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물궁리지학, 격치지학, 격치학 그리고 과학 -서양 과학에 대한 동아시아의 지적 도전과 곤경-
From gewu qiongli to kexue -The Predicament of East Asian Intellectuals in Understanding Science-
김선희 ( Seonhee Kim )
발행기관 : 한림과학원
간행물 : 개념과 소통 17권0호
발행년월 : 2016년 06월
페이지 : 119-157(39pages)
개념과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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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wu qiongli gezhi gezhixue kexue bowuxue leishu mingwu dushu Jesuits Western Lea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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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는 엄밀한 의미의 ‘과학(科學, science)’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외부 세계에 대한 지적 확장과 리(理)에 대한 근원적 통찰을 의미하는 ‘격물궁리(格物窮理)’의 전통이 서학 지식 유입에 따라 ‘격치(格致)’로 전환된 후에야 과도기를 거쳐 결과적으로 근대적 ‘과학(科學)’으로 재편성되었다는 것은 보편적 상식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일반적 평가를 넘어서 동아시아에서 격물궁리, 격치 등 과학이전의 개념과 범주들이 발화된 맥락과 지향을 검토함으로써 서양 과학에 대한 근대 초기 동아시아 지식인의 도전과 전환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본래 성리학 에서 격물궁리는 외부 세계를 향한 지적 인식을 어떻게 마음에 내재된 근원적 원리[理]에 합치시킬 것인가를 묻는 환원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성리학적 ‘격물 치지’, ‘격물궁리’의 전통에 균열을 낸 것은 16세기 말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 중국에 들어온 예수회였다. 이들은 자신의 철학과 신학을 ‘격물궁리의 학’으로 번역 하여 기독교와 유럽의 지식체계를 중국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격치가 성리학의 맥락에서 이탈하는 경향은 예수회와 관계없이 이미 시작된 현상 이었다. 14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사이 중국 지식인은 박물학적 유서(類書)나 의서(醫書)의 표제로 ‘격치’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외부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탐구과정을 ‘격치지학’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서학을 포함해 다양한 지식 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인 명말ㆍ청초의 지식인들은 격치지학을 박학(博學)과 박물(博物)의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서양과의 온건한 접촉이 끝나고 본격적인 대결 단계에 접어든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 서양인에 의해 최신 서양 과학 이론들이 한역되자 점차 ‘격치학’이 서양의 근대 분과 과학들을 총 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격치로 표현되는 한 동아시아 지식인이 지적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격치는 「대학(大學)」에서 연원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서양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으므로 동아시아 지식인은 전통적인 격물의 이념 위에 서서 외래 지식에 접근할 권리와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최소한의 권리와 여유는 박물과 격치를 대체하는 ‘과학’의 등장으로 동아시아 지식장에서 서서히 소멸되었다.
격치학에서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 가 서구 문맥에서 전유한 신조어 ‘과학’으로의 전이는 현재의 우리에게 동아시아 에서 학문의 중심부가 변경되었음을 보여 준다.
서양 과학은 일본이 직접 이룬 성취는 아니었지만 일본이 언어와 지적 정보를 선취하자, 지식의 중심부와 주변부가 바뀌게 된 것이다. 중국의 학문적 전통은 더 이상 동아시아 세계의 보편 과학 (universal)이 아니라 낙후된 지역 과학(local science)에 한정되었다. 지적 주체의 성격 역시 바뀌었다.
격물을 통해 궁리를 체현하고자 했던 한 개인으로서의 동양 지식인은 문명의 선취자로서 독보적 권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던 서양뿐 아니라 지식의 형성과 체계화과정에서도 지식의 일방적 수용자ㆍ습득자로 격하되었으며, 특히 조선인은 제도화된 과학을 운용할 국가를 상실함으로써 삼중의 소외를 겪게 되었다.
It is generally accepted that East Asia did not have a well-defined concept of ‘science.’ After the introduction of Western Learning, however, there followed a transition period, during which the intellectual exploration of the external world through the Neo-Confucian tradition of gewu qiongli (the investigation of phenomena and the full comprehension of their underlying principles), together with the fundamental approach to understanding represented by li (the pattern principle), were transformed into modern science. This paper aims to discover the challenges facing early modern East Asian intellectuals by examining the traditional concepts and categories which were relevant to science, such as gewu qiongli. The transformation of such Neo-Confucian traditions was largely driven by Jesuit missionaries who entered China at the end of the sixteenth century. Thus, they tried to integrate the European Christian system of knowledge with the existing Chinese knowledge system by translating their philosophy and theology and framing it as gewu qiongli studies. In fact, some variation from the existing Neo-Confucian tradition of gezhi (格致) had already begun before the arrival of the Jesuits, particularly among the intellectuals of the late Ming and early Qing periods who used the term ‘gezhizixue (格致之學)’ to refer to boxue (博學, learning); later, in the nineteenth century, the term ‘gezhixue (格致學, natural studies)’ replaced gezhizixue. During this period, however, gezhixue always referred to specific scientific disciplines, allowing East Asian intellectuals to approach the Western knowledge system via the traditional concept of gewu, since gezhi originates from the Confucian classic Da Xue (Great Learning ). However, with the emergence of the term ‘kexue (science)’ coined by Nishi Amane in the Western context, East Asian intellectuals became passive consumers of Western knowledge and the Chinese intellectual tradition lapsed into a backward and localized science.
UCI(KEPA)
I410-ECN-0102-2017-300-00030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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