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목회] 관상적 시선에 대하여
이민재 목사
승인 2024.01.02
관상적 시선이란 무엇일까?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는(히 12:2) 눈이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나는 하나님과 하나 되고 성령의 조명을 받는다. 일치와 조명 상태에서 눈에서는 비늘이 떨어진다. 세례받을 때처럼 정화되고 깨끗해진다. 따라서 관상적 시선은 “세례받은-정화된-깨끗한” 눈이다. 관상 상태를 벗어난 눈이 모든 것을 진부하고 상투적으로 본다면, “세례받은-정화된-깨끗한” 관상적 시선은 모든 것을 새롭고 경이롭게 본다.
기독교 영성전통은 관상적 시선을 깨닫게 하려고 이콘 묵상을 발전시켜왔다. 아래 그림은 스페인 화가 키코 아르게요가 그린 예수 이콘이다.
이제 이콘을 몇 분간 주의 깊게 바라보고 느낌을 적어보자.
icon of jesus, kiko arguello, 1939~현재
사람마다 본 것이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눈이 슬프다 하고, 무심하다고 한다. 왼쪽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는 사람도 있고, 튀어나온 광대뼈를 보는 사람도 있다. 콧날이 날카롭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왼쪽 볼에서 대여섯 가닥의 수염을 보는 사람도 있다. 꽉 다문 입에서 어떤 굳은 의지를 보는 사람도 있고, 눈에 초점이 없는 것 같다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본 것이 사람마다 다르지만, “내가” 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림을 보는 주체는 나이고, 그림의 예수는 나의 봄에 의해 “알려지는” 대상이다. 이러한 봄을 통해 주체인 나는 대상(예수)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
이 그림을 보는 다른 방법이 있다. 이제 이콘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콘의 눈으로, 즉 예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보는 주체가 되어 이콘이라는 대상에 “관해” 무언가 알려고 하는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그런 충동을 흘려보낸다. 그러면 눈이 고요해진다. 이렇게 눈을 고요하게 만든 다음, 다시 예수의 눈을 통해 나를 본다. 더 나아가 예수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본다. 이때 보는 주체는 예수님(또는 하나님)이고, 나는 예수님이 보시는 대상이 된다. 시선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다. 이러한 시선의 변형 또는 역전이야말로 이콘 묵상의 은총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경이와 신비로 빛난다.
이제 이콘의 시선으로 나를 십여 분 동안 바라본다. 바라보는 동안 판단하는 마음, 거리끼는 마음, 죄책감, 두려움, 불안 같은 느낌이 들면 그 느낌을 부드럽게 흘려보낸다. 이콘의 눈을 통해 지극한 사랑으로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계속 알아차린다. 하나님의 수용적 시선에서 벗어나거나 숨거나 감추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한다.
이런 식으로 이콘을 묵상하면 내가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인식한다. 나는 “아는 자”가 아니라 “알려지는 자”가 된다. 이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알려지는 것”이 나의 인식작용을 채우기 시작한다. 나는 이분법적인 주관/객관의 인식틀을 벗어나 상호-인식mutual knowing의 상태에 들어간다. 이뿐 아니라 나는 예수님(하나님)의 바라봄을 통해 예수님과 상호내재적 현존 상태에 들어간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갈 2:20) 관상 상태에 이른다.
이콘 묵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제 눈을 감고 이콘의 느낌을 마음에 간직한 다음, 이콘의 형체를 흘려보내고 이콘의 눈이 나의 눈이 되는 것을 고요히 지켜본다. 내가 이콘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 눈으로 나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삶을, 세상을 바라본다.
관상적 시선은 기적을 일으킨다. 관상적 시선으로 나를 보면 나는 세속이나 악마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 하나님이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사랑하는”(사 43:4) 고귀한 존재가 된다. 관상적 시선으로 남을 보면 남은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니다. 비교의 대상도 아니며 욕망 충족의 도구도 아니다. 친구가 되며, 길벗이 된다. 혈연과 지연과 학연을 넘어선 새로운 인연이 생긴다. 소울프렌드로 만나는 영적 인연이다.
관상적 시선으로 보면 삶은 신비와 신성으로 충만하다. 섭리의 눈으로 삶을 보기 때문에 삶에서 “신성한 삶의 배열”을 읽는다. 은총의 눈으로 삶을 보기 때문에 삶의 모든 고통이 보석처럼 빛난다. 모든 관계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에 동료 인간은 성사聖事가 된다.
노동도 새로워진다. 나의 노동을 통해 누군가의 생명이 유지됨을 알기에 소명감을 샘솟는다. 모든 노동 속에는 누군가의 기도─노동자 자신의 기도, 노동자의 가족을 위한 기도, 노동자를 위한 부모의 기도, 아내의 기도, 남편의 기도, 아이들의 기도─가 들어있음을 깨닫기에 노동이 거룩해진다. 지겹고 고달팠던 노동은 마침내 거룩한 하나님의 일Officium Divinum이 되고 시간 전례Liturgia Honarum가 된다
icon of jesus, kiko arguello, 1939~현재
사람마다 본 것이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눈이 슬프다 하고, 무심하다고 한다. 왼쪽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는 사람도 있고, 튀어나온 광대뼈를 보는 사람도 있다. 콧날이 날카롭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왼쪽 볼에서 대여섯 가닥의 수염을 보는 사람도 있다. 꽉 다문 입에서 어떤 굳은 의지를 보는 사람도 있고, 눈에 초점이 없는 것 같다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본 것이 사람마다 다르지만, “내가” 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림을 보는 주체는 나이고, 그림의 예수는 나의 봄에 의해 “알려지는” 대상이다. 이러한 봄을 통해 주체인 나는 대상(예수)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
이 그림을 보는 다른 방법이 있다. 이제 이콘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콘의 눈으로, 즉 예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보는 주체가 되어 이콘이라는 대상에 “관해” 무언가 알려고 하는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그런 충동을 흘려보낸다. 그러면 눈이 고요해진다. 이렇게 눈을 고요하게 만든 다음, 다시 예수의 눈을 통해 나를 본다. 더 나아가 예수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본다. 이때 보는 주체는 예수님(또는 하나님)이고, 나는 예수님이 보시는 대상이 된다. 시선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다. 이러한 시선의 변형 또는 역전이야말로 이콘 묵상의 은총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경이와 신비로 빛난다.
이제 이콘의 시선으로 나를 십여 분 동안 바라본다. 바라보는 동안 판단하는 마음, 거리끼는 마음, 죄책감, 두려움, 불안 같은 느낌이 들면 그 느낌을 부드럽게 흘려보낸다. 이콘의 눈을 통해 지극한 사랑으로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계속 알아차린다. 하나님의 수용적 시선에서 벗어나거나 숨거나 감추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한다.
이런 식으로 이콘을 묵상하면 내가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인식한다. 나는 “아는 자”가 아니라 “알려지는 자”가 된다. 이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알려지는 것”이 나의 인식작용을 채우기 시작한다. 나는 이분법적인 주관/객관의 인식틀을 벗어나 상호-인식mutual knowing의 상태에 들어간다. 이뿐 아니라 나는 예수님(하나님)의 바라봄을 통해 예수님과 상호내재적 현존 상태에 들어간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갈 2:20) 관상 상태에 이른다.
이콘 묵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제 눈을 감고 이콘의 느낌을 마음에 간직한 다음, 이콘의 형체를 흘려보내고 이콘의 눈이 나의 눈이 되는 것을 고요히 지켜본다. 내가 이콘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 눈으로 나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삶을, 세상을 바라본다.
관상적 시선은 기적을 일으킨다. 관상적 시선으로 나를 보면 나는 세속이나 악마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 하나님이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사랑하는”(사 43:4) 고귀한 존재가 된다. 관상적 시선으로 남을 보면 남은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니다. 비교의 대상도 아니며 욕망 충족의 도구도 아니다. 친구가 되며, 길벗이 된다. 혈연과 지연과 학연을 넘어선 새로운 인연이 생긴다. 소울프렌드로 만나는 영적 인연이다.
관상적 시선으로 보면 삶은 신비와 신성으로 충만하다. 섭리의 눈으로 삶을 보기 때문에 삶에서 “신성한 삶의 배열”을 읽는다. 은총의 눈으로 삶을 보기 때문에 삶의 모든 고통이 보석처럼 빛난다. 모든 관계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에 동료 인간은 성사聖事가 된다.
노동도 새로워진다. 나의 노동을 통해 누군가의 생명이 유지됨을 알기에 소명감을 샘솟는다. 모든 노동 속에는 누군가의 기도─노동자 자신의 기도, 노동자의 가족을 위한 기도, 노동자를 위한 부모의 기도, 아내의 기도, 남편의 기도, 아이들의 기도─가 들어있음을 깨닫기에 노동이 거룩해진다. 지겹고 고달팠던 노동은 마침내 거룩한 하나님의 일Officium Divinum이 되고 시간 전례Liturgia Honarum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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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 목사
은명교회 담임
감신대 객원교수
예목원 연구위원
은명교회 담임
감신대 객원교수
예목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