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o Jung Gil
8 h ·
<다시,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워라>
5월 6일-8일 <김지하시인 1주기 추모문화제>
에서 있을 7일 토론<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의 저의 토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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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워라>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녹색불교연구소 소장)
(IPCC 6차 보고서, 2040년에 도달할 1.5도의 비극)
지난 달인 2023년 3월 20일 IPCC 6차보고서는 이대로 가면 지구 평균기온은 2040년에 티핑포인트인 1.5℃에 도달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는 3년전 2050년에 도달할 것이라는 예측보다 10년 앞당겨진 것이다. 인류가 위기를 해결할수 있는 기회가 10년 줄어든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인류는 2040년이후는 어떤 삶이 펼쳐질까? 이 위기 다음의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이제까지 인류는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것이며, 시간적 차이를 두고 모든 국가는 풍요로운 유토피아를 이룰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본과 돈, 권력이 행세하는 소수의 자본가와 독재권력에 항거하여 민중이 중심이 된 평등한 세상이 되면 시대의 모순은 다 해결되고 아름다운 진보의 미래가 펼쳐질 것을 믿었다. 80년-90년초까지 한국사회는 계급모순이나 민족모순이 해결되면 사회주의나 최소한 북유럽 수준의 풍요로운 사회주의 비슷한 것을 희망의 미래로 상상했다.
그러나 고르바쵸프가 몰타에서 자본주의와의 경쟁을 폐기하고, 전지구적인 위기로서 환경생태문제를 주목하며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선언했다. 급기야 1990년 직후 동구와 소련이 붕괴하는 사건을 목도하면서 변혁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이후 92년 브라질 리우환경회의는 <지속가능할 발전 ESSD>이라는 세계적 화두를 던졌다. 이는 인류가 2-300년간의 이제까지의 진보와 성장, 발전이 지속불가능한 발전임을 선언하고 이러한 발전 페러다임의 패절과 강력한 전환을 요구하는 사건이었고, 의제21( Agenda21)이라는 세계적 변혁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온나라의 발전방향의 전환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동구가 붕괴하기 시작한 1990년, 그리고 1992년 리우환경회의 사이에, 1991년 5월 5일 시인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우라”는 사자후는 당시 전지구적인 전환의 위중한 시기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겐 당황스럽고 이해할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과거 동지였던 많은 사람들은 이를 배신이라고, 섬망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면 되는 걸까?
(생명위기의 본질과 인간의 어리석음)
오늘날 인류에게 닦친 심각한 문제는 계급문제나 민족문제를 압도하는 기후위기로 대표되는 환경위기, 생태위기와 생명위기이다. 한때는 그저 여러문제중 하나인 환경문제의 일부라고 생각해지만, 이제 전지구적인 페러다임의 문제이며, 인류의 총체적인 문명전환을 강제하는 메시지라는 것은 30년이 지난 지금은 상식이 되었다.
그러면 생태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자본주의(청색)든 사회주의(적색)이든 결국 기후위기를 초래하게 만든 동일한 원인제공자로서, 그놈이 그놈인 쌍둥이일 뿐이라고 비판하며 생태주의(녹색)가 등장했다. 그래서 생태적 재의식화로 전환사회를 구성하지 않으면 안될 시대임을 강변하게 되었다. 80년-90년대의 진보라는 페러다임이 생태위기 앞에 과연 그것이 진정한 진보였는지를 돌아보게 되었고, 나아가 역사가 그렇게 앞에서 뒤로 직선적으로 상승 발전하는 것인지도 의심을 품게 되었다.
1991년 바로 그때가 인류에게 전환의 각성을 요구한 안팎의 변곡점이었다. 바로 그때 이를 예감한 김지하는 민주화운동을 했던 옛 동지들에게 과거의 인식을 패절하고 생명운동의 전환을 강조하며 1991년 5월 5일 죽음의 굿판을 때려지우라고 주장했다. (김지하, 김종철(녹색평론 1991.10월창간) 두사람이 당시 새로운 페러다임으로서 생태주의, 생명운동으로의 전환을 역설했다.)
기후위기를 앞두고 자본주의든 사회주의자든 국가마다 일정한 시간간격을 두고 성장과 풍요를 추구했으며, <생산력의 고도화>가 진보의 척도라고 생각했던 과거를 다시 복기해 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고전경제학이든 사회주의경제학이든 동일하게 <지구의 자원는 무한하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했다. 이것은 증명이 필요가 없는 당연한 공리였다. 이를 기반으로 무한성장주의, 무한팽창주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동일한 전제였다. 무한한 자원의 경쟁적 전취, 채취가 바로 발전이었다. 유럽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선진국들의 현재의 풍요는 아프리카, 아메리카와 아시아지역의 자원을 빼앗아 자기나라에 쌓아 이룩한 찬란한 문화였고, 그 나라에서 강제로 끌고간 노예등의 값싼 노동력착취를 기반으로 이룩한 풍요였다. 더욱이 과학기술의 가속적인 발달로 자연의 개조능력은 폭주하면서 무한한 채굴, 가속적인 채굴을 하며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포괄하는 산업사회의 풍요를 이루어왔다. 그리고 가난한 나라들을 향하여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따라오라고 말하며 GNP,GDP 서열을 매겨 성장을 유도해 왔다.
(무한성장주의, 무한채굴주의. 죽임의 사회)
그러나 위기를 통해 우리가 깨달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은 지구는 무한하지 않은, “하나뿐인 지구(The Only One Earth / Our Sole Earth)”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무한한 자원채굴은 불가능하며, 무한한 물질생산은 불가능하고,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는 지구자원의 정화능력 재생능력을 넘어서는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 <생산력의 고도화>를 그동안의 진보 페러다임이라고 생각해온 생각은 허상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지구상의 인간만이 유일한 의미있는 중심이라는 인간중심주의가 심각한 문제의 또 다른 원인임도 깨닫게 되었다. 뭇생명과 비인간 존재들은 그저 인간의 식량으로, 지배 정복되고 이용되어야 할 존재로 생각했던 것이 오늘날 생물종의 멸종을 초래하고 자연과의 조화와 균형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자원은 미래세대의 것이며 현세대는 그것을 그저 빌어왔을 뿐이라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정의는, 현세대의 인간들간의 협의만 주창했던 민주주의도 비인간존재와 미래세대의 의사까지 반영한 의사결정으로 확장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인간의 몸의 조화와 균형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의 번영을 추구하여 무한증식하는 암세포처럼 인간은 바로 자연과 뭇생명과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지구의 정화수준을 벗어난 무한정한 쓰레기와 오염을 유발해왔던 것이다. 또한 현세대의 북반구 국가의 풍요는 오염을 가난한나라에 떠넘기거나 미래세대로 떠넘기며 후손들에게 피해를 전가시키며 누리고 있는 번영, 성장임을 깨닫게 되면서, 이러한 성장, 이러한 진보와 발전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기후위기는 전환의 시그널)
여기에 아마존의 밀림이 “파괴되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다”, “네가 죽든말든 나는 관계없다”는 “너와 내가 구분하고 단절되어있다”는 가르고 나누는 구분의식이 경쟁사회를 구성하는 근본이 되며 이는 성장사회의 보편적인 사회윤리가 되었다. 경쟁은 곧 너와 나를 가르고 적과 우리편을 가르고, 우리편의 단결을 위해 상대를 극단적으로 배제하는 이분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경쟁은 필연적으로 승리와 패배를 초래한다. 나의 성공, 승리를 위해서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누군가는 패배해야한다. 인간과 인간끼리 경쟁을 통해 서로를 죽여나가는 사회가 결국 인간이 자연을 죽여나가는 죽임의 사회를 구조화했고 결국 인간 자신이 죽어가는 죽임의 문화가 보편화된 것이다. 이러한 죽임의 문화가 오늘날 약한 고리로서 기후위기로 등장한 것이다. 생태위기시대의 우리의 깨달음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구분하고 가르고 나눌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 촘촘히 연결되어있으며, 이러한 연결된 존재로서는 모든 개인과 사건은 우주적으로 연결된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탄소문제가 심각해져 탄소배출만을 생각하는 것, 기후문제만 집착하는 것을 환경운동에서는 “탄소환원주의” 또는 “기후환원주의”라고 비판한다. 실제 탄소나 기후만 해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페러다임이 만든 수많은 문제중에 약한 표층을 뚫고나온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래서 기후위기는 총체적인 죽임의 사회에 변화를 강제하는 시그널이자 메신저로 봐야 한다는 것이 기후위기운동가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죽임의 사회를 살림의 사회로)
2035년 1.5도를 막을 수 없으면 인류는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위기이자, 절멸로 추락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경고한다. 이러한 상황에도 무한성장과 발전, 직선적 진보의 추구는, 벼랑끝으로 가는 줄 모르고 무리지어 달려가는 어리석은 동물떼들 아닌가? 전지구적인 ‘죽음의 굿판’아닌가. 누군가 방향을 틀어야 하지 외쳐야 하지 않는가.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계급모순과 민족문제가 심각하지만, 그것은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안에서 의자를 평등하게 배치하는 것보다 침몰을 우선 막는 것에 집중할수 밖에 없지 않을까? 뜨거운 물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개구리처럼 1990년대 우리들은 서서히 죽어가는 이러한 거대한 죽음을 인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지하는 80년 초부터 죽임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그의 목소리는 갈수록 절규로 변했다. 92년 인류는 이대로 가면 안된다고 7만명이 넘는 유엔인간개발회의를 통해 발전과 성장에 대해 방향 전환을 강변했다. 우리는 그저 다양한 문제중에 하나인 환경문제가 심각해졌구나하는 정도의 인식에 머물러있을때, 그는 7-80년대의 동지들을 향해 새로운 페러다임 전환을 절규했던 것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가 외쳤던 죽음의 굿판속에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이제야 죽임의 문명을 살림의 문명으로 개벽되어야 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다시,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워라)
이념이 아니라 생명에 주목하라고 말하는 그의 절규, 단순한 평등이 아니라 서로 모심을 통해 평등이 완성됨을, 뭇생명을 모시는 민주주의를 새로운 제기를, 외부의 산업화에 포섭된 인간 내면의 산업화를 극복해야 함을, 사회변화는 결국 인간의 자기변화와 함께 해야한다는 각성을, 인간과 모든 존재들이 큰 하나님을 모시는 한울임을 깨닫는 영성, 확장과 지배, 정복이라는 남성성에서 관계과 과정, 돌봄과 협동이라는 여성성의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30년이 지난 이제야 모두가 하나씩 깨닫게된 것이다.
절박한 기후위기는 전인류에게 공포와 두려움이 되어 희망을 말하기 어렵지만, 이러한 위기를 인지한 시인은 파국과 절멸, 공포와 두려움이 아니라 신명과 풍류로 새세상이 열리는 차원변화의 세계임을 강조했고 이를 준비해야함을 강변했다. 혁명, 변혁이 아니라 다시 개벽의 희망을 말하고 있는 그의 사상은 위기로 암울한 이때 정말 눈물어리게 고맙고 소중한 희망의 메시지가 되고 있다.
위기의 시대, 많은 사람들은 지금이 바로 죽임의 굿판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30년전 그것을 알아차리고 알린 사람은 소수였고 그중 맨 앞에 선 사람중에 하나, 광야에서 많은이 들의 돌을 맞으며 외치는 예언자는 바로 김지하였다. 이제야 우리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죽여나가는 “죽음의 굿판”속에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우고” 살림의 개벽세상을 위해 이 위기를 전환의 기회로 만드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