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go Enomiya-Lassa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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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her Hugo Enomiya-Lassalle
Hugo Makibi Enomiya-Lassalle (11 November 1898[1] in Gut Externbrock near Nieheim, Westphalia – 7 July 1990[1] in Münster, Westphalia) was
Biography[edit]
Hugo Lassalle passed his school days from 1911 to 1916 at the Gymnasium Petrinum in Brilon in 1917. Because of an injury in the First World War, Hugo Lassalle was admitted to the military hospital of Brilon in 1917.
He travelled to Japan as a missionary in 1929 and became interested in that country's Buddhist practices. In 1940, he became the vicar of Hiroshima, and on 6 August 1945 he was critically wounded by the nuclear blast in that city, which is depicted in John Hersey's book Hiroshima.[2]
In September 1946, he had an audience with Pope Pius XII, in which he revealed his plan to build in Hiroshima a cathedral dedicated to the idea of world peace. Designed by Japanese architect Togo Murano, construction on the cathedral began in 1950 and on 6 August 1954, the Memorial Cathedral for World Peace(ja)was dedicated.[3]
In 1956, Enomiya-Lassalle began studying Zen with Harada Daiun Sogaku.[1][4] In 1958, he published Zen: A Way to Enlightenment.[4]
Following Harada's death in 1961, Enomiya-Lassalle became an apprentice of one of Harada's students, Yamada Kōun. Yamada was enthusiastic about the possibilities of Zen as a Christian practice, believing that "Zen would become an important stream in the Catholic Church one day".[5] With Enomiya-Lassalle's active assistance, he attracted a number of Catholic priests and nuns as students. In the late 1960s, Enomiya-Lasalle was certified as a teacher in Yamada's Sanbo Kyodan sect and given the title roshi (Zen master), while professing his continued belief in Christianity. After 1968, Enomiya-Lassalle spent much of his time in Europe leading Zen retreats and encouraging Zen practice among Christians. His books influenced symphony conductor Herbert von Karajan to study Zen and incorporate a Zen mindset into his conducting.
Memorial Cathedral for World Peace, at Naka-ku Hiroshima, Japan, design by Togo Murano in 1954.
Bibliography[edit]
- Zen: Way to Enlightenment (1964)
- Zen Meditation for Christians (1974)
- Living the New Consciousness (1984)
- The Practice of Zen Meditation, (1987, Thorsons).
See also[edit]
References[edit]
^ Jump up to:a b c d Akinade, Akintunde E. (2010). A New Day: Essays on World Christianity in Honor of Lamin Sanneh. Peter Lang. p. 242. ISBN 9781433104565.
^ John Hersey: Hiroshima; Vintage Books, New York 1989, p 11 etc
^ "【平和の使徒】 世界平和記念聖堂 (Memorial Cathedral for World Peace) – カトリック広島司教区平和の使徒推進本部".
^ Jump up to:a b Oldmeadow, Harry (2004). Journeys East: 20th Century Western Encounters with Eastern Religious Traditions. World Wisdom, Inc. pp. 429–430. ISBN 9780941532570.
^ Terebess Asia Online
푸고 라사르 [일어]
후고 라사르 아미야 마비 Hugo Makibi Enomiya-Lassalle | |
---|---|
예수회 사제 | |
푸고 마키비 에노미야 라사르 | |
교회 | 가톨릭 교회 |
개인정보 | |
실명 | 푸고 마키비 에노미야 라사르 |
별명 | 아미야 마비 |
태어나다 | 1898년 11월 11일 |
주사위 | 1990년 7월 7일 (향년 91세) |
국적 | 일본 |
푸고 마키비 에노미야 라사르 ( Hugo Makibi Enomiya-Lassalle , 1898년 11월 11일 - 1990년 7월 7일 )는 독일 출생의 예수 회원 으로 가톨릭 교회 사제 , 선교사 . 일본어 표기에서는 성과 이름이 각각, 푸고도 라 사르 도, 혹은 드물게 라살 이라고도 표기된다. 1948년 ( 쇼 와 23년)에 일본으로 귀화하고 있어, 일본명은 아미야 마비 (에미야 마키비). 영어판 위키피디아 “Hugo Enomiya-Lassalle” 에 있는 영어 표기 Aiun-ken 는, 라사르의 선불교상에서의 자칭 애운처의 음역 .
기독교 성직자 로서 처음으로 좌선을 종교 생활 속에 실천적으로 도입했다 . 1945년 (쇼와 20년) 8월 6일 에 히로시마 시 의 야마치 천주 공교회(야 마치 교회 )에서 원자 폭탄 의 투하를 만나 직접 피폭 한 것으로, 희생자에게의 위령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세계 평화를 목표로 한 기념장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히로시마 의 땅에 세계평화기념성당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 히로시마의 문화 복지의 발전에 널리 공헌한 공적이 인정되어, 1968년 ( 쇼와 43년) 4월 히로시마시의 명예 시민 으로서 현창되고 있다 [1] [주1] .
귀화명에도 잘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일본 문화 에 대한 조예가 깊고, 특히 일본인 의 영성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선종에 깊은 흥미를 안고, 스스로 참선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기독교 관계자에게도 적극적 에 좌선을 권했다. 일본 국외에서는 오히려 그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가톨릭 선」[2] 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생 [ 편집 ]
생생한 [ 편집 ]
1898년 ( 메이지 31년) 11월 11일 독일 제국 베스트팔렌 지방(현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 니 하임 익 스텐블록(Externbrock)에서 탄생. 조상은 아마 프랑스 에서 망명한 유그 노라고 생각되고 있다 [3] . 초등학교 4학년부터 김나듐 으로 진행한 뒤 그 8년차(Unterprima)에 징병되어 제1차 세계대전 중서부 전선 으로 보내졌다. 부상과 관절 류마티스를 위해 여러 번 입원했지만, 1919년 ( 다이쇼 8년)에 고등상등병(Obergefreiter)으로 제대. 2급 철 십자 훈장 수장 [4] .
수업 시대 [ 편집 ]
1919년(다이쇼 8년) 4월 25일 에 예수회 에 입회. 당시 독일의 예수회 서관구에 소속된 수련원은 , 국경에서 접하는 네덜란드 의 셰렌베르프 에 있으며, 거기서 2년간의 수련기를 보낸 후, 네덜란드의 남홀란트주 팔켄 부르 프 성 이그나치오 대학에서 배운다. 또 영국 의 스토니허스트 칼리지 나 헤이스롭 칼리지 등에서 도 철학 을 3년간, 신학을 4년간 배우고, 철학 박사 학위 취득. 1927년 (쇼와 2년) 신학 과정의 3년째 종료시에, 팔켄부르프에서 사제에 서층되었다 [ 4 ] .
프랑스의 아미 안에서 받은 제3수련 기간 중에 신비사상 에 관심을 갖고 십자가의 성 요한 과 아빌라 의 세인트 테레사 의 저작을 열심히 읽는다. 이 경험이 뒤에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 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선 체험이라고 호응해 양자가 연결되어, 독자적인 길을 개척해 가게 되었다 [4] .
미션 [ 편집 ]
로마 교황청 으로부터 당시 독일의 예수회 서관구에 주어진 미션 에 일본이 있어, 거기서의 주요한 사업 내용은 상지대학에서의 교육 이었기 때문에 [주 2] , 라사르는 1929년 (쇼와 4년) 에 상지대학에 파견되게 되었다. 그러나 라살은 당초 아프리카 의 한센 병원 에 파견을 하고 싶었던 적도 있고, 대학에서 학생 상대에게 독일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이치의 사람들 사이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사회 사업 을 행하는 것을 취향 [4] , 관동대지진 의 피해자가 많이 살고 있고, 1931년 (쇼와 6년) 당시 도쿄시 최대의 곤궁지대였던 아라카와구 미카와 지마 에 , 학생들과 활동하기 위한 거점이 된다 가미치 세츠루멘토」를 설립했다 [5] [주3] .
1935년 (쇼와 10년) 독일 본국의 예수회관구장 클라인 신부가, 37세의 젊음으로 라사르를 예수회 일본관구의 상장으로 임명하면, 입장에 살아 익숙한 시모마치로부터 상지대학에 부속 되는 SJ 하우스 [주 4] 로 옮겨야 했다. 거기서 라사르는 일계를 안고, 상장의 권한으로 예수회의 일본관구(미션)의 본부 자체를 히로시마에 옮겨 버린다[4 ] . 그때까지 파리 외국 선교회 에 위탁 된 오사카 교구 중 히로시마 · 오카야마 · 야마구치 · 시마네 · 돗토리 의 중국 지방 5 현을 포함한 서쪽 지역이 1923 년 (다이쇼 12 년)에 정식으로 분할되어 히로시마 대목구로서의 포교활동이 예수회 독일 서관구에 맡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6] . 라사르가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재해 버리는 것도 이러한 경위에 따른다.
당시 히로시마의 야마쵸 에 있던 야마치 천주 공교회 는 낡은 목조 의 일본식(일본 양식)의 평야건축 의 건물로, 실내도 다다미 깔린 작은 교회였다 [4] [주5] . 일본관 구장으로서 수명의 부하를 수반한 집무를 취하기 위해, 1936년(쇼와 11년) 사무소 겸 주거로서 새롭게 사제관을 건설해, 오카야마에 있던 교구장관 자체도 히로시마 로 옮겨져 교구장도 거기에 옮겨 살게 되었다 [4] . 사제관은 서양풍 의 오두막 3층 건물의 확고한 건물이며, 일본의 지진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던 설계자 의 글 로퍼 수도사 [ 7] 는 「근처의 어떤 건물보다 8배는 강하다」 라고 자랑했다. 실제로, 폭심지 로부터 1.2 km의 거리 [주 6] 에 있어서 성당을 비롯한 주위의 건물이 굉장히 도괴한 가운데, 실내는 손해했지만 몸은 폭풍에도 견디고, 그 후 유소했다고는 해도 사제 관 속에 있던 라사르들 5명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2] [주7] .
원폭 피폭 [ 편집 ]
라살이 피폭해 버리는 것도, 당시 일본과 동맹 관계에 있던 추축국 측의 독일 출신이며, 1941년 (쇼와 16년) 12월 8일 의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도 일본 국외 퇴거를 면했기 때문에 이다 [8] .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의 그 때, 자실의 창가에 서 있던 라사르는, 등에 폭풍으로 깨진 유리 조각을 받게 되어 버렸다[9 ] .
다음은 그때의 모습의 라자르 자신에 의한 직접 증언이다.
딱 아침의 미사 갓 하고 나서, 조금 서었을 때, 갑자기 뭔가의 빛이 밖이었습니다. 무슨 일일까, 뭔가의 사건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약)하지만 그 때, 원폭의 소리를 전혀 듣지 않았어요. 어쩐지 말하면, 소리는 역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동안 천장도 아무것도 엄청 어려워지고, 떨어지고, 이것으로 이미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약)
도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까지 강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약) 그냥
그때 주변의 학교 학생이 폭심지 근처에 일하러 와서, 상당히 학생들은 죽고, 클래스의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을 정도로 전멸에 가까웠습니다. 나도 함께 죽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약) 그래도, 살아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해 가야 되네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역시 하나의 기도하는 곳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미야 진비 강연 '세계 평화 기념 성당의 건축을 둘러싸고 - 강연과 대화'(건축가 무라 노토고 씨와 세계 평화 기념 성당을 말하는 회편 / 1959년 3월 30일간)에서 발췌 [10 ]
중상을 입은 라살은, 히로시마시 교외의 기온 장속에 있던 예수회 수련원 까지 담가 로 옮겨진 뒤 [2] , 거기서 원조 수도회 (연옥 원조 자매회)의 간호를 받으면서 몇 주 동안 바닥에 붙어야 했다 [11] .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는 석문과 석담만이 태워 남아 있는 야마치교회의 부지에 우선 2평 정도의 버락을 세우고, 거기를 도구 오두막 겸 주거로 옮겨 간다 . 이듬해 1946년 (쇼와 21년) 1월에는 주택영단 에서 매입한 조립식 주택을 2동 없이 12조 정도의 공간을 확보해, 우선 성당과 전도집회소의 형태가 갖추어 졌다 . 3월에는 또 1동분을 연결해 주임 사제의 주거로 해, 4월에는 성모 유치원도 재개 . 그리고 삶도 밀려오는 12월이 되어 드디어, 태워 남아 있던 기초 위에 이전과 거의 같은 모습으로 사제관이 재건 된 것이다 [12] .
세계평화기념성당 [ 편집 ]
건축 경기 설계 [ 편집 ]
단 하나의 폭탄 에 의해 하나의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사는 20만 이상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상하고 게다가 방사능에 의한 파괴력은 오랫동안 피해자를 괴롭혔을 뿐 아니라 , 세대를 넘어 영향도 걱정되었다. 과학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이 새로운 근대무기 의 악을 극복할 정도의 희망을 주고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 건설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건축이 그 마이너스의 힘에 길항하는 것만의 플러스 힘이 있어야 했다 [13] .
그러므로 그 건축이 가져야 할 성격은, 이념에서 말해도 규모의 면에서 말해도, 히로시마의 원폭의 희생자에게의 위령뿐만 아니라, 전쟁에 의한 모든 희생자에게의 기도가 마음 있는 사람들 을 끌어당겨 진정한 세계평화를 쌓아가기 위한 운동의 기점이 되는 것이어야 하며, 민족도 종교도 국가도 넘은 모든 전쟁 희생자 위에 세워진 새로운 정신 문명 의 기초가 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고 라사르는 생각한 것이다 [14] .
원자폭탄이 인간에 미치는 파괴력을 직접 경험한 라사르의 이 직관에 기초한 장대한 비전은 반드시 처음부터 사람들의 적극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15 ] , 어쨌든 그러한 대성당 으로 발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교회 의 신자들을 위해 몸에 맞는 교회당 건설을 하고 주위는 원했지만, 이것에 관해서는 라사르는 힘들었다[16 ] .
1946년 (쇼와 21년) 3월, 라사르는 예수회의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 에 여행을 떠난다. 같은 해 9월에는, 시의 교황 피오 12 에 개인 속견한 기회를 파악해 스스로의 구상을 피역하고, 우선 로마 교황청의 먹이 첨부를 붙인 후, 자신은 유럽 , 북미 및 남미를 둘러싸고 세계에 히로시마의 참상을 보고하면서 세계평화기념성당 건설을 향한 협력을 부탁한 것이다 [15] . 이 여행은 라사르에게 1년 여유가 길게 되었다 [12] .
1947년 (쇼와 22년)도 후반이 되어 귀국하면 [주 8] , 성당 건설을 단순히 히로시마 교구의 문제로서는 아니고, 제2차 세계 대전 의 패전 후에 새롭게 평화 국가로서 재출발한 일본 전체의 이를 위해 [15] , 이 건설 계획 자체를 아사히 신문사 의 후원을 얻어 「평화 기념 히로시마 가톨릭 성당 건축 경기 설계」[주 9] 로 해, 1948년 (쇼와 23 년) 부활제의 날을 기하여 아사히 신문지에 발표했다. 전년에 열린 센다이시 공회당 공모와 함께 일본 건축계에서는 전후 건축사의 개막을 알리는 당시 최대급의 공모 였다 . 게다가 라사르가 내건 고편한 이념에 의해, 일본 근대 건축 사상 처음으로 세계의 눈을 의식한 콤페가 되었다 [8] . 대회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명확하게 내세운다.
본 계획에 있어서는 뛰어난 일본적 성격을 발휘하는 것과 동시에 전후 일본의 새로운 시대에 응하는 제안을 바라고 있다.
이의 주지에 근거해 하기의 요항을 내건다.
1. 성당의 작풍은 일본적 성격을 존중하고 가장 건전한 의미에서의 모던 스타일인 것, 따라서 일본 및 해외의 순수한 고전 양식은 피해야 한다.
2. 성당의 외관급 내부는 모두 반드시 종교적 인상을 주어야 한다.
3. 성당은 기념 건축으로서의 장엄성을 가져야 한다. 이상의 모던, 일본적, 종교적, 기념적이라는 요구를 조화시키는 것이 이번 경기 설계의 주안이다.— 평화기념 히로시마 가톨릭 성당 건축 경기 설계도집(히로시마 가톨릭 교회편 / 홍양사·1949년)에서 인용 [17]
자신이 체험하게 된 테크놀로지 의 진보에 의한 미증유의 참상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우선 명확하게 모더니즘 양식인 것이 주장되고 있는 것은, 라사르가 과학 기술의 진보를 반드시 부정하지 않고 , 그것은 인류에 대한 자부심이었고 [18] 오히려 기술의 진보를 인류의 사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 . 그러나 세계가 평화이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마음이 평화여야 하며, 따라서 과학기술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 자체는 이론이나 이데올로기에 지배된 인간이 아니라 우선 영 ( Geist)에 의해 지배된 인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 .
물자 부족에 휩쓸린 태평양 전쟁의 전시중을 빠져나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직후의 곤궁한 시대에 행해진 제2차 세계 대전 후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큰 대회이며, 상금이 고액이었던 것 도 도와 177명의 응모가 있었지만, 요항에 내거진 고도의 조건을 완전하게 채우는 것이 없고, 1등 당선은 해당자 없음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성당의 설계 자체는 결국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표현파의 실력자 무라노 후고가 스스로 행하게 되어, 이것은 건축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지만 , 무라노 후 고는 설계료의 수령을 거절하고 [주 10] , 나중에 무라노는 1980년 (쇼와 55년) 8월 3일 , 스스로 설계한 니시노미야 트라피스티누 수도원 에서 증손 과 함께 라사르로부터 카톨릭의 세례를 받고 있다 [ 20] [21] .
일본으로의 귀화 [ 편집 ]
세계평화기념성당의 건설이 점차 구체화되어 가는 가운데, 라사르는 1948년 (쇼와 23년) 10월 25일 , 국적을 일본으로 옮기고 있다 [22] . 귀화명에 있는 아미야 진비의 '진비'라는 이름은 견당사로서 일본에 당나라 의 선진 적인 문화를 가져와 또 조토 다이지 장관으로서 나라 도다이지 의 건설 에 종사한 나라 시대 의 대학자 요시비 진비 ( 695년 - 775년 )에 의한 것이다. 성의 ‘아미야’ 쪽은, 일본 서기 속에서 진무 천황이 동정 때 행재소 를 아기 국 ( 아키쿠니 )의 ‘먼지(에노미야)’(현재의 히로시마시 교외 아키 군 후추 마을 )에 놓았다는 기술을 근거로, 그 고지를 소리로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말 그대로 신을 사랑한다는 의미라고 생각되고 있다[23 ] . 길비국의 태생이었던 길비 진비의 성명이 '길비의 출의 진비'라는 자칭인 것에 따르면, '아미야' 즉 사랑의 신인 그리스도를 모시는 궁(교회)에 사는 ' (그리스도교회 출신의) 진비'라는 의미라고도 생각된다.
길비 진비라고 하면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 마비 초가 유명하지만,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 마비초 쇼다에 있는 길비 공산 유노우물 에는, 라 사르가 지은 현창비가 있어, 라틴어와 일본어로 각각 다음 의 같은 칭찬을 받고있다.
불멸의 유덕을 앙암 이 비석은
이 땅에 삶을 얻은 문학자로서, 또 정치가로서 많은 공적을 낳은 선현길비 진비공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바라면, 이 위인의 굉장한 이상과 귀덕이, 조국 일본의 청소년 영원의 모범이 되어, 불멸의 지표가 되는 것을.
쇼와 38년 10월 2일
아미야 마비— 오카야마 요시비 진비 공원·요시비 진비 현창 비문
기념성당 건설 [ 편집 ]
1948년 (쇼와 23년)에 귀화한 것으로 명실상부 히로시마 시민이 된 라사르는, 다음 1949년(쇼와 24년)에는 스스로 야마치 교회의 주임 사제가 되어 대성당 건설을 향해 진두 지휘 에 닿게 되었다 [12] . 그러나, 삼각주 위에 발전해 온 히로시마시의 지반이 연약하고 기초 공사가 난항한 것을 시작으로, 1950년 (쇼와 25년) 공사와기를 똑같이 하도록 해 시작된 조선 전쟁 의 영향으로 건설자재가 몇 배나 치솟는 등 당초부터 건설은 어려움을 겪었다. 건설 공사가 중단될 때마다, 라살은 건설 자금의 수당에 분주해야 했던 것이다. 거기서 다음 1951년 (쇼와 26년) 1월에는 「세계 평화 기념 성당 후원회」의 명칭을 「히로시마 평화 기념 성당 건설 후원회」라고 바꾼 다음 [주 9], 새롭게 명예 총재에 다카마쓰 노미야 선인 친왕을 대, 총재에는 요시다 시게루 내각 총리 대신을 맞아, 히로시마현 출신의 이케다 용인 대장 대신이 실질적인 정리역인 회장 발기인이 되어, 국내에서의 모금 활동을 지지하게 되었다.
‘위령을 위한 성당’에서 보다 이념적인 ‘평화를 희구하는 성당’으로 라사르가 내건 건축 이념은 1949년(1949년) 8월 6일에 시행된 히로시마 평화 기념 도시 건설법 의 이념과도 공명하게 되어, 1952년 (쇼와 27년)에는 「히로시마 평화 기념 성당 건설에 대한 감사 결의문」이 히로시마시 의회보다 만장 일치로 보내지고 있다 [ 24 ] . 성당 건설은 단순히 가톨릭 교회만의 것이 아니라 점차 종파나 종교를 넘어 넓게 히로시마 시민의 것이 되어 갔던 것이다. 그로 인해 독일 쾰른시 보다 파이프 오르간이 , 보훔시 에서는 강철 제 종이, 독일 본시 에서는 성교 가 , 벨기에 에서는 대리석 제단 등이, 히로시마시에 기증되는 형태로 건설 현장에 전달 되었다. 또한 일본 국내외의 헌금은 물론 미국 뉴욕 의 사업가 토마스 A. 브래들리로부터의 다액의 자금 원조에 의해 내진 상부 의 돔가 수당되는 등 [25] [주 11] , 전세계로부터의 선의에 의해 성당으로서의 형태가 갖추어져, 1954년(쇼와 29 년) 8월 6일의 히로시마의 원폭 위령일에 헌당식이 실시한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헌당식 당일에는 성당 내진 에 모자이크 화도 없었고, 창문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가 아니고 무색 투명 유리가 끼워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8년 후의 1962년 (쇼와 37년)이 되어 드디어, 히로시마 교구의 사목이 예수회에서 교구 사제에게 맡겨지는 것과 시간을 같이 하도록(듯이), 전달된 마지막 스테인드 글라스가 성당 최상부의 창문에 끼워져 성당은 진정한 완성을 본 것이다 [26] . 그리고 성당 건설에 심혈을 기울인 라사르도 그것을 보는 것처럼 히로시마의 땅을 떠나게 되었다. 히로시마의 강 모래를 사용하여 콘크리트 를 만들고 쌓아 올린 콘크리트 벽돌의 수는 [주 12] 원폭으로 잃어버린 희생자의 수와 필적한다고도 말한다. 세계평화기념성당은 2007년 ( 헤세이 19년)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단 시타 켄조 의 히로시마 피스센터 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건축물로서 처음으로 일본국의 중요문화재 (건조물)로 선정 되어 있다.
선과 기독교 신비 사상 [ 편집 ]
실천 [ 편집 ]
라사르가 종교적인 틀을 한 걸음 밟아 좌선을 자신의 종교 생활에 도입하게 된 것은 쓰와노에 있는 영명사에서의 1943년(쇼와 18년)의 회 가 계기 였다 [ 23 ] . 라살의 선 에 대한 관심의 원인은 기독교 전도 에 있어서 우선 일본인의 전통적인 영성을 알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른바 「사람을 보고 법을 설하라」라는 셈이다 [27] .
그러나 체험적으로 선의 정신을 접해 보면, 라사르는 묵상이나 관상과 같은 기독교 적 수덕 법과 공통되는 것을 거기에 느끼고
- 완전한 자기 포기로 신과 사람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기독교 신비 주의사상 에 말하는 주부적 관상(수동적인 탈혼 상태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전을 직접 받는 것)에 대한
- 정신적인 준비로서 좌선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28 ] .
오랜 종교적 전통에 의해 고도로 매뉴얼화된 선의 수법이 [29] ,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휘두르는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뛰어난 실천적 명상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19 ] .
1954년 (쇼와 29년)에 세계평화기념성당이 완성된 후, 1956년 (쇼 와 31년)에 우선 후쿠이 현 오하마시 에 있는 발 심사 의 하라다 조다케 ( 1871 년-1961년 ) 고마자와 대학교 교수) 하에서, 후에는 하라다 조악의 법계를 계승하는 야마다 경운 ( 1907년 -1989 년 / 1954년 <쇼와 29년>)에 결성된 조동종 계의 종교법인 삼보교단 제 2조)의 지도를 듣고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갔다 [23] .
1961년 (쇼와 36년)이 되면, 히로시마시의 교외 가베초 미나미하라협 에 선도장「신명굴」을 건설. 라살은 스스로 참선했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접심을 지도하게 된 것이다 . 좌선의 진행방법과 식이법은 선불교의 전통적인 작법을 지켜서 행해졌지만, 도장에서의 하루는 이른 아침의 미사에서 시작하여 밤의 기도로 끝나도록 완전히 그리스도인의 그 것이다 [ 28 ] , 라살의 선에 대한 접근법은 이론적 의미에서도 어디까지나 방법론적인 포착 방법이며, 거기에는 신학적으로 말해,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교리적인 싱크 레티 즘 ( 제종 혼교)라는 요소는 전혀 없었다 [30] . 그러므로 라살은 자신의 선수행에 있어서, 공안 이라는 방법만은 도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28] . 그러나 라살의 선수행에 대한 대처는 진지 그 자체이며, 그 후에는 세계평화기념성당의 지하성당에서 좌선을 짜는 모습도 목격되고 있다[23 ] .
이론 [ 편집 ]
그리스도교는 구절과 염상 외에 묵상이나 관상 등 몇 가지 확립된 명상법이 있지만, 통상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성모 마리아의 사적 등 명확한 지향 대상 이 있다 . 기독교는 사랑을 설득하고 사랑에는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31] . 그에 대해 불교는 일절 무상을 설고 거기에 자비는 있지만, 인간의 적극적인 행위의 실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32] . 불교에 대한 견성 이란 자신의 불성을 재검토 하는 것이고, 자기를 초월한 타인으로서의 하나님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정이란 인식을 만유와 일치시켜(깨달음 ) , 윤회전생하는 생명의 순환적인 존재방식으로부터 멀어져(해탈 ) , 만유 그 자체로 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열반 ) [33] .
각자 는 자기를 한정된 것으로 하고 있는 모든 '잡혀'를 폐하여 무아의 경지에 이르고,
심지어 그 무의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자신의 작위조차도 멸각하여 논리적인 계단 을 넘은 해탈에 이르려 한다 [34] .
선종이 때때로 배리적인 모순을 포함한 공안이라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도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으로서 잡혀 있는 주어진(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원죄)인 조리나 정리를 파각 하고 ,
일상적인 이성 과 감정을 기각하여 무념무상의 명상상태에 이르고, 그 인식을 통해 절대적인 자유의 경지인 涅槃에 이르려 하는 것이다[35 ] .
그 소극적인 능동성을 칭해 해탈이라고 한다.
반대로 인간이 원죄 가운데 있다고 하는 기독교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스스로의 입 위치에 불성(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신성)을 찾아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견신)이 아니다 . 그리스도인은 기도와 소명 에 근거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유일하게 영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처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의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행위나 기도는 어떠한 것이라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36 ] .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구제라는 초자연적 신비 체험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응답성을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37] . 그 적극적인 수동성을 칭하여 은총 이라고 한다 [38] .
라살이 선 수행에 요구한 무념 무상도 하나님과의 합일을 방해하는 하나님과 개아 사이에 있는 장애를 없애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받기 위한 준비로서 무사 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라사르는 깨달음이란 자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존재 그 자체와 일체가 되는 자연적 신비 체험이며 , 깨달음 자체는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라고 한다 [28] . 한편, 도모토 는 반복 무상을 강조하고, 단순한 방법론으로서의 「습선」을 물리친다 [39] .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선정에 이르는 선수행으로 보고 성성불을 부정하고, 좌선이야말로 선정의 수증이라고 하는 타관타좌 를 설명 하는 것이다 [ 40 ] .
불교자는 어디까지나 아무것도 붙잡히지 않는 유가 독존 적인 해탈을 자립으로 파악하고, 자기 확립된 하늘 이라는 무아의 이상상태를 해탈하지 않거나 열반이라고 존중한다. 반대로 기독교 신비주의에 말하는 무사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한 자기 포기이며, 어디까지나 궁극적인 유(유=존재하고 있는 것)인 신[41]의 영원성 을 , 스스로의 장소에 받아들일 수 있는 하늘이다. 불교적인 깨달음으로 보면,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은총과 같은,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해 기대되는 조건 설정(계약)이야말로 해탈을 방해하는 「잡혀」이며, 만유와의 합 하나를 목표로 지금 여기 있는 자기 외에는 아무것도, 즉 하나님도 자기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관념에도 잡히지 않는 현전하는 절대적인 하늘(구)을야 이상적인 상태로 계속 앉아 이다(주관 타좌) [42] .
기독교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명확하고 선형적인 시간과 그것을 넘은 존재로서의 「유」가 있지만, 불교에는 순환하는 원환적인 시간과 그것을 넘은 장소로서 의 "무"밖에 없다 [43] . 기독교와 선불교의 양자 사이에 궁극의 실재를 어떻게 파악하는지의 차이가 있더라도, 무념 무상을 통해 선정에 이르는 좌선의 행법과 십자가의 요한이 말하는 '영혼의 밤밤'을 빠져나가 신인 합일에 이르는 신비 사상 [44] 과의 사이에 공통점을 찾아내고, 게다가 그것을 신학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좌선을 행해 스스로의 종교 생활 속에서 실증하려고 한 곳에 , 라살의 독창성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45] [46] .
※ 기독교 세계와 불교 세계에 있는 종교적인 인식의 차이를 예시하기 위한 것이며, 상기 #이론의 기술에 관련되어 역사상의 인물인 예수 , 마리아 , 테레사 , 및 석가 가 실제로 이미지 같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년 [ 편집 ]
히로시마시 교외 가베초 미나미하라 협 에 있던 「신명굴」이 미나미하라 댐 건설에 따라 파괴되면, 1962년 (쇼와 37년)에 가미치 대학으로 돌아가, 1969년 (쇼와 44년)에는 도쿄 도서 다 마군 히하라 무라 코이와에 「아키가와 신명굴」을 세운다 [19] . 90세에 컨디션을 무너뜨릴 때까지, 거기서 매년 30회 정도의 접심을 행했다 [2] . 라살은 일본 국내외에서 선과 기독교의 접합을 목표로 한 논문이나 저작을 발표하고 있어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는 쾌적하게 생각되지 않고, 고위 성직자로부터 이론을 받기도 했지만 [23 ] ,
기독교 카트리 시즘의 현대화에 근거하여 제종교와의 상호 이해에 적극적으로 내디던 제2바티칸 공회의(1962년-1965년) 이후, 그러한 비판도 하화가 되어 , 라 사르는 일본 국내 에서만 없이 일본 국외에서도 널리 기독교 관계자에게 참선을 권하고 스스로 지도하게 되어 간다 [2] . 최근에는 서양에 널리 선사상을 소개한 스즈키 오오츠키이후의 「ZEN 붐」도 도와서, 서양에서의 선의 실천 이론적 개척자로서, 그 활동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평가되게 되는 것이다[47 ] . 1993년 (헤세이 5년)에는 스위스 의 예수회 수도원 속에 라사르의 이름을 딴 참선을 위한 시설 '라살 하우스 센터(Zentrum Lassalle Haus)' [주 13]이 건설 된 예 도 있다.
나이를 얻어도 여전히 선의 지도나 강연 활동에 정력적으로 근무하고 있던 도중, 라사르는 독일 체재중에 컨디션을 파괴하고, 성모 마리아의 순례소가 있는 독일·베스트팔렌주 케이 벨러 ( 그리고 암 에 의한 큰 종양 의 절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체력이 돌아오지 않고, 뮌스터 에 있는 예수회의 수도원에서 요양생활을 강요당하고, 일본에의 귀국을 의사 로부터 멈추어져 버린다 [2] [48] . 1990년 (헤세이 2년) 7월 7일에 사망. 91세에서 몰.
한때 "뼈가 일본의 땅이 될 때까지"라고까지 정한 고인의 일본에 대한 강한 구상이 고려되어 독일에서 처음으로 예수회사의 화장이 허용되어[2] 그 유골 의 일부 가 히로시마 의 세계 평화 기념 성당의 제단 왼쪽 옆에 담겨있다.
선의 수행에 대한 기울임에서 볼 수 있듯이, 라사르는 자신을 엄격히 이끌면서 결코 신념을 구부리지 않고 세계 평화 기념 성당의 건설과 선을 기독교에 연결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한 적이 있는 일본인 중에는, 그 것보다도 그 인품을 돌려서 당황하고, 금발[49]로 장신 슬리퍼의 일본인·아미야 진비의 추억을 말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 그 버릇은 「뭐, 좋겠지」였다고 한다 [50] .
주요 저작 [ 편집 ]
- 『모스코나 로마인가?』 중앙 출판사, 1951년. ASIN B000JBCAPS .
- 『진리와 혜택』 상·하, 엔델레 서점, 1959년. ASIN B000JAOR5U .
- 『진리와 혜택〈제1부〉자연 종교—가톨릭 종교학』(개정판) 엔델레 서점, 1966년. ASIN B000JBED4E .
- 이케모토 가라·시야마 히로시역 “선 - 깨달음에의 길” 이상사, 1967년. ASIN B000JA8EPE .
- 가미치 대학 동양 종교 연구소 감수 편, 시바타 건책 번역 「선과 기독교」춘추사〈시리즈 종교와 경험 1〉, 1974년 ASIN B000J9BOQ6 .
- 호다 시로 번역 「신 체험의 길로서의 선 명상 - 신비적 기도에 대한 안내」엔델레 서점, 1975년. ASIN B000J9AF8Y .
- 시바타 건책 번역 『선과 신비 사상』(신장판) 춘추사, 1994년. ISBN 4-393-28112-8 .
영상자료 [ 편집 ]
- 「고향 발 시리즈 피폭 61년 「평화의 종야 울려 퍼지-대성당 건설·한 신부의 이야기-」」NHK히로시마 방송국 제작, 2006년 8월 6일 방영(히로시마현내용). NHK 히로시마 방송국 헤세이 18년(2004년)·여름 「히로시마」특집 프로그램 , 2010년 9월 23일 열람.
각주 [ 편집 ]
주석 [ 편집 ]
- ↑ 당시의 야마다 시오오 히로시마 시장으로부터 1968년 (쇼와 43년) 4월 1일 에 히로시마 명예 시민으로서 현창되었다. 「히로시마시 명예시민 조례」가 1962년 (쇼와 37년)에 제정되고 나서 4명째이며, 귀화인이나 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수장이다(이시마루 기흥 1988, 226쪽 ) . 쇼와 43년 4월 15일자의 히로시마시보 제264호에 게재된 공고는 그 이유로서 세계 평화 기념 성당 건설과 일본 국내외에서의 모금 활동, 및 히로시마의 실정을 널리 알리는 로마, 독일 , 프랑스, 스위스, 미국,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에서 수백회에 걸친 해외 강연 활동 외에 전전 전후에 걸쳐 상지대학, 히로시마 육군 유년학교,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히로시마 문리 대학 에서 의 독일어 교육 게다가 엘리자벳 음악 대학 , 히로시마 학원 중학교 , 히로시마 학원 고등학교 설립에의 진력 또 거기에서의 교육, 그 외 교예사 로서의 활동, 히로시마 일독 협회에서의 교류 활동, 히로시마시 교외에 선도장을 건설해 실천 이나 저작연구에 있어서 불교 및 신도 와 기독교의 상호이해를 진행한 것 등 10개 항목에 걸쳐 그 공적을 올리고 있다.
- ^ 상지대학의 창립자 중 한 명이자 중심적인 멤버였던 예수회사 요셉 다르만(독일어판)이 독일인 . 일본의 예수회는 1935년 (쇼와 10년) 2월 5일부터 1949년 (쇼와 24년) 2월 15일까지의 사이, 독일의 예수회 서관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독일 서관구에서 분리되어 준관구로서 독립하는 것은 1949년(쇼와 24년)이며, 1958년(쇼와 33년)에 일본관구로 승격 했다 . 이시마루 기흥 1988 , 19, 21쪽.
- ↑ 개설 당초의 명칭은 「카미치 카톨릭 세츠르먼트」였지만, 관헌에의 배려로부터 곧 「카톨릭」의 문자가 제외되었다. 그 후 「가미치 세츠르멘토」는 1933년 (쇼와 8년)에 아라카와구 마치야 에 이전한 후, 1955년 (쇼와 30년) 8월에는 사회복지법인 상지사회사업단 「상치후생관」이 되어 2010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회복지법인 가미치사회사업단 공식 HP-연혁 , 2010년 9월 23일 열람.
- ^ 예수 회원은 성명 뒤에 SJ라고 하는 관습이 있으며, SJ란 Societas Jesu의 이니셜.
- ↑ 세계 평화 기념 성당 헌당 50주년 뉴스 vol.1 12월호 2004년 ( PDF ) 의 5페이지에는, 성당은 150m 2 로 있지만, 이시마루 기흥 1988 의 14페이지에는 “건물은, 모두 목조로, 성당이 80평, 사제관이 약 50평, 전도사택 및 가정부택(양자를 합쳐 전도사관이라고 부르고 있었다)이 약 20평이었다”는 설명이 있다.
- ↑ 이시마루 기흥 1988 의 23쪽에 근거했다. 존 허시 1949 의 16페이지에서는 1.3km로 되어 있지만, 동서 vi의 지도는 폭심을 원폭 돔으로 하고 있으며, 원폭 돔은 진정한 폭심지로 여겨지는 섬 병원보다 약 100m 북서 에 위치하고 있다 . 덧붙여 동서 93쪽에도 그 취지의 기술이 있다.
- ^ 이시마루 기흥 1988 의 14, 23-24 페이지에 의하면, 당시 교회에 있던 것은 4명의 신부들 외, 다케모토 신학생, 후카이 슈지 교구장 비서, 호시시마 전도사와 그 가족, 가정부 의 무라타 부인으로 되어, 피폭시 히로시마현청에 출근하고 있던 호시시마 부자를 제외한 호시시마 전도사의 가족과 유치원의 보모 2명이 도괴한 건물로부터 구출되고 있다. 호시시마 전도사의 가족은 일시행방불명이 되었지만, 그 후 동련병장으로 피난하고 있던 것이 판명. 그러나 후카이 비서는 피난 도중에 행방불명인 채로 되어 있다. 사제관 안에 있던 4명의 신부들 중 무상이었던 것은 시슬릭만으로, 라사르, 크라이조르게(귀화명:타카쿠라 마코토), 시퍼의 3명이 부상해, 유리로 왼쪽 귀 위를 잘라 출혈 다량에 빠진 시퍼와 라살이 중상이었다. 존 허시 1949 의 34쪽에는 "교회 서기의 후카이 씨는 선교사관 2층의 자실 창가에 서서 폭심의 방향을 벗으면서 울고 있다"라는 설명도 있어, 동서 36페이지 에 따르면 후카이 씨는 사제들과 피난하는 도중 혼자 불길 속으로 되돌아가, 동서 72쪽에는 그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 ^ 이시마루 기흥 1988 의 43쪽에는 「1947년 12월(일설에는 가을), 일본에 귀국한 라사르 신부는, 본격적으로 성당 건설을 실현에 옮기기 위한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에 묘사가 있다.
- ↑ a b 「세계 평화 기념 성당」은 건설 당초 「히로시마 평화 기념 성당」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세계 평화 기념 성당」이라고 하는 정식 명칭이 확정되는 것은, 헌당식을 가까이 앞둔 1954년(쇼와 29년) 7월 23일이었지만, 관계자의 사이에서는 당초보다 「세계 평화 기념 「성당」과의 합의가 있어, 「히로시마」의 이름을 씌운 것은 모금 활동을 진행하기 쉽게 하기 위해였다고 한다. 이시마루 기흥 1988 , 169-173 페이지.
- ^ 이시마루 기흥 1988 의 223-224페이지에 의하면, 「설계대를 처음쯤 한 번만 드렸습니다만, 그 후는 무라노 선생님이 몇시나 거절했습니다」(아미야 신부에 의한 담)라고 있어, 그 액수도 불과 그렇다고 한다. 또한 설계감리료는 라사르 신부가 현장에서 거주 담당자에게 직접 건네주었다는 설명이 있다.
- ^ 이 "잠깐 바뀐 원형 지붕"의 인사는, 이시마루 기흥 1988 의 44-46, 116-117 페이지에 상세하다. 세계 평화 기념 성당 # 건축 의장 도 참조.
- ^ 이시마루 기흥 1988 의 144쪽에는, 24부터 30만개 정도 현장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 ↑ 스위스투크 주 에 있는 예수회의 수도원 부지 안에 참선 도장과 종교 세미나를 위해 새로 지어진 것. 설립자인 벨기에인 예수회사 니콜라우스 브랜첸(선불교사명-오운 노사)은 라살의 소개로 야마다 경운에 사사하고 나중에 접심을 지도하는 것을 정식 으로 인가 받았다 「노사」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 디자인은 앙드레 슈투더. swissinfo.ch 세계로 보내기 스위스 뉴스 , 2010년 9월 23일에 확인함.
출처 [ 편집 ]
- ^ News vol.1, 2004년 4월, 세계평화기념성당 봉헌 50주년 ( PDF ) , 4-5쪽.
- ^ a b c d e f g 세계평화기념성당 50주년 기념 뉴스 vol.1 2004년 3월 ( PDF ) 6면.
- ^ 세계평화기념교회 봉헌 50주년 기념뉴스 제1권 2004년 3월호 ( PDF ) , 4쪽.
- ^ a b c d e f g 세계평화기념성당 50주년 기념 뉴스 vol.1 2004년 3월 ( PDF ) 5면.
- ^ 세계평화기념성당 봉헌 50주년 기념성당 소식 2004년 6월호 제1호 ( PDF ) 6면.
- ↑ 가톨릭 히로시마 주교구 HP 「히로시마 교구·약사」 , 2010년 9월 30일 열람.
- ^ 존 허시 1949 , 16 페이지.
- ^ a b 단시타 켄조 후지모리 테루노부 2002 , 130쪽.
- ^ 존 허시 1949 , 15, 26 페이지. 히로시마 기념 성당 HP「세계 평화 기념 성당의 피폭한 십자가」도 참조. 2010년 9월 23일에 확인함.
- ^ 단시타 켄조 후지모리 테루노부 2002 , 130쪽에 의한다. 서식도 동서 그대로.
- ^ 뉴스 vol.1, 2004년 6월, 세계평화기념성당 봉헌 50주년 ( PDF ) , 3면.
- ^ a b c 세계평화기념성당 50주년 기념 뉴스 vol.1 2004년 7월 ( PDF ) , 4쪽.
- ^ 뉴스 vol.1, 2004년 5월, 세계평화기념성당 봉헌 50주년 ( PDF ) , 3면.
- ^ 세계평화기념교회 봉헌 50주년 기념식 소식 vol.1 2004년 3월 ( PDF ) , pp. 3-4.
- ^ a b c 세계평화기념성당 50주년 기념 뉴스 vol.1 2004년 7월 ( PDF ) 3면.
- ^ 세계평화기념교회 봉헌 50주년 기념뉴스 vol.1 2004년 12월 ( PDF ) 6면.
- ^ 단시타 켄조 후지모리 테루노부 2002 , 130쪽에 의한다. 덧붙여 동서로부터의 인용시에, 원문의 역사적 가명견을 현대 가명견으로 바꿨다.
- ^ a b 세계평화기념교회 봉헌 50주년 기념교회 소식 vol.1 2004년 12월 ( PDF ) 3면.
- ^ a b c 세계평화기념교회 봉헌 50주년 기념교회 소식 vol.1 2004년 11월 ( PDF ) 6면.
- ^ 세계평화기념성당 봉헌 50주년 기념성당 소식 vol.1 2004년 9월 ( PDF ) , p.4.
- ^ 세계평화기념교회 봉헌 50주년 기념뉴스 vol.1 2004년 10월 ( PDF ) 3면.
- ^ News vol.1, 2004년 4월, 세계평화기념성당 봉헌 50주년 ( PDF ) , 4쪽.
- ^ a b c d e 세계평화기념성당 헌당 50주년 뉴스 vol.1 창간호 2004년 ( PDF ) , 4쪽.
- ^ 뉴스 vol.1, 2004년 4월, 세계평화기념성당 봉헌 50주년 ( PDF ) 5면.
- ^ 세계평화기념교회 헌당 50주년 뉴스 vol.1 2004년 9월 ( PDF ) 4-5쪽.
- ^ 뉴스 vol.1, 2004년 10월, 세계평화기념성당 봉헌 50주년 ( PDF ) 6면.
- ^ 뉴스 vol.1, 2004년 4월, 세계평화기념성당 봉헌 50주년 ( PDF ) 6면.
- ↑ a b c d 세계평화기념성당 헌당 50주년 뉴스 vol.1 창간호 2004년 ( PDF ) , 5페이지.
- ↑ 대법 윤각 1997 스즈키 격선 「미치모토 사토리」102쪽.
- ^ 세계평화기념성당 봉헌 50주년 기념성당 소식 Vol.1 2004년 7월 ( PDF ) , 8쪽.
- ↑ 누가의 복음서 「친절한 사마리아인」
- ↑ Berkson 1979「도덕과 종교의 2개의 원천」446쪽.
- ↑ Berkson 1979「도덕과 종교의 2개의 원천」444쪽.
- ↑ 大法輪閣 1997 마츠타마 마코토 「석존의 사토리」7-8페이지.
- ↑ 대법 윤각 1997 니시무라 히데노부 「임재선의 사토리」74-76쪽.
- ↑ 요한복음 ‘나는 포도나무’
- ↑ 구약 성경 욥기 제42장 1절-6절
- ↑ 신약성서 요한계시록 제21장 1절-8절
- ^ 후루다 사와키 『선이란 무엇인가』 일본 방송 출판 협회 <NHK 라이브러리> 1996년, 193쪽. 「좌선은 습선에는 없고, 대안락의 법문이 되어, 불염오의 수증이 된다」(도원 「보권 좌선의」).
- ↑ 대법 윤각 1997 스즈키 격선 「미치모토 사토리」99-101쪽, 106-107면.
- ↑ 구약 성서 출애굽기 제3장 14절
- ↑ 대법 윤각 1997 스즈키 격선 「미치모토 사토리」99-101쪽.
- ↑ 대법 윤각 1997 카지야마 유이치 「반 와카케이와 사토리」19-25쪽.
- ^ 앙리 셀루야 1975 , 114-118 페이지.
- ^ 세계평화기념교회 봉헌 50주년 기념뉴스 제1권 2004년 7월 ( PDF ) 6면.
- ^ 세계평화기념교회 봉헌 50주년 뉴스 vol.1 2004년 12월 ( PDF ) , p. 10.
- ↑ 세계평화기념성당 헌당 50주년 뉴스 vol.1 창간호 2004년 ( PDF ) , 6페이지.
- ^ 세계평화기념성당 봉헌 50주년 기념성당 소식 Vol.1 2004년 7월 ( PDF ) , 5쪽.
- ↑ Leben aus der Mitte , 독일의 선도장 홈페이지에 있는 푸고 라사르의 초상, 2010년 9월 23일에 확인함.
- ^ News vol.1, 2004년 5월, 세계평화기념성당 봉헌 50주년 ( PDF ) , 5쪽.
※ 이 판에 있어서의 기술에서는 전체적으로 이시마루 기싱 1988을 , 또 #이론 에서는 스즈키 오오조 2004 를 전반적으로 참조했으므로, 여기에서는 특히 각주화를 실시하고 있지 않다.
참고 문헌 [ 편집 ]
- 존 허시 저, 이시카와 겐이치 , 타니모토 키요시 , 아케다가와 융역 「히로시마」(증보판(2003년)) 호세이대학 출판국, 1949년. ISBN 4-588-31612-5 .
- 단시타 켄조 , 후지모리 테루 노부 『단시타 켄조』 신건축사, 2002년. ISBN 4-7869-0169-5 .
- 이시마루 기흥 『세계 평화 기념 성당』 사가미 서방, 1988년. ISBN 4-7824-8804-1 .
- 대법 윤각 편집부 편 「사토리는 무엇인가」대법 윤각, 1997년. ISBN 4-80-461130-4 .
- 앙리 벨크슨 저, 모리구치 미토 남역 , 사와 사쿠히사 편 「베르크슨」중앙 공론 신사 <세계의 명저 64>, 1979년. ISBN 4-12-400674-8 .
- 앙리 셀루야 저, 후카야 철역 『신비주의』 시라미즈샤〈문고 쿠세쥬〉, 1975년.
- 스즈키 오오키 저자, 사카히토성 준· 시미즈 모리 졸역 “신비주의-기독교와 불교” 이와나미 서점, 2004년. ISBN 4-00-0233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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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ーゴ・ラッサール
フーゴ・ラッサール 愛宮真備 Hugo Makibi Enomiya-Lassall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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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エズス会司祭 | |
フーゴ・マキビ・エノミヤ=ラッサール | |
教会 | カトリック教会 |
個人情報 | |
本名 | フーゴ・マキビ・エノミヤ=ラッサール |
別名 | 愛宮真備 |
出生 | 1898年11月11日 |
死去 | 1990年7月7日(91歳没) |
国籍 | 日本 |
フーゴ・マキビ・エノミヤ=ラッサール(Hugo Makibi Enomiya-Lassalle, 1898年11月11日 - 1990年7月7日)は、ドイツ生まれのイエズス会員で、カトリック教会の司祭、宣教師。日本語表記では姓と名がそれぞれ、フーゴーともラサールとも、あるいはまれにラッサルとも表記される。1948年(昭和23年)に日本に帰化しており、日本名は愛宮真備(えのみや まきび)。英語版ウィキペディア “Hugo Enomiya-Lassalle”にある英語表記 Aiun-ken は、ラッサールの禅仏教上での名乗り愛雲軒の音訳。
キリスト教の聖職者として初めて、坐禅を宗教生活のなかに実践的に導入した。1945年(昭和20年)8月6日に広島市の幟町天主公教会(幟町教会)で原子爆弾の投下に会い直接被爆したことで、犠牲者への慰霊のためだけではなく、世界平和を目指した祈念の場の必要性を痛感し、ヒロシマの地に世界平和記念聖堂を建設することに尽力した。それら広島の文化福祉の発展に広く貢献した功績が認められて、1968年(昭和43年)4月広島市の名誉市民として顕彰されている[1][注 1]。
帰化名にもよく現れているように日本文化に対する造詣が深く、特に日本人の霊性への関心から禅宗に深い興味を抱き、自ら参禅しただけでなく他のキリスト教関係者にも積極的に坐禅を勧めた。日本国外ではむしろ、その理論と実践において「カトリック禅」[2]ともいえる新境地を開拓したことで知られる。
生涯[編集]
生い立ち[編集]
1898年(明治31年)11月11日にドイツ帝国ヴェストファーレン地方(現在のノルトライン=ヴェストファーレン州)ニーハイムエクステンブロック(Externbrock)で誕生。祖先はおそらくフランスから亡命したユグノーであると考えられている[3]。小学校4年生からギムナジウムに進んだ後、その8年目(Unterprima)に徴兵されて、第一次世界大戦中西部戦線に送られた。負傷と関節リウマチのために何度か入院したが、1919年(大正8年)に高等上等兵(Obergefreiter)で除隊。2級鉄十字勲章受章[4]。
修業時代[編集]
1919年(大正8年)4月25日にイエズス会に入会。当時ドイツのイエズス会西管区に所属する修錬院は、国境で接するオランダのシェーレンベルフにあり、そこで2年間の修練期を過ごしたのち、オランダの南ホラント州ファルケンブルフの聖イグナチオ大学で学ぶ。またイギリスのストーニーハースト・カレッジやヘイスロップ・カレッジなどでも、哲学を3年間、神学を4年間ほど学び、哲学博士号取得。1927年(昭和2年)神学課程の3年目終了時に、ファルケンブルフにて司祭に叙階された[4]。
フランスのアミアンで受けた第三修練の期間中に神秘思想に興味を抱き、十字架の聖ヨハネやアビラの聖テレサの著作を熱心に読み込む。この経験がのちに東洋の神秘主義思想とも言える禅体験と呼応して両者が結びつき、独自の道を切り開いてゆくことになった[4]。
ミッション[編集]
ローマ法王庁から当時ドイツのイエズス会西管区に与えられたミッションに日本があり、そこでの主な事業内容は上智大学での教育であったため[注 2]、ラッサールは1929年(昭和4年)に上智大学に派遣されることになった。しかしラッサールは当初アフリカのハンセン病院への派遣を望んでいたこともあって、大学で学生相手にドイツ語を教えることよりも、市井の人々の間に積極的に飛び込んで社会事業を行なうことを好み[4]、関東大震災の被災者が多く住んでいて、1931年(昭和6年)当時東京市最大の困窮地帯であった荒川区三河島に、学生たちと活動するための拠点となる「上智セツルメント」を設立した[5][注 3]。
1935年(昭和10年)ドイツ本国のイエズス会管区長クライン神父が、ラッサールを37歳の若さでイエズス会日本管区の上長に任命すると、立場上住み慣れた下町から上智大学に付属するS.J.ハウス[注 4]に移らなければならなくなった。そこでラッサールは一計を案じ、上長の権限でイエズス会の日本管区(ミッション)の本部自体を広島に移してしまう[4]。それまでパリ外国宣教会に委託されていた大阪教区のうち、広島・岡山・山口・島根・鳥取の中国地方5県を含んだ西地域が1923年(大正12年)に正式に分割され、広島代牧区としての布教活動がイエズス会ドイツ西管区に委ねられていたからである[6]。ラッサールが広島で原爆に被災してしまうのも、このような経緯による。
当時広島の幟町にあった幟町天主公教会は古い木造の和風(日本様式)の平屋建ての建物で、室内も畳敷きの小さな教会であった[4][注 5]。日本管区長として数名の部下を伴った執務をとるために、1936年(昭和11年)事務所兼住居として新たに司祭館を建設し、岡山にあった教区長館自体も広島に移されて教区長もそこに移り住むようになった[4]。司祭館は西洋風の小屋裏3階建てのしっかりとした建物であり、日本の地震を極度に恐れていた設計者のグロッパー修道士[7]は「近所のどんな建物よりも8倍は強い」と自慢した。実際、爆心地から1.2kmの距離[注 6]にあって聖堂を初めとする周囲の建物がことごとく倒壊したなかで、室内は損壊したものの躯体は爆風にも耐え、その後類焼したとはいえ司祭館の中にいたラッサールたち5名の命を救うことになったのである[2][注 7]。
原爆被爆[編集]
ラッサールが被爆してしまうのも、当時日本と同盟関係にあった枢軸国側のドイツ出身であり、1941年(昭和16年)12月8日の太平洋戦争勃発以降も日本国外退去を免れたからである[8]。1945年8月6日午前8時15分のその時、自室の窓際に立っていたラッサールは、背中に爆風で割れたガラス片を浴びることになってしまった[9]。
以下はその時の様子のラッサール自身による直接証言である。
ちょうど朝の御ミサたててから、ちょっと立ったとき、突然何かの光が外であったんです。何のことだろうかと、何かの事件じゃないかと思いました。(略)けれどもその時に、原爆の音を全然聞かなかったんです。どうしてかといいますと、音はやはり時間がかかるでしょう。そのうちに、天井も何もかも滅茶苦茶になって、落ちて、これでもう、最後だと思いました。(略)
でも、生きてました。それから、その日の夕方まで川のそばに座っておったんです。(略)
ちょうどその時、周辺の学校の生徒が爆心地のあたりに働きに来てて、随分生徒たちは死んで、クラスの一人も生き残らないくらい、全滅に近かったんです。私も、一緒に死んだらよかったのにと思いました。(略)それでも、生きているのだから、どうにも働いてゆ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ね。それで、どうしたらいいかと考えました。やっぱり一つのお祈りするところをつくりたいと思いました。— 『愛宮真備講演「世界平和記念聖堂の建築をめぐって-講演と対話」(建築家村野藤吾さんと世界平和記念聖堂を語る会編 / 昭和59年3月30日刊)より抜粋[10]
重傷を負ったラッサールは、広島市郊外の祇園長束にあったイエズス会修練院まで担架で運ばれたあと[2]、そこで援助修道会(煉獄援助姉妹会)の看護を受けながら数週間床につ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11]。
しかし同年12月には、石門と石塀だけが焼け残った幟町教会の敷地にまず2坪ほどのバラックを建て、そこを道具小屋兼住居として移り住む。翌年1946年(昭和21年)1月には、住宅営団から買い入れたプレハブ住宅を2棟つないで12畳ほどのスペースを確保し、とりあえず聖堂と伝道集会所の形が整うことになった。3月にはもう1棟分をつなぎ合わせて主任司祭の住居とし、4月には聖母幼稚園も再開。そして暮れも押し迫る12月になってようやく、焼け残っていた基礎の上に以前とほぼ同じ姿で司祭館が再建されたのである[12]。
世界平和記念聖堂[編集]
建築競技設計[編集]
たったひとつの爆弾によってひとつの都市が完全に破壊されただけでなく、そこに住む20万以上もの人々が一瞬のうちに死傷し、しかも放射能による破壊力は長く被災者を苦しめたのみならず、世代を超えた影響さえ心配されていた。科学技術の進歩がもたらしたこの新たな近代兵器の悪に打ち勝つほどの希望を与え、人々が再び立ち上がって建設的に生きて行くためには、建築がそのマイナスの力に拮抗するだけのプラスの力強さを持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13]。
それゆえその建築が持つべき性格は、理念から言っても規模の面から言っても、広島の原爆の犠牲者への慰霊だけでなく、戦争によるすべての犠牲者への祈りが心ある人々を引き付け、真の世界平和を築いて行くための運動の起点となるようなものでもなければならず、民族も宗教も国家も超えたすべての戦争犠牲者の上に築かれた、新たな精神文明の礎となるものが求められているとラッサールは考えたのである[14]。
原子爆弾が人間に及ぼす破壊力を直接経験したラッサールのこの直観に基づく壮大なビジョンは、必ずしも初めから人々の積極的な理解を得られるものではなく[15]、いずれそのような大聖堂に発展するにせよ、まずは自分たち教区の信者のために身の丈に合った教会堂建設をと周囲は望んだが、このことに関してはラッサールは頑であった[16]。
1946年(昭和21年)3月、ラッサールはイエズス会の総会に出席するためにローマに旅立つ。同年9月には、時の教皇ピオ12世に個人謁見した機会を捉えて自らの構想を披瀝し、まずローマ法王庁のお墨付きを取り付けた後、自身はヨーロッパ、北米および南米をめぐって世界にヒロシマの惨状を報告しながら、世界平和記念聖堂建設に向けた協力を仰いだのである[15]。この旅は、ラッサールにとって1年有余の長きにわたるものとなった[12]。
1947年(昭和22年)も後半になって帰国すると[注 8]、聖堂建設を単に広島教区の問題としてではなく、第二次世界大戦の敗戦後に新たに平和国家として再出発した日本全体のものともするために[15]、この建設計画自体を朝日新聞社の後援を得て「平和記念広島カトリック聖堂建築競技設計」[注 9]とし、1948年(昭和23年)3月28日の復活祭の日を期して朝日新聞紙上に発表した。前年に行なわれた仙台市公会堂コンペとともに、日本建築界にあっては戦後建築史の幕開けを告げる当時最大級のコンペであった。しかもラッサールの掲げた高邁な理念によって、日本近代建築史上初めて世界の目を意識したコンペともなったのである[8]。コンペは次ぎのような条件を明確に掲げる。
本計画に於ては優れた日本的性格を発揮すると共に戦後日本の新しい時代に応ずる提案を望んでいる。
此の主旨に基いて下記の要項を掲げる。
1. 聖堂の様式は日本的性格を尊重し、最も健全な意味でのモダン・スタイルである事、従って日本及び海外の純粋な古典様式は避くべきである。
2. 聖堂の外観及内部は共に必ず宗教的印象を与えなければならない。
3. 聖堂は記念建築としての荘厳性を持つも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以上のモダーン、日本的、宗教的、記念的と云う要求を調和させる事が此の競技設計の主眼である。— 平和記念広島カトリック聖堂建築競技設計図集(広島カトリック教会編 / 洪洋社・1949年)より引用[17]
自身が体験することになったテクノロジーの進歩による未曾有の惨禍にも関わらず、ここでまず明確にモダニズム様式であることが謳われているのは、ラッサールが科学技術の進歩を必ずしも否定せず、それは人類にとっての誇りであり[18]、むしろ技術の進歩を人類の使命であるとさえ見ていたからである[19]。しかし世界が平和であるためには、まず人間の心が平和でなければならず、したがって科学技術を使わざるを得ない人間自体は、理論やイデオロギーに支配された人間ではなく、まずもって霊(Geist)によって支配された人間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ていた[18]。
物資不足に見舞われた太平洋戦争の戦時中をくぐり抜けて第二次世界大戦敗戦直後の困窮した時代に行なわれた第二次世界大戦後初とも言える大きなコンペであり、賞金が高額であったことも手伝って177名もの応募があったが、要項に掲げられた高度な条件を完全に満すものがなく、1等当選は該当者なしとされた。それで聖堂の設計自体は結局、審査員の一人でもあった表現派の実力者村野藤吾が自ら行なうことになって、このことは建築界に少なからぬ波紋を呼び起こすことになったが、村野藤吾は設計料の受け取りを辞退しており[注 10]、のちに村野は1980年(昭和55年)8月3日、自身で設計した西宮トラピスチヌ修道院で曾孫と共にラッサールからカトリックの洗礼を受けている[20][21]。
日本への帰化[編集]
世界平和記念聖堂の建設が次第に具体化して行くなか、ラッサールは1948年(昭和23年)10月25日、国籍を日本に移している[22]。帰化名にある愛宮真備の「真備」という名は、遣唐使として日本に唐の先進的な文化を持ち帰り、また造東大寺長官として奈良東大寺の建設に携わった奈良時代の大学者吉備真備(695年-775年)に因んだものである。姓の「愛宮」の方は、日本書紀の中で神武天皇が東征の際に行在所を阿岐国(安芸国)の「埃宮(えのみや)」(現在の広島市郊外安芸郡府中町)に置いたという記述を踏まえて、その故地を音(おん)で表すと共に、文字通り神を愛するという意味であると考えられている[23]。吉備国の生まれであった吉備真備の姓名が、「吉備の出の真備」であることの名乗りであることに従えば、「愛宮」すなわち愛の神であるキリストを祀る宮(教会)に住まう「(キリスト教会出身の)真備」という意味であるとも考えられる。
吉備真備というと岡山県倉敷市真備町が有名であるが、岡山県倉敷市真備町箭田にある吉備公産湯の井戸には、ラッサールが建てた顕彰碑があり、ラテン語と日本語でそれぞれ次ぎのような賛がしるされている。
不滅の遺徳を仰がん
この碑石は、この地に生をうけた文学者として、また政治家として、多くの功績をのこされた先賢吉備真備公をたたえるために建てられたものである。
願わくば、この偉人のけ高い理想と貴徳が、祖国日本の青少年永遠の模範となり、不滅の指標とならんことを。
昭和三十八年十月二日
愛宮真備— 岡山吉備真備公園・吉備真備顕彰碑文
記念聖堂建設[編集]
1948年(昭和23年)に帰化したことで名実共に広島市民となったラッサールは、翌1949年(昭和24年)には自ら幟町教会の主任司祭となって大聖堂建設へ向けて陣頭指揮に当たることになった[12]。しかし、三角州の上に発展して来た広島市の地盤が軟弱で基礎工事が難航したのを皮切りにして、1950年(昭和25年)工事と期を同じくするようにして始まった朝鮮戦争の影響で建設資材が数倍にも高騰するなど、当初から建設は困難を極めた。建設工事が中断するたびに、ラッサールは建設資金の手当に奔走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ある。そこで翌1951年(昭和26年)1月には「世界平和記念聖堂後援会」の名称を「広島平和記念聖堂建設後援会」と変えた上で[注 9]、新たに名誉総裁に高松宮宣仁親王を戴き、総裁には吉田茂内閣総理大臣を迎えて、広島県出身の池田勇人大蔵大臣が実質的な取りまとめ役である会長発起人となって、国内での募金活動を支えることになった。
「慰霊のための聖堂」からより理念的な「平和を希求する聖堂」へというラッサールの掲げた建築理念は、1949年(昭和24年)8月6日に施行された広島平和記念都市建設法の理念とも共鳴するようになり、1952年(昭和27年)には「広島平和記念聖堂建設に対する感謝決議文」が広島市議会より満場一致で送られている[24]。聖堂建設は単にカトリック教会だけのものではなく、次第に宗派や宗教を超えて広く広島市民のものともなって行ったのである。それによってドイツケルン市よりパイプオルガンが、ボーフム市からは鋼鉄製の鐘が、ドイツボン市からは聖櫃が、ベルギーからは大理石の祭壇などが、広島市に寄贈される形で建設現場に届けられた。また日本国内外よりの献金はもとより、アメリカのニューヨークの実業家トーマス・A・ブラッドレーからの多額の資金援助によって内陣上部のドームが手当てされるなど[25][注 11]、世界中からの善意によって聖堂としての形が整って行き、1954年(昭和29年)8月6日の広島の原爆慰霊日に献堂式が行うことが出来た。
しかし献堂式当日には聖堂内陣にモザイク画もなく、窓にはステンドグラスではなくて無色透明のガラスが嵌められていただけであった。それから8年後の1962年(昭和37年)になってようやく、広島教区の司牧がイエズス会から教区司祭に任されるのと時を同じくするようにして、届けられた最後のステンドグラスが聖堂最上部の窓に嵌められて、聖堂は真の完成を見たのである[26]。そして聖堂建設に心血を注いだラッサールもそれを見届けるかのように、広島の地を去ることになった。広島の川の砂を使ってコンクリートをつくり、積み上げられたコンクリートレンガの数は[注 12]、原爆で失われた犠牲者の数にも匹敵するとも言われる。世界平和記念聖堂は、2007年(平成19年)日本を代表する建築家丹下健三の広島ピースセンターと共に、第二次世界大戦後の建築物として初めて日本国の重要文化財(建造物)に選ばれている。
禅とキリスト教神秘思想[編集]
実践[編集]
ラッサールが宗教的な枠組みを一歩踏み込んで、坐禅を自らの宗教生活に取り入れるようになったのは、津和野にある永明寺での1943年(昭和18年)の参禅会がきっかけだった[23]。ラッサールの禅に対する関心の因って来るところは、キリスト教伝道に際してまず日本人の伝統的な霊性を知る必要性があったからであり、いわゆる「人を見て法を説け」というわけである[27]。
しかし体験的に禅の精神に触れてみると、ラッサールは黙想や観想といったキリスト教的修徳法と共通するものをそこに感じ、完全な自己放棄によって神と人との合一を目指すキリスト教神秘主義思想にいう注賦的観想(受動的な脱魂状態に至って神のビジョンを直接受け取ること)への精神的な準備として、坐禅が非常に効果的だと思うようになっていった[28]。長きにわたる宗教的伝統によって高度にマニュアル化された禅の修法が[29]、物質的な豊かさに振り回される現代人にとっては優れた実践的瞑想法だと思ったのである[19]。
1954年(昭和29年)に世界平和記念聖堂が完成した後、1956年(昭和31年)にまず福井県小浜市にある発心寺の原田祖岳(1871年-1961年 / 曹洞宗大学〈現・駒澤大学〉教授)のもとで、のちには原田祖岳の法系を受け継ぐ山田耕雲(1907年-1989年 / 1954年〈昭和29年〉に結成された曹洞宗系の宗教法人三宝教団第2祖)の指導を仰いで、本格的な修行に入った[23]。
1961年(昭和36年)になると、広島市の郊外可部町南原峡に禅道場「神冥窟」を建設。ラッサールは自ら参禅しただけでなく、信者にも接心を指導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坐禅の進め方や食事法は禅仏教の伝統的な作法を守って行なわれたが、道場での一日は早朝のミサから始まって夜のお祈りで終わるように完全にキリスト者のそれであり[28]、ラッサールの禅に対するアプローチは理論的な意味においてもあくまで方法論的な捉え方であって、そこには神学的に言って、仏教とキリスト教との間の教義的なシンクレティズム(諸宗混交)といった要素は全くなかった[30]。それゆえラッサールは自らの禅修行において、公案という方法だけは取り入れなかったのである[28]。しかしラッサールの禅修行への取り組みは真剣そのものであり、のちには世界平和記念聖堂の地下聖堂で坐禅を組む姿も目撃されている[23]。
理論[編集]
キリスト教には口祷や念祷のほかに、黙想や観想などのいくつかの確立された瞑想法があるが、通常そこにはイエス・キリストなり聖母マリアの事績などの明確な志向対象がある。キリスト教は愛を説き、愛には対象が必要であるからである[31]。それに対して仏教は一切無常を説いてそこに慈悲はあるが、人間の積極的な行為の実効性を認めない[32]。仏教にいう見性とは己の仏性を見つめ直すことであって、自己を超越した他者としての神を見ようとすることではないからである。禅定とは認識を万有と一致させ(悟り)、輪廻転生する生命の循環的な在り方から離れて(解脱)、万有そのものと化そうとすることである(涅槃)[33]。
覚者は自己を限られたものとしているあらゆる「とらわれ」を廃して無我の境地に至り、さらにはその無の境地に至ろうとする己の作為さえをも滅却して、論理的な階梯を超えた解脱に至ろうとする[34]。禅宗が時に背理的な矛盾を含んだ公案という方法を用いるのもそれゆえであり、人が人として捕われている所与(キリスト教的に言えば原罪)である条理や情理を破脚し、日常的な理性や感情を棄却して無念無想の瞑想状態に至り、その認識を通して絶対的な自由の境地である涅槃に達しようとするのである[35]。その消極的な能動性を称して解脱という。
対して人間が原罪のうちにあるとするキリスト教にとっては、そのような自らの立ち位置に仏性(キリスト教的に言えば神性)を見出すことは神を見ること(見神)ではない。キリスト者は祈りや召命に基づいた行為を通して神の愛を信じ、神の愛によって唯一永遠なる神とひとつとなることで初めて永遠の命を得られるとするからである。愛によって神と人格的に結びつかない行為や祈りは如何なるものであっても結局何ものでもないのである[36]。神の愛による救済という超自然的神秘体験を可能にするためにこそ、神の呼びかけに答える応答性を神から求められているのである[37]。その積極的な受動性を称して恩寵という[38]。
ラッサールが禅修行に求めた無念無想も、神との合一を妨げる神と個我の間にある障害を取り除こうとしたからであって、神の意志をより直接的に頂くための準備として無私を得ようとしたのである。ラッサールは、悟りとは自己を完全に放棄して存在そのものと一体となる自然的神秘体験であって、悟りそのものは目標ではなく出発点であるという[28]。一方で、道元は繰り返し無常を強調し、単なる方法論としての「習禅」を退ける[39]。日常生活のすべてが禅定に至る禅修行とみて見性成仏を否定し、坐禅こそが禅定の修証であるとする只管打坐を説くのである[40]。
仏教者はあくまで何ものにも囚われない唯我独尊的な解脱を自立と捉えて、自己確立された空(くう)という無我の理想状態を解脱ないしは涅槃といって尊ぶ。対してキリスト教神秘主義にいう無私とは、全き神の愛を受け取るための自己放棄であり、あくまで究極的な有(ゆう=在りて有るもの)である神[41]の永遠性を、自らの場に受け容れるための空(くう)なのである。仏教的な悟りからすると、キリスト者が言う恩寵のような、何者かから何ものかを期待し期待される条件設定(契約)こそが解脱を妨げる「とらわれ」であって、万有との合一を目指していまここにある自己の他には何ものにも、つまり神にも自己を超越する神の観念にも捕われない現前する絶対的な空(くう)をこそ理想状態として座り続けるのである(只管打坐)[42]。
キリスト教には始りがあって終わりがある明確で直線的な時間とそれを超えた存在としての「有」があるが、仏教には循環する円環的な時間とそれを超えた場としての「無」しかない[43]。キリスト教と禅仏教の両者の間に究極の実在をどのように捉えるかの違いがあるにせよ、無念無想を通じて禅定に至る坐禅の行法と、十字架のヨハネの言う「魂の暗夜」をくぐり抜けて神人合一に至る神秘思想[44]との間に共通点を見出し、しかもそれを神学理論としてではなく、実際に坐禅を行なって自らの宗教生活の中において実証しようとしたところに、ラッサールの独創性があったと言える[45][46]。
※キリスト教世界と仏教世界にある宗教的な認識の違いを例示するためのものであり、上記#理論の記述に絡めて歴史上の人物であるイエス、マリア、テレサ、および釈迦が実際に画像のようであったと主張するものではない。
晩年[編集]
広島市郊外可部町南原峡にあった「神冥窟」が南原ダム建設に伴って取り壊されると、1962年(昭和37年)に上智大学に戻り、1969年(昭和44年)には東京都西多摩郡檜原村小岩に「秋川神冥窟」を建てる[19]。90歳で体調を崩すまで、そこで毎年30回ほどの接心を行なった[2]。ラッサールは日本国内外で禅とキリスト教の接合を目指した論文や著作を発表しており、そのためカトリック教会内部からは快く思われず、高位聖職者からの異論を受けることもあったが[23]、キリスト教カトリシズムの現代化に基づいて諸宗教との相互理解に積極的に踏み出した第2バチカン公会議(1962年-1965年)以降、そのような批判も下火となり、ラッサールは日本国内だけでなく日本国外でも広くキリスト教関係者に対して参禅を勧め、自ら指導するようになってゆく[2]。近年では、欧米に広く禅思想を紹介した鈴木大拙以来の「ZENブーム」も手伝って、西洋における禅の実践理論的パイオニアとして、その活動がむしろ積極的に評価されるようになるのである[47]。1993年(平成5年)にはスイスのイエズス会修道院のなかに、ラッサールの名を冠した参禅のための施設「ラサール・ハウス・センター (Zentrum Lassalle Haus)」[注 13]が建設された例もある。
齢を得てもなお禅の指導や講演活動に精力的に勤しんでいた最中、ラッサールはドイツ滞在中に体調をくずし、聖母マリアの巡礼所のあるドイツ・ヴェストファーレン州ケーヴェラーで、癌による大きな腫瘍の摘出手術を受けた。しかしその後も体力が戻らず、ミュンスターにあるイエズス会の修道院で療養生活を余儀なくされ、日本への帰国を医師から止められてしまう[2][48]。1990年(平成2年)7月7日に死去。91歳にて没。
かつて「骨が日本の土となるまで」とまで思い定めた故人の日本への強い想いが考慮されて、ドイツで初めてイエズス会士の火葬が許され[2]、その遺骨の一部が広島の世界平和記念聖堂の祭壇左脇に納められている。
禅の修行への傾倒にみられるように、ラッサールは己を厳しく律しながら決して信念を曲げず、世界平和記念聖堂の建設と禅をキリスト教に接合するという大事を為したが、ラッサールに接したことのある日本人の中には、そのことよりもその人柄の方を却って慕い、金髪[49]で長身痩躯の日本人・愛宮真備の想い出を語る人は少なくない。その口癖は「ま、良いでしょう」であったという[50]。
主な著作[編集]
- 『モスコーかローマか?』中央出版社、1951年。ASIN B000JBCAPS。
- 『真理と恩恵』 上・下、エンデルレ書店、1959年。ASIN B000JAOR5U。
- 『真理と恩恵〈第1部〉自然宗教—カトリック宗教学』(改訂版)エンデルレ書店、1966年。ASIN B000JBED4E。
- 池本喬・志山博訪 訳『禅 - 悟りへの道』理想社、1967年。ASIN B000JA8EPE。
- 上智大学東洋宗教研究所監修 編、柴田健策 訳『禅とキリスト教』春秋社〈シリーズ宗教と経験 1〉、1974年。ASIN B000J9BOQ6。
- 保田史郎 訳『神体験への道としての禅冥想 - 神秘的祈りへの手引』エンデルレ書店、1975年。ASIN B000J9AF8Y。
- 柴田健策 訳『禅と神秘思想』(新装版)春秋社、1994年。ISBN 4-393-28112-8。
映像資料[編集]
- 『ふるさと発シリーズ被爆61年「平和の鐘よ 鳴り響け-大聖堂建設・ある神父の物語-」』NHK広島放送局制作、2006年8月6日放映(広島県内向け)。NHK広島放送局 平成18年(2004年)・夏「ヒロシマ」特集番組、2010年9月23日閲覧。
脚注[編集]
注釈[編集]
- ^ 当時の山田節男広島市長から1968年(昭和43年)4月1日に広島名誉市民として顕彰された。「広島市名誉市民条例」が1962年(昭和37年)に制定されてから4人目であり、帰化人や外国人としては初めての受章である(石丸紀興1988、226頁)。昭和43年4月15日付の広島市報第264号に掲載された公告はその理由として、世界平和記念聖堂建設と日本国内外での募金活動、およびヒロシマの実情を広く知らしめるローマ、ドイツ、フランス、スイス、アメリカ、アルゼンチン、ブラジルなどでの数百回に及んだ海外講演活動のほか、戦前戦後にかけての上智大学、広島陸軍幼年学校、広島高等師範学校、広島文理大学でのドイツ語教育、さらにエリザベト音楽大学、広島学院中学校、広島学院高等学校設立への尽力またそこでの教育、その他教誨師としての活動、広島日独協会での交流活動、広島市郊外に禅道場を建設し実践や著作研究において仏教及び神道とキリスト教の相互理解を進めたことなど、10項目にわたってその功績をあげている。
- ^ 上智大学の創立者の一人で中心的メンバーであったイエズス会士ヨゼフ・ダールマンがドイツ人であったことによる。日本のイエズス会は1935年(昭和10年)2月5日から1949年(昭和24年)2月15日までの間、ドイツのイエズス会西管区に所属していた。ドイツ西管区より分離され準管区として独立するのは1949年(昭和24年)のことであり、1958年(昭和33年)に日本管区に昇格した。石丸紀興1988、19、21頁。
- ^ 開設当初の名称は「上智カトリックセツルメント」だったが、官憲への配慮からまもなく「カトリック」の文字が外された。その後「上智セツルメント」は1933年(昭和8年)に荒川区町屋に移転したのち、1955年(昭和30年)8月には社会福祉法人上智社会事業団「上智厚生館」となって2010年現在に至っている。社会福祉法人 上智社会事業団 公式HP-沿革、2010年9月23日閲覧。
- ^ イエズス会員は氏名のあとに、S.J.と記す慣習があり、S.J.とはSocietas Jesuの頭文字。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12月号 2004年 (PDF) の5頁には、聖堂は150m2とあるが、石丸紀興1988の14頁には「建物は、すべて木造で、聖堂が80坪、司祭館が約50坪、伝道士宅及び家政婦宅(両者を合わせて伝道士館と呼んでいた)が約20坪であった」との記述がある。
- ^ 石丸紀興1988の23頁に拠った。 ジョン・ハーシー1949 の16頁では1.3kmとしているが、同書 vi の地図は爆心地を原爆ドームとしており、原爆ドームは真の爆心地と考えられている島病院より約100m北西に位置している。なお同書93頁にもその旨の記述がある 。
- ^ 石丸紀興1988の14、23-24頁によれば、当時教会に居たのは4名の神父たちの他、竹本神学生、深井渙二教区長秘書、星島伝道士とその家族、家政婦の村田夫人とされ、被爆時広島県庁に出勤していた星島父子を除いた星島伝道士の家族と幼稚園の保母2名が倒壊した建物から救出されている。星島伝道士の家族は一時行方不明となったものの、その後東練兵場に避難していたことが判明。しかし深井秘書は避難の途中で行方不明のままとされている。司祭館の中に居た4名の神父たちのうち無傷だったのはシースリックのみで、ラッサール、クライゾルゲ(帰化名:高倉誠)、シッファーの3名が負傷し、ガラスで左耳の上を切って出血多量に陥ったシッファーとラッサールが重傷だった。ジョン・ハーシー1949の34頁には「教会書記の深井さんは、宣教師館の二階の自室の窓際に立って、爆心の方向をむきながら泣いているのだ」との記述もあり、同書36頁によると深井さんは司祭たちと避難する途中ひとり炎の中に引き返し、同書72頁にはその後行方不明になったとある。
- ^ 石丸紀興1988の43頁には「一九四七年十二月(一説には秋)、日本に帰国したラッサール神父は、本格的に聖堂建設を実現に移すべく行動を開始したのである」との記述がある。
- ^ a b 「世界平和記念聖堂」は建設当初「廣島平和記念聖堂」と称していた。「世界平和記念聖堂」という正式名称が確定するのは、献堂式を間近に控えた1954年(昭和29年)7月23日のことだったが、関係者の間では当初より「世界平和記念聖堂」との合意があり、「廣島」の名を冠したのは募金活動を進めやすくするためだったという。石丸紀興1988、169-173頁。
- ^ 石丸紀興1988の223-224頁によれば、「設計代を初め頃いっぺんだけ差し上げましたが、その後は村野先生が何時も断りました」(愛宮神父による談)とあり、その額もわずかであったらしい、という。また、設計監理料はラッサール神父が現場で住み込みの担当者に直接渡したとの記述がある。
- ^ この「ちょっと変わった円屋根」のいきさつは、石丸紀興1988の44-46、116-117頁に詳しい。世界平和記念聖堂#建築意匠も参照。
- ^ 石丸紀興1988の144頁には、24から30万本ほど現場で作ったとある。
- ^ スイスツーク州にあるイエズス会の修道院の敷地の中に、参禅道場と宗教的セミナーのために新たに建てられたもの。設立者のベルギー人のイエズス会士ニコラウス・ブランチェン(禅仏教師名-悟雲老師)は、ラッサールの紹介で山田耕雲に師事し、のちに接心を指導することを正式に認可された「老師」の資格を持っている。設計はアンドレ・シュトゥーダー。swissinfo.ch 世界へ発信 スイスのニュース、 2010年9月23日閲覧。
出典[編集]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4月号 2004年 (PDF) 、4-5頁。
- ^ a b c d e f g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3月号 2004年 (PDF) 、6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3月号 2004年 (PDF) 、4頁。
- ^ a b c d e f g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3月号 2004年 (PDF) 、5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6月号 2004年 (PDF) 、6頁。
- ^ カトリック広島司教区HP「広島教区・略史」、2010年9月30日閲覧。
- ^ ジョン・ハーシー1949 、16頁。
- ^ a b 丹下健三・藤森照信 2002、130頁。
- ^ ジョン・ハーシー1949 、15、26頁。広島記念聖堂HP 「世界平和記念聖堂の被爆した十字架」も参照。2010年9月23日閲覧。
- ^ 丹下健三・藤森照信 2002、130頁による。書式も同書のまま。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6月号 2004年 (PDF) 、3頁。
- ^ a b c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7月号 2004年 (PDF) 、4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5月号 2004年 (PDF) 、3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3月号 2004年 (PDF) 、3-4頁。
- ^ a b c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7月号 2004年 (PDF) 、3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12月号 2004年 (PDF) 、6頁。
- ^ 丹下健三・藤森照信 2002、130頁による。なお同書からの引用に際して、原文の歴史的仮名遣いを現代仮名遣いに改めた。
- ^ a b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12月号 2004年 (PDF) 、3頁。
- ^ a b c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11月号 2004年 (PDF) 、6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9月号 2004年 (PDF) 、4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10月号 2004年 (PDF) 、3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4月号 2004年 (PDF) 、4頁。
- ^ a b c d e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創刊号 2004年 (PDF) 、4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4月号 2004年 (PDF) 、5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9月号 2004年 (PDF) 、4-5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10月号 2004年 (PDF) 、6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4月号 2004年 (PDF) 、6頁。
- ^ a b c d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創刊号 2004年 (PDF) 、5頁。
- ^ 大法輪閣1997 鈴木格禅「道元のさとり」102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7月号 2004年 (PDF) 、8頁。
- ^ ルカによる福音書「親切なサマリヤ人」
- ^ ベルクソン1979「道徳と宗教の二つの源泉」446頁。
- ^ ベルクソン1979「道徳と宗教の二つの源泉」444頁。
- ^ 大法輪閣1997 松濤誠達「釈尊のさとり」7-8頁。
- ^ 大法輪閣1997 西村惠信「臨在禅のさとり」74-76頁。
- ^ ヨハネによる福音書「わたしは葡萄の木」
- ^ 旧約聖書 ヨブ記 第42章1節-6節
- ^ 新約聖書 ヨハネの黙示録 第21章1節-8節
- ^ 古田 紹欽『禅とは何か』日本放送出版協会〈NHKライブラリー〉1996年、193頁。「坐禅は習禅にはあらず、大安楽の法門なり、不染汚の修証なり」(道元『普勧坐禅儀』)。
- ^ 大法輪閣1997 鈴木格禅「道元のさとり」99-101頁、106-107頁。
- ^ 旧約聖書 出エジプト記 第3章14節
- ^ 大法輪閣1997 鈴木格禅「道元のさとり」99-101頁。
- ^ 大法輪閣1997 梶山雄一「般若経とさとり」19-25頁。
- ^ アンリ・セルーヤ1975、114-118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7月号 2004年 (PDF) 、6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12月号 2004年 (PDF) 、10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創刊号 2004年 (PDF) 、6頁。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7月号 2004年 (PDF) 、5頁。
- ^ Leben aus der Mitte、ドイツにある禅道場のホームページにあるフーゴ・ラッサールの肖像、2010年9月23日閲覧。
- ^ 世界平和記念聖堂 献堂50周年ニュース vol.1 5月号 2004年 (PDF) 、5頁。
※ この版における記述では全体的に石丸紀興1988を、また#理論では鈴木大拙2004を全般的に参照したので、ここでは特に脚注化を行っていない。
参考文献[編集]
- ジョン・ハーシー 著、石川欣一・谷本清・明田川融 訳『ヒロシマ』(増補版(2003年))法政大学出版局、1949年。ISBN 4-588-31612-5。
- 丹下健三、藤森照信『丹下健三』新建築社、2002年。ISBN 4-7869-0169-5。
- 石丸紀興『世界平和記念聖堂』相模書房、1988年。ISBN 4-7824-8804-1。
- 大法輪閣編集部 編『さとりとは何か』大法輪閣、1997年。ISBN 4-80-461130-4。
- アンリ・ベルクソン 著、森口美都男 訳、澤瀉久敬 編『ベルクソン』中央公論新社〈世界の名著 64〉、1979年。ISBN 4-12-400674-8。
- アンリ・セルーヤ 著、深谷哲 訳『神秘主義』白水社〈文庫 クセジュ〉、1975年。
- 鈴木大拙 著、坂東性純・清水守拙 訳『神秘主義-キリスト教と仏教』岩波書店、2004年。ISBN 4-00-0233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