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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사전 작성일 2007-08-24
제목 조동진(1924~) 박사
주제어 [현대신학자] [선교지도자]
자료출처 조동진선교학연구소 성경본문
내용
조동진 박사
장로회신학대학교(B.D)
미국애지브레신학교(Th.M.)
미국 윌리암캐리대학교(Ph.D.)
국제선교협력기구(KIM) 창립, 창립총재 취임(1961)
현, 동서선교연구개발원장
사단법인 민족통일에스라운동협의회 이사장
조동진은 1924년, 1905년부터 한국을 침략하여 한국을 통치하던 일본 제국주의 정권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이끌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상항은 열 살의 어린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조동진은 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자녀로 성장하였고 내어난 지 열흘만에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는 일본 제국 통치 아래서 교육을 받았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번 종전으로 한국민이 일제 통치로부터 해방된 후에 그는 서울에 설립된 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56년 이후까지 더 높은 신학교육을 받고 1960년 에즈베리신학교 대학원에서 선교학으로 신학석사(Th.M.) 학위를 받았다. 1980년과 1981년에 미시시피 주의 벨헤이븐대학과 모교인 에즈베리신학교 두 곳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후 캘리포니아 주 파사데나에 있는 윌리암케리대학교에서 국제개발학을 연구하여 철학박사(Ph.D.) 학위를 취득하였다.
1960년부터 1978년까지 그는 서울에 있는 후암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그가 개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동안 총회신학교와 그 밖의 몇 개의 주요 교단 신학교에서 선교학과 전도학, 그리고 교회행정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1961년, 조동진은 한국의 신학교들에서 처음으로 선교학 강좌를 개설한 선도자이다.
그는 1963년 서울에 국제선교신학원(International School of Mission:ISM)을 설립하였다. 이 선교신학원은 1973년 동서선교연구개발원(East-West Center for Missions Research and Development:EWC/mrd)으로 확장되었다. 이 선교연구기관은 비 서구세계에 설립된 최초의 선교사 훈련과 연구를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1972년부터 그는 1973년 8월 서울에서 개최된 <범아시아선교지도자회의: All Asian Mission Consultation)의 소집을 주도하였다. 1975년, 그는 이 범아시아선교지도자회의의 계속위원회의 실행위원장으로서 <아시아선교협의회: Asia Missions Association/AMA>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이 협의회는 세계 최초의 역내 국가들의 선교단체들을 연합한 지역협의회(regional association)가 되었다. 그는 이 협의회 창립총회가 발표한 '기독교 선교에 관한 서울선언'의 기초자이며, 이 선언은 1966년 휫튼선언과 1970년 프랑크푸르트선언과 맥을 같이 하는 아시아인의 선언으로써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조동진 박사는 미국의 위리암케리대학교 교수와 고려연구소장으로 봉사하는 한편,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 있는 웨스턴신학교의 선교학 교수로,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 파사데나에 있는 풀러선교대학원의 방문교수로 봉사하였다.
조동진 박사는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제 1회 세계복음화국제대회: The First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의 전체회의의 '선교 구조의쇄신'에 대한 강사였으며, 또한 같은 해에 소집된 세계복음주의협의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WEF) 총회가 그를 선교위원회 조직위원(Ad Hoc Committee of Missions Commission/WEF)의 3인 위원(유럽 1인, 미국 1인, 제삼세계 1인) 중 1인으로 선정되었으며, 그는 1975년 8월 서울에서 WEF 선교위원회 (Missions Commission of WEF) 창립회의를 소집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1988년, 조동진 박사는 1989년에 제삼세계선교협의회(Third World Missions Association/TWMA)를 낳게하는 제삼세계 선교발전을 위한 지도자회의(Third World Missions Advance Consultation)를 소집하였으며 1995년까지 그 협의회 회장으로 봉사하였다.
1988년 이래, 조동진 박사는 매 4년마다 미국 휫튼대학에서 개최되는 '한인세계대회'의 주강사로 초청되었다.
이러한 모든 사역 외에 휫튼대학 대학원, 무디성경학교, 트리니티선교대학원,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달라스신학교, 리폼드신학교 등 미국의 여러 선교대학원에서 강의하였다.
조동진 박사는 1989년 이래 20회 이상 북한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일성과 세 차례에 걸친 단독회담을 가졌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과 평양신학원의 방문교수로 임명을 받았으며 두 곳 밖에 없는 평양의 교회에서 여러 차례 북한 신도들을 위하여 설교할 기회를 가졌었다. 조동진 박사는 그 밖에도 미국의 빌리그래함 박사와 지미 카터 대통령을 북한 최고지도자 김일성이 초청하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1991년에는 북한의 UN 주재 대사였던 한시해를 데리고 조지아 주 플레인에 있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저택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의 평양 초청을 전달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는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러시아지도력개발원'을 설립하고 그곳 출신 목사들을 중심으로 '러시아기독교개혁교회 모스크바대회(Synod)를 조직하였다. 2003년 9월에는 제 8회 아시아선교협의회 총회를 러시아에서 소집하여 30여 개국으로부터 350여 명의 아시아 선교지도자들이 참석함으로써 아시아 선교세력을 유로아시아로 확대시켰다.
조동진 박사는 그의 80세가 되는 2004년부터 그의 후학 동문들과 선교동역자들의 후원으로 <조동진선교학연구소>를 설립하고 또한 세계선교박물관을 서울에 설립할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한편, 조동진 박사는 그가 설립했던 동서선교연구개발원이 계속되기를 원하는 후학 동문들의 뜻에 따라 미국 풀러선교대학원 교수 박기호 박사를 동서선교연구개발원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박기호 박사는 동서선교연구개발원을 선교대학원대학교로 확대 개편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조동진은 1949년 6월 그의 신학교 동기동창인 라신복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4녀의 자녀가 있고, 손자와 손녀 1명씨과 외손녀 한 명이 있다. 조동진 박사의 동역자이며 아내인 라신복은 1992년 10월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묘지는 조동진 박사가 설립한 바울의 집 언덕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