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4

임천고치의 공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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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고치의 공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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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희 『임천고치(林泉高致)』산수훈(山水訓)에 나타난 공간관에 대하여






사실 이 글에서 참고한 판본은 이게 아니고 더 옛날 거지만 이미지가 없어서-3-;


들어가며


동양 삼국 중 가운데 나라에 태어났으면서도 자기 나라의 전통회화를 가리켜 ‘동양화’라 떼어 부르고, 영어로 쓰인 어려운 책은 술술 읽으면서도 고궁 대문 앞에서는 현판 하나를 제대로 읽지 못해 갸웃거려야 하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현실이다. 나름대로 예술이론을 전공한다는 나 역시 별 나을 게 없었다. 동양미술사 시간에 접한 여러 작품들은 서양 고전 회화에 비해 오히려 이국적으로 보였고, 더 깊은 이해를 위해 뒤적인 책들은 한자에 뒤덮여 접근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펴든, 자기네들 이론의 틀에 맞춰 동양화를 재단하는 서양 학자들의 저술이 심정적으로는 불쾌했지만, 이해하기에는 훨씬 편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 학기에는 동양화론을 들어 보기로 했지만, 쉽게 와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양식 예술론에 익숙한 내게 미술을 인격 도야와 백성 교화의 도구로 보는 유학자들의 태도는 순수예술의 굴욕으로 느껴졌고, 품등을 나누고 종파를 가르는 짓거리는 한갓 세력다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진짜 예술이란 그런 것과 무관하지 않은가? 내가 서양식 사고방식에 완전히 절어 버린 건지, 아니면 동양화론에 정말 그만한 가치가 없는 건지 판단하기 어려웠고, 자신의 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느꼈다.





이런 책을 보고 하는 말임ㅇㅇㅇㅇ


그런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이 곽희(郭熙)의 글이었다.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드러나는 그의 화론은 고식이나 정신적인 요소 못지않게 순수한 관찰을 중요시하고, 방대한 창작 경험을 바탕으로 놀랍도록 세세하고 실전적인 기법을 제안한다. 특히 원근법에 개인적인 관심이 있는 내게 곽희가 제시하는 산수 관찰법과 공간 표현법은 동시대 서양의 논의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면이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임천고치 중 ‘산수훈(山水訓)’ 부분에 초점을 맞춰 곽희가 보여주는 공간 인식의 특성을 밝히고, 이를 서양 근대 회화의 투시원근법과 비교하면서 동양화론이 보여주는 과학적인 면을 부각하려 한다.



산수훈에 드러난 곽희의 사상적 입장



산수훈의 첫머리에서 곽희는 산수화의 목적을 세속에 머물면서 자연을 대신 즐기기 위한 것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은 오래 전 제시된 종병(宗炳)의 와유(臥遊)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지만, 곽희의 글에서는 더 미묘한 사상적 갈등이 드러나 있다. 초야에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면서도 언젠가는 현세에 출사하며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하려는 뜻을 품는, 즉 자연을 일종의 도피처로 삼는 유가(儒家)적 자연관과, 현실을 아예 초월하여 자연에 머물며 유유자적하는 도가(道家)적인 자연관 사이의 갈등이 그것인데, 두 태도는 자연을 즐긴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궁극적인 이상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 도가에 심취했던 곽희는 자연을 즐기는 삶을 이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도교적이지만, 스스로 고관의 자리에 오르고 아들의 과거 합격을 기뻐하는 등 속세의 입신양명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다분히 유교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이러한 자기모순을 “어진 사람으로서 자기 한 몸을 깨끗이 하려고 속세를 벗어나는 짓은 사람 된 도리로서 진퇴와 절의에 벗어난다.”고 함으로써 정당화하고, 산수화를 속세에 머물면서도 자연을 접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곽희의 이러한 사상적 입장을 유교의 도덕주의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도교의 해의반박(解衣盤儁)식 무규범에 빠지지도 않고 자신만의 자연주의를 추구할 수 있었던 기반으로 본다. 이어지는 글에서 그는 당대 회화의 천편일률적인 전통 모방 일색을 비판하며 다양한 화가(畵家)를 모두 취하여 일가(一家)에 얽매이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태도 역시 고식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신즉산천이취지(身卽山川而取之)’, 곧 직접적인 체험 속에서 순수한 눈과 감각에 의존하여 자연을 관찰하게 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화론은 객관적인 재현을 추구한 근대 서양 회화론과 비교해 고찰할 여지를 남긴다.



곽희의 산수 관찰법 - 서양 투시원근법과의 비교



곽희는 산수훈에서 계절과 시간, 날씨, 그리고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산수의 양상이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하나의 산이지만 수십 수백 산의 형상을 겸하고 있”으니 화가의 관찰점과 관찰 각도가 다르면 산수가 나타내는 심미 형상도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진지한 관찰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서양 근대 회화에서 시점(視點, vantage point) 개념과 통한다고 할 수 있으나, 서양 회화가 같은 개념을 바탕으로 광학의 도움을 받아 시점에 들어오는 빛의 상을 기계적으로 정확히 포착하는 투시원근법에 집중한 데 비해 곽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곽희가 산수훈에서 산천 관찰을 설명하기에 앞서 언급하는 정물 관찰법은, 다양한 각도에서의 관조를 제안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여기서 그림자를 관찰하라고 설명하는 대나무의 경우는 빛의 직진성을 활용해 실루엣을 얻는 방법으로 서양식 투시법과 일치하지만, 꽃은 구덩이에 넣고 위에서 내려다봐야 꽃의 사면을 볼 수 있다고 함으로써 다양한 시점에서의 파악을 강조하고 있다. 즉 곽희는 시점의 제한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점에서 관조하여 대상의 본질을 파악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고정된 한 시점에서 포착 가능한 풍경을 객관적으로 완벽하게 모사하는 서양의 투시원근법과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이러한 곽희의 산수화론은 정답이 명확한 투시원근법에 비해 화가에게 많은 선택의 여지를 남긴다. 다양한 시점과 환경에서 관조한 상을 모아 한 장의 그림 속에 구성해내는 것은 전적으로 화가의 주관과 역량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포유어간(飽遊飫看)’, 곧 여러 산을 많이 보고 산천의 여러 가지 자태를 익숙히 알며 여러 가지 산수 임천을 느끼는 것을 강조하며 다양한 예를 통해 산수의 바람직한 형태를 제시한다. 특히 화결(畵訣) 부분에서는 집의 입지를 정할 때 수해(水害)의 위험성을 따지고 나무의 크기를 정할 때 흙의 깊이를 따지는 등 단순히 시각적인 상에만 머무르지 않고 풍경의 현실적인 타당성까지 고려하는데, 이는 결국 산수훈에 제시된 ‘경치의 경지를 벗어난 뜻(景外意)’을 포착해 감상자가 그러한 산수 속에 자신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나아가 ‘뜻의 경지를 벗어난 묘(意外妙)’를 통해 실제로 바로 그곳으로 나아가는 듯한 기분을 주게 하기 위함이다.

즉 곽희의 화론은 화가가 체험한 자연을 그림을 통해 감상자에게 다시 체험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 체험에는 시각적인 것뿐 아니라 다양한 인간 활동이 포함된다. 반면 서양의 투시원근법은 마찬가지로 자연을 직접 관찰하여 화면을 구성하지만 이때의 관찰은 순수하게 한 순간에 포착된 빛의 형태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범관 <계산행려도> 축. 11세기 초.



삼원법(三遠法)에 드러난 곽희의 공간관


다양한 환경과 시점에서의 체험을 화폭에 옮겨놓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곽희가 제시하는 것이 유명한 삼원법이다. 서양식 투시원근법의 기준으로 곽희의 삼원법을 분석해 보면, 고원(高遠)은 올려다보는 시점(仰視)이고, 심원(深遠)은 내려다보는 시점(俯瞰視), 평원은 지면에 평행하게 바라보는 시점(平視)이 된다. 투시원근법에서는 오직 한 가지 시점과 각도만을 취할 수 있으며, 특히 올려다보는 시점과 내려다보는 시점을 동시에 한 화면에 그리는 것은 서양 근대 회화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다양한 렌즈 기법이 도입된 현대 회화에서는 넓은 시야를 묘사하는 것도 가능해졌지만, 전통적인 서양 회화에서는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는 시점을 포함하는 삼점투시법도 찾아보기 힘들다. 삼원법으로 치면 평원법만이 쓰이는 셈인데, 서양회화의 시점이 이렇듯 제한되는 이유는 다양한 시점을 평면에 옮겨놓게 되면 반드시 수학적인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엄밀한 수학을 전제하지 않고 체험의 전달을 목적으로 한 곽희의 삼원법은 화가의 단련된 경험과 감각을 바탕으로 다시점 구도의 구현에 성공할 수 있었다.

현대의 감상자가 화북산수(華北山水)를 볼 때 느끼는 사실감, 분명 실제 같기는 하나 사진의 기계적인 재현과는 다른 묘한 사실감은 이런 차이에서 기원한다. 곽희가 산수훈 첫 부분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산수는 큰 물체이다. 이미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눈을 굴리며 한참 돌아다니지 않고는 산의 전체 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 서양식 풍경화는 고정된 위치와 각도로 단 한번 찍은 사진과 같아서, 한 시점에서 제한된 화각에 들어온 상만을 그대로 전달할 뿐이나, 삼원법을 사용한 곽희의 <조춘도(早春圖)>는 웅장하게 곧추선 주봉우리의 당당함이나 오른쪽 아래로 내려다본 폭포의 아찔함, 왼쪽으로 멀어지는 모래언덕들의 유연한 굴곡을 모두 한 화면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시점이 한 평면에 병렬되는 데서 오는 모순은 화가의 오랜 경험과 탁월한 기량에 의해 자연스럽게 사라져 하나로 연결된다. 이러한 화면구성은 서양에서는 팔백 년 이상이 흘러 입체주의가 등장한 후에야 가능했다.







나오며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곽희의 『임천고치』중 산수훈 부분에서 드러난 공간관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자연 관찰 태도에 근거하였고, 이는 다시 현세에 머무르는 속인에게 자연의 극치를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얼핏 탁상공론에 불과해 보였던 동양화론도 실제 작품 창작에 절실히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에는 명확한 근거와 합목적성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작품을 통해 자신의 감흥을 전달하려는 예술가의 노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언제나 치열한 것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특히 삼원법을 통해 구현된 다시점 공간은 풍경의 전달이라는 실용적인 목적에 있어 서양의 투시원근법보다 우수한 점이 있음을 알았고, 동양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곽희와 영향을 주고받은 화론을 중심으로 더 공부해 나간다면 처음 접했을 때 납득하기 어려웠던 다른 화론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얻은 귀중한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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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학기 동양화론 시간에 서평 쓰래서 썼던 건데… 저저 이거저거 많이 찾아봤어여 점수 좀 주세여 하는 느낌이 좔좔 흘러나는 레포트 말투라 좀 오글거리긴 합니다만-3-; 나중에 써먹을 일이 있을 것 같아 그림 몇 개 추가해 올려봅니다. 각주 몇 개 있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아 생략-3-; 주로 참고한 책은

곽희, 곽사, 허영환 편역, 『林泉高致: 郭熙, 郭思의 山水畵論』, 서울: 열화당, 1989.
黃琪源, 「『林泉高致』에 나타난 郭熙의 自然觀」, 『環境論叢』, 30 (1992).
양창석, 『동양 회화의 意境에 관한 연구: 산수화를 중심으로』, 박사학위논문,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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