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평론
초기불교의 사상·윤리성에 비추어 본 한국불교 / 김종명
특집-현대 한국불교의 비판적 성찰
[17호] 2003년 12월 10일 (수) 김종명 jmk@ysu.ac.kr
1. 머리말
“머리 깎은 스님이나 부처를 믿는 신도나 부처님 말씀을 모르고 있다.”
1967년 해인사 초대방장으로 취임한 성철(1912∼1993) 스님의 사자후다.1)1) 〈성철 스님 《백일법문》으로 겨울나기〉, 〈중앙일보〉 2003년 11월 22일(27면).
나2)도 이 견해에 동의하며, 이 점은 여전히 한국불교계의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불교는 부처가 경험한 다양한 형태의 삶의 산물로서 인간 삶의 진단, 고통의 원인 및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한 인생교육시스템이었다. 2) ‘필자’보다 책임성이 강조된 개념이며, 국내의 일부 학계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국 역사상 기복신앙으로서의 불교전통’3)은 그 수입 초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내려 왔으나, 인생교육시스템으로서의 ‘초기불교’4)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현실적 삶에 대한 경험적 분석을 토대로 하여 성립된 불교의 기본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3) 이 전통은 최근 ‘기복불교’란 개념으로 칭해지고 있다. 기복불교의 비판론에 대해서는 《불교평론》 7호(2001년 여름호), 9호(2001년 겨울호), 14호(2003년 봄호) 관련 부분 및 홍사성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니다〉, 《불교와 문화》 1·2호(2002) 참조. 기복불교를 옹호한 데 대해서는 〈법보신문〉 2002. 3. 13 등 참조. 이 글에서의 기복불교에 대한 논의들은 주로 이 자료들에 의하였다.
따라서 나는 이 글을 통해 한국불교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사유체계와 삶의 양식으로서의 초기불교의 성격에 대한 바른 알음알이와 그 실천화가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현대의 한국불교계를 진단하고, 국내외의 불교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분석한 후, 이를 바탕으로 사상과 윤리로서의 불교와 그 현대적 중요성을 검토하기로 한다.
한국불교의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한국불교가 가진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그것이 부처의 말씀과 어떻게 어긋나는지 근거를 제시한 후 해결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으며,5) 사상·윤리6)로서의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 몇 차례에 걸쳐 견해들을 발표해 왔다. 따라서 이 글은 나의 기존 견해들에 대한 종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여기서의 ‘초기불교’는 부처와 그의 제자들의 가르침을 뜻한다. 초기불교의 가르침, 생활, 수행법 등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특집 - 초기불교를 다시 본다〉, 《불교평론》 14호(2003년 봄호) 참조.
5) 박영록, 〈‘기복불교를 말한다’를 말한다〉, 《불교평론》 9호(2001년 겨울호). 6) 여기서의 ‘사상’은 ‘사회 및 인생에 대한 일정한 견해’를, ‘윤리’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의미한다. 이들 각각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숭녕 감수, 《새국어대사전》 (서울: 한국도서출판중앙회, 1997), p. 586
2. 한국불교계 진단
1) 한국불교의 현재
한국 역사상 전개된 불교의 중요성은 역사적·문화적·교육학적·철학적 측면 및 한국학의 세계화 등의 다방면에서 찾을 수 있다.7) 7) 김종명, 〈21세기와 한국불교〉, 《불교연구》 제7집(서울: 한국불교연구원, 2000), pp.259∼303.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불교학의 연구 수준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며,8) 한국사회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상대적 위상 및 현대 한국의 여론 주도층 중 불교 관련 인사가 차지하는 비율도 상당히 낮다.9) 한국인들은 복을 받고 태어나서, 복을 빌며 살다가, 복을 비는 마음으로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을 받고, 복을 누리는 것에 대해 운명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다. 여기에는 인과응보의 사고가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이를 불교사상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10) 8) 김종명, 〈한국불교학계의 연구활동: 분석과 평가〉, 《종교연구》 제27집(2002년 여름), pp.87∼118. 9) 김종명, 〈국제대학원과 한국학의 세계화〉, 《국제한국학회지》 제2권(1997), pp.179∼182. 10) 황인규, 〈기복불교는 왜 생겨났는가〉, 《불교평론》 7호(2000년 여름호).
이런 현상은 우리의 일반 학계, 승단 및 세속 세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의 한국불교계는 제사 만능주의를 표방하여 부처의 비판을 받은 그 당시의 브라만교를 방불케 하고 있는 것이다.11)11) 유동호, 〈기복주의를 넘어 공덕주의로〉, 《불교평론》 7호(2001년 여름
결과적으로, 불교는 기복 위주의 ‘종교’로만 간주된 채 인문교양교육에서도 별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불교학도 국내학계의 주변학문으로 밀려나 있다. 이는 현재 세계불교학계를 리드하고 있는 국가의 하나인 미국의 경우 인문학의 한 분야로서의 불교학 연구가 특히 1980년대 이후 ‘폭발적 성장’세를 보여 온 현상12)과는 아주 다르다. 12) 김종명, 〈국내 불교학 연구의 방향〉, 《철학사상》(2000. 11) 111호, p.70.
더욱이 불교 개념들인 ‘홍익인간’과 ‘원융무애’를 교육이념으로 채택하고 있는 나의 재직 대학교의 인문학 전공 교수들도 불교는 종교이며, 이 대학교 교양교과목 편성의 한 원칙인 종교성 배제의 원칙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불교 관련 교과목은 교양교과목이 되기에는 부적절하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불교종단의 고위 행정직을 역임하고 있는 승려들과 사찰의 승려들도 기복신앙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부채질까지 하고 있으며, 현대 한국 불자들의 대부분도 복을 빌기 위해 절에 나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13) 13) 홍사성, 2002.
따라서 비불자들 중 상당수도 불교를 개인 차원의 기복종교로 생각하는 경향이 적지 않으며, 심지어는 무속과 같은 차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14) 불교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시각의 원인은 무엇인가? 14) 한명우, 〈기복불교의 실태와 문제점〉, 《불교평론》 7호 (2001년 여름호).
2) 원인 분석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다양하다. 초기불교의 자연관, 인생관, 세계관은 각각 사대설, 업보설, 십이처설이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사상적으로 이러한 초기불교를 이은 것이 아니다. 한국불교는 초기부터 중국 고유의 자연관, 인생관, 세계관인 풍수지리설·조상숭배설·천견재이설(天譴災異說)에 사상적 토대를 둔 채15) ‘기복불교’로 자리매김 되어 왔으며, 대내외적으로도 왜곡 이해된 역사를 가졌다. 15) 김종명, 《한국중세의 불교의례: 사상적 배경과 역사적 의미》(서울: 문학과지성사, 2001), pp. 206∼272. 나는 한국불교의 정체성 문제와도 직결된 이 주장에 대한 학계의 반응을 기대해 왔으나, 아직 별 반응이 없다.
대내적으로는 현실과 타협한 승단의 정치적 예속, 과거 중국불교 전통의 묵수적 수용,16) 근대 일본 불교학계의 연구 성과에 대한 무비판적 계승,17) 현대 한국승가 교육과정의 문제,18) ‘불립문자’에 대한 오해, 교리에 대한 무지19) 등에서, 대외적으로는 왕실에 의한 기복종교화, 유학자들에 의한 허무의 종교 및 비도덕적 종교로의 잘못된 이해,20) 근대 서구 선교사들에 의한 미신으로의 곡해, 근대 교육과정 수립시 구시대의 유산으로 치부된 점 등이 그 이유들로 나타난다.
16) 카마다 시게오(鎌田武雄) 지음, 장휘옥 역, 《중국불교사》(서울: 장승, 1993), p. 21. 이러한 경향은 국내의 중국사 연구 및 의학계의 연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에 대해서는 각각 김태승, 〈중국근대사 인식의 계보와 유산〉, 한국사연구회 엮음, 《20세기 역사학, 21세기 역사학》(역사비평사, 2000), 82쪽 및 이종찬, 〈동서 의학의 문명사적 비교〉, 영산대학교 제6차 한의학 학술대회(2003. 11. 7) 발표논문, pp.15∼16 참조. 따라서 비판문화의 부재는 국내 동양학계의 일반적인 경향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7) 국내 불교학계에서는 화엄사상과 정치권과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해 왔으나, 이것은 근대 일본 불교학계의 연구성과를 답습한 결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최연식, 〈화엄철학은 어떻게 일본의 정치이데올로기가 되었는가〉, 《불교평론》 6호 (2001년 봄호) 참조. 18) 김종명, 〈현대사회와 승가교육〉, 《한국불교학》 제28집(2001), pp.485∼518. 19) 조준호, 〈기복불교는 불교인가〉, 《불교평론》 7호(2000년 여름호). 20) 김종명, 〈퇴계의 불교관: 평가와 의의〉, 《한국인의 원류를 찾아서》, 퇴계 탄신 500주년 기념 계명 한국학 국제학술대회 논문집(2001. 9. 16∼20), pp.59∼78. 김종명, 〈불교쟁론 23: 주자의 불교 비판〉 상·하, 〈법보신문〉 1999년 10월 13일∼20일 (12면).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 원인들도 내부적 원인의 산물로 간주되므로 현대 한국사회에서 한국불교가 가진 낮은 위상의 궁극적 원인은 불교계 내부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는 한국 역사상 바람직한 인생교육을 위한 사유체계로서 출발한 불교의 진면목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결과로 생각된다.
특히, 기복불교는 역사상의 한국불교를 사실상 특징지워 온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다. 이는 한국불교의 문제점들이 종합적으로 나타난 현상인 동시에 한국불교를 낙후시킨 대표적 병폐기도 하며,21)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되어 온 지도 오래다. ‘통불교’ 개념22) 및 ‘법통설’23)과 더불어 한국불교의 특징적 개념으로 간주되어 온 ‘호국불교’24) 개념도 기복불교 개념의 외연적 확장에 다름 아니다. 21) 〈불교포럼: 기복불교의 대안〉, 〈현대불교〉 불기 2545[2001]. 9. 19. 22) 이 개념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대해서는 심재룡, 〈한국불교는 회통불교인가〉, 《불교평론》 3호(200년 여름호) 및 Jaeryong Shim, “On the General Characteristics of Korean Buddhism-Is Korean Buddhism Syncretic?” in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 2 (1989), pp.147∼157 참조. 이 개념에 대한 긍정적 시각에 대해서는 이봉춘, 〈회통불교론은 허구의 맹종인가〉, 《불교평론》 5호(2000년 겨울호) 참조.
23) ‘법통설’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에 대해서는 박해당, 〈조계종의 법통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철학사상》 제11호 (2000. 12), pp.43∼62. 길희성, 〈한국불교 정체성의 탐구: 조계종의 역사와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종교연구》 제2집(2000), pp.159∼193 참조. 24) ‘호국불교’ 개념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김종명, 2001, pp.277∼286. 김종명, 〈‘호국불교’ 개념의 재검토-고려 인왕회의 경우〉, 《종교연구》 제21집(2000년 가을), pp.93∼120. Benard Senecal, “On Writing a History of Korean Buddhism: A Review of Books,” in Korea Journal(Spring 1997), pp.154∼177. Jong Myung Kim, “Chajang (fl. 636∼650) and ‘Buddhism as National Protector’ in Korea: A Reconsideration,” in Religions in Traditional Korea, ed. Henrik H. Sorensen, SBS
따라서 유교의 경우 종교로의 자리매김이 현대 한국에서 더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25)되고는 있으나, 나는 불교가 종교로만 간주되고 있는 점이 인문학으로서의 불교의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기본법상의 제약 때문이다. 교육기본법(敎育基本法, 제정 97. 12. 13 法律 第5437號) 제1장 總則에서는 종교교육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한정시키고 있다. 제4조 (교육의 기회균등)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신념,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 또는 신체적 조건 등을 이유로 교육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제6조 (교육의 중립성)
2항: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설립한 학교에서는 특정한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을 하여서는 아니된다(시행일 98. 3. 1).
교육기본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각자가 믿는 종교에 관계없이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나, 국공립학교에서의 특정 종교교육은 금지되고 있다. 나름대로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교육업무를 추진하고 있는 선진 외국의 교육기관들과는 달리, 국내의 국공립학교에서 시행되는 교과과정들은 사립학교에서도 답습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법에 따라 국공립학교에서 특정 종교가 교수되지 않는다는 것은 종립학교 이외의 사립학교에서도 종교는 가르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은 국내의 대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결론적으로, 일반 교육 현장에서 특정 종교를 교수할 수 없는 국내의 교육 현실 속에서 불교가 종교로 정의되고 있는 점은 인문학으로서의 불교가 교육과정에 포함되지 못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26) 26) 김종명, 〈21세기와 한국불교〉(2000), pp.266∼267.
따라서 나는 무엇보다도 현대 한국사회에서 인생교육체계로서의 불교의 중요성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된 후, 그것의 한국에서의 역사적 변천에 대한 검토가 이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불교의 성격을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불교에 대한 오해는 곧 불교의 성격에 대한 오해의 산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3. 불교의 성격 검토
불교의 성격은 무엇인가? 철학인가? 종교인가? 양쪽 모두의 성격을 가진 것인가?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 것인가? 위의 물음들은 일견 진부해 보일지도 모르나, 적어도 현대 한국이란 지역에 한정시킬 경우 아주 중요하면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한국에 소개된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기복종교로 간주되어 왔을 뿐, 부처의 가르침은 한국 역사상 대중화되지 못한 가운데 불교의 성격에 대한 진지한 논의도 우리의 학계에서나 승단에서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성격에 대한 해석과 관련, 국내외의 견해들을 살펴보고, 이 견해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시도해 보자.
1) 국내의 경우
국내에서 불교는 크게 승단과 학계를 통해 수행 및 연구되고 있으며, 불교학계는 다시 종립대학교와 비종립대학교로 구분된다. 이들 집단 간의 불교의 성격에 대한 시각은 다르다.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한국 승단에서 불교는 기복종교로 간주되는 경향이 절대적이며, 동국대학교를 비롯한 종립대학교의 경우도 불교는 신앙 우선, 학문 그 다음이란 차원에서 취급되고 있다.
반면 비종립대학교에서는 학문, 특히 철학의 한 분야로 간주되고 있으며,27) 불교에 관심을 가진 국내의 일부 서양철학자들도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또한 비불교 전공자에 의한 불교 교육도 상당한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불교의 성격과 관련,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승단과 종립대학교의 역할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는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불교를 기복종교로서만 인식하게 하는 한 근본 요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27)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경향은 서양의 학문계로부터 역풍이 분 결과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Robert E. Buswell, Jr., The Zen Monastic Experience: Buddhist Practice in Contemporary Korea(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2), p.71 및 로버트 버스웰 지음, 김종명 옮김, 《파란 눈 스님의 한국선 수행기》(서울: 예문서원, 2000), p.99 참조.
2) 서양의 경우
과거 서양에서도 불교는 종교란 편견과 철학이란 편견이 동시에 존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양에서 불교를 종교의 틀로만 보려는 견해는 중세 이후 기독교를 철학 및 과학과 적대시하여 종교로만 국한시켜 온 버릇에 기인한다.
또한 세계 불교학 연구의 초기에 해당하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불교학 연구는 형이상학적 개념 분석에 치중하였으며,28) 이를 수입한 일본 불교철학계도 이 전통 위에 서 있었다. 한국불교계는 일제시대를 통하여 이러한 일본의 학풍을 다시 수입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한국 불교철학계의 전통이 되었다. 28) 형이상학적 개념 분석에 치우친 점은 한국의 동서양철학계의 공통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김종명, 〈한국 역사에 나타난 대표적인 논쟁 학설들의 철학적 분석〉, 《한민족과 2000년대의 철학》①, 한민족철
‘Religion’의 번역어로서의 ‘종교’의 3요소인 신, 경전, 신자에 바탕을 둔 이러한 주장은 서구의 기독교에 기준을 둔 것이었다. 따라서 불교를 비롯한 아시아 종교와 많은 원시종교를 배제한 결과를 가져왔다. 불교가 기존의 종교란 틀 속에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내의 경우 불교는 일차적으로 기복종교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사상도 시대적 산물이란 대전제에 비추어 볼 때, 과거의 기복불교 전통이 현대에도 그대로 수용되어야 할 당위성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기복이라는 종교행위는 초기불교의 입장에서는 성립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연기설과 그것에 바탕을 둔 업설 때문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복을 빌어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의 행위이기 때문에 사실상 불교에는 복을 빌 대상이 없다. 또한 불교의 중심교리에는 주술이나 기도로써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르침도 없다. 학자들이 이 시기의 불교야말로 인류 종교사에서 가장 비판적, 지성적, 이지적, 합리적, 계몽적 종교라고 한 이유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29)29) 조준호, 2000.
소수의 지식층들이 활동하던 과거에는 대부분의 비지식층 대중을 위한 방편설로서의 기복 강조도 나름대로는 시대적 타당성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이러한 경향은 지구촌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아프리카, 아시아처럼 사회적·경제적 박탈감이 강한 국가일수록 그에 대한 심리적 보상 차원에서 종교에 기대는 경향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 문맹률 측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인들의 지식수준이 높아진 현대에서까지 기복신앙이 불교신행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문제다. 따라서 유럽 및 북아메리카 등 서구 선진국일수록 기독교 신자가 감소하고 있는 점30)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30) 박정호, 〈부자 나라 기독교 쇠퇴 뚜렷〉, 〈중앙일보〉 2003년 11월 5일 31) 반면, 미국의 불교인들 중 대부분은 유럽계 백인, 고학력 중년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별 차이도 크지 않다. 〈불교신문〉 불기 2547(2003)년 11월 26일 참조. 32) 김종만, 〈기복불교 옹호론의 문제점〉, 《불교평론》 14호(2003년 봄호).
현대 한국사회의 불자들은 40대 이상, 여성, 비전문인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31)
길어야 20∼30년 후, 이들을 이을 다음 세대를 위한 한국불교계의 대안은 무엇인가? 중등교육이 이미 의무화되었으며, 고교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이 80%에 육박하는 현대의 한국에서 여전히 기복불교 선양에만 열을 올릴 것인가? 이는 한국불교계의 생존 전략으로서도 부적절하다. 오히려 포교 차원에서도 초기불교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 더 나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종교다원주의 시대인 현대에서 근본주의적 관점에 서서 초기불교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현대의 한국불교가 불교의 근본 가르침과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32)
불교를 철학으로 이해하면서, 형이상학적 개념 분석에 치중해온 서구의 불교학 연구 전통은 불교의 수행면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불교의 중요 교학들은 철학적·논리적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 참선 경험의 산물이다. 이 점은 불교가 합리적·관념적 분석을 중시하는 서양의 철학적 사유구조와 다른 이유다. 불교 텍스트의 내용들이 수행의 목표를 위한 방편설이란 점을 간과한 것이다.33) 33) Sungtaek Cho, “Rethinking Current Buddhist Studies in Korea,” in Collection of Papers of the 9th International Conference on Korean
더욱이 대부분의 불교이론들도 그렇게 오래된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론들 자체에 대한 연구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또한 불교와 서양철학은 각각의 독특한 문화적, 역사적 특징을 가지고 전개된 사유체계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 사유적 전통에 의해 다른 사유 전통을 평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단순히 철학의 영역이나 종교의 영역에만 속한다고는 할 수 없다. 불교는 이성과 논리를 강조하는 서양철학과는 달리 삶의 양식과 신념 체계를 동시에 의미하는 사상체계34)이며, 불교에서의 이 두 영역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초기불교의 성격과 관련하여 현대의 세계불교학계에서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도 불교는 철학적 요소와 종교적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35)34) 서구에서는 최근 이러한 사유체계를 ‘ethnophilosophy’란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35) Frank E. Raynolds and Charles Hellisey, “Buddhist Religion, Culture, and Civilization,” in Buddhism and Asian History, Joseph M. Kitagawa and Mark D. Cummings, ed. (New York: Macmillan
4. 사상·윤리로서의 불교
초기불교의 핵심 사상들은 사성제·연기설·사대설·오온설·십이처설·삼법인설·팔정도 등이며, 이 이론들은 철학의 일반적 관심사인 존재론·인식론·윤리론뿐 아니라, 서양철학에서는 결하고 있는 수증론(修證論)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철학이며, 해탈의 종교로서 철학적으로는 실재론과 운명론을 극복하면서 구체적 현실에 대한 바른 알음알이를 통해 합리적으로 사는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종교적으로는 도덕적 덕목을 강조한 인간 중심의 윤리적 교육체계로서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를 극복한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1) 사상으로서의 불교
사성제의 일부, 연기설·사대설·오온설·십이처설·삼법인설은 사상으로서의 불교를 잘 표현하고 있는 이론들이다.
사성제는 인생 진단(苦), 인생 현실의 원인(集), 인생의 목표(滅), 바람직한 삶의 방법(道)에 대한 이론으로서 불교의 총체적 가르침이다. 이는 곧 인생교육시스템이며,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바른 생각과 바른 행위다. 특히 ‘고’와 ‘집’은 철학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고’는 인간의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인생에 대한 부처의 진단 결과를 지칭하는 용어다. 인생을 통하여 누구나 상대적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쁨의 순간도 경험하게 되는데, 인간 삶 전체를 고통으로 보는 시각은 자칫 허무주의에 입각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오해의 산물일 뿐이다. 불교가 제시하는 고통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육체적·정신적 고통뿐 아니라, ‘불만족’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통하여 경험하게 되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명한 것이지만, ‘불만족’을 고통의 내용으로 포함시킨 것은 불교만의 특징이다. 인생살이를 통한 기쁜 경험도 일시적이며, 그것이 달성된 후엔 또 다른 차원의 기쁨을 지속적으로 바라는 것이 일반적 인생사란 점에서 기쁨의 경험도 고통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삶을 초래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집’의 개념으로 나타나며, 그 내용은 무분별한 욕망이다. 불교에서의 욕망은 존재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무지, 즉 무명의 산물로 간주되어 극복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욕망이 부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부정의 대상은 잘못된 인식의 결과로 인한 무분별한 욕망이며, 올바르고 정당한 욕망은 오히려 긍정된다. 불교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무명 상태의 인간은 잘못된 언설적 개념화에 의해 탐·진·치의 삼독으로 대표되는 잘못된 욕망을 일으키고, 이러한 욕망에 의해 이기적 행위를 포함한 잘못된 행위를 하게 되며, 그 결과 고통을 받으며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목표는 이러한 무명의 타파와 욕망의 극복을 통해 존재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바른 알음알이를 얻어 마음 속의 번뇌가 없어지게 된 상태에 이르는 데 있는데, 이러한 마음의 자유 상태를 열반 또는 해탈이라 한다.
연기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며, 그 뜻은 모든 현상은 수많은 1차 원인(因)과 2차 원인(緣)의 결합에 의해 생긴다는 것, 즉 모든 존재는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성 속의 존재라는 것이다. 존재들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강조한 이론인 연기설은 사성제와 함께 불교의 핵심 사상을 이루고 있으며, 부처도 ‘법(현상, 세계)을 보는 것은 연기를 보는 것이며, 연기를 보는 것은 법을 보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연기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도 없어진다.” 이 이론은 현대 물리학계로부터도 상당한 설득력을 인정받고 있다.
사대설은 존재의 물질적 구성 요소에 대한 이론이며, 모든 존재는 흙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공기(혹은 바람)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피부·살·머리카락·발톱 등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고, 혈액과 체액 등은 물로 환원되므로 각각 흙의 요소, 물의 요소로 구성된 것으로 본 것이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대사열 및 체온 등은 불의 요소, 날숨과 들숨 등은 공기의 요소로 간주된 것이다. 이 설은 불교 이전 인도의 존재 구성 요소설에 입각한 것으로서 현대의 과학적 지식에 비추어 보면 초보적인 분석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여전히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오온설은 불교의 인간관이며, 인간은 오관(눈·귀·코·혀·몸)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요소(色)와 일련의 정신작용, 감수작용(受)·인식작용(想)·의지작용(行)·판단작용(識)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감각기관과 대상 사이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감수작용 단계에서는 대상에 대한 좋음, 좋지 않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의 세 가지 중 한 가지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대상에 대해 호감을 가질 경우, 정신작용은 그 다음 단계인 인식작용으로 진행되게 된다. 여기서는 대상의 특징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게 되며, 그 결과가 긍정적일 경우,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는 의지작용 단계를 거쳐, 소유 결정에 이르는 판단작용에 이르게 되며, 이는 곧 행동으로 나아가게 됨을 의미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사대로 구성된 오관을 통해 사물을 받아들이고, 일단 받아들인 후에는 일련의 정신작용을 거쳐 행동을 하는 존재란 것이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작용은 항상성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것들에 집착함으로써 갖가지 고통을 초래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 이론을 통해 인간에 대한 바른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란 말은 우주, 자연, 대상, 객관을 뜻하며, 불교에서는 인간 인식의 모든 대상이 되는 존재로서 법(法, dharma)이라고 표현된다. 불교의 세계관은 인간이 객관대상으로서의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며, 이는 십이처설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사유체계가 아니라 인식론적 사유의 산물이다.36) 36) 불교의 세계관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은 김종명, 〈불교의 세계관〉, 《求道》 (1997. 5), pp.7∼12 참조.
십이처설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意) 등 6근과 인간의 감각기관인 오관의 대상과 마음의 대상인 세계(法)인 6경의 관계에 대한 이론이며, 그 핵심은 ‘인식 없이 세계 없다’는 것이다. 객관 대상인 세계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관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일 뿐이란 것이다. 그러나 오관 스스로가 각각의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란 점은 아주 중요하다. 일례로, 특정 대상을 주시하고 있더라도, 의식 없이 그것을 봤을 경우에는 무엇을 봤는지를 기억할 수 없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오관을 기능케 하는 ‘그 무엇’을 일컬어 억지로 마음, 의, 의식 등등으로 지칭하였으며,37) 마음은 인간 존재와 세계의 근원인 동시에 모든 인간 행동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즉 세계는 나의 마음의 산물(一切唯心造)이란 시각이며, 마음을 통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은 서양의 신(神) 중심적 세계관 및 유교의 형이상학적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현대에서도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론이다. 37) 교학불교와 선불교를 포함함 불교역사상 마음에 대한 다른 명칭은 수십 가지가 넘는다.
삼법인설은 존재에 대한 속성론으로서 불교만이 가진 독창설이다.
그 내용은 (1) 모든 존재란 시간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諸行無常). 모든 존재는 생멸을 반복하기 때문이며, 오온으로 구성된 인간도 예외는 아니란 것이다. (2) 모든 존재는 공간적으로도 실체가 없다는 것(諸法無我)이다. 이 이론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 중의 하나로서 존재의 본질과 참모습에 대한 바른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불교 흥기 당시 인도의 정통종교였던 브라흐만교엔 없었던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보통 자신, 혹은 영혼 등의 한 부분은 적어도 변치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상정된 영원한 자아에 묶인 삶을 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무집착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이론은 자아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 아니라 ‘참 자아’를 찾게 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3) 정신적, 육체적 즐거움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존재(一切皆苦)란 것이다. 인생살이를 통해 인간이 겪게 되는 대표적인 고통은 4고(태어남·늙어감·병듦·죽음)로 표현되며, 이것의 확대된 형태는 8고(태어남·늙어감·병듦·죽음·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싫어하는 이와의 만남·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오온에의 집착)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의 의미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있다. 일반적으로 범부들은 존재의 현상에 집착하여 판단을 내리고, 이를 바탕으로 행동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통을 겪게 되므로 존재의 본질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어려움을 줄이거나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불교의 주요 사유체계들은 불교의 존재론·인식론 및 세계관을 대표하는 것들이며 인간의 의지, 즉 ‘마음’을 모든 존재의 근본으로 본 데 그 핵심이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기복적 요소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복도 잘못된 마음의 산물이며, 그 속성도 영원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른 건강한 삶을 살 때, 복은 부수적으로 따른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상식적일 것이다.
이들 초기불교 교학들은 후대에 전개된 부파불교 전통의 대표적 학파들인 상좌부·대중부·설일체유부, 대승불교 전통의 중관학·유식학, 한국불교를 비롯한 동아시아불교 전통의 화엄종·천태종·선종·정토종 등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을 포함한 역사상의 불교전통에서는 주인공인 불교의 내용보다는 부수적인 ‘방편설’이란 이름의 기복신앙이 주인 자리를 차지해 왔다.
이 점은 반성적 시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지언정 더 이상 묵수나 추종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복불교란 기치 아래 ‘부처 팔아 밥 빌어먹는’ 일은 이제 불식되어야 한다. 이 점은 한국 역사상 시대별 대표 승려들이었던 원효(元曉, 617∼686), 지눌(知訥, 1158∼1210), 휴정(休淨, 1520∼1604),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질타했던 일이기도 하다.
2) 윤리로서의 불교
불교에서는 인간 행동의 범주를 몸에 의한 행동(身業), 입에 의한 행동(口業), 뜻에 의한 행동(意業)의 3가지로 분류한다. 따라서 불교윤리의 목표도 이 삼업의 청정화에 두고 있으며, 특히 의업은 모든 행위의 근원으로 간주되어 가장 중요시 된다. 불교의 윤리성은 사성제 중의 네 번째 가르침인 팔정도에서 잘 나타난다. 팔정도는 계·정·혜의 삼학으로 구성된 바람직한 삶의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서, 특히 계의 항목들―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직업, 바른 정진―은 불교 윤리의 기초가 되었다. 후대에 전개된 5계·8계·10계 및 이삼백여 가지에 달하는 비구(니)계 등의 기원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대소승불교 전통에서도 계율은 깨달음만큼 중요시되었으며, 계율은 깨달음의 하위 개념도 아니었다. 특히 대승불교권에서 잘 알려진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는 윤리로서의 불교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와 도림선사(道林禪師, 741∼824)의 대화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송나라에서 1004년에 편찬된 《경덕전등록》에 전하는 이 게송의 내용은 “모든 악은 짓지 말고, 선을 중시해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뜻을 맑게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重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란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불교는 곧 윤리적 가르침이었으며, 그 핵심은 마음 수행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부처는 자신의 교설의 목적을 행복(열반)을 얻는 데 두고 있었으며, 삼독을 없애는 것도 행복을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는 곧 도덕의 완성을 의미하였다. 윤리로서의 불교는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한 확신이란 철학적 기초 위에서 자리이타를 지향하는 윤리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였으며, 그 핵심은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데 있다.
칠불통계게의 핵심도 단순히 악을 멈추고 선을 행하라는 윤리적 교훈으로서보다는 청정한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있으며, 그것이 바로 불교의 본질임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윤리로서의 불교도 바른 마음가짐에 의한 바른 행동을 강조하고 있을 뿐 기복을 중요시하고 있지는 않다.
3) 현대적 중요성
불교의 철학적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제시한 합리적 세계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처는 사회의 변혁과 인류 공동의 행복이 개개인의 올바른 세계관과 이에 근거한 삶의 양식의 변화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자아변혁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38) 38) 안옥선,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 초기불교윤리에의 한 접근》(서울: 불교시대사, 2002), pp.103∼105.
이 점은 기존의 동서양의 세계관과는 아주 다르지만, 합리적인 것이다. 세계란 형이상학적 실재인 신의 창조물이란 시각이 서양의 전통적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었다면, 동양 성리학의 세계관은 세계 존재 이유로서의 이치와 다양한 만물이 생기기 이전의 태초의 세계를 ‘있다’고 보는 믿음 위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세계관은 분석적·합리적·구체적 관점에 서 있다기 보다는 실유론적·형이상학적·사변적 시각에 입각한 것이었다.39) 39) 김종명,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하여: 그 동양철학적 모색〉, 황필홍 외, 《새로운 공동체를 찾아서》(서울: 한맥, 1997), pp.115∼147.
그러나 불교의 세계관은 형이상학적 실재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한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유 없이 존재 없다’는 십이처설의 메시지는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교 세계관의 현대적 중요성은 기존의 동서양철학이 가진 존재론적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점에서 살필 수 있다. 이는 곧 불교의 윤리학적 특징으로도 이어진다.
현대의 종교는 윤리적 요인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더욱 넓게 정의되고 있으며, 이 점에서는 불교를 포함한 전통도 종교로 간주되고 있다.40) 연기론적 존재론과 상황윤리론을 바탕으로 한 불교윤리의 현대적 중요성은 현대 윤리학이 직면해온 합리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윤리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40) Mircea Eliade, ed., Encyclopediea of Religion, vol. 11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1993), p. 283.
윤리학의 근본과제는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 선과 악을 판별하는 보편적 기준을 확보하려는 데 있다. 동양의 윤리는 유가 윤리로, 서양윤리는 기독교 윤리로 대표되어 왔다. 그러나 기존의 동서양 윤리론은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한계성을 가진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것은 양자의 윤리론이 각각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인 천명·신의 뜻·이성을 윤리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성리학은 윤리적으로는 이기이원론을 인간의 삶에 적용시켜 도덕적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려 하였다.
성리학의 인간관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봄으로써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강조한 데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성리학의 도덕적 형이상학도 더 이상 그 가치를 지속시킬 수 없게 되었다. 서구 근대 윤리학은 이성의 입장에서 도덕 판단의 보편적 원리를 확립하고자 노력해 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합리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것은 인간 행위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식별하고 판단하는 합리적이고도 보편적인 이유와 근거, 기준과 원칙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으며, 윤리적 상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41)41) 길희성, 〈현대 윤리학의 위기와 상호의존의 윤리〉, 《西江人文論叢》 第11輯(2000. 1), p.53.
그러나 불교의 연기적 상호의존의 윤리는 기존의 전통적 도덕 실재론들과 차별화되며, 또한 존재론적 근거도 갖고 있다. 어떤 행동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에 대한 불교의 기준은 그 행동이 자신이나 남, 혹은 양쪽 모두에게 해가 되느냐, 아니냐와 열반을 얻는 데 방해가 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으며, 인간 스스로가 자기 행동의 책임자로 간주된다.
이러한 특징은 기존 동서양의 형이상학적 윤리관이 가진 현실적 딜레마로부터 하나의 탈출구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인도철학사와 종교사에서 불교가 남긴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도 자아와 같은 증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실재를 가정하지 않고 윤리론을 전개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불교는 감정과 이성을 동시에 중요시하고 있는데, 지계(持戒)를 통한 바른 감정이 없으면, 지혜도 얻을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감정에 바탕을 둔 유럽의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나 흄(David Hume, 1711∼1776)의 경험론, 이성에 기초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이성론의 한계도 극복한 것으로 간주된다.42)42) Damien Kewon, The Nature of Buddhist Ethics(New York: St. Martin’s Press, 1992), p.108.
불교윤리는 상황윤리란 점에서도 기존의 윤리론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부처는 당시의 다른 사상가들처럼 특정 행위는 특정 결과를 낳는다고 보지 않았다. 브라흐만교에서는 범신에 대한 제사만을 선업으로 간주하였으며, 부처 당시의 육사외도들은 숙명적 인생관을 주장하고 있었다. 또한 자이나교는 업의 절대적 법칙성을 강조하였으며, 우파니샤드 철학자들은 자아가 행위자며, 결과를 받는 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인간의 행동은 세 가지 요인인 외부 자극(접촉 등), 의식적 동기(삼독 등), 무의식적 동기(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마음 등) 중의 하나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그것은 같은 행동이라도 환경이 다를 경우 결과도 달라진다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존재들을 과거의 업으로 해석한 결정론자들과는 달리, 부처는 업을 존재 결정의 한 요소로 간주하면서, ‘행위는 윤회의 밭, 의식은 씨, 욕망은 수분’으로 비유하였다.43) 43) David J. Kalupahana, Buddhist Philosophy, A Historical Analysis(Honolulu: The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76), pp.44∼51.
즉 행위의 효과는 행위 자체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으며, 행위자의 상태, 행위 환경 등의 다른 요소들도 관계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자의 의식이다. 이러한 사유체계는 현대의 실정법 체계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 연기적 인간관은 전통사회의 공동체적 인간관계가 지닌 폐쇄성과 배타성뿐 아니라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근대 서구 사회의 인간관계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와 폐쇄적 공동체주의,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우주적 공동체를 지향하기 때문이다.44) 44) 길희성, 2000, pp.51∼72.
따라서 불교의 상호존중성과 포용성은 현대의 다원주의 사회에서도 보편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45) 인간의 삶과 자연 존재를 동시에 중요시하는 불교의 사유체계는 환경문제가 지구촌의 초미의 관심사가 된 현대에서 환경생태학46) 측면에서의 기여도도 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45) 안옥선, 2002, pp.143∼168. 46) 불교와 생태학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불교문화연구원, 《불교와 생태
5. 맺음말
과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는 기복불교로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 산물일 뿐 인간 스스로와 그들의 삶에 대한 바른 알음알이 얻기와 그 실천에 중점을 두었던 초기불교의 가르침과도 다른 것이다. 불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부처의 가르침 자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역사적 산물로서 전개된 한국불교에 대한 검토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현대 한국에서도 불교는 기복 위주의 종교로만 간주된 채, 인생교육체계로서의 불교의 존재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철학적·윤리적 가르침들은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바탕을 두고 전개된 동서양의 철학계와 종교계에 새로운 대안으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불교는 현실적이고도 실용적인 가르침47)이다. 따라서 불교의 성격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현대 인류의 삶의 질적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 불교계에 남겨진 과제로 생각된다. 47) 안옥선, 〈‘불교와 불교학의 실용성’에 대한 한 생각〉, 《불교평론》 13호(2002년 겨울호).
인간의 가치는 노력과 수양과 행동에 있는 것으로서 종성(種姓)의 문제는 수도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부처와 그 제자들의 요지였다.48)
48) 기무라 다이켄(木村太賢), 박경준 역, 《原始佛敎思想論》(경서원,
근대 한국의 대표적 선승이었던 만공(滿空, 1876∼1946)도 승려의 기준은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앎에 있음을 강조하였다.49)
무엇보다도 불교에 대한 기본 지식의 함양은 가장 시급한 과제다. 불립문자는 문자적 지식에 대한 절대적 의존성을 경고한 말이지 불교교리 자체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승단에는 이를 잘못 해석하여, 문자는 마귀며, 승려로서 교학을 공부하는 자는 지적 알음알이에 묶인 사람이라는 식의 인식이 팽배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당연히 불식되어야 한다. 앎이 없는 실천은 위험할 뿐 아니라 정혜쌍수를 강조해온 한국불교 전통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들은 객관성과 보편성을 가진 인류의 관심사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학문의 전당이며, 종립대학들도 이 대전제 위에 서 있다. 따라서 그 일차적 관심도 불교신앙이 아닌 불교학에 두어야 할 것이며, 그 학문적 성과는 현대 한국사회에 회향되어야 할 것이다. ■
김종명
UCLA 철학박사(불교학전공), 현재 영산대학교 조교수(문화관광 전공). 논저서로 《한국중세의 불교의례: 사상적 배경과 역사적 의의》, Encyclopedia of Buddhism(공저), 《논쟁으로 보는 불교철학》(공저), 《파란 눈 스님의 한국선 수행기》(역서), 〈원효와 지눌의 수증론 비교〉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 원인들도 내부적 원인의 산물로 간주되므로 현대 한국사회에서 한국불교가 가진 낮은 위상의 궁극적 원인은 불교계 내부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는 한국 역사상 바람직한 인생교육을 위한 사유체계로서 출발한 불교의 진면목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결과로 생각된다.
특히, 기복불교는 역사상의 한국불교를 사실상 특징지워 온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다. 이는 한국불교의 문제점들이 종합적으로 나타난 현상인 동시에 한국불교를 낙후시킨 대표적 병폐기도 하며,21)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되어 온 지도 오래다. ‘통불교’ 개념22) 및 ‘법통설’23)과 더불어 한국불교의 특징적 개념으로 간주되어 온 ‘호국불교’24) 개념도 기복불교 개념의 외연적 확장에 다름 아니다. 21) 〈불교포럼: 기복불교의 대안〉, 〈현대불교〉 불기 2545[2001]. 9. 19. 22) 이 개념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대해서는 심재룡, 〈한국불교는 회통불교인가〉, 《불교평론》 3호(200년 여름호) 및 Jaeryong Shim, “On the General Characteristics of Korean Buddhism-Is Korean Buddhism Syncretic?” in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 2 (1989), pp.147∼157 참조. 이 개념에 대한 긍정적 시각에 대해서는 이봉춘, 〈회통불교론은 허구의 맹종인가〉, 《불교평론》 5호(2000년 겨울호) 참조.
23) ‘법통설’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에 대해서는 박해당, 〈조계종의 법통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철학사상》 제11호 (2000. 12), pp.43∼62. 길희성, 〈한국불교 정체성의 탐구: 조계종의 역사와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종교연구》 제2집(2000), pp.159∼193 참조. 24) ‘호국불교’ 개념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김종명, 2001, pp.277∼286. 김종명, 〈‘호국불교’ 개념의 재검토-고려 인왕회의 경우〉, 《종교연구》 제21집(2000년 가을), pp.93∼120. Benard Senecal, “On Writing a History of Korean Buddhism: A Review of Books,” in Korea Journal(Spring 1997), pp.154∼177. Jong Myung Kim, “Chajang (fl. 636∼650) and ‘Buddhism as National Protector’ in Korea: A Reconsideration,” in Religions in Traditional Korea, ed. Henrik H. Sorensen, SBS
따라서 유교의 경우 종교로의 자리매김이 현대 한국에서 더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25)되고는 있으나, 나는 불교가 종교로만 간주되고 있는 점이 인문학으로서의 불교의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기본법상의 제약 때문이다. 교육기본법(敎育基本法, 제정 97. 12. 13 法律 第5437號) 제1장 總則에서는 종교교육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한정시키고 있다. 제4조 (교육의 기회균등)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신념,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 또는 신체적 조건 등을 이유로 교육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제6조 (교육의 중립성)
2항: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설립한 학교에서는 특정한 종교를 위한 종교교육을 하여서는 아니된다(시행일 98. 3. 1).
교육기본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각자가 믿는 종교에 관계없이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나, 국공립학교에서의 특정 종교교육은 금지되고 있다. 나름대로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교육업무를 추진하고 있는 선진 외국의 교육기관들과는 달리, 국내의 국공립학교에서 시행되는 교과과정들은 사립학교에서도 답습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법에 따라 국공립학교에서 특정 종교가 교수되지 않는다는 것은 종립학교 이외의 사립학교에서도 종교는 가르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은 국내의 대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결론적으로, 일반 교육 현장에서 특정 종교를 교수할 수 없는 국내의 교육 현실 속에서 불교가 종교로 정의되고 있는 점은 인문학으로서의 불교가 교육과정에 포함되지 못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26) 26) 김종명, 〈21세기와 한국불교〉(2000), pp.266∼267.
따라서 나는 무엇보다도 현대 한국사회에서 인생교육체계로서의 불교의 중요성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된 후, 그것의 한국에서의 역사적 변천에 대한 검토가 이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불교의 성격을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불교에 대한 오해는 곧 불교의 성격에 대한 오해의 산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3. 불교의 성격 검토
불교의 성격은 무엇인가? 철학인가? 종교인가? 양쪽 모두의 성격을 가진 것인가?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 것인가? 위의 물음들은 일견 진부해 보일지도 모르나, 적어도 현대 한국이란 지역에 한정시킬 경우 아주 중요하면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한국에 소개된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기복종교로 간주되어 왔을 뿐, 부처의 가르침은 한국 역사상 대중화되지 못한 가운데 불교의 성격에 대한 진지한 논의도 우리의 학계에서나 승단에서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성격에 대한 해석과 관련, 국내외의 견해들을 살펴보고, 이 견해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시도해 보자.
1) 국내의 경우
국내에서 불교는 크게 승단과 학계를 통해 수행 및 연구되고 있으며, 불교학계는 다시 종립대학교와 비종립대학교로 구분된다. 이들 집단 간의 불교의 성격에 대한 시각은 다르다.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한국 승단에서 불교는 기복종교로 간주되는 경향이 절대적이며, 동국대학교를 비롯한 종립대학교의 경우도 불교는 신앙 우선, 학문 그 다음이란 차원에서 취급되고 있다.
반면 비종립대학교에서는 학문, 특히 철학의 한 분야로 간주되고 있으며,27) 불교에 관심을 가진 국내의 일부 서양철학자들도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또한 비불교 전공자에 의한 불교 교육도 상당한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불교의 성격과 관련,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승단과 종립대학교의 역할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는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불교를 기복종교로서만 인식하게 하는 한 근본 요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27)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경향은 서양의 학문계로부터 역풍이 분 결과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Robert E. Buswell, Jr., The Zen Monastic Experience: Buddhist Practice in Contemporary Korea(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2), p.71 및 로버트 버스웰 지음, 김종명 옮김, 《파란 눈 스님의 한국선 수행기》(서울: 예문서원, 2000), p.99 참조.
2) 서양의 경우
과거 서양에서도 불교는 종교란 편견과 철학이란 편견이 동시에 존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양에서 불교를 종교의 틀로만 보려는 견해는 중세 이후 기독교를 철학 및 과학과 적대시하여 종교로만 국한시켜 온 버릇에 기인한다.
또한 세계 불교학 연구의 초기에 해당하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불교학 연구는 형이상학적 개념 분석에 치중하였으며,28) 이를 수입한 일본 불교철학계도 이 전통 위에 서 있었다. 한국불교계는 일제시대를 통하여 이러한 일본의 학풍을 다시 수입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한국 불교철학계의 전통이 되었다. 28) 형이상학적 개념 분석에 치우친 점은 한국의 동서양철학계의 공통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김종명, 〈한국 역사에 나타난 대표적인 논쟁 학설들의 철학적 분석〉, 《한민족과 2000년대의 철학》①, 한민족철
‘Religion’의 번역어로서의 ‘종교’의 3요소인 신, 경전, 신자에 바탕을 둔 이러한 주장은 서구의 기독교에 기준을 둔 것이었다. 따라서 불교를 비롯한 아시아 종교와 많은 원시종교를 배제한 결과를 가져왔다. 불교가 기존의 종교란 틀 속에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내의 경우 불교는 일차적으로 기복종교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사상도 시대적 산물이란 대전제에 비추어 볼 때, 과거의 기복불교 전통이 현대에도 그대로 수용되어야 할 당위성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기복이라는 종교행위는 초기불교의 입장에서는 성립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연기설과 그것에 바탕을 둔 업설 때문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복을 빌어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의 행위이기 때문에 사실상 불교에는 복을 빌 대상이 없다. 또한 불교의 중심교리에는 주술이나 기도로써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르침도 없다. 학자들이 이 시기의 불교야말로 인류 종교사에서 가장 비판적, 지성적, 이지적, 합리적, 계몽적 종교라고 한 이유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29)29) 조준호, 2000.
소수의 지식층들이 활동하던 과거에는 대부분의 비지식층 대중을 위한 방편설로서의 기복 강조도 나름대로는 시대적 타당성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이러한 경향은 지구촌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아프리카, 아시아처럼 사회적·경제적 박탈감이 강한 국가일수록 그에 대한 심리적 보상 차원에서 종교에 기대는 경향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 문맹률 측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인들의 지식수준이 높아진 현대에서까지 기복신앙이 불교신행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문제다. 따라서 유럽 및 북아메리카 등 서구 선진국일수록 기독교 신자가 감소하고 있는 점30)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30) 박정호, 〈부자 나라 기독교 쇠퇴 뚜렷〉, 〈중앙일보〉 2003년 11월 5일 31) 반면, 미국의 불교인들 중 대부분은 유럽계 백인, 고학력 중년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별 차이도 크지 않다. 〈불교신문〉 불기 2547(2003)년 11월 26일 참조. 32) 김종만, 〈기복불교 옹호론의 문제점〉, 《불교평론》 14호(2003년 봄호).
현대 한국사회의 불자들은 40대 이상, 여성, 비전문인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31)
길어야 20∼30년 후, 이들을 이을 다음 세대를 위한 한국불교계의 대안은 무엇인가? 중등교육이 이미 의무화되었으며, 고교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이 80%에 육박하는 현대의 한국에서 여전히 기복불교 선양에만 열을 올릴 것인가? 이는 한국불교계의 생존 전략으로서도 부적절하다. 오히려 포교 차원에서도 초기불교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 더 나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종교다원주의 시대인 현대에서 근본주의적 관점에 서서 초기불교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현대의 한국불교가 불교의 근본 가르침과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32)
불교를 철학으로 이해하면서, 형이상학적 개념 분석에 치중해온 서구의 불교학 연구 전통은 불교의 수행면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불교의 중요 교학들은 철학적·논리적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 참선 경험의 산물이다. 이 점은 불교가 합리적·관념적 분석을 중시하는 서양의 철학적 사유구조와 다른 이유다. 불교 텍스트의 내용들이 수행의 목표를 위한 방편설이란 점을 간과한 것이다.33) 33) Sungtaek Cho, “Rethinking Current Buddhist Studies in Korea,” in Collection of Papers of the 9th International Conference on Korean
더욱이 대부분의 불교이론들도 그렇게 오래된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론들 자체에 대한 연구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또한 불교와 서양철학은 각각의 독특한 문화적, 역사적 특징을 가지고 전개된 사유체계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 사유적 전통에 의해 다른 사유 전통을 평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단순히 철학의 영역이나 종교의 영역에만 속한다고는 할 수 없다. 불교는 이성과 논리를 강조하는 서양철학과는 달리 삶의 양식과 신념 체계를 동시에 의미하는 사상체계34)이며, 불교에서의 이 두 영역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초기불교의 성격과 관련하여 현대의 세계불교학계에서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도 불교는 철학적 요소와 종교적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35)34) 서구에서는 최근 이러한 사유체계를 ‘ethnophilosophy’란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35) Frank E. Raynolds and Charles Hellisey, “Buddhist Religion, Culture, and Civilization,” in Buddhism and Asian History, Joseph M. Kitagawa and Mark D. Cummings, ed. (New York: Macmillan
4. 사상·윤리로서의 불교
초기불교의 핵심 사상들은 사성제·연기설·사대설·오온설·십이처설·삼법인설·팔정도 등이며, 이 이론들은 철학의 일반적 관심사인 존재론·인식론·윤리론뿐 아니라, 서양철학에서는 결하고 있는 수증론(修證論)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철학이며, 해탈의 종교로서 철학적으로는 실재론과 운명론을 극복하면서 구체적 현실에 대한 바른 알음알이를 통해 합리적으로 사는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종교적으로는 도덕적 덕목을 강조한 인간 중심의 윤리적 교육체계로서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를 극복한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1) 사상으로서의 불교
사성제의 일부, 연기설·사대설·오온설·십이처설·삼법인설은 사상으로서의 불교를 잘 표현하고 있는 이론들이다.
사성제는 인생 진단(苦), 인생 현실의 원인(集), 인생의 목표(滅), 바람직한 삶의 방법(道)에 대한 이론으로서 불교의 총체적 가르침이다. 이는 곧 인생교육시스템이며,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바른 생각과 바른 행위다. 특히 ‘고’와 ‘집’은 철학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고’는 인간의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인생에 대한 부처의 진단 결과를 지칭하는 용어다. 인생을 통하여 누구나 상대적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쁨의 순간도 경험하게 되는데, 인간 삶 전체를 고통으로 보는 시각은 자칫 허무주의에 입각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오해의 산물일 뿐이다. 불교가 제시하는 고통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육체적·정신적 고통뿐 아니라, ‘불만족’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통하여 경험하게 되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명한 것이지만, ‘불만족’을 고통의 내용으로 포함시킨 것은 불교만의 특징이다. 인생살이를 통한 기쁜 경험도 일시적이며, 그것이 달성된 후엔 또 다른 차원의 기쁨을 지속적으로 바라는 것이 일반적 인생사란 점에서 기쁨의 경험도 고통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삶을 초래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집’의 개념으로 나타나며, 그 내용은 무분별한 욕망이다. 불교에서의 욕망은 존재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무지, 즉 무명의 산물로 간주되어 극복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욕망이 부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부정의 대상은 잘못된 인식의 결과로 인한 무분별한 욕망이며, 올바르고 정당한 욕망은 오히려 긍정된다. 불교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무명 상태의 인간은 잘못된 언설적 개념화에 의해 탐·진·치의 삼독으로 대표되는 잘못된 욕망을 일으키고, 이러한 욕망에 의해 이기적 행위를 포함한 잘못된 행위를 하게 되며, 그 결과 고통을 받으며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목표는 이러한 무명의 타파와 욕망의 극복을 통해 존재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바른 알음알이를 얻어 마음 속의 번뇌가 없어지게 된 상태에 이르는 데 있는데, 이러한 마음의 자유 상태를 열반 또는 해탈이라 한다.
연기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며, 그 뜻은 모든 현상은 수많은 1차 원인(因)과 2차 원인(緣)의 결합에 의해 생긴다는 것, 즉 모든 존재는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성 속의 존재라는 것이다. 존재들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강조한 이론인 연기설은 사성제와 함께 불교의 핵심 사상을 이루고 있으며, 부처도 ‘법(현상, 세계)을 보는 것은 연기를 보는 것이며, 연기를 보는 것은 법을 보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연기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도 없어진다.” 이 이론은 현대 물리학계로부터도 상당한 설득력을 인정받고 있다.
사대설은 존재의 물질적 구성 요소에 대한 이론이며, 모든 존재는 흙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공기(혹은 바람)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피부·살·머리카락·발톱 등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고, 혈액과 체액 등은 물로 환원되므로 각각 흙의 요소, 물의 요소로 구성된 것으로 본 것이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대사열 및 체온 등은 불의 요소, 날숨과 들숨 등은 공기의 요소로 간주된 것이다. 이 설은 불교 이전 인도의 존재 구성 요소설에 입각한 것으로서 현대의 과학적 지식에 비추어 보면 초보적인 분석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여전히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오온설은 불교의 인간관이며, 인간은 오관(눈·귀·코·혀·몸)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요소(色)와 일련의 정신작용, 감수작용(受)·인식작용(想)·의지작용(行)·판단작용(識)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감각기관과 대상 사이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감수작용 단계에서는 대상에 대한 좋음, 좋지 않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의 세 가지 중 한 가지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대상에 대해 호감을 가질 경우, 정신작용은 그 다음 단계인 인식작용으로 진행되게 된다. 여기서는 대상의 특징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게 되며, 그 결과가 긍정적일 경우,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는 의지작용 단계를 거쳐, 소유 결정에 이르는 판단작용에 이르게 되며, 이는 곧 행동으로 나아가게 됨을 의미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사대로 구성된 오관을 통해 사물을 받아들이고, 일단 받아들인 후에는 일련의 정신작용을 거쳐 행동을 하는 존재란 것이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작용은 항상성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것들에 집착함으로써 갖가지 고통을 초래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 이론을 통해 인간에 대한 바른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란 말은 우주, 자연, 대상, 객관을 뜻하며, 불교에서는 인간 인식의 모든 대상이 되는 존재로서 법(法, dharma)이라고 표현된다. 불교의 세계관은 인간이 객관대상으로서의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며, 이는 십이처설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사유체계가 아니라 인식론적 사유의 산물이다.36) 36) 불교의 세계관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은 김종명, 〈불교의 세계관〉, 《求道》 (1997. 5), pp.7∼12 참조.
십이처설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意) 등 6근과 인간의 감각기관인 오관의 대상과 마음의 대상인 세계(法)인 6경의 관계에 대한 이론이며, 그 핵심은 ‘인식 없이 세계 없다’는 것이다. 객관 대상인 세계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관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일 뿐이란 것이다. 그러나 오관 스스로가 각각의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란 점은 아주 중요하다. 일례로, 특정 대상을 주시하고 있더라도, 의식 없이 그것을 봤을 경우에는 무엇을 봤는지를 기억할 수 없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오관을 기능케 하는 ‘그 무엇’을 일컬어 억지로 마음, 의, 의식 등등으로 지칭하였으며,37) 마음은 인간 존재와 세계의 근원인 동시에 모든 인간 행동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즉 세계는 나의 마음의 산물(一切唯心造)이란 시각이며, 마음을 통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은 서양의 신(神) 중심적 세계관 및 유교의 형이상학적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현대에서도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론이다. 37) 교학불교와 선불교를 포함함 불교역사상 마음에 대한 다른 명칭은 수십 가지가 넘는다.
삼법인설은 존재에 대한 속성론으로서 불교만이 가진 독창설이다.
그 내용은 (1) 모든 존재란 시간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諸行無常). 모든 존재는 생멸을 반복하기 때문이며, 오온으로 구성된 인간도 예외는 아니란 것이다. (2) 모든 존재는 공간적으로도 실체가 없다는 것(諸法無我)이다. 이 이론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 중의 하나로서 존재의 본질과 참모습에 대한 바른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불교 흥기 당시 인도의 정통종교였던 브라흐만교엔 없었던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보통 자신, 혹은 영혼 등의 한 부분은 적어도 변치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상정된 영원한 자아에 묶인 삶을 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무집착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이론은 자아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 아니라 ‘참 자아’를 찾게 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3) 정신적, 육체적 즐거움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존재(一切皆苦)란 것이다. 인생살이를 통해 인간이 겪게 되는 대표적인 고통은 4고(태어남·늙어감·병듦·죽음)로 표현되며, 이것의 확대된 형태는 8고(태어남·늙어감·병듦·죽음·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싫어하는 이와의 만남·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오온에의 집착)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의 의미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있다. 일반적으로 범부들은 존재의 현상에 집착하여 판단을 내리고, 이를 바탕으로 행동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통을 겪게 되므로 존재의 본질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어려움을 줄이거나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불교의 주요 사유체계들은 불교의 존재론·인식론 및 세계관을 대표하는 것들이며 인간의 의지, 즉 ‘마음’을 모든 존재의 근본으로 본 데 그 핵심이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기복적 요소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복도 잘못된 마음의 산물이며, 그 속성도 영원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른 건강한 삶을 살 때, 복은 부수적으로 따른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상식적일 것이다.
이들 초기불교 교학들은 후대에 전개된 부파불교 전통의 대표적 학파들인 상좌부·대중부·설일체유부, 대승불교 전통의 중관학·유식학, 한국불교를 비롯한 동아시아불교 전통의 화엄종·천태종·선종·정토종 등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을 포함한 역사상의 불교전통에서는 주인공인 불교의 내용보다는 부수적인 ‘방편설’이란 이름의 기복신앙이 주인 자리를 차지해 왔다.
이 점은 반성적 시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지언정 더 이상 묵수나 추종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복불교란 기치 아래 ‘부처 팔아 밥 빌어먹는’ 일은 이제 불식되어야 한다. 이 점은 한국 역사상 시대별 대표 승려들이었던 원효(元曉, 617∼686), 지눌(知訥, 1158∼1210), 휴정(休淨, 1520∼1604),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질타했던 일이기도 하다.
2) 윤리로서의 불교
불교에서는 인간 행동의 범주를 몸에 의한 행동(身業), 입에 의한 행동(口業), 뜻에 의한 행동(意業)의 3가지로 분류한다. 따라서 불교윤리의 목표도 이 삼업의 청정화에 두고 있으며, 특히 의업은 모든 행위의 근원으로 간주되어 가장 중요시 된다. 불교의 윤리성은 사성제 중의 네 번째 가르침인 팔정도에서 잘 나타난다. 팔정도는 계·정·혜의 삼학으로 구성된 바람직한 삶의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서, 특히 계의 항목들―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직업, 바른 정진―은 불교 윤리의 기초가 되었다. 후대에 전개된 5계·8계·10계 및 이삼백여 가지에 달하는 비구(니)계 등의 기원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대소승불교 전통에서도 계율은 깨달음만큼 중요시되었으며, 계율은 깨달음의 하위 개념도 아니었다. 특히 대승불교권에서 잘 알려진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는 윤리로서의 불교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와 도림선사(道林禪師, 741∼824)의 대화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송나라에서 1004년에 편찬된 《경덕전등록》에 전하는 이 게송의 내용은 “모든 악은 짓지 말고, 선을 중시해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뜻을 맑게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重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란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불교는 곧 윤리적 가르침이었으며, 그 핵심은 마음 수행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부처는 자신의 교설의 목적을 행복(열반)을 얻는 데 두고 있었으며, 삼독을 없애는 것도 행복을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는 곧 도덕의 완성을 의미하였다. 윤리로서의 불교는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한 확신이란 철학적 기초 위에서 자리이타를 지향하는 윤리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였으며, 그 핵심은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데 있다.
칠불통계게의 핵심도 단순히 악을 멈추고 선을 행하라는 윤리적 교훈으로서보다는 청정한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있으며, 그것이 바로 불교의 본질임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윤리로서의 불교도 바른 마음가짐에 의한 바른 행동을 강조하고 있을 뿐 기복을 중요시하고 있지는 않다.
3) 현대적 중요성
불교의 철학적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제시한 합리적 세계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처는 사회의 변혁과 인류 공동의 행복이 개개인의 올바른 세계관과 이에 근거한 삶의 양식의 변화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자아변혁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38) 38) 안옥선,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 초기불교윤리에의 한 접근》(서울: 불교시대사, 2002), pp.103∼105.
이 점은 기존의 동서양의 세계관과는 아주 다르지만, 합리적인 것이다. 세계란 형이상학적 실재인 신의 창조물이란 시각이 서양의 전통적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었다면, 동양 성리학의 세계관은 세계 존재 이유로서의 이치와 다양한 만물이 생기기 이전의 태초의 세계를 ‘있다’고 보는 믿음 위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세계관은 분석적·합리적·구체적 관점에 서 있다기 보다는 실유론적·형이상학적·사변적 시각에 입각한 것이었다.39) 39) 김종명,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하여: 그 동양철학적 모색〉, 황필홍 외, 《새로운 공동체를 찾아서》(서울: 한맥, 1997), pp.115∼147.
그러나 불교의 세계관은 형이상학적 실재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한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유 없이 존재 없다’는 십이처설의 메시지는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교 세계관의 현대적 중요성은 기존의 동서양철학이 가진 존재론적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점에서 살필 수 있다. 이는 곧 불교의 윤리학적 특징으로도 이어진다.
현대의 종교는 윤리적 요인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더욱 넓게 정의되고 있으며, 이 점에서는 불교를 포함한 전통도 종교로 간주되고 있다.40) 연기론적 존재론과 상황윤리론을 바탕으로 한 불교윤리의 현대적 중요성은 현대 윤리학이 직면해온 합리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윤리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40) Mircea Eliade, ed., Encyclopediea of Religion, vol. 11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1993), p. 283.
윤리학의 근본과제는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 선과 악을 판별하는 보편적 기준을 확보하려는 데 있다. 동양의 윤리는 유가 윤리로, 서양윤리는 기독교 윤리로 대표되어 왔다. 그러나 기존의 동서양 윤리론은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한계성을 가진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것은 양자의 윤리론이 각각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인 천명·신의 뜻·이성을 윤리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성리학은 윤리적으로는 이기이원론을 인간의 삶에 적용시켜 도덕적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려 하였다.
성리학의 인간관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봄으로써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강조한 데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성리학의 도덕적 형이상학도 더 이상 그 가치를 지속시킬 수 없게 되었다. 서구 근대 윤리학은 이성의 입장에서 도덕 판단의 보편적 원리를 확립하고자 노력해 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합리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것은 인간 행위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식별하고 판단하는 합리적이고도 보편적인 이유와 근거, 기준과 원칙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으며, 윤리적 상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41)41) 길희성, 〈현대 윤리학의 위기와 상호의존의 윤리〉, 《西江人文論叢》 第11輯(2000. 1), p.53.
그러나 불교의 연기적 상호의존의 윤리는 기존의 전통적 도덕 실재론들과 차별화되며, 또한 존재론적 근거도 갖고 있다. 어떤 행동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에 대한 불교의 기준은 그 행동이 자신이나 남, 혹은 양쪽 모두에게 해가 되느냐, 아니냐와 열반을 얻는 데 방해가 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으며, 인간 스스로가 자기 행동의 책임자로 간주된다.
이러한 특징은 기존 동서양의 형이상학적 윤리관이 가진 현실적 딜레마로부터 하나의 탈출구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인도철학사와 종교사에서 불교가 남긴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도 자아와 같은 증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실재를 가정하지 않고 윤리론을 전개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불교는 감정과 이성을 동시에 중요시하고 있는데, 지계(持戒)를 통한 바른 감정이 없으면, 지혜도 얻을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감정에 바탕을 둔 유럽의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나 흄(David Hume, 1711∼1776)의 경험론, 이성에 기초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이성론의 한계도 극복한 것으로 간주된다.42)42) Damien Kewon, The Nature of Buddhist Ethics(New York: St. Martin’s Press, 1992), p.108.
불교윤리는 상황윤리란 점에서도 기존의 윤리론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부처는 당시의 다른 사상가들처럼 특정 행위는 특정 결과를 낳는다고 보지 않았다. 브라흐만교에서는 범신에 대한 제사만을 선업으로 간주하였으며, 부처 당시의 육사외도들은 숙명적 인생관을 주장하고 있었다. 또한 자이나교는 업의 절대적 법칙성을 강조하였으며, 우파니샤드 철학자들은 자아가 행위자며, 결과를 받는 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인간의 행동은 세 가지 요인인 외부 자극(접촉 등), 의식적 동기(삼독 등), 무의식적 동기(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마음 등) 중의 하나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그것은 같은 행동이라도 환경이 다를 경우 결과도 달라진다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존재들을 과거의 업으로 해석한 결정론자들과는 달리, 부처는 업을 존재 결정의 한 요소로 간주하면서, ‘행위는 윤회의 밭, 의식은 씨, 욕망은 수분’으로 비유하였다.43) 43) David J. Kalupahana, Buddhist Philosophy, A Historical Analysis(Honolulu: The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76), pp.44∼51.
즉 행위의 효과는 행위 자체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으며, 행위자의 상태, 행위 환경 등의 다른 요소들도 관계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자의 의식이다. 이러한 사유체계는 현대의 실정법 체계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을 가지고 있다.
불교의 연기적 인간관은 전통사회의 공동체적 인간관계가 지닌 폐쇄성과 배타성뿐 아니라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근대 서구 사회의 인간관계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와 폐쇄적 공동체주의,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우주적 공동체를 지향하기 때문이다.44) 44) 길희성, 2000, pp.51∼72.
따라서 불교의 상호존중성과 포용성은 현대의 다원주의 사회에서도 보편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45) 인간의 삶과 자연 존재를 동시에 중요시하는 불교의 사유체계는 환경문제가 지구촌의 초미의 관심사가 된 현대에서 환경생태학46) 측면에서의 기여도도 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45) 안옥선, 2002, pp.143∼168. 46) 불교와 생태학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불교문화연구원, 《불교와 생태
5. 맺음말
과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는 기복불교로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 산물일 뿐 인간 스스로와 그들의 삶에 대한 바른 알음알이 얻기와 그 실천에 중점을 두었던 초기불교의 가르침과도 다른 것이다. 불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부처의 가르침 자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역사적 산물로서 전개된 한국불교에 대한 검토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현대 한국에서도 불교는 기복 위주의 종교로만 간주된 채, 인생교육체계로서의 불교의 존재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철학적·윤리적 가르침들은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바탕을 두고 전개된 동서양의 철학계와 종교계에 새로운 대안으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불교는 현실적이고도 실용적인 가르침47)이다. 따라서 불교의 성격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현대 인류의 삶의 질적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 불교계에 남겨진 과제로 생각된다. 47) 안옥선, 〈‘불교와 불교학의 실용성’에 대한 한 생각〉, 《불교평론》 13호(2002년 겨울호).
인간의 가치는 노력과 수양과 행동에 있는 것으로서 종성(種姓)의 문제는 수도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부처와 그 제자들의 요지였다.48)
48) 기무라 다이켄(木村太賢), 박경준 역, 《原始佛敎思想論》(경서원,
근대 한국의 대표적 선승이었던 만공(滿空, 1876∼1946)도 승려의 기준은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앎에 있음을 강조하였다.49)
무엇보다도 불교에 대한 기본 지식의 함양은 가장 시급한 과제다. 불립문자는 문자적 지식에 대한 절대적 의존성을 경고한 말이지 불교교리 자체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승단에는 이를 잘못 해석하여, 문자는 마귀며, 승려로서 교학을 공부하는 자는 지적 알음알이에 묶인 사람이라는 식의 인식이 팽배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당연히 불식되어야 한다. 앎이 없는 실천은 위험할 뿐 아니라 정혜쌍수를 강조해온 한국불교 전통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들은 객관성과 보편성을 가진 인류의 관심사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학문의 전당이며, 종립대학들도 이 대전제 위에 서 있다. 따라서 그 일차적 관심도 불교신앙이 아닌 불교학에 두어야 할 것이며, 그 학문적 성과는 현대 한국사회에 회향되어야 할 것이다. ■
김종명
UCLA 철학박사(불교학전공), 현재 영산대학교 조교수(문화관광 전공). 논저서로 《한국중세의 불교의례: 사상적 배경과 역사적 의의》, Encyclopedia of Buddhism(공저), 《논쟁으로 보는 불교철학》(공저), 《파란 눈 스님의 한국선 수행기》(역서), 〈원효와 지눌의 수증론 비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