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행복하고 다른 사람에게 조금 도움이 돼라.’
법륜스님은 한 사람으로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나요?
“법륜스님께서는 스님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계십니까? 어떤 기준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사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제가 스님이라는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사람들과 대화할 때 불교 용어보다 일상용어를 더 많이 사용해요. 만나는 사람도 일반인이 더 많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3년 전부터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있어요. 저는 승려로서 하는 일과 한 인간으로서 하는 일이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자유롭고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 승려가 됐어요. 승려라는 이름에 갇혀서 위선적으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삶의 기준은 첫째,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입니다. 저 자신에게도 이렇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님을 위해 나를 희생하겠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칭찬을 할 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인생관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행복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냐고 질문하면 저는 이렇게 키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행복하면 아이는 저절로 잘 자란다. 아이 키운다고 힘들어하면 아이는 그걸 본받아서 불행해진다.’라고 말해요. 내가 행복한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둘째,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있는가’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자립을 해야겠죠. 개나 토끼, 심지어 메뚜기도 스스로 살지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만 어미의 도움을 받지요. 저는 성인이 되면 자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꾸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받으려고 하잖아요. 도움을 받으려는 마음, 의지하는 마음이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살든 경제적, 정신적으로 자립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니까 짐승보다 나아야 하겠지요? 자립하는 건 기본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원래 상부상조하며 사는 거지만, 그래도 내가 주는 게 51이고 받는 게 49 정도 되어야 합니다. 주는 게 적고 받는 게 많으면 다 빚이 돼요. 그래서 저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려고 합니다. 이렇게 대화를 해서 도움을 주든지,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든지, 일을 거들어 주든지 해서 조금이라도 남에게 도움이 되려고 해요. 이게 제 인생관이자 설법의 요체입니다.
‘네가 행복하고 다른 사람에게 조금 도움이 돼라.’
도움이 많이 되려고 하는 것도 욕심입니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지는 않잖아요. 이루어진다고 꼭 좋다는 보장도 없어요. 이루어지기도 하고, 이루어지지 않기도 하는 게 정상입니다.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어요. 그처럼 남이 원하는 일도 내가 다 해줄 수 없습니다. 남이 원하는 걸 내가 다 해줄 수 없으니 해줄 수 있는 것은 해주고, 해줄 수 없으면 ‘죄송합니다!’하면 돼요.
부처님의 가르침도 이와 같습니다. ‘남을 때리거나 죽이지 마라. 손해를 끼치지 말라, 성적으로 괴롭히지 마라, 말로 괴롭히지 말라. 술 마시고 괴롭히지 마라,’ 이것이 다섯 계율입니다. 사람답게 살려면 적어도 남을 해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남을 해치거나 손해를 끼치면서까지 살려고 합니까? 무엇 때문에 남을 괴롭히면서까지 살려고 해요? 누구나 살아갈 권리는 있지만 남을 해칠 권리는 없습니다. 누구나 이익 볼 권리는 있지만, 남에게 손해 끼칠 권리는 없습니다. 누구나 즐거움을 추구할 권리는 있지만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습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지만, 사기를 쳐서 남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욕설 등으로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습니다. 술을 마셔도 되지만, 취해서 남을 괴롭히는 것은 안 됩니다. 기분 좋게 술 마시고 왜 남을 괴롭히고 가족을 괴롭히나요? 누구도 그럴 권리는 없습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기본 원칙은 지키되 가능하면 내 인생도 간섭받지 않고 남의 인생도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이라면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른 손해도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어떤 선택이 절대적으로 좋다고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지 않으려고 해요. 주식을 살 때 망설이는 이유는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익을 크게 보려고 하면 손해가 클 가능성도 있겠지요? 1년 전만 해도 주식투자를 안 하고 집을 사지 않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됐어요? 만약 제가 일 년 전에 그것은 거품이니까 하지 말라고 했으면 제가 세상을 잘 모른다고 했겠지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제 말이 맞았다고 하겠지요.
우리는 항상 지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금 맛있다고 건강에 좋다는 보장도 없고, 지금 이익이 된다고 미래에도 이익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나부터 행복해지라는 말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는 게 아니에요.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면서 자기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는 겁니다. 권력이 있어야 좋고, 부자가 되어야 좋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던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는 게 좋아요. 제 자화상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나이 들어 은퇴하면 한 사람의 농사꾼으로 살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위대한 승려가 되기보다 세상에 내가 도와야 할 일이 끝나면 농사꾼으로 살고 싶었어요. 낮에는 농사짓고 저녁에 고단하면 자고 얼마나 편합니까? 저는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