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19

알라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알라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은이),조은평,강지은 (옮긴이)동녘2012-08-13
원제 : 44 Letters from the Liquid Modern World





































Sales Point : 2,742

8.9 100자평(8)리뷰(31)

400쪽
책소개
한 달 동안 무려 3000여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10대 소녀, 카드대금을 또 다른 신용카드로 돌려막는 대학생, 외모 개선을 위해 성형외과를 찾는 여성들, 질병에 대한 공포를 유발하는 제약회사, 회사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해고되는 노동자들, 낯선 사람들을 피해 '외부인 출입 제한 주택지'라는 거대한 담을 쌓고 살지만 항상 그 안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불안하고 피로한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안개 속과 같은 이런 삶의 위기에서, 누군가가 삶의 기술을 알려주는 지혜롭고 통찰력이 가득한 편지를 보내준다면 어떨까. 그런데 그 편지의 발신자가 우리 시대의 최고 지성으로 인정받는 현존하는 최고의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면 또 어떨까.

가족과 함께 있어도, 카페에서 연인과 함께 할 때도,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우리는 항상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혼자서 고독을 누리거나 사색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친구를 만나서도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만난 것일까? 트위터 팔로워가 늘어날수록 공허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 책은 고독, 세대 간의 대화, 온라인과 오프라인, 트위터, 인스턴트 섹스, 프라이버시, 소비, 자유에 대한 변화하는 개념, 유행, 소비지상주의, 건강 불평등, 신종 플루, 예측불가능한 일과 예측불가능하지 않은 일들, 공포증, 운명과 성격, 불황의 끝 등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첨예하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문젯거리를 다루고 있다. 바우만은 그 이슈들의 의미를 짚고, 오늘이 어떤 미래를 빚어낼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띄우는 편지 형식으로 들려준다.


목차


추천의 글_삶의 위기에서 찾은 지혜의 편지

편지1_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편지2_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3_세대 차이
편지4_오프라인과 온라인
편지5_트위터, 혹은 새들처럼
편지6_인스턴트 섹스
편지7_프라이버시라는 기묘한 사건(1)
편지8_프라이버시라는 기묘한 사건(2)
편지9_프라이버시라는 기묘한 사건(3)
편지10_부모와 아이
편지11_10대들의 소비문화
편지12_Y세대 들여다보기
편지13_신용카드로 얻은 자유
편지14_아이가 아닌 아이
편지15_속눈썹 감모증
편지16_유행에 관하여
편지17_쇼핑하라!
편지18_문화 엘리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편지19_질병 권하는 사회
편지20_신종 플루 공포
편지21_건강 불평등
편지22_불평등이라는 시한폭탄
편지23_교육을 환대하지 않는 세계?(1)
편지24_교육을 환대하지 않는 세계?(2)
편지25_교육을 환대하지 않는 세계?(3)
편지26_새해 소망
편지27_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기
편지28_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기
편지29_공포에 대한 공포
편지30_공위시대
편지31_종교를 닮은 정치, 정치를 닮은 종교
편지32_해고되는 사람들
편지33_위기에서 탈출하기
편지34_불황에는 과연 끝이 있을까?
편지35_왜 그렇게 살아야 하죠?
편지36_버락 오바마 현상
편지37_세계화된 도시의 문화
편지38_로나, 침묵의 소리
편지39_낯선 사람들은 위험하다
편지40_하늘을 바라보는 부족
편지41_경계 긋기
편지42_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
편지43_운명과 성격
편지44_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옮긴이의 말

접기


책속에서


P. 24 미국 고등교육신문의 웹사이트(chronicle.com)에서 한 달에 무려 3000여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10대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문자메시지를 많이 보냈다는 것은 그 소녀가 하루 평균 100여건의 메시지를 보냈거나 깨어 있는 동안 매 10분마다 거의 한 번꼴로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침이든 대낮이든 한밤중이든, 주중이든 주말이든, 수업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숙제시간이든, 심지어 양치하는 시간이든’ 가리지 않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결국 그 소녀는 10분 이상은 계속 누군가와 이야기한 셈이고, 이는 그 소녀가 혼자서만 지내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생각과 꿈, 걱정, 희망 같은 것들을 고민하면서 홀로 있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24쪽_편지2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중에서) 접기
P. 49-50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사귀는 형태의 만남이 일단 다양한 형태로 서로 화면을 통해 만나는 방식으로 변화되면서, 사람들이 서로 접촉하는 방식도 피상적인 것이 됐다. 마치 생겨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져버리는 행운처럼, 매우 급하게 진행되는 우리들 삶의 방식 때문에 선호하게 된 ‘웹서핑’이라는 표현 수단 중 하나인 트위터에 대한 호감은 급기야 인간들 상호 간의 의사소통 수단마저도 장악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 간의 상호 교제와 그 사이를 묶어주던 유대감이 지니고 있던 친밀함과 심원함, 영속성이 상처를 입게 되었다. (49-50쪽_편지 5 <트위터, 혹은 새들처럼> 중에서) 접기
P. 119 조지 스완이라는 여성은 매주 패션 주간지 두 종류를 읽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침실에서 좋아하는 옷을 입어보거나 엄청나게 수집한 구두를 신거나 핸드백을 매보면서”보낸다. 조지는 화장하는 것을 아주 좋아해서 방에다 립글로스를 무려 20개 정도 두었다고 한다. 애플야드가 기사를 쓸 당시에 조지는 가슴 성형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는 중이었지만, 자신의 우상인 모델 조던처럼 되기를 꿈꾸면서 그 수술을 기다리는 일조차도 무척 힘들어했다. 자, 어쩌면 당신은 분명 조지 같은 여성들이 무척 많고, 그 뉴스가 전하는 소식도 별로 새로울 게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조지가 바로 그 당시에 열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아이였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119쪽_편지 14 <아이가 아닌 아이> 중에서) 접기
P. 341 그날 밤 모니카는 잠자리에 누워 있으면서도 뜬 눈으로 밤을 꼴딱 샐 수밖에 없었고 외부인 출입 제한 주택지가 아니라 일반 거리에서 살았던 지난 20년의 세월 동안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느낌을 받았다.” 결국 담장 뒤에 숨는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증대된 셈이다. 그곳의 거주민들이 아무리 위험을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위험에 대한 공포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광고를 해대는 ‘새롭게 개선된’ 첨단 기술 장치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 상태는 더 불안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점점 더 자신의 주변을 더 많은 첨단 보안 장치들로 둘러싸고 보호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 장치들 중의 어느 하나가 혹시라도 ‘고장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341쪽_편지 39 <낯선 사람들은 위험하다> 중에서) 접기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인 우리들 각자는 모두 다시는 반복될 수 없을 정도의 특이성과 유일성의 가치를 지닌 한 개인이나 한 인격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오히려 판매할 만한지 아니면 팔기 어려운지에 따라 뒤죽박죽으로 수집된 물건 더미가 되어버릴 것이다. 62 - jade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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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오늘의 대다수 젊은이들은 인터넷 서핑, 아이팟, 휴대전화, 비디오게임에 둘러싸인 채 살아간다. 이런 전자문명이 만든 네트워크 속에서 개인과 개인의 관계, 그리고 사회적 유대관계들이 형성된다. 우리는 “가상적인 관계들이 현실적인 관계의 가장 실질적인 부분을 능가하는” 세계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 세계 속에서 이 책을 읽는 일은 꽤나 의미가 있다. 바우만은 그 특유의 통찰력으로 지식과 정보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상호 모순으로 충돌하는 의견들과 제안들 사이에서, 혹은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다른 넘치는 지식과 정보에 섞여 숨어버린 상태에서, 껍질이 아니라 “진리의 낟알”들을 찾고 가려낼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한다.
- 장석주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수많은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연결된 것 같지만 정작 우리 삶은 헛헛하고 외롭기만 하다. 혼자 있는 순간조차도 세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는 우리들의 기본 정서가 외로움인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혁신하고 변화하라는 명령에 의해 우리는 그 누구에게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관계를 만들고 가꿀 수 없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지속적인 우정’이 아니라 ‘획득하게 되는 그 순간’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모든 관계가 일시적이고 임시적이 된 소비사회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 중의 하나인 바우만의 이야기를 대중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 엄기호 (사회학자, 『단속사회』『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저자)

“액체근대(liquid modernity)”로 알려진 사회학자 바우만이 점점 더 불확실해져 가는 현대세계의 불안한 삶을 조명하였다. 초기 근대가 고착, 안정, 단조로움, 규칙성, 반복성, 예측가능성을 가진 질서정연한 것이라면 액체근대 혹은 유동하는 근대는 변화, 불안정, 복잡함, 비규칙성과 무질서를 특징으로 한다.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의 자유는 불편하고 위험하여 “축복으로 위장한 저주”일 수 있다. 이것이 바우만이 본 유동하는 근대의 디스토피아적 모습이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레오 스트라우스의 “전대미분의 무능을 동반한 전대미문의 자유”와 같은 맥락이다.
이 책은 바우만이 그의 유동하는 근대의 불안한 삶이라는 관점에서 세대차이, 온라인과 트위터, 프라이버시, 소비, 유행, 불평등, 교육, 공포, 종교, 운명과 성격 등의 일상의 주제를 읽기편한 문체로 쓴 44개의 편지이다. 몇 가지 흥미로운 편지를 보자. 액체근대의 세대 차이는 고체근대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한 세대의 지혜와 가치가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 과정에서의 세대 차이가 아니라 “정상상태”에 대한 세대 간의 가치와 삶의 방식이 공약 불가능하고 유전되지 않는다. 세대 차이를 성장과 성숙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로 간주한다. 온라인에서의 “정체성”은 “가벼운 외투”처럼 “언제든 처분 가능한” 것이 되었고, 사회적 유대관계는 장기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접속”을 유지하는 것이다. “빠르고 쉽고 문제없는 ‘만남’”을 통해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트위터로 인간관계의 “친밀함과 심원함, 영속성이 상처를 입게 되었다.” 열심히 구애할 필요도 없이 상대를 피자 주문하듯 하는 인스턴트 섹스 웹사이트도 생겨났다. “유행은 우리의 생활양식을 영구히 끝날 줄 모르는 혁명이라는 양식 안으로 내던져버리고,” 이것은 “결국 인간 조건이 소비시장을 통해 식민화 되고 착취되는 과정”이다.
유동하는 근대에서 인간은 고독할 수 있는 시간조차 빼앗겨 버렸다. 첫 편지에서 바우만은 “고독은 ...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할 수 있게 하는 ... 숭고한 조건”인데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고 쓰고 있다. 액체근대의 불안한 삶에 대한 흥미로운 진단에도 불구하고 바우만은 이 불안을 해소할 구체적인 지혜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액체근대”에서 비판이론의 새로운 임무가 사적영역에 의해 식민화된 공공영역을 해방시키고 수호하여 공적 공간을 정비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의미 있는 해법의 실마리이다. 그런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규범과 질서라면 도대체 끊임없이 변화하는 녹아내리는 액체근대에 어떻게 이 규범과 질서에 부여할 수 있을까?
- 마인섭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유동하는 세계에서 살아가기
- 장석주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고단한 일상 위로하는 바우만의 편지
- 한겨레 신문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동안 우리가 잃은 것들
- 장동석 (《학교도서관저널》 기획위원, 북칼럼니스트)

영화 보기 싫은 10대들, 그 이유를 듣고 보니……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조선일보
- 조선일보 북스 2012년 8월 18일자 '한줄 읽기'
중앙일보
- 중앙일보 2012년 10월 6일자 '책과 지식'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2년 12월 21일



저자 및 역자소개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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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폴란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했다가 소련군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가담해 바르샤바로 귀환했다. 폴란드사회과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후에 바르샤바대학교에 진학해 철학을 공부했다. 1954년에 바르샤바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캠페인의 절정기에 교수직을 잃고 국적을 박탈당한 채 조국을 떠나,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교에서 잠시 가르치다 1971년 리즈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영국에 정착했다. 1990년 정년퇴직 후 리즈대학교와 바르샤바대학교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활발한 학문 활동을 했으며, 2017년 1월 9일 91세 일기로 별세했다.

1989년에 발표한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MODERNITY AND THE HOLOCAUST》를 펴낸 뒤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90년대 탈근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며 명성을 쌓았고, 2000년대 현대사회의 유동성과 인간의 조건을 분석하는 ‘유동하는 현대LIQUID MODERNITY’ 시리즈로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1992년에 사회학 및 사회과학 부문 유럽 아말피 상을, 1998년 아도르노 상을 수상했다. 2010년에는 “지금 유럽의 사상을 대표하는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아스투리아스 상을 수상했다. 《레트로토피아》,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왜 우리는 계속 가난한가? 》, 《유동하는 공포》,《쓰레기가 되는 삶들》 등 다수의 저작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액체 현대>,<범죄학과 사회이론>,<액체 세대> … 총 430종 (모두보기)

조은평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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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데올로기 이론’에 관한 논문을 준비 중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건국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강지은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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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교에서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과 의사소통의 가능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칸트 철학을 기반으로 예술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하여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논문을 발표하고 있으며 현재도 연구 중이다. 대학교에서 20여 년간 철학, 윤리, 토론, 글쓰기 강의를 해왔으며 현재 서울시립대학교와 건국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번역했고 『철학자의 서재』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 『B급 철학』(이상 공저) 등을 썼다. 2022년 초부터 여행과 ... 더보기

최근작 : <칸트의 순수이성비판>,<B급 철학> … 총 3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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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일복 같은 소리>,<개가 보는 세상이 흑백이라고?>,<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등 총 257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3위 (브랜드 지수 148,182점), 여성학/젠더 4위 (브랜드 지수 97,606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트위터 팔로워를 늘려가는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온라인에 연결되어 있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이 시대
불안과 공포… 삶의 위기에서 도착한 지혜의 편지 44통!

한 달 동안 무려 3000여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10대 소녀, 카드대금을 또 다른 신용카드로 돌려막는 대학생, 외모 개선을 위해 성형외과를 찾는 여성들, 질병에 대한 공포를 유발하는 제약회사, 회사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해고되는 노동자들, 낯선 사람들을 피해 ‘외부인 출입 제한 주택지’라는 거대한 담을 쌓고 살지만 항상 그 안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 온라인 친구는 많은데 현실 친구가 전혀 없는 청소년들……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불안하고 피로한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안개 속과 같은 이런 삶의 위기에서, 누군가가 삶의 기술을 알려주는 지혜롭고 통찰력이 가득한 편지를 보내준다면 어떨까. 그런데 그 편지의 발신자가 우리 시대의 최고 지성으로 인정받는 현존하는 최고의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면 또 어떨까.
가족과 함께 있어도, 카페에서 연인과 함께 할 때도,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우리는 항상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온라인상에서 누군가와 끊임없이 메시지를 주고받고 인터넷 서핑을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혼자서 고독을 누리거나 사색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친구를 만나서도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만난 것일까? 트위터 팔로워가 늘어날수록 공허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 책은 고독, 세대 간의 대화, 온라인과 오프라인, 트위터, 인스턴트 섹스, 프라이버시, 소비, 자유에 대한 변화하는 개념, 유행, 소비지상주의, 건강 불평등, 신종 플루, 예측불가능한 일과 예측불가능하지 않은 일들, 공포증, 운명과 성격, 불황의 끝…… 등,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첨예하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문젯거리를 다루고 있다. 바우만은 그 이슈들의 의미를 짚고, 오늘이 어떤 미래를 빚어낼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띄우는 편지 형식으로 들려준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액체처럼 끊임없이 유동하며 변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 우리가 놓쳐버린 고독에 대하여

우리는 인터넷, 트위터나 페이스북,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끊임없이 접속을 시도한다. 우리는 항상 타인들 그리고 세계와 접속하면서 삶을 꾸린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접속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우리에겐 외로울 틈조차 없다. 우리가 온라인의 가상 세계와 연결되어 동안 놓쳐버린 것은 없을까? 트위터(Twitter)는 새들이 지저귀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140자 이내의 가벼운 물음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누군가와 연결을 유지한다. 스마트폰의 자판을 가볍게 터치하며 마치 새들이 지저귀듯 누군가와 재잘거리는 것이다. 온라인의 가상 세계 속으로 들어올수록 우리의 선택은 순간적으로 쉽게 이루어진다. 어깨에 걸친 ‘가벼운 외투’를 벗어버리듯. ‘새들의 지저귐’ 속에 자신을 방임하는 동안에 우리는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친다. 우리가 놓친 것은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을 위해 꼭 필요한 숭고한 조건이다. 이 책의 저자 바우만은 이렇게 우리들이 무엇인가에 끊임없이 연결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동안 외로움과 고독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바우만은 ‘근대성’에 관해 천착해온 유럽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다. 그는 여전히 ‘유동하는 근대(액체 근대)’라는 사유체계 속에 살고 있다. 그는 지금의 세계를 ‘유동하는 근대 세계’라고 명명한다.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는 패션, 유행들, 물건들, 사건들, 꿈과 희망들, 기회와 위협들, 이 모든 것들은 딱딱한 사물처럼 제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액체로 출렁이며 흘러간다. 어제의 새로움은 오늘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유동하는 근대’는 우리를 자주 놀라게 만든다. 액체로 흘러가는 세계의 변화 속도가 우리 의식의 속도를 간단하게 추월해버리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현대사회의 유동적(액체적) 성격과 인간 조건을 분석하는 <유동하는 근대> 시리즈를 발표해 주목을 받아왔다. 바우만은 제2의 근대를 이야기하면서 ‘포스트-모더니티’라는 부정적 개념을 사용하기보다는 ‘유동하는 근대’라는 긍정적 개념을 사용해 현대사회를 분석했다. ‘유동하는 근대(Liquid Modernity)’란 기존 근대 사회의 견고한 작동 원리였던 구조ㆍ제도ㆍ풍속ㆍ도덕이 해체되면서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국면을 일컫는 바우만의 독특한 개념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세상은 갈수록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 기존의 정치·사회 제도는 빠른 속도로 해체되거나 소멸하고 있다. 정해진 형태를 유지하는 견고성(고체성)과 달리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을 가진 유동성(액체성)에 빗대어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했던 근대에서 벗어나 안정적이지도 않고 확실한 것도 없는 사회가 됐다는 것이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나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세계,
비밀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웬일인지 우리는 점점 더 내가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상태로 떠밀려 간다.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주변의 목소리들이 많아질 때, 혹은 개인의 비밀들이 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나와 여기저기 나뒹굴 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무심코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익명의 대중에게 중계한다. 그렇게 사적 비밀이 서식할 수 있는 시공을 지워버린다. 프라이버시란 한 개인이나 집단의 정보들을 격리시켜 이를 통해 자신들을 선택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능력과 연관된다. 프라이버시가 비밀을 유지할 수 있는 권리와 또 이런 권리가 타자에게 승인되고 인정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때 비밀이 비밀로써 지켜질 수 없다면 프라이버시도 존재할 수 없다. 그리하여 바우만은 “프라이버시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유일하고,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그러한 주권이 유지되는 지대이자 바로 그처럼 주권을 지닌 사람들의 왕국이지 않으면 안 되는 영역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프라이버시를 방어하는 게 아니라 무심코 익명인들이 관람할 수 있는 공적인 영역으로 퍼다 나른다. 사적인 영역들을 말살하는 이런 일들이 통제할 수 없는 권력들이 아니라, 프라이버시를 방어해야만 하는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심각성을 간과해버린다. 바우만은 <프라이버시라는 기묘한 사건>이라는 소제목으로 세 번씩이나 연거푸 편지를 쓰면서 우리의 주의를 환기하는데, 이는 프라이버시의 위기야말로 삶의 위기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 안에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이 시대의 교육,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을 넘나들며, 바우만 특유의 ‘유동하는 근대’라는 사상으로 이 세계의 문제를 풀어나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잔혹하고 불안한 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선 바우만이 강조하는 부분은 이 불안한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한 문제다. 우리들 자신이 각자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사실은 함께 해결하지 않으면 완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처럼 공동의 문제라는 걸 인식하고 함께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들이 처한 이 불안한 유동하는 근대라는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렇다면 이런 태도는 또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바우만은 우리가 여러 선택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성격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저 타인들에게 성격 좋고 인품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이 유동하는 근대 시대의 요구들에 과감히 저항하려는 선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성격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성격을 형성하면서 타인과 정말로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들에게 띄우는 마지막 편지에서 카뮈의 표현을 빌려 “자신만의 부조리한 상황에서 홀로 무겁게 돌을 굴려야만 하는 시지프스가 이제는 타인들의 비참한 고통에 맞서 반항하는 프로메테우스와 마주할 수 있는 공간”들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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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어의 지느러미는 작다. 그래서 적이 다가오면 빨리 헤엄쳐서 도망칠 수 없다. 그 대신 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몸을 서너 배로 부풀린다. 그래도 적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몸에 테트로도톡신이라는 맹독 성분의 물질을 낸다. 복어의 독은 자기방어를 위한 생존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어의 독이 강할수록 맛이 좋다. 그런 위험천만한 맛이 얼... 더보기
cyrus 2014-06-21 공감 (3) 댓글 (2)



1. 집에 하루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들을 것, 볼 것, 읽을 것이 너무 많다. 2. 휴대폰을 꺼놓는 게 속 편하다. 3. 혼자 쇼핑하는 게 더 좋다. 4. 사람들과 오래 있었으면, 혼자서 ‘재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5. 혼자 장시간 드라이빙하는 걸 즐긴다. 당신은 이 다섯 가지 유형 모두 다 평소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 더보기
cyrus 2014-05-22 공감 (17) 댓글 (3)



1. 죽기 살기로 며칠 매달렸더니 애니팡 순위 1위를 달성하였다. 내심 흐뭇해하고 있는데 며칠 지나니 지난 주 순위가 종료되고 새로 잘 해보란다. 새로 낸 점수가 단박 마음에 찰 리 없다. 그래,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아이템을 쓰려면 일단 점수를 올리기 위해 마구 달려보는 거지. 자고로 기계를 상대로 덤볐다가 나가떨어지는 것... 더보기
ksvioletta 2013-02-28 공감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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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바우만 선생이랄까, 최고급 우롱차처럼 몇 번을 읽어도 글이 맛있다! 분석의 날카로움과 정확함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대가의 가치는 소품에서 더욱 빛나는 법.
빙과 2012-08-20 공감 (1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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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진짜.. 한숨만 나옴 넷에서 번역 검색해보면 알아요;; 완독했지만 많이 아쉬웠습니다 다시 번역되어 나오길..
여신은의지니 2017-01-26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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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통찰은 그의 나이와는 별개의 문제인듯 하다. <액체 근대>로 많은 이에게 영감을 줬던 그가, 이번에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대해 논하며 고독에 대해 말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청년이라면 필히 읽어봐야
무곡 2012-10-06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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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좋은 진 모르겠는데......... 아마 번역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sesiling 2017-07-13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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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나 외국이나 비슷하구나.. 혼란스럽고 불안한 젊은 세대들에 대한 할아버지의 걱정, 고민.. 부드럽고 냉철하게 쓴 글을 읽으니 나도 힘이 솟는다..!
삐약삐약 2012-12-26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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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며칠 전부터 집에 텔레비젼이 생겼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물론 아이들이다.문제는 아이들이 텔레비젼을 보면서 무언가를 자꾸 사자고 조른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텔레비젼에서 소개하는 광고를 보며 무조건적인 신뢰를 가진다. 물론 미남미녀들만 등장하며 이쁘고 멋진 모습으로 소개하는 상품소개는 아이들에게 제품의 신뢰를 주기에는 충분하다. 문제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주어도 아이들은 맑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왜? 라고 순진한 얼굴로 되묻는다. 아이들과 한참을 소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나 역시도 쓸데없는 소비를 많이 하고 있는 과잉소비자였다.








1,소비자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끊임없이 소비해야 돌아가는 사회이다. 한마디로 소비자사회. 소비의,소비를 위한, 소비에 의한 사회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만들어지는 상품들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소비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품들이다. 실제로 없어도 일상에 불편함은 없는 상품들이다. 소비를 목적으로 만든 상품은 강한 유혹으로 외관이 아름다워야 하며, 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야한다. 본질은 같음에도 말이다. 가만히 멈춰 있을 수 없고 오랫동안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없고 모든 것들이 계속해서 변해야 한다. 우리들이 좇으려고 안달하는 패션들과 우리의 주목을 받는 대상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 또한 우리가 꿈꾸는 것들과 무서워하는 것들,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과 몹시 싫어하는 것들, 심지어 희망을 품는 이유와 염려하는 이유조차도 계속해서 변화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래야만 하는 지금의 이 시대를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라는 표현을 한다.




'유동하는 근대세계'는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저자 바우만의 독창적인 개념으로 , 기존 근대사회의 견고한 작동 원리였던 구조,제도, 풍속,도덕이 해체되면서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국면을 일컫는 용어다. 바우만은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유동하는 근대'를 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자가 예측 가능한 사회였고, 공동체가 존속했던 시대였다면, 후자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이 모두 사라져버린 시대이다. 바우만에게 '유동성'은 후기 근대의 불확실한 삶을 가리키는 것이자, 동시에 공포와 결부되는 개념이다. 바우만은 이처럼 근대를 '견고한 근대'와 '유동하는 근대'로 나누고 견고성에 유동성을 대비시킨다. 바우만은 유동성이라는 개념용어를 현대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용했다. 우리 시대 세계의 질서와 제도가 고체성을 잃어버리고 끊임없이 유동한다는 것이 바우만의 생각이다.



2, 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소비자사회는 이렇게 보여지는 것,모든 것이 전시의 목적을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의 판단기준은 미와 추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보여지는 것이 이제는 상품이 아닌 인간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인간의 존재를 대변하게 된다고 한다. 소비자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웹서핑은 점차 확대되어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까지 장악하게 되었고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사귀는 만남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촉하게 되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이런 것들로 의사 소통의 기회는 더욱 많아졌지만 이런 온라인으로의 의사소통은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아닌 피상적인 대화속의 피상적인 만남을 부추긴다. 오로지 보여지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온라인의 만남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가지는 어떤 친밀함이나 심원함, 영속성에 상처를 주고 있다.




"어째서 의사소통 기술이 개선을 거쳐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정작 다른 형태의 의사소통, 다시말해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을 이어주는 진정한 의사소통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려 이처럼 여전히 서로 엇갈리는 혼란 속에 빠져 있어야 하는가. 더구나 은폐되어 있는 측면뿐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측면에 있어서도 분명 정직하지 못하며 실상 참다운 의사소통의 환상에 불과한 그런 광장(인터넷광장)을 지니게 되었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말이다." -주제 사라마구-



주제 사라마구는 그의 소설에서 아무리 의사소통 기술이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지속될 수 밖에 없는 인간 고유의 특성-진정한 미궁을 통해서 서로 대면하게 될 때의 당혹감-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며 가지는 독특한 특성들은 온라인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3,김씨표류기가 보여주는 잉여사회

영화 <김씨표류기>를 보면 소비자사회에서 버려진 불량소비자 남여 두 김씨가 나온다. 은둔형 외톨이의 여자는 오로지 온라인에서만 여왕대접을 받는다. 이 가상의 공간에서 아름답고 행복하며 완벽한 여자가 되지만, 현실에서는 부모에게 의존해 사는 은둔형 외톨이일 뿐이다. 미와 추의 기준으로 보면 소비자사회에서 버려진 추의 여자이다. 끊임없이 성형수술을 해야하고 온 몸을 아름답게 꾸며야하는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로서의 삶으로 실제로 그녀는 얼굴에 흉터가 있는 불량소비자일 뿐이다. 신용불량자인 남자가 한강에서 투신자살을 한 후 강물에 떠밀려 표류하게 된 곳은 밤섬이라는 외딴섬이다. 이 밤섬은 도시의 외딴 섬으로 도시의 쓰레기가 밀려와 도착하는 잉여의 공간이다. 김씨가 떠밀려온 것처럼..도시의 모든 쓰레기가 강물로 떠내려와 도착한다. 이 밤섬은 그렇게 쓰레기 즉 잉여의 공간이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공간에 살아가며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가고 있는 여자와 잉여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 이들은 모두 바우만이 말한 도시에서의 잉여적 삶의 형태 -불합격품,불량품,폐기물,찌꺼기- 이다. 그러나 이들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쓰레기의 재사용이다. 쓰레기는 다시 쓸수 없는 버려진 물건이다. 잉여의 삶인 두 주인공들에게 희망이란 쓰레기를 다시 재사용함으로써 보여주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세계를 구축'하는 사용자로서의 '독립된 면모'를 발휘할 때 잉여적 삶에 희망이 비춰진다는 메세지와 함께 두 주인공들의 삶은 비극이 아닌 희망으로 막을 내린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이 책의 저자 바우만이 명명한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운 편지와 같은 맥락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4, 집단적인 불확실성과 개인적인 불확실성

폴란드의 노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하는 근대에 띄운 44통의 편지는 노학자다운 삶의 혜안과 번뜩이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사회학이자 철학이 숨쉬고 있다. 가장 먼저 온라인이 장악하게 된 사회에서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무분별한 정보에 휩쓸리게 되면서 거짓말과 환영,쓰레기, 폐기물 같은 껍질들을 분리해내서 읽을 만한 낟알과 진리의 낟알을 뽑아내도록 도와주는 탈곡기가 없음을 안타까워 하는 첫번째 편지를 시작으로 세대 차이,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주는 의사소통의 한계,점점 프라이버시가 없어지며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섹스, 부모와 아이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교육 문제 등을 냉철한 판단과 노학자의 근심어린 조언을 들을 수 있다. 노학자의 가장 큰 우려는 모두가 이 '유동하는 근대'의 모습을 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유동하는 근대에 사는 우리들의 모습은 저자의 표현대로 하면 살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이런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위험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오로지 속도뿐이라고 한다. 저자는 앉아 있는 것보다는 걷는 편이 낫고, 걷는 것보다는 뛰는 편이 나으며, 뛰는 것보다는 오히려 서핑(파도타기)하는 편이 낫다고 한다. 어쨋거나 유동하는 근대에서는 어떤 한 형태가 언제 어떤 식으로 고체화될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어떤 형태로 고체화된다하더라도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는 이토록 집단적인 불확실성과 개인적인 불확실성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정보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으며, 언제든지 위험으로부터 구출해내줄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통신 수단은 최첨단을 걷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오히려 수많은 범죄에 노출되어 몸살을 앓고 있다. 나는 한편으로는 스마트폰이 우리의 정신을 뺏어갈 수는 있을지라도 우리의 일상에는 실질적으로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위에 말했듯이 지금은 필요에 의한 상품들이 아닌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상품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이름하여 소비자사회가 '유동하는 근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이들은 새로운 것들에 열광하며 넘쳐나는 물질문명에 익숙한 세대로 낡은 우리 부모세대들을 점점 더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과 일상에서 철학할 줄 모르는 사유가 쏙 빠진 고독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미래는 더욱 불확실해져 갈 것이다. 유동하는 근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그문트 바우만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불투명한 미래에 한줄기 투명한 희망의 빛 같은 것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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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2-10-17 공감(1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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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고독이여!







고독을 모르는 천치들의 세대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아인슈타인의 예언’이라는 제목의 한 장의 사진이 누리꾼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사진 속에는 아인슈타인이 예언한 문구가 소개되어 있다. "I fear the day that technology will surpass our human interaction. The world will have a generation of idiots."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과학기술이 인간 사이의 소통을 뛰어넘을 그날이 두렵다. 세상은 천치들의 세대가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정말 이 말을 했는지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다. 다만 아인슈타인이 살았던 시대보다 더 과학기술이 발달한 시대 속에서 24시간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살고 있는 인류는 천치들의 세대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 컴퓨터를 세상에 선보였던 1984년으로 되돌아가 보자.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공놀이하거나, 흙장난, 인형놀이를 하는 등 다 같이 어울리며 뛰어놀고 있다. 18년 뒤, 애플과 삼성이 스마트폰 기술을 둘러싸고 특허전쟁을 벌였던 작년 2012년 아이들의 모습을 보라. 벤치에 모여 앉아 스마트폰 및 IT 기기들을 만지며 각자 놀고 있다. 놀이터에는 아이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또래 친구들과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아이들에게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자체가 놀이이며 일상이다. 트위터에 짧은 문구를 남기고, 페이스북에 자신의 일상을 담은 사진을 올린다. 웬만한 남녀노소는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스마트폰을 잘못 다루면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2011년 행정안전부가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스마트폰 중독율이 성인 7.9%, 어린이(만 9세 이하) 11.3%로 나타났다. 어린이의 경우 대개 자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초기 관리를 놓치면 쉽게 중독으로 악화될 수 있다. 과도하게 인터넷에 노출되면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문가들의 보고가 있다. 자극적인 화면에 익숙해지면서 학습능력 저하는 물론 폭력 충동 등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스마트폰에 중독된 아이들이 정말 정신 작용이 완전하지 못한 천치의 세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류가 스마트폰, 트위터, 페이스북에 열중할수록 고독의 시간을 잃어버린다고 말한다. 스마트폰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상상하라. 24시간 내 곁에 있었던 가족이나 정든 친구 한 명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외로움이 느껴지면 스마트폰을 먼저 찾게 된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기다릴 때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집으로 가기 위해 혼자 버스 탈 때도 눈은 스마트폰으로 향한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혼자 있는 시간도 외롭지 않고 지루하지 않다. 그러나 혼자만의 시간을 스마트폰으로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확인하는 데 소비할수록 우리는 인간관계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고독을 모르는 천치가 되어가고 있다.









자유를 얻었으나 고독을 느끼는 현대인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1931년





지금 이 시대는 액체처럼 흐른다.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에 흐물흐물 거리는 시계처럼 말이다. 바우만은 현대사회의 역동성을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라는 말로 개념화했다. 그는 '변덕스러움', '불안정성', '불확정성'은 우리 시대 삶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형태들이 더 이상은 제 모습을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여건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근대적 사회는 제도, 규범이 작동되는 견고한 구조로 구성되었다. 근대 들어 인간은 국가와 사회가 옭아맸던 속박의 틀을 깨고 해방됐다. 그러나 자유를 얻음과 동시에 질서와 규범이 사라진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안과 불확실성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지 못하므로 선택과 결정을 할 때마다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은 쓰레기로 전락한다. 유연성이 곧 합리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 실패나 패배의 책임을 모두 떠안게 된 개인은 '영원히 폐기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정보기술의 발전과 함께 등장한 스마트폰, 트위터, 페이스북은 '유동하는 공포'를 잊을 수 있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동료가 없는 빈자리에서 느껴지는 공허감을 스마트폰 안에 설치된 카카오톡으로 말 걸 수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동료를 친구로 만들기 위해서는 '친구 추가' 버튼 하나 누르면 충분하다. 하루에 많으면 두세 명, 한 달 뒤에는 수십 명 넘는 '페북 친구'가 생기게 된다. 페이스북에서 만난 친구의 수가 백 명을 넘기도 한다. 트위터를 통해 수많은 사람과 언제든지 소통할 수 있다. 새해 인사를 수많은 친구들에게 직접 만나거나 전화 통화로 할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카카오톡과 트위터로 단시간만에 백 명이 넘는 친구에게 새해 인사를 전할 수 있다. 2013년 새해 첫날인 1월 1일 0시로 넘어가는 순간 아시아권 이용자들(한국, 일본)의 초당 신년 축하 트윗 건수가 미국과 영국을 앞지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트위터는 인간관계에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일상화되었다. 이 정도쯤이면 우리는 고독을 느낄 필요가 없는 축복 받은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지구상에 그런 천국이 존재할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마침내 그 꿈이 실현되고 있는 것일까? 모두가 인정하듯이 대화와 같이 인간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양면적인 가치, 다시 말해 편안하면서도 아주 즐거운 특성과 그럼에도 동전의 양면처럼 아주 성가시기도 하고 온갖 위험으로 가득한 이중적인 특성이 마침내 해결된 것일까?" (p 30)



그러나 바우만은 오늘날 인류의 삶이 윤택해진 현대사회에 의문을 제기한다. 고독을 피하고 잊기 위해 온라인 세계로 향하는 '엑소더스' 행렬은 개인의 정신을 성숙하게 하는 사색과 인간관계 내에서의 소통을 형성하게 만드는 조건이 내포된 진짜 '고독'을 잊어버리게 된다.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p 31)







자신이 외롭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페이스북에 지인과 함께 외식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올리거나 틈만 나면 '카톡질'을 하는 엄지족의 모습은 늘 고독과 불안감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현대인들의 눈물겨운 투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오프라인 인맥 형성에는 인색하다.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나는 타인과 소통을 시작하는 행위는 항상 호기심 섞인 불안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저 사람과 친하기 위해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대화의 물꼬를 트기 전에는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주저하고 고민한다. 온라인 인맥 형성은 오프라인에 비해 간편하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쓸데없이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인관관계를 재정리할 때도 온라인이 편하다. 싫어하는 동료가 있으면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친구 목록에 삭제해도 된다. 애정이 식어버린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할 때 문자 하나면 만사 오케이다.







고독하지만 자유롭게













오귀스트 로댕 『생각하는 사람』 1888년





바우만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실존의 고독을 낭만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불확실한 근대를 버리고 질서가 살아 있는 과거로 회귀하자고 주장하거나 어떤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고독의 기회를 잃어버린다고 해서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과거의 유희적 움직임을 기억하자는 것도 아니다. 이미 지나가버리고 사라진 과거에만 집착한다는 건 고독을 더 키우는 부질 없는 고집일 뿐이다.



이제 사회는 '구조'보다 하나의 '네트워크'가 되어 간다. 유동하는 사회 앞에 인간은 어찌 해야 하는가. 국경과 공간을 초월하는 광범위한 인맥 네트워크가 형성되더라도 진정한 소통 능력과 공동체 의식을 자리 잡지 못한다. 이방인에게 직접 말을 걸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오프라인 세계에 관심을 잃고 '친구'라는 글자의 빈껍데기를 씌운 가상의 온라인 세계에 관심을 기울인다.



고독은 사회와 집단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부정의 개념으로 널리 통한다. 그러나 고독은 단순히 인간관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며 뿌리 깊은 욕구이다. 즉, 새로운 인간을 만나 소통하고 싶은 관계 형성의 욕구이다. 고독은 개개인의 행복과 창조 활동뿐만 아니라 사회의 발전과 안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궁극적으로 사람은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고독 속에서 자유롭게 사람을 만나는 관계를 추구하는 과정은 진정한 유대감을 획득하는 확실한 인생의 경로다.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친구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바우만의 표현처럼 '생각을 집중하게' 할 수 있는 고독을 누릴 필요가 있다. 유동하는 세상에 잊고 있었던 고독을 다시 한 번 불러보자. "응답하라, 고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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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3-01-09 공감(1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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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개인이 유대관계를 회복시키려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나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하지 않는다. 요즘 흔히 말하는 SNS는 하나도 하지 않는 셈이다. 사실 이런 SNS에는 일종의 유행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서 SNS 유형의 서비스들을 살펴보아도 내가 어느 SNS도 하지 않는다는 명제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는 듯하다. 이전에는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유행이었고, 그 이전에는 세이클럽이나 버디버디가 유행이었다고 여겨지는데, 나는 이 SNS의 세계에서는 개인적으로는 싸이월드를 제외하고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한 것을 지켜봤을 뿐이니 정말 좁은 부분을 견식 해봤구나,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SNS의 범위를 좀 넓혀서 이야기하자면, 인터넷 상으로 사교를 하는 대부분의 서비스를 이 범주에 포함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카페나 블로그도 어쩌면 SNS에 포함될 수 있을 터인데, 그렇게 넓힌다면 나 또한 이 서재를 포함해서, 블로그 정도 (비록 이제는 거의 관리하지는 않지만) 로 SNS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사람들이 주로 SNS라는 말을 할 때 떠올리는 것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이다. 그렇기에 SNS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하려면 이 둘을 중심으로 진행시켜야 할 것이고, 이 글에서도 범위를 그 둘로 한정한다. 물론 앞서 밝혔다시피 트위터 계정도 없고, 페이스북 계정은 가지고 있지만 조금도 업데이트 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 둘에 대해서 자세히 논할 여력도 없고, 경험도 일천하다. 그러나 몇 가지 듣고, 본 내용으로 판단하자면, 이들 서비스들은 일단 블로그에 비하면 좀 더 즉각적이고, 무엇보다도 좀 더 짧은 내용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좀 더 부연하자면, 알라딘 서재나 기타 블로그에 글을 올려본 사람들은 아마 어느 정도는 느낄 것이다. 블로그 창을 열어 큰 공백을 마주하다보면, 왠지 모르게 그 공백을 어느 정도는 채워야 될 것 같은 기분을 말이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서, 짧게 글을 쓰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대개의 경우 블로그의 글은 적어도 트위터의 140자를 훨씬 상회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트위터는 본디부터 짧은 글을 위해서 생긴 서비스이니 그 '트윗' 들을 살펴보면 모두 한 트윗, 길어도 서너 트윗 내로 문장이나 내용이 완결되는 경우가 많다. 내용 또한 트위터의 내용들이 더 개인적인 느낌이나 감정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여겨진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위에서 이 SNS 세계를 내려다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마치 거미줄처럼 연결된 망일 것이다. A에서 시작하여 B로 향하고, C로도 뻗어나가는 그런 연결망 말이다. 그 망은 너무나 복잡해서, 순차적이지 않고, C로 향했던 것이 방향을 바꾸어 다시 A에게 되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B자신이 자신의 트윗을 돌려받기도 한다. 이 SNS 세계에서 우리는 (적어도 같은 서비스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결의 놀라운 면모는 연결된 사람들끼리의 유대를 제공한다는 측면이 아니다. 이 연결은 사람들의 양가감정,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만 동시에 자신을 숨기고 싶어하는, 또한 자신을 최대한 진솔하게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최대한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하는 그 이중성을 충족시켜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트위터의 거친 글은 감정을 여과하지 않고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처럼 보여주는 작용을 한다. 그 글을 다른 트위터 이용자가 보면서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트위터와 같은 도구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경우, 마치 우리가 대화를 할 때 비언어적인 표현이 중요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 내용만큼이나 그 글의 어조나 분위기가 다른 사람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대화와 트위터가 다른 점은 우리는 대화와 달리 트위터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좀 더 과장되거나, 좀 더 축소하는 등으로 변경시킬 여지가 훨씬 많아졌다는 점이다. 바로 이 부분에 이중성의 충족이 작용한다. 비언어적인 표현(트위터 어구의 어조나 분위기)은 자신의 진솔함을, 언어적인 표현(글 내용)은 자신이 숨기고 싶어하는 부분을 담당하는 식으로 말이다. SNS는 인터넷이라는 환경 아래에서 이런 방식으로 발달해왔고, 우리는 이런 SNS를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는 없을까?



이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은 사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이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대두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저자가 유동하는 근대, 라고 규정한 세계에서 어떻게 우리의 가치와 삶의 방향이 바뀌고 흔들리는가를 다루고 있다. 저자의 개념을 받아들여 논의를 지속시켜보면, 어떤 사람이 어느 행성에 서 있다고 하자. 예를 들어 지구에 이렇게 두 발을 딛고 서 있다고 가정할 때, 갑자기 지구의 지반이 목성이나, 토성처럼 가스 등으로 바뀌어버리거나 혹은 액체 처럼 유동성을 가진 물질로 바뀌어버린다면, 우리의 걸음은 그 전까지 걷던 걸음과는 매우 달라질 것이다. 때로는 그 물질에 먹혀버리기도 할 것이고,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하여 헤엄도 칠 것이다. 바로 그런 부분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생각을 진전시켜보자. 우리가 단독자로서 행성을 딛는다면, 그러니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이 행성을 딛고 있지 않다면 다른 논의는 무의미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유동하는 물질로 덮힌 행성을 나 혼자만 딛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주위의 많은 사람이 똑같이 유동하는 물질 위에서 버둥거리고 있다. 그렇게 서로 버둥거리다가 어느 순간 손이 맞닿기도 할 것이고, 어느 순간 눈짓이 오가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가장 먼저 일어날 수 있는 것은 협동일 것이다. 이 무른 지각 위에서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 서기 위해서 말이다. 협동이라고 규정짓고 보면,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저 흔들리는 유체 위의 사람들을 우리 현대 사회의 모형이라고 본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도 물론 존재한다. 유체 위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발을 딛기 위해서 겨우 상대적으로 좀 단단해 보이는 지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 그 사람을 밟고 올라가는 등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물론 이는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도 그 이전에 협동이 먼저 일어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먼저 손이라도 맞잡아야 상대방과 함께 올라가거나, 혹은 밟고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협동이 저런 상황에서 먼저 일어날 것이다. 그 이후에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초기 조건이 조금 변함으로써 거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카오스 이론이라고 부른다던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적용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 양식은 비선형적으로 복잡한 양식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복잡한 양식을 영위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초기에 가졌던 관계, 협동을 잊지는 않았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다시 그 협동을 부활시키기에 이르는데, 그 양상은 이제 일종의 SNS 형식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렇게 단정짓기 위해서는 몇 가지 의문에 답을 해야만 한다. 어떤 점에서 현대의 SNS가 초기의 협동 관계를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가? 계승했다면 어떻게 변했는가? 그리고 왜 SNS 형식이어야 하는가? 이는 이런 예를 들면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에 여중생의 납치 사건과 같은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하자. 그럴 때에는 트위터의 활동들, 리트윗 등을 통하여 어떻게든 범인을 찾고 여중생을 찾으려는 노력이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초기의 협동관계가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초기의 협동관계보다 그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140자로 리트윗만 하면 우리는 정의를 구현했다는 마음과 동시에 사회에 무언가 도움을 주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사회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초기에는 협동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협동 방식의 간략화로 인하여 누구나 간단하게 협동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초기에서 변한 방식이며 동시에 SNS 형식이어야 할 이유이다.



하지만 저런 의문에 답을 했다고 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 지금 와서 이런 형식을 빌려 협동이 재발견되었는가? 이는 현재의 SNS의 태생과도 연결되는 문제이다. 현재의 협동은 유동하는 근대의 초기와는 그 모습이 사뭇 달라졌다. 초기에는 그 태생이 사람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기원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기원을 기업과 기술에 두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운영하는 기업, 그리고 물질적으로 그 체제가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서버들, 그리고 그런 서비스에 쉽게 접속할 수 있는 스마트폰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직접적으로 저 근본적인 문제에 답하자면 기업과 기술의 이권과 협약이 협동을 부활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이 그렇기 때문에 저런 서비스들의 활동은 모두 무의미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아까 트위터의 활동들, 리트윗 등을 통하여 사회를 바꾸려는 기획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조정환이 지은 인지자본주의, 에서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를 점거한 상태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기업이 지원하는 이 서비스는 근본적으로는 사람-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기계-사람의 형식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공장을 점거했다고 하더라도 가내 수공업이 아닌 이상은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서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더 편리해졌다. 하지만 잃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이 책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야기한다. 이런 트위터나 페이스북 세계가 있는 온라인 세계는 '사람들 간의 접속이 지속 되는 시간을 축소시킴으로써 접속이 무한하게 증대되고' 동시에 '인간들 간의 유대관계를 약화시킨다' 라고 말이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자. 어, 나는 트위터 팔로워가 몇 백명인데, 나는 페이스북에서 친구들이 정말 많은데, 그렇게 의아해할 수 있지만 그들과 나의 관계는 앞서도 지적했다시피 다른 사람보다는 나 자신의 양가감정의 충족을 위한 것이다. 이런 양가감정의 충족은 사람-사람의 관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사람이 마주보고 있을 때에는 초면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좀 관계가 진척되면 새로운 의심이 생긴다. 과연 이 사람이 어디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걸까, 라고.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이나 비언어적인 표현을 잘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손해 보는 기분이 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어디까지 상대방에게 맞추어야 할 지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사람-기계-사람의 관계에서는 기존에 자신의 감정과 비언어적인 표현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서슴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상대방과 맺어지기는 쉬워졌지만 깊이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워졌다. 부연하면 더욱더 진솔함은 많아졌지만, 동시에 더욱더 숨김도 많아졌다. 이는 자연스럽게 유대관계의 약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람은 고독에 빠지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이기에 사실 이런 결론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반대되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독의 속성을 잘 분석해보면 그렇게까지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쉽게 생각하면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SNS의 활용 때문에 고독을 누릴 시간이 없어진 것 처럼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피상적인 고독이다. 고독을 누리고 싶다면 사실 컴퓨터를 안하면 되고, SNS를 안하면 된다. 이 책에서 진정으로 고독을 언급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 보다는 어떻게 사람이 사람-기계-사람의 구성'물'이 되어 기계에 동화되어 가는가, 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기계가 될 수도 없다. 거기에서 사람은 진정한 고독을 느낀다. 그리고 그 진정한 고독은, 사람-사람 관계 사이의 유대관계를 갈구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변모한다. 초기의 협동관계로 정말 먼 길을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초기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동안 쌓인 경험이 더욱 사람-사람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저렇게 진정한 고독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면 온라인 공간에서 활동하면서 잃은 유대관계는 어떤 방식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한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대답하도록 하겠다. 일전에 대학로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혜화역에 내렸을 때 왠 외국인이 돈을 조금만 빌려달라고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었고 빨리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약속 때문에 혜화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면서 홀끔홀끔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외국인이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자신이 지갑을 잃어버렸고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결과적으로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하였다. 사실 나도 고개를 저으면서 그냥 지나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대사관에는 연락을 했나, 경찰에는 말을 했나 등등과 같은 질문을 하면서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면 내가 여기서 다른 사람들처럼 고개를 돌리고 떠나간다면 이 사람은 좋지 못한 상황에 놓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어설프게 그 사람에게 영어로 말을 하고 조금 돈을 주었다. 끝까지 갚겠다고 이메일이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는 그였지만 그냥 괜찮다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그때 하나 깨달은 게 있다. 사실 나로서는 상대방이 거짓을 이야기하는지, 진실을 이야기하는지 당시에 주어진 정보로는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가 거짓말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를 믿는다면, 객관적인 사실은 몰라도, 적어도 내 마음 안에서는 그는 정직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내 도움도 진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피상적인 고독을 잃어버린, 이 유동하는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의 말이 의심스럽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한 알 수 없다. 근거를 모을 수 있는 데까지 모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가진 근거로는 상대방을 판단할 수 없을 때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를 믿는 것뿐이다. 계속 그를 의심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의 진솔함보다 그의 숨김에 더 집중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 사이의 유대를 갈구하는 그런 진정한 고독에 빠질 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 발 앞서 나가서 먼저 그를 믿는 것이 좋을 것이다. 때로는 거짓말로 신음할 것이고, 때로는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신음하고 손해를 본 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관계는 회복될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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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10-03 공감(23) 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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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와 과잉, 그 역설에 관한 사회학 보고서



배제와 과잉, 그 역설의 세계에 관한 사회학 보고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지그문트 바우만, 동녘, 2012. 8.



커피 전문점에서 커피를 사이에 두고 두 남녀가 앉아서 스마트 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한 사람이 커피를 가지러 간 사이에도 남은 한 사람은 기척이 없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식당에 어린 아이 세 명이 앉아 있다 부모님이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에도 세 아이는 색색의 닌텐도 기기를 들고 게임에 집중해 있다. 부모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앉아서 아이들은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으리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지난 주 금요일 출장을 갔다가 세미나실 서랍에 핸드폰을 두고 왔다. 주말과 주일의 스케줄은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나기로 한 약속이 취소되었다는 문자를 받지 못해서 두 시간을 약속 장소에서 기다렸고,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급한 연락이 올까 염려스러워서 조바심으로 이틀을 보냈다. 앞서 이야기한 이 모든 사례가 모두에게 낯설지 않으리라. 우리를 연결하는 접점이 사람과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사람과 기기를 사이에 무수한 (익명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반유대 캠페인의 여파로 국적을 박탈당한 채, 영국에 정착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Zygmunt Bauman)은 “무료함 속에서 결실을 일구는 법”을 잃어버리고, 지루함과 지속적인 것을 참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마흔 네 통의 편지를 보낸다. 몇 년 후면 구순이 되는 노학자는 여전히 촌철살인의 언어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순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저마다 개성 있는 삶을 살고 꿈꾸지만, 경쟁은 평준화를 조장한다. 전 지구적인 자본의 낚시질에서 자기 세계를 주장하며 주체로 살아남기에 개인은 너무도 무력하다. 현대인은 가볍게 공간을 넘나들며 유목하며 살아가는 듯하지만, 그것은 자본이 기획하는 마케팅에서 한 발작도 나아가지 못한 선택일 때가 대부분이다. 홈 패인 공간을 벗어난다는 것은 비행기에 탐승해서 국경을 넘나들며 세계 곳곳에 발자국을 찍는 일이 아니다. 시대를 지배하는 에피스테메(epistēmē),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담론을 위반하며 자기 길을 가는 것이다.



감정 소모 없이 외로움을 극복하는 필살기 - <인 디 에어>(Up In The Air, 2009)



제이슨 라이트먼트가 연출한 영화 <인 디 에어>(Up In The Air, 2009)에서 주인공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은 1년 365일 중에서 43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공항에서 보낸다. 미국 전역을 여행하는 미국 최고의 베테랑 해고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양육하기 위해서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은 그의 인생 설계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지상에 천척하지 않은 채 그가 가진 유일한 목표는 항공사에서 발급하는 탑승 시간 마일리지 카드의 천만을 채우고, 세계에서 일곱 번째 - 금으로 만든 - 플래티넘 카드를 받는 것이다. 허공을 딛고 사는 듯한 이 황당한 삶의 목표를 가진 라이언의 모습은 유동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메타포다. 뜨겁게 부딪히는 핫(hot)한 구체적인 삶을 거부하고, 감정 소비를 비난하는 태도를 비난하는 쿨(cool)한 삶을 추구한다. 철저하게 보여줄 것과 감출 것을 구별하고, 감정 소비 없이 인스턴트 관계와 방법으로 외로움과 고독을 잊고자 하는 유동하는 사회의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정치가 점유했던 권력이 자본으로 이동하면서, 국가는 감시와 처벌 평가 기구로 전락했다. 1997년 IMF와 이후 ‘88만원 세대’의 성장을 우리 사회가 경험했듯이 국가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되었고, 모든 실패의 책임이 개인의 어깨에 떨어지고 있다. 바우만은 액체 근대는 삶의 실제에서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다고 본다. ‘가속’의 개념으로 공간과 공간 사이를 가로 지르며 둘 사이의 거리감이 사라진다. 시간이 공간 보다 우위를 점하면서, 공간에 따라서 경계를 이루었던 견고한 삶은 무너지고, 이동의 속도와 이동의 수단은 권력과 지배의 가장 주요한 도구로 격상되었다. 더 값싼 노동력을 있는 - 권리 주장을 덜 하는 -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다국적 기업과 자본은 국경의 경계를 넘어 가볍게 돌아다니는 것이 힘의 자산이 되었다. 이윤 창출은 견고한 관계 속에서 오랫동안 유지했던 신뢰가 아니라, ‘생산품의 순환과 재활용, 노화와 폐기와 대체 과정에서의 경탄할 만한 속도“에 있다. 오래된 것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신상(품) 소비는 능력을 입증하는 중요한 의례가 되었다.



불확실성으로 유동하는 사회



사랑이 넘실거리던 자리에는 욕망이 자리를 잡았다. 인터넷이 매개가 되면서 욕망을 해소하는 일회성 만남이 잦아진다. 신용카드는 소비의 자유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여성의 몸은 성형외과 의사의 경작지가 되었으며, 의사들은 질병의 치료자가 아니라 - 약을 필요로 하도록 잠정적 환자를 만드는 - 질병 홍보 역할을 맡게 되었다. 건강은 복지 정책이 아니라, 부의 소유 여부와 비례 관계를 형성했으며, 문화는 백화점의 상품처럼 소비재로 취급되었다. 배우는 일은 즐거움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생존방식이 되었다. 교육은 급속한 변화에 뒤처지면 안 될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사무직원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미화원 보다 거의 열배 가까운 임금을 받고, 키보드를 만드는 제3세계 노동자보다 “백배나 많은 임금”(194쪽)을 받고 있다. 공동체의 버팀목이었던 탄탄한 유대는 전지구적인 자본의 힘으로 해체되고 있다. 유동의 시대는 과잉이기도 하지만, 배제이기도 하다. 새로운 직업과 일자리가 창출 되고 있으나 실업이 급증하고, 영세 기업은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SNS는 국경을 해체하고 세계를 단일 공간의 무정부주의로 만들었으나, 바로 옆에 살고 있는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프리랜서 고소득자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반면,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있다.



여전히 미완인 근대의 기획



근대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발전을 통해서 개인을 평등한 상태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근대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바우만은 그러한 근대를 지연하고 있는 것이 ‘유동하는 사회’라고 얘기하고 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유동하는 액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을 낯설게 보는 것이고,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아와 독백 형식의 대화를 나누는 일상의 회복이다. 깃털처럼 가벼운 외투를 벗고, 견고한 강철 전투복이 필요한 시간이다.



고독을 회복해야 할 시간



바우만의 편지는 테이블과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아서, 삶의 끝자락에 더 가까이 가 있는 노(老)학자의 말씀을 듣고 있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가까운 지인을 앞에 두고 얘기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사적 삶과 취향쯤으로 가볍게 지나쳐도 괜찮을 것 같은 생활 세계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은 우리가 일상을 얼마나 섬세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만든다. 사회학적 토대에서 만들어내는 적절한 은유가 빛이 나는 책이다. 우리와 다른 공간에서 쓰인 책이라고 볼 수 없는 깨알 같은 즐거움도 있다. 헐리웃 대중영화처럼 치부할 <블레어 워치>와 <로니의 침묵>을 유동사회의 텍스트로 가져온 점은 거장과 함께 동시대에 같은 것을 경험하는 유쾌함을 선물한다.



아쉬움은 편지 형식에서 필연적으로 수반할 밖에 없는 문제점이다. 2년 동안 2주마다 썼던 편지 모음이다 보니 주제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쟁점이라는 측면에서 거대 담론이 바우만 개인의 생활 세계와 중첩하면서 간결한 글쓰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으리라 짐작한다. 44통의 편지는 방대한 주제에 걸쳐 있기 때문에 장과 장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서 구조화가 되어 있지 않다. 파편화된 글들은 ‘고독’이 필요하다는 하나의 주제로 묶이기에는 다소 산만하다. 책 제목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까닭에 결실을 생산할 수 없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핵심 메타포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겠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액체 근대』(강, 2009)를 읽었던 독자라면,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바우만과 담소하며 사색의 길을 함께 산책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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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숲 2012-10-21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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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해지지 않기 위해서 고독해져야만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편지들을 열어보기 위해서 먼저 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라는 것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이 '유동하는(liquid)' 근대 세계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끊임없이 액체가 흐르는 것처럼 유동하면서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매일매일 달라지고 있다. 미디어, 유행, 자본, 사조, 국가, 주권, 관계, 회사, 문화 등등 모든 것은 계속 변화하고, 동시에 그런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세계에 살고 있는 개인도 당연히 역시 같이 유동하게 된다. 즉 개인들은 변화하고, 변화할 수 밖에 없으며, 전혀 원치 않더라도 변화를 강요당한다. 예를 들어 요즘에 가장 각광받고 있는 말 중에 하나가 유연성(flexible)인데, 이는 유동하는 세계에 맞춰 자신을 유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며, 그것이 갖춰지지 않았을 경우 개인은 그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흐름에 떠밀려 가라앉는다(고 위협당한다). 이것은 정신적으로도 그렇고(생각의 유연성), 실제로 물리적으로도 그렇다(자본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키는가). 막연한 얘기 같으니 직관적인 예를 들어보자. 최근 급격히 녹아들어가는 극 지방의 빙하들을 생각해보라. 예전에는 하나의 커다란 대륙이었던 극 지방의 빙하는 이제 여러 떠다니는 얼음 조각들의 집합체로 변모하고 있다. 즉 거대한 바다 위에서 수많은 얼음조각들은 말 그대로 유동한다. 그러므로 그곳에 살고 있던 북극곰들은 그 빙하들을 넘나드는 능력이라는 예전에 그리 필요하지 않았고, 유용하지도 않았던 능력들을 새롭게 갖추어야만 한다.

물론 이는 바우만이 지적하듯이 최근에 새롭게 재편된 세계이다. 예전의 세계에는 개인이 흘러다니지 않도록 하는 몇 가지의 보호막들(동시에 굴레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가부장이 지배하는 가정, 혹은 끈끈한 마을공동체, 혹은 안정적인 고용구조를 갖추는 있는 회사, 거대한 지배력을 갖추고 있는 국가, 신의 가호를 받는 종교공동체 등등. 그러나 최근에는 모든 것이 거의 해체되었고, 모든 권위와 그러므로 동시에 그 권위로 지속되던 모든 보호막은 거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바우만의 표현대로 국가의 지배권력적으로 말하면 공위시대(한 국왕이 사망하고, 다음의 국왕이 즉위하기 전까지의 공백사태)이고, 종교적으로 말하면 '정치를 닮아가는 종교(동시에 종교를 닮아가는 정치)'이다. 즉 최근에는 종교인은 점점 정치적으로 변해가고, 정치인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일단 저를 믿으세요." 그것이 반복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의 불길한 초상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일단 믿으라는 이 시대에,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언술들이 잘 먹혀들어가는 이 시대에는 개인들은 무엇인가 붙잡으려 한다. 그러니까 북극곰이 떠다니는 해빙들에 어떻게든 매달려 있기 위해 꽉 붙들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떠밀려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인가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뭐 트위터일수도 있고, 페이스북일 수도 있고, 쇼핑일 수도 있고, 인스턴트 섹스일 수도 있으며. 유행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고, 물론 알라딘 서재일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것들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그것은 점점 사람들을 각각의 벽 속의 한정된 구획 안으로 몰아넣고, 그 자신이 만든 틀 속에 갇혀있도록 만들며, 동시에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것을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극명한 하나의 예(아마도 바우만이 우리나라에 와서 이 풍경을 본다면 이 책에 하나의 사례로 쓸 것이라 생각하는데)를 들어보자. 어떤 젊은 남녀가 커피숍에 마주보고 있다. 그러나 오랜시간 그들은 그저 서로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그들 사이의 대화는 트위터에 누가 이런 글을 올렸다느니, 카카오톡으로 누가 말을 걸었다느니 이런 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서로 무엇인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이것을 이런 방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다. 하나의 커다란 빙하가 아닌 현재와 같이 나뉘어진 유빙(流氷)들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구획된 질서라는 커다란 빙하 속에 존재하고 있을 때에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존재증명의 한 방식이었지만, 현재 세계에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신의 역할을 아무리 잘 하더라도 그 매달려있는 세계가 떠밀려가버리면 끝이다. 그러므로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존재증명의 가장 유용한 방식은 나를 수없이 다른 나로 쪼개는 것이다. 나를 나뉘어진 모든 유빙들에 최대한 많이 쪼개서 보내는 것. 예를 들어 트위터 속의 나, 페이스북 속의 나, 혹은 파워블로거로서의 나, 쇼핑몰 VIP 고객으로서의 나 같은 것으로 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벤치마킹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동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가장 유명하다는 사실이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서 가장 자신을 많이 쪼갤 수 있는 사람이 그 세계에서는 가장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최근에 가장 잘나가는 연예인을 어떻게 선정하는가. 물론 그것은 TV에, 혹은 다른 어딘가에 가장 많이 얼굴을 비추는 사람이다. 가끔 TV에 틀면 나오는 연예인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이 수없이 갈라진 자신을 어떻게 견뎌내지).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신을 이들처럼 최대한 많이 쪼개고 싶어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디스토피아에 44개의 편지를 띄운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44개의 부표라든가, 구명보트라든가, 구명조끼, 혹은 우리들에게 보내는 동정을 가득담은 연서(戀書)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근대 세계의 근대인, 즉 우리들이 특별히 무엇인가를 엄청나게 잘못하였기 때문에 이 세계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극의 빙하들이 점차 부스러져 떠내려가게 된 것이 북극곰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국가가, 자본이, 종교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아왔으며, 우리는 그저 보통의 인간들로 보통의 삶을 영위해 왔을 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어떤 특정한 특성을 기준으로 분포도를 그려보면 그것은 대체로 가운데가 불룩한 '종'의 형태를 가진 가우스 곡선(정규분포곡선)이 되며, 우리들 대다수는 그 불룩한 가운데에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우만은 묻는다. 어쩌면 그 가운데가 불룩한 정규분포라는 것, 그 정상성의 범주에 우리들 대부분이 들어간다는 것이 혹시 문제는 아닐까. 책에도 나오지만, 이라크 포로수용소나 히틀러의 수용소에서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특별히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가우스 곡선에서 가운데 불룩한 부분의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를만한 아주 '정상'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웃에게 친절하고, 가족을 잘 돌보며, 주어진 일을 성심성의껏 해내는, 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요구하는 최선의 인물(그러므로 아마도 상당히 유연한 그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요구하는 것은 도리어 그 이상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성격을 가다듬는 것(여기서의 성격이란 '성격 좋다'고 할 때의 그 성격이라기 보다는 개성이나 결단성, 저항성 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이며, 또는 반항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유동하는 근대에서 요구하는 것들, 유연해질 것, 자신을 쪼갤 것, 무엇인가를 구매하고 소비할 것, 사이버 세계로 빠져들 것 등등의 수많은 유형의 무형의 규칙들에 대한 반항 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는 그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싫어도 따라야 한다며 몇 가지 규칙을 내밀었고, 그 규칙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둘 빙하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지그문트 바우만은 44개의 부표를 던져주며 말하고 있다. 지금은 새로운 규칙, 새로운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생활방식)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 가능할까.

그것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생각하기'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수많은 역설적인 통찰들이 있다. 몇 개의 편지들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역설적인 것들을 요구하고 있고(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기,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기.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의 사건들을 우리가 바라는 것에 일치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역설적인 통찰들이 이 책에는 가득하다. 역설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는 이곳이 유동하는 근대이기 때문이다. 유동하는 근대에서 지금까지와 같은 모두스 비벤디는 점점 의미가 없어지며, 유동하는 근대에서 만들어지는 메시지들에 그대로 따르는 것은 우리의 유동을 도리어 더 강화시킬 뿐이다. 예를 들어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쇼핑하라!'는 메시지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내부의 신호가 아니라, 새로운 수요를 그 메시지를 내보내는 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그 메시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뒤떨어진 적이 없었고, 그것이 필요한 적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따라잡기 위해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라는 메시지는 어떨까. 이 유동하는 세계에서 그에 따른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새로운 것들을 따라잡는 사이에 그보다 더 훨씬 새로운 것들이 몇 배는 더 만들어진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영원히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외에도 쏟아지는 수많은 메시지들을 뒤집어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뒤집어서 볼 필요가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 책의 제목일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그러므로 단지 '고독을 되찾으라'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을 되찾는 것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필요한 경계를 긋는 것이다(경계는 동시에 접속 지점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의 지적에 따르면 벽은 동시에 이곳이 통행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통행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에 벽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고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를 되살리는 첫 시작이다. 다른 말로 하면 수없이 쪼개진 자신을 다시 조용히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정상이라고 규정되는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며, 이 유동하는 근대는 우리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면, 그러니까 떠다니는 유빙들을 꽉 붙잡지 않으면 우리가 차가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 것이라고 끊임없이 경고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도 있다. 우리가 그 유빙들을 아무리 꽉 붙잡아도 그 유빙들은 언젠가 녹아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이다(그리고 당연하게도 더 꽉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녹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작은 유빙에서 더 큰 유빙으로 옮겨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빙들을 결합시키는 것, 더 이상 각자가 외로운 섬으로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시 역설적으로 사고해야만 한다. 우리가 유빙들을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그것을 어느 정도는 녹여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역설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상이 되기 위해 정상에서 벗어나야만 하며, 삶의 태도를 모방하기 위해서 특정의 양식을 모방하는 것을 거부해야만 하며, 안전해지기 위해서 안전한 울타리를 없애고, 고독해지지 않기 위해서 고독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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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0-26 공감(10) 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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