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의 집’ 설립자 조동진 목사 (15) ] 연재를 마치면서
박민균
승인 2011.04.25
통일 위한 서독의 노력 본받아야
▲ 조동진 목사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서 화해와 교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거목은 키가 너무 높고 가지가 너무 넓어 온전히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다. 거목 아래 시원한 그늘 속에 있지만, 주위가 온통 거목의 그늘인 탓에 그 아래 있는 것도 모른다. 지난 1월부터 열네 차례에 걸쳐 ‘나의 삶 나의 신앙’을 연재한 조동진 목사가 바로 그런 거목이다. 연재를 마치며 경기도 의왕시의 조동진 목사 자택에서 ‘나의 삶 나의 신앙’에 모두 담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24년 평북 용천에서 출생한 조동진 목사. 80세를 훌쩍 넘겨 미수를 앞두고 있지만, 지금도 아시아를 대표하는 원로 선교학자로 세계 곳곳에서 요청하는 강의와 원고청탁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기자가 방문한 날도 두 명의 제자들이 요청한 원고를 검토하고 있었다.
“당시 신학교는 전도나 선교를 가르치지 않았어요. 신학은 우등생인데, 목회자로서 전도는 낙제생이었어요. 그래서 전도학과 선교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지요.”
그러나 1960년대 미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의 신학교 중 선교학으로 학위를 주는 학교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켄터키주의 에즈베리신학교가 유일하게 선교학과 전도학으로 Th.M 학위과정이 있었는데, 당시 학교에서 조 목사가 백인 외에 선교학을 공부하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백인 곧 서구 교회 외에서 유일하게 선교학을 공부했기에, 내가 아시아와 제3세계에서 최초의 선교학자가 됐어요. 그때부터 선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비서구 선교세력이 선교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일에 사명을 갖고 지금도 일하고 있습니다.”
‘나의 삶 나의 신앙’에 기술한 것처럼, 조 목사의 이후 사역은 무엇을 하든지 ‘아시아와 비서구권 국가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1968년 최초의 선교대학원 과정인 국제선교신학원 설립, 세계 최초 비서구세계 선교단체 지도자들의 지역조직인 아시아선교협의회 조직, 최초의 아시아 선교지도력 개발 기관인 동서선교연구개발원, 최초로 동서양 선교지도자 협력 컨소시엄 구성 등등 조 목사가 이뤄낸 ‘최초’는 수없이 많다.
최초는 곧 유일하다는 의미이다. 동서선교연구개발원은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한국 교회의 인재는 물론 아시아 각국의 선교 인재들이 모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한국선교역사에서 1980년대까지 선교사로 나간 사람은 모두 이곳 출신으로, 현재 한국 선교계의 원로와 리더들 상당수가 조 박사의 제자들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아시아 인재들도 교육을 시켰기에, 홍콩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등의 교회 지도자들 역시 조 목사의 손을 거쳤다.
조동진 목사의 사역 중 또 하나 놀라운 일은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활동이다. 조 목사는 1978년 후암교회를 사임한 후, 한경직 목사 백낙준 박사 조향록 목사 김일환 장로 등과 함께 북한해방기도운동을 펼쳤다. 이후 국내에서 대북활동이 어렵게 되자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면서, 김일성종합대학 방문교수로 임명되고 김일성 주석과 면담하는 등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사역을 펼쳤다. 특히 카터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주선한 일은 극적이기까지 하다.
이렇게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노력했기에 조 목사는 현재 남북 갈등이 너무 안타깝다.
“김정일이 쓰러지면 통일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입니다. 북한이 붕괴되면 미국과 휴전협정을 한 중국이 바로 북한으로 진입합니다. 동독이 무너지지 않도록 엄청난 지원을 했던 서독을 보십시오. 서독은 국방예산보다 더 많은 재정을 동독과 인근 나라에 지원하는 동방정책을 수립하고 20년 넘게 지원했습니다. 그러면서 주위 국가들의 협력을 이끌어냈습니다. 우리는 서독이 했던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