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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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유학(新儒學)은 송나라와 명나라 시절에 시작된 일련의 유학 학파를 통틀어 이르는 말. 성리학 및 양명학 등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신유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서양의 유학 연구자들이 고안한 용어인 "Neo-Confucianism"의 번역어에 해당하며, 당대엔 전혀 쓰이지 않았던 표현이다. 중국에서는 송명이학(宋明理學)이라는 표현도 자주 쓰이나, 이는 송명대 유학에 영향을 받아 한국 및 일본에서 전개된 유학 전통은 배제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신유학"의 용법과는 차이가 난다.
더불어 5.4운동 이후부터 진행된 현대의 유학적 전통인 이른바 "현대신유학(New Confucianism)"과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
"신유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서양의 유학 연구자들이 고안한 용어인 "Neo-Confucianism"의 번역어에 해당하며, 당대엔 전혀 쓰이지 않았던 표현이다. 중국에서는 송명이학(宋明理學)이라는 표현도 자주 쓰이나, 이는 송명대 유학에 영향을 받아 한국 및 일본에서 전개된 유학 전통은 배제하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신유학"의 용법과는 차이가 난다.
더불어 5.4운동 이후부터 진행된 현대의 유학적 전통인 이른바 "현대신유학(New Confucianism)"과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
2. 배경[편집]
신유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한참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1] 최소한 신유학의 직접적인 토대가 된 인물은 《태극도설》로 유명한 주돈이로 받아들여진다.
중세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유교, 불교, 그리고 도교 등 간의 사상적 경합 가운데서 유교가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띤 취약점 중 하나는 그 형이상학적인 토대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중국 고유의 신화적 우주관을 그대로 계승한 도교, 그리고 고대 인도에서 힌두교 및 자이나교 철학 등과의 치열한 경합을 거치며 이론적으로 세련화를 거친데다가 중국 유입 이후엔 도교의 영향을 받아 선불교까지 탄생시킨 불교에 비하여
중세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유교, 불교, 그리고 도교 등 간의 사상적 경합 가운데서 유교가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띤 취약점 중 하나는 그 형이상학적인 토대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중국 고유의 신화적 우주관을 그대로 계승한 도교, 그리고 고대 인도에서 힌두교 및 자이나교 철학 등과의 치열한 경합을 거치며 이론적으로 세련화를 거친데다가 중국 유입 이후엔 도교의 영향을 받아 선불교까지 탄생시킨 불교에 비하여
고대 유교는 세계와 우주의 근본적인 면모를 설명하는데는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았다. 선진 유교는 현실주의적 토대에 기초하여 정치와 인성 수양에 주안점을 두었기에 이런 형이상학적 주제를 도외시해도 큰 문제를 겪지 않았으나, 불교 유입을 기점으로 여러 사상들 간의 경합이 심해짐에 따라 위기감을 느낀 유교 또한 이런 근본적인 이론적 토대를 강화시킬 필요성이 생겼다.
주돈이의 작업은 주역 등에서부터 전래된 도교의 이론적 틀을 차용하여 유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자 했던 본격적인 최초의 시도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는 이후 성리학의 직접적인 뿌리가 됨으로써 신유학이 탄생하는 기틀이 되었다.
주돈이의 작업은 주역 등에서부터 전래된 도교의 이론적 틀을 차용하여 유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자 했던 본격적인 최초의 시도 가운데 하나였으며, 이는 이후 성리학의 직접적인 뿌리가 됨으로써 신유학이 탄생하는 기틀이 되었다.
3. 역사[편집]
저작 《정몽(正蒙)》으로 유명한 횡거 장재(張載)는 북송 당대의 유학자 소옹 등과 더불어 세계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설명과 동시에 그에 근거한 유교적 수양론을 제시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기(氣)에 근거한 장재의 학설을 비판한 대표적인 당대의 학자로는 "이정(二程)"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명도 정호(程顥), 이천 정이(程頤) 형제가 있었으며, 이들의 학설은 양시(楊時), 사량좌(謝良佐), 호굉(胡宏) 등을 통해 전래됨과 동시에 나름의 변천을 이루기도 했다.
남송 시대에 태어난 주희는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접하며 스스로 이정, 특히 정이의 학설을 계승했다 여기고 후일 성리학으로 불리는 가르침을 제시했으며, 주희가 상세한 주석을 달기도 한 사서는 이후 중국 과거시험에서 중시하는 핵심 문헌이 되었다. 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 혹은 이정과 주희의 성을 따서 "정주학"이라고 불리기도 하던 성리학은 그에 따라 먼 미래인 청나라 시기까지도 과거시험의 핵심이 되는 관학(官學)으로 남는다.
한편 주희 당대에 《태극도설》의 해석 등을 두고 주희와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상산 육구연(陸九淵)의 가르침은 그보다 한참 뒤인 명나라 대의 왕수인에게 계승되었다. 당대 관학이었던 성리학과 격렬하게 대립했던 왕수인의 가르침은 육구연과 왕수인의 성씨를 따 "육왕학" 같은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후엔 왕수인의 호를 따 "양명학"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됐다.
이러한 신유학의 흐름은 비단 중국 대륙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당대 동아시아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향이 도입한 성리학은 조선 시기에 이르러 한반도에서 확고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지며 이후 500년간 이황, 이이 등으로 대표되는 자생적인 변천을 거쳐왔다. 다른 한편 가마쿠라 막부 시절부터 일본에 조금씩 도입되기 시작한 신유학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후지와라 세이카 등의 에도 막부 시기 크게 번성하였으며, 어떤 학설에 따르면 이후 존황양이 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이르렀다.
남송 시대에 태어난 주희는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접하며 스스로 이정, 특히 정이의 학설을 계승했다 여기고 후일 성리학으로 불리는 가르침을 제시했으며, 주희가 상세한 주석을 달기도 한 사서는 이후 중국 과거시험에서 중시하는 핵심 문헌이 되었다. 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 혹은 이정과 주희의 성을 따서 "정주학"이라고 불리기도 하던 성리학은 그에 따라 먼 미래인 청나라 시기까지도 과거시험의 핵심이 되는 관학(官學)으로 남는다.
한편 주희 당대에 《태극도설》의 해석 등을 두고 주희와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상산 육구연(陸九淵)의 가르침은 그보다 한참 뒤인 명나라 대의 왕수인에게 계승되었다. 당대 관학이었던 성리학과 격렬하게 대립했던 왕수인의 가르침은 육구연과 왕수인의 성씨를 따 "육왕학" 같은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후엔 왕수인의 호를 따 "양명학"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됐다.
이러한 신유학의 흐름은 비단 중국 대륙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당대 동아시아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향이 도입한 성리학은 조선 시기에 이르러 한반도에서 확고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지며 이후 500년간 이황, 이이 등으로 대표되는 자생적인 변천을 거쳐왔다. 다른 한편 가마쿠라 막부 시절부터 일본에 조금씩 도입되기 시작한 신유학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후지와라 세이카 등의 에도 막부 시기 크게 번성하였으며, 어떤 학설에 따르면 이후 존황양이 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