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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시대의 지구유학
조성환 | | 2022-07-07 (목) 09:07
[보프의 지구의 울음과 켈러의 생태적 애통. 이것은 유학적으로 말하면 ‘측은지심’에 해당한다. 다만 지금과 같은 생태위기 시대에는 측은의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들, 심지어는 행성 지구(planet Earth)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되었을 때 아픔이 행성적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고, 거기에 이르렀을 때 ‘생태적 애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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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유학을 현대화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양명학자 정인재 교수님께서는, 『대학』의 팔조목에는 ‘사회’ 부분이 없으니까 제가(齊家)와 치국(治國) 사이에 ‘화사(和社)’, 즉 “사회를 화합시킨다”를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뒤로 교토포럼에서 공공철학을 접하면서 ‘화사(和社)’가 의미상으로는 ‘공공(公共)’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지구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지구유학(planetary Confucianism)’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기후변화 시대에 유학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인류세 시대에 유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는가? 여기에 걸맞은 명칭이 ‘지구유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던 지구유학에 뭔가 구체성이 입혀지기 시작한 것은 신학자 캐서린 켈러와의 만남 덕분이었다. 그녀가 쓴 『묵시적 종말에 맞서서』(한성수 옮김)에 나오는 “생태학적 애통(ecological grief)” 개념이 마치 『맹자』에 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켈러는 “애통해 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라는 「마태복음」 5장 4절을 인용하면서, “오늘날 대량멸종과 지구온난화 시대에는 ‘생태학적 애통’이라는 이름의 정신건강 조사를 하는 범주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 생태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가 쓴 『지구의 울음(Cry of the Earth), 가난한 자의 울음(Cry of the Poor)』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났다.
보프의 지구의 울음과 켈러의 생태적 애통. 이것은 유학적으로 말하면 ‘측은지심’에 해당한다. 다만 지금과 같은 생태위기 시대에는 측은의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들, 심지어는 행성 지구(planet Earth)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되었을 때 아픔이 행성적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고, 거기에 이르렀을 때 ‘생태적 애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측은지심과 더불어 사단(四端)의 하나인 ‘사양지심(辭讓之心)’도 생태적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가령 퇴계는 사랑하는 증손자가 젖을 못 먹어 목숨이 위태로울 때,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여종을 보내면 살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여종이 낳은 갓난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때 퇴계가 한 말이 『근사록』에 나오는 “자기 자식을 살리기 위해 남의 자식을 죽여서는 안 된다”였다. 퇴계는 이 말씀에 충실했고, 결국 증손자 창양은 죽고 말았다(『안도에게 보낸다』). 이 이야기를 생태적 차원에서 해석하면, 다른 생명을 위해 자기 생명을 ‘양보’하는 ‘사양지심’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퇴계학파의 아버지를 둔 최제우가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두 여종을 각각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은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기에게 주어진 특권을 양보하고,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한 것이다. 그리고 최제우의 제자 최시형이 “만물이 하늘님이다”고 한 것은 ‘사양지심’을 인간과 인간 사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non-human) 사이로까지 확장하라는 메시지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퇴계 이황이 추만 정지운과 같이 그린 「천명도(天命圖)」는 가장자리가 흰색과 검은색의 반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반절은 흰색의 얇은 띠로, 나머지 반절은 검은색의 얇은 띠로 이루어져 있고, 양자가 서로 갈마 들어가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른바 ‘천원(天圓)’을 도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지방(地方)’을 도상화한 네모난 검은 부분이 있다. 이 중에서 ‘천원’ 부분을 음양이 만들어 내는 대기(大氣)로, 지방 부분을 생물체들이 살아가는 지표(地表)로 각각 해석하면, 「천명도」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생물권(biosphere)’ 내지는 ‘임계영역(critical zone)’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내부에 인간과 만물이 위치해 있는 것은 이 임계영역 안에서만 생물이 살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서 「천명도」의 정 가운데에 퇴계가 가장 중시한 ‘경(敬)’의 덕목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활동이 지구의 환경과 대기의 조건을 좌우하는 인류세 시대에는 인간의 행위를 신중히 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다. 『중용』의 ‘신독(愼獨)’ 개념을 빌려 말하면 일종의 ‘신행(愼行)’을 ‘경’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철학의 ‘기화(氣化)’ 개념은 ‘대기변화’의 일종으로 이해할 수 있고, 기화 개념을 가장 많이 쓴 혜강 최한기의 『기학』은 기후변화의 관점에서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시선을 생태위기나 기후변화로 돌리면 이 시대에 요청되는 인문학적 요소들을 유학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성환_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hansowon70@nate.com
저서로 《한국 근대의 탄생 – 개화에서 개벽으로》와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 – 퇴계, 다산, 동학의 하늘철학》이 있고, 현재 【다른백년】(온라인)에 <조성환의 K-사상사>를 연재 중이다.
*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 735호에 실린 글입니다. 저작권은 한국종교문화연구소(http://kirc.or.kr)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