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5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에서 살아가기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에서 살아가기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에서 살아가기
기자명 유기쁨 서울대학교 농림생물자원학부 강사
입력 2022.04.01



공공학 공공철학


인류세, 인간에 의한 대멸종 이야기
요즘 TV를 켜면 두 갈래의 상반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편에서는 예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부의 과시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극적으로 이뤄진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도 두드러지는데, 가령 맛있는 음식에 대한 탐닉이 전례 없을 정도로 공중파를 통해 전파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주로 조금 늦은 시간대의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는 세계 각지의 환경악화 현상 및 그로 인한 비참함이 두려울 정도로 생생하게 전달된다. 기후변화로 인한 홍수나 가뭄, 죽어가는 생명, 산불 등 빠르게 악화되는 오늘의 상황에 대한 뉴스는 두려움과 절망감을 불러일으킨다.

서로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현상은 인류세 시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징후들로서, 서로 상반돼 보이지만 실은 서로 연결돼 있고 서로를 부추기고 있다.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용어는 오존층 연구로 노벨화학상 수상한 파울 크뤼천 교수가 2000년도에 처음 제안한 개념이다. 인류의 생태학적 과대 성장이 지구의 전체 시스템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지금 우리는 인간에 의한 지구상 6번째 ‘대멸종 시대’에 접어들게 됐다는 것이다.

인간이 야기한 생태 위기의 심각성을 절감하는 사람들은 너무 늦기 전에 변화를 위한 행동을 촉구하려 한다. 그래서 환경 악화로 인한 세계의 비참을 고발하고, 이대로 계속될 경우 닥치게 될 암울한 종말론적인 미래상을 비관적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대로 살면) 망할 것이고 이미 망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변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전 인류가 끔찍한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등.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너무 끔찍하고 두려운 현실에서는 눈을 돌리고 싶어 한다. 어떻게 해도 인간이 악화시킨 지구환경은 다시 좋아질 것 같지 않다는 무력감과 불안감 속에서, 오히려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단기적인 감각적 쾌락에 몰입하는 현상이 반작용으로 일종의 트렌드처럼 나타나는 듯하다. 어차피 인류는 충분히 변하지 않고 있고, 어차피 너무 늦었고 망할 것이니 잊어버리자, 뭐 그런 것. 역설적이게도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생태 위기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그러한 이야기가 실제로는 오히려 사람들의 단기적인 쾌락 추구를 이기적인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되곤 하는 것이다.

절망이나 외면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행동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암울한 잿빛 전망뿐 아니라 다채로운 생명 세계의 신비에 대해, 녹색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중요한 것 같다. 그러면 어디에서부터 그 희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현재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의 시야는 종종 너무나 인간 중심적이라는 데 착안해서, 우리의 시야를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상’으로 넓히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인간 중심적 시각에서 시작된 인류세(Anthropocene)는 인간 중심적 시각을 넘어서야만 극복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 가운데 여기서 소개하고 싶은 것은, 인류학, 철학, 종교학 등 학계의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이다.

낡은 애니미즘
‘애니미즘(animism)’이란 용어는 종종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일찍이 1871년에 출간된 E. B. 타일러의 『원시문화』에서 사용된 이래 널리 알려지게 된 용어이다. 1, 2권으로 이뤄진 그 책은 방대한 양의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동서고금의 인간 문화에서 나타나는 유사성과 차이점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야심찬 저술이었고, 타일러의 생전에 이미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폴란드어로 번역됐을 뿐 아니라 10판이 인쇄되는 등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책의 인기와 함께 ‘애니미즘’이란 개념도 널리 퍼지게 됐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그 책의 어떤 부분이 그토록 당대인들의 관심을 사로잡았을까? 풍부한 사례를 제시하면서 인류 문화의 보편적 법칙을 찾아내려고 시도했을 뿐 아니라 ‘애니미즘’이라는 종교 이론을 수립한 것도 『원시문화』의 인기에 한몫했을 것이다. 동서고금의 종교 현상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일별한 그는 인류의 ‘하등종족’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종교현상에 주목했다. 곧 인간이 아닌 것에게 일종의 영혼이 있다고 여기면서, 곰, 사슴 같은 동물이나 삼나무 같은 식물, 나아가 무생물까지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여기는 등의 현상 말이다. 타일러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포함해서 세계 각지의 원주민 문화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애니미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애니미즘은 “생명, 숨, 영혼”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까지, 나아가 돌 같은 사물이나 바람 같은 자연 현상까지 살아있는 것으로 여기고 영혼이 있다고 여겼다니,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났다니. 하이테크놀로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일 것 같다.

타일러에 따르면, 우리의 고대 조상은 나름대로 합리적이었다. 타일러는 ‘원시인’ 또는 ‘하등종족’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설명이 요구되는 두 가지 사실을 마주하고서 합리적인 답을 찾다가 모든 존재에 존재하는 영, 영혼을 상상하게 됐으리라고 보았다. 타일러가 볼 때, 원시인들이 직면한 설명이 요구되는 첫 번째 사실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몸과 죽은 사람의 몸이 현격히 다르다는 점이다. 잠자는 사람이 누워있는 것과 죽은 사람이 누워있는 것이 외형적으로는 같아도 실은 전혀 다르다. 그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두 번째 사실은 바로 꿈이었다. 꿈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돌아다니며 말하는 형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타일러는 ‘원시인들’이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혼’의 존재를 상상함으로써 죽음과 꿈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찾았으리라고 여겼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영혼이고, 꿈속에서 나타나는 형상 역시 영혼으로 인한 것이다. 그리고 원시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 식물, 심지어 물체의 영혼을 일반화하게 됐으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아닌 존재, 곧 영혼이 없는 존재에게 영혼이 있다고 상상하고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람처럼 여기는 어린애 같은 믿음에 붙은 꼬리표가 애니미즘이었다. 근래까지 그 용어는 어리석은 자들의 유치하고 미개한 믿음을 가리키기 위해 주로 사용됐다.

새로운 애니미즘
그런데 최근에는 근대적 시각에서 이뤄진 그러한 방식의 논의를 ‘낡은 애니미즘(old animism)’으로 규정하고, 특히 북미 원주민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애니미즘 문화를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하기보다 오히려 거기서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인 존재론, 생활방식을 적극적으로 발견하는 ‘새로운 애니미즘(New Animism)’ 논의가 인류학, 철학, 종교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들은 지금껏 원시인의 어리석은 믿음으로 평가절하됐던 세계 각지 원주민의 존재론과 생활방식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타일러의 시대부터 비교적 근래에 이르기까지, 우월한 과학적 지식을 가진 우월한 ‘우리’가 어리석은 믿음을 가진 ‘너희’를 내려다보면서, 언젠가는 극복돼야 할 과거의 잔재로서 애니미즘을 다룬 것이 ‘낡은 애니미즘’ 논의였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우월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행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파괴해왔고, 어리석다고 여겨져 온 ‘너희’가 오히려 생태계에 적절히 깃들어 사는 방식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에서는 ‘아니마’에서 ‘영혼’보다 ‘생명’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리고 북미 원주민들을 비롯한 세계 각지 원주민 사회에서 발견되는 애니미즘을 ‘살아 있는 존재들이 서로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공존의 생활방식’이라고 적극적으로 재조명한다.

이 세계가 인간들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 그리고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생명이 밀접하게 관계를 주고받으며 공생해왔다는 점, 인간은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일원이기에 무수한 생명이 살아가는 세계에 적절히 깃들어 관계를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 이것은 오늘날 생태위기에 직면한 우리가 고통스럽게 깨우치고 있는 사실이다.

독일의 동물학자이자 철학자, 의사, 화가이기도 했던 그야말로 만능 지식인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은 『생물체의 일반 형태론(Generelle Morphologie der Organismen)』(1866)에서 ‘유기체와 무기적 환경, 그리고 함께 생활하는 다른 유기체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oecologie’라는 신조어를 제안했다(그 용어는 널리 받아들여졌고, 1893년 국제식물학회의부터 오늘날과 같이 ‘ecology’로 표기).

헤켈이 제안한 생태학의 정의에서 핵심적인 것은 ‘관계’이다. 헤켈의 생태학 정의를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해보면, 오늘날 일어나는 각종 생태 문제들은 인간이 지구상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가 뒤틀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태위기의 근원에서 우리는 관계의 위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 각지 원주민의 애니미즘적 존재론과 생활방식이 오늘날 재조명되는 이유는, 인간이 지구상 다른 존재들과 적절하게 관계 맺으며 공생하는 지혜를 거기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각계의 여러 학자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그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뭇 생명과 적절한 방식으로 공생해온, 오늘날의 우리가 참고할 만한 대안이자 모델로서 세계 각지의 원주민 사회, 소규모 공동체들의 애니미즘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를 본격적으로 촉발한 것이 북미 원주민인 오지브와족의 애니미즘을 재발견한 할로웰의 글이다.

인간이 아닌 사람들
인류학자인 할로웰(Irving A. Hallowell)은 1960년에 <오지브와족의 존재론, 행동, 그리고 세계관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오지브와족은 북미에 거주하는 원주민 부족이다. 할로웰은 특히 캐나다의 오지브와족을 찾아가서 연구를 진행하다가, 그들의 ‘사람(person)’ 범주가 인간이 아닌 존재들까지 포함한다는 점을 발견하고서, 그 의미를 여러 각도에서 살피게 됐다. 할로웰은 오지브와족의 관념을 영어로 기록하면서 “인간 이외의 사람들(other-than-human persons)”이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곰을 비롯한 동물, 나무를 비롯한 식물뿐 아니라 바위, 벼락 등을 포함한 여러 경험적 존재들 혹은 실재들이 포함됐다. 그의 글은 새로운 방향에서 애니미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됐다.

가령 인류학자인 누리트 버드 데이비드(Nurit Bird-David)는 어떤 존재를 지역의 언어를 통해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이 갖는 인식론적 기능에 주목한다. 그가 볼 때,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람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인간인 자기와 인간이 아닌 그가 이 세계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세계 안에 존재하는 그러한 다원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탐구적인 관심이 생겨나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류학자 비베이루스 지 까스뚜르 (Eduardo Viveiros de Castro)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람으로 여기는 관습에 주목하면서, 타자를 알기 위해서 타자를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편,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이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사람으로 칭하고 그렇게 여길 때, 그들의 예민한 생태적 감수성을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이러한 접근법에서는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초점이 맞춰진다. 가령 인류학자 팀 잉골드(Tim Ingold)는 애니미즘을 매 순간 달라지는 환경 속에서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을 민감하게 지각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생활방식으로 조명한다.

이들을 비롯한 여러 학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역 생태계에서 생계에 필요한 것들을 직접적으로 얻는 이들이 특히 이러한 생활방식을 몸에 익히고 사회적으로 전수해온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인간 사회에 대해서 뿐 아니라 지역 생태계 내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도 관계적 태도로 임하며, 환경 속의 다른 존재들을 소통 가능한 주체들로 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계는 눈(eye)으로 가득 차 있다
근대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우리는 종종 ‘보는 자’, ‘관찰하는 자’의 자리에 인간을 둔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심지어 맨눈으로 볼 수 없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도 인간의 관찰 ‘대상’의 자리에 놓인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람이라고 부를 때 흥미로운 부분은, 그들을 사람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의 시선을 인정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도 시점을 차지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는 이를 관점성으로 지칭한다. 고양이도, 퓨마도, 악어도 저마다 하나의 시점을 차지할 수 있다. 나도 고양이를, 퓨마를, 악어를 바라보지만, 고양이도, 퓨마도, 악어도 자신의 시점에서 나를 바라본다. 이렇게 보면 애니미즘은, 달리 말하면, ‘나는 보는 동시에 보이는 존재’라는 사실에 좀 더 민감한 존재론으로도 재조명될 수 있을 것 같다.


호주의 생태철학자 발 플럼우드(Val Plumwood)의 경험을 살펴보자. 1985년 2월의 어느 날, 카카두 국립공원에서 홀로 카누를 타던 발 플럼우드는 상류의 폭우로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면서 예상치 못하게 커다란 악어를 만나게 됐다. 악어는 카누 곁으로 돌진해왔고, 플럼우드의 카누를 되풀이해서 들이받았다. 악어는 플럼우드의 다리를 꽉 물고 몇 차례나 물속으로 처박았다. 그는 온몸으로 저항하다가 겨우겨우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플럼우드가 나중에 회상하기를,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 아름다운, 얼룩이 있는 황금색 눈”을 마주 보게 된 순간이 있었는데, 서로의 눈이 마주친 그 순간이야말로 인간인 자신이 다른 존재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고 한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기에, 내가 이 세계를 관찰하지만 이 세계(의 존재들)도 나를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가령, 우리는 보통 동물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의 시선에만 주의를 기울이느라 인간을 바라보는 동물의 시선, 그 의미는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대자연에 깃들어 살아온 많은 원주민 종족들의 경우, 동물이라는 인간과 다른 부류 존재의 시선을 인식하는 일은 종종 생사를 좌우하는 일이었다.
덴마크의 인류학자인 빌레르슬레우(Eske Willerslev)가 연구한 시베리아 유카기르족의 사례도 우리를 응시하는 비인간 존재의 시선에 대해 주목할 만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유카기르족은 “세계가 눈(eyes)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동물은 물론이고 강이나 호수, 나무로부터 심지어 그림자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존재는 우리의 시선을 되받는 자신의 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카기르족의 세계는 인간만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만을 위한 곳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들의 세계는 수많은 존재가 거주하면서 서로에게 감각되고 또 서로를 감각하는, 매우 감응적인 세계이다.
플럼우드는 악어의 먹이가 될 뻔한 경험 이후에 수많은 존재가 거주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적 생태학적 맥락 안에서 죽음에 대한, 그리고 먹는다는 행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펼치게 됐다. 애버리지니로 일컬어지는 호주 원주민의 애니미즘에 대한 그의 연구가 심화됐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낡은 애니미즘’과 대비되는 자신의 철학적 애니미즘 논의를 전개했는데, 그 궁극적 목적은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를 향한 종간(inter-species) 윤리를 정립하는 것이다. 플럼우드는 인간이 이 세계와 평화롭게 공존, 공생하기 위해서는 지구상의 비인간 타자를 동료인 행위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여겼던 것이다.
함께 살기
인간은 생태계의 일부이고 이 세계에는 인간 이외에도 수많은 부류의 존재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학교에서 배워서 또 책을 읽어서 알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인, 특히 인공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도시 거주 현대인이 그러한 사실을 체감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시야는 이 세계를 향해 온전히 열려 있지 않으며 오로지 인간을 중심으로 좁아져 있다.
최근 들어 생태적 위기 상황에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이 일어나면서, 일군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현대적 통념에서는 인간이 아닌, 심지어 생명이 없는 대상에게서 또 다른 의미의 ‘사람다움’을 발견하는 토착문화를 적극적으로 재조명하고 이를 예술 작품으로 재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자연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사람’이라는 용어를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까지 적극적으로 전유하는 사례도 발견된다.
근대 서구 문명이 생태위기를 초래했다는 데 대한 반성과 대안에 대한 관심 속에 점점 더 많은 인류학자, 철학자, 종교학자들, 나아가 생태운동 활동가, 예술가, 작가들 사이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람’의 의미 확장이 시도되고 있다. ‘사람’을 인간이 아닌 존재에 적용하는 흐름에는 뚜렷한 의도와 지향점이 있다. 곧, 인간이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의 일원이며, 생태계 내 다른 존재들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 그러한 인간의 기본 조건을 다양한 방식으로 상기시키는 것이다.

6번째 대멸종을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우리 인간이 다른 부류의 존재들과 공존, 공생하기 위해서는, 에두아르도 콘이 말하듯이 “우리가 열린 전체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감각”을 되찾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영역이 급속도로 비대해지면서 우리는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 이른바 열린 전체로 존재하는 방식을 잊었고,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이 세계와 다시 연결되고 평화롭게 공존, 공생하기 위해서,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발견하고 그들 입장에서 우리를, 그리고 우리가 만든 세계를 바라보려는 노력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가령 우리는 도시의 길고양이, 새, 나아가 가로수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려고 시도해볼 수 있다. 거기서부터 조금씩 시야를 확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니미즘은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에서의 생명성, 공동체성을 다시 사유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유기쁨 서울대학교 농림생물자원학부 강사



유기쁨 서울대학교 농림생물자원학부 강사 webmaster@thepublicnews.co.kr