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1

중앙시사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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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 “해방 후 새로운 50년 한·일관계의 초석 놓다”
일본선교 55주년 맞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통일교가 일본선교 55주년을 맞아 ‘한학자 총재 시대’ 개막을 알렸다. 통일교는 한 총재의 모성 리더십으로 새로운 한·일관계의 초석을 마련하고자 한다. 10월 16일 일본 도쿄 인근의 사이타마현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린 ‘일본선교 55주년 기념 수도권 대회’에는 신도와 시민·사회단체 회원 등 2만여 명이 참석했다.





통일교가 일본선교 55주년을 맞았다. 일본은 통일교 선교 국가 중 교세가 가장 크다. 선교 초기 온갖 핍박도 많았다. 그래서 이번 선교 55주년은 의미가 남다르다. 문선명 총재 별세 이후 한학자 총재가 첫 대외활동 국가로 일본을 선택한 것에도 특별한 함의가 있다.

통일교는 ‘한학자 총재 시대’ 개막을 일본에서 알리며 새로운 한·일관계의 초석을 마련하고자 한다. 한 총재의 모성 리더십으로 통일교가 한·일관계의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울 것이라고 한다. 한 총재의 첫 발걸음에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10월 16일 오전 10시께 일본 도쿄 인근의 사이타마현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의 일본선교 55주년 기념대회가 열리는 곳이다. 하지만 날씨가 예사롭지 않다. 전날부터 쏟아지던 폭우는 가늘어졌지만,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었다. 일본 도쿄도를 강타한 26호 태풍 ‘위파’의 영향이다. ‘위파’는 일본 기상당국이 ‘최근 10년 사이 가장 강력한 태풍’으로 예고할 만큼 일본 간토(關東) 지역과 주변 섬에 수십여 명의 사망·실종 등 큰 인명피해를 남겼다.

“태풍 때문에 일부 전철이 운행되지 않는다는데, 행사가 제대로 될 지….” 행사 관계자들조차 걱정스럽게 말했다. 통일교는 일본선교 55주년을 맞아 10월 14일~22일까지 현지 5개 지역(삿포로·도쿄·나고야·나가노·고베)을 순회하며 기념행사를 여는데, 이날은 수도권 대회로 14일 삿포로 대회에 이어 두 번째로 열렸다.

첫 행사인 삿포로 대회를 성황리에 마친 터라 일본 통일교 측의 걱정도 십분 이해됐다. 그런데 정오쯤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JR사이타마 신도심 전철역이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일본인들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대형 관광버스 수십 여대도 행사장으로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행사 시작까지는 2시간가량이 남았는데도,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인근 출입구는 인파로 가득 찼다.

참석자 중 일부는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끼어 있었다. 60대의 한 여성은 자신의 마을에 전철이 끊겨 전철이 운행되는 인근 마을까지 2시간가량을 걸어서 전철을 타고 이곳에 왔다고 전했고, 일부 시민은 전철 대신 버스를 타고 도착했다고도 했다. 태풍이 부른 악천후를 뚫고 사람들의 발길을 이곳까지 이끈 힘은 무엇일까?

일본 통일교 관계자는 “통일교회 신도들도 있겠지만, 인류의 화합과 세계 평화운동을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 회원이 많이 참석했다”며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초국가·초종교’의 세계 평화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세계 평화를 위해 한곳에 모인 일본인들의 열망이 커서였을까? 거세게 불던 바람도 오후가 되자 점점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1 10월 16일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열린 수도권 대회에서 한학자 총재가 공개강연을 하고 있다. 2 한 총재와 도쿠노 에이지 일본 통일교회협회장 등이 18일 나고야시 ‘포트메세 나고야’에서 열린 중부대회에서 통일기를 흔들며 참석자들에게 답례 인사를 하고 있다.

태풍도 비켜가게 한 일본 신도들의 믿음

행사장인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의 수용 규모는 3만7000명. 지난해 국내 아이돌 그룹 ‘빅뱅’의 콘서트장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곳이다. 아레나 안으로 들어서자 후끈 열기가 느껴졌다. 식전행사가 펼쳐지고 있는 경기장에는 이미 빈 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찼고, 통일교 깃발(일명 통일기)과 평화·화합 문구가 적힌 피켓을 흔드는 광경은 흡사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주최 측이 추산한 참가 인원은 2만 명가량. 일본 통일교 신자들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뿐만 아니라 도쿄도를 비롯해 인근 사이타마·지바·가나가와현 등 수도권 광역의회 의원 30여 명과 10여명의 일본 국회의원 등 정치인과 각국에서 온 평화대사들도 참석했다. ‘평화’를 바라는 세계인의 힘이 집결된 듯했다.

본행사가 시작되고, 중앙 대형화면에 문선명 총재의 영상이 나오자 신도들의 기도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행사의 절정은 한학자 총재의 등장이었다. 일본 신도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으며 단상에 선 한 총재는 강연을 통해 일본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한 총재는 “하나님은 미국만을 사랑한 게 아니라 일본을 사랑해 오늘의 일본이 이뤄진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며 “하나님이 일본을 사랑하는 이유는 오늘 대회에 기꺼이 참여해 평화운동을 지지하는 여러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일본 국민들은 근면하고 겸손하며 옳다고 믿는 것을 따라가는 훌륭한 국민성을 지녔다”며 “새 시대 새 역사를 선도하는 일본이 되기를 하늘 앞에 축원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일본을 마냥 추켜세우는 것은 아니었다. 한 총재는 일본이 세계 평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말문을 열었다. 첫 행사였던 북해도 삿포로 대회에서다. “하나님은 일본을 사랑하고 축복했다.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환태평양 국가들을 끌안고 지도해나가야 할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사명이 있다. 그러나 과거를 덮고 미래를 본다면 진실을 볼 수 없으며, 진실이 없으면 친구가 없다.” 한국과의 과거사 문제를 정리해야 양국이 동북아와 세계 평화를 위해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라고 통일교 측은 부연설명했다.

18일 나고야시 ‘포트 메세 나고야’에서 열린 ‘일본선교 55주년 기념 중부대회’에도 1만여 명의 시민·사회단체 회원 등이 모였다. 전·현직 중의원과 광역·기초 지방의원 20여 명도 자리를 함께 했다. 특히 조총련 중부지역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해 한 총재가 이끄는 초종교·초국가 평화운동에 성원을 보내 청중들의 주목을 받았다.

원수를 품은 사랑과 통일원리가 일본인들에게 어필

통일교가 일본에서 이처럼 엄청난 교세를 갖게 된 데는 어떤 역사가 있을까? 도쿠노 에이지(59) 일본 통일교회협회장은 “평화를 염원하는 일본인과 세계 평화를 섭리로 삼는 통일교회가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오야마다 히데오(72) 세계평화연합 회장은 “문선명 총재의 원수를 품는 사랑이 일본 통일교회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며 문 총재의 일화를 소개했다.

“문 총재는 일본 와세대 대학 유학시절 비밀 독립운동 결사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며 일본 고문 경찰의 얼굴과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일본인에 대한 원망과 증오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문 총재는 광복을 맞이한 후 한국에 거주했던 일본 관헌을 찾아가 가족과 함께 일본에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줬고, 그 내용이 알려져 일본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면서 그는 통일교에 대한 박해가 또 다른 이유라고 강조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종교를 받아들였지만, 신흥교인 통일교는 많이 핍박했다. 하지만 박해가 심할수록 젊은이들은 문 총재의 주변으로 몰려 들었다. 원리원칙을 신조로 개인 책임분담을 강조하는 문 총재의 가르침이 규칙을 중시하는 일본 국민성에 부합하는 점이 컸다.

당시 혼란 속의 일본에 살던 일본 젊은이들은 문 총재의 가르침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또 시련이 왔다. 교세 확장을 우려해서였는지 한동안 우호적이던 일본 정부와 사회가 1980년대 다케시타 노보루 정권 이후부터 다시 반통일교 정서를 확산시키고 있다. 상황은 나쁘지만 그래서 희망을 본다.” 종교는 박해가 심해질수록 발전한다는 의미로 읽혀졌다.

송용천 일본 전국축복가정총연합회 총회장은 행사 후 일본 내 통일교의 성공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기독교의 경우 구원의 기본 단위가 개인에 있지만, 통일교는 구원의 기본 단위를 가정으로 본다. 혼자 천국에 가 있으면 뭐 하나? 내 사랑하는 가족이 지옥에 있으면 그 마음이 편하겠는가? 통일교는 교회의 외적 건물이 아니라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 이렇듯 사람을 회심시키고 변화될 수 있도록 만든 통일원리가 일본 통일교 성장의 원동력이다.”

그는 또 일본 통일교와 한국 통일교는 통일원리 하에 일체화되어 있으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살려 선의의 경쟁을 하는 점을 내세웠다. 그는 “통일(統一)과 획일(劃一)은 전혀 다른 말인데, ‘통일’이란 단어에는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개성과 특성이 있다는 의미이고, ‘획일’ 속에는 개성과 특성이 있을 수 없다”며 “이러한 점에서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말씀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은 하나의 목적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과 통일교의 인연은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문선명 총재가 일본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한국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한 4년 뒤인 1958년. 한국과 일본이 수교도 맺지 않은 때였다. 문 총재가 일본을 해외의 첫 번째 선교 국가로 정한 것에 대해 통일교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문 총재는 일본선교에 대해 첫째로 일본을 살리고, 둘째로 한국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는 세계 국가들이 하나둘 공산화돼가는 상황이었다. 만약 일본이 공산화되거나 용공의 입장에 서게 되면 한국이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을 예견했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깰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을 무장시켜 일본에 파송했다. 물론, 통일교회의 미래를 위한 측면도 있다. 문 총재는 한국은 아담국가, 일본을 하와국가로 보고 어느 국가보다도 가장 먼저 통일원리를 전하게 했다. 일본이 경제적인 면에서나 세계 선교의 확장을 위해 선도적인 역할을 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통일교는 이 같은 문 총재의 일본 사랑에 힘입어 교세 확장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리고 문 총재의 예상은 적중했다. 통일교는 선교사가 일본에 도착한지 1년 만인 1959년 10월 2일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동경교회라는 이름으로 첫 예배를 본 이후 전국적 조직 확대에 힘썼다. 그 결과 현재 일본 통일 교회협회는 신자 수 약 60만 명에, 교회나 수련소 등 관련 시설이 전국에 266곳이나 있는 대형 종교단체로 성장했다.



▎송용천 일본 전국축복가정총연합회 총회장(왼쪽)과 도쿠노 에이지 일본 통일교회협회장은 한학자 총재를 중심으로 ‘ 초종교·초국가’를 완성해 세계 평화를 구현하는 데 일본이 선두에 서겠다고 다짐한다. 송 총회장과 도쿠노 회장이 문선명 총재의 가르침을 정리한 ‘천성경’과 ‘평화경’을 들고 있다.





반세기 이어온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일본 사랑

도쿠노 회장의 설명이다. “문 총재는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을 예견했다. 문 총재는 1965년 1월 28일부터 10월 10일까지 제1차 세계 순회에 나섰는데, 첫 번째 방문 국가가 일본이었다. 일본 통일교회는 비록 신도 수는 적었지만 이미 종교법인으로 승인을 받고 활발한 전도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때였다.

이후 문 총재는 일본 교회 발전을 위해 여러 차례 방문했고, 한학자 총재 역시 자주 일본을 찾아 공개강연 집회, 특히 여성 강연집회를 다양하게 주재했다. 1995년 9월 14일 도쿄돔에서 세계 53개국 대표 등 5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세계평화여성연합 창립 3주년 기념대회에는 조지 H.W.부시 전 미국 대통령 부처가 특별 손님으로 초청되기도 했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통일교는 세계 선교의 국가적 사명을 설명할 때 한국과 일본을 부부관계로 규정한다. 한국이 아버지 나라이며, 일본은 어머니 나라다. 굳이 역사를 꺼내지 않아도 두 나라가 세계 평화를 위해 손잡고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뜻이다. 게다가 최근 한·일관계가 과거사와 영토 문제로 갈등을 겪으며 악화되고 있지 않나? 그런 상황에서 한학자 총재가 일본을 첫 해외 순방지로 택한 것은 한·일 양국이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한 총재의 일본에 대한 애정은 깊고 견고한 듯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문 총재와 함께 10여 차례, 단독으로는 20여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이번 강연회를 포함해 순회강연도 140차례에 이른다. 한 총재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이 하나돼야 한다는 역사인식을 갖고 일본에서 특별강연·세계대회·축복결혼식·훈독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주재하며 일본을 위해 정성을 들이고 품었다. 이번 순회강연에서 한 총재가 일관되게 강조한 메시지에서도 그런 애정은 그대로 묻어난다. 그는 “일본은 아시아의 존경 받는 나라의 길로 나가야 한다.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고 한국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순회강연에서 일본 각계 지도층으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은 것도 한 총재의 이 같은 열정을 일본인들이 이해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안호열 대외협력실장은 “한 총재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일본이 자국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동북아와 더 나아가 세계 평화를 위해 힘써야 한다고 권면했다”고 말했다.

9000여 쌍 축복결혼, 한·일 간 장벽 허물어

통일교가 일본에서 엄청난 교세를 확보한 것은 이념적·인간적 결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가정의 중요성과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통일원리가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믿음을 갖게 만든 점은 이념적 결합으로 볼 수 있다. 인간적 결합의 대표적 사례는 ‘교차축복결혼(국제합동결혼)’이다. 축복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룬 축복가정은 한국과 일본이 모두 모국이기 때문에 갈등과 미움을 갖게 될 수 없다는 원리였다.

안호열 실장의 설명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1910년 한일합방을 거쳐 1945년 8월 15일 광복절까지 한국은 40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인해 양국은 매우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1965년 ‘한·일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 협정)이 체결돼 양국 간의 국교가 회복됐다. 당시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국교가 정상화됐다해도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를 둘러싼 문제는 여전했기에 양국 간의 국민감정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문 총재는 원수 관계에 있는 양국을 하나로 묶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은 국제합동결혼식으로 보았다. 국가나 민족이 역사적인 원수 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양국의 선남선녀가 부부의 연을 맺고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자녀가 태어난다면 그 자녀는 양국의 원수 관계를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축복결혼식이 처음으로 열린 것은 1968년. 그 해 2월 22일 한국에서 43쌍의 축복식이 거행됐고, 일본에서는 쿠보키 오사미 회장 부부와 오오야마 키미코가 참가했다. 1969년 5월 1일 43쌍 중 22쌍의 축복식이 도쿄에서 행해졌다. 1970년대에 들어와 축복결혼식이 점점 대형화하면서 1970년 10월 21일 777쌍의 축복식에 일본에서 235쌍(국제 축복 4쌍)이 참가했다. 1975년 2월 8일에는 서울에서 1800쌍의 국제합동결혼식 이후 일본의 참가자는 크게 늘어났다.

한·일, 일·한 축복가정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은 1988년 6500쌍의 국제합동축복결혼식 이후부터다. 6500쌍 중에서 한·일, 일·한 축복가정은 약 2600쌍이었다. 그리고 1992년 3만 쌍, 1995년의 36만 쌍 국제합동축복결혼식에서도 각각 수천 쌍의 한·일, 일·한 축복가정이 탄생했다.

그 이후에도 축복결혼식 때마다 한·일, 일·한 축복가정이 지속적으로 탄생됐고, 최근에는 축복가정 2세·3세 중에서도 인연을 맺는 경우도 늘어나는 추세다. 현재 일·한 축복가정으로서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부인은 2500여 명, 한·일 축복가정으로서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부인은 7000여 명에 이르러 다양한 분야에서 한·일 간의 우호친선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양국 간 축복가정의 역할에 대해 통일교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 부인들은 한·일 양국의 가교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모범적인 활동을 펼친다. 이들 일본 부인 가운데는 농촌의 남성에게 시집간 사람도 있다. 농어촌 마을은 한국 여성조차 등을 돌리는 곳 아닌가? 그런 곳으로 시집가서 남편과 아이들뿐만 아니라, 시부모와 그 친족을 위해서 열심히 생활하는 모습은 모든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들 일본인 신부 이야기는 한국 사회 내에서 그동안 자주 화제가 돼 언론 매체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내용은 일본 부인들이 각종 지방자치단체 및 기관이 수여하는 ‘효부상’을 거의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한·일 양국의 관계개선에도 앞장서고 있다.”

송용천 총회장이 한·일 간의 축복결혼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문 총재는 축복결혼을 통해 세계인이 혈통적으로 하나가 된다면 국가적 갈등이나 대립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믿었다. 한·일 양국에는 벌써 축복가정이 9000여 곳에 이른다. 이들 가정의 2·3세들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모두 말할 뿐만 아니라 두 나라를 모국으로 생각한다. 더 많은 축복가정이 탄생한다면 결국 한국과 일본의 갈등도 더욱 엷어질 것이다.”

아울러 통일교는 한·일 여성 16만 명의 자매결연을 추진하기도 했다. 1994년 3월 11일 서울 올림픽공원 제2 체육관에서 한국과 일본 여성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한·일 여성 자매결연식을 열어 17만 9000쌍의 한·일 여성이 자매의 연을 맺었다. 통일교가 한·일관계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사례도 있다.

승공운동이 그것이다. 문 총재는 승공운동을 일본에 확산시키기 위해 1972년 5월 1일 국제승공연합 재일본부를 결성했다. 일본에 국제승공연합이 창립되기 이전에도 강사들에게 승공강의를 할 수 있도록 이론을 무장시켰다. 이들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거점인 조선대학 등지에 파견돼 대대적으로 승공강의를 했다. 그러면서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 방문을 추진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남북이 극한대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나 조총련은 대립과 반목을 계속했다. 이는 재일동포들의 결속력을 반감시키고 교포사회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그래서 문 총재는 우선 재일동포부터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고 보고 1975년 9월 추석성묘단 모국 방문을 주선했다. 이들은 광복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해 가족 친지들과 감격의 상봉을 했다.

당시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 이 행사가 수차례 거듭되면서 우리 사회에도 상당한 충격을 안겼다. 이는 문 총재가 국제승공연합 최용석 전 이사장을 파견해 조총련을 상대로 승공교육을 펼치면서 남북의 현실을 바로 깨닫게 하고 민단과 조총련 사이에 화해의 전기를 마련한 결과였다. 특히 최용석 전 이사장은 1975년 5월 16일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사업의 문을 연 공로로 5·16민족상 안보부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2년 9월 일본 통일교회 본부 안에 남북통일국이 개설돼 일본의 재일동포를 중심으로 한 남북통일운동을 추진해왔다. 2004년 7월에는 ‘재일동포 화합’ ‘한반도의 조국통일’ ‘세계 평화’라는 이념 아래 평화통일연합이 창설됐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위하는 삶’의 참사랑을 근본정신으로 삼고 국내외 한민족(조선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도모하며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가정을 중시하는 통일원리가 일본인들에게 어필한 것이 통일교가 일본에서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라는 게 일본인들의 평가다. 오야마다 히데오 세계평화연합 회장(왼쪽)과 아오야마 다카시 전 문부과학대신이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민단과 조총련의 화해의 길 터 남북관계 개선

주목할 대회는 2004년 11월에 열린 ‘총심정 동족권 평화통일대회’이다. 한민족 대화합의 상징적 행사였던 이날 대회에는 민단과 조총련 대표 각 600명, 영호남 대표 1000명 등 총 2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지역 이기주의가 팽배했던 지난 시대를 청산하고 참사랑과 희생봉사의 정신으로 평화와 통일시대를 여는 선구자가 될 것과 민족 대화합과 평화통일운동에 적극 참여한다는 등 5개항의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이날 재일동포들은 남북분단의 현장인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서 사상의 벽을 넘어 한마음으로 조국의 평화통일은 염원하는 ‘남북평화통일기원제’를 열었다. 2005년 7월에도 민단과 조총련에서 각 1100명이 참가한 가운데 화합의 자리를 마련했으며, 2005년 12월에는 재일동포 1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임진각에서 ‘조국통일 평화대행진’을 갖는 등 지속적인 화해운동에 나서고 있다.

송용천 총회장은 “통일교가 승공운동을 펼칠 당시 일본에 공산주의가 득세하고 있을 때였다. 통일교의 승공운동이 일본의 공산화를 막은 셈”이라며 “일본인들 역시 통일교의 이런 활동을 가슴 깊이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승공운동은 통일교가 일본 사회에서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계기도 마련해주었다. 9선의 중의원으로, 2001년 고이즈미 정권 당시 문부과학성(한국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아오야마 다카시 전 장관도 그중 한 명이다. 나고야 대회에 참석한 아오야마 전 장관은 기자와 만나 한·일관계에서 통일교가 기여한 바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의 많은 정치인은 통일교의 승공운동과 통일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는 한국과 일본이 원수지간 아니었나?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통일교가 가교역할을 해 한·일 정치인 간 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화했다. 한·일의원연맹이 만들어진 것도 한·일 간 정치인의 해묵은 감정을 해결해서 가능했다. 통일교가 일정 역할을 했다고 본다.”

통일교가 추진한 양국 화해의 상징적 사건은 한일터널 추진을 들 수 있다. 한일터널은 문 총재가 1981년 국제평화고속도로 건설을 선언하면서 그 첫 단계로 제안한 것이다. 문 총재가 한일터널 건설을 주창한 것은 1981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제10차 국제과학통일회의에서였다. 통일교는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1983년 5월 일본에 ‘일한터널연구회’를 설립해 일본 사가현 가라쓰지역, 이키섬, 대마도 일원 등에 대한 육상 및 해저지질조사 등을 체계적으로 실시했다.

1986년 10월부터는 사가현 진제이초 나고야에서 파일럿 터널공사를 착공했다. 같은 해 한국에서도 한일터널연구회가 설립됐고, 1988년 거제도 일원에서 지질조사까지 마쳤다. 통일교는 1984년 세계평화터널재단을 창설하고, 산하에 ‘한일터널 포럼’도 설립하는 등 체계적인 연구와 홍보활동을 펼쳤다.

한일터널 건설이 공론화되자, 한·일 양국의 지도자들도 터널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90년 5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물론,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 2006년 1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터널을 만들면 한·일 양국이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한일터널 건설에 대해 언급했다. 일본 측에서는 2000년 10월, 모리 요시로 총리가 서울 아셈회의에서 한일터널 건설을 제안했다.

한일터널 건설은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우호증진이나, 철도가 한반도를 경유하기 때문에 유라시아 대륙 각지를 통과하는 물류 허브로서의 기능할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여객과 물류 비용절감에 크게 기여하고, 미국·중국에 이어 세계 경제 규모 3위권인 일본이 가담하면서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철도망 구축에 상승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세계 각국을 연결하는 철도망이 북한을 거치게 될 경우 남북통일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한학자 총재 역시 한일터널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듯하다. 한 총재는 사이타마에서 열린 수도권 대회에서 직접적으로 한일터널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일본은 지리적으로도 한국과 하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한 총재는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매우 가까운 나라고, 현재 동북아 상황이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과 북한,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과 일본, 이렇게 4개국이 첨예한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섭리적으로 민주국가인 한국과 일본이 하나돼야 동북아를 넘어 세계 평화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한·일 양국이 평화관계를 형성하기 힘들다. 결국 양국의 관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류를 해야 한다. 한일터널이 연결될 때 한·일관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한일터널의 추진과 관련해 통일교 관계자는 “2011년 국토해양부가 한일터널이 경제성이 없다는 평가를 내려 중지됐지만, 한일터널 건설은 한·일 양국의 과거사를 청산하고 신시대를 여는 상징적 사건이 될 것”이라며 “국제 정치·경제의 중심축이 아시아·태평양지역으로 급속히 이동하는 환태평양 시대를 맞아 한일터널은 동북아 평화는 물론 세계평화 정착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마법의 터널’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오야마 전 장관 역시 “한·일은 하나가 될 수 있다”며 “그런 의미에서 한일터널은 매우 뜻 깊은 사업이며, 이런 점에서 통일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비전 2020’ 한·일관계에도 새로운 전환점 마련할까?

통일교의 목표는 ‘초종교·초국가’를 완성해 세계 평화를 구현하자는 것이다. 이는 문선명 총재의 유업이기도 하다. 한 총재 역시 문 총재의 성화 이후 ‘중단 없는 전진’을 주창하며, 유업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한 총재는 ‘비전 2020’으로 중장기 플랜을 구체화했다. ‘비전 2020’은 문 총재 탄생 100주년이자 문·한 총재 성혼 60주년이기도 한 2020년까지 국내 신도 600만 명, 세계적으로 신도 1000만 명의 확실한 지지기반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통일교는 이를 위해 전 세계 194개 선교국 가운데 43개 전략 국가를 선정해 선택과 집중을 통한 선교정책을 펼칠 예정이다. 아시아에서는 네팔·필리핀·대만·인도·태국·말레이시아 6개국에서 중점국가다.

한 총재의 이런 구상을 완성해줄 원동력은 역시 일본 신도들이다. 현재 통일교의 세계적 기반은 1960년대 이후 세계 선교의 큰 축을 담당했던 일본 신도들의 헌신적 활동 때문이었다는 게 통일교 내의 평가다. 한 총재도 ‘비전 2020’의 성공을 위해서는 일본인 신도들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보고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오늘날 통일교 교세를 만든 원동력은 일본 신도들의 불 같은 정성과 헌신이었다. 앞으로도 일본 신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 총재의 이번 일본 주요 선교지역 순회는 한 총재 시대의 개막을 일본 신도들에게 알리고 이들의 적극적 활동을 촉구하는 성격도 지니고 있다. 일본 통일교회의 한 관계자는 “세계 선교의 최일선에 서 있고, 앞으로도 선교의 핵심 축을 담당할 일본 신도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어깨를 다독여주는 것은 한 총재의 몫”이라며 “한 총재를 중심으로 신도들이 단결해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베 일본 총리의 우익 행보 지속으로 한·일 양국 관계가 냉각기를 계속 이어간다. 이런 가운데 통일교 문선명 총재가 수많은 민간 교류를 통해 한일 간 화해의 물꼬를 트고, 한일터널 건설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마련해 환태평양 시대에 대비하는 등 지난 반세기 동안 추진해온 각종 사업이 다시 주목을 받는다. 한학자 총재를 중심으로 새롭게 출발한 통일교의 노력이 한·일관계에도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