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 성리학 그리고 다른 학통들
고현석 기자
승인 2020.06.21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3강>_ 이승환 고려대학교 교수의 「정주 성리학 그리고 다른 학통들」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3강 이승환 교수(고려대 철학과)의 강연 중 정주 성리학의 핵심 내용 부분을 발췌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이승환 교수는 “동아시아 문명에서 근대 서구 문물이 들어오기 이전까지 이른바 ‘문화의 정전’이라고 불릴 만한 사유 체계”로서 정주(程朱) 성리학(性理學), 즉 12세기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신유학(Neo-Confucianism)’을 전반적으로 살펴본다. 먼저 그 정주 성리학의 핵심 내용들, 목적과 지향을 확인한 다음 그러한 “성리학이 추구하는 양대 공부로서 격물궁리(格物窮理)와 거경함양(居敬涵養)”을 소개하고 그렇게 해서 성취되는 “최후의 인격, 이상적 관망자로서 성인(聖人), 그리고 성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왕도 정치의 이상”까지 다룬다. 그에 이어 “정주 성리학과 상산학(象山學), 심학(心學)이 어떻게 해서 갈라졌는가”, “성리학의 도학적(道學的)인 학풍이 사공학(事功學)의 공리주의적인 학풍과 왜 갈라설 수밖에 없었는가”를 고찰하면서 이들이 남긴 문제가 오늘날에도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 지난 5월 23일, 이승환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3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동아시아 문명의 정전, 정주 성리학
동아시아 문명에서 근대 서구 문물이 들어오기 이전까지 이른바 ‘문화의 정전’이라고 불릴 만한 사유 체계를 꼽으라면 단연코 정주 성리학이 될 것이다. ‘정주 성리학’이란 12세기에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신유학’을 가리키는 말로, 성리학 사유 체계의 형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정명도ㆍ정이천과 주자의 성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은 공ㆍ맹의 원시유학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불교ㆍ도교의 형이상학과 수양론을 유학 안으로 받아들여 송대에 새롭게 확립된 사상 체계를 말한다. 이 사상 체계는 인간의 본성(性)과 세계의 이치(理)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성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송대에 정립된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송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육상산ㆍ왕양명의 심학(心學)과 대비하여 리학(理學)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 두 학통은 단지 공부 방법론상의 차이일 뿐 궁극적으로는 ‘신유학’이라는 커다란 지적 흐름에 함께 속해 있다.
‘정주 성리학’이 근대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 문화의 정전으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ㆍ도교와 구별되는 유학 고유의 특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불교와 도교가 개인적 차원에서 해탈과 초월을 추구하는 출세간적(出世間的) 사유 체계라면, 유학은 자기 도야와 자아 완성을 추구하는 개인적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차원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규범적 방향을 제시하는 입세간적(入世間的) 사유 체계였던 탓에 장구한 시기에 걸쳐 동아시아에서 주도적인 사유 체계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리학이라는 사유 체계는 우주ㆍ자연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본성과 바람직한 삶에 대한 통찰,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에 기반한 이상 국가와 이상 사회에 대한 청사진까지 제공하였기 때문에 국가의 법ㆍ제도와 정치 이념, 사회 구성 원리와 윤리적 규범, 그리고 개인의 수양과 자기 완성에 이르는 폭넓은 지적 영역을 망라하고 있다.
성리학적 사유 체계의 궁극 지향
신유학은 공ㆍ맹의 원시유학을 계승하여 수기(修己)에서 치인(治人)에 이르는 일 또는 내성(內聖)에서 외왕(外王)으로 나아가는 일을 학문의 궁극 목표로 삼았다. 즉 안으로는 성인의 인격에 이르고(inner sage-hood) 밖으로는 왕도 정치의 이상을 펼치는 일(outer kingship)이 송대에 들어 새롭게 흥기하던 사(士) 계급이 자신을 포함한 지배 계층 모두에게 부과한 문화적 사명 의식이었다.
수기치인과 내성외왕이라는 사명 의식은 신유학이 원시유학과 더불어 공유하는 핵심 가치이지만, 신유학자들은 특히 ‘수기’ 또는 ‘내성’의 영역에 절대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타인을 평안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 계급 자신이 성인에 가까운 인격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지성사 연구가들은 원시유학과 구별되는 신유학 고유의 특징을 “내면으로의 전환(Turning Inward)”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독서인 계층의 자각 운동으로 시작된 성리학은 장차 과거 시험을 통하여, 또는 재야에 남아서라도 백성들을 평안한 길로 이끌어야 할 책임을 지닌 예비 지도자들을 성인과 같은 지고의 인격으로 주조해내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성인이라는 지고의 위격(位格)에 이르기 위해서는 크게 두 측면의 공부와 노력이 요청된다. 하나는 객관 세계에 내재한 다양한 원리와 법칙 그리고 이유와 이치를 파악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무사(無思)ㆍ무위(無爲)한 천ㆍ지의 운행 방식을 본받아 대공무사(大公無私)한 심적 상태를 확보하는 일이다. 전자와 연관된 공부를 격물궁리(格物窮理)라 한다면 후자와 관련된 공부는 거경함양(居敬涵養)이다. 성리학에서 이 두 가지 공부는 새의 두 날개 또는 수레의 두 바퀴처럼 어느 하나도 결해서는 안 되는 상호 보완적 관계로 간주되었다.
격물ㆍ궁리의 궁극 목표: 심여리일(心與理一)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性)과 세계의 이치(理)를 궁구하는 학문이다. 성리학자들은 천지ㆍ자연에는 불변하는 항상된 원리가 내재해 있다고 믿었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이 원리를 그대로 품부(稟賦)받아 자기의 본성(性)으로 삼는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성즉리(性卽理)”라는 명제다.
격물(格物: 사물의 이치에 도달함)은 궁리(窮理: 이치를 궁구함)와 마찬가지 뜻으로, 객관 세계에 내재한 존재의 원리를 파악하는 일(所以然之故) 그리고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당위의 원칙(所當然之則)을 이해하는 일을 포괄한다.
격물ㆍ궁리의 궁극적 목표는 인격 주체가 객관 세계에 내재한 중다한 원리들을 파악하여 마침내 총체적 원리인 ‘천리’와 합치하려는 데 있다. 주자는 격물 공부의 목적이 ‘리’와 합치하는 데(合於理) 있다고 보고, 주체의 사고와 언행이 순연하게 ‘리’와 합치하게 된 상태를 심여리일(心與理一) 즉 “마음과 ‘리’가 하나가 된 상태”라고 표현한다.
심즉리(心卽理)는 주자의 경우, 격물 공부를 통하여 수많은 이치에 통달하게 될 때 주체의 마음은 ‘리’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의미이다. 한 가지 일과 한 가지 사물마다 일정한 이치가 없는 것이 없다. 하루하루 공부하여 쌓임이 많다면 마음속에 저절로 [이치가] 관통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 곧 ‘리’이고, ‘리’가 곧 마음이어서(心卽理, 理卽心)” 몸가짐과 행동거지가 모두 ‘리’에 들어맞게 된다.
유학에서 인(仁)은 인간다움의 총칭으로, 성인에 해당하는 인격이 가지고 있는 지고의 덕성(supreme virtue)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에서 ‘인’은 아무에게나 허여(許與)할 수 있는 소소한 중덕(衆德) 중의 하나가 아니다. 성리학에서 인자(仁者)는 인간 세계에서 표준이 될 만한 모든 이치를 한몸에 갖추고 있는 ‘리’의 담지자다.
인자(仁者)에게 근심이 없는 까닭은 단지 인자(仁者)의 마음이 곧 하나의 도리(道理)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자는 어떤 일이 닥쳐와도 크거나 작거나에 관계없이,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자기의 마음에 갖추어진 각각의 ‘도리’로서 대응할 뿐, 일이 닥치기를 기다려 비로소 여기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곧 ‘리’인 것이다(心便是理了)”.
주자가 ‘심즉리(心卽理)’라고 할 때 이 명제가 가리키는 내용은 다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학이지지(學而知之)의 자질을 지닌 범인들의 경우, 격물ㆍ궁리의 공부가 쌓이면 마음씀씀이와 행동거지가 모두 이치에 들어맞게 된다. 그리고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자질을 지닌 성인 또는 인자의 경우 그의 마음 씀씀이는 항시 도리에 부합한다.
독서인 계층인 ‘사’가 현자의 단계를 거쳐 궁극적으로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객관 세계에 내재한 수많은 ‘리’를 체득하는 일 즉 격물ㆍ궁리의 공부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이러한 공부를 통하여 주체의 심적 상태가 객관 세계의 ‘리’와 합치하게 될 때 이를 “주체의 마음 상태가 객관 세계의 ‘리’와 하나가 되었다(心與理一)”라고 평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으로 자아를 주재하기: 거경ㆍ함양
성리학에서는 의식 활동에 깃든 경향성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하여 자아를 두 층위로 구분한다. 인간은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기’와 ‘리’의 합으로 이루어진 만큼, ‘기’적인 특성과 ‘리’적인 특성을 한 몸에 가지고 있다.
‘기’적 특성이란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이 가지는 본능적 경향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리’적인 특성이란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이 가지는 인격적 지향성을 의미한다. 현실 속의 인간은 기본적으로 ‘기’에서 연유하는 본능적 경향성을 충족시키며 살아가지만, 자아의 심층에는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인격적 지향성이 간직되어 있다.
주자는 자아의 심층에 자리하고 있는 인격적 지향을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본연지성’은 ‘의리지성(義理之性)’이나 ‘천명지성(天命之性)’과 동일한 개념이지만, 특히 날 때부터 자아의 심층에 간직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본래성’에 주목해서 쓰는 말이다. 성리학적 수양론의 궁극적 목적은 자아의 심층에 잠재된 인격적 지향(본연지성)을 의식의 표층 위로 끌어올려 현실 속에서 실현시키는 데 있다.
성리학에서는 신체에서 연유하는 본능적 경향성을 송두리째 부정하지는 않는다. 주자는 “외물의 유혹은 음식에 대한 욕구와 성적 욕구보다 더 심한 것이 없지만, 그 근본을 추구해보면 이러한 욕구는 진실로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서 없애려야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사이에 천리와 인욕의 구분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안 되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성리학적 수양론의 관심은 신체(形氣)에서 연원하는 본능적 경향성을 자아의 심층에서 근원하는 인격적ㆍ문화적 지향에 의해 제어하려는 데 있다.
인격적 지향은 어떻게 본능적 지향을 제어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경(敬) 공부에서 찾을 수 있다. ‘경’ 공부의 요체는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외물을 향하여 분산되는 의식 활동을 내면으로 수렴하여, 본연지성에서 연유하는 순일한 의식이 뻗어나가게 하는 데 있다. ‘경’ 공부에는 다양한 설명 방식이 있지만 주자는 특히 의식을 하나로 집중할 것(全一集中)을 강조하고, 의식을 하나로 집중하면 자신에게 간직된 ‘본연의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경’ 공부는 의식의 동(動)과 정(靜)의 두 국면에 모두 걸쳐 있다. 의식의 지향 활동이 아직 개시되기 이전인 미발(未發)의 국면과 의식의 지향 활동이 이미 개시되어 활발하게 흘러가는 이발(已發)의 국면 모두가 ‘경’ 공부의 대상이 된다. 주자는 “미발 시에는 함양(涵養)하고, 이발 시에는 성찰(省察)하라”라고 말한다. ‘함양’은 원래 농사일에서 파종하기 전에 씨앗에 물을 흠뻑 주어 발아시키는 일을 의미한다. 아직 의식이 지향 활동을 개시하기 전에 경외의 자세로 순일한 인격적 지향의 싹이 발아할 수 있도록 방한(防閑)하고 기르는 노력이 바로 ‘미발 함양’이다. 의식의 지향 활동이 개시된 후에는 사유와 감정이 바르게(正) 흘러가는지 행여 삿되게(邪) 전개되지는 않는지 점검하고, 공정하게(公) 흐르는지 행여 사사로운(私) 방향으로 전개되지는 않는지 살피는 일이 ‘이발 성찰’이다.
‘경’ 공부의 목적은 주체의 의식을 항상 순일하고 안정되게 유지함으로써 유사시에 사태를 정명(精明)하게 판단하고, 의리(義理)에 맞게 처신하며, 시비(是非)를 분명하게 분변할 수 있는 도덕적 성향을 도야하는 데 있다. 성리학에서 인간은 양극에 걸쳐 있는 존재이다. 신체적 층위의 자아와 인격적 층위의 자아가 그것이다. 수양의 목적은 자아를 더 높은 층위로, 더 고귀한 존재로 상승시키는 데 있다. 자아를 상승시키기 위한 노력의 여하에 따라, 인간은 그저 신체적 층위에 머물 수도 있고 아니면 더 높은 층위 즉 인격적 층위로 나아갈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층위에 속하는 존재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주체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 성리학에서 보는 인간은 생물학적 사물로 세상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는 ‘만들어져가는 존재’이다. 인간을 수양을 통하여 향상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 또는 ‘과정적 존재’로 바라보는 성리학의 수양론은 인간에 대한 물신화의 경향이 팽배한 오늘날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격물궁리와 거경함양의 결과: 공정한 관망자로서 ‘성인’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성인’이라는 이상 인격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격물ㆍ궁리와 거경ㆍ함양이라는 양대 공부가 요청된다. 격물ㆍ궁리를 통하여 객관 세계의 이치에 대해 충분한 인식을 확보하는 일은 ‘경’ 공부를 통해 공정하고 무사한 마음 상태에 도달하는 일과 더불어 윤리적 실천에 있어서 합리적 판단자가 갖추어야 할 필요ㆍ충분 조건을 구성한다.
합리적 판단자가 갖추어야 할 이러한 자격 요건은 이상적 관망자 이론(ideal observer theory / impartial spectator theory)에서 ‘이상적 관망자’가 갖추어야 할 자격 요건으로 요청되는 무사의(無私意: disinterestedness), 공정성(impartiality), 그리고 객관적 사실에 대한 충분한 인지(well-informedness) 등의 자격 요건에 해당한다. 이상적 관망자 이론은 한 행위의 윤리적 타당성 여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메타윤리학적 질문에서 비롯된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한 행위는 오직(if and only if) 이상적 관망자에 의해 옳다고 판정될 때만 옳은 것이고, 만약 이상적 관망자가 그르다고 판정한다면 이 행위는 그른 것이다. 이때 이상적 관망자의 요건은 위에서 든 바와 같이 무사의, 공정성, 객관 사실에 대한 충분한 인지 등으로 요약된다. 성리학에서 격물궁리와 거경함양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성인의 인격은 행위 세계의 원리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확보하고 대공무사한 마음가짐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공정하게 조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이상적 관망자’에 다름 아니다.
행위 이론(action theory)의 관점에서 볼 때,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행위자의 모델은 천지(天地)와 성인(聖人)이다. 천지는 만물에게 생명을 부여하지만 결코 의도적이거나 작위적이지 않으며, 성인은 만인을 보듬어주지만 결코 자의적이거나 사사롭지 않다. 비의도적이고 비작위적인 천지의 무심한 운행을 본받아 백성들을 이롭게 보살피는 이상적 행위자가 바로 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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