다. 기쁘고 즐겁게 축하할 일도 속시원히 할 수 없어서 우울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상황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단 말이다.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우리 삶은 꼭 그렇게 만나서 밀접한 접촉만을 통하여 생존의 의미를 찾았던가?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빈번한 소통을 가져야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게 하였던가? 삶은 관계요 만남이라고 하지만, 때때로 홀로 외롭고 고독하게 오롯이 자기만의 시간과 장소를 가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외부에서 오는 강제상황으로 고독한 상태가 만들어지는 것을 바랄 사람은 없다.
스스로 선택하여 만든 외롭고 고독한 상황이 아니라 지금은 그런 것들이 강요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요 사실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다른 사람이 어떠해서가 아니라, 내가 혹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만나거나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따져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코로나19가 왜 왔는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이 있고, 터무니가 있어서 생긴 것이겠지만, 그것은 때가 되면 밝혀지고 알려지겠지만, 지금 내 자신이 할 일은 현실로 다가온 강요된 고립감을 어떻게 긍정의 세계로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강요된 것을 어떻게 내 자신이 선택한 고독과 외로움으로 바꾸어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씨름해 보는 일이다.
어려서나 지금이나 나는 나만의 고독한 공간과 시간을 가지고 싶었고, 가지고 있다. 인디언들의 삶을 그린 책들에서 발견된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매우 감동스러운 이야기가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기만이 가지는 비밀스런 장소와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오로지 혼자서 외롭게 (어떤 궁극존재와) 이야기를 하거나 묻거나 답하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다. 복잡한 세상과 나 자신을 떠나서 혼자만이 있는 절대고독의 기회를 가지는 곳과 때를 가진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절대고독을 가질 수 있는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한 점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사람에게는 그런 절대고독의 그 한 점에서 삶이 결정된다. 예수가 잡혀서 죽기 전 피땀을 흘리며 하느님 아버지에게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 아무런 응답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절대고독의 시간, 자신도 없어진 것같은 절대고독의 상태를 경험한 뒤 얼마나 홀황한 해방의 느낌을 가지고 자기에게 다가온 운명을 받아들였던가?
석가가 생노병사의 비밀을 알아보겠다고 온 뫔을 던져 생명을 걸고 정진하던 보리수나무 아래의 절대고독이 없었다면 해탈의 찬란하고 까맣고 까만 체험을 통한 윤회의 연결고리를 풀어낼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 이런 예는 가장 근본되는 문제에 둘러싸인 강요된 고독의 상황을 덥썩 받아 스스로 적극 더 깊은 절대고독의 자리를 만들어 해답을 찾은 참 길이 여기에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만들고 자기 자신을 꾸리는 인간은 언제나 위기상황을 절대긍정의 자리로 이끌어 가는 놀라운 전환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여 왔다. 문명의 전환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판단하는 지금, 우리는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나 나라들이 절대고독을 체험할 때다. 이것이 삶이냐, 이것이 나라냐, 이것이 문명이냐 하는 물음을 근본부터 다시 던지고 따질 일이다. 원래 사람이 사는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지만, 또 자기 자신만이 문제를 풀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시, 강요된 고독의 길에서 우리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절대고독의 자리로 끌고가서 철저하게 곱씹어보는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 관계를 끊지 않지만 스스로 선택한 절대고독의 자리에서 독립되고 해방된 나라, 종속되지 않은 자유하는 인간, 인간중심의 교만한 문명이 생명중심으로 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따져보는 기회를 가져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