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9

파독 간호사, 호스피스, 동성결혼…“다시 태어나도 같은 선택” : 여성 : 사회 : 뉴스 : 한겨레

파독 간호사, 호스피스, 동성결혼…“다시 태어나도 같은 선택” : 여성 : 사회 : 뉴스 : 한겨레:

파독 간호사, 호스피스, 동성결혼…“다시 태어나도 같은 선택”

등록 :2022-10-29
 
이유진 기자
 
다큐 ‘두 사람’ 상영 계기 방한
30여년 ‘동반자’ 생활 끝 결혼
“난관 많은 삶의 숙제 이어져도
불행 속 나를 내버려두지 않아”
[한겨레S] 인터뷰

‘70대 재독 호스피스·성소수자’ 김인선-이수현 부부





김인선·이수현씨가 24일 오후 서울 금천구의 한 공원에서 앉아 자세를 취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22살의 푸르던 청춘은 어느덧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다. 김인선(72)씨는 독일에서 간호사, 신학 연구자, 이방인들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는 호스피스 리더로서 많은 일을 했다. 30대 중후반에 느닷없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남편과 이혼하고 동성 연인을 선택한 레즈비언으로서도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지난 8월31일, 김인선씨는 30여년간 함께 살아온 ‘짝꿍’ 이수현(74)씨와 혼인신고를 마쳤다. 독일은 2001년 8월1일 ‘생활동반자 관계에 관한 법률’(생활동반자법)을 시행하며 동성 간 혼인과 유사한 파트너십을 가능하게 했고 2017년 10월1일부터 동성 간 혼인을 허용했다. 동성혼 시행 이후 동성혼의 비율은 전체 혼인 건수 중 약 3%다.

지난 10~13일 이 부부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감독 반박지은)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영화제를 계기로 한국에 온 두 사람을 지난 24일, 서울 금천구에서 만났다. 영화보다 영화 같은 두 사람의 영화는 29일 오후 한국퀴어영화제에서 1회 특별상영된다. 입장권은 일찌감치 전석 매진됐다.



무지개 깃발을 몸에 두른 김인선(왼쪽)씨를 이수현씨가 바라보고 있다. 영화 <두 사람>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누리집

독일의 한국 할머니 커플

―1985년에 만나 1990년부터 함께 살아오셨는데, 결혼을 결심하신 이유가 있나요?

이수현(이하 이) 서로 의지하고 권리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의무도 행할 수 있는 그런 안정된 삶을 저는 원했어요. 게다가 이 친구(김인선)가 2009년과 2019년 두번에 걸쳐 암이 발병했거든요. 법적인 보호자가 아니면 병실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생활동반자등록은 안 하셨어요?

이 저희는 안 했어요. 자타가 공인하는 (커플로서) 삶을 1990년부터 살았는데 법적인 절차가 필요하겠나 생각했죠. 그런데 이 친구가 아프면서 안 되겠다 싶어 손잡고 혼인청에 찾아간 거죠. 그런데 엄청난 서류가 필요했어요. 이 친구가 독일에서 결혼했던 증서, 이혼했던 증서, 그리고 (가족관계증명서 등) 한국 서류도 갖고 와야 된다고.

1948년 충남 홍성 태생인 이수현씨는 1975년 간호사로 독일에 파견돼 지금까지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국에서 생활한 터라 가족관계증명서 발급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김인선씨는 1984년 파독 광부 출신 동포 남성과 결혼한 독일 국적의 시민권자다. 그런 그가 다시 결혼하게 되면서 한국의 원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했는데 발급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다. 김인선씨는 혼외자였고, 그의 존재를 한국에서 증명해줄 사람도 없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영사관을 통해 ‘1950년 마산 태생 김인선’의 가족관계등록부를 찾긴 했지만, ‘그 김인선’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아버지가 같되 어머니가 다른 비슷한 나이의 자매일 것으로 추정한다. 부자 아버지의 집 뒷방에 고아처럼 모여 살던 여러 혼외자들 중 하나였으리라. 한국영사관과 독일 구청에 어렵게 소명하여 천신만고 끝에 결혼할 수 있었다.





서울 종로구 한 카페 겸 문화공간에서 특별상영 중인 <두 사람>을 관객들이 관람하고 있다. 이유진 기자

―한국에 또 다른 김인선씨가 살고 있는 거네요.

김인선(이하 김) 그렇게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니까.(웃음)

이 사실은 중간에 결혼을 포기했어요. 독일에 있는 성소수자와 이민자들 커뮤니티의 사회복지사가 도와줘서 다시 용기가 난 거죠. 그 사람도 이란 난민 출신이에요.

김 파란만장한 속에 장미는 핀다.(웃음)

이 (결혼사진을 보여주며) 혼인청에서 예물 교환을 하는데, 우린 작은 천사 조각상을 하나씩 주고받았어요. 수호천사죠.(웃음) 30년간 서로 의지하고 배려하고 보호해준다는 마음에서 살았는데 결혼 뒤 그런 마음이 더 강해진 것 같아요.

김 동성과 이성 간의 결혼 생활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수현은) 때로는 언니 같고 때로는 친구 같고 때로는 할머니 같고. 좋은 파트너예요. 내가 해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어디 사람이든 누굴 사랑하든 인격적으로 서로 존중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참 좋을 것 같아요.

―결혼하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이 결혼 뒤 병원이나 공공기관에서 당당하게 “가족입니다”라고 얘기하고 대신 일을 처리하거나 병실에 자연스레 들어가서 보살필 수 있게 됐어요. 많은 것이 달라졌죠. 세월이 그저 번개처럼 지나갔을 뿐이에요.

이수현씨는 독일에서 매년 퀴어퍼레이드에 참석했다. 잡채와 동그랑땡을 만들어 성소수자 친구들과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지내는 것에 익숙하다. 얼마 전 오래 함께 일했던 남자 간호사가 동성 연인과 결혼을 했다며 신나는 피로연 장면을 핸드폰으로 보여주었다. 독일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친숙한 이수현씨지만, 그 또한 한국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이수현씨는 “(자신의 커밍아웃과 결혼이)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지금은 홀가분하고 마음이 가볍다”고 말했다. 이번에 두 사람은 이수현씨 부모님 산소를 찾아 큰절을 했다. 친지들은 뜻밖에 오래전부터 어느 정도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었노라고 했다.



독일 신학대학에서 공부할 때 목사복을 입은 모습. 김인선, 나무연필 제공

동행과 죽음

갯마을의 11남매 대가족 틈에서 활발하게 자란 이수현씨와 달리 김인선씨의 어린 시절은 답답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신문기자로 일하던 인텔리 신여성 어머니와 경남 마산의 부잣집 아들인 색소포니스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부남 아버지는 미혼인 어머니를 속였고, 어머니는 뱃속의 아이를 유산하려고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가까스로 태어난 어린 인선의 생애를 붙든 건 외할머니였다. 독일인과 결혼해 외국으로 떠난 어머니는 딸을 조카라고 속여 독일에 초청했지만 데리고 사는 건 아니었다. 22살의 나이에 수녀원에서 주경야독하면서 겨우 독일에 정착한 김인선씨는 한인교회에서 소개로 만난 한 남자와 1984년 결혼했고, 어머니는 그런 딸의 결혼과 이혼을 모두 완강하게 반대하고 비난했다. 말년의 어머니는 지독하게 미워하던 딸과 그 동반자의 살뜰한 보살핌 속에 세상을 떠났다. 마침내 어머니는 딸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미안하다. 이제 좋은 짝을 만났으니 변치 않고 잘 살아라.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았지만 그것도 별것 아니더라. 너는 남을 위해서 살기로 했으니까 잘 해보아라.”

2001년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한 김인선씨는 2004년 호스피스 지도자로서 자격증을 취득하고 2005년 6월 독일에서 세상을 떠나는 이방인들을 돌보는 단체인 ‘동행-이종문화간의 호스피스’를 설립했다. 독일 최초의 이종문화 간 호스피스 단체였다.



이수현(왼쪽)·김인선씨의 젊은 시절. 각각 33살, 31살 때다. 부산국제영화제 누리집

김 처음부터 저희 어머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네가 성장하는 동안 해준 게 너무 없으니 지금이라도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면 좋겠다”고 하셨죠.

이 어머니가 저희 활동을 굉장히 좋아하셨고 자랑스러워하셨어요. 미안하셨던지 돌아가실 때까지 대소변은 딸이 못 받게 하셔서 제가 수발했어요. 2007년 어머니 돌아가신 다음날이 ‘동행’에서 자선 음악회를 하는 날이었어요. 둘이 흰옷을 입고 참석해 행사를 무사히 마친 다음 마이크 잡고 말했죠. “어제 저녁 6시에 저희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요.

‘동행’을 위해 이수현씨는 노후자금을 내놓았고, 김인선씨는 생명보험을 헐었다. 모두 5만유로, 지금 환율로 7000만원이 넘는 거액이다. 단체는 2008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감사패를 받았고 한국에서도 2010년 비추미 여성대상 등 많은 상찬을 받았다. 하지만 후원과 회비만으로는 재정적 어려움이 컸고 결국 2009년 파산신고를 했다. 노후자금이 다 들어갔지만 두 사람 모두 “후회는 없다”고 했다.

다행히 독일 휴머니즘협회 베를린지부에서 새 호스피스 단체를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해왔다. 그렇게 2009년 4월 ‘동반자-이종문화간의 호스피스’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하지만 삶의 숙제는 끝나지 않았다. 김인선씨가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은 것이다. 이것도 끝이 아니었다. 자서전을 집필하고 영화를 찍으며 지내던 2019년, 다시 난관이 찾아왔다. 이번엔 자궁암이었다. 무수한 죽음을 만나고, 자신의 죽음을 놓고도 깊게 숙고했을 김인선씨의 결론은 무엇일까.



2019년 6월1일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한 김인선씨. <한겨레> 자료사진

―잘 죽으려면 어떡해야 하나요?

김 잘 사는 게 잘 죽는 것이에요. 매일매일 매 순간 삶의 마지막인 것처럼요. 내가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 나의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해요.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은 내가 지금 행복한지 불행한지, 누가 나를 지금 힘들게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죠. 울분을 다스리게도 되고요. 스스로 관찰을 해서 나를 찾는 일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임종기의 환자들은 어떻게 위로하세요?

김 ‘어떻게 삶을 마감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아직까지 생각 안 했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그럴 때 “나는 독일에서 살지만 수장을 해서 한국으로 띄워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서 제 얘기를 먼저 꺼내요. 이렇게 대화가 조금씩 풀리죠. 호스피스는 환자의 상황을 예민하게 판단해야 해요. 중요한 건 그 사람에게 휩쓸리면 안 된다는 거죠. 내가 같이 죽어줄 수는 없거든요. 나를 지켜야 되는 거예요.

이 호스피스 얘기를 하니 눈이 반짝반짝하네.(웃음)

할머니처럼, 언니처럼, 친구처럼 이수현씨는 김인선씨를 예민하게 보살폈다. 추울세라 등 뒤로 점퍼를 덮어주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두사람> 주인공 김인선가 24일 오후 서울 금천구청옆 소공원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다시 태어나도 같은 삶

김인선씨는 배움에 대한 갈망이 컸다. 보훔대학교 신학부를 나와 2003년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오래전부터 목사가 되어 한인 여성을 돕고 한인 1세와 정체성 혼란을 겪는 한인 2세의 간극을 좁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목사가 되지는 못했다. 목사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석연찮게 합격하지 못한 것이다. 성적 지향 때문이라 짐작만 할 뿐이다. 자서전에서 김인선씨는 “나는 난관이 있다고 해서 그 불행 가운데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고 썼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라는 책 제목은 김인선씨 인생 전체를 상징하는 말과도 같다. 소설가 조선희씨는 이 책을 두고 “진흙뻘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이야기, 진화하는 삶, 끊임없이 스스로를 업그레이드시키는 라이프스토리”라고 말했다.

―다시 태어난다면요?

김 똑같은 삶을 살았을 것 같아요. 힘든 때도 많았지만 재미있는 것도 많았거든.(웃음) 내 마음대로, 내가 선택하고, 나중에 후회를 하더라도 내가 한 일이니까 되도록 긍정적으로 보자, 그렇게 생각해요.

이 인생에 양면이 있다니까요. 내 경우엔 어려서 거의 막내로 자라면서 허리가 다 꼬부라진 엄마한테서 그걸 배웠어요. 우리 나이가 되니까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아무리 나쁜 일이 일어나도 돌이켜 보면 어떤 면은 참 좋았다고 생각돼요.

―두 분이 간호사로 일할 땐 성추행을 당하기도 했다고요.

이 너무 순진했기 때문에 환자들이 ‘흑심’을 가졌다는 생각을 전혀 안 한 거야. 예를 들어서 혈압을 재느라 “손을 줘보세요” 하면 그냥 손이 여기(가슴)까지 와. 독일 간호사들한테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그래도 독일에서 많은 것을 배우셨어요.

김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고, 디아코니세(개신교 여성 전문 섬김직), 신학 석사, 문화중재자, 슈퍼바이저, 호스피스 팀장이 되었어요.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독일 사회가 기회를 준 것이죠.

―한국 가부장제가 외면한 김인선을 독일 사회가 거두고, 이수현이 키운 것 같아요. 뒷바라지한 분의 공로가 크십니다.

이 할머니 역할을 조금 했을 뿐이에요. 뭐 하나라도 챙겨 먹이고 싶고 편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죠. 제가 이 친구 삶을 아니까 애잔하고 마음이 아파요. 목사가 안 됐을 때 나도 낙심천만이었지만 호스피스로서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했어요. 그것도 인생의 양면성이죠.



영화 <두 사람>(감독 반박지은)의 한 장면. 이수현씨가 파독 당시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누리집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동행’에는 이들처럼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고통받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국, 인도, 베트남, 필리핀, 파키스탄, 튀르키예 등에서 온 이주민들이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을 받았고 고향 사람들의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동행했다. 전쟁통에 이주한 베트남인들도 독일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동독은 1950년대부터 북베트남 출신 저임금 노동자들을 연수생으로 초청했지만 통일 독일은 이들에게 합법적 체류 자격을 주지 않았다.

이 북베트남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고 배움도 부족했어요. 저희들한테도 “따이안, 따이안”(대한, 대한)이라면서 굉장히 무서워했죠. 그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고, (잘못이 있다면) 사죄하는 마음도 있고 늘 애잔해요. 제가 본 가장 비참했던 죽음은 베트남 엄마하고 아들이 독일로 피난을 와서 사는 경우였어요. 베트남인 예비 며느리가 형편없는 집 거실에 누워 있는데, 배가 동산만 해가지고 오늘내일하는 거예요. 그 옆에는 시어머니 될 사람이 돌아가시려고 오늘내일하더라고. 정말 기가 막혔어요.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결국은 돌아가셨죠. 필리핀, 타이에서 온 결혼이주여성들도 독일에서 고통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리아 난민으로 오신 분들 텐트에도 찾아가서 저희가 목사님 도움을 받아가며 음식을 끓여주고 지원을 해주었죠.

김 우리가 외국인이니까, 남의 일 같지 않았죠.

―이젠 파독 간호사나 광부분들도 많이 돌아가셨죠?

이 그럼요. 이제 교포신문 한 면이 부고로 꽉 차요.

―두분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로도 지면이 꽉 찰 것 같습니다. 독자들께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은요?

김 내 삶의 주인공은 나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도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되도록 밝게, 다른 사람한테 조금이라도 웃음을 줄 수 있는 그런 삶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가능한 한 오늘 하자. 내일이 안 올 수도 있으니까요.

이 이런저런 얘기 다 하려면 밤을 새워야 돼. 어때, 오늘 시간 좀 괜찮으세요?(웃음)



이수현(왼쪽), 김인선씨가 햇살 속으로 걸어 가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