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7

샹까라에서 덧놓음(가탁)의 의미와 의의 박효엽, 인도철학 제30집(2010), 157~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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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까라에서 덧놓음(가탁)의 의미와 의의
박효엽*1)
인도철학 제30집(2010), 157~189쪽


Ⅰ 우빠니샤드의 명상과 덧놓음. 
Ⅱ 명상 수행으로서 덧놓음.
Ⅲ 인식론 결함으로서 덧놓음. 
Ⅳ 방법론 략으로서 덧놓음. 
Ⅴ 샹까라에서 덧놓음의 의의.


요약문 [주요어: 샹까라, 베단따, 덧놓음, 명상, 오류, 방법]

우빠니샤드에서 명상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는 덧놓음(가탁)은, 이를 수용하고 변용하면서 ‘베단따’라는 체계를 정립하는 샹까라에게 세 가지 의미로 나타난다. 
세 가지 의미란 명상 수행으로서의 덧놓음, 인식론  결함(오류)으로서의 덧놓음, 방법론 략으로서의 덧놓음이다. 
첫째, 명상 수행으로서의 덧놓음은, 유속성 라흐만에 표 인 명상으로 기능하면서 무속성 라흐만에 한 지속 인 상기를 낳
기 때문에, 명상과 지식 사이에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다. 

둘째, 명상 덧놓음의 변형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인식론 결함으
로서의 덧놓음은, 인간의 모든 인식활동을 규정하는 근본 이고 보편 인 조건으로서, 주 과 상을 덧놓음의 상으로 삼고 순수주 을 덧 놓음의 토 로 삼는 이 구조를 보여 다. 

셋째, 인식론 덧놓음의 방법 확장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방법론
 략으로서의 덧놓음은, 통 인 방법인 ‘덧놓기와 걷어내기’(가탁과 탈가탁)를 가리키는데, 덧놓음의 토 와 상 사이에 발생하는 혼동을 분별로 이끄는 가장 포 이고 심 인 략이다. 

샹까라에게서 세 가지 의미를 가지는 이 덧놓음은, 
이원성이 비이원성으로 환되는 과정에 해 신비에의 호소가 아니라 합리 인 설명이 가능하게끔 한다. 
한 ‘베단따’라는 체계를 다른 체계들과 분명하게 차 별되게끔 하며, 
베단따가 인도의 심 통이 되는 데 암묵 으로 일조 하기도 한다.
 
* 박효엽 : 경북 동서사상연구소 연구 빙교수. mayadotcom@hotmail.com


Ⅰ. 우빠니샤드의 명상과 덧놓음

고 인도에서 명상(up san )의 여러 유형 가운데 하나로 알려 져 있는 ‘adhy sa’(흔히 ‘假託’으로 번역하지만 이 에서는 ‘덧놓 음’으로 번역함)1)라는 말은, 어근 ‘√s’(앉다, 살다)에 두사 ‘adh i’(~ 에)가 붙은 동사 ‘adhy s’의 명사형으로서 ‘~ 에 앉음, 
 
1) ‘가탁’ 신에 ‘덧놓음’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 것에 해 다음 3가지 을 언 하고자 한다. 첫째, 학계에서 ‘가탁’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된 이상, 왜 굳이 ‘덧놓음’이라는 번역어를 새롭게 제시하는가 하는 문제제기이다. 하지만 학문의 수용사가 번역어의 변천사와 궤를 같이 하기 때문에, 이 문제제기는 무의미하다. 비 의 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새로운 번역어를 제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새롭게 제시되는 번역어 그 자체’여야만 한다. 둘째, ‘덧놓음’을 번역어로 제시하는 이유는 이 용어가 일상어라는 데 있다. 일상어란 일상인들이 그 말의 내포를 바로 짐작할 수 있는 말이라고 규정해 볼 수 있다. 일상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아 그 내포를 거의 짐작할 수 없는 ‘가탁’ 는 ‘부탁’(付託)의 경우와 달리, ‘덧놓음’이란, 구나가 ‘겹침’이라고 알고 있는 ‘덧’(덧신, 덧 고리, 덧나다, 덧입다 등)이라는 두사와 ‘놓다’라는 가장 기본 인 동사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덧놓다’의 명사형이기 때문에, ‘겹쳐 놓음’이라는 그 내포를 바로 짐작할 수 있다. 결과 으로 ‘무지에 의해 가탁된’과 같은 표 보다는 ‘무지에 의해 덧놓인’이라는 표 이 의미를 달하는 데 훨씬 효과 이다. 더 나아가 ‘adhy sa’라는 말이 토 와 상의 계를 바탕으로 하는 한, ‘가탁의 토 , 가탁의 상’과 같은 표 보다는 ‘덧놓음의(덧놓이는) 토 , 덧놓음의(덧놓이는) 상’이라는 표 이 더 선명하게 그 계를 드러낼 수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부분이 수용하는 어 번역어인 ‘superimposition’은 ‘얹음, 덧붙임, 포개 놓음, 첨가함’ 등을 의미하기에 ‘덧놓음’이라는 번역어와 거의 다르지 않다. 셋째, 이 의 목 가운데 하나는 ‘덧놓음’이라는 번역어를 제시하고 이 번역어로써 ‘adhy sa’를 심으로 개되는 샹까라의 체계를 ‘다시-쓰기’ 하는 것이다. 즉 ‘덧놓음’이라는 번역어가 얼마나 매끄럽게 샹까라의 사유를 ‘보다 잘’ 설명해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이 이 의 부수 목 이기도 하다. 

놓임, 들어감’이라는 뜻이다. 명상 가운데 ‘태양을 비슈 로 명상 하다’라는 형태처럼 어느 하나(태양)의 ‘에’ 다른 하나(비슈 )가 ‘앉거나 놓이는’ 것이 ‘adhy sa’인 셈이다. 따라서 ‘adhy sa’란 주 체의 의도성을 고려한다면 ‘태양 에 비슈 를 덧얹음’ 즉 ‘어떤 것 에 다른 것을 덧놓음’을 가리키기에, 최종 으로 ‘덧얹음, 덧 놓음’ )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에서, 덧놓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경우, 우선 으로 
그것을 베다 시 에 꽃핀 명상의 일종이라고 간주해야만 한다. 우 빠니샤드의 명상이란 라흐마나(Br hmaṇa)에서 발아하고 아란 야까( raṇyaka)에서 만개한 명상이 자아에 한 지식으로 변환되 는 지 을 보여 다. 다른 식으로 말해, 베다 시 에 차 으로 진행된 지식의 내재화·내면화 과정에서, 제의(행 )에 한 지식 을 이어받은 명상의 지식이 ‘지식 그 자체인 순수주 ’에 한 지 식으로 변환되는 지 을 보여 다. ) 이 경우에, 거칠게 표 하자 면, 제의의 지식이란 ‘A(상 인 것)로써 B(월 인 것)를 기원 하다’(A라는 제의로써 B라는 결과를 얻다)라는 형태이고, 명상의 지식이란 ‘A를 B로 명상하다’(A를 B로 명상함으로써 B라는 결과 를 얻다)라는 형태이고, 주 의 지식이란 ‘A를 가진 자아가 곧 B 이다’(A를 가진 자아가 곧 B와 동일하다고 앎으로써 B라는 결과 를 얻다)라는 형태이다. ) 제의의 지식은 A와 B의 물리 인과 계에, 명상의 지식은 A와 B의 심리 인과 계에, 주 의 지식은 A′(A를 가진 자아)와 B의 심리 동일성에 기 를 두고 있다. 결국 ‘가까이 앉음’(up san ) 혹은 ‘지식’(vidy )으로 표 되는 우 빠니샤드의 명상은 ) ‘심리 인과 계에 이른 명상’이 ‘심리 동 일성을 지시하는 지식’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그 가운데 서 덧놓음이라는 것은 그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흔 일 수 있 다. 

명상이라는 것이 ‘A를 B로 명상하다’라는 형태인 이상, 명상의 
종류는 자연스럽게 A와 B의 계에 의해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 다. 어떤 분류에 따르면 명상은 크게 결합(sampad), 덧얹음( ropa), ) 덧놓음(adhy sa), 흡수(saṃvarga)라는 네 가지로 나뉘는데, ) 이 모두는 명상의 토 인 A와 명상의 상인 B의 계에 따른다. 이 네 가지는 부 외 인(b hya) 명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와 달 리 내 인(antar) 명상은 자기 자신과 계하며 자신을 특정한 신 격으로 명상하는 방식이다. 외 인 명상은 이미지(pratim , prat ka) 명상으로, ) 내 인 명상은 자기 악(ahaṃgraha) 명상으로 각각 불리기도 한다. 자기 악 명상이란 ‘나는 그 아뜨만이다’, ‘나는 그 것이다’ 등과 같이 ‘나’의 정체성을 악하는 명상으로서, ‘나’를 속 성을 가진 상으로 명상하면 유속성(saguṇa) 명상이 되고 속성 을 가지지 않은 상으로 명상하면 무속성(nirguṇa) 명상이 된
다. ) 그런데 단지 외 인 명상에 불과한 덧놓음은 두 가지 종류의 내 인 명상에까지 그 독특한 형식을 확장함으로써, 명상의 특징 인 ‘선후의 인과 계’가 지식의 특징인 ‘무 계의  동일성’ 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덧놓음은 비록 우빠니샤드에서 단지 명상의 한 종류에 불과할 지라도 ‘개별 자아와 라흐만의 동일성’에 한 가르침과 련 해서 매우 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우빠니샤드에서 ‘A를 B 로 명상하다’라는 지식이 ‘A를 가진 자아가 곧 B이다’(A′가 곧 B이다)라는 지식으로 이되는 경우에, 후자의 지식은 ‘A에 A와 는 다른 B를 덧놓아서 명상하다’라는 덧놓음의 계를 비 인 형식으로 삼아서  동일성을 취하기 때문이다. 덧놓음에서는 반드시 그 토 인 A가 열등한 것이고, 그 상인 B가 A와는 분 명히 다른 우등한 것이어야 한다. 열등한 A에 A와는 다른 우등한 B를 덧놓음으로써 이 명상은 B라는 심리 효과·결과를 얻는다. 그런데 명상의 상보다 명상의 주체에 한 심이 더 강해지는 내재화·내면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이 외 인 형태인 덧놓음은 자 기 혹은 ‘나’에 한 내 인 명상에도 자연스럽게 연장된 채로 용된다. 애당 덧놓음에서 명상의 주된 상은 우등한 ‘덧놓음의 상’이 아니라 열등한 ‘덧놓음의 토 ’이므로, 덧놓음은 명상의 주체인 ‘자기’를 악하려는 내 인 명상과 매우 친화 일 수 있 는 셈이다. 더욱이 내 인 명상은 사실 ‘A′가 곧 B이다’와 같이 내 인 지식에 다름 아니지만, A′가 곧 ‘나’ 자신이므로 열등한 ‘나’에 우등한 신격이나 라흐만을 덧놓아 명상하는 방식을 기본 으로 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신격은 유속성이고 라흐만은 무 속성이기에, ) 이 명상을 통해서는 마치 열등한 자기가 유속성의 신격이거나 무속성의 라흐만인 듯이 자기에 집 하고 몰입할 수 있다. 바로 이처럼 덧놓음의 명상은 열등한 것을 우등한 것인 양 격상하고 고양하는 방식을 띰으로써, 개별 자아와 라흐만 의  동일성에 한 지식을 해 그 길을 열어 놓는다. 

사실 개별 자아와 라흐만의 동일성이라는 것은 차이에 기
반을 둔 동일성이어야 한다. 덧놓음은 어떤 것에 그것과는 상이한 것이 덧얹히는 형태이므로 확실히 차이에 기반을 두는 명상이다. 그리고 개별 자아와 라흐만이 이처럼 차이를 가짐에도 동일 성의 범주에 묶이기 해서는, 반드시 하나는 허상이고 다른 하나 는 실상이어야 한다. 즉 덧놓음의 토 와 상 사이에 나타나는 ‘다름이나 차이성’이 ‘같음이나 동일성’으로 바 기 해서는, 본질 으로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 둘로 나타난다는 방식으로 설명해 야만 한다. ) 그리하여 덧놓음은 열등한 허상에 우등한 실상을 덧 얹는 ‘임의 인’ 명상이기에, 집 하고 몰입해야 하는 것으로서의 명상의 주체가 ‘불변 으로’ 유일무이한 실재인 순수주 임을 아 는 데 결정 인 기여를 한다. 따라서 덧놓음의 명상은 우빠니샤드 의 내 인 자기 악 명상에로 확 용되어 개별 자아(명상의 주체)와 라흐만(순수주 )이 상 으로 차이 있어 보이지만 본 질 으로 동일한 것임을 드러냄으로써, 양자에 한  동일 성의 지식을 얻는 데 형식 인 토 를 제공하고 그에 따라 방법 인 기여도 한다. 
그 다면 이와 같은 덧놓음은 우빠니샤드 이후에 그 상과 역 할에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특히 우빠니샤드의 사상을 직 계 승하고 체계화한 샹까라(Śaṅkara, 기원후 8세기경)는 이것을 어떻 게 활용하고 있을까? 우빠니샤드에서 명상의 일종인 덧놓음이 최 고의 지식을 획득하기 한 형식 ·방법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 인다면, 이것은 샹까라에게서도 분명 의미의 변화를 겪게 되고  다른 의의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결국 덧놓음에 한 이와 같은 질문들은, 이 개념이 샹까라의 베단따 철학에서 가장 핵심 이면 서 풍부한 함의를 가지는 이상, 그 철학 체계가 작동하는 원리를 통합 으로 이해하는 데 여러 시사 을 던져 것이다. 


Ⅱ. 명상 수행으로서 덧놓음 

샹까라의 작이 부분 통 문헌에 한 주석서라는 과 
별도로, 그의 사상을 구체 으로 들여다보아도 그가 통주의자라 는 사실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단 그가 미맘사의 제의 
심 이고 행 심 인 세계 을 거부한다고 해도 일상 차원 의 행 에 해서 그다지 부정 이지 않듯이, 그가 아무리 지식을 해탈의 수단으로 강조한다고 해도 오랜 통을 가진 명상의 힘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샹까라가 지속 으로 견지하는 태도는 명상이 지식의 수단이요12) 지식이 해탈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 처럼 그는 명상과 지식을 차등화 함으로써 명상의 통을 정 으로 계승하고 지식의 통을 확고하게 정립한다. 
그럼에도 행 와 지식의 구분이 선명한 것과 달리 명상과 지식 은 그 구분이 모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컨, 라흐마 수 뜨라 의 많은 부분에서 자는 라흐만이 명상의 상임을 밝히 고, 샹까라 역시 그 주석에서 이 을 논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흐만은 하나일지라도, ‘한정자와의 연계를 필요로 하는 명상 상인 것’과 ‘한정자와의 연계를 배제하는 지식 상인 것’으로서 [ 라흐만이] 베단따들에서 가르쳐진다고 밝히기 해, 작의 남은 
[부분이] 시작된다.13)
비록 명상 즉 사유가 마음에 속할지라도, 여 히 인간이 행할 수도 행하지 않을 수도 혹은 다른 방식으로 행할 수도 있다 — 사람에 의존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식은 지식수단으로부터 산출된다. 그리고 지 식수단은 존재하는 바 로의 사물과 계한다 — 그 이유로부터 지식 은 행할 수도 행하지 않을 수도 혹은 다른 방식으로 행할 수도 없다 
— 으로 그것은 오직 사물에 의존한다.14) 
 
여기서 앞의 인용문은 라흐마 수뜨라 주석  1.1.12의 앞주석
 
인데, 주석가는 라흐마 수뜨라 라는 작의 나머지 부분이 즉 1.1.12 이후의 모든 부분이 ‘명상 상으로서의 라흐만’과 ‘지식 상으로서의 라흐만’이라는 두 측면을 이해시키기 한 해명에 불과하다고 고백한다. 곧 유속성 라흐만과 무속성 라흐만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이 베단따에서 가장 요한 과제임을 시인하는 셈이다.15) 그런데 명상 상인 유속성 라흐만은 사람에 의존하
 
12) 명상은 진정한 실재를 나타나게끔 하기 때문에 비이원 지식의 보조자(upak raka)라고 알려진다. ChUBh, 서문 참조.
13) BSBh, 1.1.12 앞주석. 참고로, ‘앞주석’이라는 말은 특정 수뜨라의 ‘뒤에’ 놓인 주석이 아니라 그 ‘앞에’ 놓인 주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쓴다. 
앞주석에서는 주로 수뜨라와 련된 배경지식이나 질문을 제시한다. 
14) BSBh, 1.1.4.


는 것이기 때문에 명상하는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는 여 지가 있다. 반면에 지식 상인 무속성 라흐만은 사물에 의존하 는 것이기 때문에 명상하는 사람과 무 하게 존재하는 바 로 드 러날 뿐이다. 결국 동일한 상인 라흐만의 두 측면에 따라 명 상과 지식이 구분됨으로 말미암아, 양자를 구분하는 것이 모호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유속성 라흐만은 사람에 의존하고 무속성 라흐만은 사물에 의존함으로 말미암아, 양자를 구분하는 것은 선명하기도 하다. 그러므로 샹까라의 체계는 명상과 지식의 경계 를 곡 사가 을 타듯이 긴장감 있게 넘나드는 방식으로 작동한
다고 말할 수 있다.16)
샹까라가 이처럼 명상과 지식을 구분하는 것은 종국 으로 해 탈이라는 결과를 낳는 데 어느 수단이 더 유용한가 하는 을 따 지기 때문이다. 기존의 미맘사 학 와 차별하기 해 행 와 지식 을 구분하고 기존의 요가 학 등과 차별하기 해 명상과 지식 을 구분한 채, 오직 지식만이 해탈에 합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다. 행 는 물리 주체와 상을 갖는 반면에 명상은 심리 주 체와 상을 갖는다. 그러나 행 도 명상도 둘 다 주객의 이항 립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결코 해탈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없 다. 특히 명상의 상과 확연하게 상이한 명상의 주체를 상정함으 로써 해탈로부터 멀어지는 명상과 달리, 지식은 상과 주 의 이 원성을 기해 버림으로써 해탈을 가능하게 만든다.17) 이와 같이 명상은 그 작동방식이 주객 이원성에 기 해 있기에 해탈이라는 
 
15) 유속성과 무속성 라흐만으로 차이(bheda)를 두는 것은 오직 명상을 해서일 뿐이고, 문헌의 본래 취지는 양자의 무차이(abheda)이다. BSBh, 3.2.12 참조. 이 외에도 유속성 라흐만을 구분하는 것이 오직 명상을 해서일 뿐이라는 언 은 그의 작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16) 샹까라의 문헌 해석학도 명상과 지식의 경계를 빈다. 를 들어, 확고한 권 를 가진 특정 문헌에서 발견되는 비일 인 부분을 명상의 상인 유속성 라흐만과 련된다고 해석함으로써, 지식의 상인 
무속성 라흐만을 그 문헌의 유일한 취지로 인정한다. 
17) ChUBh, 서문 참조. 

결과를 산출할 수 없지만 , 지식은 비이원성의 작동방식을 통해 해 탈이라는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 
그 다면 덧놓음이라는 형태의 명상은 샹까라가 말하는 명상 가운데서 어떤 표성을 가지는 것일까? 샹까라가 “라흐만에 한 명상들의 어떤 것들은 번 을 의도하고, 어떤 것들은 진 해탈을 의도하고, 어떤 것들은 의례(행 )의 극 화를 의도한다 — 그것들의 차이는 ‘특수한 속성’과 ‘한정자’의 차이에 따른다.”18) 라고 밝히듯이, 명상의 목 은 다양하고 그에 따른 명상의 결과도 다양할 뿐이다. ) 그 지만 샹까라에게서 가장 요하고  가장 많이 언 되는 것은, 주 할 필요도 없이 유속성 라흐만 혹은 신에 한 명상이다. ) 이 명상은 필연 으로 우빠니샤드처럼 ‘A 에 A와는 다른 B를 덧놓아서 명상하다’와 같은 형태이다. 왜냐하 면, 명상이 지식의 수단이라는 을 염두에 둔다면, ‘A라는 명상 의 주체’에 ‘A와는 다른 B로서의 유속성 라흐만’이 덧놓이는 명 상이어야만,  하나의 다른 B로서 무속성 라흐만이 곧 A의 본 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식을 발생시킬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 다. 결국 단지 명상의 상에 불과하던 무속성 라흐만이 우빠니 샤드에서 지식의 상이 되는 과정은 샹까라에 의해 더욱 체계 으로 재 되는 셈이다. 요컨 라흐마 수뜨라 주석 에서 명상 이란 주로 덧놓음을 형식으로 하는 유속성 라흐만에 한 명상 이고, 이 덧놓음의 명상은 무속성 라흐만에 한 지식을 가능 하는 수단이 된다. 
 
샹까라는 라흐마 수뜨라 주석 에서 명상으로서의 덧놓음에 해 몇 차례 언 하고 있다. 그는 1.1.4에서 라흐만과 아뜨만의 동일성에 한 지식이 결합도 아니고 덧놓음도 아니라고 말한 다. ) 이 언 은 사실 그러한 동일성의 지식이 자칫 명상에 의해 서도 가능하다는 식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음을 간 으로 고백 한 것이다. 그만큼 그는 주객 이원성으로 작동하는 명상이 지식과 혼동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샹까라는 3.3.9에서 덧놓 음을 직 정의하고 있는데, 덧놓음이란 토 와 상이라는 양자 를 필요로 하고  덧놓음의 상에 의해 덧놓음의 토 가 지양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를 들어, ‘옴’(Om)이라는 이름에 라흐 만의 념이 덧놓이는 경우 라흐만의 념에 의해 그 이름이 지양되지는 않는 경우가 덧놓음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정의는 매우 기본 이고 일반 인 것으로서, “어떤 상에 다른 상에 한 념이 놓인다” )라는 자 그 로의 정의처럼, 덧놓음에 
해 별다른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결국 이와 같은 단편 언 으로는 샹까라가 덧놓음을 명상으 로도 이해하고 있다는 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뿐, 그가 명상 으로서의 덧놓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 모를 제 로 알 수는 없다. 다만 이러한 언 과 별도로, 그의 체계에서 명상이라는 것 이 유속성 라흐만을 상으로 하는 이상, 명상 수행으로서의 덧놓음이 그의 체계에 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아무리 강조해 도 지나치지 않다. 명상이 문헌에 의해 제시된 특정한 상에 해 외부 념·생각의 방해 없이 마음의 유사한 변형들을 지속 으로 확립시키는 것이라면, ) 명상을 통해 라흐만을 계속 으 로 생각해야만 라흐만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 그러므 로 우빠니샤드에서처럼 ‘차이성을 동일성으로 바꾸는 구조를 가진 덧놓음’은, 이처럼 명상과 지식 사이에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요컨 , 샹까라에서 ‘덧놓음’이라는 개념은 명상 수행의 
에서 유속성 라흐만에 한 표 인 명상으로 기능한다. 그가 명상과 지식을 그토록 구별하는 이유는, 행 로부터 차별화된 라흐만이 다시 사이비·유사 라흐만과 순수 라흐만으로 혼동 될 여지를 막고자 하는 데 있다.  ) 우빠니샤드의 통을 계승하면 서도, 속성을 가진 사이비·유사 라흐만으로부터 속성을 가지지 않은 순수 라흐만을 차별화하기 해서는, 자에 한 근인 명상과 후자에 한 근인 지식을 ‘수단과 목 의 계’로 설정 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에 유속성 라흐만의 명상을 무속성 라흐만의 지식으로 이어주고  이끄는 데 결정 기여를 하는 것이 바로 덧놓음의 명상이다. ) 자기 자신의 본질이 라흐만임 을 알기 해서는 우선 자기에다 라흐만을 덧놓는 명상이 수행 인 측면에서 유효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Ⅲ. 인식론 결함으로서 덧놓음

흔히 샹까라와 덧놓음을 연 시키는 경우, 덧놓음이란 부분 
 
인식론 결함 즉 무지(avidy )와 유의 인 것을 가리킨다. 라 흐마 수뜨라 주석 의 서문을 ‘덧놓음에 한 주석’(adhy sa-bh ṣya) 이라고 특별하게 부르는 바와 같이, 샹까라는 이 개념을 가장 요한 작의 첫머리에 제시한 채로 주석 작업을 시작한다. 자신의  주석마 도 허구 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 개념은, 인도철 학사에 베단따를 강력하게 각인시키고 샹까라가 최고의 철학자· 신학자로 불리는 데 결정 인 역할을 한다. 베단따는 샹까라가 이 덧놓음을 인식론 으로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상키야·요가나 불교 로부터 차별화되는 형이상학과 수행론마 확보하게 될 정도이 다.28) 
그런데 한 가지 궁 한 은, 샹까라 이 부터 존재하던 이 덧
놓음이라는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이유에서 갑작스럽게 그에 의해 인식론 오류로 등장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일단 명상 수행으로서의 덧놓음을 인식론 결함으로서의 덧놓음으 로 확 용하는 것이 샹까라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덧놓음에 한 주석’에서 그는 여러 학 들이 인식론 덧놓음을 어떻게 간주하는지 소개한 뒤에 그것들을 일반화시켜 정의를 내 리기 때문이다. 샹까라는 오류지식(khy ti)에 한 여러 학 의 이
 
이어지는 데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덧놓음의 명상이다. 
28) Hirst(2005), p. 35 참조.
론들을 덧놓음에 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 이론들은 단순하게 말해서, ‘A를 A가 아닌 것으로 잘못 안다(지각한다)’와 같은 경우 에 왜 그러한 오류지식이 발생하는지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 면서 그는 모든 오류지식 혹은 덧놓음을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속 성으로 함”이라고 정의하며, 이를 보다 인식론 으로 변환시 켜 “그것이 아닌 것에 하여 그것으로 인식함”이라고 정의한 다.29) 바로 여기서 명상에서의 덧놓음과 오류지식에서의 덧놓음 이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을 알 수 있다. 명상으로서 덧 놓음은 ‘A에 A와는 다른 B를 덧놓아서 명상하다’라는 형태이고, 오류지식으로서 덧놓음은 ‘A에 A와는 다른 B를 덧놓아서 인식하 다’라는 형태인 것이다. 후자는 ‘A를 A와는 다른 B로 인식하다’와 같이 그 일반 으로 잘못된 지식을 가리키지만, 이것이 덧놓음 을 구조로 하는 이상, 샹까라는 이 오류지식과 덧놓음을 동일시하 고 있는 셈이다. 결론 으로 샹까라에게 인식론 결함으로서 덧 놓음이란 명상 덧놓음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30) 
그럼에도 샹까라의 이 과업에 해, 덧놓음이라는 개념의 기원
을 두고 볼 때는 변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덧놓음의 토 와 상을 두고 볼 때는 새로운 차원도 함께 제시되는 변형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얼핏 보기에도 열등한 것에 우등한 것을 덧놓는 
 
29) 이 두 가지 정의 모두 ‘덧놓음에 한 주석’에 등장한다. US 산문편 2.51에서는 무지를 “어떤 것에 하여 다른 것의 속성을 덧놓음”으로 정의한다. 무지에 한 이 정의는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속성으로 함”이라는 덧놓음에 한 정의와 거의 일치한다. 
30) 샹까라의 인식론 덧놓음은 ‘자기상정’(abhim na) 혹은 ‘허 자기상정’(mithy bhim na)이라는 개념과도 유의 이다. 그런데 이 개념은 ‘자기가 아닌 것을 자기로 잘못 상정(想定)하는 것’을 가리키므로, 자기와 다른 존재를 자기로 명상하는 모든 내 인 명상 즉 자기 악 명상도 자기상정의 범 에 들어올 수 있다. 결국 ‘자기상정’이라는 개념은 명상 덧놓음과 인식론 덧놓음의 연결고리가 됨으로써 후자가 자의 변형이라는 을 방증해  수 있다. 이 개념은 BSBh, ‘덧놓음에 
한 주석’, 1.1.4, 1.1.21, 1.2.18, 1.2.22, 1.2.24 등에서 지속 으로 등장하는 편이다. 
명상과 주로 우등한 것(실재)에 열등한 것(비실재)을 덧놓는 오류 사이에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지 않는가. 비록 두 종류의 덧놓음이 모두 어떤 것에 그것과는 다른 것을 덧놓는 형식일지라도, 명상으 로서의 덧놓음에서 토 와 상으로 구분되는 것들은 오류로서의 덧놓음에서 둘 다 상으로 환되어 버린다. 바꿔 말하자면, 명 상에서는 경험 자아가 덧놓음의 토 이고 신격이나 유속성 라흐만이 덧놓음의 상인데 비해, 오류에서는 라흐만·아뜨만으 로서 실재 자아가 덧놓음의 토 이고 ‘경험 자아, 신격이나 유속성 라흐만’이 덧놓음의 상이다. 베단따에서 말하는 ‘아뜨 만이 아닌 것’이 경험 자아와 상세계를 가리키는 이상, 인식 론 결함으로서 덧놓음이란 주로 아뜨만에 아뜨만이 아닌 경험  자아와 상세계가 덧놓이는 오류를 가리키는 셈이다. 결국 샹 까라는 명상에서 덧놓음의 토 와 덧놓음의 상 부를 인식론 에서는 아뜨만에 덧놓이는 상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덧놓음의 이 구조를 도입하고 있다. 
아뜨만이 덧놓음의 유일한 토 라는 과 덧놓음이 이 구조를 가진다는 은 샹까라가 덧놓음을 상호 인 것으로 악하면서도 실재와 비실재를 구분하는 데서 암시된다. 
본질 으로 ‘어둠’과 ‘빛’처럼 상충하는 ‘ ’와 ‘나’라는 념들의 
역인 ‘ 상’과 ‘주 ’에서 상호 화(相互轉化)가 부당하다고 확립되어 있는 경우에 그것들 [각각의] 속성들에서도 더더욱 상호 화가 부당 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라는 념의 역이고 순수의식을 본질로 하는 주 에 ‘ ’라는 념의 역인 상과 그 속성들을 덧놓음과, 그 와 반 로 상에 주 과 그 속성들을 덧놓음은 [모두] 허 라고 하는 것이 합리 이다 — 그럼에도 완 하게 분별되는 [각각의] 속성과 [각 각의] 기체(基體)에 한 상호 무분별로 말미암아 각각에 [그것과 다 른] 각각의 본체들과 각각의 속성들을 덧놓은 채로, 실재와 비실재를 결합시키면서 “나는 이것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허 지 식을 기인으로 하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일상의 경험작용’이 있다.31)
 
31) BSBh, ‘덧놓음에 한 주석’. 주 에 상 인 것이 덧놓이는 시가 
여기서 샹까라는 덧놓음이 결코 혼성될 수 없는 주 과 상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말미암아 발생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즉 주 과 상이 분별되어야 함에도 경험의 역에서는 분별되지 않 기 때문에, 이 덧놓음은 인간에게 불가피한 인식론 조건이 된 다. 더 구체 으로 덧놓음의 구조란, ‘주 ’에 ‘ 상이나 상의 속 성’이, 혹은 ‘상’에 ‘주 이나 주 의 속성’이 덧놓이는 형태이다. 주 은 순수의식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실재이고, 상은 비실재 이다. 그런데  다시 샹까라는 덧놓음에 한 논의를 정리하는 부분에서 “이와 같이 ‘나’라는 념을 가진 [내 기 을] 그 자체 (내 기 )의 모든 활동에 한 조자인 내 아뜨만에 덧놓고, 한 그와 반 로 모든 것에 한 조자인 그 내 아뜨만을 내 기 등에 덧놓는다.”32)라고 말한다. 이로부터는 그가 ‘내 기
’(antaḥkaraṇa)33)과 ‘내 아뜨만’(pratyag tman)이라는 두 가지 의 주 을 의도한다고 볼 수 있다. 덧붙여, 이 두 가지의 주 을 분별해서 아는 것이 베단따에서는 가장 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인식론 덧놓음이란 순수주 (내 아뜨만, 순수의식), 주 (내 기 ), 상이라는 3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가운데 순수주 은 주 과 상 사이에 발생하는 상호 덧놓음 의 최종 토 인 것이다. 
 
‘나는 이것이다.’이고, 상에 주 인 것이 덧놓이는 시가 ‘이것은 나의 것이다.’이다. 본체의 덧놓음에 한 시로는 ‘이것(밧 )은 뱀이다.’를, 속성의 덧놓음에 한 시로는 ‘이 (회색) 밧 은 검은색이다.’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덧놓음의 상호성은 이미 샹까라가 명상으로서의 덧놓음에 한 시로서 열등한 것에 우등한 것이 덧놓이는 형태뿐만 아니라 우등한 것에 열등한 것이 덧놓이는 형태를 언 한 으로부터 그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다. 그가 상호 덧놓음의 시로 드는 것은 ‘옴’(Om)이라는 음 과 ‘우드기타’(Udg tha)이다. 
BSBh, 3.3.9 참조. 
32) BSBh, ‘덧놓음에 한 주석’.
33) 내 기 이란 외 감 (기 )이 아닌 내 ·심리 기 으로서, 
일반 으로 마음(manas), 자아 념(ahaṅk ra), 지성(buddhi)이라는 세 가지가 포함된다. 지능(citta)이 포함되기도 한다. 
만약 덧놓음이 오류지식으로서 인식론 결함이라면 ‘잘못된 지 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무지’로 간주되는 것은 매우 합당하다. 그 럼에도 샹까라에게 덧놓음과 무지가 완 하게 유의 이지 않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는 것은 두 개념의 다양한 내포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34) 그가 분명히 “이와 같이 특징지어지는 이 덧놓음을 식자들은 ‘무지’라고 간주하고, 한 그것(덧놓음)의 분 별을 통한 사물의 본질 확정을 ‘지식’이라고 이른다.”35)라고 말하 는 것으로부터는 의심의 여지없이 두 개념이 인식론 결함이라 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덧놓음은 명상 수행이기도 하고 인식론  결함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방법론 략이기도 하다.36) 반 면에 무지는 주 측면에서 인식론 결함이기도 하고, 상 측면에서 존재론 근본물질이기도 하다.37) 이 경우에 인식론 결함으로서의 무지란 실재를 실재가 아닌 것으로 잘못 아는 ‘허
 
34) 를 들어 Comans는 무지가 세계의 물질 원인이라는 을 강조하기 해, 샹까라가 자주 사용하는 표 들인 ‘무지에 의해 
야기된’(avidy -kṛta), ‘무지에 의해 제공된’(-pratyupasth pita)’, ‘무지에 
의해 상상된’(-kalpita), ‘무지에 의해 덧놓인’(-adhyasta,-adhy ropita) 
등에서 무지란 인식론 인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약 이런 표 들에서 무지가 인식론 결함이라면 무지는 곧 
덧놓음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무지에 의해 덧놓인’이라는 표 은 
‘덧놓음에 의해 덧놓인’(superimposed by superimposition)이라는 뜻일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덧놓음에 의해 덧놓인’이라는 표 은 거의 받아들이기 힘들다. 결국 Comans는 덧놓음과 무지가 완 하게 동일하지는 않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Comans(2000), p. 247 참조. 
‘무지에 의해 야기된’ 등의 표 들이 등장하는 용례는 Hacker(1995), p. 
74를 참조하시오. 
35) BSBh, ‘덧놓음에 한 주석’.
36) 방법론 략으로서의 덧놓음에 해서는 4장에서 다룰 것이다. 방법론 략으로서의 덧놓음은 역설 이게도 덧놓음 그 자체를 기하기 한 방법이다. 
37) Comans는 Hacker가 샹까라의 무지를 두 가지 의미로 악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덧놓음과 동의 인 것이고, 둘째는 세계의 물질 원인인 ‘미 된 명칭과 형태’(avy kṛtan marūpa)와 동일한 것이다. 
Comans(2000), p. 248 참조.

 지식’(mithy jñ na) 혹은 ‘허 념’(mithy pratyaya)이다. 결과 으로 덧놓음과 무지는 각각 여러 쓰임새를 가지지만 공통 으로 인식론 결함을 의미하며, 특히 샹까라에게는 부분 이 러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인식론 개념으로서의 덧놓음은 무지와 유의 인 것이자 ‘실재에 비실재를 덧놓는 오류’를 지시할 뿐이다.
이와 같이 무지와 유의 인 것으로서 덧놓음은 샹까라의 체계 에서 해탈을 해 반드시 기되어야만 한다. 인간의 일상 경험 을 가능 하는 덧놓음은 만인이 공통 으로 지각할 수 있음에도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자연스러운(naisargika) 상이다.38) 그래 서 주객의 상호 덧놓음은 인간의 인식활동을 규정하는 근본 이 고 보편 인 조건으로서 그 근원을 따질 필요도 없이 이미 주어 져 있는 사실로 알려진다.39) 만약 이 덧놓음을 주어져 있는 사실 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덧놓음을 기하고자 하는 베단따의 기 획도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덧놓음을 통해 샹까라는 이 근본 이고 보편 인 인간의 굴 로부터 탈출하기 해 덧놓음의 구조 를 앎으로써 덧놓음의 토 에 해 모든 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의도하기 때문이다.40) 쉽게 말해서 덧놓음을 보편 상으로 삼 아야만 실재에 비실재를 덧놓는 속박의 근본 구조를 인정하게 됨 으로써 실재에 한 지식을 얻는 데 집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 국 덧놓음의 토 인 실재, 덧놓음의 상인 비실재, 기되어야 
 
38) BSBh, ‘덧놓음에 한 주석’ 참조. 
39) Alston은 시간과 인과율 자체가 덧놓인 것들이기 때문에, 덧놓음 자체는 시간과 원인 안에서 시작과 끝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Malkovsky(2000), p. 91 참조. 
40) 덧놓음의 략은 기체(덧놓음의 토 ) 없이는 환 (덧놓음의 상)이 불가능하다는 논리 즉 라흐만 없이는 세계가 존재하지 못한다는 
논리를 정당화한다. Narain(2003), p. 150 참조. 다른 한편, 덧놓음은 
일종의 태생 인 ‘잘못된 자기상정’이므로 실에서 덧놓음의 토 (the 
Ground)를 알자는 것이 베단따의 기본방식이다. Malkovsky(2000), p. 76 참조.

 
하는 덧놓음, 이 세 가지가 베단따의 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 이 단순한 구도 속에서 덧놓음은 이미 그 태생부터 그 토 에 한 지식을 이끌기 한 방법 략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
다.


Ⅳ. 방법론 략으로서 덧놓음

샹까라의 베단따 철학이 ‘덧놓음, 덧놓음의 토 , 덧놓음의 
상’이라는 세 가지를 요체로 하는 경우, 해탈이라는 최종 목표를 이루기 해서 방법 으로 덧놓음 혹은 덧놓기(adhy ropa)를 고 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왜냐하면 덧놓음을 알지 못하면 덧놓음 의 기가 불가능하고, 덧놓음을 기하지 못하면 해탈이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덧놓음이 방법론 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어김없 이 걷어내기(apav da) )와 한 으로 등장하므로, 이를 통 으 로 ‘덧놓기와 걷어내기’(adhy ropa-apav da)의 방법 )이라고 부 른다. 인식론 덧놓음을 방법론 덧놓음으로써 기하고자 하는 이 방법은 해탈을 한 베단따의 요한 략이다. 즉 덧놓음의 구조를 알지 못하면 그것을 제 로 없앨 수 없는 이상,44) 덧놓음 자체를 덧놓음의 구조를 이용하여 기하고자 하는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자기해체’ 략이다. 토 와 상으로 이루어진 덧놓음 의 구조에서 상을 통해 차 으로 토 에 근하고자 하는 이 략은, 본디 토 인 실재에 한 지식을 승하고  획득하고자 하는 목 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식론 덧놓음을 방법론 덧놓음으로 환시키는 이 략은 어도 베단따의 통 내에서는 샹까라가 최 로 구사했을 가능
성이 크다. 사실 언설 불가능하고 지각 불가능한 실재를 경험하기 해서 언설 가능하고 지각 가능한 상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차 으로 그 실재에 다가가야 한다는 략은 인도철학에서 매우 일반 이다. 한 속박이라는 것과 해탈이라는 것도 모조리 상 계에서 발생할 뿐이기에, 무지의 기나 지식의 획득은 상계에 서 일어나는 사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베단따에서 해탈의 수 단이 지식이고 이 지식이 분별 지식이며 이 분별 지식이 비 실재로부터 실재를 분별해서 아는 것이라면, 무문별의 무지에서 분별의 지식으로 나아가기 해서는 덧놓음의 상을 실 출 발 으로 삼아 그 상과 토 의 차이를 인지하는 수밖에 없다. 실재에 비실재가 덧놓인 실에서 출발해야 하고 비실재를 길잡 이로 하여 비실재와는 다른 실재를 분별해내야 한다면, 임의 으 로나마 덧놓음을 실행하여 허상인 덧놓음의 상을 해체하고 실 상인 덧놓음의 토 를 확정해야 한다. 이처럼 임의 으로 덧놓음 을 실행하는 것이 덧놓기요, 덧놓음의 상을 걷어내고 토 만을 
 
편이다. 삿 다난덴드라는 덧놓기와 걷어내기를 ‘귀속과 철회’(attribution and retraction)로 번역한다. 이 방법을 상세히 다룬 서로는 The 
Method of the Vedanta(1997) 등이 있다. 

44) 이 말은 ‘잘못된 지식으로서의 무지에서 무엇이 잘못인지를 알지 못하면 그 무지를 올바른 지식으로 이끌 수 없는 이상’이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남기는 것이 걷어내기다. ) 그리고 이 덧놓음의 임의성은 우빠니 샤드에서 명상으로서의 덧놓음이 가진 임의성과도 일맥상통하기 에, 비록 방법론 덧놓음을 크게는 인식론 덧놓음의 방법 인 확장으로 간주할지라도, 어떤 측면에서는 덧놓기와 걷어내기를 명 상 덧놓음과 인식론 덧놓음의 종합 인 확장으로 볼 수도 있 다. 
샹까라는 방법론 덧놓음의 상과 요성에 해 거의 언
하지 않지만, 이 방법 자체를 직간 으로 언 하기도 하고 용 하기도 한다. 그의 여러 작들 가운데 덧놓기와 걷어내기의 방법 을 직 언 하는 곳은 바가와드 기따 주석 (Bhagavad-g t bh ṣyam)이다. 그는 이 방법을 통해서 표 되거나 설명될 수 없 는 것이 표 되거나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 이는 덧놓기와 걷어내기를 통해서 복잡 상계를 넘어서 있는 실재가 알려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한 라흐마 수뜨라 주석 에서는 걷어내기를 직 언 하는데, “걷어내기라는 것은 어떤 상에 해 이 에 덧얹힌 잘못된 념이 확정되어 있는 경우에 나 에 만들어지는 참된 념이 이 에 덧얹힌 잘못된 념을 기하는 것이다.” )라 는 정의는 덧놓기와 걷어내기의 방법과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샹까라는 이 방법을 간 으로 언 하는데,  유명한 시인 ‘아룬다띠’(Arundhat ) ) 별을 통해서이다. 컨 , 아룬다띠를 보여주고자 하는 자가 우선 그것의 근처에 있
고 일차 이지 않은 큰 별을 아룬다띠라고 지각하게 한 다음, 나 에 그것(큰 별)을 부정하고서 아룬다띠 자체를 지각하게 하듯이, 그와 마 찬가지로 그것(쁘라다나)은 아뜨만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49)
컨 , 아룬다띠를 지시하는 경우에 비록 일차 아룬다띠가 아닌 수많은 별들이 제시될지라도 최종 으로 밝 진 것이 바로 일차 아 룬다띠이듯이,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환희로 이루어진 것’은 모든 것의 내부이기 때문에 일차 아뜨만이다.50) 
지극히 작고 희미한 아룬다띠를 알기 해서는 그 주 의 여러 별들을 이용해야 하는데, 가장 크고 밝은 별로부터 작고 희미한 별의 순서 로, 아룬다띠라고 거짓으로 덧놓은 다음에 아룬다띠가 아니라고 걷어내면서 마지막에 진정한 아룬다띠를 알게끔 한다. 마찬가지로 가장 미시 인(미세한) 실재를 알기 해서는 그 실재 에 덧놓인 여러 비실재를 이용해야 하는데, 가장 시 인(크고 거친) 비실재로부터 미시 인 비실재의 순서 로, 실재라고 거짓 으로 덧놓은 다음에 실재가 아니라고 걷어내면서 마지막에 진정 한 실재를 알게끔 한다. 다른 한편, 샹까라가 덧놓기와 걷어내기 의 방법을 실제로 용하는 사례로는 라흐마 수뜨라 주석  1.
1.12-19를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우빠니샤드에 등장하는 음식(ann
a)·숨(pr ṇa)·마음(manas)·인식(vijñ na)·환희( nanda)로 이루어진 다섯 가지 아뜨만들51) 가운데 마지막 것이 최종 아뜨만으로 간 주되고, 더 나아가 ‘환희로 이루어진 아뜨만’이 아닌 ‘환희 자체’가  다시 최종 아뜨만이라고 확정된다. 샹까라는 이 사례를 통 해, 아뜨만에 아뜨만이 아닌 것을 덧놓고 걷어내는 덧놓기와 걷어 내기의 방법이 우빠니샤드부터 로 승되어 왔음을 시사하고 있는 셈이다.52) 이처럼 샹까라에게서 인식론 덧놓음은 걷어내
 
49) BSBh, 1.1.8. 
50) BSBh, 1.1.12.
51) 다섯 가지 아뜨만들은 Taittir ya-upaniṣad, 2.1-5에 등장한다. 
52) BSBh, 1.1.12-19에서 덧놓기와 걷어내기의 방법이 구체 으로 용된 
기와 결합된 방법론 덧놓음으로 환되면서 무지의 기 혹은 지식의 획득을 가능 한다. 

샹까라가 이용하는 가르침의 여러 방법들, 를 들어 시를 사 용하거나 이야기 식으로 달하는 방법들53) 한 부분 덧놓기 와 걷어내기의 방법과 다소간의 상 계를 가진다. 실제 텍스트 에서 베단따의 사상을 유효하게 가르치기 해 직간 으로 제 시되는 이 방법들은, 덧놓기와 걷어내기, 함축(lakṣaṇ ) 등과 같은 베단따의 주요 수행 방법이나 실천 방법과 그 목표가 동일하다는 측면에서 그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방법들은 두 가지 측면 에서 넓은 의미의 덧놓기와 걷어내기 방법에 포 될 수 있을 것 이다. 첫째, 베단따에서 사용되는 가르침의 여러 방법들은 감각 인 실재를 경험의 역으로 가져와서 지시해야 하기 때문에, 어 떤 식으로든 경험 인 것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하는 덧놓음·덧놓 기와 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둘째, 그 여러 방법들은 실재와 비 실재의 계를 해명하는 데 내용 으로 을 맞춰야 하기 때문 에, 토 와 상으로써 그 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덧놓기와 걷 어내기의 방법으로부터 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인식론 덧놓음이 베단따의 결정 인 가르침인 이상, 그 덧놓음을 기하 기 한 모든 가르침의 방법들은 넓은 의미에서 덧놓기를 앞세운 걷어내기를 통해 개될 수밖에 없다. 덧놓기와 걷어내기는 가장 심 이자 가장 포 인 베단따의 수행 방법 혹은 실천 방법인 것이다. 
샹까라에게서 덧놓기와 걷어내기의 이러한 방법론 의의는 베
단따의 근본 원리와 계해서도 여 히 변하지 않는다. 베단따의 근본 원리란 망각된 실재를 재인식하는 것이고 ‘자기가 아닌 것 들’과 ‘참다운 자기’를 혼동한 상태로부터 분별한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베단따의 심 방법이란 이러한 원리를 실 할 수 
 
것에 한 논의는 박효엽(2006)을 참조하시오.

53) Hirst는 샹까라가 가르치는 기술을 ‘시 사용, 이야기 달, 진 방법’이라는 세 가지로 요약한다. Hirst(1990), pp, 113-150 참조. 

있는 데 결정 인 역할을 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덧놓기와 걷어내 기는 무엇보다도 덧놓음의 사실이54) 망각되었음을 동일한 덧놓음 으로써 일깨우는 방법이므로 망각과 재인식을 본질로 하고 있다. 더욱이 덧놓기와 걷어내기는 이미 논의했다시피 덧놓음의 토 와 상 사이에 발생하는 혼동을 분별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다. 즉 베단따의 해탈을 개별 자아와 라흐만·아뜨만 사이에서 동일성을 깨닫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인식론 덧놓음은 그 상인 개별 자아를 참다운 자아로 간주하므로 덧놓기의 방법을 통해 그 토 인 라흐만·아뜨만을 분별해 내야만 해탈이 가능하 다.55) 이처럼 덧놓기와 걷어내기의 방법은 베단따에서 그 근본 원 리를 실에서 구 하는 데 필수불가결하기에, 샹까라에게서 이 방법이 심 이고 포 으로 사용된다는 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Ⅴ. 샹까라에서 덧놓음의 의의

샹까라의 베단따를 덧놓음이라는 개념을 심으로 살펴보는 것 은 그의 사유를 덧놓음을 통해 재구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비록 인식론 덧놓음에 견주어 다른 두 가지 덧놓음 즉 명상 
 
54) ‘덧놓음의 사실’이란 ‘덧놓음의 토 와 상의 본질에 한 사실’을 가리킨다. 
55) 베단따에서 개별 자아와 아뜨만 사이 혹은 세계와 라흐만 사이의 동일성(identity)은 양자의 같음(equation)이 아니라 
불가분리성(inseparability)이다. 즉 무지 혹은 덧놓음의 상태에서는 양자에 그 어떤 차이도 없는 것처럼 오직 믿을 뿐이고, 지식의 상태에서는 실질 으로 그 어떤 차이도 없다. 무지는 양자의 동일화를 주장하지만, 지식은 개별 자아로부터 아뜨만의 차별화 혹은 세계로부터 라흐만의 차별화를 주장한다. Roy(1982), pp. 91-92 참조. 

덧놓음과 방법론 덧놓음이 샹까라에게 상 으로 덜 요할지 라도, 이 후자들을 복원하여 자와 연 시켜야만 그의 사유가 가 진 진면목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다. 즉 라흐마 수뜨라 주석 과 ‘덧놓음에 한 주석’의 요성을 고려한 채, 인식론 덧놓음을 심으로 하여 그 배경을 이루는 명상 덧놓음과 그 실행을 이 루는 방법론 덧놓음을 밝 냄으로써, 샹까라 베단따의 체계가 체연 성(samanvaya) 아래 일목요연하게 재구성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결국 샹까라에게서 덧놓음이라는 것은, 인식론 결 함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명상 수행과 방법론 략이라는 의미도 가지면서, 그의 작 속에서 복잡하고 다양하게 기능하고  몇 가지 요한 의의를 암시하고 있다.56) 무엇보다도 샹까라는 명상 인 덧놓음을 인식론 인 덧놓음으 로 확장하는 와 에, 이원성(차이)이 비이원성(무차이)으로 환 되는 과정에 해 신비에의 호소가 아니라 합리 인 설명이 가능 하게끔 한다. 베단따에서 계승하는 우빠니샤드의 핵심 가르침은 두말할 나 없이 무지에 의해 만들어진 이원성을 없앰으로써 비 이원 인 아뜨만에 한 지식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우빠니샤드 에는 그 이원성이 사라지기 이 과 이후 혹은 비이원성을 얻기 이 과 이후의 상태에 해 묘사하기만 할 뿐, 어떤 방식으로 이 원성이 비이원성으로 환되는지 명료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57) 이와 달리 샹까라는, 명상에서의 주객 이원성이 어떻게 인식론 인 무지의 주객 이원성으로 확장되고, 이 후자가  어떻게 지식 의 주객 비이원성에 의해 기되는지, 덧놓음이라는 개념을 통해 
 
56) 덧놓음의 세 가지 의미를 밝히는 와 에 그 각각의 의의 역시 어느 정도는 밝 진 셈이다. 여기서는 추가 으로  종합 으로 덧놓음의 의의를 밝 보고자 한다. 
57) Bṛhad raṇyaka-upaniṣad, 4.5.15를 로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소 
이원성이 있을 경우에, 그러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보고, … 하지만 모든 것이 오직 ‘그의 아뜨만’이 될 경우에, 그러면 무엇에 의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 그러면 무엇에 의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무엇에 의해 이 모든 것을 알려주는 그것을 알아야 하는가!
체계 으로 설명해 다. ‘베단따’라는 체계는 바로 그가 명상의 주체(주 )와 상이라는 이원성을 비이원 인 아뜨만(순수주 ) 에 덧놓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성립된다. 그만큼 명상 인 것에 서 인식론 인 것으로 확장되는 덧놓음은, 단순히 샹까라의 베단 따가 우빠니샤드를 계승하고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 그것을 재해 석하고 있다는 차원을 보여주는 셈이다. 신비 인 방식을 거의 벗 어나지 못한 우빠니샤드의 비이원 가르침은 샹까라의 덧놓음에 의해 한편으로 승되고  한편으로 확 되는 까닭에, 결과 으 로 덧놓음은 체계로서의 베단따를 단숨에 가능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샹까라에게서 인식론 덧놓음은 베단따라는 체계
를 가능 하는 동시에 방법론 덧놓음58)과 조합을 이루면서 그 체계를 다른 체계들과 분명하게 차별되게끔 한다. 즉 인식론 이 고  방법론 인 덧놓음은 베단따의 형이상학과 수행론을 베단 따만의 고유한 것으로 만드는 데 결정 으로 기여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베단따를 비롯한 인도의 해탈 심 학 들은 외 없 이 본래의 자기를 잘못 아는 것을 교정함으로써 자기를 있는 그 로 올바르게 인식하고자 하는 데 을 둔다. 물론 ‘있는 그
로’의 자기를 어떻게 간주하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 을 보이기 는 하지만, 근본 으로 그 학 들은 차이 보다 유사 을 더 많이 가진다. 그런데 샹까라의 인식론 이고 방법론 인 덧놓음은 그 미약한 차이 을 더 크게 만듦으로써 베단따를 확실하게 다른 학 들로부터 차별화되는 체계로 완성한다.
샹까라의 베단따 체계를 극도로 단순화시키면, 실재인 아뜨만
에 해 ‘①잘못 알다, ②잘못 알고 있음을 일깨우다, ③올바르게 알다’라는 3단계로도 충분히 표 할 수 있다.59) ①에 해당하는 것
 
58) 여기서 비록 ‘방법론 덧놓음’이라고만 언 할지라도, 덧놓기만을 가리키지 않고 걷어내기도 포함한다는 을 인지할 필요가 있겠다. 
59) Bina Gupta는 샹까라의 체계를 정교한 인식론 인 분석의 결과라고 말하는데, 그가 주장하는 인식론 3단계를 약간 변형시켜서 표 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허상을 인식하다, ②그 인식이 사라지다, ③교정이 발생하다. Gupta(1998), p. 8 참조. 
이 바로 인식론 덧놓음이고, ②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방법론 덧놓음이다. 그리하여 잘못된 지식이라는 조건을 출발 으로 삼는 것은 해탈 심 인 다른 학 와 동일하지만, 그 조건이 인식론 덧놓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과 그 조건을 벗어나기 해 덧놓 음을 방법 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은 베단따의 고유한 사유가 된다. 이 사유를 더 확 해서 표 하자면, ‘주객의 상호작용인 잘 못된 앎’과 ‘순수주 그 자체인 올바른 앎’ 사이에 덧놓음의 계 가 있으므로 덧놓음의 상인 잘못된 앎에서 출발하여 덧놓음의 토 인 올바른 앎에 도달해야 하며, ) 이는 인식론 덧놓음에서 방법론 덧놓음에로 이행하는 양자의 조합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인식론 덧놓음과 방법론 덧놓음의 내용이 결 코 다르지 않다는 에서 샹까라의 고유한 사유는 더 잘 드러난
다. 덧놓음의 상과 토 는 동일한 것임에도, 인식론 덧놓음이 그 잘못 알고 있다는 ‘그러한 사실’과 계하는 반면 방법론 덧놓음은 그 사실을 일깨우고자 하는 ‘의도 인 략’이라는 데 양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후자를 통해 잘못 알고 있다는 그러 한 사실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은, 곧 올바른 앎이라는 목 을 달 성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샹까라의 형이상학과 수행론은 바로 이 처럼 ‘인식론 덧놓음의 이 구조’와 ‘덧놓음의 인식론 이고 방 법론 인 이 역할’을 심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다른 학 의 그 것과 변별되는 지 을 보다 확실하게 가질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샹까라는 인식론, 형이상학, 수행론을 일 되게 꿰
뚫는 덧놓음의 체계를 완성함으로써 베단따 철학이 인도의 심 통이 되는 데 암묵 으로 일조하기도 한다. 완성된 덧놓음의 체 계에 의해 다른 학 들의 교리가 덧놓음에 속하는 무지의 산물로 간주되는 까닭에, 자연스럽게 베단따 사유의 우 가 확보되는 것 이다. 사실 학 경쟁 성격이 강한 인도에서는 자기 학 의 교 리를 최정 에 두기 해 다른 학 들의 교리를 종종 무지의 산 물로 규정해 버린다. 실재에 한 다른 학 들의 견해가 올바르지 않다는 에서 당연하게도 그 교리 체가 잘못된 지식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샹까라의 덧놓음은 이 세상에서 가능한 모든 경험 활동이 덧놓음의 역에서 작동한다고 규정해 버림으로써, 역설 으로 덧놓음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자신의 사유만을 최종 인 지식으로 치시켜 버린다. 컨 샹까라는 “[한편] ‘무지’라고 불리는 그 ‘아뜨만과 비아뜨만 사이의 상호 덧놓음’을 제로 하 여 지식수단·지식 상에 한 일상 이고 베다 인 모든 경험작 용들이 나아가고, 한 명령·지·해탈을 목 으로 하는 모든 성 들과 [련된 경험작용들이] 나아간다.” )라고 말한다. 인간이 실행하는 모든 활동은 덧놓음의 사실성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기에, 이 덧놓음의 역 안에 있는 모든 학 들의 교리는 외 없이 결코 최종 인 것이 될 수 없다. 심지어 베단따의 교리조차 도 덧놓음에 속할 뿐이지만, 어도 이 덧놓음이라는 잣 만은 세 계 인식에서 유일무이하고 최종 인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덧놓 음의 잣 는 다시 그 자체를 바탕으로 하는 베단따의 교리에마 인간 지성의 마지막 보루인 것과 같은 권 와 상을 부여하고 만다. 따라서 샹까라의 덧놓음은 인도에서 베단따 학 가 그 권력 을 형성하고 존속하는 데 음성 으로 기여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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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Adhy sa in Śaṅkara


Park, Hyo Yeop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Adhy sa or superimposition known widely as a kind of meditation in the Upaniṣads is a trace that shows properly a turning point from meditative knowledge to Self-knowledge. This meditation through which an inferior is to be elevated or uplifted to the state of a superior, presents the formal foundation and contributes methodologically in obtaining knowledge of the identity between an individual self and Brahman. In Śaṅkara who succeeds the Upaniṣadic tradition and puts Ved nta on a firm footing, by accepting and modifying this meditation it appears to be three meanings on the concept of 'adhy sa', i.e. meditative practice, epistemological error, and methodological strategy.
First, adhy sa as meditative practice takes the form of 'to meditate by superimposing B which is different from A on A'. As far as Śaṅkara looks on meditation as a means of knowledge and on knowledge as a means of liberation, this concept can be a means to enable knowledge on 
Brahman-without-attribute. Adhy sa that is representative of meditation on Brahman-with-attribute can act as mediators between meditation and knowledge, since it gives birth to a continuous recollection of Brahman-without-attribute. 
Second, adhy sa as epistemological error, on account of the form of 'to cognize by superimposing B which is different from A on A', is nothing but a transformation of meditative adhy sa. This most well-known adhy sa has double structure in the sense that the constituents of adhy sa i.e. the subject and object are altogether superimposed on the final ground of adhy sa i.e. the Pure-subject or tman. In this way this adhy sa as false knowledge or ignorance (avidy ) signifies 'false cognition on the Reality by superimposing the non-Reality on the Reality'. Moreover, this given adhy sa can be said to be a radical and universal condition prescribing all the cognitions of human being, and accordingly, there is no need to trace its origin. 
Third, adhy sa as methodological strategy, an approximate equivalent to the traditional method of 'adhy ropa-apav da', is a methodological expansion of epistemological adhy sa to accomplish the ultimate goal of liberation. It may be said that for Śaṅkara this adhy sa is the most central and inclusive method of practice in a way that it includes all the methods handed down from the Ved ntic tradition. Plus, as the basic tenet of Ved nta consists in re-cognition of the forgotten Reality, so this adhy sa or adhy ropa accompanied by apav da is the most reliable method to lead the state of discrimination from that of indiscrimination between the ground and object of adhy sa.
To look around the philosophical system of Śaṅkara through the concept of adhy sa aims at to reveal its true character better, by means of reconstructing his system with priority given to a few meanings of adhy sa. After all three kinds of adhy sa may have the following significances. First, throughout his substitution from meditative adhy sa to epistemological one, Śaṅkara throws open the door to a reasonable explanation unlike an appeal to mystery, about the process of shifting duality to non-duality. Second, epistemological adhy sa of Śaṅkara paves the way for Ved nta as a system and distinguishes it from all other systems. Third, Śaṅkara plays a part in making Ved nta philosophy as a central tradition in India by a tacit, since he perfects the system of adhy sa penetrating epistemology, metaphysics, and theory of practice consistently. 

Key Words: zaGkara, vedAnta, adhyAsa, meditation, error, method

투고 일자 : 2010년 11월 15일 
심사 기간 : 2010년 12월 15일~12월 22일 
게재 확정일 : 2010년 1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