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부조리 앞에서] 시적 정의
현실에서는 선인이 고생할 수도 있고 악인이 잘 살 수 있다. 노자 도덕경에서 "天網恢恢 疎而不失"(임위편 73: 하늘의 법망은 넓어서 촘촘하지 않고 엉성하지만 거르지 못하거나 놓치는 법이 없다.)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일종의 시적 정의(poetic justice)일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이나 선비나 신자는 현실에서 정의가 이루어지 않는 역사적 애매성 앞에서도 이 시적/영적 정의를 믿고 끝까지 버틴다. 그래서 8년 전에 쓴 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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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經(문학과 음악)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유학을 우습게 알지 말라 3
1.
유교 五經의 시작은 공자가 편찬한 옛 시들로 이루어 진 詩經이다. 공자는 311편의 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노송 경편’에 등장하는 ‘사무사’ 구절을 인용하여 “思無邪”라고 했다.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역시 공자는 술이불찬(述而不贊)의 자세,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태도로 낙빈 속에 겸손하면서도 당당히 인간성의 가치를 믿고 사신 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와 음악의 대가였다.
자공이 말하길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으며,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께서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되 [도를] 즐거워하며, 부유하되 예절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못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자공이 “詩經에서 ‘곧 잘라 놓은 듯, 곱게 갈아 놓은 듯하며, 쪼아 놓은 듯, 갈아 놓은 듯하구나!’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수양에 수양을 더하는 것]을 말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공자께서는 “賜[자공의 이름]야,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경을 논할 만하구나. 지나간 것을 일러주니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아는구나!”라고 말씀하셨다.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論語 <學而篇>, 詩經 <衛風篇>)
상아를 절차하고 옥돌을 탁마하듯이, 우리는 사특함이 없는 양심을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자르고, 줄로 쓸고, 쪼고, 곱게 갈아서 빛나게 해야 한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늘 나서기를 좋아했던 자공은 이제 비로소 깨달았다. 더 다듬어야 한다. 가난 속에서도 도를 즐거워하는 마음, 부자라도 타인을 대할 때 예의로 대하는 자세는 절차탁마하듯이 매일 이루어가는 작업이다. 빈부보다 자세의 문제이다.
2.
성경을 잡고 펼치면 중간 부분에 시편이 나온다. 내가 가진 개역개정은 구약이 1331쪽, 신약이 423쪽, 합 1754쪽이라 중간이 874-875쪽이다. 시편 97-101편이 실려 있다. 98편 1절은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이다.
조상의 신앙 체험과 고백이 나이테처럼 새겨진 옛 시편과 나의 고민, 항의, 감사, 확신, 찬양이 들어간 새 노래가 어울릴 때,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에 대한 논리적 이해와 법적 정의를 넘어, 시적 정의(poetic justice)가 포함된 통전적 세계 이해로 넘어간다.
시편을 읽지 않으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도 어릴 때부터 시편을 암송하고 읊조리고 묵상하고 노래했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에도, 고통 중에서도 피를 토하면서도 시편 22편을 아람어로 노래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1절)
......
......
......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26절)
3.
물론 루터는 1546년 2월 17일 죽기 하루 전 시편 31:5을 암송했다. 공동기도문에서 임종 때 하는 기도였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4.
시와 문학과 음악은 하나님의 침묵과 인간사의 부조리 속에서도 ‘사무사’의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정의를 믿고 외치고 노래하게 한다. 악인이 승리하는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세상과 교회에 대한 절망 속에서도, 공의와 소망을 놓치지 않는 것이 시인의 자세이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나는 매일 죽는다.”는 자세요, 윤동주의 말을 빌리면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밤”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예민한 良心을 가지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仁과 禮의 태도이다. 그때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思無邪)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주어진 길"(道)이다.
1941년 11윌 20일, 윤동주 나이 스물 셋,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고민하던 청년. 시경과 시편을 제대로 공부한 그에게는 시대는 암울한 밤이었지만 안에는 빛나는 양심이 있고, 밖에는 우러러 볼 하늘이 있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