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8

나물을 삶는 일은 극히 작은 정성인데(烝黎出妻)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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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을 삶는 일은 극히 작은 정성인데(烝黎出妻)


몽촌

2015.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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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려출처(烝黎出妻)

[요약] (烝: 김 오를 증. 黎: 검을 려(여). 出: 날 출 妻: 아내 처)

나물을 잘 삶지 않았다고 아내를 내쫓았다는 뜻으로, 옛날에 증자(曾子)가 자기(自己)의 처가 어머니에 대(對)한 정성(精誠)이 부족(不足)하다 하여 이혼(離婚)한 일.

[출처]《공자가어(孔子家語). 권제9(卷第九)》




[내용] 이 성어는 공자가어(孔子家語) 9권에 공자의 제자 72명을 기술한 가운데 증삼(曾參= 曾子) 단락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증삼(曾參, 자는 자여(子輿), 노나라 남무성(南武城: 지금의 산동성 가상현) 사람으로 공자보다 46세 아래였다. 그는 효도에 대해 철저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그러므로 공자가 그의 진술로 효경(孝經) 지었고 한다.

제(齊)나라에서 그를 불러 경(卿)으로 삼고자 했으나 거절하면서 말 했다. “나는 늙은 부모를 모시고 있다. 이제 만일 남의 녹을 먹게 되면 그 사람의 일을 걱정해야 할 터인즉 그렇게 되면 나의 늙은 부모는 멀리 해야 할 터이니 그런 일을 차마 하지 못한다.” 또한 그는 계모에게 은혜를 받지 못했으나 변치 않고 잘 봉양했으며, 그의 처가 덜 삶 어진 나물을 부모에게 올리자 이로 인해 처를 내 쫓기로 했다. 어느 사람이 이를 알고 말했다.

“칠거지악이 아닌데 그렇게 하면 되겠소.”

증삼이 말했다.

“나물을 삶는 일은 극히 작은 정성인데, 내가 나물을 노인이 자시기 좋게 푹 삶으라고 말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니 더 큰 효를 어떻게 하겠소.”

그리고 처를 쫓아내고 죽을 때까지 아내를 얻지 않았다.

그의 아들이 아내를 얻을 것을 원하자 그는 이렇게 아들에게 말했다.

“고종(高宗= 殷= 商나라)은 후처로 인하여 효기(孝已)를 죽였고, 윤길보(尹吉甫)도 후처로 인하여 백기(伯奇)를 내쫓았다. 나는 위로는 고종에 미치고 못하고, 중간의 윤길보에 비교할 수 없으니 어찌 그런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겠느냐?”


曾參,南武城人,字子輿,少孔子四十六歲.志存孝道,故孔子因之以作孝經.齊嘗聘欲與為卿而不就,曰:「吾父母老,食人之祿,則憂人之事,故吾不忍遠親而為人役.」參後母遇之無恩,而供養不衰,及其妻以藜烝不熟,因出之.人曰:「非七出也.」參曰:「藜烝小物耳,吾欲使熟而不用吾命,況大事乎.」遂出之,終身不取妻.其子元請焉,告其子曰:「高宗以後妻殺孝已,尹吉甫以後妻放伯奇,吾上不及高宗,中不比吉甫,庸知其得免於非乎.」공자가어(孔子家語). 권제9(卷第九) - 72제자해(七十二弟子解)...




**주(周) 나라의 어진 재상인 윤길보(尹吉甫)의 아들. 유향(劉向)의 ≪열녀전(烈女傳)≫에 ‘윤길보의 아들 백기는 지극히 효성스러워 계모를 잘 섬겼으나 계모가 백기를 모함하여 죽이기 위해 벌을 잡아 독침을 뽑고 치마에 매어달았는데 백기가 다가가서 떨어버리려 하매, 계모가 백기가 내 옷을 벗기려 한다 하니, 길보가 드디어 의심하였다. 이로써 백기는 마침내 자살하였다.’ 하였음.


[네이버 지식백과] 백기 [伯奇]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li>상 나라 고종과 주 나라 윤길보는 모두 어진 임금과 현명한 정승이었지만, 효기•백기가 모두 제대로 죽지 못했습니다. 성명하신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 商之高宗 周之尹吉甫 皆令主賢相也 孝己伯奇 皆不得其死 聖明之世 安有如此事耶 [중종실록 권제27, 57장 뒤쪽, 중종 12년 4월 5일(경술)]


[네이버 지식백과] 백기 [伯奇]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li>




이하 「전경」속 역사인물 : 증자(曾子)|작성자 지산겸에서



『논어(論語)』 안에서 그는 열다섯 번 등장하는데 흔히 증자(曾子)라는 존칭으로 불린다. 정이(程頤, 1033∼1107년)는 『논어』가 유약(有若)과 증삼(曾參)의 문인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두 사람에게 자(子)의 칭호가 붙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리고 노둔(魯鈍: 어리석고 순박함)하였으나, 학문에 대한 뜻이 성실했기 때문에 공자 도(道)의 진수(眞髓)를 얻었다고 한다.



증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제자가 많았다. 공자가 죽은 뒤 공자의 제자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도를 전하기도 하고 경(卿)·대부(大夫)의 벼슬을 하기도 했으나, 그는 고향 수사(洙泗)에서 종신토록 강학(講學) 활동을 하여 70여 명의 문인을 배출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 언언(言偃), 전손사(顓孫師) 등이 그를 공자처럼 섬기려고 하였으나, 증자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에게 공자의 사상을 전수하고, 이것이 자사의 제자를 통해 맹자(孟子)에게 전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대(宋代) 주자가 『대학』의 전(傳)을 증자가 쓴 것이라고 진술한 이후로 유가의 도통은 공자에게서 증자를 거쳐 자사, 맹자에게로 전해졌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증자를 흔히 종성(宗聖)이라 칭하기도 한다.[儒敎大事典].



청대(淸代)의 최술(崔述, 1740∼1816년)은 “성도(聖道)의 밝힘은 대부분 단목사(端木賜: 子貢)에 의해서였고, 성도의 전함은 대부분 증삼에 의해서였다. 단목사의 공은 당시에 있었고 증삼의 공은 후세에 있다.”라고 평하였다. 또한, 청대의 완원(阮元, 1764∼1849년)은 “공자의 학문에 종사하는 것은 마땅히 증삼에서 비롯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후세에 학자들은 그를 종성(宗聖)으로 받들고 안회(顔回), 자사, 맹자 등과 같이 사성(四聖)으로 일컬었으며, 문묘(文廟)의 대성전(大成殿)에 안회 다음으로 모시고 봄, 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낸다.[儒敎大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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