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ipyo Hong
故 유동식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소금(素琴) 유동식(柳東植, 1922-2022) 선생님께서 만 100세를 사신 끝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감신학보>("복음의 토착화와 한국에서의 선교적 과제", 1962), <기독교사상>("기독교의 토착화에 대한 이해", 1963)의 두 글을 통해 한국 신학계에 토착화 신학 논쟁을 촉발시키신 분이다. '무교'(巫敎, 한국 샤머니즘)와 기독교를 고찰하신 유동식 선생님의 도발적 시도와 논쟁은, 이후 선배이신 윤성범 교수(유교와 기독교), 후배셨던 변선환 교수(불교와 기독교)의 참여까지 이끌어 내, 토착화 신학 담론을 감리교 신학의 중심에 놓으셨다. 이는 종교간 대화를 통한 화해와 평화의 모색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응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교계, 교단에서의 거부감이나 내홍은 만만찮았고, 1992년 감리교 종교재판 사태는 그 비극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고교 시절 접한 이 사건이 안긴 충격파가 없었다면 나도 신학 공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유동식 선생님은 그렇게 우리 형제를 이 바닥(?)으로 이끄신 원점에 서 계신 분이시기도 하다.
군대 제대 후(2000년) 동생 홍승표 목사가 감신대 총학생회 학술부장을 할 때 유동식 교수님을 강연자로 모시고자 봉원동 자택을 찾았다. 그 때 나는 너바나( Nirvana)의 커트 코베인(Kurt D. Cobain, 1967~1994) 티셔츠를 입고 찾아 갔는데, 내심 걱정한 것이 사실이다. 학교에서 만난 한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교수는 내 옷을 보고 경박스럽다거나 불교 용어가 적혀 있다고 꾸짖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고령의 유동식 선생님은 너무나 온화하게 환대해 주셨고, 내 티셔츠를 유심히 보시더니, "열반(涅槃, Nirvana)이라고 적혀 있구만... 아주 심오한 옷을 입고 왔어...!"라고 하시며 복장 때문에 긴장하고 있던 내 마음을 녹여 주셨다. 그리곤 쌍둥이 형제가 신학을 하게 된 계기를 물으시기에, 1992년 종교재판 이야기를 하니 한참을 서글퍼하시더니 두 사람의 사명이 크다고 격려해 주셨다. (변선환 교수와 함께 파문을 당한 홍정수 교수는 동향의 모교회 출신이기도 하다.)
젊은 학부 신학생 둘을 귀찮아하지 않고 몇 시간을 이야기 나누며 자신이 새롭게 진행 중인 ‘예술신학'에 대해 조곤조곤 말씀을 이어가셨다. 그때의 인연으로 감신대 강연회를 무사히 마치고, 연신원 옛 건물에서 개설하셨던 '예술신학' 대학원 강의도 청강했으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원우회 활동을 할 때에도 채플 강사로 모시는 등 만남을 이어간 것은 여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동생 홍승표 목사는 1960년대에 유동식 선생님께서 맡으셨던 대학기독교서회 월간 신학지 <기독교사상>의 편집장으로 4년간 일하면서 그 길을 이어 받는 영광도 누렸음은, 20대에 불쑥 찾아 뵈었던 때의 그 만남을 더욱 각별한 인연으로 느끼게 한다. 홍승표 목사의 박사논문은 한일 칼 바르트 신학의 수용 과정을 고찰하기도 했는데, 그 때 일본 경유의 왜곡된 바르트 신학을 탈피해 해방 후 처음으로 허혁 등과 함께 주체적인 바르트 읽기를 시도한 분으로서 유동식 선생님을 소개하는 등, 그분의 현대 신학사 속 위상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2005년 5월 30일에는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일본 도시샤사대학 신학부 모리 고이치(森孝一) 학장이 와서 '일신교에의 도전과 기독교의 책임성'(The Challenges to the Abrahamic Religions and the Responsibility of Christianity)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내 얼굴을 알아 보시고는 옆에 앉아 함께 내용을 경청하셨다. 나는 그 때 일본어를 전혀 못 알아 듣고 있는데, 일본어 강연을 전부 이해하시며 정성껏 필기를 하며 후배 학자의 주장에 경청하는 모습에 절로 존경심이 일어났다.
수년 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기독교인과 신도(神道) 이해"라는 주제로 연구를 하게 된 것도, 생각해 보면 유동식 선생님의 뒤를 밟아 가고픈 후학으로서의 자연스런 동경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교토대학에서 이 주제를 다루려 할 때, 지도교수가 처음으로 소개해 준 책이 바로 호리 이치로(堀一郎) 교수의 『민간신앙』(民間信仰)라는 책이었다. 호리 선생은 다름 아닌 유동식 교수의 도쿄대학 및 국학원대학 지도교수였던 분이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와 절친으로 그의 책을 일본어로 옮겨 소개한 대표적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게 호리 선생의 책을 보면서 유동식 선생님과도 연결돼 있음을 느끼곤 했다.
유동식 교수님은 교토에 오실 때면, 교토의 도시샤대학 명예교수 다케나카 마사오 (竹中正夫, 1925-2006) 선생님을 꼭 뵈었다고 한다. 다케나카 선생은 교토대와 도시샤 신학부를 마친 뒤, 1950년부터 예일대학에 유학을 가셨는데, 마침 유학시기가 겹쳐 유동식 교수와 친분을 쌓으신 모양이다.
다케나카 선생도 『료우칸(일본 승려, 문학인)을 사랑한 그리스도인』(良寛を愛したキリスト者 小倉章蔵の生涯, 1992), 『와후쿠(기모노)의 그리스도인』(和服のキリスト者 :木月道人遊行記, 2001), 『미와 진실 : 근대 일본의 미술과 기독교』(美と真実: 近代日本の美術とキリスト教, 2006) 등의 책을 펴내시면서 일본의 전통 문화 및 근현대 미술 안에 깃든 기독교적 가치를 발굴하고 해석하셨다는 점에서 유동식 선생님과 지음지교(知音之交)의 벗이었다고 평가할 만 하다. 일본 불교의 성산인 교토 히에잔(比叡山) 기슭에 위치한 일본 크리스찬 아카데미(日本クリスチャン・アカデミー) 간사이 세미나 하우스( 関西セミナーハウス)에는 다케나카 선생이 수집한 기독교 미술 작품들이 진열돼 있어 그곳을 둘러 볼 때도 늘 화폭에 빠져 계실 유동식 선생님을 떠올리곤 했었다.
유동식 선생께서 연희전문 수물과 시절 함께 다녔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5년 2월 너무나 일찍 별이 되었고, 도쿄 유학 시절의 스승 호리 이치로도 진작에 떠나 가셨으며, 우리 형제에게 다과를 대접해 주셔던 사모님(윤정은 전 이대 교수)도, 붕우 다케나카 마사오 선생도 모두 떠나고 없는 이승에서의 여생은 생각보다 너무 길어지신 탓에 만년은 지치지 않으셨을까 싶다.
이제는 다 훌훌 털어 내시고 그립던 분들을 다 만나며 회포 풀고 계시겠지... 나도 언젠가 때가 도래하면 다시 너바나(Nirvana) 티셔츠 꺼내 입고 유동식 선생님과 해후할 수 있기를... (산돌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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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유동식 교수님께서 기독교사상 지면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쓰신 글을 일부입니다. )
<기독교사상>2002년 1월호, 종교와 예술의 뒤안길에서(9)
무교와 한국문화 (유동식)
1. 우리의 마음 바탕
『한국종교와 기독교』(1965)를 낸 이후 나는 항상 하나의 과제를 지니고 다녔다. 그것은 한국인의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종교적 영성을 본격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일이다. 복음이 뿌리내릴 곳은 우리들의 종교적 마음 밭, 곧 영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 또는 한국신학의 형성 문제가 제대로 논의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영성의 구조와 특성이 규명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방대한 학문적 작업이 요청되는 일이다.
나는 1962년부터 감리교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일과 기독교서회 편집부장의 일을 겸임해 왔다. 하루도 여유 있는 날이 없이 한 주간을 뛰어다녀야만 했다. 이러한 속에서 본격적인 한국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단기간이라도 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꿈꾸어 왔다. 그것은 유학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국제선교협의회(I. M. C.)는 1957년 가나회의에서 제3세계의 신학교육 향상을 돕기 위해 신학교육기금(T. E. F.)을 창설했다. 1964년 연세대학교 안에 설립된 연합신학대학원은 이 기금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서회는 이보다 앞서 1961년부터 T. E. F.의 원조로 신학교재 출판을 진행해 왔다. 1964년 말까지 이미 12종의 신학교재를 간행했다.
출판부장인 나는 자연히 T. E. F.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고, 그 책임자인 코(Shoki Coe) 박사와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하루는 코 박사에게 내 연구계획에 대해 의논했다. 나는 동경대학에서 일년간 한국의 무교에 대해 연구할 생각이었다. 한국의 문화사와 더불어 존재해 온 우리의 무교는 우리들의 영성 또는 종교의식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동경대학을 택한 것은 그 곳에 민속종교 연구의 세계적 학자인 호리(堀一郞)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코 박사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다. 그 후 일이 급진전되어 호리 교수로부터는 연구 지도의 승낙을 받았고, 7월에는 T. E. F. 위원회에서 장학금 지급 통지가 왔다. 그러므로 1968년 9월부터 동경대학 문학부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해 정월부터 「기독교사상」에 연재하기 시작한 “한국신학의 광맥” 시리즈는 이로 인해 연말까지만 쓰고 중단해야만 했다. 동경으로 떠나기 전에 3회분의 원고를 쓰느라고 진땀을 흘렸던 생각이 난다.
호리 교수를 통해 배운 것은 그의 친구인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이다. 특히 그들의 공통관심의 대상인 샤머니즘에 대한 폭넓은 이해의 틀을 얻을 수 있었다.
동경대학에는 논문박사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논문을 쓸 작정이었다. 호리 교수와 함께 작성한 논문의 윤곽은 “조선 샤머니즘의 역사 구조적 특질”이었다.
그 해 동경대학은 격렬한 학생운동에 휘말려 결국에는 학교 제도상의 변혁을 초래했다. 그 중의 하나가 교수들의 정년을 60세로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미 60세를 넘어선 호리 교수는 다음 해에 퇴직해야만 했다. 그리고 국학원 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문학박사 학위 청구 논문을 완성한 것은 1971년 말 경이다. 논문은 자연히 지도교수가 있는 국학원 대학에 제출했다.
6개월 후에 논문심사가 있었고, 학위수여식은 1972년 9월에 있었다. 이때 마침 집사람이 세익스피어 연구차 영국 엑세타 대학으로 가던 길이었으므로 동경에 들러서 학위수여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조선 샤머니즘이란 “한국 무교(巫敎)”를 뜻한다. 그 원형은 고대 신화와 제천의례 속에 나타나 있다. 곧 천지의 주재신인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가 됨으로써 신의 능력에 힘입어 인간의 꿈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꿈의 중심은 무병장수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생존적 가치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신인합일의 의례는 노래와 춤에 의한 제례의식이다. 무교란 단적으로 “가무로써 강신케 하여 소원을 성취한다는 원시종교”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무교의 전승과 전개에는 세 흐름이 있어 왔다.
첫째는 단순전승이다. 외래 종교문화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옛 모습이 그대로 전승되어 가고 있다. 오늘의 민간신앙으로 알려진 무속의 흐름이 그것이다.
둘째는 종교습합적 전승이다. 대체로는 외형상 외래 종교의 형태를 유지하지만 그 안에는 무교적 요소들이 흐르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기성종교의 저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셋째는 승화적 전승이다. 외래 종교를 매개로 무교가 승화되어 새로운 형태의 종교문화를 형성한다. 예컨대, 신라의 화랑도나 근세의 동학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전개 유형을 그림으로 그려 본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샤머니즘은 동북아시아 제 민족 사이에 공통된 종교현상이다. 그러나 각 민족마다 그들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그 특성을 달리하고 있다. 한국 무교의 두드러진 특징은 노래와 춤으로써 신령을 섬기는 심미적 종교성에 있다. 따라서 퉁구스나 일본의 굿이 주로 죽은 자들을 천도하기 위한 음산한 제례인데 비해, 한국의 굿은 무악을 동반한 재수굿이나 농악을 앞세운 마을굿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승에서의 기복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민중의 오락을 겸한 명랑한 것이다.
여기에 한국 무교가 민중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 삶을 부추겨 온 종교적 역할이 있다.
2. 무교문화론
1973년 3월부터 나는 연세대학교 교양학부의 종교주임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박대선 총장의 주선에 의한 것이다. 정확히 20년 전에도 나는 배화여고의 종교주임으로 취임했었다. ‘종교주임’이라는 것이 나의 천직인 듯이 느껴졌다.
한 가지 새로운 경험은 내가 홀로 쓸 수 있는 교수연구실을 갖게 된 일이다. 나는 비로소 내 연구를 위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장소와 함께 여유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셈이다.
유신체제 하의 1975년은 어둡고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민주주의란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못하게 한 대통령 긴급조치법에 의해 학생들과 교수들이 구속되는가 하면, 학원의 자율과 자유를 천명한 박 총장은 죄인으로 몰려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그러한 와중에서 나는 이상할 정도로 연구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전년에 받은 대학원의 연구비 덕택으로 “한국 토착신앙과 민중의 불교 수용 형태”(「연세논총」)를 발표했고, 이에 힘입어 성곡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한·일 불교 수용 형태의 비교 연구”에 몰두했다. 한편 나는 내 학위논문을 다시 보충해서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연대세 출판부)란 제호로 간행했다. 그 책의 맺는 말에서 나는 일종의 무교문화론을 폈다.
한국 문화의 깊은 암석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불교문화이다. 그 위의 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유교 문화이다. 그리고 지난 한 세기 남짓한 동안에 형성된 지표층이 있다. 곧 기독교를 동반한 서구문명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문화의 지층은 최소한 세 겹으로 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문화는 단순히 세 겹의 문화층으로 된 둥근파가 아니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한국문화의 심층부에는 지핵에 해당하는 무교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외래 종교 문화들을 받아들여 문화지층을 형성해 왔던 것이다.
한편, 문화지층들은 무교의 지핵을 억압하고 배척해 왔다. 따라서 무교는 문화의 표면으로부터 사라져 가고 있다. 하지만 무교는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지금도 한국문화의 심층에서 여전히 그 에너지를 발휘하고 있다. 우리들의 행동 양식이나 가치체계를 적지 않게 지배하고 있다. 무교의 뜨거운 열량은 여전히 민중문화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지열이 창조적인 열량으로 전환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새로운 문명의 창조를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의 세계문명은 그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새로운 문명이 싹트기를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문명의 나비는 새로운 종류의 번데기에서만 나올 수 있다. 이러한 새 번데기를 무교에서 기대해 본다는 것이 무교문화론의 방향이다.
무교의 특질은 가무에 의한 제례를 통해 신화적 원초세계로 돌아가는데 있다. 그 곳은 신과 인간이, 하늘과 땅이, 삶과 죽음이 모순 없이 조화를 이루는 창조적 세계이다. 거기에서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문화의 창출을 기대할 수 있다.
기독교의 도리는 그 동안 헬라와 로마의 아폴로적인 이성과 질서를 통해 세계 구원의 역사를 도모해 왔다. 그러나 거기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서구문화가 갖는 한계성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도리를 재해석할 새로운 틀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디오니소스가 상징하는 자유와 황홀의 길이다. 가무강신하는 심미적 신인통합의 길이다. 곧 무교문화의 틀을 통한 복음의 재해석이다.
무교문화론은 결국 엑스타시 문화론이다.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된 엑스타시 속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문화이다. 삶은 거리를 두고 관망할 대상이 아니다. 삶에서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곧 예술이다. 삶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삶이 곧 종교이다. 임마누엘은 삶과 자기와의 완전한 통합을 초래한다. 그리하여 자유와 기쁨의 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서구 문명의 쓰레기를 먹고 통제와 경제개발을 외치며 일어선 유신독재체제 속에서 무교 연구에 열을 올린 것은 이러한 새로운 문화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공감이나 한 듯이 <한국일보>가 제정한 출판문화상은 그 해의 저작상 대상으로 내 책을 선택했다.
같은 해에 일본에서도 두 권의 책이 나왔다. 하나는 내 학위논문이 『조선의 샤머니즘』(학생사)이라는 제호로 간행되었고, 또 하나는 그간 김충일 씨가 번역해 오던 『한국종교와 기독교』(양양사)의 일어판이다.
그런데, 이 무렵에 박 정권은 비판세력을 없애기 위해 교수 재임용제라는 것을 발표했다. 명분인즉 연구실적이 없는 무능한 교수들을 제거하는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각 대학별로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심의를 했다. 교양학부의 교수들은 전공에 따라 각 대학으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탈락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신과대학만은 나를 재임용 교수 명단에서 탈락시키는 웃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3. 무교 미술과 한국화의 뿌리
미술사의 전개는 종교적 이념의 형상화 작업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의 미술사 역시 한국의 종교문화사와 그 궤도를 같이 한다. 고대의 무교 미술은 불교미술로 이어졌고, 근세로 오면서 유교적 동양화가 전개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기독교문화와 연계된 서구의 미술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세계의 미술사가 오늘의 한국화라는 장르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화의 뿌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역시 무교 미술일 것이다.
무교 미술의 전형적인 것은 고분 벽화나 무신도, 그리고 일부 민화에서 볼 수 있다. 그 특색은 무교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으며, 생동감 넘치는 곡선과 채색으로 그려졌다는 데 있다. 그 사례를 들어본다.
① 고구려의 사신도
(중략)
② 신라의 천마도
(중략)
③ 창부도
중국문화의 기준으로 보아 후진국이었던 신라는 선진 중국문화를 그대로 수용하려 하지 아니했다. 6세기에 이르러 진흥왕은 대륙문화를 매개로 전통문화를 승화시킴으로써 주체적인 민족문화를 구축해 나갔다. 그것은 화랑제도를 설치하고, 민족의 얼인 풍류도를 왕성하게 함양하는 것으로써 시작되었다.
한편 고대 원시종교로서의 무교는 민중들의 신앙형태로 전승되어 왔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무속이요, 샤머니즘이다. 가무강신하고 소원성취한다는 종교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가 노래와 춤으로써 신령들과 교제하는 무당이다.
무당은 노래와 춤을 전문으로 하는 종교적 예술가이다. 그들이야말로 최초의 직업적 예술가였다. 이러한 무당의 수호신으로 되어 있는 것이 광대신인 창부이다. 창부는 말하자면 한국의 예술신이다.
무교의 신상은 전통적으로 그림으로써 표현한다. 현실을 뜻하는 삼차원의 입체적 신상을 만들지 아니하고 이차원적인 그림을 사용한다. 그것은 동방교회가 성상으로 이콘을 사용하는 것과도 같다.
무신도의 사용 역사는 이미 오래다. 12세기 이규보의 시문 속에도 무당들이 신당을 차린 다음 제석신이나 칠성신 등을 그려 놓고 굿을 하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노무편).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인 굿당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인왕산 중턱에 있는 국사당이다. 그 곳에는 10여 폭의 무신도들이 걸려 있는데, 그 중 예술적으로 뛰어난 그림은 역시 <창부도>이다. 도포를 입고 빛갓을 쓴 창부가 피리를 불며 멋드러지게 춤을 추고 있다. 피리 하나만 빼고는 전체가 율동적인 곡선으로 그려져 있다. 그 생동감은 <천마도>나 <백호도>를 연상케 하며, 청·홍·황색과 흑백의 조화는 더욱더 고분 벽화의 전통을 실감케 한다.
글쓴이 / 유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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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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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Choong Lee
학부 때 아쉽게 유교수님 수업을 들을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그 때는 유교수님의 책이 참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하면, 참 귀한 우리 신학이었구나 싶습니다.
최문영
올려주시는 글들이 일반 성도에게는 어려울 때가 많아서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접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존재 자체를 몰랐던 유동식 교수님의 업적을 글을 통해 알게 되었네요. 고인이 이표, 승표 오빠에게 영향을 끼친 것처럼 후학들에게도 앞으로 큰 영향력을 끼칠 것으로 기대됩니다. 교수님께서는 주님 곁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고 계시겠지만 더 긴 시간 함께 하지 못해 슬픔으로 마음이 많이 아플 교수님 가정 가족들의 평안과 건강을 위해 기도합니다.
Seung Pyo Hong
최문영 문영아 반가워^^; 늘 한결같은 모습에 감사하구나. 언제 때가 되면 직접 만나 회포를 풀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 건강하고 평안하길...
Yipyo Hong
최문영 고마워. 같이 송감에서 지낼 때 늘 진지하고 성실한 문영이 모습은 귀한 자극이 되었던 기억이 나... 지금도 여전한 그 모습이 얼마나 반갑고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최문영
Yipyo Hong 어른이 되어서 알았습니다. 쌍둥이 오빠들이 도전적인 일을 많이 했었다는 것을요.^^ 그때의 기억들이 지금 신앙생활 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공유해주시는 일본 소식과 취미생활 그리고 거침없는 정치적인 발언들 잘 보고 있습니다.*^^* 평안과 건강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